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리뷰를 쓰는 것보다도) 수많은 책 중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내는 일이다. 한참 동안이나 이 책이 좋을까, 저 책이 좋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사실 모든 책이 좋아보이거나, 아니면 모든 책이 다 문제가 많은 책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읽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단지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골라낸다는 것의 민망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리뷰를 쓸 때보다도 이 추천도서 목록을 작성할 때가 늘 시간이 더 걸리곤 해서 아유, 이런 추천리스트 같은 것은 이제 더 안했으면 싶었는데, 막상 마지막 추천도서를 쓸 때가 되고보니 시원함보다는 여전히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자면 또 저번 서평단 마지막 추천글의 ctrl+V가 될 것 같고, 어서 몇 권의 책을 내밀며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 듯 싶다.

 

이대로 책만 읽고 있어도 좋은걸까, 하는 시간들 속에서 골라낸 몇 권의 책들.

 

 

 

사물 판독기 / 반이정 / 세미콜론

 

<씨네21>에 실렸던 반이정의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커다란 사진과 같이 실린 그의 (대체로) 짤막한 글들은 때로 사진 에세이 같기도 하고, 혹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이나 단지 농담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 종잡을 수 없는 웅얼거림들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도리어 문득 세상을 보는 (나의) 무감한 시선들이 느껴지곤 했다. 그가 내미는 하얀 토끼를 따라 이상한 사물들의 나라로 들어가 보자.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류신 / 민음사

 

이상한 사물을 보았으니 이제 이상한 공간을 읽을 차례이다. 문학비평가인 류신의 이 책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얻어 이 복잡한 도시 서울을 벤야민 식으로 읽어낸다고 하는데, 뭐 사실 누구 식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보다 중요한 것은 거의 대부분 무감하게 지나치는 이 공간들을 기어코 다시 '돌아본다'는 것에 있을 것인데, 새로운 필터를 거친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하얀 토끼를 따라 들어간 앨리스는 이제 여왕이 지배하는 기이한 공간들을 보게 된다.

 

 

시인을 체포하라 / 로버트 단턴 / 문학과지성사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 전경목 / 휴머니스트

 

기이한 공간들을 보는 것은 현재의 공간들을 뒤집어보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당시의 공간들이 어땠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역사책에 실린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무대로서만의 공간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던 일상적인 공간 그 자체를 보려는 미시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고양이 대학살>로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을 이름인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세기 중엽의 파리와 당시의 구어적 의사소통망을 특유의 흥미로운 서술 방식을 통해서 재구성해낸다. 전경목의 책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는 낡고 빛바랜 종이일 뿐이었던 고문서를 입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당대의 생활상을 복원해내고, 우리에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면의 일상사를 엿보게 해준다. 고문서 연구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저자의 이력을 한번 믿어보자. 

 

 

세상물정의 사회학 / 노명우 / 사계절출판사

 

이상한 사물들과 이상한 나라를 본 앨리스는 이제 과거의 앨리스가 아니다. 이야기 속의 앨리스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났지만, 현실의 앨리스들에는 꿈에서 깬 이후의 삶이 남아있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에 감춰져있던 리얼리티를 보는 것일텐데, 사회학자 노명우는 이 책에서 우리 세속의 풍경들에 감춰져 있던 의미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던 취미, 섹스, 개인, 가족, 노동, 기억, 상식과 같은 풍경들에 담긴 것들인데, 우리는 이 당연한 키워드들 속에서 어떤 냉혹한 현실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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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03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4-01-05 14:42   좋아요 0 | URL
파트장님도 추천도서 쓰시면서 많이 고민하셨던 모양이네요. 파트장님 추천목록도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가연 2014-01-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ㅎㅎ 너무 늦게 이렇게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저도 빨리 추천목록을 만들어야하는데...

맥거핀 2014-01-05 14:43   좋아요 0 | URL
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연님 추천목록도 보러 가겠습니다. 이번달에도 과학책이 한 권은 들어있겠죠?

비의딸 2014-01-1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물정의 사회학..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맥거핀 2014-01-15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이 책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서평단도 별로 안남았네요. (댓글이 조금 늦었네요. 제가 요새 잘 못 들어와서..;)
 

 

2013년 좋았던 영화 10편 (무순)

 

 
설국열차, 봉준호

후쿠시마의 잔해 제거를 위해 노숙인들이 헐값에 투입되었다는 세밑의 기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설국열차에서 그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바닥에 들어가 있던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윌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셈이다. 봉준호가 직관적으로 보여준 이 세계는 이미 실현되었고, 이때 봉준호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도대체 어느칸에 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폴 토마스 앤더슨은 집단의 서사를 개인의 서사로 능숙하게 압축시킨 다음,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보는 것을 통해 결국 우리 각자의 비어있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든다.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과 코맥 맥카시는 관객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고 극단으로 몰아붙인 다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차가운 성찰을 요구한다. 올해 최고의 공포물. 리들리 스콧의 의외의 간결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가 늘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편으로 리듬의 조절에 매우 능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절한 포인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종종 멈춰서서 관객을 차분히 성찰하도록 내버려둔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그는 알고 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타비아니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고대 로마와 그것을 연기하는 재소자들의 과거와 그들이 보여주는 현재의 무대. 그리고 그 세 가지의 이야기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죽어야 하는 우리의 '시저'는 누구인가.

 


스토커, 박찬욱

단 한 숏도 의미없이 지나치지 않는다. 박찬욱은 늘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번에도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한 세계를 마감하고,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홍상수의 명계(冥界)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홍상수의 줌은 누군가를 가까이 당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그 명계에서 해원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집요한 도덕극이자 말(言)이 만들어내는 환영들의 향연. 전작의 장점들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롭게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말의 스릴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 같다.

 


블러드 브라더, 스티브 후버

진짜 기적이 있는지 늘 의심하는 나와 같은 자들은, 진짜 기적을 만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EIDF에서 만난 단연 올해의 다큐.

 


일대종사, 왕가위

모든 것이 쇠락해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으며, 한껏 자신만만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소한도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왕가위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경의를 보낸다.
 



2013년 보았어야 할 영화 10편 (무순)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테이크 쉘터, 제프 니콜스

잠 못 드는 밤, 장건재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풍경, 장률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제로 다크 서티, 캐서린 비글로우

가족의 나라, 양영희

필름 소셜리즘, 장 뤽 고다르

비념, 임흥순

코스모폴리스, 데이빗 크로넨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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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대종사, 풍경,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언급된 것 중 보았어야 한다고 (특히) 생각하는 영화 3편이에요. 아 아쉽다!
2. 영화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 모두 고개 끄덕이게 하는...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맥거핀 2014-01-03 20:35   좋아요 0 | URL
아..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봤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들러서 인사해주시고..섬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경은 저도 아직 못봤지만(사람이 너무 없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일대종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강추할 수 있습니다.^^ 아..아직 개봉하고 있는 영화중에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이 영화도 참 좋아요.

2014-01-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알면서도 그 영화 못 보고 있어요.ㅠㅜ 심지어 동네 극장에서 하는 월터..도 못 보고 있는!! 이대로 출국 2월초 귀국하면 봤어야 할 영화에 월터와 아델이 떠억하니 오르겠죠. 넘흐 보고 싶었던 이무지치의 사계마저도 1월에 내한 공연!!!!!!!! 뭡니까.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왜!!!!! 난 너희 나라에 지금 갈 건데! 진짜 저주받은 타이밍요...ㅠㅜㅜㅜ /아 풍경....ㅠㅠ 장률 감독 GV도 기회 있었는데 못 가보고...

맥거핀 2014-01-03 21:07   좋아요 0 | URL
아..저 사실은 월터..도 봤어요,라고 염장을 지르려고 했는데, 이건 뭐 염장을 지르는 것은 아무래도 섬님인듯..이태리요? 저는 이 팍팍한 서울에 갇혀서 TV속에서 그네 언니 얼굴이나 보고 있는데..

저는 영화 같은 건 안봐도 좋으니..(;;) 어디나 좀 갔으면 싶은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어디 갈 일이 없어요. 매일매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 속의 공허함을 여행으로 채우고 싶어요(라고 하지만, 사실 술도 좋..).

2014-01-0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댓글 안 달려고 했는데 우껴서.. 그네 언니야 트윗 탐라 조정하듯이 인생에서 편집해 주시고, 사실 술이 좋다고 괄호 속에다 부끄럽게 고백하셨으니 행복 인증이네요. 알콜은 어디서나 손닿는 곳에 있어주시니.. 일상 속 찰랑이는 행복...후후후 근데 이건 어떻슴까? 전 이딸리아에서 싸고 맛있는 와인, 좋은 친구로 날밤을 보낼 거라는... (월터, 그래도 제게 염장입니다.ㅋ 휴~)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어제 저도 조촐한 신년회가 있어서 와인 마셨어요.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와인 정도는 안되겠지만, 뭐 그래도 많이 먹었으니..질보다 양으로다가..(정신승리중. ㅋ)

근데 월터씨는 좀 별로였어요. 그거 아시죠? 남들 다 웃을 때, 하나도 안 웃겨서 소외되는 기분..개인적으로는 왜 우리나라에서 평들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외국에서는 평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탈리아 잘 다녀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가연 2014-01-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본 영화가 하나도 없... ㅋㅋㅋ 정말 삭막한 작년을 보낸 것 같네요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가 다 안타깝네요. 뭐 그런데 가연님은 그 이상으로 좋은 책 많이 보시니까.^^

Shining 2014-01-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를 뒤늦게 봤어요. 덕분에 제 페이퍼에선 언급도 안 된;;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작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최고작일줄 알았는데. 영화 정말 좋았어요. 한 컷도 낭비하지 않은 철저함과(편집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이라죠) 그러나 넘치는 서정과 설정숏도.

새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구정을 찾을 거에요, 그래서 아직 나이를 먹지 않은 거라 믿고 그래서 인사도 안 하는 겁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실은 연말연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야 들어오네요. 인사가 늦었어요. 건강하고 건강한 한 해 보내세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웃음).

맥거핀 2014-01-06 18:43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 시간이라는 것의 무게를 관객에게 인식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 영화입니다.

사실 위의 BEST10은 마지막에 두 개의 좋은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기 때문에 나온 글입니다. 그 두 개의 영화를 연말에 못 만났으면 리스트 같은 것은 안 썼을 거예요.ㅋ

저도 연말에 이웃분들에게 다 인사를 쓸까, 아니면 다 하지 말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죠. 뭐.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받으니 참 민망하네요. 저야말로 Shining님의 좋은 글을 잘 읽고 있으니,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해야겠군요. 어디 도망가지 마세요.하하.

아..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희선 2014-01-23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말(글말)을 하는군요 지난 한해 동안도 여전히 영화가 만들어졌군요 저는 영화는 한편도 못 봤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극장이 있는데 한번도 안 가봤습니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사람이 학교에 더 자주 늦기도 하잖아요 꿈 이야기가 나오는 책에 영화는 낮에 꾸는 꿈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더군요(저는 깨어있을 때 꾸는 꿈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는 보는 것(듣기)이니까 더 생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희선님. 그렇군요. 영화를 안 보셨군요. 사실 제 서재의 상당수의 글들이 영화에 대한 글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뭐 그래서 한편으로 여러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서재에서 영화란 맥거핀입니다(그러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놓고 늘 그것과 어쩌면 관계가 없을지 모를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제 희망입니다만, 솔직히 아직 그럴 깜냥이 안됩니다. 그거야말로 어쩌면 대가들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뭐 아무튼 저는 그럴 능력이 턱없이 안됩니다.^^

영화관에 있다가 나오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 같은 영화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운이 나쁘면 가끔 진짜 꿈을 꾸기도 합니다.
 

 

 

 

 

 

 

 

 

 

 

변호인, 양우석, 2013

 

 

(영화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긴 글을 쓰기는 생각이 짧아 어려울 것 같고, 짧은 글로 대신하고 싶다. 영화 <변호인>은 굳이 따지자면 사건 중심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로 보아야 할 것 같고, 그 중심에는 변호인 송우석(송강호)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이 영화 <변호인>은 조금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캐릭터를 양분하여 전후반부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이 송우석이 정겨운, 밉지 않은 속물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애를 써서 영화의 전반부에 캐릭터를 구축한 다음, 영화는 후반부에 그 애써 구축된 캐릭터를 이제 지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것은 대중영화의 공식에 그렇게 크게 어긋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내내 유지되는 캐릭터들도 있지만, 이렇게 캐릭터 중심의 영화일 경우 중간에 캐릭터가 탈바꿈하는 것은 흔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를 쌓으려는 노력에 비하여 탈바꿈의 고리가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캐릭터 송우석이 변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 보여지는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이다. 모든 것은 노력으로 가능하고, 누군가의 실패는 그들의 포기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식의 접근. 그래서 그는 고교동창 기자(이성민)와 싸울 때에도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냉소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노력하기 싫으니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약한 태도일 뿐이지,같은 식의 말들. 이렇게 어떤 태도와 정치적인 스탠스가 뒤섞여 있는 이러한 모습에서 그 태도는 여전히 후반부에도 남아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자세는 어떻게든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무죄방면 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의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뀌었는데(혹은 정치적인 스탠스가 생겼는데), 이는 어쩌면 앞의 질문과도 연관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태도는 바뀔 수 없어도,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뀔, 혹은 생겨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 혹은 상식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인간을 고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정치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것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것은 도리어 어떤 태도에 가까운 것이고, 송우석이 눈을 뜨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도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송우석은 사실 변화라기보다는 각성에 가깝고, 그런 각성은 통상 느린 것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런 각성은 (기본 상식을 갖춘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태도인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는 끈덕지게 물을 것이다. 정말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영화니까 사람이 그렇게도 변하는(각성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실제는 어렵지 않겠어요? 물론 이것에는 당연히 준비된 대답이 있다. 아니, 이건 단지 영화가 아니예요, 그렇게 변한 사람이 실제로 있거든요. 그런데 이 준비된 대답은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이 영화가 의도한(혹은 의도하지 않은) 이차적인 질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로 인간 노무현을 환기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질문에 답할 각오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 즉 영화의 2부를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의 끝, 그러니까 99명의 변호인이 변호해 준 송우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만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일종의 자기기만이나 자기위안에 가깝다. 우리가 노무현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그 나머지에 대한 씁쓸함을 견딜 각오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아니, 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송우석이 박종철 군의 죽음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추모는 원래 조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그의 말과는 달리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조용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99명의 변호사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한명한명 일어설 때,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고 이야기하던, 아무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조금은 우회해서 찾고 싶은데, 예를 들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예를 들어 악질적인 고문 경찰 차동영(곽도원)이나 건설사 대표의 아들(류수영)과 같은 도리어 어떤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무서워보이는 캐릭터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송우석의 앞과 뒤만을 보고 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들, 그러니까 빨갱이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차동영은 과거만을 보고 있고, 민주주의를 하고 싶지만, 현재는 아직 그 역량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건설사 대표 아들은 미래만을 보고 있다. 즉 그들은 과거에 얽혀 있거나, 미래의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현재의 인간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을 국가의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무엇 때문에, 혹은 미래의 무엇 때문에 현재의 국민은 희생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왜곡된) 국가이다. 그리고 거기에 송우석은 일갈한다. 국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국가는 국민입니다! 현재 눈 앞에 있는 이 푸른 수의를 입은 국민을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만족을 위해, 노무현이라는 실제의 기표를 환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 일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씌워야만 한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내가 포함된, 그가 수장이었던 우리의 정부는 무엇이라고 답했나. 비디오 앞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그를 보았나, 보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쓸씁해진다. 국가가 국민이라고 답하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 이것은 단지 영화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씨네 21>에 실렸던 이 영화 <변호인>에 대한 정한석의 글은 노무현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왜 그것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정한석은 말한다. "<26년>과 <그때 그사람들>은 저들이 반드시 전두환과 박정희라는 인물 자체로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변호인>은 영화 안에는 송우석이 있고 그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요한 건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안의 인물과 바깥의 인물.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줄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보는 이가 알아서 조절하도록 떠넘긴다(예를 들어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허구입니다."라는 식의 상당히 모호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그 간극을 극도로 줄여 현실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로 응축시킬 것이고, 누군가는 그 씁쓸함에 괴로워하며 소주 한 잔을 들이킬 것이고, 누군가는 비웃으면서 평점 1점의 테러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 간극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이고, 정한석의 말대로 이 영화의 운명이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다만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것이 이 씁쓸함에 맞서는 작은 내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간극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혹시 각성이라는 구조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언뜻 보면 변화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결국 각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노력하겠다라는 송우석의, 혹은 노무현의 태도이다. 그런데 어쩌면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 태도가 그의 비극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해 얼마간 포기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답은 어렵고, 짧은 글을 쓰겠다고 했으니 이제 글을 끝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저 마지막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변해버린 자기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환멸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환멸이든, 자신에 대한 환멸이든(그러므로 도리어 나는 영화의 처음을 생각한다. 선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방 앞에서 머뭇거리며 박카스를 하나 꺼내 꿀꺽 마시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나중에 그에게도 다른 의미에서의 박카스가 필요했다).


덧.
짧은 글로 대신하겠다,고 처음에 시작했는데, 필요이상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다. 뒷 부분은 그저 씁쓸함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아..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여두자면 이 영화가 올해 조금만 더 빨리 개봉했더라면 상당수 영화제의 남우주연상도 어쩔 수 없이 또 송강호에게 줘야만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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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2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설적이게도....일배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의 무지막지한 별점테러가 이 영화를 살려주는 역작용을 하고 있어 보이더군요...^^

맥거핀 2013-12-20 13:55   좋아요 0 | URL
예전에도 말씀드린적이 있지만, 본 사람들이 그러는 거에 대해서는 전혀 뭐라고 할 마음이 없습니다만, 왜 안본 사람들이 그러는지..(뭐 보았다고 해도 '감성팔이'니 뭐니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지만요. 뭐 그 친구들에게 영화란 원래 감성을 파는 것이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먹겠죠.)

프레이야 2013-12-20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성에 대한 영화군요. 그분을 연상시키는 영화라 꼭 보자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잖아도 볼 생각이었지만 맥거핀님의 리뷰가 또 더욱 부추깁니다

맥거핀 2013-12-23 14:39   좋아요 0 | URL
누구의 이야기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영화 자체적으로도 그렇게 흠잡을 만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쯤 볼만한 영화인 것 같아요.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2013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본 코맥 맥카시의 작품은 겨우 3편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봤다는 말을 하기가 조금은 애매한 것이 소설로 읽은 것은 <로드> 한 편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카운슬러>는 영화로 봤다. 그럼에도 감히 코맥 맥카시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파악한 그의 세계는 어긋나 버린 공간에 놓인 자들의 세계이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공간에 불려나와 서있는 사람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세계, 혹은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세계를 본다. 예를 들어 그들은 <로드>에서는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이후의 세계 어느틈에 놓여져 있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보는 것이 더 좋았을 단발머리 사신 안톤 쉬거를 본다. 그것은 영화 <카운슬러>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카운슬러(마이클 패스벤더)가 보게 되는 세계는 그가 꿈에서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 끔찍한 평행우주다(이 영화 카운슬러는 이 두 가지를 평행하게 놓고 초반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전혀 섞일 수 없는 두 세계가 교차되며 영화가 전개된다. 이 무시무시한 대비. 예를 들어 영화의 중반부 총에 맞은 마약운반원이 트럭을 몰고 겨우 도착한 낡은 주유소. 마치 F1의 피트 스톱처럼 이루어지는 일사불란한 움직임. 어린아이가 포함된 그들은 도대체 이 일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 것인가). 그들은 그들의 실수이든, 혹은 다른 누구의 잘못이든, 혹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든 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간과 공간, 놓이지 말아야 할 곳에 놓인다. 아마도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시간과 공간.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죽는 것이 더 나은 시간과 공간이 있을까. 그러나 코맥 맥카시는 능히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자이다. 그것을 <카운슬러>는 냉혹하게 그려서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대사로서 가르쳐 주기도 한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그리고 우리는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에게 누군가가 <카운슬러>가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카운슬러>는 '카운슬링'을 시도하는 영화입니다,라고 답할 것 같다. 아니, <카운슬러>가 '카운슬링'을 하는 영화라니, 이거 무슨 허무개그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끊임없이 카운슬링을 이어붙이는 영화다(돌고도는 마약이나 누가 범인인가라는 문제는 그저 맥거핀이다). 한 인물은 어떤 상황에 대해 모르거나,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거나, 선택의 순간에 놓여져 있고, 다른 한 인물은 그에 대해 카운슬링을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영화는 중간중간 약간의 흐름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카운슬링의 시도들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인 카운슬러의 사업파트너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또다른 중개인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 같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다이아몬드를 파는 나이든 보석판매상, 혹은 성당의 신부, 혹은 위험한 골목에서 음식을 파는 사내 등등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카운슬링을 하거나 카운슬링을 받는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하고도 재미있어 보이는 사실은 가장 카운슬링을 할 것처럼 보이는 명칭도 카운슬러인 주인공(물론 카운슬러counselor는 변호사라는 뜻도 있다)은 사실상 한번도 카운슬링을 하지 않고, 받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카운슬링이 명백히 필요해 보이는 시점, 예를 들어 감옥에서 여죄수를 만났을 때나, 라이너가 말키나(카메론 디아즈)의 이상한 성적 취향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시시한 농담으로 일관하는데, 이 카운슬링의 부재는 결국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첫번째 카운슬링의 부재는 그를 결정적으로 놓이지 말아야 할 세계로 내몰았으며, 또한 그는 두번째에서는 라이너의 이야기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어야만 했다.)

 

 
어떤 것이 계속 이어질 때,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조금 쉬운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그것의 끝과 마지막을 보는 것이다. 가장 처음의 카운슬링과 마지막 카운슬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처음의 카운슬링은 다이아몬드를 파는 나이든 판매상의 카운슬링이다. 그가 얘기해준 좋은 다이아몬드를 고르는 법, 그것은 반짝거리는 부분보다도 흠집을 보는 방법이며, 그것은 명백히 경고이고, 동시에 영화의 나머지를 미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불길한 신탁으로 시작하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대략 짐작한다(동시에 그 다이아몬드 판매상은 이런 얘기도 했다. 다이아몬드는 죽음에 대한, 혹은 죽음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진 자는 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재산을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중국으로 떠난 말키나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경고의 카운슬링은 영화의 전반부의 카운슬링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새로 위험한 사업에 뛰어드려는 카운슬러에게 라이너도 경고하고, 웨스트레이는 보다 강도높게 경고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카운슬러는 그것을 거의 귓등으로 흘려듣고, 이것은 영화의 뒷부분을 익히 예상하게 만든다. 그 경고는 카운슬러에게만 닥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말키나는 카운슬러의 약혼녀 로라(페넬로페 크루즈)에게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짜리인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경고의 의미처럼 보인다. 그것을 네가 가지고 있는 의미 혹은, 그것을 감수하기 위해서 그의 약혼남이 뛰어든, 혹은 버린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불쌍한 로라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결국 그의 대가를 치른다. 물론 그녀가 치러야 하는 대가보다 엄청나게 큰 대가였지만.

 

즉 우리는 흔히 카운슬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주로 선택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선택할까, 혹은 저것을 선택할까 하는 갈림길. 그러나 영화가 이야기해주는 것은 사실 이 카운슬링을 받는 순간은 선택의 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택의 갈림길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쳐왔고, 듣게 되는 것은 그것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선택은 어떤 행위(바로 이 카운슬링)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빌어먹을 카운슬러가 아니라 바로 나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것은 다른 세계라는 점, 다시 말해서 영화 속 말대로 실수를 한 세계와 실수를 되돌리려고 하는 세계는 이미 다른 세계라는 점 말이다(그리고 물론 그 실수가 거의 회복된다고 해도 그것은 또다른 '다른 세계'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모든 카운슬링은 실패한다. 결정이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제시되는 경고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위에서 <카운슬러>가 카운슬링을 '시도'하는 영화라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즉 영화 <카운슬러>는 카운슬링을 계속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영화다. 카운슬러는 다이아몬드 판매상에게 경고를 들었지만 흠집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라이너와 웨스트레이에게 경고를 받았지만 사업에 뛰어들고, 라이너는 카운슬러에게 말키나의 이상한 성적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것을 안들은 걸로 해달라고 하며, 로라는 말키나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신부는 말키나의 고해성사, 즉 그녀에 대한 카운슬링을 포기하고 도망간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카운슬링을 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카운슬링의 실패를 보고자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카운슬링에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을 다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집에 앉아있는 카운슬러에게 술집의 주인은 카운슬링한다. 여기는 밤이 되면 나가면 총을 맞는 위험한 곳이니 조금 있다가 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카운슬링은 역시 실패하고, 카운슬러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기어이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나 어쩌면 총을 맞기를 애타게 바랬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총알이 쏟아지는 무서운 공간이 아니라, 총기에 희생당한 소녀들을 추모하는 집회의 현장이다. 이것은 그가 보고 싶지 않았던, 혹은 보지 말았어야 할 어떤 세계일까, 아니면 어떤 연대의 공간, 혹은 그를 앞으로 다른 길로 이끌 수도 있는 희망의 신호일까. 어떤 절망이나 어떤 희망이나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섣부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또다른 '다른 세계'이며, 그가 다른 세계에서는 아마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을 세계임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즉 실패한 카운슬링이 인도하는 것은 그가 애타게 바랬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전혀 모르는, 그래도 여전히 어떤 가능성이 남아있는 살아있는 세계이다.

 

그것을 코맥 맥카시의 어떤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 말한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시간과 공간. 코맥 맥카시는 그것을 냉혹하게 그리며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그 냉혹함에서 어떤 아이러니와 미세한 의지를 조심스레 느낀다. 살고자 할 때는 죽음으로 가까이 보내지만, 그가 다시 기꺼이 죽고자 할 때 끝끝내 코맥 맥카시는 그를 살려둔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세계를 본다. 그것은 분명 그가 보고자 한 세계도 아니었고, 그가 모르는 것이 더 나았을 세계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적어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살아남아서 본 그 세계란 또다른 세계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세계가 어떨지는 그 누구도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다. 혹시 어쩌면 그것은 더 잔혹한 것일까. 영화의 후반부에 카운슬러가 들은 여자친구가 죽고 시인이 된 남자의 이야기처럼, 살아남아 시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 더 잔혹한 것일까. 그런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코맥 맥카시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그래도 시가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 낫지 않을까). 다만 이 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선택된 세계이다. 그는 그가 벌인 일에 대해서 살아남아서 어쨌든 마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서는 어찌되었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끝에 절망이 있든, 혹은 한줌도 안되는 희망이 있든.  카운슬링은 필요가 없다. 어차피 선택은 카운슬러가 아니라 내가 이미 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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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 서평단 활동도 이제 점점 끄트머리로 다가가는 것 같다. 책을 추천할 수 있는 기회도 이제 이번을 포함하여 단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 서평단의 경우에는 시절이 하 수상해서 그런지 몰라도, 상대적으로 정치-사회 쪽의 책들이 조금 많다. 그래도 명색이 '인문/사회/과학/예술 서평단'인데 늘 소외받는 분야의 책들이 아쉽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알라딘 측에서 인문/사회 분야와 과학/예술 분야의 분리에 대한 고려를 다시 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아마도 과학이나 예술 분야의 책들은 선정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과학/예술을 묶는 것이 조금은 의아해 보일 수도 있는데,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SF작가이자 과학자였던 아서 클라크의 말.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말도 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신비는 예술과 과학의 근본을 이루는 진정한 모태이다." 결국 극도의 과학과 극도의 예술은 인간에게 동일하게 신비의 세계를 열어준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는 과학과 예술 분야의 책을 추천을 하겠다는 말이다.

 

 

 

신경 과학의 철학 / 맥스웰 R. 베넷 외 / 사이언스북스

 

이름부터가 왠지 과학적인 맥스웰 교수와 해커 교수가 지은 이 <신경 과학의 철학>이라는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그리 만만치는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듯 하다. 책 소개에 따르자면 "인간의 심적 속성이 뇌의 부분이 아닌 인간 전체의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이 오묘한 질문을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을까? 마음이라는 것, 혹은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금 더 괜찮은 질문을 하면 좋겠지만, 최근에 읽은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때문에 이런 것밖에 생각이 안난다. 그 소설에는 교통사고에 따른 수술 후 살인을 하지 않게 된, 그러니까 무엇인가가 달라져 버린 살인마가 나온다. 그런 것이 가능할까? 즉 살인충동이라는 악이 우리 신체 어딘가, 혹은 뇌의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여 그를 선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 읽은 프로이트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는 우리 뇌 어딘가에서 진짜 테베로 돌아오는 중일까?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 / 에르빈 슈뢰딩거 / 필로소픽

 

만만치 않기로는 이 책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듯 하다. 양자역학의 사고실험 중의 하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이 물리학자는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이 책에서 서구 과학의 유물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인도 철학인 베탄다 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의식, 자아, 실재, 윤리 등의 문제를 고찰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의 양자역학에 대한 연구와 이 책의 관점을 연결하려는 해석을 시도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연결을 지양하며 할 수 있는 말만 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역시 과학자다운 태도가 아닐까.

 

 

  

할리우드 사이언스 / 김명진 / 사이언스북스

 

만만치 않아보이는 책을 두 권 골랐으니 만만해 보이는 책으로 균형을 맞춰야겠다. 위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은 즉각적으로 영화를 떠올리도록 만들기도 하는데, 때로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집약된 영화는 거의 일종의 마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을 저렴하게 우주로 모셨던 <그래비티>와 같은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일텐데, 현대 과학기술은 영화의 많은 부분의 자양분이 되어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했으며, 또한 도리어 반대로 영화적 상상력이 미래 과학기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렇게 고도의 과학은 예술이 되고, 또한 고도의 예술은 다시 과학에 빚을 갚는다.

 

 

 

 

 



 

 

 

 

 

 


 

명작순례 / 유홍준 / 눌와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2 / 김봉렬(글), 관조스님(사진) / 컬처그라퍼

그래서 마지막 두 권은 고도의 예술품이자, 어떻게 보면 당대의 과학기술이 집약되었다고 볼 수 있는 옛 미술품들, 그리고 전통건축에 대한 책으로 꼽아봤다. 물론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예술가의 상상력을 통해 탄생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당대의 명작들이 지금까지 남아있고, 우리의 눈에까지 전달될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최고의 과학기술에 빚진 바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전해진 과거의 상상력은 다시 현재의 과학, 현재의 기술에 영향을 미친다...
 
는 끼워맞추기고, 솔직히 말해서 한 해의 마무리를 좋은 것들을 보며 차분하게 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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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5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5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12-05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인문/사회 분야에 예술/대중문화를 넣으면서 너무 지나치게 범위가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긴 하더라구요.. 이렇게 합쳐지면서 예술분야는 그다지 선택이 안되고 있기도 하고.. 과학 분야라고 별반 다른 상황도 아니구...

맥거핀 2013-12-05 19:2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분리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그러겠죠..근데. 다음번에 혹시 서평단을 하게 되면 과학책 좋아하는 분들 모아서 사전작당이라도 해야...라고 해봤자 어차피 담당자님 마음..^^

근데 진짜 범위가 넓기는 좀 넓어요. 걸면 걸리니까 좋은 점도 있지만.

마립간 2013-12-0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기 서평단부터 수학/과학의 분야의 독립을 담당자님에게 줄기차게 부탁하는데, 그리고 알라딘에서 어느 정도의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수학/과학 책은 서평단 효과가 적은 지 출판사에서 도서 제공이 힘들다고 하더군요.

맥거핀 2013-12-05 19:29   좋아요 0 | URL
아..마립간님이 선구자셨구나. 또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뭐 아무튼 안된다면 할 수 없는거죠. 서평단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라딘과 출판사 측의 나름의 필요라는 부분도 고려안할 수 없는 거니까요. 아무 효과도 없는데 유지하라,고 할 수 만은 없는 거겠죠. 조금 더 책을 읽고 싶게 하는 리뷰를 써서 판매신장 효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은 많이 모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