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2disc)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의 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首,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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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본 영화라는 이유로 다시보기가 안되고 있는 넘버원의 영화죠. 저는 데이트하면서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영화가 그렇고, 동생이랑은 극장 안가고 국밥집이나 갈비집으로만. 누나랑 보셨다기에!

제동생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는데 그다지 계보는 없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얘기하는거보면 또 계보가 있는것 같고. 걔는 좋으면 그냥 좋은거더라고요. 많이 보면 확실히 보는 눈은 높아지는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통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서 뭐가 좋았니라고 물으면 컷이나 씬을 얘기못하고, 걔는 잘하더라고요. 맥거핀님처럼.

저는 영화에서 늘 부조리를 찾아서 그걸 현실에 대비시키려는 버릇이 있고, 그 부조리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하는 직업을 갖고싶었던 것 같아요. 예를들면, 늘 말했던 형사,판사,국제공무원같은. 자유를 엄청 갈구하면서 내 자유 대신 남의 자유를 찾아주고싶은 이 부조리한 마음가짐은 또 뭐란 말입니까!

1등댓글안쓰려고 했건만 :)

맥거핀 2013-04-30 14:25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나무를 보건, 숲을 보건 좋은 법이죠. 영화라는 건 사실 대부분 영화 그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기억남는 건 다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날 영화를 보고난 후 주고받은 얘기라던가, 보고나와서 먹었던 음식의 맛이라던가, 짜증나게 했던 뒷자리 사람이라던가..뭐 그런거요. 그런 것과 나중에 영화의 내용과 짬뽕되어 그 총체로 기억하는 거죠. 집에서 보는 영화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무엇을 보고나면 기억에 잘 안남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최근 집에서 DVD로 다시 봤지만요.)

근데 이 영화는 데이트용 영화로는 아주 최악에 가까운데 말이죠..좀 다른 얘긴데 예전에 설날인가, 추석 때 온가족이 모여 앉아있는데 특선영화라고 <올드보이>를 하더군요. 저는 편성담당자 저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싶었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영화라고 기대감을 가지고 보시기에 잠자코 있었죠. 역시나 한 중반부 넘어갈 때쯤에 어른들은 이거 뭐 이상한 영화네..그러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만 남아서 끝까지 봤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ㅋ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하면 조리가 되죠. 아이리시스님 우리 1등 댓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멋진데요. 전혀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긁어주셨습니다.
전 그동안 맥거핀 님을 여성ㅇ라고 생각하다가 누나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본지 오래도어서 가물가물하네요...ㅎㅎ. ㅎ여튼 박찬욱의 최고걸작은 늘 복수는 나의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4-30 14:3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들이야말로 저도 읽으면서 가끔 오호..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좋더군요.

아..근데요.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성이라는 법은 없지요(옛날에 여성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남성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물론 여자도 군복무를 할 수 있고요. ㅋ

Mephistopheles 2013-04-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상황을 묘사해주는 장면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의 전기고문에 소변배출하는 배두나의 모습이나 마지막 송강호가 신하균을 죽인 후 강가(?)에 널브러진 신하균의 옷과 피범벅이 된 그리 크지않은 보따리 묶음(토막)등등은 뭐랄까 직접적인 고어의 느낌보다 강렬했어요.

맥거핀 2013-04-30 14: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올드보이>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죠.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졸라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박찬욱 감독이 뭐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류의 감독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들에서 상상이나 뉘앙스로 조금 더 잔인하게 느끼게 하는 면이 있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나고,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넙치 2013-04-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또렷이 남은 건 그 영화 개봉 당시 분위기, 그리고 영화를 봤던 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는 것 밖에 없네요.
맥거핀님 글 읽고 난 후 제가 썼던 리뷰를 봐도 생경하기만..;;;

맥거핀 2013-04-30 14:36   좋아요 0 | URL
앞으로 어떤 화양연화가 또 올지 모르죠.^^ 예전에 쓰셨다는 리뷰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예전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과 이번에 새로본 영화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아무래도 영화라는 건 보는 이가 나머지 퍼즐조각을 맞추는 모양입니다.

Shining 2013-04-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읽었는데 댓글은 이제 남겨요. 저는 가끔 실은 종종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저랑 맥거핀님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사고의 회로도가 다르다는 느낌? 뭔가를 바라보는 투영도나 설계도, 농도, 질감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요.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맥거핀님의 글을 읽는게 즐겁다가 좌절하고 좌절하다 자극받고. 네, 그래서, 좋다구요 :)

저도 가끔 저 영화 짱이야, 라면서 혼자 TV 차지하고 같이 영화 보다가 가족들이 대개 짜증내거나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이건 슬픈 이야기).

맥거핀 2013-05-02 01:44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말입니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얘기한 것 같은데, 저도 Shining님의 어떤 글을 보면서 이건 못써, 이건 절대 나는 이렇게는 쓸 수 없어 하는 글들이 있어요. 그건 좋은 거겠죠. 네..아마도 좋은 걸 겁니다.

저도 가족들과는 거의 영화를 같이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TV영화들도 거의 같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보다가 민망해질 것 같은 영화는 알아서 도망가구요. 뭐 특히 박찬욱 감독 영화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같이 관람은 안하는 것이...

cyrus 2013-04-3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영화 장면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수월하게 잘 풀어내시는거 같아요. 저도 가끔 영화 한 편 보고나서 나름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고 싶은데 책 읽고 글 쓰는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책은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화 서평은 영화 한 편을 한 번 봤다고해서 쓰는게 아니라 여러 편 보다가 그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맥거핀님은 영화 서평을 이렇게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맥거핀 2013-05-02 0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을 영화글에다가 그냥 씁니다. 그러고 마치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구라를..^^

근데 DVD로 영화를 보다보니까 조금 달라지는 면이 있더군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DVD 같은 경우에는 보다가 끊고 자꾸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싶어져요. 그 충동을 참는 게 힘듭니다만, 생각해보니 왜 참아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우끼 2016-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니, 정말 멋지네요.. 맥거핀님 글 잘쓰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리뷰를 쓰시는 데 쓰인 시간과 노고를 가늠해보니.. 이 글이 더 값지게 보입니다. 복수라는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부분이라든가, 두 머리에 대한 우화와 연결지은 류와 동진의 관계,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등가교환 신화에 대한 지적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감독의 작위적인 메세지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군요.. 인간의 괴물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감독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괴물을 비판하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괴물로 살고 싶지 않은데, 겨우 허덕이며 위선을 베푸는 게 전부인 요즘, 어떤 삶을 살아야 괴물을 마주하면서도, 괴물로 남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지점에서, 이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우끼님. 댓글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죠? 제 글 읽어주시는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단 칭찬 먼저 감사드리구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라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영화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죠. 아무래도 영화가 좋아야(물론 책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글은 물론 그 중에 일부만 다룬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분명히 다층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 느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아마도 대부분 자신들만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매일 또 지면서 말이죠. 예전에 누군가 한 말대로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는 법이니...
 
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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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의 소설들은 늘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사실적인 허구, 허구적인 사실, 완전한 허구, 사실들의 주석, 사실들의 허구적인 주석, 허구들의 사실적인 주석, 각종 기호들, 특정의 양식, 원본과 위본,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생몰연대가 불확실한 인물들, 사물들의 연대기, 떠도는 풍문들 등등. 우리는 그의 소설들에서 늘 이것들을 구별해낼 수 없었고, 사실들과 허구들과 기호들과 이야기들과 풍문들과 진짜와 가짜, 그 사이 어디엔가에서 늘 길을 잃다가 에코가 선심쓰듯 마련해준 출구로 겨우 기어나오곤 했다. 사실 그곳이 제대로된 출구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분명 잘못된 출구이거나 혹은 사실은 입구였을 것이다.) 즉 에코의 소설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둘러싼 다른 어떤 것들이 존재했고, 그 존재를 파악하기가 힘든 것은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기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서 상당수 비롯된다. 기호학은 상징이나 도상, 지표와 같은 것들의 의미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보다, 그 기호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호학은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 기호체계 자체의 규약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어떤 것보다 기호 자체의 작동이 더 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코의 소설에서 그 이야기 자체는 짐짓 어디에선가 발견된 원본의 일부라던가, 혹은 필사본이라던가, 숨겨진 내부의 문건들이라는 식의 형태를 띠었고, 그것은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도 마찬가지이다.

<프라하의 묘지>는 크게 세 가지의 문건이 뒤섞여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거짓과 위조를 일삼으며 거짓된 문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살아가는 공증인 시모니니가 기억을 잃은 채로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적어내려가는 일기가 그 하나이고, 그의 가까이에서 살면서 그 시모니니의 일기를 읽으며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첨부하는 역시 기억을 잃어버린 달라 피콜라 신부의 기록이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 두 개의 문건을 후대에 입수한 어느 이름모를 화자(물론 에코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가 재구성한 기록이 그 하나이다. 그런데 에코는 이 세 개의 문건을 분리된 플롯으로 구성하지 않고, 이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뒤섞는 형태로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또 각각의 분절적인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19세기 신문 연재소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또한 여기에 에코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여 19세기 대중소설의 문체를 모방함으로써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더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플롯이 아닌 스토리로 보면 이 <프라하의 묘지>는 공증인 시모니니의 거짓와 사기, 조작으로 점철된 일대기이며, 동시에 반(反)유대주의 문서인 '프로토콜'의 탄생 과정인데, 여기에서 에코는 이 스토리와 이 고유의 형식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소설을 단지 형식의 과시 이상의 것으로 이끌고 있다.

즉 에코는 이 소설에서 '프로토콜'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 이 반유대주의로 점철된 문서가 단지 조작과 거짓과 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내기 위해,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 자체를 일종의 거짓 문서, 위작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를 일종의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나의 문서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허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그 문서를 둘러싼 모든 것, 그러니까 그 문서를 만들어낸 시모니니라는 저자의 모든 것을 허구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이다. 즉 에코는 이 내용이 거짓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이 거짓이다'라고 독자에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거짓되게 만들어냄으로써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 '이것이 거짓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디센던트>에서 초반부에 '하와이를 단지 휴양지로만 여기지 말라, 여기에도 다 나름의 삶이 있다'는 주인공의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하와이를 휴양지처럼 '보이게' 찍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과 그 보여주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그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이것이 소설의 경우라면 어떨까.)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 자체가 거짓으로 보이기는 하되, 이것은 완전한 허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문서 '프로토콜'은 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아우슈비츠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이 책 26장의 제목이기도 한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실제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I, 11)에서 이렇게 썼다. "그 민족의 삶이 끊임없는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매주 징징거리며 주장하기를, 그 문서가 허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문서가 진짜라는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 그 책이 온 국민의 공동 자산이 될 때에는 유대 민족의 위험이 제거된 것으로 여겨도 되리라." - p.766) 그리고 어떤 것이 완전한 허구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것(예를 들어 제노사이드)마저도 마치 허구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코는 시모니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을 실제의 인물들로 배치하고,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 즉 예로 들어 가리발디의 원정이라던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등에 이 시모니니를 깊숙하게 개입시킨다. 즉 실제의 사건 속에 단 하나의 거짓 인물을 투입함으로써 그의 거짓이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절하게 효과를 거두며, 그것은 물론 이런 사실적인 허구, 혹은 허구적인 사실이 에코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 허구처럼 보이는 사실, 혹은 사실처럼 보이는 허구, 즉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것은 에코의 장기일 뿐더러 동시에 이 주인공 시모니니의 장기이다. 시모니니는 위조된 문서를 만들어 내는 몇 가지의 원칙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떤 자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려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그가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 적당한 적을 설정하여, 읽는 이의 분노를 그것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 혹은 한번에 한가지에 대해서만 혐오감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떤 읽는 이의 흥미 혹은 재미를 돋우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가 가지는 전략이다. 이것은 소설의 초반부부터 전개되는데, 주인공 시모니니는 프랑스인, 유대인, 독일인, 러시아인, 공화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사제들, 여자들 등 자신 외의 거의 모든 집단들에게 혐오감을 내비치며, 그들 모두를 번갈아 적당한 적으로 등장시키면서 어떤 분노가 단계적으로 옮아가도록 한다. 동시에 그가 적으로 설정하는 음모나 꺼림칙한 것들로 가득한 집단은 그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프리메이슨회나 예수회, 유대인들 등에 대한 어떤 것에서 기초한다. 즉 에코는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서 시모니니가 구사하는 위조의 전략을 이미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에코가 원하는 것은 이 소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한 권의 위조된 문서이며, 거짓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설은 읽는이가 주인공에 동화되어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와 함께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이 소설은 반대로 주인공을 혐오하게 하거나, 그가 벌인 거짓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치에 닿을 수 없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 에코는 몇 가지의 전략을 쓰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플롯을 복잡하게 구성하거나, 사건을 분절시키거나 하는 것들도 그러하거니와 죽었던 인물, 혹은 죽었다고 믿어졌던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거나, 매번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 등도 그러하다. 즉 이 소설의 줄거리가 아무리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 에코가 (의도한 바대로) 그것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킬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 시모니니의 미식의, 아니 식탐의 기록을 나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먹는 음식의 아주 상세한 레시피를 정밀하게 기록하는 것은 독자의 식욕을 돋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식욕을 멈추게 하여 안 그래도 정나미 떨어지는 모두까기인형 시모니니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인 시모니니의 탐욕한 모습을 극대화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음식문화에 담긴 어떤 근대적인 탐욕을 밝히는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프라하의 묘지> 마지막 장을 덮고 우리는 묻는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기원을 파헤친다고 들려준 이 이야기 자체가 도리어 알 수 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 거의 대부분 역시 다른 소설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들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을 수 밖에. 그렇다면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은 또 무엇에서 기원한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아마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늘 그 반대에 위치한 질문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거짓의 메커니즘이 실제와 같이 굴러간다고 해도, 다시 말해서 그 메커니즘이 진실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그 메커니즘의 재료가 거짓인 한 그 끝에는 결국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 某 님의 마음속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某 님으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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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내 선물이야 내 선물.. 뿌듯.. 희미하고 뿌연 거짓의 향기는 책을 뒤집어 다시 한 번 읽더라도 여전히 맡아지는 거겠죠?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믿지 말아야 하지,라니 완전히 꿰뚫는 얘기예요. 써보고 싶었는데, 역시, 써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럭저럭 유럽사나 뒤적거리다 말겠죠. 모처럼 아는 기분으로 흡족하게 읽고 추천 눌렀는데 추천했다고 하네요. 생각해보니 제가 1등으로 했어요. 기억이 나요.

음식 나오는 것도 짱나는데 레시피가 자주 나올 때는 토나올 것 같았어요. 저는 음식얘기 별로 안 좋아해요. 탐구심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음식은 절대 아니예요. 햄이랑 맛살, 소시지 못 먹어요ㅠ.ㅠ

그럼 이쯤에서 재미난 거 한 번 해봐요, 맥거핀님.

질문 1.
<프라하의 묘지> 읽고나서 떠오른 영화는?

질문 2.
에코씨 책 중에 뭐가 제일 좋았고, 뭐가 제일 안 좋았어요?

질문 3.
지금 읽고있는 책은요? 몇 페이지?

맥거핀 2013-03-20 14:29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안계시면 추천 눌러줄 분도, 댓글 달아줄 분도 없군요.^^ (사실은요, 위에 추천 하나는 제가 눌렀음.ㅋ) 뭔가 책을 읽었다는 확인을 해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알라딘인데 책 리뷰도 좀 쓰고 그래야지 싶어서요. 아이리시스님이 풀어주셔도 재밌는 얘기 나올 것 같은데, 뭐 뒤적거리신 유럽사에 대해 알게 되는것도 좋구요.

저도 사실 음식, 미식 이런 데는 별 관심이 없어서요..그저 안굶을 정도로만 먹자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진짜 신기한 건 사람들이 먹방을 본다는 것, 그것도 심지어는 돈까지 내면서 말이죠. 햄이랑 맛살, 소시지를 못먹다니 저랑 완전히 반대되는 입맛입니다요. (저는 인스턴트 싸구려 입맛)

답변 1.
지금 막 생각해보니 얼마전에 본 <파우스트>가 떠오릅니다. 영화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지만요. (아니..'전혀'라고 할 수 있을까?) 쓰자 하면서 아직 버려둔 <파우스트> 메모가 생각나는군요.

답변 2.
아무래도 처음 본 <장미의 이름>이 제일 좋았구요. 점점 안좋아지다가, 이번 책에서 다시 좀 살아나는듯?

답변 3.
지금 가방에 들어있는 책은 세르쥬 다네의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라는 책입니다. 책이 작아서 왔다갔다하면서 읽기 좋겠군, 생각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지하철에서 읽을 책은 아닌듯..

Shining 2013-03-2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글은 읽었는데 미처 댓글은 못 남겼어요ㅠ 저도 이 책 읽어야하는데(고로 아직도 못 읽었는데;) 글도 써야하는데 맥거핀님이 먼저 이런 리뷰 쓰지 마세요_- 대체 전 어떻게 하라는겁니까ㅠㅠ(엄살 아닙니다요... 진짜로 막막해요, 이 리뷰. 하긴 이 리뷰 뿐 아니라 요샌 글 쓰는 자체가 무섭네요;)

아, 바로 위에 있어서 읽어버렸는데(하하)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사셨군요. 어떤가요, 이 책? 궁금한데 근처 서점엔 없어서 실물도 못 봤거든요; 간단한 감상이라도...+_+

맥거핀 2013-03-22 15:32   좋아요 0 | URL
쓰기만 하시면 제가 열심히 읽겠습니다.^^ 여기 팬이 한 명 있어요. 그러니 쓰십시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는 말랑말랑한 제목과 달리 읽으면서 계속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렇게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은 책인데요. 그래도 딱딱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영화같은 느낌같은, 삶과 영화가 결합된 한 인물의 전기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여기 있는 작품 중에 본 게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만요. 오늘 읽은 한 대목을 옮기는 게 책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더 나으실지도.. (이 책 전체적으로 번역체가 이상하기는 하지만요.)

"우리는 현재만을 기록할 수 있다. 그 현재는 볼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의 관념, 신화 그리고 꿈속에서 포착되어질 때 놀라운 방식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미디어의 정보속에 있는 것은 병리적인 것이 된다. 그 병리는 동시성이란 엄밀히 말해 더 이상 영화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미지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채널을 돌리는 현상과 관련된 것이란 사실에서 온다. 즉 시간의 노동, 인간들의 노동이라는 관념이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가 가진 사물들을 길게 늘어뜨리거나 가혹화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커트하는 힘이 마치 '대출중'인 것같고 결국 사회 공통의 잡탕 그릇에 들어가 버려 영화에서 점차적으로 제거되어 지듯이 이루어진 것과 같다."


2013-03-24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5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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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한국에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아니라, 한국인 '박노자'가 된 그의 이력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 직격으로 쏟아내는 비판들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박노자는 항상 우리에게 고정관념을 탈피할 것을, 우리를 둘러싼 몇 겹의 사회적 장벽들을 뛰어넘어 사고하기를 강변한다. 그의 발언들은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제도의 문제, 지식인 사회의 문제, 스포츠나 생활 습관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국의 전 사회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끔 지나치다 싶은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한국 사회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이며, 의견이 존중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진정한 외부자의 시선을 자처하며,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그보다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의 주종목인 고대사에서 '다르게 보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로, 그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주간 <한겨레 21>에 꾸준히 연재해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라는 칼럼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이 칼럼들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이 제목에 농축되어 있다. 즉,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대사에 대한 여러 지식들에 의문을 가져보자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가져온 고대사에 대한 어떤 인식들을 이번에 '거꾸로 보는' 작업들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간 다른 시각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보자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기존의 주류 학계의 사관, 혹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들을 기반으로 한 논의들이 그렇다. 그러나 박노자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국민의 상(像)을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상(像)은 '우리들의 위대성' 위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p. 10)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박노자의 이런 논의가 어떤 재야사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공격하고, 올바름을 가장한 '우리 역사 깎아내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노자의 논의는 그보다는 어떤 제3의 시각을 향해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해석의 시각이 미래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계급 중심적인 시각이 반영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표출하여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각은 우리의 고대사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팽창적 야망이 아닌 다수 한반도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에 맞는 고대사를 지향한다. (중략)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한 마디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고대 국가들의 위대성'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벌어지는 물적, 인적, 사상적 흐름, 국가가 아닌 민중을 비롯한 한반도 주민의 다양한 계층, 집단이 서술 대상이다. (p. 13-15)

 

우리가 가진 고대사에 대한 기존의 지식들을 깨뜨리기 위해 박노자는 계속 묻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1부에서는 "우리는 만주의 주인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따라서 고조선에 의한 만주의 영토적 지배는 일종의 오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낙랑 및 한사군을 일종의 침략 세력으로 보거나, 고구려를 강대한 제국으로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2부에서는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시각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며 당과 발해 등의 주변국가까지 포괄하여 전체 구도를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이러한 박노자의 시각으로 보면 통일 신라 역시도 단일민족이나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3부에서는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임나 일본부설이나, 왜와 백제의 관계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식민주의적 관점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른 시각, 즉 후대의 역사로 비롯된 일종의 콤플렉스적 시각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 당시의 맥락을 살펴볼 것을 주문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고대의 성(性)문화나 민중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글들을 통하여, 기존의 고대국가를 살펴보는 시선들이 후대의 시각들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것임을 밝히면서, 고대 국가가 단순히 종교와 전제정치의 억압만이 존재하던 곳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정치적 발언이 허용되던 활력의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위의 내용들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그것은 고대사 연구, 그 자체에 대한 박노자의 시각을 생각해봄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고대사 연구란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역사쓰기는 늘 취사선택의 과정이고, 늘 서술 주체의 시각이 개입하게 돼 있다"라고 말하며, 머리말을 통해 자신이 고대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며,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본문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이러한 방향으로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고대사 논의들은 그렇지 않다. 그 논의들은 자신들의 '해석의 시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숨기며, 마치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확한 사실이란, 사실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고대사의 많은 자료들은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져 있으며, 혹여 베일을 벗었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후대의 다른 시각들이 새롭게 덧붙여진 경우들이 많다. 또한 그 당시의 명확한 사실을 기술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시각에서 기술했는가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란 무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기술한 몇 개의 글들만이 1000년후의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그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혹자는 촛불 시위를 예로 들며,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이었다고 할 것이며, 혹자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들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였다고 밝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박노자처럼 조심스럽게, 또한 자신의 해석 의도를 밝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박노자 역시 대다수의 고대사학자들처럼 일부의 자료들을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노자 글들은 앞에서도 논의하였지만,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최근 며칠간의 아시안게임으로 촉발된 대만의 반한 시위와 그에 대한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경멸적인 대응을 보며, 이러한 것의 이면에 들어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들에는 분명히 그간 우리의 역사교육이 초래한 일말의 사고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의 민족적 자긍심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역사교육을 받아온 대다수들이(우리 및 대만 모두) 그런 일방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을 도리란 없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박노자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적어도 당신이 그런 대만의 시위에 맞서서, 우리도 대만의 국기를 불태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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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가 사라진다길래 예전에 리브로에 작성한 리뷰를 가져옴.

처음 작성일: 20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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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울나라에 대한 예시를 논거로 하니, 확 다가오네요..

맥거핀 2012-12-19 18:44   좋아요 0 | URL
박노자님 시각이 비판을 많이 받는 것으로도 알고 있는데 아무튼 책은 재미있었던 것 같은...(2년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ㅠ.ㅠ)
 
코쿤벨즈(Cocoon Bells) - EP 2집 Healing Of The Mind
코쿤벨즈 (Cocoon Bells) 노래 / 신나라뮤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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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미끄러지며, 한없이 부스러져 손끝으로 조금씩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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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1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라디오에서 한 음악을 처음듣고 '어머 이게 뭐야' 싶어서 바로 음반매장으로 가 묻지마 구입했다. 그게 HARU의 Really라는 앨범. 그 후로 도대체 활동을 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구나. 목소리는 둥글둥글해졌고, 때로는 평범한 카페뮤직 같지만, 나이들었나봐, 이런게 좋네.
 
[얽힘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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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 현상과 그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렇다면, 양자물리학, 양자얽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그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라는 점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그 '이해못함' 마저도 이해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즉 '양자물리학이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했는지의 여부마저도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마저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만약 양자론에 대해 어지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 누구보다도 가깝게 다가간 아인슈타인마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발표한 논문(EPR)에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마저도 양자역학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도, 그러므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그가 이런 견해를 밝히게 해준 '양자 얽힘' 현상은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존 벨과 일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면 그것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는 그간 우리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믿어졌던 일반적인 원칙, 고전물리학의 법칙, 또는 만물의 근본적인 작동 원칙에 반하는 몇몇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일차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나 이 양자물리학은 이 상대성이론의 몇몇 원칙들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의 세계, 그러니까 극소의 세계, 에너지와 물질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조각인 양자의 성질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무엇인가 다른 일들, 우리가 그간의 상식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그 큰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의 '얽힘' 현상이다. '얽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둘 이상의 물질이나 빛이 떨어져 있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학의 토대가 되었던 '국소적 인과성'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관찰과 무관한 실재'도 아니다.

 

즉 양자역학 이전의 물리학은 국소적인 인과성이나 관찰과 분리된 실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성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국소적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간의 믿음이다. 즉 한 물체는 오직 국소적인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한정된 시공간에서의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 영향은 빛의 속력보다 빠를 수 없다(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므로).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면 그의 음파가 그의 성대에서 출발해 우리의 고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며, 그 속도는 당연히 빛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러나 양자 얽힘 현상에서는 두 광자가 아무리 먼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비국소성), 어떤 동시적인 운동방식을 보인다. 물론 이 동시성을 어떤 무선통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광자가 자신이 운동하기 전 '재빨리' 다른 광자에게 어떤 것(그러니까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양자 포텐셜'과 같은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재빨리'는 빛보다 훨씬 빠른 '재빠름'이어야만 한다. 겨우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물리적 신호로는 그런 현상(얽힘 현상의 동시성)을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다른 계에 있는 두 광자라도 한 번 얽히게 되면, 그 얽힘이 아무리 먼거리에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길에서 만난 한 사람과 우연히 옷깃이 한번 스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동일한 운동패턴, 혹은 동일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

 

더군다나 이는 관찰과 분리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리학은 아니 우리의 세계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아인슈타인의 말)를 가정하고 이루어진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물리학 때문이든 다른 어떤 것 때문이든), 그것은 관찰자의 외부에 분리된 실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얽힘에서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한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가 없으며(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것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 확률이란 측정의 확률, 관찰자의 확률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비분리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오직 관찰자가 보았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파동함수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섞여 있거나 스며들어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있다고 할 것이다.(p.294)" 즉 고양이의 생사는 관찰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적 실체들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웃긴 소리인가?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역시 텔레파시?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p.30)"

 

그러나 아무튼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이 터무니없는 현상들이 실제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사고실험(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에서 나타나던 것들이 존 벨이나 클라우저, 혼 등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세계로 넘어오며, 그러한 얽힘 현상은 실제로 실험실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작동원리의 여러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예를 들어 그 의문 중의 하나는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얽힘 현상이 왜 그보다 큰 물질, 그러니까 양자들이 합쳐진 보다 큰 물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등등이다. 차일링거 등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떤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같이)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고전물리학은 물론이고, 상대성이론마저도 아주아주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중고생들에게도 그것의 본질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폴 디랙의 견해로는, 그러므로 현재는 양자물리학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가 이해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기이며(1급 난이도 문제- 현재로선 해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문제), 얽힘 현상의 구성에 큰 기여를 한 존 벨마저도 이러한 것을 1964년 마이클 나우엔버그와 공동으로 쓴 논문 <양자역학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양자역학적 설명은 대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이론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들과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그 이론의 최후 운명은 그 내부 구조에 명백히 잠재해 있다.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540)"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단지 어렵고 불완전할 뿐인, 언젠가 다른 것(예를 들어 초끈이론)으로 대체될 한정적인 이론일 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모든 물리학은 과거의 이론에서 얻어진 어떤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로 발전해나가며, 그것이 과거의 이론을 모두 뒤집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과거의 그 이론 없이는 탄생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어떤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책의 각 장은 특정의 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실제의 대화, 실제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 수많은 대화들의 장면이 중첩되어 이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거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장면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미시적인 장면들은 모두 이 거시계 속에서 '얽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 물리학자들은 책 속에서 모두 각자 나름의 역사를 부여받고 있으며(이 책은 모든 학자들에 대해 '그들이 왜 양자물리학에 빠져들게 되었는가'의 관점으로 그들의 약사(略史)를 기술한다), 이들은 양자물리학에 한 번 얽히게 된 이후에는 평생 그 양자물리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즉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에 한 번 얽힌 이후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미스테리에 대해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비국소적인 개체로서 얽혀 있었다. 이를 보다 더 큰 관점으로 보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과도 얽혀 있다. 즉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가 존재할 것이라 가정할 수 없다.

 

(책에서 한편으로 실제적인 양자물리학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예들은 양자컴퓨터, 양자를 이용한 암호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파인먼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컴퓨터의 가치 또한 그것의 어떤 실생활에서의 목적보다는(양자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산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였다. "파인먼에게 있어서 양자 컴퓨터가 지닌 위대한 의미는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킴으로써 벨이 제시한 서로 관련된 입자들에게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p.533)" 즉 이것은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양자론의 작동방식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즉 물리학자들이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난점을 '실제로 그것이 획기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방식'을 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적인) 귀납적인 믿음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하고 끝내고 싶다. 양자컴퓨터나 양자를 이용한 암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론, 양자물리학의 가치는 무한하다. 양자컴퓨터나 양자 암호 등의 발전 정도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19세기의 이론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p.536)),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가 루이자 길더는 마지막에 이를 일종의 유머로서 살짝 암시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양자론의 비실재성과 인간중심성(관찰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는 물리학자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가 된 후에 어머니에게 숨겨진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카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이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1년 전에 처음으로 얽힘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 그 결과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50)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교류도 없이 오랜 기간 자라난 청년과 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에 그것도 양자물리학에 헌신한다는 것, 이 미스테리에 담긴 것이야말로 얽힘 현상의 (보다 큰 물질에 있어서의) 재현이 아닌가. 얽힘 현상은,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언젠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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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0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허. 드디어 서평단 마지막 리뷰를 썼음.

아이리시스 2012-12-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허. 맥거핀님 드뎌 서평단 임무 마감.

맥거핀 2012-12-03 18:13   좋아요 0 | URL
아주 좋아요. 기말고사 마지막 레포트를 제출한 느낌이랄까. 아 근데 하나 남았음..

2012-12-03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2-03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자역학......이래서 저는 인문쪽 지원은 꿈도 안 꿔본 겁니다(흑흑).
인문, 이 아니잖아요............

맥거핀 2012-12-04 00:30   좋아요 0 | URL
하지만 저희 정식 명칭은 '인문/사회/과학/예술'이라는 사실! 그래도 저자가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반복해서 읽다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조금은 있다,고 애써 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