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2015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는 앨런 튜링의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계와 인간이 채팅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그러니까 사실 튜링 테스트와 모방 게임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과 5분간 채팅을 하여 그 대상이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체 영화의 구조를 이 튜링 테스트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동성애 혐의로 경찰서에 소환되었으며, 형사에게 일종의 튜링 게임을 제안하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을 것, 그리고 다 들을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형사에게 묻는다. 내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혹은, 내가 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

 

이렇게 앨런 튜링의 삶(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과 그의 이론(기계인가, 인간인가)을 등치시키는 것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앨런 튜링과 그의 이론을 교묘하게 등치시킨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앨런 튜링(물론 그가 농담에 가장 취약한 것은 농담에서는 표면적인 발화 내용보다 그 안에 담겨진 숨은 뜻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튜링이 군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이와 묘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군에서의 대화란 그 반대로 대부분 표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처럼, 독일의 암호해독기 이니그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튜링의 크리스토퍼(영화 속에서는 튜링이 그가 사랑했던 친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처럼 나오지만,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는 이니그마가 암호를 생성해내는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튜링이 그 돌파구를 친구 크리스토퍼에 대한 사랑에서 찾는 것처럼, 이 이니그마의 해독에 대한 실마리가 열리는 것은 한 독일군의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영화 속 설정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다시 비슷한 등치의 형태로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진화 양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독일 이니그마의 암호를 깬 영국 측에서 그 암호를 깼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튜링은 위험에서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튜링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진화이다. 튜링은 예전에도 친구 크리스토퍼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 거짓말은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의 거짓말에서는 조안의 스매싱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다시 말해서 이 등치는 튜링의 진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튜링이라는 유사기계의 진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는 기계, 그럼으로써 마치 인간인 것처럼 믿게하는 기계. 그것이 튜링 테스트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 즉 기계의 사고는 거의 인간과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는가의 문제. 실제로 작년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라는 인공지능이 최초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떠들썩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통과한 것인지, 더 나아가 튜링 테스트를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시험하는 리트머스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튜링 테스트의 대안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영화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말미에서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다루는 것을 통해 어떤 짐작을 할 수는 있다. 영화의 말미는 쓸쓸하다. 그것은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그렇고, 영화 마지막에 붙은 에필로그로도 그렇다(그들이 남은 모든 자료를 불태우는 것). 아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앨런 튜링은 형사와의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는가? 그것은 결국 실패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형사가 그것을 자신이 판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왜냐하면 튜링은 그 앞에서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의 튜링은 삶에서도 결국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 시절의 튜링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니 괴롭힘을 넘어서서 일종의 혐오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튜링은 그것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그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즉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을 혐오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 말을 더듬는 것,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것, 뛰어나게 똑똑하거나, 눈에 띄게 어리석은 것, 키가 너무 큰 것, 키가 너무 작은 것, 너무 뚱뚱한 것, 너무 마른 것 등등...셀 수도 없는 수많은 '정상분포에서 벗어난 것'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돼지'에게 너무 뚱뚱하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역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을까. 즉 '기계'라는 다른 종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흥미롭게도 반대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로봇이 사람과 비슷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혐오감이 증가하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변곡점을 넘으면 다시 급격하게 그 혐오감이 줄어든다는 이론)와 같은 이론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간 수많은 영화에서 이 언캐니 밸리의 골짜기에 빠져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봐왔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다만 이것이 '골짜기'의 형태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렇게 인간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까지 로봇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다시 적어도 다른 두 가지를 나에게 생각하게 만드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작용하는 언캐니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이미테이션 게임, 혹은 튜링 테스트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여 모든 환영을 작동시킨다. 환영은 그들이 실재한다고 계속 거짓말을 하며, 관객은 그 거짓말에 속아넘어간다. 아니 기꺼이 속아넘어감으로써 그 거짓말을 즐긴다. 즉 이 때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이 거짓말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로 비유하자면 네가 기계인 것은 알지만, 그 채팅이 즐겁기 때문에 네가 인간이라고 믿어준다랄까. 그런데 지금까지 영화는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무성에서 유성에서, 흑백에서 칼라로, 2D에서 3D로 혹은 더 나아가 4D로. 영화는 어떻게 든 현실이 되려고, 아니 기계는 어떻게든 인간이 되려고 애써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꾸 현실이 되려고 발버둥칠 때 그 혐오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 혹은 기술적인 발전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그 해답이 될까.

 

다른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혐오와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는 튜링에게 묻는다. 기계도 생각을 합니까? 여기에 튜링의 대답이 흥미로운데,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형사에게 답한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되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요? 그것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기계와 인간의 경우지만, 그것은 영화에서 암시하듯이 인간들 사이의 혐오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같은 것들. 어쩌면 우리의 만연한 혐오는 쉽고 달콤한 유혹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코패스, 일베, 혹은 종북과 같은 것으로 낙인찍고 싶은 유혹들, 그것이 달콤한 이유는 그것은 너무나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라는 낙인은 너무나도 간편하며 동시에 우리의 혐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동일하게 여기에 튜링처럼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그들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시급한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나 빠른 격리보다도, 그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왜냐하면 혐오와 격리는 번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으며,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혐오하거나 다른 모든 사람을 격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만연한 수많은 혐오스러운 말들을 보며, 그 속에 존재하는 나의 혐오와 당신의 혐오, 이중의 장벽을 뚫고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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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4-1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르다고 낙인 찍는 것은 정말 간편하지요, 이해하거나 자기 주장을 굽히고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위에 있다고 고집하면 되니까요..

저도 곧 이 영화 보려구여
vod 가격이 아직 마넌인지라 ^^

맥거핀 2015-04-17 14:48   좋아요 0 | URL
네..정말 그렇죠. 근데 요즘에는 심해도 너무 심해요. 그저 당신은 종북, 당신은 일베, 그걸로 끝이죠. 최소한도의 토론도 점점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두들 각자의 프레임 안에 갇혀살죠. 물론 저라고 그렇게 다르지 않구요.

좋은 영화고, 뭐 다 떠나서 일단 재미있습니다.^^ 아직 극장 개봉중이라서 그럴거예요. 곧 내려갈 것 같기는 합니다.

2015-04-16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17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4-1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이야기를 거의 라디오 방송에서 듣기도 합니다 지금 나오는 영화를 말할 때가 많고 가끔 예전 영화를 말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이 영화 이야기를 들어서죠 제가 듣는 건 두곳인데 하나는 영화음악이고 하나는 책과 영화군요 영화음악인데 음악보다 영화 이야기를 더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 많이 해주는 것도 아닌데...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방송을 잘 들을 때도 있고 그냥 흘려들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르게 보이는데 거기에 보통이라는 게 있다니, 비슷비슷한 사람이 더 많기에 거기에서 아주 다르게 보이면 따돌리기도 할지도... 그런데 자신이 정말 보통이라고 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지금 듭니다 두드러져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지만,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다른 걸 틀리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텐데... 저도 그럴 때가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라도 서로 알려고 하면 조금은 알 수도 있겠죠 좀 어려운 일이지만... 알 수 없다 해도 그렇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죠

시대를 잘 타고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나는 사람도 있죠 튜링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났죠 하지만 지금은 다시 보게 돼서 다행이네요 생각하는 것도 남들보다 많이 앞섰더군요

한주가 가고 있습니다 또 주말이라니... 주말 잘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5-04-20 16:2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튜링이 시대를 잘못 태어난 덕분에 후대의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튜링의 생각은 당시에 획기적이었죠. 영화에서는 튜링의 개인적인 특성이 그의 연구와 관련이 깊은 것처럼 나오는데, 실제로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영화음악 방송은 종종 들어요. 최근에는 팟캐스트로 이주연의 영화음악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팟캐스트로 방송을 들으면 음악이 다 제대로 나오지를 않아서 그게 조금 단점이기는 합니다만, 영화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있어서 가끔 듣습니다. 예전에 김혜리 기자가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할 때도 가끔 들었구요. 그런데 이야기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를때가 많죠. 아무래도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니까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 추천 글을 써야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벌써 한달이 지나갔단 말인가. 다들 한달을 나름의 방식으로 카운트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신간평가단을 할 때는 이것으로 카운트를 한다. 그러니까 추천글을 쓰는 것이 한달의 시작이며, 책을 받을 때에는 중순이고, 리뷰를 써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때는 월말이 가까워온다는 얘기다. 아무튼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은 이제 더 안 오겠지 싶으면, 눈치 없이 계속 말을 거는 끌리지 않는 소개팅 상대의 메시지같고, 봄이라는 것은 앞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보기위해 고개를 들라치면, 어느덧 곁을 휙 스치고 지나가 뒷모습 밖에 보여주지 않는 길거리미녀 같기만 하다. 집 앞에 나갈 때마다 가끔 만나는 얼룩고양이 은주씨(앙칼진 눈빛이 첫사랑 은주씨를 닮았기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농담이고, 처음 만났을 때 전신주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기에 숨을 은(隱)자에 기둥 주(柱)자를 붙였다)가 이제 좀 따듯한지 햇볕을 받으며 뒹굴거리는 희귀한 광경도 어제 보았으니 시간이 가고 그래도 조금씩 날이 따듯해져 가고 있기는 하나 보다.

 

지난 달에는 사실 마땅히 추천할만한 책이 별로 없어 난감했다면, 이번달에는 괜찮아보이는 책이 너무 많아서 난감하다(물론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지, 실제로 책을 읽고나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아무튼 어떻게 난감하든지 간에 5권의 책을 골라내야 하는 것은 사실이고, 어쩔 수 없이 이럴 때에는 평소에 사용하던 것보다 조금 더 세심한 취향의 잣대를 들이대야만 한다. 그런데 골라놓고 보니 왠지 다 어두운 이야기 같은 것이, 어두운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할 수 없이 그런건지, 아니면 나의 일반적인 취향에 가려져 있던 취향의 밑바닥에는 어두운 요소가 더 많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하기는 어떨 때는 한없이 밝고 평화로운 이야기에 끌리고, 또 어떨 때에는 야하고 변태적인 이야기에 끌리며, 또 다른 때에는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에 끌리니 그저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이다. 리모노프의 말을 빌리자면 "개떡같은 취향이지, 한마디로.")

 

개떡같은 취향이 개떡같이 골라낸 이번 달의 다섯 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구병모, 문학과지성사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뉴스를 보며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수없이 속으로 이말을 되뇌이는가. 예고없이 찾아오는 만연한 재앙을 피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가난한 시대. 구병모가 날카롭게 잘라낸 현실의 조각들은 이 가난한 시대에서, 이 말들을 부적삼아 되뇌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음들을 한걸음 물러서서 들여다보게 해줄까. 

 

 

고통의 해석, 이창복, 김영사

 

물론 재앙과 고통이 예고없이 찾아왔던 것은 오늘날의 시대만은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작가들은 삶 속에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양상을 세밀하게 추적해 그의 근원을 늘 밝히고자 하였다. 괴테, 카프카, 브레히트, 하이너 뮐러 등 독일문학의 중추를 이루는 작가들의 작품을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그 근원에 있는 것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익사, 오에 겐자부로, 문학동네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들어간 소설에는 아무래도 더 관심이 간다. 그의 문학에 담겨져 있는 창작의 원천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을까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아버지의 이야기. 읽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는 책이다.  

 

 

방랑기, 하야시 후미꼬, 창비

 

위의 책과 같이 자전적 내용의 소설이다. 가난한 여자 혼자 세상을 사는 것이 녹록한 일이 아닌 것은 요즘에도 그러한데, 1920년대 일본 사회에서는 어땠을까('방랑기'라는 제목만 보아도 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동명의 영화(특히 주인공 역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는 명연이다)를 아주 좋게 보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게 되는 책이다.

 

 

별을 먹는 사람들, 로맹 가리, 마음산책

 

여러 복잡다단한 이유 속에서 선택된 마지막 책. 로맹 가리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그보다는 내용이 더 흥미로워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별’은 마스탈라라는 가상의 지역 특산물인데, 코카열매보다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마약의 한 종류이다. 그러니까 별을 먹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비참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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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글을 써야하는 심정, 이해합니다. 그 덕분에 저는 따로 신간평가단 공식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아도 이웃님이 추천하는 다양한 분야의 신간 도서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

맥거핀 2015-04-03 23:40   좋아요 0 | URL
cyrus님이야 워낙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분이시니..cyrus님도 해보신 경험이 많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신간추천이라는 게 즐거우면서도 참 여러가지로 고민되는 일이기는 하죠.

아이리시스 2015-04-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구병모,로맹가리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진짜 재밌는 책 읽으며 밤새고싶은 밤이네요. 비가..바람이..ㅎㄷㄷ

맥거핀 2015-04-03 23:42   좋아요 0 | URL
<익사>가 꽤 추천이 많아서 될 것 같기도 하네요. 이번에는 2권 모두 제가 추천한 책 중에서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아이리시스아님 2015-04-05 02: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거 완전 대다난 바람인 것 같아요. 잉여놀이를 꽤 했는데도 시간이 아직 2시네요. 내일은 일요일인데 꽤 피곤한 하루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좋은 주말 밤~^^

맥거핀아님 2015-04-09 15: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저는 맥거핀님이 원하시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ㅋ 그러나저러나 맥거핀님 서재에 글도 잘 안 쓰시고 어디서 뭐 하시는지..

희선 2015-04-03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는 그렇게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한주 가는 건 빠르고 한달 가는 건 더 빠릅니다 어느새 올해 사월이 왔으니까요 늘 내일로 미루는 건 여전합니다 시간으로 보면 내일도 아닌데... 버릇은 고치기 어려운 거군요 어떻게 해야겠다 생각하는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앞으로도 내일부터, 할 것 같습니다 모르는 것보다 알면서 그러는 건 더 안 좋을 텐데... 오늘부터, 하는 날이 오기를...

전봇대 뒤에서 엿보는 얼룩냥이, 이름으로 하기에는 좀 길까요 은주라는 이름 설명을 보니... 말 그대로군요 햇볕 받고 뒹굴거리는 모습 귀엽겠네요 저는 그런 것보다 차 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끔 봤네요 제가 다니는 때는 고양이가 잘 안 다니는 때인지도...

구병모, 책은 아주 조금 읽어봤는데 예전에 남자 작가인지 알았습니다 책을 읽었다 해도 그렇게 잘 읽지 못했네요 로맹 가리 책에 나오는 별이라는 거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본 것인지, 처음 본 건데 예전에 본 것 같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처음 본 건데도 언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게 자신의 숙명처럼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책소개를 조금 보니, 자유라는 말이 있더군요

아직 책 안 읽었는데, 그 책에 ‘19세 이상’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예전에 나온 것하고 다른 데서 나온 것은 아닌데... 전에 그것을 보고는 나중에 책 읽고 말해볼까 하다가 어제 말했습니다 고객센터에, 그랬더니 그게 없어졌더군요 별거 아니지만...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마나 할 때도 있지만...


희선

맥거핀 2015-04-03 23:52   좋아요 0 | URL
구병모 작가는 그런 얘기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저도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당연히 남자작가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죠. 글쎄요.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글도 약간 남성적인 느낌이 있기도 해요.

예전에 그런 얘기 한 것 같은데, 우리 동네에는 고양이가 많이 다녀요. 얼룩고양이도 있고 검은 고양이도 있고, 못생긴 고양이, 잘생긴 고양이 다양한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이름을 붙여준 것은 그녀석 하나 뿐이예요. 우리 아파트 동 근처가 녀석의 나와바리인지 주로 이 근처를 어슬렁 거립니다. 길냥이들이 대체로 조심성들이 있는 편인데 녀석은 꽤 대담해요. 처음에는 전신주 뒤에 숨어 있더니 요새는 뭐 별로 해가 되지 않을 인간이군, 싶었는지 그저 막 앞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죠. 하루의 시간은 참 왜이리 안가나 싶을 때도 있는데, 한달, 일년의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벌써 4분의 1이나 지나갔잖아요. 저도 언젠가부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이런 버릇이 생겨서 해야할 일을 금새 미뤄버리고는 해요. 아니 내일 정도가 아니라 마음 편하게 며칠 뒤, 이럴 때도 많구요. 저도 조금 그런 버릇을 버려야 하는데...

다른 것도 그렇지만 영화나 책 같은 것도 생각했을 때 봐야하는데 자꾸 미뤄버리고는 해요. 책은 조금 미뤄도 볼 수 있지만, 영화는 시일이 지나면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지 않게 되니 제 때 보는 게 좋기는 한데 말이죠. 물론 그 이후에 집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영화는 아무래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같은 영화를 집에서와 영화관에서 볼 때, 전혀 다른 무엇인가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희선 2015-04-04 01:43   좋아요 0 | URL
시간이 가서 어느 때가 오면 좋겠다 하면 참 안 가요 별 생각없이 지내거나 무엇인가 집중하면 그때는 잘 가고... 집중해서 하는 거 별로 없지만... 책도 집중해서 못 읽고, 마음처럼 잘 안 되는군요 그것보다 요새는 집중해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때보다 새벽에 시간이 더 잘 가는군요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나중에 이름 말한 걸 생각하니, 이름에 그게 무엇인지 나타내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뭐든 이름만 붙이지 그게 무엇인지 나타내지 않잖아요 바로 생각났으면 고쳤을 텐데, 자려고 할 때 생각나는 거예요 저도 참... 그런 게 생각나는지, 그럴 때 가끔 있는데 하루 지나면 그냥 두자 합니다

그 고양이가 맥거핀 님을 자주 보다보니 얼굴을 익혔나봅니다 그러니 이제는 피하지 않고 앞에 나타나고 편하게 뒹굴거리기도 하죠 만화를 보니 길고양이는 쉽게 배를 내놓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이건 당연하겠습니다 다른 고양이가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책에서는 길고양이가 싸우기도 하더군요 동물은 자기 영역 같은 걸 가지고 있군요 산에서 사는 동물도... 지금은 산에 동물이 별로 없을 테지만...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잖아요 그런 게 나오는 책을 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랑이뿐 아니라 다른 동물도 거의 없어졌군요

저는 책 도서관에서 빌려볼 때 그래요 가끔 어떤 책 읽어야지 하고 적어두기도 하는데, 지금은 적어둔 책 거의 못 봐요 예전에는 한권씩 읽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가면 다른 책이 눈에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빨리 못 읽어서 그렇기도 하군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보는 거 아주 다르겠네요 어떤 영화만 쭉 보여주는 그런 영화관도 있으면 좋을 텐데... 빨리빨리 돌아가는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없겠군요 아니 그런 곳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죠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고... 부산엔가는 예술영화만 보여주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힘든 사람한테 위로가 되지 못한다 해도 책, 영화, 음악은 있는 게 좋겠죠(예술은 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 게 눈에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을 테니까요

시간이 흘러서 주말입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B.B 2015-04-2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에서도 다카미네 히데코가 나왔었죠. <방랑기>는 아직 못봤는데 책도 출간되었으니 먼저 읽머보고싶네요. 책소개글 보러 가끔 북플들어와봐요. 티스토리에서도 가끔 뵙지만요 :) 좋은 오후 되시길요~

맥거핀 2015-04-20 16:43   좋아요 0 | URL
아..여기서 뵈니까 반갑네요. 북플은 저는 스마트폰에 깔아놓기만 하고 별로 실질적인 활용을 못하고 있습니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여럿 나왔죠. 방랑기에서 뭔가 살짝 비어보이면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한 그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네요. 영화가 참 매력이 있어요.

건강 조심하시고, 즐겁게 지내시길요.^^
 

 

 

(<위플래쉬>, <꿈보다해몽>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3월이 지나가기 전에 3월에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싶다. 3월에 본 영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3월 중순 이전에 본 영화들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영화를 본 직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과 영화를 보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무엇인가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위플래쉬>. 이 영화는 음악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나는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일종의 스포츠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체를 이용하여 정확한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그래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스포츠, 혹은 신체언어를 이용한 예술인 무용이나 발레와 같은 것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영화에서 나타내는 방법이 예술가의 고뇌나 개인적인 일화, 혹은 그 '음악' 자체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도 일종의 신체 예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조에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드럼 연주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강도로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실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그것을 지속시킬 체력과 근력, 즉 신체의 지탱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플래쉬>의 촬영은 이런 신체를 이용하는 스포츠나 예술을 다루는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내용상의 측면(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에서도 그러하지만, 한편으로는 촬영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클로즈업의 활용을 통해, 신체 그 자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점점 분열되어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런 타이트한 촬영은 이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블랙 스완>에서 발끝이 지면과 충돌하면서 토슈즈에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것이 관객에게 고통(이자 쾌감)을 전이시켰다면, <위플래쉬>에서는 손에 아무렇게나 칭칭감은 붕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자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을 자꾸 신체언어로 바꾸려드는 것 같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영화에는 있는데,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중요한 공연에서 결국 연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떤 연습의 부족이나, 정신적인 문제, 심한 긴장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육체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음악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문제, 혹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몸이라고 이상한 역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 '김중혁의 바디무비'에서 왜 아직 이 영화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음악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약간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자꾸 눈에 보이는 땀, 피 혹은 악보의 음표로 치환되어 지속적인 피로감을 준달까.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러 갔는데, 고통을 체험하게 된달까.

 

그것은 이 영화가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이면을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스포츠 영화의 화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간 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들을 즐겨 묘사하여 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를 보며 한계를 이미 넘어선 사람들의 전면에 있는 그 성취만을 주목했다면, 스포츠 영화들은 그 이면에 있는 한계를 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을 즐겨 그려오곤 했다.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말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앤드류가 그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정의 어느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물론 그것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처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며, 수월성교육이라는 것을 평소에 찬성했던 교육학자들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수월성교육에는 그리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 버드, 즉 찰리 파커와 같은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되었던 다른 학생들의 인생, 즉 플렛처(J.K.시몬스)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다른 제자의 삶과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교육'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플렛처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사실 플렛처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저 '마이 템포'이다. 그리고 그는 학생이 그 템포에 맞출 때까지 계속 같은 것을 반복시킬 뿐이다. 학생은 그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그것을 맞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그저 공포 속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복, 이를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를 플렛처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즉 지금까지 내가 당신의 템포에 맞추었으니, 이제 당신이 나의 템포에 맞추라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 둘은 은밀한 공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공명은 음악에 대한 공명이 아닌, 어떤 방법론의 공명처럼 보인다. 일방적인 마이 템포로의 방법론. 다시 말해서 앤드류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면 그는 플렛처 교수와 아주 비슷한 방법론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그는 플렛처에게 음악보다는 그런 방법론을 사실 배우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과자도 타인을 위해 팝콘 속에 담아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여자친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생활마저도 '마이 템포'로 하려든다. 그것이 교육학 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때려친 나라도, 이 영화를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영화도 있다. 이광국의 <꿈보다 해몽>. 이 영화가 서 있는 것은 플렛처가 그토록 싫어했던 '굿잡'의 위치이며,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의 방법론이다. 좌절하려고 하는 사람들, 혹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보내는 따듯한 격려. '꿈'이라는 말에는 양가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 허망한 것,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 혹은 희망을 가지려는 자세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에서의 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가까우며,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꿈의 무게는 현실보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현실보다 가볍다고 해서 무조건 들고 있을 수도, 혹은 현실보다 무겁다고 해서 무조건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다른 말로는 해몽이다. 즉 누구나 현실과 꿈의 무게를 재지 않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동시에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광국의 이야기 직조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광국은 전작 <로맨스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방식,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오고,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처음의 실마리가 끝과 만나다가 다시 사라져버리곤 하는 기이한 연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의 선을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그 선은 사라졌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며, 그때마다 관객은 꿈에서 현실, 다시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든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처음에는 꿈과 현실, 혹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보였지만, 그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 얼킨 실타래를 어떻게든 찾아내 감독이 어딘가에 남겨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좋은 방식은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려 들지 말고, 그 얼킨 실타래를 스스로 잘라붙여 이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 끊어진 꿈의 조각들을 스스로 이어붙여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꿈을 꾸었으니, 그 해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늘 얼개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종종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혹은 좋은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이 영화에는 있는데, 꿈을 해몽해주는 형사(유준상)와 그의 누나(서영화)의 이야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뇌출혈 같은 것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가는 누나를 형사는 돌보고 있는데, 누나는 쓰러지기 전에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날짜가 무슨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사는 누나가 여행가려고 정해둔 날이었나 보다는 식으로 눙치지만, 그 날은 사실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 삶의 얼개가 더 잘 들어맞았더라면, 즉 누나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더 좋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얼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전개보다는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해몽이다.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종종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형사가 사실 그날이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날이었음을 몰래 알게 되는 장면, 혹은 전작 <로맨스조>에서 초희(이채은)가 우연히 촬영장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대본을 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같은 마법같은 장면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광국의 영화에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 영화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 인물의 이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한걸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줌인과 줌아웃.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이광국의 영화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홍상수의 줌인이 주변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이광국의 줌인은 보고자하는 인물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홍상수는 카메라를 현실에 놓고 명계의 세계를 들여다보지만, 이광국은 카메라를 명계에 놓고,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홍상수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연약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광국의 여인들은 겉은 강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리다. 즉 이광국 영화의 그 결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훨씬 따듯하게 느껴진다. 

 

<씨네21>의 김지미 평론가는 994호에 실린 비평에서 이 영화가 전작의 동어반복이며, 너무 나이브한, 동화같은 순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동화같은 순진함. 대체로 우리가 분노보다 위무에 더 박한 평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평은 조금 가혹해보인다. 김지미는 이 글의 부제를 '<꿈보다 해몽> 속 순진한 어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달았다. 그 현실은 <위플래쉬>와 같은 현실일 것이다. 오로지 최고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꿈보다 해몽>보다 <위플래시>가 더 각광 받고 있는 그 현실(적어도 관객수라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최고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꿈을 가지려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현실에 더 잘 맞춰주고 있는 것은 <꿈보다 해몽>보다는 <위플래쉬>인데, 그것을 나이브한 동화라고만 말해야만 할까. <위플래시>의 마무리는 개운치않은데, 그것은 내용보다도 그 싹둑 잘라버리는 영리한 쿨함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이다. 나는 그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그 <꿈보다 해몽>의 마무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맛보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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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3-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욜인가, 시내 도서관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또 데이트. 무한 전력 질주를 했는데 예매한 <뷰티풀 라이>는 결국 취소하고 말았어요. 차로 날아가도 시간을 놓칠 것 같아서 장봐서 음식 만들고 보쌈 사와서 먹고 그냥 놀았어요. <꿈보다 해몽>이 뭐지..하고 보니까 우리동네 예술관이랑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하고 있는데, 그제 간만에 해운대에 진입했더니 거긴 뭐, 갈때마다 외국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찔한 빌딩, 각 잡힌 네온사인, 조깅하는 외국인들, 점점 더 발전하는 바다. 공연장, 미술관, 백화점, 극장, 바다까지 모여있으나 주말에 마비 상태가 되는 이 동네는 내가 진입할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더 봐요, 맥거핀님. 그리고 글 써 줘요! ^________________^

2015-03-30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3-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플래쉬 보고 싶었는데 맥커핀님 리뷰 보니 엌;
그런 거 같아요. 요즘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오디션과 멘토 문화, 각종 자기계발서에 기댄 성공심리. 예전엔 뛰어난 뮤지션들 다 독학해서 자수성가한 경우잖아요.
아래 우리가 연결해나가야 할 꿈으로 마무리지으셔서 좋았어요 :)

맥거핀 2015-03-31 12: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Agalma님. 위플래쉬는 잘짜여진 영화이긴한데, 좋아할 수 없었고, 꿈보다해몽은 전작에 비해 밀도는 적었지만, 좋았어요. 아마도 위플래쉬 같은 영화가 요즘의 세태에 더 맞는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더 흥행하는 것일수도 있고..그렇다고해도 이 영화에 대한 열광이 조금 의아해보이기는 해요.

아이리시스 2015-03-3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알람이 오니까 좋네요 :) 점심 먹어야죠, 배고파요ㅠㅠ

맥거핀 2015-04-01 13:59   좋아요 0 | URL
나는 알람 다 꺼놨어요. 뭐 사실 북플이 나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

아이리시스 2015-04-01 15:52   좋아요 0 | URL
어디 마땅히 기록이 불가능하니까 북플을 쓰는 거죠. 올해는 다이어리를 안 샀거든요. 넘 바빠서 다이어리를 날마다 들여다볼 시간도 없;; 날짜가 왜 한번 펼칠때마다 2-3일씩 훅훅 가있는지.. 3일 이상 지나면 뭐했는지 기억도 잘 안납니다.. 맨날 노니까요ㅠㅠ 맘같아서는 완전히 비공개해놓고 혼자만 기록하고 그저 노트같은 걸로 사용하고 싶은데. 사실 그래서 저 계정 하나 더 있어요! 가끔 메일주소와 비번이 나도 헷갈리는 다른 계정!! 알람은 댓글알람만 초기부터 해놨는데 소수정예댓글이라 알람이 많이 안 와서(!) 좋은 것 같아요, 물론 다수정예댓글이라도 좋겠죠. ^^;;

맥거핀 2015-04-01 15:56   좋아요 0 | URL
흐흐. 아이리시스님 이중생활하는 거 고백했따~. 저는 사실 알라딘 주로 지하철에서 많이 보거든요.(지금은 PC 앞이지만) 북플로도 보고, 알라딘 앱으로도 보고 그러는데, 북플은 이상하게 데이터도 많이 먹고 정이 안가요. 그래서 주로 알라딘 앱으로 봅니다. 알라딘 앱으로 서재도 보고 책도 검색하고 그래도 나한테는 충분해요. 그래서 북플을 잘 안쓰게 되는데..그래서 북플에 다른 사람들이 막 이 기능 좋다, 저 기능 좋다 하셔도 그게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단순하게 댓글 달릴 때만 좋습니다.

아..그래도 아이리시스님이 요새 무슨 책 보는지는 북플로 꾸준히 체크하고 있어요. ㅋㅋ(이걸 왜 체크하고 있는지..)

아이리시스 2015-04-01 16:04   좋아요 0 | URL
응, 그거 좋아요, 그런 자세. 체크해야죠. 저도 친애하는 이웃님 몇 분 체크함. 아..이분들은 요즘 책 안 읽나.. 글도 좀 쓰지..

나 뭐 읽는지 체크당하라고 북플이 있잖아요.. 혼자 읽지마.. 뭐 읽는지 맥거핀님에게 알려.. 댓글 달리면 알려줄게.. 답글도 좀 달고.. 독서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다 같이 읽는 거라고.. 대신 데이터는 좀 많이 빼앗아갈게.. 나도 살아야 하니까.. 대신 표지 화질 좋지.. 책 좀 사라고..책 사라고..책 사라고.. (결국 못 이기는 사람이 책삼) 근데 그게 이런 순서대로 가나요? :)

저는 마지막으로 책 샀던 게 도서정가제 이전이었던 것 같아요.

맥거핀 2015-04-01 16:07   좋아요 0 | URL
아..말씀을 듣고 보니 이웃님 독서생활 체크하기라는 아주 중요한 기능이 북플에 있었군요. 나는 계속 북플을 안함으로써 아이리시스님이 내가 무슨 책을 보는지 궁금하게 하겠음..

나도 요새 거의 새책은 안사고 중고서점에서만 좀 샀어요. 그런데 이번에 적립금 들어와서 그냥 새책 몇 권 질러봤음...역시 그래도 책은 중고책보다는 새책 지를 때가 쾌감이 더 높아요.

아이리시스 2015-04-01 16:2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책욕심은 버린 척 하는 거지 버려지는 게 아니란 걸 날마다 더 깊게 깨달아요. 중고보다 새 책이 좋고, 신간이 좋고 컬렉션을 완성시키는 게 좋죠. 이 마음을 알라딘 서재에서는 이해받으니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2015-04-01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2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4-02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는 건 감동인데, <위플래쉬>는 그것과는 좀 먼 듯하네요 음악이 나오지만 교육이 보이는군요 가끔 음악도 안 좋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냥 놔두면 자기 감성대로 피아노를 잘 칠 텐데, 뭔가에 잘 맞게 치기를 바라고 그것대로 하지 않으면 피아노 치는 사람을 힘들게 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음악을 그만둘지도...

한계를 넘으려고 할 때 여기저기 다치고 그러는군요 이 말을 보니 그런 거 자주 본 듯합니다 운동 경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다치고 피 흘려야 할까요 진짜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군요 그것도 자신이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시키면 하고 싶지 않을 듯합니다 그것을 잘 따라하는 사람도 있겠죠

본래 뜻과 다르게 좋게 보는 것도 괜찮겠죠(그런데 누나가 나은 다음 다시 그런 마음을 먹는다면... 누나가 죽으려고 한 것을 알았으니 이야기를 해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보다 시간이 지나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네요) 꿈은 크지 않아도 좋다고 봅니다 작은 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도 즐거우니까요


희선

맥거핀 2015-04-02 13:02   좋아요 0 | URL
네..영화에서도 그래서 음악을 그만두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지요. 하나의 찰리 파커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포기자들을 만들어내도 좋은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는 그 마지막 음악이 뭔가 울림을 주지 못했어요. 뭐 사실 음악은 음악이고, 내용은 그 별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같은 사람은 자꾸 이야기와 음악을 연결짓게 되는군요.

위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사실 교육의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교수도 실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없지만, 사실 앤드류도 무엇을 배운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즉 그가 그렇게 열심히하는 것에는 단순히 배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 이상의 어떤 것들 말이죠. 그것이 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 안할지는 사실 영화의 마무리를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의 또 하나 위험한 점이겠지요.

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작은 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도 즐겁습니다. 꿈이 크지 않아도요. 적어도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제 꿈이 무엇인지 조금 알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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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하나 빼먹고 있었지 싶었는데, 신간평가단 추천 페이퍼를 쓰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실 나는 추천페이퍼를 조금 빨리 쓰려고 하는 편인데, 그건 성실도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단지 너무 늦게 쓰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선거에서 탈락할 것이 거의 확실한 후보한테 표를 주는 기분이랄까. 물론 선거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 행위이기 때문에 탈락할 것이 확실한 후보라고 해서 표를 주는 것이 의미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어쩌면 신간평가단 책을 골라내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조금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대체로 많은 일이 그렇듯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캐스팅 보트 같은 것을 쥐고 있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대한 기다린 다음 결정적인 한표를 던지는 잉여짓을 할 수도 있겠지. 뭐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도 아니니 뭐가 문제랴.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플로리다의 선거인단들은 자신이 이라크 국민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꿈에서라도 해봤을까.) 아무튼 그런 잉여짓을 한다고 해도 실물의 책이 내 손에 도달하기까지는 다른 요소들도 많이 작용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있다가 저녁에는 무엇인가를 쓰기에는 적절한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재미가 많이 없더라도 지금 써야겠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일부러 해도 잠이 안깨니, 잠이 더 몸을 덮치기 전에.

 

 

 

두 번의 자화상, 전성태, 창비

 

이제 어느덧 중견이 된 전성태 작가의 단편 작품집이다. 등단한지 올해로 20주년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여주며, 다양한 수상작품집에도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올해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도 작가의 이름을 본 듯 하다). 작품집에 올라있던 여러 단편들은 보았지만, 차분히 작가의 작품들을 본 기억은 없는데, 이번 기회에 읽고 싶다.

 

 

목숨전문점, 강윤화, 실천문학사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강윤화의 청춘들은 모두 뚜렷한 목적을 보이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붙어 있는 목숨 자체를 의문시하며 '살고 싶은가'라는 패배적인 자조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라니. 그들의 이 '자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그 이면의 것을 읽고 싶다.

 

 

괴테 문학 강의, 안진태, 열린책들

 

그간 독일문학에 대해 꾸준하게 천착해 오던 안진태 교수의 책이다. 강의실에 앉아서 차분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 서가를 장식하고 있는 괴테의 책들을 꺼내서 다시 읽으면 조금 달리 보이는 게 있을 것 같다.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 단편집, 김종일 외, 황금가지

 

제목이 약간 벙찌게 만드는 면이 있는데, 표지도 그렇고 컨셉인 것 같다. 원래 이런 컨셉은 피식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보다가 몇 차례 크게 얻어맞고 급기야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비웃어서 미안해!를 외치는 게 가장 최고급 코스인데, 이 소설들은 어느 정도의 코스일지 궁금하다.

 

 

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박하

 

<맏물 이야기>와 이 책 중에 가늠해보다가 이 책을 골랐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들을 즐겁게 읽고 있는데, 그의 적자인 그녀의 소설을 한 권 고르고 싶었다. 그 중에서는 아무래도 이 책이 조금 더 낫겠지 싶다. 

 

 

덧.

 

 

이 책을 고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 책을 읽은 후 어떤 리뷰를 쓰게 될지 불보듯 뻔할 것 같아서 빼기로 했다. 보나마나 이것도 죽이고, 저것도 죽이네 하며 감탄하다가, 근데 다 출간이 안 되었다고 징징대다가, 급기야는 한국 출판 문화를 성토하면서 이 책을 추천한 내 자신을 원망하는 걸로 끝나겠지. 누군가의 러브레터를 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 러브레터의 대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나.

 

 

아 그리고 이 책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라는 제목의 이질감. 나이든 무라카미 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더구나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4050세대의 다섯 가지 가느다란 희망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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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쓰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라는 말이 너무 공감되네요 ㅋㅋ... 하지만 저는 새로 나왔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그분들의 추천을 받아서 제 신간 선정 목록에 넣기도 해요. 나름 이런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ㅎㅎ

맥거핀 2015-03-06 00: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롸님! (`롸`라는 닉네임이 인상적이네요. 저는 MLB팬이라 쓸데없이 알렉스 로드리게즈, 일명 `롸동자`를 연상하고 있습니다.ㅋ) 아..그렇군요. 그런 장점도 있기는 하겠군요. 저도 신간추천하면서 늘 다른 분들의 추천을 봐요. 모두들 각자 나름의 색깔?이 있으신 것 같더군요.^^

희선 2015-03-0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어서 잠이 오는가봐요 저는 철이 바뀔 때가 되면 잠이 많이 오더군요 어느 날 왜 이렇게 잠만 자고 싶을까 생각하면 그런 때였어요(그럴 때가 아니어도 기분이 별로면 잠을 자는군요) 겨울에서 봄으로 바뀔 때는 다 그럴 것 같습니다 한동안 움츠려 있어서 그것을 펴려면 좀 힘이 들지 않을지... 사람이나 그렇게 움츠려 있지, 식물은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고 있었겠습니다

벌써 정해졌을지 몰라도 마지막에 쓴 것까지 확인해보겠죠 누군가는 저런 책도 나왔구나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군요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라는 말이 재미있네요 제목에서 벌써 웃음이 나옵니다 실제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류는 오랜만이네요 지난해에도 책이 나오고 예전에 나온 게 다시 나온 것 같기도 한데...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제죠 어제 보름이었더군요 달이 잘 보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달 보셨습니까


희선

맥거핀 2015-03-06 00:26   좋아요 0 | URL
하하..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게 되네요. 이런 경우 잘 없는 것 같은데...저는 솔직히 늘 잠이 와요. 잠을 적게 자도 잠이 오고, 잠을 많이 자도 잠이 오고..참 이상하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옛날에는 잠이 참 없는 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잠이 많아졌는지..남들은 나이들면 잠이 적어진다는데, 저는 이상하게 반대인 것 같아요.

네..저도 사실 과학과 액션이 어떻게 융합되었을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상당히 괴랄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요. 저도 무라카미 류 이름 오랜만에 봐서(아주 오래전에 `공생충`이라는 소설을 본 이후로 거의 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반가웠는데, 제목부터 내용까지 별로 땡기지가 않아요. 무라카미 류는 그냥 내 추억 속의 무라카미 류로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커트 코베인이 살아 돌아와 포크 앨범을 낸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달 못봤어요. 올해는 정월대보름도 뉴스 보고 알았어요. 부럼도 못 먹었고, 오곡밥도 구경을 못했네요. 별 거 아니지만, 왠지 그냥 지나가니 섭섭하군요.

맥거핀 2015-03-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지금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발견했는데, 위에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 단편집>은 표지에는 `단편선`이라고 되어있네...근데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에는 `단편집`이라고 되어있고..이상하다....

2015-03-18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0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스캐처, 베넷 밀러, 2015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 21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자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씨네21> 991호에 실렸던 송형국 평론가의 글 서두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이자,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이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왜'를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2.  

사실 이 영화의 구성은 조금 흥미롭다. 위에 언급되는 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데이브 슐츠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이다. 그도 형과 같은 레슬링 선수이자, 역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초반의 씬들은 인상적이다. 아무도 없는 레슬링 도장에서 인형을 잡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그를 한동안 멀리 바라본 후, 장소는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마크가 강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고를 손에 들고 중얼거리며 앞을 노려보는 그는 긴장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국기가 걸린 강당에서 마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오륜 마크가 그려진 자켓을 입고 목에 건 금메달을 보여주며, 레슬링과 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그리고 서류에 날짜를 쓰는 어떤 손이 보인다. 1987년 3월 14일. 학교 행정실이다. 강연료가 20달러라고 말해주며 행정직원은 이름을 묻는다. 데이브인가요, 데이빗인가요? 그리고 마크는 답한다. 마크라고, 형 대신 왔다고. 행정직원은 약간 의아한 눈길을 보내지만, 그리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크는 덧붙인다. 둘 다 금메달리스트라고. (이 장면들에서 마크의 옆으로 당시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의 사진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그 이후 찌푸린 얼굴로 낡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치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사내들 틈에서 음식을 주문하려 하는 마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기도 하고, 마크와 데이브의 관계의 어떤 일단(예를 들어 형의 도움으로, 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크)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즉 데이브는 강연을 초청받지만, 마크는 사실은 데이브가 받았어야 할 강연료를 받아, 낡은 차 안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다. 같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이지만 데이브와 마크의 처지는 왜 다른가). 그런데 이 장면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씬들이 영화 마지막의 에필로그 씬들과 일종의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이다. 그는 형이 죽은 후 UFC같은 격투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실에서 혼자 외롭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모습을 비춰준 후(이 장면이 한편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이전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옆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고 힘을 북돋우는 형 데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등의 화려한 소개를 들으며 링으로 올라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의 마크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은 외친다. USA! USA! USA!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대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두 장면 모두 관객을 상대로 한 어떤 무엇을 시작하려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공통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에 나왔던 강당에 걸려있었던 미국 국기와 행정실에 있던 레이건의 사진 그리고 마크가 강연에서 얘기하려 했던 조국과 같은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에 마치 화답을 보내는 것 같은 마지막의 USA!와 같은 외침들은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마크의 이름을 외치지 않고, USA를 외치는 걸까. 마크는 국기가 걸려있던 초등학교에서 조국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받았고, 이제 몇 년 후 그 시큰둥한 반응은 열렬한 환호로 이상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크의 얼굴은 굳어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대신 섰을 수도 있는 데이브는 그 시간들 사이에 누군가의 총을 맞았다. 기의는 달라졌고, 기표는 여전히 비어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끝과 마지막을 이 비어있는 기표가 장식한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가 형의 죽음에서도 그다지 배운 것은 없어보인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이 조금 더 다층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오프닝(그러니까 마크가 등장하기 전의 오프닝)과 이것이 묘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많이 이상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문구가 지나간 후, 보이는 것은 낡은 기록사진과 같은 풍경들이다. 오래 전의 폭스캐처 농장을 보여주는 낡은 기록필름. 말과 사냥개들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실제의 기록필름(어린 시절의 존 듀폰과 그의 어머니의 컷이 있는 것도 같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아마도 영화의 중간에서 존 듀폰이 마크에게 보라고 하는 비디오도 이것과 비슷한 화면일 것이다). 여우를 잡으러 뛰어가는 사냥개를 담은 기록필름의 컷 사이에 제목이 뜬다. '폭스캐처' 그러니까 여우를 사냥하는 무엇. 그리고 이어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형을 붙잡고 텅빈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마크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그러니까 사실 여우를 잡는 사냥도구였던 말 혹은 사냥개와 그의 지원을 받아 레슬링 훈련을 하는 마크의 존재의 의미는 존 듀폰에게는 동일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마크가 따온 메달이 결국 여우와 같지 않느냐는 듀폰의 말도 있다. 듀폰의 어머니에게는 여우사냥과 말이었다면, 듀폰에게는 그것이 레슬링과 마크였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말한 마크가 나온 오프닝 혹은 엔딩과 이것을 연관지어 본다면 여기에서 감독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마치 그것이 존 듀폰만 그런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존 듀폰이 마크가 따온 메달을 마치 자신이 딴 것처럼 자신의 진열대에 전시할 때, 혹은 더 나아가 듀폰이라는 가문이 (실제는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닌) 여우와 메달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때, 국가와 USA를 외치는 국민은 거의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는 어쩌면 단지 규모나 사적소유(실제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 당신은 김연아가 딴 금메달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나.

 

  

4. 

물론 이 영화에서 이런 질문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우리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존 듀폰과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이 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존 듀폰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비극은 그가 그의 어머니 이상의 것을 바랬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중간에 그가 레슬링 선수들에게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이 단지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며, 동물 위에 앉는 것이 뭐 그리 고상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물이 아닌 인간 위에 앉고 싶었다. 인간도 물론 먹고 싸지만, 인간은 한 가지를 더해 주니까. 즉 그를 존경해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그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멘토가 받는 존경을 받고 싶었다(예를 들어 그가 자신이 써낸 조류학 책을 보여주며 자신을 조류학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에게는 조류학이든 뭐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류학자가 받을 수도 있는 존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멘토가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도, 흉내를 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듀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듀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은 듀폰이 데이브를 쏘기 전에 보이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분노를 보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 전에 자신을 본다. 자신이 마크와 데이브를 비롯한 레슬링 선수들의 멘토인 것처럼 만들어진 비디오.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집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친구로 '붙여줬을 때'에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만들어진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그러니까 진짜 '멘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진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5.  

즉 듀폰에게는 데이브의 존경이 필요했다. 마크의 존경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고(아마도 마크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형이나 형의 아내에게 듀폰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이도 멘토로서의 존경이라기 보다는 그의 금력에 대한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진짜 멘토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멘토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멘토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정말 비극은 데이브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그는 누군가의 권위에 따르고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하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아예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가 아주 훌륭한 연기로 이를 잘 보여주는데) 데이브에게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비디오 연출가가 시킬 때, 그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수긍하고 하려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천성처럼 보이며, 그가 다른 사람들, 특히 듀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극은, 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혹은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했다. 존 듀폰은 멘토가 되는 법을 모르며, 데이브는 멘토라는 것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존 듀폰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데이브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중혁 작가가 <씨네21> 993호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에 데이브가 차를 고치다가 듀폰을 만나 총을 맞고 죽어갈 때 그의 팔에 쓰인 낙서 'P.U.KIDS'라는 문구를 보고, 혹 이것이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는 아닐까,라고 쓴 구절이 있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위의 얘기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영화와 이 글을 본 후 궁금해져서 이 부분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은 마크 슐츠가 데이비드 토마스와 사건 후 쓴 <Foxcatcher: The True Story of My Brother's Murder, John du Pont's Madness, and the Quest for Olympic Gold>라는 책의 시작머리에 나오는데, 차를 고친 후 아이들을 픽업(Pick Up)하러 가야한다고 자신에게 일러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문구가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폭스캐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잔상을 많이 남기는 영화다. 예를 들어 몇몇 기억에 남는 잔상들이 있다.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 아닌 지시를 받았을 때 마크 러팔로의 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되지 않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나, 듀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짓는, 스티브 카렐이 어떻게든 어머니 앞에서 멘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도저히 못보겠다는 표정, 혹은 스티브 카렐이 고개를 약간 치켜 들고 동공이 비어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멘토라고 만들어진 비디오를 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일부러 극중인물 대신 배우 이름을 쓰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모두, 이들 자신이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터에도 있는 가짜 코를 달고 약간 고개를 위로 치켜 뜬 스티브 카렐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사실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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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0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랄 것 없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겠습니다 하지만 가진 게 많다고 해서 모자란 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진 사람은 그 나름대로 모자란 게 있을지도 모르죠 그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지, 어쩐지 가진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친구를 엄마가 돈으로...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바랐을까요 이게 알고 싶네요 사람 위에 서고 싶어서... 존경받는 건 누군가 위에 서는 게 아닌데, 그것을 잘못 알고 있었네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군요 데이브도 그걸 잘 몰랐다니,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만났군요 데이브가 모르는 것도 있었겠지만, 별로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기도 하겠죠 존경한다는 것은 말로 하기보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뚜렷한 동기가 있어서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도 있지만, 동기가 확실하지 않은 때도 있어요 이 일도 뚜렷하게 알기 어려울 듯하네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여기 나온 사람들이 다 연기를 잘했군요


희선

맥거핀 2015-03-06 00:14   좋아요 0 | URL
뭐 물론 이 글은 영화를 본 제 나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진짜 나름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존 듀폰이 데이브 슐츠를 사살했다는 사실 뿐이니까요. 말씀하셨듯이 동기가 확실한 사건도 있지만, 많은 사건들이 동기가 불확실하죠. 어쩌면 존 듀폰도 쏘면서도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튼 (적어도 영화상으로 본다면) 그 마지막이 흥미로웠어요. 존 듀폰이 자신을 칭송하는 비디오를 본 후 데이브에게 가서 그를 쏘는 것. 아마도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보다 쉬운 방식, 그러니까 자기자신에 대한 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치환하고는 하죠. 말은 쉽지만 자신이 전혀 존경 같은 것은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겠죠. 꼭 존경 뿐만이 아니라 사실 많은 것이 그렇기도 할 것이구요.

연기의 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볼 게 많은 영화입니다. 대사가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어서 미묘한 느낌을 살려야 하는 부분들이 많은 영화인데, 세 사람 모두 상당한 호연을 보여줍니다.

네오 2015-04-2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쓰셨네요!! 궁금한게 다 풀렸네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네오님, 고마워요! 네오님 칭찬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네오 2015-05-01 13:18   좋아요 0 | URL
네,,감사요,,사실,,이 글을 읽을때 전율비슷한,,마크가 수미쌍관적으로 왜 배치를 했는지를 설득가능하도록 이야기를 해주셨으니,,뭐,,더이상 이만한 리뷰글을 넘는글을 상상도 못할거고,,다 이야기를 풀어주셨으니 말을 더한다는 것은 낭비인것도 같고 해서요,,저는,,걍 느낌위주로 글을 써야겠아요^^ 아 단지,,베넷 밀러가 왜 중요한지는 말 하고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