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2disc)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의 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首,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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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본 영화라는 이유로 다시보기가 안되고 있는 넘버원의 영화죠. 저는 데이트하면서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영화가 그렇고, 동생이랑은 극장 안가고 국밥집이나 갈비집으로만. 누나랑 보셨다기에!

제동생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는데 그다지 계보는 없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얘기하는거보면 또 계보가 있는것 같고. 걔는 좋으면 그냥 좋은거더라고요. 많이 보면 확실히 보는 눈은 높아지는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통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서 뭐가 좋았니라고 물으면 컷이나 씬을 얘기못하고, 걔는 잘하더라고요. 맥거핀님처럼.

저는 영화에서 늘 부조리를 찾아서 그걸 현실에 대비시키려는 버릇이 있고, 그 부조리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하는 직업을 갖고싶었던 것 같아요. 예를들면, 늘 말했던 형사,판사,국제공무원같은. 자유를 엄청 갈구하면서 내 자유 대신 남의 자유를 찾아주고싶은 이 부조리한 마음가짐은 또 뭐란 말입니까!

1등댓글안쓰려고 했건만 :)

맥거핀 2013-04-30 14:25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나무를 보건, 숲을 보건 좋은 법이죠. 영화라는 건 사실 대부분 영화 그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그 이후에 기억남는 건 다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날 영화를 보고난 후 주고받은 얘기라던가, 보고나와서 먹었던 음식의 맛이라던가, 짜증나게 했던 뒷자리 사람이라던가..뭐 그런거요. 그런 것과 나중에 영화의 내용과 짬뽕되어 그 총체로 기억하는 거죠. 집에서 보는 영화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무엇을 보고나면 기억에 잘 안남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최근 집에서 DVD로 다시 봤지만요.)

근데 이 영화는 데이트용 영화로는 아주 최악에 가까운데 말이죠..좀 다른 얘긴데 예전에 설날인가, 추석 때 온가족이 모여 앉아있는데 특선영화라고 <올드보이>를 하더군요. 저는 편성담당자 저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싶었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영화라고 기대감을 가지고 보시기에 잠자코 있었죠. 역시나 한 중반부 넘어갈 때쯤에 어른들은 이거 뭐 이상한 영화네..그러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만 남아서 끝까지 봤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ㅋ

부조리에 부조리를 더하면 조리가 되죠. 아이리시스님 우리 1등 댓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살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멋진데요. 전혀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긁어주셨습니다.
전 그동안 맥거핀 님을 여성ㅇ라고 생각하다가 누나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본지 오래도어서 가물가물하네요...ㅎㅎ. ㅎ여튼 박찬욱의 최고걸작은 늘 복수는 나의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맥거핀 2013-04-30 14:31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들이야말로 저도 읽으면서 가끔 오호..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좋더군요.

아..근데요.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성이라는 법은 없지요(옛날에 여성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남성들이 언니라고 부르고..). 물론 여자도 군복무를 할 수 있고요. ㅋ

Mephistopheles 2013-04-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인한 상황을 묘사해주는 장면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송강호의 전기고문에 소변배출하는 배두나의 모습이나 마지막 송강호가 신하균을 죽인 후 강가(?)에 널브러진 신하균의 옷과 피범벅이 된 그리 크지않은 보따리 묶음(토막)등등은 뭐랄까 직접적인 고어의 느낌보다 강렬했어요.

맥거핀 2013-04-30 14:3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올드보이>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죠.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졸라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박찬욱 감독이 뭐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류의 감독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들에서 상상이나 뉘앙스로 조금 더 잔인하게 느끼게 하는 면이 있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나고,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넙치 2013-04-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에 또렷이 남은 건 그 영화 개봉 당시 분위기, 그리고 영화를 봤던 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는 것 밖에 없네요.
맥거핀님 글 읽고 난 후 제가 썼던 리뷰를 봐도 생경하기만..;;;

맥거핀 2013-04-30 14:36   좋아요 0 | URL
앞으로 어떤 화양연화가 또 올지 모르죠.^^ 예전에 쓰셨다는 리뷰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예전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과 이번에 새로본 영화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아무래도 영화라는 건 보는 이가 나머지 퍼즐조각을 맞추는 모양입니다.

Shining 2013-04-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읽었는데 댓글은 이제 남겨요. 저는 가끔 실은 종종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저랑 맥거핀님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사고의 회로도가 다르다는 느낌? 뭔가를 바라보는 투영도나 설계도, 농도, 질감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요.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맥거핀님의 글을 읽는게 즐겁다가 좌절하고 좌절하다 자극받고. 네, 그래서, 좋다구요 :)

저도 가끔 저 영화 짱이야, 라면서 혼자 TV 차지하고 같이 영화 보다가 가족들이 대개 짜증내거나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이건 슬픈 이야기).

맥거핀 2013-05-02 01:44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말입니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얘기한 것 같은데, 저도 Shining님의 어떤 글을 보면서 이건 못써, 이건 절대 나는 이렇게는 쓸 수 없어 하는 글들이 있어요. 그건 좋은 거겠죠. 네..아마도 좋은 걸 겁니다.

저도 가족들과는 거의 영화를 같이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TV영화들도 거의 같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그리고 보다가 민망해질 것 같은 영화는 알아서 도망가구요. 뭐 특히 박찬욱 감독 영화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같이 관람은 안하는 것이...

cyrus 2013-04-3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영화 장면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수월하게 잘 풀어내시는거 같아요. 저도 가끔 영화 한 편 보고나서 나름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고 싶은데 책 읽고 글 쓰는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책은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화 서평은 영화 한 편을 한 번 봤다고해서 쓰는게 아니라 여러 편 보다가 그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맥거핀님은 영화 서평을 이렇게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맥거핀 2013-05-02 0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을 영화글에다가 그냥 씁니다. 그러고 마치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구라를..^^

근데 DVD로 영화를 보다보니까 조금 달라지는 면이 있더군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DVD 같은 경우에는 보다가 끊고 자꾸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싶어져요. 그 충동을 참는 게 힘듭니다만, 생각해보니 왜 참아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우끼 2016-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니, 정말 멋지네요.. 맥거핀님 글 잘쓰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리뷰를 쓰시는 데 쓰인 시간과 노고를 가늠해보니.. 이 글이 더 값지게 보입니다. 복수라는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부분이라든가, 두 머리에 대한 우화와 연결지은 류와 동진의 관계,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등가교환 신화에 대한 지적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감독의 작위적인 메세지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군요.. 인간의 괴물을 여실하게 드러내면서도 감독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괴물을 비판하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괴물로 살고 싶지 않은데, 겨우 허덕이며 위선을 베푸는 게 전부인 요즘, 어떤 삶을 살아야 괴물을 마주하면서도, 괴물로 남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던 지점에서, 이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우끼님. 댓글로 얘기나누는 건 처음이죠? 제 글 읽어주시는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단 칭찬 먼저 감사드리구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라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영화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죠. 아무래도 영화가 좋아야(물론 책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더 많아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글은 물론 그 중에 일부만 다룬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분명히 다층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 느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아마도 대부분 자신들만의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작은 투쟁을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요. 매일 또 지면서 말이죠. 예전에 누군가 한 말대로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