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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123페이지라는 짧은 쪽수와 사륙판이라는 작은 사이즈, 그리고 비교적 작지 않은 폰트를 가진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팜플렛이나 선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질문은 명확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마저 빼앗기면서 가만히 있는가(혹은 그 '빼앗김'을 도리어 옹호하고 있는가)? 그러나 원래 질문이 간단하고 명확할수록 대답은 조금 더 긴 사색을 요하는 법이다. 바우만의 방법은 이렇다. 먼저 우리가 얼마나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사실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불평등의 옹호에 내재한 4가지의 '부정의의 교의'를 살펴보고, 그 '부정의의 교의'를 깨부숨으로써 우리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추고, 이것이 행동의 의지를 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실에 의거한 판단과 논리가 결합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바우만이 먼저 제시하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서 찾아낸 불평등의 양상들이다. 경제적으로 '20대80의 사회'라는 이야기는 이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재는 거의 1대99의 사회이거나 0.1대99.9의 사회, 혹은 그 이상의 사회라는 사실이다. 대략적으로 '전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된다.'(p.18) 혹은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p. 19). 문제는 이것이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급격하게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에 미국 최고 대기업들 최고경영자의 세후 평균 보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12배였다. 1974년에는 이것이 35배가 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135배, 1999년에는 400배, 2000년에는 531배가 되었다(이와 비슷한 수치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고, 전세계에서 중산 계급들은 점점 '프리카리아트(불안정한 고용이나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 노숙자들을 총칭하는 말)'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비단 경제 부분만이 아니고, 사회의 전부분에 걸쳐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증하는 사회병리와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관련한 연구들은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일텐데, 그것은 이 마지막에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파국은 매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평등은 왜 감소하지 않는가? 아니 감소하기는 커녕 왜 도리어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기이한 믿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용어로는 '낙수효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부자들의 감세가 경제를 발전시킨다. 삼성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가 잘 된다.) 바우만이 이러한 기이한 믿음을 부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이 표면에 자리잡은 '교의'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교의'에 내재한 '부정의의 교의'의 기만들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부정의의 교의'는 큰 소리로 선언되는 확신들을 뒷받침하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암묵적인 전제들로서,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거의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암시만 될 뿐 분명하게 표현되는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지고 생각한다(p. 35~36).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이한 믿음'에는 몇 가지의 암묵적인 믿음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믿음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우만의 말이다.

바우만이 보여주는 네 가지의 내재된 믿음, 즉 부정의의 교의는 다음과 같다(p.49).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만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정리하자면 불평등과 경쟁은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거나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을 감수하고라도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가 필요하다는 교의, 혹은 믿음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 교의들이 거짓말이거나, 혹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올 수 있는 믿음임을 다음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1. 경제성장은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낙수 효과는 없고, 경제성장은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의 부만 더 늘려주고 있음을 수치들은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07년의 신용 붕괴 이후 미국의 GNP 증가분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들에게 돌아갔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2. 행복에 이르는 것이 소비라는 말은 현재의 부정의를 잊게 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9.11 다음날 당시 대통령 부시가 제시한 최선의 행동 수칙은 '쇼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현재 공공연하게 제시되는 소비 권장 메시지는 소비를 놓고 대중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대중들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비사회에서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공공의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불평등이 당연한 것이라는 오랜 믿음은 사회적 불평등을 무리없이 수용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회의 질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옆에 사람이 조금 더 가지거나, 자신의 생활수준이 조금 더 나빠지는 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작은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커다란 불평등은 정상적인 것,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오랜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4. 소비사회에서 소비자와 물건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우리는 인간사회에마저 적용하고 있다. 상대방을 주체로 대하는 정당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객체로 대하면 되는 경쟁관계보다 더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협력과 공생보다는 경쟁이 우선 순위가 된다. 이는 소비사회의 특징이며, 그것을 쇼핑몰들은 보여준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나 무장경호원에 더 의존한다.

...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맥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지 모른다. 아니 겨우 그런 얘기하려고...그거 별로 안 좋은 거는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혹은)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거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 말 많이 해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이 모냥, 이 꼴이잖아요. 모두들 다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경쟁하고 소비하면서 사는데, 나 혼자 협력하고 선의와 친절을 보여주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후....맞는 말이다. 그것은 바우만도 인정한다. "우리가 소망하거나 없애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벅찬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p.111) 그러나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이유라기보다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다가오는 파국을 멈출 기회도 희망도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말하고 생활방식을 바꿈으로써 말과 행위의 간극을 줄이려, 파국을 막으려 노력해야 한다.

바우만은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4) 어느 작가는 1939년 8월 23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끝났다'는 진술이 아니라, 그가 이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진술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를 '진짜'작가로 만드는 것은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이고, (진술을 한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당신이 이것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혹은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1925년생으로 나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겪은 노학자는 파국을 막기 위해 글을 쓰면서 애쓰고 있다. 나도 파국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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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6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7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11-0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지나긴했는데 일본 사법고시에서 교포가 아닌 한국 일반여성이 처음으로 합격했는데 부산여자인 거예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시아최초, 외국인최초 뭐 그렇게 났던 것 같아요. 지역신문에서 봤고요. 국제변호사가 되겠다고 중퇴한 학교는 제가 사는 구에서 갈 수 있는 다섯 개 여고중 하나였고, 교포가 아니니까 언어가 안돼서 서너시간만 자고 공부했대요. 나이도 20대라 관심있게 읽었는데, '처음으로'가 맘에 걸려서 제가 나름 분석끝에 한 소리가, 누가 일본에서 변호사를 하겠다고 하겠어, 하겠다고 시험 볼 확률이 적으니 당연히 합격률도 낮겠지 생각했었는데 이 리뷰 보면서 그때 생각났어요.

20%:80% 이런거,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이나 불평등 이런 게 저는 특히 심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늘 생각했거든요. 우리나라가 이상한거지, 나는 괜찮아.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잖아요. 다른 사람이 가난하다고 내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겪지않은 걸 두려워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린 공산주의도, 전쟁도 모르니까 그것들이 만들어놓은 불합리도 이해할 수도 없고 어떻게 우리 잘못이 아닌지도 잘 모르고요. 이런 와중에 TV 틀면 상속자들이 드글거리는 [상속자들] 같은 거나 하고.. 맨날 재벌2세는 가난한 여자를 사랑해요. 으흐흐흐.

강남에 있는 (장사하는)건물들 90%는 우리나라 자본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건물이 아니라 업체가 우리나라껀 아닌 거겠죠. 그게뭐든. 요즘은 제주도도 그렇대요. 중국이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고. 우리나라도 우리 게 아닌데, 이 나라에 내껀 없어요. 갑자기 슬퍼요 ㅠㅠ (저 지금 뭐하는 거임?-_-;;)

맥거핀 2013-11-04 22:19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뭔가 진지한 댓글인 척 하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슬퍼지는 이 댓글은 앞뒤가 안맞습니다. 다음 번에 조금 더 진지한 자세로 응모하시기 바랍니다.ㅋ

..는 뻘소리구요. 읽다보니까 과연 불평등이 어디까지인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여러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회를 평등하게 해주면 평등한 것인가...국제중 입학 전형에서 같은 시험기회를 주면 공평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 붙고, 엄청난 과외받고 한 아이들이 더 유리할 것은 당연한 이치고, 그렇다고 어느 정도까지 평등하게 만들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원시공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죠.

그리고 (책에 집중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이지만) 경제적 불평등만 있는것도 아니고, 심리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은 더 크고,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죠. 차라리 파국이 나을까요? 알라딘 서재의 배너에도 '자본주의의 파국'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던데, 파국이 무엇이 될 것인가, 즉 그 '파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가 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비행은 이미 글렀고, 그럼 이제 연착륙 시켜야 하는데, 그 연착륙마저 어렵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동체착륙이라든가, 수상착륙이라든가)을 시도해봐야겠지요. 물론 여기서 지금이 연착륙을 포기할 시점인가?,의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구요.

아이참..나도 <비밀> 끊어야하는데...그러니까 재벌 2세를 만나려면 먼저 가난해져야만 하는 거군요..응?

아이리시스 2013-11-05 13:04   좋아요 0 | URL
..가난한데 미국에 가서 언니한테 버림받고 잘 곳이 없어지거나, 가난한데 재벌2세가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를 실수로 죽여야죠..

1시다, 대낮에 알라딘하니까 좋다, 맨날 밤이나 새벽에만 하다가.. 이제 맛난 거 먹으러 갑니다..안녕..

맥거핀 2013-11-06 18:38   좋아요 0 | URL
근데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2세들은 왜 다 이렇게 잘생긴거임? 돈이 있어서 성형한건가..돈이 많으면 못생기기라도..아님 돈이 많고 잘 생겼으면 성질이 엄청 더럽기라도 해야지..돈이 많고 잘 생겼는데, 성질 더러운 것 같았지만 알고 봤더니 착해!, 왜 다 이런 애들 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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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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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 박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기만(속이는 것)과 자기기만(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가정에서, 남녀관계에서, 사회적인 관계들 하에서,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 보다 큰 국가적인 영역에서, 종교에서, 혹은 사회과학 분야와 같은 학문 영역에서 그러하다. 특히 비행기 사고나 챌린저호 폭발과 같은 거대한 항공 우주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부분에서 이러한 기만과 자기기만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저자는 챌린저호 폭발에서 나타난 NASA의 경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같은 여러 예를 통해 그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기만에서 출발하고 있고, 기만이 하나의 개체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한 기만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라 인간 외의 거의 모든 종이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그 새가 기르도록 하는 탁란과 같은 것이나, 암컷을 흉내내 수컷 옆에 자리잡고 있다가 진짜 암컷이 오면 재빨리 그 암컷과 먼저 교미를 해버리는 의사(疑似) 암컷(그러니까 사실은 수컷), 혹은 자신의 몸짓을 더 커보이게 하거나 색깔을 바꿈으로서 위장하는 것,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죽은 척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 등등도 모두 기만이며, 이러한 기만의 형태는 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 내부에서 자기기만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다른 인간을 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다른 동물들도 자기기만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저는 그것이 제 알이 아니라고 제 자신마저도 속였답니다."라고 울먹이며 고백하는 뻐꾸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의 양상은 예를 들어 자기(의 능력 혹은 외모 등등)를 부풀리거나 과신하는 것, 남을 폄하하는 것, 내집단 구성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내집단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고 믿는 것(한글의 우수성!),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 혹은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것(저번 주에는 로또 번호 1이 나왔으니 이번 주에는 나올/안나올 거야), 편향된 사회이론을 구축하거나 거짓된 개인 서사 혹은 집단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자신의 긍정적인 행동만을 기억하는 것) 등등의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기만은 대체로 일시적으로는 어떤 위안이나 이득을 그 자기기만을 행하는 개체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쟁이나 국가적 자기기만 서사의 위험성을 일일이 설파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예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로또 번호를 면밀히 분석하여 이번 주에는 반드시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주 동안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다음 주에 다시 새로운 분석기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분노에 휩싸여 더욱 많은 로또를 구매할 것이고, 더욱 많은 소주를 소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마도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자기기만을 왜 행하는 것일까? 저자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진화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종합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기기만을 하는 것은 내 어떤 의식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무의식이 혹은 내 유전자가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예가 남녀관계, 섹스에 얽힌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남녀관계, 부부문제에서의 수많은 자기기만이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은 섹스를 하기 위해서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거짓 감정(자기기만)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두말할 여지도 없다. (아..얼마나 많은 수많은 여자들이 "너를 사랑해."라는 말에 속아 침대로 기꺼이 따라 들어갔던가. 물론 이것은 여자만 속이는 것은 아니며, 남성들 자신들도 실제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한 여성은 배란기에 전반적으로 성적으로 활기를 띠며, 배란기에는 노출이 더 잦아진다. 또한 배란기에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유전적 자질을 지닌 남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진화적으로' 개체에 이익을 준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자기기만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며, 의식적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음..배란일이니까 조금 더 파진 옷을 입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은 유전자가 시켜서(이기적 유전자) 하는 것이며, 그것의 상당 부분은 그 개체의 유지, 진화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이러한 대목들에서 스즈키 코지의 <링> 시리즈가 생각났는데, 결국 비디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자체의 번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디오는 이후 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갔다. <링> 시리즈는 공포물이 아니라 아마도 진화생물학적 과학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즉 그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적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결국 우리는 그 자기기만들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14장의 제목은 '우리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이다.) 그것의 이유를 저자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간단하고 개인적인 이유, 즉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던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즉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멸종으로 내몰릴 일이 없는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책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나머지 전체에서 그러한 자기기만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는 계속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승리를 과신하고, 상대방의 전력을 한껏 폄하한 상태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나(이것은 또한 전쟁이 결국 개체수를 줄이고 강한 개체만 남김으로써 진화에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이상한 합리화와도 연관된다. 물론 이 말들이 추운 나라의 열차를 만들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자기기만적인 논리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 대학살, 혹은 명확한 불안신호들을 애써 무시함으로써 죄없는 7명의 우주비행사의 생명을 앗아간 챌린저호의 비극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수많은 예들은 자기기만의 논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자기기만이 빚어낸 크고 작은 댓가(비용)들을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한탄, 아..얼마나 수많은 여자들이 "오빠 믿지?"라는 말에 속아 모텔에 따라 들어갔던가. 그러나 비(희)극적인 건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도 그 믿을 수 없는 '오빠'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저자가 마지막에 애써 제시하는 자기기만과 싸우기 위한 전략들 -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생각 중인 행동을 피하라던가, 어떤 변수를 추정할 때는 처음 추정한 값에서 30%를 줄이라던가, 불편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라던가, 기도와 명상을 활용하라던가 등등의 - 이 영 미덥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맞서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물론 그 싸움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싸움일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무의식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덧.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다 긍정적인 반응은 이런 '이 정도 썼으면 그래도 욕은 안 먹겠지'싶은 자기기만이 가득한 리뷰보다는 보다 곰곰이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자기기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일 터이다. 물론 저자가 "기만과 자기기만 연구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사례가 부족할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p.524)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기기만은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악행을 기록했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노트 한 두 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한정하여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생각해보면 사실 글을, 특히 이런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일종의 지속적인 자기기만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 혹은 내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 혹은 내가 조금 더 잘 떠들 수 있는 것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며, 사실은 내가 좋은 리뷰를 쓰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물론 자기기만은 분명히 '글'을 쓰는 아주 큰 동력을 제공해주기는 한다.) 이 책의 리뷰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영화 리뷰 같은 어떤가. 영화 리뷰란 결국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로 영화를 보는 것이고, 쓰면 쓸수록 계속 그 자기기만을 강화하여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영화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편향된 창작물이며, 어차피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 자신만족 뿐인데 무엇이 상관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타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9000원을 날리게 하거나, 2시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많은 것과 연관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차가운 혹은 뜨거운 반응은 감독의 창작 욕구를 저해시키거나 증진시킬 수도 있고, 혹은 영화에 대한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의 논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아니면 서평단의 경우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자기기만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서평단들은 각자 나름 몇 권의 책을 추천하고, 그 추천한 책들 중에서 한두 권이 선정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체로 본인이 추천한 책에는 리뷰 시에 더 좋은 별점(점수)을 주는 경향이 있다. 시험 삼아 지난 서평단에서 선정된 책 중 6권을 뽑아 그 책을 추천한 사람과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을 비교해 보는 잉여짓을 해봤다(이런 잉여짓은 LG 야구를 보면서 해야한다. 요즘 LG 야구는 열심히 보면 빡치고, 대충 보면 이기는 것 같다. 오늘도 이겼다. - 그리고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자기기만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 예상대로 6권 중에 5권의 경우에 추천한 사람들의 별점평균이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평균보다 최소 0.3 이상 높았다(다른 한 권은 거의 같았다). 이것을 서평단의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면, 이 자기기만은 내집단/외집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터이다. 즉 내가 추천한 책이니 이 책은 '내집단'이 되는 것이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책을 보는 안목을 더 떨어뜨릴 수 있고(사실상 안좋은 책인데, 본인이 좋은 책이라고 믿어버림으로써) 실제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게 함으로써 별 관심없던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한다는 것은 온라인 서점이나 출판사의 이익이며, 그것은 이 서평단을 계속 유지시킬 하나의 필요성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이 서평단이라는 '종'의 유지와 진화에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모든 자기기만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자기기만이기 때문에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할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은 내가 추천한 책이 아니니 나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대로 점수를 주겠다. (그러므로 내 별점은 신뢰할 만하다고 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기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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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9-3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는 맥거핀님의 '내집단'인가봐요. 나머지 한 권이 이 책인줄 몰랐어요. 저자 식으로 세상을 읽으면 세상에는 기만 혹은 자기기만이 아닌 행동이 없고, 내 안에는 날 조종하는 아이언맨이 한 명 들어와있는 것 같아요. 저는 서평단이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긍정과 구입으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가진 한정의 사람에게 책정보를 조금 더 보태주는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겠죠? 세상에는 충동구매도 있으니.. 알고보면 저야말로 책을 충동구매할 때가 많아요. 사야지 벼르던 책은 다른 책인데, 그날 신문에서 본 리뷰가 떠올라 그걸 산다던가.. 물론 매체에 실린 명사들의 리뷰는 마케팅적이지만 독자리뷰까지 그런가 싶은 거죠.

종의 유지가 목표라면 전쟁이나 테러 말고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에 적힌 미래를 향한 화학적 생식력 제거가 차라리 인간적인 것 같아요. 버튼은 여기서 누르고 누가 어떻게 되는지는 자기 손을 떠난 것. 서서히 진행되는 종의 퇴화라면 반발도 덜할 것 같고..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데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자식을 낳고 또 그로인해 경제력은 채워질지 모르겠으나 다른 수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 아프리카 부족의 이상한 종족유지본능이 어릴 때부터 비상식적이란 생각을 했었어요. 아마 제가 일단 아직은 제가 더 중요하고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죠. 확실히 오늘날의 어떤 태세들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말이에요.

맥거핀 2013-10-01 23:19   좋아요 0 | URL
책을 읽고 돌이켜보면 정말로 많은 자기기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자기기만에 대항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거죠. 그리고 자기기만이라는 결국 내가 모르는 나, 그러니까 무의식 같은 것이 행하는 거니까요. 자신의 무의식을 무슨 수로 이겨낸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아주 소극적인 대응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렇죠. 알라딘에서의 활동들도 일종의 자기기만에 가깝기는 하죠. 가까운 이웃들의 글은 그만큼 오랫동안 봐왔으니 이야기가 더 잘 들어오기도 하고, 또 그만큼 잘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어느 틈에 공감을 누르고 있지요. (물론 생각해보면 '공감'이라는 것이 결코 잘 썼다는 의미는 아니고, 말 그대로 '공감'한다는 것입니다만..'공감'한다는 것이 꼭 잘 썼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구요.)

아무튼 책은 흥미로운 편이었어요. 이론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례 중심이라 읽기도 조금은 편한 쪽이었구요. 아참참 댓글 늦어서 미안해요. 근데 사실 요즘 솔직히 알라딘에 잘 안들어오게 되기는 하네요. 이상하게도.

Shining 2013-09-30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음...왜 책은 별로 재미 없어 보이는데 맥거핀님 리뷰는 이렇게 흥미진진한거죠?(아부 진짜 아니고요, 정말요_-) 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즈민>을 며칠 전 보고 왔는데.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이 떠오르네요. 자기가 속은 줄도 몰랐던 여자였는데, 실은 자기가 자기를 속인 여자. 자기가 자기를 속였다는 것도 속이거나 숨기는 여자.

서평단과 관련된 가설(?)은 저도 서평단 할 때마다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네요. 항상, 제가 원하던 책이 채택되길 바랐는데 막상 되고나면 왠지 책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상한 논리. 그래서 먼저 나서서 까게(!!) 되거나 은근슬쩍 옹호하게 되는 스스로의 태도. 그러다 보니 차라리 남이 추천한 책이 되길 원했던 이중성 같은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서 좋네요, 맥거핀님의 글은 :)

맥거핀 2013-10-01 23:19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제가 추천한 책이 안되는 쪽이 약간 아쉽기는 해도, 리뷰 쓸 때는 왠지 마음이 더 편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가설을 만들어 실험(?)을 해봤던 건데, 저도 결과가 솔직히 약간은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편향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인 걸까요? (그럼에도 저는 사실 이 서평단이라는 게 유지된다는 게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이게 책의 홍보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걸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사실 영화라는 것도 얼마나 자기기만이 작용하는 것인지요. 같은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나와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야기들, 숏과 씬들은 머리 속에서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렇게 아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끌어내는 영화들이 사실은 더 좋은 영화일 때가 많지요. 자기기만은 영화를 보는 데에도, 혹은 만들어내는 데에도 필수적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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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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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3 2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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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6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8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9-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서 자꾸 뭔가 걸리는데? 라고 생각했던게 여기서 처음 지적한 부분인 이야기가 문화통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군요. 깨닫고 가네요.

맥거핀 2013-09-28 01:1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확실히 의도적인 부분이 있죠. 가연님도 말씀하셨지만 저자의 관점은 명확하니까요. 저는 그런 관점하에서 조금 더 '분석'에 가까운 내용들을 보고 싶었는데, 분석이 평이한 수준이라 아쉬웠어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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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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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1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 하다가 한 마디를 붙여놓는다. 그러니 사실 이 이야기는 (하루키의 많은 이야기가 사실 그러했듯이) 김난도 식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나 성찰보다는 늘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견디는 법이나 휩쓸리지 않는 법을 얘기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무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 다른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선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 때 나는 하루키의 많은 책들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 당시의 많은 책들은 분노하는 법을 가르쳐줬지, 자신을 스스로 위무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색채가 없는...>은 하루키의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여전히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지만, 적극적으로 비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예전의 작은 위무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해두자.

걸리는 부분 중에 하나는 예를 들어 책 안의 강조점과 같은 부분들이다. 하루키의 소설 혹은 에세이들에는 늘 강조점(글씨체가 바뀌는 것 같은)들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떤 글이든 중간에 색을 바꾼다거나 글자체를 바꾼다거나 하는 강조가 들어간 글들을 잘 읽지를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강조는 결국 읽는이가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hining 2013-08-2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하다 (저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이번 리뷰는 본문보다 덧과 댓이 조금 더 좋네요.

맥거핀 2013-08-23 17: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hining님 요새 많이 바쁘신가봐요. 서재에도 뜸하시고...바빠도 건강 잘 챙기세요. 저는 요즘 여름감기로 애를 먹고 있어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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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파과'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破果, 그러니까 으깨지거나 뭉그러진 과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게 되는 서효인의 <저글링>에 나오는 짧은 글귀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미련을 더 이상 두지 않는 과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년의 여성 킬러는 냉장고 안에 언젠가 넣어두었던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의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버리기 위해 조각을 모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음을 내뱉는다. 으깨진 과일 같은 것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신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으깨진 과일일 것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뭉크러진, 한 때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처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아니,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별명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조각, 복숭아 조각,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달라붙어 잘 떼어내지 않는 복숭아 조각.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손톱 조(爪)에 뿔 각(角)인 조각, 다시 말해서 각이 진 손톱, 혹은 날카로운 손톱.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유능한 킬러였으며, 맡은 바 임무를 무리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솜씨좋은 재주를 가진 방역업자였다. 그녀에게 손톱은 치장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이전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손톱 조'라는 한자의 생김새는 조금 재미있는 데가 있다. 손톱 조(爪)자 밑에 삐침을 하나 붙이면, 오이 과(瓜)자가 된다.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손톱 조(爪)'란 '오이 과(瓜)'가 깨어진, 혹은 파괴된 것이다. 즉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를 통해서 연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파과(破瓜)'다. 이 파과(破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관된 여러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일단 파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한다는 것으로 오이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 2개가 되어 그 두 개를 합한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동시에 파과라는 말은 여자의 처녀막의 상실, 즉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됨, 혹은 월경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16세, 혹은 사춘기, 청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파과란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깨지며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시기다. 그 파괴되는 무엇인가를 단순히 처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순수함이나 그간 자신의 주위에서 애써 유지되던 세계, 헤르만 헤세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조각 역시 그런 나이에 그녀 주위의 세계가 부서져 나갔다. 당숙의 집에서 나름의 세계를 더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균열점들은 알을 조각냈고, 그녀는 모든 것이 깨지려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본능을 발휘하여 방역업자로서 거듭났다. 즉 그녀는 이중의 파과(破瓜)를 맞았다. 의미로서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파과를 맞이하였고, 글자로서도 오이 과(瓜)가 깨어진 손톱 조(爪), 조각(爪角)이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조각이 났다. 조각난 삶을 겨우 지탱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류의 존재였다. 류는 세상과 그녀를 연결하는 접착제, 끈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갈 곳 없이 내버려진 그녀를 지탱시키는 심리적인 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였고, 그녀가 류의 지시를 받아 방역업을 해나간다는 업무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어쩌면 류와 뭔가 불안한 무엇일지라도, 행복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깨진 세계는 또다시 쉽게 깨질 수 있는 법.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겨지는 류의 말들과, '무용'이라는 늙은 개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깨진 조각이 다시 무엇인가를 붙여나가는 이야기이다. 무엇으로 무엇을 붙여나가는 것인가. 뭐 강박사라고 해도 좋고, 해니라고 해도 좋고, 투우라고 해도 좋고, 손톱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종장에 등장한 어느 네일샵의 이름모를 어린 막내 여직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 노년의 여성 방역업자는 자신의 손톱 위에 무엇인가를 덧씌운다.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다른 색과 무정형 도안이 불꽃놀이처럼, 혹은 과일 열매처럼 퍼져 나가는 인조 손톱. 그리고 네일샵의 원장은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막내 여직원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지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렇게 조각은 무엇인가를 붙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조 손톱이라고 해도 좋고, 막내 여직원과의 이상해보이는 공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붙여나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에 그녀가 네일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서 나왔거나, '서장'에서 벌어진 현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하철에서의 어떤 소동들, 그러니까 나이든 남자와 젋은 여인이 자리를 두고 시비를 붙고, 50대 여인은 중재에 실패하며, 젊은 임부의 낭패한 얼굴과 눈물을 덤덤히 견뎌낸 조각이 방역업에 결국 성공하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붙지 않을 것만 조각이 점점 무엇인가를 붙여나간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여성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당숙 집에 얹혀 살던 소녀에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친척언니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으며, 류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 역시 류의 아내 조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는다. 강박사가 붙고, 강박사의 부모와 해니가 붙고, 길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이 붙고, 결국에는 투우도 붙는다(이를 가족을 잃은 자들의 이상스런 연대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가족(류)을 잃은 조각과 아내 혹은 엄마를 잃은 강박사와 해니,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투우). 그러니 그녀가 네일샵의 막내 여직원과 이상한 연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관계에 있어서) 무용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방역업에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무용'하다. 그녀가 키우던 늙은 개의 이름처럼 말이다. '무용'이라는 개는 그녀의 어떤 단면이다. 예를 들어 개 '무용'은 '현관에 정좌하여 돌아온 주인을 향해 꼬리를 예의 바르게 흔들기는 하지만 뛰어올라 몸에 달라붙으려고 하거나 코를 비벼대지 않'으며, '무념무상의 도를 실천하며 달관의 몸짓으로 주인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 '무용'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은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용(無用)'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쓸모없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파과(破瓜)함으로써 조각(爪角)이 되었고, 그 조각들은 결국 파과(破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붙여나감으로써 다시 그녀는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새로운 파과(破瓜), 또는 합과(合瓜)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번째 파과는 그녀를 다시 조각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손톱 위에 인조 손톱을 붙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대로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일 것이다.

 

 

덧.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종장'이다. 아마도 이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게도 영화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수습이나 될 수 있을까 싶던 이야기(사실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 마지막들이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고령화가족>이나 소설 <파과>나.)에 붙는 너무 희망적이라 도리어 믿고 싶어지는 에필로그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이 너무 말들이 안된다고 머리에서 말해주는데, 마음에서는 이상하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 참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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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8-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 맥거핀님 소설 리뷰다아.. ^^ 얼마전에 뒹굴거리다가 <고령화 가족> 영화로 보는데 예전에 봐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소설보다 더 단조롭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느껴졌어요. 하찮은 시나리오에 거물급 배우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듯한 기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소한 작품에 나오는 이름있는 배우들이 고맙게 느껴졌어요. 저 '파과'의 의미를 해석하는 이벤트가 어디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읽어보려다 말았습니다..

잘자요, 일찍일찍 자요, 맥주 마시지 말고요!

맥거핀 2013-08-10 16:38   좋아요 0 | URL
<고령화가족>을 만든 송해성 감독의 영화는 사실 다 구려요. <파이란> 같은 것도 말이죠. 근데 이상하게 그 영화들을 까지를 못하겠어요. 이 영화들에는 뭐랄까, 어떤 따듯한 정서랄까, 인간에 대한 예의랄까 같은 게 스며들어 있어서 그래도, 괜찮잖아?라고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어요.

사실 <고령화가족>도 좋은 원작에 좋은 배우들 데려다놓고 만든 것 치고는 상당히 말아먹은 영화고, 마무리도 참 이상했지만, 저는 나름 좋았어요. 그래도 감독이 인물들에 대해 애정이 있구나 싶어서요.

아..이벤트 있었죠. 녹즙기 주는 이벤트였는데, 저는 왠 녹즙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았습니다. (파괴된 과일이니 갈아서라도 먹어라, 뭐 그런 걸지도..) 녹즙기보다는 맥주가 좋습니다. 맥주 주는 이벤트였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썼을텐데.

아이리시스 2013-08-12 12:43   좋아요 0 | URL
이건 좀 아줌마 잔소리 같지만.. 술에 영혼을 팔면 안됩니다. 술 안마신다고 반드시 건강하다는 법도 없지만, 술을 거뜬히 감내하려면 그만큼 몸에 좋은 걸로 해독작용도 시켜야 해요. 요즘은 음식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거 믿고 있어요. 여러번 겪었고. 저는 건강염려증 환자는 아니지만 오래 전에 큰아버지 돌아가신 가족력도 있고 아빠도 워낙 술을 좋아하셨고 사업차 많이 드셨고, 두려운 순간이 많았어요. 제가 아빠딸이면 완전 술꾼일텐데 엄마체질을 더 많이 닮아서 몸에도 잘 안받아요. 그래서 저도 제가 못마시는 줄 알았는데 웬만한 여자들 평균만큼은 거뜬히 먹더라고요. 놀러가서 술술 하는 친구들은 제가 못 먹는 줄 알지만 전 그냥 못 먹는다고 해요. 시집도 안갔고 태어날 애기도 걱정되고 원래 튼튼체질이 아니라서 둔해질 머리도 염려스럽고.. 어느새 건강염려증 환자.

그래서 모두 정도껏인게 좋아요. 녹즙기, 맞다, 녹즙기. 그건 웬만해선 집에 있는 거라서 관심 덜하겠네요. 녹즙기가 문제가 아니라 갈고 분리하고 씻고 말리고 그게 더 짜증.

아이리시스 2013-08-12 12:48   좋아요 0 | URL
근데 이런 얘기 왜 했지. 맥거핀님 술꾼인지 아닌지 저는 모르잖아요. 으히히. 갑자기 술론이 나와버렸어요. 아, 책 말이죠, 신용카드 요즘은 인터넷서점들 무이자 할부 카드 없더라고요, 거의. 맨날 3개월 해놓고 한 달에 한 세 번 사버리면, 아니 왜 할부는 했냐고요ㅋㅋㅋ

맥거핀 2013-08-13 22:51   좋아요 0 | URL
으하하..저 술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술꾼이라고 불릴 급은 아니고, 그냥 잡스러운 정도입니다. '술꾼'이라고 하면 왠지 좀 아티스트 같은 느낌이 있잖아요? (아..나만 그런가..근데 술꾼도 급수가 있어요. 조지훈 선생의 주도 18단계인가 뭔가 있는데, 그 구분에 의하면 저는 한 2,3급 정도?)

으히히..기껏 걱정해주셨는데, 한다는 소리가 무슨 2급이니 어쩌니 하니까 한심스럽지요? 하긴 뭐 술이 몸에 안 좋은 건 다 알죠. 되도록 안마시는 방향으로 가기는 해야죠. 아이리시스님은 술이 몸에 안 받는다니 복받은 겁니다. 그냥 안받으니까, 안먹어요, 이게 젤 좋아요. 그러니 그냥 좋은거임.

신용카드는 그러니까 일시불로 질러야함..괜히 책 값 같은 거 3개월 할부로 끊어봤자, 3개월 후에 카드값은 나가고 있는데, 책은 안 읽고 그대로인걸 보면 속 터진다니까요. 최근에는 책은 되도록 가지고 있는 책 중고로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사거나 적립금 받은 걸로 사거나, 아니면 되도록 중고로 사자고 생각하고 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요. 대학 때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말자'고 원칙을 세웠는데, 그 때 '단 반드시 읽을 것'이라는 원칙을 같이 세웠어야 했어요.

술값을 줄이면 책을 그만큼 많이 살 수 있겠죠? @.@


아이리시스 2013-08-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정원이다 ㅎㅎ

맥거핀님하고는 이런 게 어울림.







맥거핀 2013-08-17 16:40   좋아요 0 | URL
아니..저것은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저 보기보다 감성적인 사람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어느덧 맥주에 눈이 돌아간 나를 발견하게 됨..)

사진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