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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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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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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3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4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6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8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9-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서 자꾸 뭔가 걸리는데? 라고 생각했던게 여기서 처음 지적한 부분인 이야기가 문화통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군요. 깨닫고 가네요.

맥거핀 2013-09-28 01:1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확실히 의도적인 부분이 있죠. 가연님도 말씀하셨지만 저자의 관점은 명확하니까요. 저는 그런 관점하에서 조금 더 '분석'에 가까운 내용들을 보고 싶었는데, 분석이 평이한 수준이라 아쉬웠어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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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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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1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 하다가 한 마디를 붙여놓는다. 그러니 사실 이 이야기는 (하루키의 많은 이야기가 사실 그러했듯이) 김난도 식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나 성찰보다는 늘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견디는 법이나 휩쓸리지 않는 법을 얘기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무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 다른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선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 때 나는 하루키의 많은 책들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 당시의 많은 책들은 분노하는 법을 가르쳐줬지, 자신을 스스로 위무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색채가 없는...>은 하루키의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여전히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지만, 적극적으로 비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예전의 작은 위무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해두자.

걸리는 부분 중에 하나는 예를 들어 책 안의 강조점과 같은 부분들이다. 하루키의 소설 혹은 에세이들에는 늘 강조점(글씨체가 바뀌는 것 같은)들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떤 글이든 중간에 색을 바꾼다거나 글자체를 바꾼다거나 하는 강조가 들어간 글들을 잘 읽지를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강조는 결국 읽는이가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hining 2013-08-2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하다 (저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이번 리뷰는 본문보다 덧과 댓이 조금 더 좋네요.

맥거핀 2013-08-23 17: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hining님 요새 많이 바쁘신가봐요. 서재에도 뜸하시고...바빠도 건강 잘 챙기세요. 저는 요즘 여름감기로 애를 먹고 있어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파과'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破果, 그러니까 으깨지거나 뭉그러진 과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게 되는 서효인의 <저글링>에 나오는 짧은 글귀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미련을 더 이상 두지 않는 과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년의 여성 킬러는 냉장고 안에 언젠가 넣어두었던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의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버리기 위해 조각을 모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음을 내뱉는다. 으깨진 과일 같은 것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신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으깨진 과일일 것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뭉크러진, 한 때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처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아니,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별명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조각, 복숭아 조각,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달라붙어 잘 떼어내지 않는 복숭아 조각.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손톱 조(爪)에 뿔 각(角)인 조각, 다시 말해서 각이 진 손톱, 혹은 날카로운 손톱.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유능한 킬러였으며, 맡은 바 임무를 무리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솜씨좋은 재주를 가진 방역업자였다. 그녀에게 손톱은 치장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이전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손톱 조'라는 한자의 생김새는 조금 재미있는 데가 있다. 손톱 조(爪)자 밑에 삐침을 하나 붙이면, 오이 과(瓜)자가 된다.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손톱 조(爪)'란 '오이 과(瓜)'가 깨어진, 혹은 파괴된 것이다. 즉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를 통해서 연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파과(破瓜)'다. 이 파과(破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관된 여러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일단 파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한다는 것으로 오이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 2개가 되어 그 두 개를 합한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동시에 파과라는 말은 여자의 처녀막의 상실, 즉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됨, 혹은 월경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16세, 혹은 사춘기, 청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파과란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깨지며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시기다. 그 파괴되는 무엇인가를 단순히 처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순수함이나 그간 자신의 주위에서 애써 유지되던 세계, 헤르만 헤세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조각 역시 그런 나이에 그녀 주위의 세계가 부서져 나갔다. 당숙의 집에서 나름의 세계를 더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균열점들은 알을 조각냈고, 그녀는 모든 것이 깨지려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본능을 발휘하여 방역업자로서 거듭났다. 즉 그녀는 이중의 파과(破瓜)를 맞았다. 의미로서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파과를 맞이하였고, 글자로서도 오이 과(瓜)가 깨어진 손톱 조(爪), 조각(爪角)이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조각이 났다. 조각난 삶을 겨우 지탱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류의 존재였다. 류는 세상과 그녀를 연결하는 접착제, 끈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갈 곳 없이 내버려진 그녀를 지탱시키는 심리적인 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였고, 그녀가 류의 지시를 받아 방역업을 해나간다는 업무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어쩌면 류와 뭔가 불안한 무엇일지라도, 행복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깨진 세계는 또다시 쉽게 깨질 수 있는 법.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겨지는 류의 말들과, '무용'이라는 늙은 개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깨진 조각이 다시 무엇인가를 붙여나가는 이야기이다. 무엇으로 무엇을 붙여나가는 것인가. 뭐 강박사라고 해도 좋고, 해니라고 해도 좋고, 투우라고 해도 좋고, 손톱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종장에 등장한 어느 네일샵의 이름모를 어린 막내 여직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 노년의 여성 방역업자는 자신의 손톱 위에 무엇인가를 덧씌운다.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다른 색과 무정형 도안이 불꽃놀이처럼, 혹은 과일 열매처럼 퍼져 나가는 인조 손톱. 그리고 네일샵의 원장은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막내 여직원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지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렇게 조각은 무엇인가를 붙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조 손톱이라고 해도 좋고, 막내 여직원과의 이상해보이는 공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붙여나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에 그녀가 네일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서 나왔거나, '서장'에서 벌어진 현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하철에서의 어떤 소동들, 그러니까 나이든 남자와 젋은 여인이 자리를 두고 시비를 붙고, 50대 여인은 중재에 실패하며, 젊은 임부의 낭패한 얼굴과 눈물을 덤덤히 견뎌낸 조각이 방역업에 결국 성공하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붙지 않을 것만 조각이 점점 무엇인가를 붙여나간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여성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당숙 집에 얹혀 살던 소녀에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친척언니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으며, 류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 역시 류의 아내 조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는다. 강박사가 붙고, 강박사의 부모와 해니가 붙고, 길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이 붙고, 결국에는 투우도 붙는다(이를 가족을 잃은 자들의 이상스런 연대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가족(류)을 잃은 조각과 아내 혹은 엄마를 잃은 강박사와 해니,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투우). 그러니 그녀가 네일샵의 막내 여직원과 이상한 연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관계에 있어서) 무용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방역업에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무용'하다. 그녀가 키우던 늙은 개의 이름처럼 말이다. '무용'이라는 개는 그녀의 어떤 단면이다. 예를 들어 개 '무용'은 '현관에 정좌하여 돌아온 주인을 향해 꼬리를 예의 바르게 흔들기는 하지만 뛰어올라 몸에 달라붙으려고 하거나 코를 비벼대지 않'으며, '무념무상의 도를 실천하며 달관의 몸짓으로 주인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 '무용'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은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용(無用)'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쓸모없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파과(破瓜)함으로써 조각(爪角)이 되었고, 그 조각들은 결국 파과(破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붙여나감으로써 다시 그녀는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새로운 파과(破瓜), 또는 합과(合瓜)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번째 파과는 그녀를 다시 조각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손톱 위에 인조 손톱을 붙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대로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일 것이다.

 

 

덧.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종장'이다. 아마도 이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게도 영화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수습이나 될 수 있을까 싶던 이야기(사실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 마지막들이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고령화가족>이나 소설 <파과>나.)에 붙는 너무 희망적이라 도리어 믿고 싶어지는 에필로그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이 너무 말들이 안된다고 머리에서 말해주는데, 마음에서는 이상하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 참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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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8-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 맥거핀님 소설 리뷰다아.. ^^ 얼마전에 뒹굴거리다가 <고령화 가족> 영화로 보는데 예전에 봐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소설보다 더 단조롭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느껴졌어요. 하찮은 시나리오에 거물급 배우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듯한 기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소한 작품에 나오는 이름있는 배우들이 고맙게 느껴졌어요. 저 '파과'의 의미를 해석하는 이벤트가 어디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읽어보려다 말았습니다..

잘자요, 일찍일찍 자요, 맥주 마시지 말고요!

맥거핀 2013-08-10 16:38   좋아요 0 | URL
<고령화가족>을 만든 송해성 감독의 영화는 사실 다 구려요. <파이란> 같은 것도 말이죠. 근데 이상하게 그 영화들을 까지를 못하겠어요. 이 영화들에는 뭐랄까, 어떤 따듯한 정서랄까, 인간에 대한 예의랄까 같은 게 스며들어 있어서 그래도, 괜찮잖아?라고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어요.

사실 <고령화가족>도 좋은 원작에 좋은 배우들 데려다놓고 만든 것 치고는 상당히 말아먹은 영화고, 마무리도 참 이상했지만, 저는 나름 좋았어요. 그래도 감독이 인물들에 대해 애정이 있구나 싶어서요.

아..이벤트 있었죠. 녹즙기 주는 이벤트였는데, 저는 왠 녹즙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았습니다. (파괴된 과일이니 갈아서라도 먹어라, 뭐 그런 걸지도..) 녹즙기보다는 맥주가 좋습니다. 맥주 주는 이벤트였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썼을텐데.

아이리시스 2013-08-12 12:43   좋아요 0 | URL
이건 좀 아줌마 잔소리 같지만.. 술에 영혼을 팔면 안됩니다. 술 안마신다고 반드시 건강하다는 법도 없지만, 술을 거뜬히 감내하려면 그만큼 몸에 좋은 걸로 해독작용도 시켜야 해요. 요즘은 음식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거 믿고 있어요. 여러번 겪었고. 저는 건강염려증 환자는 아니지만 오래 전에 큰아버지 돌아가신 가족력도 있고 아빠도 워낙 술을 좋아하셨고 사업차 많이 드셨고, 두려운 순간이 많았어요. 제가 아빠딸이면 완전 술꾼일텐데 엄마체질을 더 많이 닮아서 몸에도 잘 안받아요. 그래서 저도 제가 못마시는 줄 알았는데 웬만한 여자들 평균만큼은 거뜬히 먹더라고요. 놀러가서 술술 하는 친구들은 제가 못 먹는 줄 알지만 전 그냥 못 먹는다고 해요. 시집도 안갔고 태어날 애기도 걱정되고 원래 튼튼체질이 아니라서 둔해질 머리도 염려스럽고.. 어느새 건강염려증 환자.

그래서 모두 정도껏인게 좋아요. 녹즙기, 맞다, 녹즙기. 그건 웬만해선 집에 있는 거라서 관심 덜하겠네요. 녹즙기가 문제가 아니라 갈고 분리하고 씻고 말리고 그게 더 짜증.

아이리시스 2013-08-12 12:48   좋아요 0 | URL
근데 이런 얘기 왜 했지. 맥거핀님 술꾼인지 아닌지 저는 모르잖아요. 으히히. 갑자기 술론이 나와버렸어요. 아, 책 말이죠, 신용카드 요즘은 인터넷서점들 무이자 할부 카드 없더라고요, 거의. 맨날 3개월 해놓고 한 달에 한 세 번 사버리면, 아니 왜 할부는 했냐고요ㅋㅋㅋ

맥거핀 2013-08-13 22:51   좋아요 0 | URL
으하하..저 술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술꾼이라고 불릴 급은 아니고, 그냥 잡스러운 정도입니다. '술꾼'이라고 하면 왠지 좀 아티스트 같은 느낌이 있잖아요? (아..나만 그런가..근데 술꾼도 급수가 있어요. 조지훈 선생의 주도 18단계인가 뭔가 있는데, 그 구분에 의하면 저는 한 2,3급 정도?)

으히히..기껏 걱정해주셨는데, 한다는 소리가 무슨 2급이니 어쩌니 하니까 한심스럽지요? 하긴 뭐 술이 몸에 안 좋은 건 다 알죠. 되도록 안마시는 방향으로 가기는 해야죠. 아이리시스님은 술이 몸에 안 받는다니 복받은 겁니다. 그냥 안받으니까, 안먹어요, 이게 젤 좋아요. 그러니 그냥 좋은거임.

신용카드는 그러니까 일시불로 질러야함..괜히 책 값 같은 거 3개월 할부로 끊어봤자, 3개월 후에 카드값은 나가고 있는데, 책은 안 읽고 그대로인걸 보면 속 터진다니까요. 최근에는 책은 되도록 가지고 있는 책 중고로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사거나 적립금 받은 걸로 사거나, 아니면 되도록 중고로 사자고 생각하고 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요. 대학 때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말자'고 원칙을 세웠는데, 그 때 '단 반드시 읽을 것'이라는 원칙을 같이 세웠어야 했어요.

술값을 줄이면 책을 그만큼 많이 살 수 있겠죠? @.@


아이리시스 2013-08-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정원이다 ㅎㅎ

맥거핀님하고는 이런 게 어울림.







맥거핀 2013-08-17 16:40   좋아요 0 | URL
아니..저것은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저 보기보다 감성적인 사람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어느덧 맥주에 눈이 돌아간 나를 발견하게 됨..)

사진 고마워요~:)
 
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1972년 2월 28일, 각종 테러와 범죄, 파괴활동방지법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연합적군의 최후의 생존자 5명 전원은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10일 동안 산장의 여주인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상은 드러난 듯이 보였으며, 이들에게는 긴 수형생활만이 남은 듯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숨겨진 나머지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은 경찰은 물론 전 일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사마 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균나이 23.3세의 일단의 젊은이들은 산속의 비밀 기지로 들어갔고, 그 숨겨진 공간에서 두 달 동안 총 31명의 연합적군 멤버 중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연쇄살인마라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죽음의 바이러스라도 퍼졌던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팩션이나, 김전일 소년의 사건기록부에나 등장할 법한 이 사건은 언론 및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아사마 산장에서의 진압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이는 최고 89.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건의 양상이 밝혀진 직후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퍼트리샤 스태인호프의 책 <적군파>는 이 사건을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 및 증언, 그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그간 쏟아져나온 각종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건의 미스테리 및 어떤 기이한 부분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가진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하나는 이것이 단지 그 사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나 르포 작가가 아니고,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요소, 그 사건의 어떤 구조적인 형태, 그 사건과 사회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사건 그 자체 못지 않게 그러한 부분들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적군이 벌인 이 아사마 산장에서의 농성과 내부 '숙청'은 좁게는 당대의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 및 폭력적 사회변혁 운동, 그리고 해외에서 벌인 요도호 그룹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일본적군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등의 거대한 테러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넓게는 일본의 현대사 전체와 일본인들의 어떤 정신적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요도호 그룹 및 일본적군, 그리고 연합적군, 적군파는 모두 일본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분파들이며- 이를 통칭하여 '적군파'라고도 한다 -, 그들은 각각 엄밀히 구분되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인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통합된 조직이며, 한편으로 저자는 이 통합의 과정이 상당부분 이 '숙청'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본격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연합적군의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책의 시작은 이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3개월 후에 일어난 오카모토 고조를 위시한 일본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과 오카모토 고조의 인터뷰이며,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합적군의 근원에 있는 적군파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책의 초반에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들의 어떤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내부논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연합적군의 '숙청'이라는 사건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덕은 책의 저자 퍼트리샤 스태인호프가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1972년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로부터 약 40여년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의 각계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소설 및 영화, 만화 등이 나왔다(와카마쓰 고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이나 야마모토 나오키의 만화 <레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사건의 주범격인 사카구치 히로시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아직도 옥중에서 혹은 외부에서 살아 있으며, 이들은 사건 후 '자기 비판'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을 꾸준히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 바, 이는 그 사건이 전후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넓게 보면 모두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스태인호프 교수는 다르다. 그는 미국인이며 이 사건들과 전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녀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인으로서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나, 미국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솔직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나,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압과정에서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의 차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행에 미친 영향도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건의 진행에서 일본 특유의 어떤 부분들이 미친 영향이나 혹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독자는 한국인이며, 이 사건에 있어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덕은 사건을 벌인 그들을 '위험한 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숙청'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나왔다. 그것은 예를 들어 조직 내의 권력다툼으로 희생자들이 나왔다, 혹은 배신자(스파이, 프락치)를 처단한 것이다 등등의 분석이 그것이다. 혹은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특성에서 사건의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여성지도자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어떤 히스테리컬한 면,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것은 사건을 맡았던 판사가 그녀를 '마귀 할멈'이나, '마녀'라고 부르면서 재판을 통해 그녀를 공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나 이들의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학자인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 이채롭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오랜 시간 각종 기록 및 관련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벌인 사건이 어떤 특수한 개인적 성향이나 권력다툼이나 배신자의 문제와 같은 특수한 사례가 아닌 어떤 조직 내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12명이나 숨지는 이렇게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한 이유는 그 사건에 내재한 언뜻 사소해보이는 분기점들, 혹은 어떤 조건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중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내부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산주의화 총괄'에 어떤 내부적인 기준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막다른 출구에 내몰려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이유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양상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조건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폭력에 의한 세계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은 괴물이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소해보였던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들 중의 대다수 역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라고 규정하면 해답은 간단해진다.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그러한 해답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며, 한 번 조건이 만들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전되어 전혀 원치 않은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조직들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작게 보면 가족과 교우관계에서 넓게 보면 국가까지 우리는 어떻게보면 폐쇄적인 조직에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주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 보아 전 국가적인 사건에까지 이어진다. 이 '희생양'이 돌고도는 것, 이것은 크기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반복되며, 이것에는 연합적군에게 내부논리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내부의 논리가 있다. (이 부분을 놓고 이들의 사건을 일종의 '이지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사실 '이지메'와 크게 연관은 없다.)

물론 저자는(그리고 나는) 이들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쉬운 결론으로 끝내는 것은 쉬운 반복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의 뿌리, 그리고 사건 당시의 이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헤집는 것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 그래서 이들의 사건 이후의 '자기 비판' 혹은 '전향'을 주의깊게 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기비판' 역시 이들의 내부논리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며 외부에서 보는 '반성'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의 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어떤 태도에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길을 뒤늦게 돌아보며 안타까움과 동정과 경이로움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같은 어떤 복잡한 심상에 젖는다. 이들의 시작은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연합적군의 지도부),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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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2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이 쓴 책에 대한 글은 처음 읽는 것 같아요.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실까요?
감탄 또 감탄을 하며 읽었습니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3-07-29 18:1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저도 영화를 보고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인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점이 많은 사건이예요.

제가 저 당시에 저 그룹의 일원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기회되시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아이리시스 2013-07-28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 좋다, 근데 이제 다 읽었어요? 몇 달 읽은 거예요, 하긴 그 몇 달 동안 저는 책을 사지도 않았;; 이건 언젠가 볼 거예요. 갑자기 김전일 보고싶네요. 방금 뎅구르르 하면서 <결혼의 여신> 보면서 남상미 빨강원피스에 계속 감탄하다가 너무 거실에서 시끄러운 것 같아서 이제 자려고요. ㅠ.ㅠ 예뻐져야 해요. 자고나면 예뻐질 거예요. 빨강원피스 너무 입고 싶어요! (왜 끝이 이렇게..)

잘자요, 맥거핀님. 안녕.

맥거핀 2013-07-29 18:17   좋아요 0 | URL
사실 초반에 좀 읽다가 한동안 묵혀놨었어요. 무슨 된장도 아니고, 책을 이렇게 묵혀두면 안되는데 말이죠. 아무튼 최근에 다시 꺼내들었다가 하룻밤 사이에 나머지 부분을 다 읽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진진하더군요.

으흐흐..남상미, 에전에 무슨 남상미가 여자경찰관으로 나온 드라마있었는데, 그 때 반해가지고 저도 한동안 꽤 좋아했습니다. 혹시 그 원피스..남상미가 입었기 때문에 이뻤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

는 아니고, 알라딘에서 이쁘기로 소문났던데요. 아이리시스님.^^ 빨강원피스 입으면 더 예쁠겁니다.

그리고 나는 휴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서재에 글 쓰는 게 자체휴가..;

아이리시스 2013-08-02 13:28   좋아요 0 | URL
그 드라마 달콤한 스파이. 뭐 퀴즈 한번 맞춰봤어요. 히히히. 당연히 남상미가 입었기 때문에 예뻤;; (일단 순순히 인정하고) 사실 뭘 입어도 다 예뻤어요. 제가 빨강원피스에 로망이 커서.. 분명 원피스 같았는데 드레스가 되는 걸 보고 '역시 나는 못 따라가겠어'라고 생각했죠. 네, 제가 졌어요.

제가 예쁘다는 소문은 제가 낸 겁니다 :)

맥거핀 2013-08-06 17:40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달콤한 스파이> 사실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잠깐 일하던 데가 그 드라마 촬영한 경찰서 주변이라서 나중에 일부러 거기도 가봤다는..(대학로 근처). 솔직히 좀 더 말하면, 그 이후에 남상미가 여자 형사로 나오는 영화도 있었는데 영화가 상당히 구렸음에도 두번이나 봤어요. (이 영화는 알려나요?)

나도 같이 소문내줄께요. 이 댓글을 보시는 다른 분들..아이리시스님 예쁩니다.^^ 비도 안온다니 아랫동네 정말 덥겠네요. 더위 잘 이겨내시고 잘 계세요.^^
 
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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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5-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투브 음악 하나 링크시키려다 날려먹고 다시 올림..ㅠㅠ

올리려던 음악은...OST에 있는 The Searchers
'올드보이'는 사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음..


넙치 2013-05-1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들 다시 보기 중 이신가 봅니다.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네요..

맥거핀 2013-05-14 13: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미 다 다시보기는 했어요. 글로 쓰는 게 오래걸릴뿐이죠.
박찬욱 영화들은 다시 봐도 또 새롭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13-05-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마지막 "개드립"에 빵 터져버렸습니다....ㅋㅋㅋ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복수 시리즈를 4부나 5부까지 만들어 사회의 제도적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영리한 분이다 보니 그 부분만큼은 살짝 비켜나가는 것 같더군요.)

맥거핀 2013-05-14 13:18   좋아요 0 | URL
아..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 지배자의 복수란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올드보이는 다시 봤더니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잔혹하더군요. 물리적인 잔혹함보다는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이정도였나 싶은 영화였습니다.

Shining 2013-05-1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개드립... 맥거핀님은 술김에 그런 생각이 나오나요? 아님 혹시 미리 준비해둔...-_-
이 기세라면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서도 글을 쓰실 것 같군요. 좋아요 좋아-_-*

덧)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혼인관계란 것을 알았을 때 무지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고 개츠비 역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마이클 패스빈더(패스밴더,가 맞나요?), 피터 사스가드 둘 다 이미 캐리 멀리건과 연기한 적이 있군요. <셰임>과 <언에듀케이션>.

민머리라... 브루스 윌리스, 섹시하지 않나요?ㅎㅎㅎ

동생이 <아이언맨 3>를 보고 최고의 오락영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 어찌고 하길래 뭬야?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어, 라면서 싸울 뻔 했습니다... <아이언맨3> 안 봤지만 제깟게(ㅋㅋ)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다, 고 저는 믿습니다...

맥거핀 2013-05-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일 1개드립을 실천중입니다. 네..아마도 다음번의 글은 <친절한 금자씨>가 될 것 같군요. 그 전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다른 것을 쓰겠지만..

민머리..하기는 민머리와 뭐 정력의 관계 같을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죠.ㅎ 사실 브루스 윌리스는 별로 섹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이나 <셰임> 두 개 다 본 적이 없어요.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부부라는 것도 Shining님에 의해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아이언맨이 다크나이트에 비견될 정돈가요. 뭐 둘이 진짜로 싸우면 아이언맨이 배트맨을 이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오락적 완성도로 봤을때도 다크나이트에 한 표를 던집니다. Shining님이 맞아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2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샤이닝님 답글이 독자적 댓글로 버려져있어요(대단한 발견!).
그런데 강혜정은 왜 이 영화 이후로는 더 나아가는 배우가 되지 못했을까요.
미녀는 괴로워 이후 에이급 스타가 된 김아중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김아중보다는 강혜정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

오랜만에 와서 댓글 참 쓸데없네요, 맥거핀님. 미..미..미안..

맥거핀 2013-05-23 12:06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댓글 달고 며칠 뒤에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요.ㅋㅋ 강혜정은 좀 아쉽지요, 괴물 같은 배우가 나온 줄로 알았는데, 여러가지 논쟁들(?)에 휘말려 배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아중씨는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이리시스님도 살아있군요! 생존 신고를 좀 하세요.ㅋ

2013-05-23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