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1972년 2월 28일, 각종 테러와 범죄, 파괴활동방지법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연합적군의 최후의 생존자 5명 전원은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10일 동안 산장의 여주인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상은 드러난 듯이 보였으며, 이들에게는 긴 수형생활만이 남은 듯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숨겨진 나머지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은 경찰은 물론 전 일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사마 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균나이 23.3세의 일단의 젊은이들은 산속의 비밀 기지로 들어갔고, 그 숨겨진 공간에서 두 달 동안 총 31명의 연합적군 멤버 중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연쇄살인마라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죽음의 바이러스라도 퍼졌던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팩션이나, 김전일 소년의 사건기록부에나 등장할 법한 이 사건은 언론 및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아사마 산장에서의 진압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이는 최고 89.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건의 양상이 밝혀진 직후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퍼트리샤 스태인호프의 책 <적군파>는 이 사건을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 및 증언, 그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그간 쏟아져나온 각종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건의 미스테리 및 어떤 기이한 부분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가진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하나는 이것이 단지 그 사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나 르포 작가가 아니고,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요소, 그 사건의 어떤 구조적인 형태, 그 사건과 사회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사건 그 자체 못지 않게 그러한 부분들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적군이 벌인 이 아사마 산장에서의 농성과 내부 '숙청'은 좁게는 당대의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 및 폭력적 사회변혁 운동, 그리고 해외에서 벌인 요도호 그룹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일본적군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등의 거대한 테러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넓게는 일본의 현대사 전체와 일본인들의 어떤 정신적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요도호 그룹 및 일본적군, 그리고 연합적군, 적군파는 모두 일본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분파들이며- 이를 통칭하여 '적군파'라고도 한다 -, 그들은 각각 엄밀히 구분되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인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통합된 조직이며, 한편으로 저자는 이 통합의 과정이 상당부분 이 '숙청'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본격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연합적군의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책의 시작은 이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3개월 후에 일어난 오카모토 고조를 위시한 일본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과 오카모토 고조의 인터뷰이며,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합적군의 근원에 있는 적군파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책의 초반에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들의 어떤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내부논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연합적군의 '숙청'이라는 사건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덕은 책의 저자 퍼트리샤 스태인호프가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1972년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로부터 약 40여년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의 각계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소설 및 영화, 만화 등이 나왔다(와카마쓰 고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이나 야마모토 나오키의 만화 <레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사건의 주범격인 사카구치 히로시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아직도 옥중에서 혹은 외부에서 살아 있으며, 이들은 사건 후 '자기 비판'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을 꾸준히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 바, 이는 그 사건이 전후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넓게 보면 모두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스태인호프 교수는 다르다. 그는 미국인이며 이 사건들과 전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녀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인으로서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나, 미국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솔직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나,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압과정에서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의 차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행에 미친 영향도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건의 진행에서 일본 특유의 어떤 부분들이 미친 영향이나 혹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독자는 한국인이며, 이 사건에 있어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덕은 사건을 벌인 그들을 '위험한 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숙청'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나왔다. 그것은 예를 들어 조직 내의 권력다툼으로 희생자들이 나왔다, 혹은 배신자(스파이, 프락치)를 처단한 것이다 등등의 분석이 그것이다. 혹은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특성에서 사건의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여성지도자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어떤 히스테리컬한 면,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것은 사건을 맡았던 판사가 그녀를 '마귀 할멈'이나, '마녀'라고 부르면서 재판을 통해 그녀를 공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나 이들의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학자인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 이채롭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오랜 시간 각종 기록 및 관련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벌인 사건이 어떤 특수한 개인적 성향이나 권력다툼이나 배신자의 문제와 같은 특수한 사례가 아닌 어떤 조직 내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12명이나 숨지는 이렇게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한 이유는 그 사건에 내재한 언뜻 사소해보이는 분기점들, 혹은 어떤 조건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중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내부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산주의화 총괄'에 어떤 내부적인 기준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막다른 출구에 내몰려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이유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양상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조건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폭력에 의한 세계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은 괴물이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소해보였던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들 중의 대다수 역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라고 규정하면 해답은 간단해진다.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그러한 해답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며, 한 번 조건이 만들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전되어 전혀 원치 않은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조직들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작게 보면 가족과 교우관계에서 넓게 보면 국가까지 우리는 어떻게보면 폐쇄적인 조직에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주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 보아 전 국가적인 사건에까지 이어진다. 이 '희생양'이 돌고도는 것, 이것은 크기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반복되며, 이것에는 연합적군에게 내부논리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내부의 논리가 있다. (이 부분을 놓고 이들의 사건을 일종의 '이지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사실 '이지메'와 크게 연관은 없다.)

물론 저자는(그리고 나는) 이들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쉬운 결론으로 끝내는 것은 쉬운 반복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의 뿌리, 그리고 사건 당시의 이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헤집는 것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 그래서 이들의 사건 이후의 '자기 비판' 혹은 '전향'을 주의깊게 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기비판' 역시 이들의 내부논리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며 외부에서 보는 '반성'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의 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어떤 태도에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길을 뒤늦게 돌아보며 안타까움과 동정과 경이로움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같은 어떤 복잡한 심상에 젖는다. 이들의 시작은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연합적군의 지도부),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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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2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이 쓴 책에 대한 글은 처음 읽는 것 같아요.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실까요?
감탄 또 감탄을 하며 읽었습니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3-07-29 18:1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저도 영화를 보고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인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점이 많은 사건이예요.

제가 저 당시에 저 그룹의 일원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기회되시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아이리시스 2013-07-28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 좋다, 근데 이제 다 읽었어요? 몇 달 읽은 거예요, 하긴 그 몇 달 동안 저는 책을 사지도 않았;; 이건 언젠가 볼 거예요. 갑자기 김전일 보고싶네요. 방금 뎅구르르 하면서 <결혼의 여신> 보면서 남상미 빨강원피스에 계속 감탄하다가 너무 거실에서 시끄러운 것 같아서 이제 자려고요. ㅠ.ㅠ 예뻐져야 해요. 자고나면 예뻐질 거예요. 빨강원피스 너무 입고 싶어요! (왜 끝이 이렇게..)

잘자요, 맥거핀님. 안녕.

맥거핀 2013-07-29 18:17   좋아요 0 | URL
사실 초반에 좀 읽다가 한동안 묵혀놨었어요. 무슨 된장도 아니고, 책을 이렇게 묵혀두면 안되는데 말이죠. 아무튼 최근에 다시 꺼내들었다가 하룻밤 사이에 나머지 부분을 다 읽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진진하더군요.

으흐흐..남상미, 에전에 무슨 남상미가 여자경찰관으로 나온 드라마있었는데, 그 때 반해가지고 저도 한동안 꽤 좋아했습니다. 혹시 그 원피스..남상미가 입었기 때문에 이뻤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

는 아니고, 알라딘에서 이쁘기로 소문났던데요. 아이리시스님.^^ 빨강원피스 입으면 더 예쁠겁니다.

그리고 나는 휴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서재에 글 쓰는 게 자체휴가..;

아이리시스 2013-08-02 13:28   좋아요 0 | URL
그 드라마 달콤한 스파이. 뭐 퀴즈 한번 맞춰봤어요. 히히히. 당연히 남상미가 입었기 때문에 예뻤;; (일단 순순히 인정하고) 사실 뭘 입어도 다 예뻤어요. 제가 빨강원피스에 로망이 커서.. 분명 원피스 같았는데 드레스가 되는 걸 보고 '역시 나는 못 따라가겠어'라고 생각했죠. 네, 제가 졌어요.

제가 예쁘다는 소문은 제가 낸 겁니다 :)

맥거핀 2013-08-06 17:40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달콤한 스파이> 사실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잠깐 일하던 데가 그 드라마 촬영한 경찰서 주변이라서 나중에 일부러 거기도 가봤다는..(대학로 근처). 솔직히 좀 더 말하면, 그 이후에 남상미가 여자 형사로 나오는 영화도 있었는데 영화가 상당히 구렸음에도 두번이나 봤어요. (이 영화는 알려나요?)

나도 같이 소문내줄께요. 이 댓글을 보시는 다른 분들..아이리시스님 예쁩니다.^^ 비도 안온다니 아랫동네 정말 덥겠네요. 더위 잘 이겨내시고 잘 계세요.^^
 
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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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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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5-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투브 음악 하나 링크시키려다 날려먹고 다시 올림..ㅠㅠ

올리려던 음악은...OST에 있는 The Searchers
'올드보이'는 사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음..


넙치 2013-05-1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들 다시 보기 중 이신가 봅니다.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네요..

맥거핀 2013-05-14 13: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미 다 다시보기는 했어요. 글로 쓰는 게 오래걸릴뿐이죠.
박찬욱 영화들은 다시 봐도 또 새롭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13-05-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마지막 "개드립"에 빵 터져버렸습니다....ㅋㅋㅋ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복수 시리즈를 4부나 5부까지 만들어 사회의 제도적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영리한 분이다 보니 그 부분만큼은 살짝 비켜나가는 것 같더군요.)

맥거핀 2013-05-14 13:18   좋아요 0 | URL
아..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 지배자의 복수란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올드보이는 다시 봤더니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잔혹하더군요. 물리적인 잔혹함보다는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이정도였나 싶은 영화였습니다.

Shining 2013-05-1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개드립... 맥거핀님은 술김에 그런 생각이 나오나요? 아님 혹시 미리 준비해둔...-_-
이 기세라면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서도 글을 쓰실 것 같군요. 좋아요 좋아-_-*

덧)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혼인관계란 것을 알았을 때 무지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고 개츠비 역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마이클 패스빈더(패스밴더,가 맞나요?), 피터 사스가드 둘 다 이미 캐리 멀리건과 연기한 적이 있군요. <셰임>과 <언에듀케이션>.

민머리라... 브루스 윌리스, 섹시하지 않나요?ㅎㅎㅎ

동생이 <아이언맨 3>를 보고 최고의 오락영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 어찌고 하길래 뭬야?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어, 라면서 싸울 뻔 했습니다... <아이언맨3> 안 봤지만 제깟게(ㅋㅋ)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다, 고 저는 믿습니다...

맥거핀 2013-05-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일 1개드립을 실천중입니다. 네..아마도 다음번의 글은 <친절한 금자씨>가 될 것 같군요. 그 전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다른 것을 쓰겠지만..

민머리..하기는 민머리와 뭐 정력의 관계 같을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죠.ㅎ 사실 브루스 윌리스는 별로 섹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이나 <셰임> 두 개 다 본 적이 없어요.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부부라는 것도 Shining님에 의해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아이언맨이 다크나이트에 비견될 정돈가요. 뭐 둘이 진짜로 싸우면 아이언맨이 배트맨을 이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오락적 완성도로 봤을때도 다크나이트에 한 표를 던집니다. Shining님이 맞아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2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샤이닝님 답글이 독자적 댓글로 버려져있어요(대단한 발견!).
그런데 강혜정은 왜 이 영화 이후로는 더 나아가는 배우가 되지 못했을까요.
미녀는 괴로워 이후 에이급 스타가 된 김아중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김아중보다는 강혜정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

오랜만에 와서 댓글 참 쓸데없네요, 맥거핀님. 미..미..미안..

맥거핀 2013-05-23 12:06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댓글 달고 며칠 뒤에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요.ㅋㅋ 강혜정은 좀 아쉽지요, 괴물 같은 배우가 나온 줄로 알았는데, 여러가지 논쟁들(?)에 휘말려 배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아중씨는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이리시스님도 살아있군요! 생존 신고를 좀 하세요.ㅋ

2013-05-23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 (2disc)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의 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數,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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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본 영화라는 이유로 다시보기가 안되고 있는 넘버원의 영화죠. 저는 데이트하면서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영화가 그렇고, 동생이랑은 극장 안가고 국밥집이나 갈비집으로만. 누나랑 보셨다기에!

제동생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는데 그다지 계보는 없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얘기하는거보면 또 계보가 있는것 같고. 걔는 좋으면 그냥 좋은거더라고요. 많이 보면 확실히 보는 눈은 높아지는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통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서 뭐가 좋았니라고 물으면 컷이나 씬을 얘기못하고, 걔는 잘하더라고요. 맥거핀님처럼.

저는 영화에서 늘 부조리를 찾아서 그걸 현실에 대비시키려는 버릇이 있고, 그 부조리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하는 직업을 갖고싶었던 것 같아요. 예를들면, 늘 말했던 형사,판사,국제공무원같은. 자유를 엄청 갈구하면서 내 자유 대신 남의 자유를 찾아주고싶은 이 부조리한 마음가짐은 또 뭐란 말입니까!

1등댓글안쓰려고 했건만 :)

맥거핀 2013-04-30 14:25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나무를 보건, 숲을 보건 좋은 법이죠. 영화라는 건 사실 대부분 영화 그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기억남는 건 다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날 영화를 보고난 후 주고받은 얘기라던가, 보고나와서 먹었던 음식의 맛이라던가, 짜증나게 했던 뒷자리 사람이라던가..뭐 그런거요. 그런 것과 나중에 영화의 내용과 짬뽕되어 그 총체로 기억하는 거죠. 집에서 보는 영화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무엇을 보고나면 기억에 잘 안남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최근 집에서 DVD로 다시 봤지만요.)

근데 이 영화는 데이트용 영화로는 아주 최악에 가까운데 말이죠..좀 다른 얘긴데 예전에 설날인가, 추석 때 온가족이 모여 앉아있는데 특선영화라고 <올드보이>를 하더군요. 저는 편성담당자 저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싶었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영화라고 기대감을 가지고 보시기에 잠자코 있었죠. 역시나 한 중반부 넘어갈 때쯤에 어른들은 이거 뭐 이상한 영화네..그러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만 남아서 끝까지 봤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ㅋ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하면 조리가 되죠. 아이리시스님 우리 1등 댓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멋진데요. 전혀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긁어주셨습니다.
전 그동안 맥거핀 님을 여성ㅇ라고 생각하다가 누나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본지 오래도어서 가물가물하네요...ㅎㅎ. ㅎ여튼 박찬욱의 최고걸작은 늘 복수는 나의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4-30 14:3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들이야말로 저도 읽으면서 가끔 오호..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좋더군요.

아..근데요.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성이라는 법은 없지요(옛날에 여성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남성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물론 여자도 군복무를 할 수 있고요. ㅋ

Mephistopheles 2013-04-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상황을 묘사해주는 장면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의 전기고문에 소변배출하는 배두나의 모습이나 마지막 송강호가 신하균을 죽인 후 강가(?)에 널브러진 신하균의 옷과 피범벅이 된 그리 크지않은 보따리 묶음(토막)등등은 뭐랄까 직접적인 고어의 느낌보다 강렬했어요.

맥거핀 2013-04-30 14: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올드보이>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죠.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졸라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박찬욱 감독이 뭐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류의 감독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들에서 상상이나 뉘앙스로 조금 더 잔인하게 느끼게 하는 면이 있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나고,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넙치 2013-04-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또렷이 남은 건 그 영화 개봉 당시 분위기, 그리고 영화를 봤던 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는 것 밖에 없네요.
맥거핀님 글 읽고 난 후 제가 썼던 리뷰를 봐도 생경하기만..;;;

맥거핀 2013-04-30 14:36   좋아요 0 | URL
앞으로 어떤 화양연화가 또 올지 모르죠.^^ 예전에 쓰셨다는 리뷰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예전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과 이번에 새로본 영화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아무래도 영화라는 건 보는 이가 나머지 퍼즐조각을 맞추는 모양입니다.

Shining 2013-04-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읽었는데 댓글은 이제 남겨요. 저는 가끔 실은 종종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저랑 맥거핀님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사고의 회로도가 다르다는 느낌? 뭔가를 바라보는 투영도나 설계도, 농도, 질감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요.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맥거핀님의 글을 읽는게 즐겁다가 좌절하고 좌절하다 자극받고. 네, 그래서, 좋다구요 :)

저도 가끔 저 영화 짱이야, 라면서 혼자 TV 차지하고 같이 영화 보다가 가족들이 대개 짜증내거나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이건 슬픈 이야기).

맥거핀 2013-05-02 01:44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말입니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얘기한 것 같은데, 저도 Shining님의 어떤 글을 보면서 이건 못써, 이건 절대 나는 이렇게는 쓸 수 없어 하는 글들이 있어요. 그건 좋은 거겠죠. 네..아마도 좋은 걸 겁니다.

저도 가족들과는 거의 영화를 같이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TV영화들도 거의 같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보다가 민망해질 것 같은 영화는 알아서 도망가구요. 뭐 특히 박찬욱 감독 영화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같이 관람은 안하는 것이...

cyrus 2013-04-3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영화 장면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수월하게 잘 풀어내시는거 같아요. 저도 가끔 영화 한 편 보고나서 나름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고 싶은데 책 읽고 글 쓰는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책은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화 서평은 영화 한 편을 한 번 봤다고해서 쓰는게 아니라 여러 편 보다가 그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맥거핀님은 영화 서평을 이렇게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맥거핀 2013-05-02 0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을 영화글에다가 그냥 씁니다. 그러고 마치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구라를..^^

근데 DVD로 영화를 보다보니까 조금 달라지는 면이 있더군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DVD 같은 경우에는 보다가 끊고 자꾸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싶어져요. 그 충동을 참는 게 힘듭니다만, 생각해보니 왜 참아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우끼 2016-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니, 정말 멋지네요.. 맥거핀님 글 잘쓰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리뷰를 쓰시는 데 쓰인 시간과 노고를 가늠해보니.. 이 글이 더 값지게 보입니다. 복수라는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부분이라든가, 두 머리에 대한 우화와 연결지은 류와 동진의 관계,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등가교환 신화에 대한 지적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감독의 작위적인 메세지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군요.. 인간의 괴물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감독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괴물을 비판하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괴물로 살고 싶지 않은데, 겨우 허덕이며 위선을 베푸는 게 전부인 요즘, 어떤 삶을 살아야 괴물을 마주하면서도, 괴물로 남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지점에서, 이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우끼님. 댓글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죠? 제 글 읽어주시는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단 칭찬 먼저 감사드리구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라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영화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죠. 아무래도 영화가 좋아야(물론 책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글은 물론 그 중에 일부만 다룬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분명히 다층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 느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아마도 대부분 자신들만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매일 또 지면서 말이죠. 예전에 누군가 한 말대로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는 법이니...
 
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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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의 소설들은 늘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사실적인 허구, 허구적인 사실, 완전한 허구, 사실들의 주석, 사실들의 허구적인 주석, 허구들의 사실적인 주석, 각종 기호들, 특정의 양식, 원본과 위본,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생몰연대가 불확실한 인물들, 사물들의 연대기, 떠도는 풍문들 등등. 우리는 그의 소설들에서 늘 이것들을 구별해낼 수 없었고, 사실들과 허구들과 기호들과 이야기들과 풍문들과 진짜와 가짜, 그 사이 어디엔가에서 늘 길을 잃다가 에코가 선심쓰듯 마련해준 출구로 겨우 기어나오곤 했다. 사실 그곳이 제대로된 출구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분명 잘못된 출구이거나 혹은 사실은 입구였을 것이다.) 즉 에코의 소설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둘러싼 다른 어떤 것들이 존재했고, 그 존재를 파악하기가 힘든 것은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기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서 상당수 비롯된다. 기호학은 상징이나 도상, 지표와 같은 것들의 의미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보다, 그 기호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호학은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 기호체계 자체의 규약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어떤 것보다 기호 자체의 작동이 더 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코의 소설에서 그 이야기 자체는 짐짓 어디에선가 발견된 원본의 일부라던가, 혹은 필사본이라던가, 숨겨진 내부의 문건들이라는 식의 형태를 띠었고, 그것은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도 마찬가지이다.

<프라하의 묘지>는 크게 세 가지의 문건이 뒤섞여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거짓과 위조를 일삼으며 거짓된 문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살아가는 공증인 시모니니가 기억을 잃은 채로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적어내려가는 일기가 그 하나이고, 그의 가까이에서 살면서 그 시모니니의 일기를 읽으며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첨부하는 역시 기억을 잃어버린 달라 피콜라 신부의 기록이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 두 개의 문건을 후대에 입수한 어느 이름모를 화자(물론 에코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가 재구성한 기록이 그 하나이다. 그런데 에코는 이 세 개의 문건을 분리된 플롯으로 구성하지 않고, 이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뒤섞는 형태로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또 각각의 분절적인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19세기 신문 연재소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또한 여기에 에코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여 19세기 대중소설의 문체를 모방함으로써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더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플롯이 아닌 스토리로 보면 이 <프라하의 묘지>는 공증인 시모니니의 거짓와 사기, 조작으로 점철된 일대기이며, 동시에 반(反)유대주의 문서인 '프로토콜'의 탄생 과정인데, 여기에서 에코는 이 스토리와 이 고유의 형식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소설을 단지 형식의 과시 이상의 것으로 이끌고 있다.

즉 에코는 이 소설에서 '프로토콜'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 이 반유대주의로 점철된 문서가 단지 조작과 거짓과 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내기 위해,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 자체를 일종의 거짓 문서, 위작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를 일종의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나의 문서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허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그 문서를 둘러싼 모든 것, 그러니까 그 문서를 만들어낸 시모니니라는 저자의 모든 것을 허구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이다. 즉 에코는 이 내용이 거짓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이 거짓이다'라고 독자에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거짓되게 만들어냄으로써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 '이것이 거짓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디센던트>에서 초반부에 '하와이를 단지 휴양지로만 여기지 말라, 여기에도 다 나름의 삶이 있다'는 주인공의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하와이를 휴양지처럼 '보이게' 찍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과 그 보여주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그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이것이 소설의 경우라면 어떨까.)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 자체가 거짓으로 보이기는 하되, 이것은 완전한 허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문서 '프로토콜'은 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아우슈비츠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이 책 26장의 제목이기도 한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실제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I, 11)에서 이렇게 썼다. "그 민족의 삶이 끊임없는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매주 징징거리며 주장하기를, 그 문서가 허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문서가 진짜라는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 그 책이 온 국민의 공동 자산이 될 때에는 유대 민족의 위험이 제거된 것으로 여겨도 되리라." - p.766) 그리고 어떤 것이 완전한 허구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것(예를 들어 제노사이드)마저도 마치 허구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코는 시모니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을 실제의 인물들로 배치하고,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 즉 예로 들어 가리발디의 원정이라던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등에 이 시모니니를 깊숙하게 개입시킨다. 즉 실제의 사건 속에 단 하나의 거짓 인물을 투입함으로써 그의 거짓이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절하게 효과를 거두며, 그것은 물론 이런 사실적인 허구, 혹은 허구적인 사실이 에코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 허구처럼 보이는 사실, 혹은 사실처럼 보이는 허구, 즉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것은 에코의 장기일 뿐더러 동시에 이 주인공 시모니니의 장기이다. 시모니니는 위조된 문서를 만들어 내는 몇 가지의 원칙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떤 자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려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그가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 적당한 적을 설정하여, 읽는 이의 분노를 그것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 혹은 한번에 한가지에 대해서만 혐오감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떤 읽는 이의 흥미 혹은 재미를 돋우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가 가지는 전략이다. 이것은 소설의 초반부부터 전개되는데, 주인공 시모니니는 프랑스인, 유대인, 독일인, 러시아인, 공화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사제들, 여자들 등 자신 외의 거의 모든 집단들에게 혐오감을 내비치며, 그들 모두를 번갈아 적당한 적으로 등장시키면서 어떤 분노가 단계적으로 옮아가도록 한다. 동시에 그가 적으로 설정하는 음모나 꺼림칙한 것들로 가득한 집단은 그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프리메이슨회나 예수회, 유대인들 등에 대한 어떤 것에서 기초한다. 즉 에코는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서 시모니니가 구사하는 위조의 전략을 이미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에코가 원하는 것은 이 소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한 권의 위조된 문서이며, 거짓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설은 읽는이가 주인공에 동화되어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와 함께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이 소설은 반대로 주인공을 혐오하게 하거나, 그가 벌인 거짓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치에 닿을 수 없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 에코는 몇 가지의 전략을 쓰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플롯을 복잡하게 구성하거나, 사건을 분절시키거나 하는 것들도 그러하거니와 죽었던 인물, 혹은 죽었다고 믿어졌던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거나, 매번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 등도 그러하다. 즉 이 소설의 줄거리가 아무리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 에코가 (의도한 바대로) 그것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킬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 시모니니의 미식의, 아니 식탐의 기록을 나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먹는 음식의 아주 상세한 레시피를 정밀하게 기록하는 것은 독자의 식욕을 돋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식욕을 멈추게 하여 안 그래도 정나미 떨어지는 모두까기인형 시모니니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인 시모니니의 탐욕한 모습을 극대화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음식문화에 담긴 어떤 근대적인 탐욕을 밝히는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프라하의 묘지> 마지막 장을 덮고 우리는 묻는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기원을 파헤친다고 들려준 이 이야기 자체가 도리어 알 수 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 거의 대부분 역시 다른 소설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들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을 수 밖에. 그렇다면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은 또 무엇에서 기원한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아마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늘 그 반대에 위치한 질문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거짓의 메커니즘이 실제와 같이 굴러간다고 해도, 다시 말해서 그 메커니즘이 진실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그 메커니즘의 재료가 거짓인 한 그 끝에는 결국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 某 님의 마음속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某 님으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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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내 선물이야 내 선물.. 뿌듯.. 희미하고 뿌연 거짓의 향기는 책을 뒤집어 다시 한 번 읽더라도 여전히 맡아지는 거겠죠?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믿지 말아야 하지,라니 완전히 꿰뚫는 얘기예요. 써보고 싶었는데, 역시, 써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럭저럭 유럽사나 뒤적거리다 말겠죠. 모처럼 아는 기분으로 흡족하게 읽고 추천 눌렀는데 추천했다고 하네요. 생각해보니 제가 1등으로 했어요. 기억이 나요.

음식 나오는 것도 짱나는데 레시피가 자주 나올 때는 토나올 것 같았어요. 저는 음식얘기 별로 안 좋아해요. 탐구심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음식은 절대 아니예요. 햄이랑 맛살, 소시지 못 먹어요ㅠ.ㅠ

그럼 이쯤에서 재미난 거 한 번 해봐요, 맥거핀님.

질문 1.
<프라하의 묘지> 읽고나서 떠오른 영화는?

질문 2.
에코씨 책 중에 뭐가 제일 좋았고, 뭐가 제일 안 좋았어요?

질문 3.
지금 읽고있는 책은요? 몇 페이지?

맥거핀 2013-03-20 14:29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안계시면 추천 눌러줄 분도, 댓글 달아줄 분도 없군요.^^ (사실은요, 위에 추천 하나는 제가 눌렀음.ㅋ) 뭔가 책을 읽었다는 확인을 해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알라딘인데 책 리뷰도 좀 쓰고 그래야지 싶어서요. 아이리시스님이 풀어주셔도 재밌는 얘기 나올 것 같은데, 뭐 뒤적거리신 유럽사에 대해 알게 되는것도 좋구요.

저도 사실 음식, 미식 이런 데는 별 관심이 없어서요..그저 안굶을 정도로만 먹자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진짜 신기한 건 사람들이 먹방을 본다는 것, 그것도 심지어는 돈까지 내면서 말이죠. 햄이랑 맛살, 소시지를 못먹다니 저랑 완전히 반대되는 입맛입니다요. (저는 인스턴트 싸구려 입맛)

답변 1.
지금 막 생각해보니 얼마전에 본 <파우스트>가 떠오릅니다. 영화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지만요. (아니..'전혀'라고 할 수 있을까?) 쓰자 하면서 아직 버려둔 <파우스트> 메모가 생각나는군요.

답변 2.
아무래도 처음 본 <장미의 이름>이 제일 좋았구요. 점점 안좋아지다가, 이번 책에서 다시 좀 살아나는듯?

답변 3.
지금 가방에 들어있는 책은 세르쥬 다네의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라는 책입니다. 책이 작아서 왔다갔다하면서 읽기 좋겠군, 생각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지하철에서 읽을 책은 아닌듯..

Shining 2013-03-2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글은 읽었는데 미처 댓글은 못 남겼어요ㅠ 저도 이 책 읽어야하는데(고로 아직도 못 읽었는데;) 글도 써야하는데 맥거핀님이 먼저 이런 리뷰 쓰지 마세요_- 대체 전 어떻게 하라는겁니까ㅠㅠ(엄살 아닙니다요... 진짜로 막막해요, 이 리뷰. 하긴 이 리뷰 뿐 아니라 요샌 글 쓰는 자체가 무섭네요;)

아, 바로 위에 있어서 읽어버렸는데(하하)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사셨군요. 어떤가요, 이 책? 궁금한데 근처 서점엔 없어서 실물도 못 봤거든요; 간단한 감상이라도...+_+

맥거핀 2013-03-22 15:32   좋아요 0 | URL
쓰기만 하시면 제가 열심히 읽겠습니다.^^ 여기 팬이 한 명 있어요. 그러니 쓰십시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는 말랑말랑한 제목과 달리 읽으면서 계속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렇게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은 책인데요. 그래도 딱딱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영화같은 느낌같은, 삶과 영화가 결합된 한 인물의 전기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여기 있는 작품 중에 본 게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만요. 오늘 읽은 한 대목을 옮기는 게 책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더 나으실지도.. (이 책 전체적으로 번역체가 이상하기는 하지만요.)

"우리는 현재만을 기록할 수 있다. 그 현재는 볼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의 관념, 신화 그리고 꿈속에서 포착되어질 때 놀라운 방식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미디어의 정보속에 있는 것은 병리적인 것이 된다. 그 병리는 동시성이란 엄밀히 말해 더 이상 영화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미지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채널을 돌리는 현상과 관련된 것이란 사실에서 온다. 즉 시간의 노동, 인간들의 노동이라는 관념이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가 가진 사물들을 길게 늘어뜨리거나 가혹화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커트하는 힘이 마치 '대출중'인 것같고 결국 사회 공통의 잡탕 그릇에 들어가 버려 영화에서 점차적으로 제거되어 지듯이 이루어진 것과 같다."


2013-03-24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5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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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한국에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아니라, 한국인 '박노자'가 된 그의 이력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 직격으로 쏟아내는 비판들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박노자는 항상 우리에게 고정관념을 탈피할 것을, 우리를 둘러싼 몇 겹의 사회적 장벽들을 뛰어넘어 사고하기를 강변한다. 그의 발언들은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제도의 문제, 지식인 사회의 문제, 스포츠나 생활 습관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국의 전 사회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끔 지나치다 싶은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한국 사회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이며, 의견이 존중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진정한 외부자의 시선을 자처하며,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그보다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의 주종목인 고대사에서 '다르게 보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로, 그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주간 <한겨레 21>에 꾸준히 연재해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라는 칼럼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이 칼럼들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이 제목에 농축되어 있다. 즉,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대사에 대한 여러 지식들에 의문을 가져보자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가져온 고대사에 대한 어떤 인식들을 이번에 '거꾸로 보는' 작업들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간 다른 시각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보자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기존의 주류 학계의 사관, 혹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들을 기반으로 한 논의들이 그렇다. 그러나 박노자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국민의 상(像)을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상(像)은 '우리들의 위대성' 위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p. 10)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박노자의 이런 논의가 어떤 재야사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공격하고, 올바름을 가장한 '우리 역사 깎아내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노자의 논의는 그보다는 어떤 제3의 시각을 향해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해석의 시각이 미래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계급 중심적인 시각이 반영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표출하여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각은 우리의 고대사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팽창적 야망이 아닌 다수 한반도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에 맞는 고대사를 지향한다. (중략)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한 마디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고대 국가들의 위대성'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벌어지는 물적, 인적, 사상적 흐름, 국가가 아닌 민중을 비롯한 한반도 주민의 다양한 계층, 집단이 서술 대상이다. (p. 13-15)

 

우리가 가진 고대사에 대한 기존의 지식들을 깨뜨리기 위해 박노자는 계속 묻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1부에서는 "우리는 만주의 주인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따라서 고조선에 의한 만주의 영토적 지배는 일종의 오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낙랑 및 한사군을 일종의 침략 세력으로 보거나, 고구려를 강대한 제국으로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2부에서는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시각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며 당과 발해 등의 주변국가까지 포괄하여 전체 구도를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이러한 박노자의 시각으로 보면 통일 신라 역시도 단일민족이나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3부에서는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임나 일본부설이나, 왜와 백제의 관계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식민주의적 관점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른 시각, 즉 후대의 역사로 비롯된 일종의 콤플렉스적 시각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 당시의 맥락을 살펴볼 것을 주문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고대의 성(性)문화나 민중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글들을 통하여, 기존의 고대국가를 살펴보는 시선들이 후대의 시각들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것임을 밝히면서, 고대 국가가 단순히 종교와 전제정치의 억압만이 존재하던 곳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정치적 발언이 허용되던 활력의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위의 내용들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그것은 고대사 연구, 그 자체에 대한 박노자의 시각을 생각해봄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고대사 연구란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역사쓰기는 늘 취사선택의 과정이고, 늘 서술 주체의 시각이 개입하게 돼 있다"라고 말하며, 머리말을 통해 자신이 고대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며,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본문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이러한 방향으로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고대사 논의들은 그렇지 않다. 그 논의들은 자신들의 '해석의 시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숨기며, 마치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확한 사실이란, 사실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고대사의 많은 자료들은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져 있으며, 혹여 베일을 벗었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후대의 다른 시각들이 새롭게 덧붙여진 경우들이 많다. 또한 그 당시의 명확한 사실을 기술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시각에서 기술했는가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란 무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기술한 몇 개의 글들만이 1000년후의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그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혹자는 촛불 시위를 예로 들며,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이었다고 할 것이며, 혹자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들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였다고 밝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박노자처럼 조심스럽게, 또한 자신의 해석 의도를 밝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박노자 역시 대다수의 고대사학자들처럼 일부의 자료들을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노자 글들은 앞에서도 논의하였지만,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최근 며칠간의 아시안게임으로 촉발된 대만의 반한 시위와 그에 대한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경멸적인 대응을 보며, 이러한 것의 이면에 들어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들에는 분명히 그간 우리의 역사교육이 초래한 일말의 사고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의 민족적 자긍심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역사교육을 받아온 대다수들이(우리 및 대만 모두) 그런 일방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을 도리란 없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박노자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적어도 당신이 그런 대만의 시위에 맞서서, 우리도 대만의 국기를 불태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사이트가 사라진다길래 예전에 리브로에 작성한 리뷰를 가져옴.

처음 작성일: 20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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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울나라에 대한 예시를 논거로 하니, 확 다가오네요..

맥거핀 2012-12-19 18:44   좋아요 0 | URL
박노자님 시각이 비판을 많이 받는 것으로도 알고 있는데 아무튼 책은 재미있었던 것 같은...(2년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