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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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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는 조금 생소하다. 플루토크라트(plutocrats)는 경제적 권력, 그리고 동시에 정치적 권력을 손아귀에 쥔 경제사회구조의 최상위층을 지칭하는 말로, 이들은 여러가지 비슷한(그러나 매우 다른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조금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부자(rich) 혹은 '특권계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의 다른 이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슈퍼엘리트, 혹은 '1퍼센트'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사실 많은 것은 이름이 좌우하는 법이다. '적대적 인수합병'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음험한 기운을 풍기지만, 조금 돌려서 '사모펀드'라고 하면 왠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저자가 굳이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일단 무엇인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중립적인 서술'과 같은 용어를 쓸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이 책은 결국 '플루토크라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플루토크라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조금은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런 플루토크라트들을 묘사한 영화나 책들이 보여주는 어떤 일반적인 이미지들, 혹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99%, 혹은 99.9%의 나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어떤 믿음들이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은 매우 부유하지만, 가정은 온갖 불화로 가득차 있으며, 성격은 괴팍하나 내 여자에게는 따듯하고, 돈이 많아 허구헌날 빈둥거리며(드라마의 재벌가 아들들은 도대체 일은 언제하는가), 정신적으로 어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라는 어떤 이미지, 혹은 믿음들 말이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한 농부와 불행한 백만장자'의 패러독스 말이다. 그것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저들은 저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불행할 거야, 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런 확신이 없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이들에 비해 더 똑똑하고, 더 신념을 가졌으며, 더 일을 많이 하고, 어쩌면 더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더 행복하며, 심지어는 도덕적으로도 더 나은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도덕을 기부액으로만 판단한다면 말이다).
 
즉 이 시대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예전의 부자들처럼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인 자들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도금 시대(Gilded Age), 즉 산업혁명의 수혜를 받은 신흥 백만장자들이 급속도로 나타나던 시대만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문명의 혜택을 받은 자들과 기존의 왕가, 귀족 세력이 뒤섞여 있었으나, 지금의 쌍둥이 도금 시대, 즉 세계화와 기술혁명과 워싱턴 컨센서스(로날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등의 친기업 정책)의 혼합으로 탄생한 신흥 플루토크라트들은 일하는 부자이며, 그들은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 자본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급여 소득, 그러니까 일해서 받는 돈으로 플루토크라트가 된다. 즉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아버지가 물려준 부동산 등에서 나온 임대소득과 정치적 권력을 적절히 조합하는 등의 방식, 혹은 단지 자본을 축적하여 '돈으로 돈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버드의 금융관련 학과를 졸업하여 일찌기 월스트리트에 들어선 다음, 자신의 아이디어와 당대의 기술혁신을 적절히 조합하여 결국 투자회사의 CEO에 오르거나, 자신만의 벤처회사를 여는 사람들이다. 즉 이들 중의 상당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당대의 기술혁신이 가져오는 새로운 분야를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남들보다 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신흥 시장들을 적절히 공략하며, 세계화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즉 이들이 플루토크라트들이 된 것은 어느 정도는 이들이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이 책의 하나의 관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는 몇 가지 질문, 혹은 잔상이 따른다. 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일단 플루토크라트가 되면 비슷한 생활방식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들이 플루토크라트가 된 이유 자체는 훨씬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위에 든 월스트리트의 루트나 벤처기업의 루트도 있지만,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켜 시장전체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 아닌, 지대 추구(rent-seeking)와 같이 단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플루토크라트가 된 사람들도 있고, 권력층에 깊숙이 밀착하고, 보다 착취적인 방식이나 혹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플루토크라트들이 있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플루토크라트들의 공통점은 사실 이것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것이란, 이들은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한 놓치지 않으려 했으며, 그들에게는 동시에 (아주 큰) 운이 따랐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본다면, 이들을 일괄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들은 어떤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처럼 악마나 악인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영웅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플루토크라트들이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이 시스템은 이들에게 쉽게 어떤 이미지를 씌우려한다. 예를 들어 카네기, 록펠러 같은 이들이 위인의 목록에 들어가 있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라면, 백만장자가 지구를 구원하는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의 이야기는 보다 현대적인 방식이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이들의 착취보다 이들의 기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플루토크라트들의 상당수는 기부와 자선에 큰 뜻을 가진 인물들이기도 하다. 단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기부를 하지만, 왜 그 기부가 필요한 이들이 탄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주교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빵 한덩이를 주면 훌륭한 성직자가 되지만, 그들에게 왜 그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알려고 하면 빨갱이가 될 뿐이다.) 이들은 단지 그 나머지 사람들 모두와 동일하게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의 인간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 즉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다음의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플루토크라트들은 누가 제어하는가, 즉 CEO의 월급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혹은 배트맨, 당신은 도대체 누가 감시하지,라는 조커의 질문. 그러나 현재대로라면 이들을 제어할 어떠한 안전장치도 튼튼하지가 않다. 영화 속 배트맨은 너무나도 착해서, 혹은 너무나도 초인적이어서,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가 있었지만(영화 <다크나이트>는 이 관계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현실의 배트맨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통의 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즉 그들이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보다 튼튼한 안전장치, 보다 튼튼한 자물쇠가 필요하고, 그것은 보다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정부의 정책, 혹은 행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음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스위스에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의 임금이 그 회사의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1대12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가 결국 부결되었다. 그 부결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위스의 수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세계화는 자본과 기술을 자유롭게 이동시키고 있으며, 한 국가 내에서만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플루토크라트의 관점에서 보면) 더할 데 없는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즉 플루토크라트들이 세계 시민으로서 그 번영을 누린다면,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세계 시민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져있다. 다시 말해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마르크스의 호소는 공산주의가 하나의 실패를 보여준 지금에도,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책에서도 말하지만, 이 극도의 불평등이 완화되었던 도금시대와 쌍둥이 도금시대의 사이에는 강력한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재산을 기꺼이 나누도록 자극했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개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던 것이다. 볼셰비키 선봉대가 권력을 장악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노동 계급에게 정치적 발언권과 사회적 안전망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p.425)"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덧.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예를 들어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칭송을 보면서 이 책의 어떤 '중립적인 서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좌파 진영의 몇몇 비평가들과 달리, 프릴랜드는 부자들을 헐뜯지 않는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서술 방식은 이 책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렵게 한다. - <USA 투데이>"  중립적인 서술이란 늘 위험하고, 동시에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늘 되묻게 만든다. 그것은 물론 책을 읽는 우리들이 대체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는 내 관점에서는 이런 중립이 무너진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프린스의 해고는 타당했다. 그가 리더로 있는 동안 시티그룹은 서브프라임 시장에 대한 노출 수위를 높였고, 기존 스와프 상품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규 신용부도스와프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중략) 물론 음악이 나올 때는 춤을 춰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멈췄을 때, 앉을 자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패배자이다. (p.263)" 이 대목은 혁명(여기서의 혁명이란 흔히 말하는 혁명이 아니라, 돈을 벌 기회로서의 '혁명'이다)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리더들의 실패를 조명하며 2007년 시티그룹의 CEO였던 척 프린스의 실패를 그 하나의 예로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돈을 벌 기회를 놓친 실패자, 혹은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실패와 패배의 이야기로 끝날 부분인가. 그 신용부도스와프는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앉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었는가.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저 이들을 실패나 패배로 규정지을 뿐이고, 이 패배자 이면의 고통받는 피해자들, 그러니까 이들 때문에 큰 고난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문제는 이들의 패배나 실패가 아니라, 영화 <월스트리트>에 나온 고든 게코의 말처럼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다 쓴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이 책은 몇몇 부분에서 이 영화 <월스트리트>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 뉘앙스를 보면 약간 조롱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으로부터 돈을 더 벌 기회를 놓쳤느니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관점은 곳곳에서 나오는데, 예를 들어 253 페이지에서도 중국의 라이창싱이나 러시아의 호도르콥스키 같은 비리로 얼룩진 갑부들의 예를 들며, 이것을 단지 '최상류층의 불안정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이 단지 그런 언급으로 끝날 문제인가(물론 이 사건들이 일종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거나, 일종의 권력다툼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경력이나 이력으로 볼 때 이 서술들에서 어떤 중립을 찾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떤 글로벌 포럼에서 사회를 맡고,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각각의 등장하는 플루토크라트들의 이력을 빼놓지 않고 적절히 인간미를 담아 소개하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 포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하고, <파이낸셜 타임스>와 <글로브 앤 메일>의 부편집장을 지낸 저자의 이력이야말로, 아마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마셜 효과(일종의 낙수효과. 즉 플루토크라트의 근처에 있으면 콩고물을 얻어먹게 된다는 말. 그러나 콩고물이 묻으려면 그만큼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의 한 예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뉴욕의 한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는, 문학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공비결은 기업인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고 한다. (p403.)"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이 책도 분명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그리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런 칼럼을 가끔 싣는 잡지이다. 이렇게 충실하게 재인용을 해주는 '조선'의 친절함을 보라. 그리고 또 하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 출신의 저자의 책이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 선정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개그인가?

 

중간에 2장부터 5장까지가 거의 지루한 나열(플루토크라트 영웅전)로 채워지고 있다는 단점(개인적으로는 책의 시작과 끝, 즉 1장과 6장만 읽어도 이 책을 이해하는데 거의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은 넘어가더라도 이 얘기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이 책은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자체적인 문장부호 표기법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어 따온 말은 홑낫표(「」)를, 그 안에서 다시 따온 말은 꺾은 괄호(<>)를 쓰는 등의 표기법이 그러하다(또 그 안에서 강조하는 말은 두 겹 꺾은 괄호(《》)를 쓰고 있다). 이러한 표기법은 영화 제목을 꺾은 괄호로 쓰고, 출판물이나 잡지를 홑낫표로 쓰는 등의 기존표기법과 맞물려 글을 상당히 어지럽게 만든다. 왜 '열린책들'만 이런 표기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여 그렇게 쓴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표기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일러두기' 등을 통해 간단한 설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덧 2.
이번 서평단의 두 책 <일베의 사상>과 <플루토크라트>는 내가 관심이 없던 세계, 혹은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솔직히 <일베의 사상>을 이 책보다 더 열심히 읽은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책의 흥미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플루토크라트가 될 수 없지만, 대신 당장 오늘밤에라도 일베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상을 본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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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2-2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충 되지 마요, 맙시다, 될 수도 있긴 있겠지만. <플루토크라트>는 읽으려고 했으나 읽지 않은 책인데 별이 두 개라니.. '1대12법' 좋은 방법 같아서 우왕, 하고 있는데 그런 반전이 있구나, 에잇. 세상에 쉬운 게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재벌남과 가난한 캔디녀의 달콤한 로맨스 후에는 반드시 경제서 한 권 흡입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전혀 하고있진 않지만. 판타지와 현실의 균형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한달에 두 개쯤 '다큐' 리뷰코너를 만들까 생각중인데..(우선 남몰래 함 해볼게요)

이 부분 특히 맘에 안들어요,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이거 정떨어진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걸 누군가에게 숟가락 얹어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특히 '과시'적인 사회가 된 것 같아서요. 심지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렇고.

맥거핀 2013-12-29 21:56   좋아요 0 | URL
아..답글이 많이 늦었어요. 벌써 주말이 다 지나갔네요. 그렇다고 주말에 뭐 특별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저는 애매한 별점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면 그저 호불호를 밝혀주는 게 낫다고 봐요. 제 별점은 업 앤 다운 정도로 생각해주세요.ㅋ 업이 아니라 다운 쪽인 건 제 생각에는 아무리 이 책을 읽어도 그들에 대해서 결국 알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보통의 인간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는데, 인간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다들 탐욕도 부리고, 나쁜 짓도 하고, 가끔은 선의도 보여주고 그러는거죠. 물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기는 하지만요.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브레이크 걸기 어렵잖아요?

아무튼 그 1대12법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이 결국 부결되었지만, 그래도 저 곳은 우리사회보다 참 여러모로 성숙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저런 비슷한 법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익히 짐작이 가잖아요. 그래도 적어도 저 사회는 토론을 거쳐 그것을 투표에 부치기까지 하니까. 지금도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최소한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죠. 참 답답합니다. 후..

아..그리고 '다큐'리뷰 쓴다고 약속한겁니까? 어디다 몰래쓰면 내가 꼭 찾아내야지. 익명으로 악플달리면 저인줄 아십셔.ㅋㅋ 저는 반대로 판타지가 많이 모자라요. 어떻게든 판타지를 좀 채워야 하는데..

 
[일베의 사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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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박가분의 책 <일베의 사상>은 일베, 혹은 일베라는 어떤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라는 사이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굳이 따지자면 '하지 않는다'와 비슷한 의미가 될 것인데, 과연 어느정도까지를 '안다'라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라도, 아무래도 들어가서 글 몇 개 본 정도로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지금 상황은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떤 영화를 본 평론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댓글을 남겨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래도 이런 댓글은 무엇인가 방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적대적 호수성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 책은 '일베의 사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제목만으로도 무엇인가 의아할 것 같은데, 도대체 일베에 '사상'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있는가, 혹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아는 상당수의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현실의 집단에서는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서의 금기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난을 퍼붓는 것은 거의 일상화된 수준에 가깝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실수이든 다른 무엇이든) 일베의 용어를 쓴 아이돌 가수가 사과문을 올리고, '일밍아웃' 같은 용어가 있는 것은 그런 풍경을 어느정도 보여준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의 이면에는 일베를 어떤 '쓰레기'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라면 일베는 매우 더러운 무엇인가가 모여 있는 어떤 곳이며, 굳이 들출 필요가 없으며, 곧 폐쇄시키는 것이 마땅한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저자도 이 책에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이야기하며, 코끼리, 그러니까 보수주의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일베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혹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문제는 보다 간단할 수 있다. 쓰레기는 버리거나, 어딘가에 묻어두면 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사이트라면 그 사이트를 폐쇄하거나, 법적인 제재를 가하거나, 접속을 차단하거나 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이, 이것이 쓰레기라고 했을 때, 그것은 썩지 않는 쓰레기라는 점이다. 즉 썩는 쓰레기라면 그것을 어딘가에 버리면 언젠가는 한낱 유기물로 돌아가겠지만, 이 괴이한 쓰레기는 썩지 않고 계속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데다가, 때로는 사람에게 달려들기도 한다. 다시 인터넷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아마도 이 일베를 없애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한다면 분명히 비슷한 다른 무엇인가의 형태로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오백원 건다). 그러니 적어도 이것이 현재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이 책처럼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길래 안 썩지,하고 보는 것이다. 혹은 조지 레이코프처럼 굳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쓰는 것이다(물론 '코끼리'를 정말로 쳐다보기도 싫다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굳이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박가분은 인터넷 논객답게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를 '세줄 요약'의 형태로 제시한다. 그것은 첫째,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하며(이 말이 정 불편하다면 일종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이 말이 특히 중요하다)'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이며, 셋째, 이러한 일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장, 즉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저자의 일종의 제언이기 때문에 제쳐두고라도 첫째와 둘째, 특히 첫째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가 이 촛불을 든 내 손에서 시작되었다고, 나한테서? (물론 모든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없다. 쓰레기는 결국 버리는 자, 그 자신이 애초에 만들어낸 것이다.)

 

직관적으로 보이듯이, 이 첫째와 둘째, 셋째는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 미래, 즉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로 끌고들어오는 현재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이 현재는 과거, 그러니까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에 의해서 배태되었다. 즉 박가분의 방식은 일종의 거슬러오르는 방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 그 기원을 거슬러 올랐던 것처럼, 아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왜 썩지 않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공장을 살펴봐야 하는 것처럼, 박가분은 그 기원을 거슬러오르는 작업을 시작한다. 물론 가장 가까이에, 즉 시작지점에 있는 것은 디시인사이드의 인기자료를 저장해 놓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출발했던 일간베스트저장소, 그러니까 일베지만, 그 이전에는 디시, 혹은 디시와 비슷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공유했던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은 예를 들어 부정과 긍정의 양식이 공존했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짤방이나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이 한 예이다), 인정투쟁과 계급투쟁, 혹은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과 같은 것들이 그와 같은 것들이다. 

 

즉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일베의 어떤 행동양식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자생적으로 자라난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떤 행동양식이나 공유하는 무의식이 일베의 행동양식의 초석이 되었고, 일베는 그것을 더 위악적으로 변형시켰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변형이라기 보다는 집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일베라는 것은 집적된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집적은 여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촛불도 결국은 집적의 한 형태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파의 집적이 일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좌파의 집적은 촛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2002년에 시작된 촛불은 현실의 정치인 노무현을 탄생시켰으나 노무현 정권은 궁극적으로 촛불의 의미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2년의 반미정서는 이라크 파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무엇인가는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 즉 2008년의 촛불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미완이었고, 이것은 곧 일종의 그 거울의 형태, 혹은 전향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일베이다.

 

물론 이것은 거친 도식화이고, 일베의 모든 것이 일종의 '전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촛불에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향의 형태가 그렇듯, 전향자와 전향하지 않은 자들은 공유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일베가 감성적인 이상주의를 비웃으며 '몰이상의 이상'을 추구했다면, 촛불은 중심에 구속받지 않으며 즐기면서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친다는 '몰이상'을 공유했으며, 일베가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에 끌어왔다면, 촛불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들어달라는 인정투쟁의 한 형태였다(물론 이 부분은 촛불의 형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정상국가의 양태는 다를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각자 다른 의미에서 정상국가가 도래하기를 꿈꿨다. 즉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결국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국가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일베는 이러한 것들, 즉 과거의 인터넷 무의식과 촛불에 대한 반동이 뒤죽박죽 얽혀 있다. 그들의 최종의 정언 명령, 즉 '인터넷의 방식으로 다같이 동물이 되자'는 것은 집밖으로 촛불을 들고나온 촛불집회에 대한 반동과 과거인터넷의 행동양식이 결합되어 있으며, 다른 일베의 행동양식들, 그러니까 팩트의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찾는 행위(누군가의 글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과거 글을 논박의 재료로 삼는 태도와 같은 것이 일례이다. 이른바 '팩트'를 찾는 일베 유저의 태도는 일베충을 몰아내기 위해 그의 과거글을 찾는 다른 커뮤니티의 자세와 통하는 점이 있다), 혹은 타인혐오(와 자기혐오)에 깃들여 있는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무의식의 계승과 촛불(로 대변되는 무엇인가)에 대한 반동이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정념덩어리인 것이다.

 

물론 다시 강조하자면 결국 이 모든 것, 즉 과거로 거슬러오르는 것은 미래를 끌어내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미래란, 일베라는 것을 없애지는 못해도, 적어도 현재의 어떤 형태에서 바꾸기 위함이다. 다시 비유로 돌아가면 썩지 않는 쓰레기에서 썩는 쓰레기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리고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그 기원에서 보게 되는 것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나의 손, 촛불을 든 나의 손, 혹은 촛불의 대의에 일정부분 공감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위험한 끝맺음일까.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잡아 족치려고 애타게 찾아 헤맸지만, 그것이 결국 나라면, 문제는 더 간단할 수 있다. 내가 안버리면 되니까. 물론 저자가 제시한 해결책(위에 셋째)은 미완의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정투쟁이 불필요한 공간, 최소한의 인정이 가능한 각자의 공간을 만들자는 것, 그것은 환멸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니까. 환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과거의 촛불에서 참가자들은 축제가 지속되기를 바랬다. 환멸을 견뎌내야 하니까. 축제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환멸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제는 끝났고, 환멸을 견뎌내지 못하는 누군가는 일베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축제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축제화다. 나의 일상이 작은 나만의 축제들로 이어진다면 외부의 축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국가'가 하등 필요하지 않다. 저자가 인용한 조윤호의 글(나는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 촛불집회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윤호 <개념찬 청춘>, 248p, 박가분 <일베의 사상> 257p에서 재인용)도 그것을 말해준다. 나의 축제에 국가가 초대받을 이유란 없다.

 


덧.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과연 이 책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필요했나 하는 것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그 옳고그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물론 솔직히 말해서 지적할 능력이 안된다). 개인적으로는 닭을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듯한 느낌이다. 예를 들어 한 영화에 대한 분석에서 약간 포커싱이 나간 장면을 두고, 이것은 우울하고 몽환적인 당대의 배경을 담아내며, 키예슬롭스키에서 소쿠로프로 이어지는 유미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시도라고 말하는 격이다(그냥 손에서 나오는대로 쓴 문장이다). 사실은 단지 촬영감독이 어제 마신 술이 덜 깼거나, 카메라 포커싱을 맞추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개인적으로 어떤 영화에 대한 글에 동의하기 위해서 는 일단 그 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나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가 설혹 잘못된 인용이나, 얼토당토 않은 이론을 끌어온다고 해도, 일단 그 글의 구조, 혹은 분석이 나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뭔가 들어맞는 듯 보이면서도 미심쩍게 만드는 이 수많은 사상가들의 인용목록이 다시 한 번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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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지금도 꽤 잔재가 남아 있지만) 한 때 영화 비평에서 '프로이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정신분석적 비평이라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을 차용하여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것에 기대자면 <설국열차>는 커티스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내가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하여 미련없이 죽는 이야기이며, <그래비티>는 우주선이라는 남근이 대기권이라는 처녀막을 관통하면서 무성의 존재 라이언이 성적 존재로 귀환하는 과정이다(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신형철과 허문영의 이야기이다). 물론 더 나아가면 이렇게 말할, 혹은 이렇게 조롱할 수도 있다. <설국열차>는 기차라는 남근이 터널이라는 질을 통과하는 것이며, 마지막 기차의 폭발은 사정과도 같다, 혹은 <그래비티>는 어떻게든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아이의 욕망(몸을 태아처럼 감싸는 라이언)이며, 어머니인 가이아 대지와 섹스하고 싶은, 그리고 결국 그것에 성공하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상당수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참 아무데나 잘도 갖다 붙이는구만. 아마도 프로이트가 들은 비판의 핵심도 그것에 어느 정도는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참 잘도 갖다붙인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또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영화 비평, 혹은 기타의 예술 비평 분야에서 각광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론의 범용성이 뛰어나다는 것. 왜? 모든 예술은 인간의 손으로 탄생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에게는 성기가 있으니까. 즉 어떤 인간도 성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즉 프로이트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과학은 오히려 비웃는 쪽에 가까웠고, 그의 이론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찬사를 보낸 쪽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상의 추락>의 저자 미셸 옹프레의 비판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말은 결국 이건 과학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거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있고, 글이 난삽한 부분이 있지만, 옹프레의 비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기원이 감추어져 있다. 프로이트가 마치 창시자처럼 되어 있는 정신분석학은 니체, 쇼펜하우어, 하르트만 등의 철학에 상당부분 빚진 것인데, 그것이 마치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것처럼 알려진 까닭은 자신의 연구에 관련된 기록을 소각하는 등 그가 벌인 행위들 때문이다. 둘째,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인류 전체의 이론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 자신을 위한 이론이며, 그의 어린시절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즉 다시 말해서 모든 아들들이 어머니와의 동침을 애타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 자신만이 그랬을 뿐이다. 셋째, 코카인에 대한 연구, 미심쩍은 치료법들, 개인적으로 치부가 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 넷째, 과학적이라고 그가 주장한 정신분석학은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사실상 그가 지어낸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그것은 반박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수행적 발화'라는 점에서도 비과학적이다. 또한 그의 삶에는 숫자, 미신,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 등등 비과학적인 요소가 점철되어 있다. 다섯째, 그는 돈이 많은 환자를 선호했으며, 남성우월주의자였고,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으며, 성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을 억압하는 쪽에 가까웠다. 즉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여섯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그가 치유한 환자는 거의 없으며, 도리어 그는 환자가 어느 정도는 완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프로이트가 전 일생을 통해서 관심을 둔 것은 환자를 치유하는 일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을 유명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그가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놓고 보면 프로이트는 거의 (사이비) 교주처럼 보인다. 옹프레의 비판대로라면 그가 만들어낸(혹은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종교는 (대다수의 사이비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원도 없고, 그나마 있는 이론도 사실은 그가 자신의 삶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이며, 단지 여러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가득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교주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고, 결국은 어떠한 신도도 천국으로 인도한 적이, 아니 제대로 치료한 적이 없다. 실제로 옹프레는 글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체계가 (프로이트가 비판한) 일종의 종교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프로이트학과 종교 둘 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환상을 이야기한다. (...) 정신분석학은 종교와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저 세상'이 있다고 가정한다.(p.687)" 또한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이론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모임, 단체 등도 이상하게도 종교적인 결사체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런 사이비 종교, 혹은 신비주의적인 이론을 부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무기는 팩트와 증거이다. 즉 눈 앞에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에서 과학의 입장에 서 있는 진화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진화의 증거들, 즉 화석이나 해부학적, 혹은 계통발생학적 증거들이다. 예를 들어 '맥거핀'을 믿는 우스꽝스러운 맥거핀교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종교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그럼 저에게 맥거핀님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가 될 것이다(물론 그 반대편 측에서는 "나는 보이는데, 너는 안보여? 그럼 너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라고 답할테지만).
 
즉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정신분석은 환자용 침대 위에서, 환자와 분석가 간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것은 오로지 분석가와 환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 눈앞에 보이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분석가의 말에 의해서 결정된다. 환자가 정신병이 생긴 원인이 분석가의 진단과 일치한다는 증거도 없고, 분석가가 제시한 치료법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도 없으며, 병이 나아가고 있다거나, 혹은 완치했다는 증거도 없다. 또한 환자가 실제로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을 때에도 프로이트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그것은 환자가 분석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했거나, 혹은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억압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환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그 환자의 머리 속을 볼 수가 없다. 그의 머리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아주 작은 오이디푸스를 핀셋으로 끄집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즉 정신분석학은 과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도 아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실증적이고, 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논리적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신분석학은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안다는 증거가 없고, 모르는 것 같은데, 아는 척한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보면 미셸 옹프레의 무기는 그렇게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역시 확실한 팩트라기보다는 상당부분 불확실한 증거, 혹은 정황증거에 의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프로이트가 친구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의 많은 부분이 감춰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혹은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자신의 이론이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는 부분을 숨기고, 자신이 이 이론의 창시자인양 행세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여러 치부들을 숨기기 위해서 한 짓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프로이트와 친구 빌헬름 플리스 간에는 일종의 동성애적인 요소가 있었으며, 그런 관점에서라면 편지를 숨기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지가 숨겨졌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을 왜 숨겼는가의 부분이며, 그것은 여전히 팩트보다는 해석의 영역이다. 다른 부분들도 거의 대부분 그런 식인데,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처제 민나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저자는 거의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그 증거로 그가 처제와 단 둘이 여행을 갔다는 점, 처제가 그들 부부와 같이 살았으며, 그녀의 방은 부부의 침실을 거쳐야만 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정황증거이다. 그런데 그것에 의거해서 저자는 다음의 논지를 이어나간다. 그가 비정상적인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들이 비정상적인 가족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확한 팩트와 명확한 근거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사에 근거한 추론이나 그가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그 역시 여러 정황증거에 따른 추론만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즉 프로이트가 환자의 여러 개인사들과 그에 따른 정황증거들을 조합하여 적절히 추론의 방식으로 '분석'을 하였다면, 마찬가지로 저자도 프로이트의 여러 개인사와 정황증거들을 놓고 적절히 추론하여 프로이트라는 인간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면, 저자의 방법론 역시도 비판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어니스트 존스나 피터 게이와 같이 프로이트에 호의적인 전기를 쓴 작가들을 공정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은 같은 팩트를 놓고 다른 해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트가 무솔리니에 보내는 책에 헌사를 쓰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6년 뒤 프로이트가 사망하기까지 그가 한 번도 자신의 글에서 히틀러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파시즘에 호의적이었다고 비판하지만,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옹호의 증거가 되는가, 아니면 무관심이나 무지의 증거가 되는가(나는 이것이 옹호가 아니고 단지 무지한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쩌면 무지도 옹호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단지 이것이 팩트라기보다는 해석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굳이 견해를 밝히라면 옹호라기보다는 무지에 가깝다고 보는데, 미셸 옹프레의 책에 있는 프로이트가 친구 어니스트 존스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독재자를 옹호한다는) 증거도 그러하다. "정치적 상황이 전보다 더 암울해졌어. 나치 정권의 공습을 저지할 방법이 도저히 없는 것 같아. 불길한 나치 정권의 행진을 막을 길이 없어. 정신분석으로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걸. 오, 안타깝도다! 무솔리니가 독일에게 자유로운 길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봤을 때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무솔리니야. 무솔리니라고.(p.653)" 나치를 저지하기 위해 무솔리니에 희망을 걸다니.)

 

아무튼 저자의 말에 따른다면 프로이트는 사기꾼이다. 그것도 전 인류를 속인 희대의 거대한 사기꾼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프로이트가 전 인류를 속일 수 있었던 이유로, 기독교 문화에 처음으로 성을 화두로 꺼낸 점, 그를 옹호하는 학자 및 무리의 종교에 비유될 정도의 견고함, 종교의 테마를 자신의 이론에 차용한 점,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당시의 시대에 잘 들어맞았다는 점,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어느정도 확보한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프로이트의 사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멍청했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서 그가 만들어낸 여러 사기의 구조가 정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기가 멍청한 우리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까. 즉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널리 전파된 이유, 그의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한때나마) 지위를 차지한 이유로 그의 내용보다는 위에 말한 다른 부차적인 부분, 즉 참신성, 조직화, 마술화(판타지), 시대성, 이데올로기에 부합 등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이 사기성 짙은 이론이 널리 퍼진 이유를 가장 쉽게 말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고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현재의 상황은 이렇다. 무속을 비판하는 일군의 무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사기라는 이유로 공격한다. 그런데 그 점쟁이에게 점을 본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옹호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우리 보살님 진짜 용한데. 제 인생 다 맞췄어요! 보살님이 저를 다 낫게 해줬어요. 저는 보살님 때문에 행복해졌어요. 그러니까 공격하지 마세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기는 사기인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남은 길은 두 가지인 것 같다. 비판을 더 정교하게 하거나(그러니까 보살님이 무슨 몰카라도 설치해 놓은 것을 발견하거나), 사기를 더 정교하게 하거나(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100% 맞추거나).

 


덧 1.
일단 사기를 더 정교하게 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뇌과학과 정신분석이 결합한 신경정신분석학(neuropsychoanalysis)과 같은 것들이 그것인데, 예를 들어 이 새로운 분야에 천착하는 학자들은 이차사고 과정이 전두엽의 실행능력을 반영하고, 정신분석의 욕동(drive)은 pontine region (특히 periaquiductal gray)에서 피질로 이어지는 트랙과 연관되어있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현의 '21세기의 정신분석, 과학인가 철학인가?'라는 글에서 따왔을 뿐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머리 속에 있는 세포에서 나노분자만한 크기의 오이디푸스라도, 아니면 하다못해 오이라도 꺼낼지도 모른다(미안합니다..내용도 없는데 글이 길어지니 짜증나서 그만..).

 

덧 2.
개인적으로는 글이 조금 난삽한 경향이 있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껴져서 읽기에 힘들었다. 글을 그렇게 썩 잘 쓰시는 분은 아닌 듯 하다. 또한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번역도 군데군데 이상한 부분들이 있는데,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탄생 배경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의 오류를 발견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그는 자신이 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천체에 대한 진실을 밝혀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동안 믿어왔던 '지동설'을 부인하고 '천동설'을 주장했다. (p.91)"와 같은 부분을 보면 천동설과 지동설을 바꾸어 쓰고 있으며, 215페이지에서는 프로이트의 딸인 소피의 이름이 그가 고등학교 때 히브리어를 배운 교사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여자 조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지 모른다고 하다가, 285페이지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로이트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교사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조카 이름이 안나였다. 프로이트는 이 소녀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우리는 안나 프로이트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온 것으로 추측한다." 바로 그 전에 거의 한 챕터를 할애해 프로이트의 딸 안나(소피의 여동생이 안나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는 소피와 안나라는 두 명의 딸이 있다)의 이름이 프로이트의 환자 안나 O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프로이트의 여동생 안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지 온갖 추측을 했으면서 말이다.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조카도 안나와 소피 두 명인 것인가? 이런 것을 놓고 보면 어쩌면 번역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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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11-23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트장님 말씀드린 날 보다도 하루 늦었네요..늦어서 죄송합니다. 흑흑.

아이리시스 2013-11-2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봐요..거짓말 아니야..(믿어, 믿어!)

아이리시스 2013-11-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되게 좋을 줄 알았더니 가연님 리뷰도 그렇고 맥거핀님 리뷰도 그렇고 읽고나니 제게 맞는 책은 아니겠어요, 비판이든 비난이든 듣기 위해선 우선 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저는 프로이트를 읽은 게 대학 2학년때의 [정신분석강의] 뿐이라서. 원랜 전집을 1권부터 차근차근 읽을 생각이었으나 그게 가능할 리가 없고, 당연히 가능하지도 않았고, 그조차 지금은 기억에 없고 그래요. 알고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주워들은 걸로나 단편적 지식으로 말고요. 읽고나서 소화시키고 그러고나서.

생각이 아주 많아요. 생각은 몰아내고 싶고요. 자주 피곤해요. 이렇게 타고 태어났으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이 많아서 내 생각이 주변인들을 밀어낸다고 느껴질 때, 외롭다고 느껴요. 우울도 없고 혼자도 심심해하진 않는 편인데, 들리지 않는, 말 못하는 내 목소리까지 이해해줄 사람이 세상에 없다고 느껴질 땐, 절망해요. 생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뭐가 필요할까요.

(괜히 와서 질문만 던지고 간다..)

2013-11-27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11-24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제가 마음속에서 걸렸던 부분을 다 지적해주시네요. 저도 이건 정황증거뿐인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 같기도 하고, 글 자체에서도 오락가락하기도 하여.. 이걸 어떻게하면 좋을까, 하다가.. 이런 경우에는 별 수 없이 개인적 호불호에 갈리더군요. 저자랑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모두 비판하려고 하다가는 제 글도 함께 난잡해질것 같아서, 허허허.. 결국 저자보다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쪽으로 가닥을 잡는게 좋을 것 같아서 글을 끄적거려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분석학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과학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리라고 봅니다.. 여담이지만 덧 1은 정말 그럴 듯 하게 적혀있네요, 하하하. 마치 코나투스적인 의미로 형성된 엔켈레케이아가 현실존재에 드리운 시니피앙에 대한 끝없는 시니피에의 결여같은 느낌인데요.

맥거핀 2013-11-27 00:59   좋아요 0 | URL
가연님처럼 정통파 공격을 못하니, 저는 저자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쪽으로라도..^^ 아무튼 제 공격법도 조금 치사합니다만, 그래도 아무튼 저자의 방법론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가연님께서 글에 재수 없어 보인다,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확실히 조금 재수가 없어 보이기는 해요. 뭐랄까, 버림받은 신도 같다랄까, 혹은 악만 남은 사람이랄까..아무튼 확실히 빠가 까가 된다는 말이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한때나마 빠였으니 그렇게 집요할 수도 있는 거겠죠.

저도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서 인정받기는 상당히 먼 여정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현재와 같은 상태로서는 유사과학으로밖에 남아있지 못할텐데, 개인적으로는 왜 그렇게 과학이 되기 위해 안달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과학이 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데..

그리고..코나..뭐요?;;

가연 2013-11-27 12:34   좋아요 0 | URL
물론 아시겠지만..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코나투스 운운하는 마지막 문장은 덧 1이 큰 의미도 없이 전문용어로 쓰여져 있는 것에 대한 반감에 끄적거렸는데 지금 보니까 괜히 이렇게 비꼬았나, 싶기도 하네요. 비꼰다고 비꼬았는데 왜이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지, 풋.

맥거핀 2013-11-28 03:08   좋아요 0 | URL
근데 솔직히 비꼬는 거라도 해도 약간 있어보여요! 저는 코나투스가 뭔지 정말 모르는데...코나투스를 인터넷에 치니 코나투스 재수종합반이 나오는군요.. (잠들기 전에 알라딘에 다시 들어와서 다행이군요.)

Shining 2013-11-2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연님 페이퍼도 읽고 이 글도 꼼꼼히 읽었습니다.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프로이트의 명성만큼 책도 엄청 많더라구요. 사례 연구만 있는 책도 많고 평전도 있고 함축적으로 담으려 했던 책도 있고. 피터 게이의 평전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책인데(..그런데 언제 읽을지 엄두가 안나요;;) 이 책도 궁금했는데 이렇게 소상한, 좋은 리뷰를 써주셨군요. 그나저나 덧 1은 진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건 제가 바보라서 그런건가요.....

맥거핀 2013-11-27 01:03   좋아요 0 | URL
피터게이의 평전은 집에 얌전히 꽂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양인 출판사에서 나온 문제적 인간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내용 때문이 아니라 책장에 꽂아 놓으면 참 뽀대가 나거든요..; 하긴 그래도 그 두 권 짜리 <프로이트>는 <히틀러>에 비하면 참 적은 분량인데...아무래도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저 말고 가연님에게 여쭙는 것이 더 합당한 길인 줄 압니다.

그리고 쓴 사람이라고 알리가 있겠습니까? 에잇 진짜 저렇게 쓰는 사람들 때리고 싶어요.;;

jin3910 2013-11-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만 좀 치우친 견해가 있으시네요.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확한 팩트와 명확한 근거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사에 근거한 추론이나 그가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그 역시 여러 정황증거에 따른 추론만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인용한 것처럼 저자가 오로지 정황근거만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일부 정황근거에 의한 프로이트에 대한 공격이 문제가 있다고 그것으로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단점은 문제가 있지만 프로이트 이론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이 책의 좋은 가치를 가릴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구분을 하시길 바라고, 아마도 양시론으로 끝내고 싶어하시는 의도가 무리한 피장파장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 같군요.(이 런 정황증거에 의한 판단이네요~^^)

맥거핀 2013-11-28 22:36   좋아요 0 | URL
네..안녕하세요. jin3910님.

확실히 "추론만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쳐 보이네요. "대체로 여러 정황증거에 따른 추론을 많이 쓰고 있다." 정도로 해두죠. (말씀하신대로 구분할 필요가 있겠군요. 어떤 게 정황증거이고, 어떤 게 직접증거인지..근데 그러고보니 확실한 직접증거라고 불릴만한 게 어떤 것이 있었나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다시 책을 열어 확인을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다시 열 엄두가 안나는군요.)

뭐 이 글이 양비론이라는 것은 100% 인정합니다.^^
 
[공범들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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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표창원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공범들의 도시'라 부른다. 표창원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불거졌던 몇몇 이슈들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그의 본래 주종목은 범죄심리학이나 프로파일링, 경찰행정 등 범죄학, 경찰학 전반에 대한 부분이다(사실 그가 국정원 사건 등에 깊숙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 사건에 경찰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날 국정원 여직원의 오피스텔에서 (윗선 누군가의 지시에) 쩔쩔매며 우왕좌왕하던 경찰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명한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터뷰 전반을 담은 이 책은 최근에 불거진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부분보다는 그의 주종목으로 돌아가 범죄, 경찰, 과학수사, 사법시스템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경찰과 사법에 대한 그의 평소 견해를 드러내는데, 그가 보는 우리의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회는 결국 '공범들의 도시'라는 것이다.
 
먼저 눈에 보이는 공범층이 있다. 정치적인 경찰과 검찰, 정치인들과 재벌 총수와 가진 자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 예를 들어 재벌 총수들이 벌이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횡령, 배임, 탈세, 사기와 같은 경제적 범죄들은 언젠가 그 회사에 고문변호사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정치적인 검사와 판사들에 의해, 그리고 그 기업과 관계를 가진 여러 경찰과 검찰의 고위직 인사들, 정치인들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 큰 정치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최근의 국정원 사건과 같은) 사건들은 '그분'에게 피해가 갈까, 미리 알아서 기는 경찰과 검찰의 고위직들에 의해 작게 축소되거나 아예 없던 일이 되며, 그 고위직들은 언젠가 '그분'의 은덕에 의해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벌인 범죄에는 때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거나 범죄라고 볼 수 없는 일들도 때로는 범죄라고 단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눈에 보이는 공범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공범들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들을 솎아내면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사회 전체가 공범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범들이 점차 우리사회 전체를 공범들로 만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이 만연한 공범들이 무서운 것은 이들이 점차 우리사회 성원 모두를 공범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점차 기꺼이 공범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답했다는 통계 조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점차 정의와 원칙에 따라 사는 것, 정의롭다면 자기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견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없이 그에 합당한 예들을 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권선징악을 가르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도리어 선인이 불행한 삶을 살고,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좇았던 악인이 행복한 삶을 산다. 이는 표창원 교수가 이야기하듯 한편으로는 경찰과 검찰 등의 사법기관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법시스템은 사회의 약자가 걸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부당하게 대우받았거나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사법시스템이 온전하다면 언젠가 저들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법 시스템은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예를 들어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서 사죄하고, 잘못을 빌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맞은 애한테도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고, 빌미를 제공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이것이 사회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쿠데타가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그들의 논리라면 "성공한 학교폭력 역시 처벌할 수 없다."

즉 잘못된 사법시스템은 단지 한 사건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끝나지 않고, 추가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그 사회를 점차 잘못된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 <화이>에서 석태(김윤석)가 화이(여진구)에게 제시한 괴물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어서 빨리 괴물이 되는 것이라는 그의 진심어린(그렇기 때문에 더 무서운) 충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괴물을 보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는 방법을 택한다. 그들이 윗사람들에게는 설설 기며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일반인들의 잘못에는 필요이상의 가혹한 처벌을 할 때, 우리들은 가진 자들의 탈세나 학력위조 같은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연예인들의 군대문제, 학력문제에는 기꺼이 'X진요'를 결성한다. 그들이 옛날에 친일 안 사람이 어디있어,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지,라며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 우리는 군대가 다 그렇지 뭐,하며 후임을 괴롭히거나 선후배가 관계가 다 그렇지 뭐,하며 아랫사람을 괴롭힌다. 그렇다면 모두가 괴물이 되면 될까.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괴물이니 상관이 없을까.

모두가 괴물이라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며, 이제 끝났다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알듯이) 그것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고, 사회 계약이 아직 탄생하기 이전이다. 즉 이는 사회를 해체시키는 것과 다름이 아니며, 시스템의 유지를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표창원의 '안타까움'의 본질은 아마도 그것인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은 표창원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깝다는 점이고, 그것은 이들의 이러한 공범만들기가 결국은 사회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이렇게 나누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를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는 결국 시스템을 쓸만하게 만들어서 유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수라고 혹은 진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실은 극단에 있는 자들끼리도 역시 서로 통한다. 모두를 괴물로 만들자고 하는 어떤 이들이나 혹은 폭력으로 사회를 탈취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이들은 극과 극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하게 사회를 무너뜨리자고 말하고 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최종의 지향점에 있는 것은 결국 같다. 그것은 힘없고 약한 자들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유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적어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결국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는 것. 괴물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괴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아니, 설혹 나머지 모두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다른 모두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내 안에서 퍼지고 있는 괴물 바이러스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이브하다고 해도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결국 애쓰는 것 뿐이다. 그저 어떻게든 애쓰는 수밖에 없다. 상대방 죄수의 선택을 모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애쓰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돌아서는 화이보다는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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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1-12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책에 질려서 말인데, 비슷해도 사례나 해석이라면 여러가지를 수평적으로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도 그 범죄심리 프로파일링 책을 몇 권 내시다보니 읽는 입장으로선 다 볼 수도 없고 그러기도 싫은데 몇 권의 책이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게 되는 저자분들 한 분이세요. 저로선.

이지아가 컴백한다는 기사 밑에 달린 조부모님대 친일 악플들.. 저는 '태왕사신기' 때부터 이지아가 싫지 않고(차라리 좋아서) 좀 다양한 생각이 들었는데요. 친일은 용서받거나 정당화할 수 없는 죄지만 그 잣대를 어디까지 들이댈까의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걸로 사람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것도 보기가 안좋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돈 많은 자본가에다 부자고 강하다면 그럴 필요도 없을텐데.. 여튼 저는 거기서 댓글 달고 노는 사람들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항상 궁금합니다.. 알라딘 서재에 와서 내가 올린 글에 댓글 달기도 벅찬 시간들인데.. ( '')

왜 또 끝이 이상하지..(..)(..)

맥거핀 2013-11-12 22:30   좋아요 0 | URL
한마디로 찌질한거죠. 물론 근원을 올라가면 친일청산의 문제부터, 연좌제 같은 문제까지 따져야할테지만, 말씀하신대로 그걸 댓글을 달고 씹고 하는 문제와는 또 약간 다르죠.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 울분을 만만한 사람한테 푸는거죠. 암튼 참 이상해요. 친일파의 후손들이 정관계, 경제계 모든 것을 주무르는 나라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꺼이 나라의 최고지도자로 뽑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도문제니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면서 갑자기 민족주의의 기치를 드높이는 나라이기도 하죠.

아무튼 최근에 이슈가 많이 된 분이죠. 저는 또 정치적인 문제만 너무 많이 들은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범죄니 과학수사니 경찰내부문제니 하는 잘 모르는 분야의 얘기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본인은 도리어 정치와 계속 약간 거리두기를 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분은 계속 정치 안했으면 좋겠어요.

끝 좋은데요?

가연 2013-11-1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억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 짓을 저지를 수 있다, 는 부분은 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10억이 아니라 100억이라면? 100억이 아니라 500억이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보니 저 스스로는 과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도 그런 상황에 처하더라도 말씀하신대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애쓸 수 밖에 없겠지요.

맥거핀 2013-11-14 23:54   좋아요 0 | URL
네..저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네요. 어떻게든 애써야한다,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어떻게든'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별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괴물이 되는 길은 괴물이 되지 않는 길보다 더 쉽죠. 아니 더 쉽다고 믿으면서 스스로에게 윤리적 우월감을 불어넣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그것이 위선이라거나 혹은 고고한 척이라고 비난받는다고 해도요).
 
[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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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의 후기에 쓰여진 여러 편의 비교적 대중적인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철학이었지만, 단지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는데, 그는 철학, 수학, 과학, 교육, 정치, 예술,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부문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피력하였다. 그것은 이 한 권의 책에도 잘 드러나있는데, 이 책에 실린 12편의 에세이들은 철학의 효용, 인류의 정신사, 인류가 가진 관념들, 인류의 미래상 등등의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여러 부문에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현실과 유리된 철학적인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깊숙이 반영하여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이야기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에세이들이 쓰인 현실, 그러니까 그 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의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1946년에서 1950년 사이, 즉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고, 세계가 급속히 두 개의 커다란 세력으로 분화하던 시기, 냉전이 서서히 그 고개를 쳐들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버트런드 러셀이 이 때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반전과 반핵, 평화운동이었다. 물론 당시 대다수의 지성인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서구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결국 이긴 쪽에나 패배한 쪽에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이대로 더이상 큰 전쟁이 지속되면 인류 전체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한 핵무기와 그것의 증가는 만약 다음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조금 더 특별했는데, 그는 이러한 전쟁이 인류의 어리석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전쟁이라는 솥을 부글부글 끓게 한 재료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현대의 전쟁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녀를 처형하던 중세의 재판에서 단지 그것의 목적이 군중들의 분노를 마녀와 마술이라는 허상에 돌리고, 군중을 즐겁게 함으로서 그들의 악한 열정을 만족시켰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 (즉 여기에서 도리어 가장 위험하게 여겨졌던 것은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아니라, '마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에서 마술을 부린다고 여겨졌던 상당수의 것들은 마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과학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을 다시 전쟁에 적용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공격받는 주장은 '우리가 적에게 질 것이다'가 아니라, '전쟁이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질투, 국가적 자만심, 자신의 집단이 우월하다는(특별하다는) 믿음 등등의 여러 '인류에 해를 끼치는 관념들'이 결합되어 전쟁이 수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러셀의 입장으로 보면,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물질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를 파괴하는 것, 인류의 정신 자체를 복구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수행되던 영국에서 반전운동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1918년에는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렇게 확고하게 전쟁을 반대하고, 혹시 발발할지도 모르는 나중의 전쟁을 우려하는 시각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된 에세이들의 쓰여진 때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셀은 이 책에서 지금으로보면 조금 의아하다고 느껴질만한 주장, 혹은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법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탄생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느니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한 쪽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승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길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중략) 내가 미국을 편드는 이유는, 문명적인 생활 방식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련보다 미국이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p.97)" 이것이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정적인 완전성'에 따른 철인이 지배하는 그의 이상국가론이 허구이고, 기만술이라고 맹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이 전체에 위치한다는 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의 <국가론>은 비판하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제국의 건설을 꿈꾼다는 이 껄쩍지근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러나 당시의 러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아니 몇 가지의 가능한 정치적인 대안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의 한 형태를 히틀러식의 국가사회주의(나치), 혹은 스탈린과 레닌의 소비에트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는 전쟁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었고, 또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 것이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교조주의인데, 그 두 가지의 사회 모두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교조주의가 만연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교조주의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또다른 교조주의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가 발견한 대안은 경험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라고 여겨지는 미국 혹은 영국과 같은 사회였다. 즉 그가 책에서 내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하는 것은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등의 교조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불분명하고 두루뭉술한 것들이고,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경험론과 합리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의 명징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는 그 교조주의의 근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거슬러 올라가 멀게는 플라톤에서 가깝게는 헤겔까지 도마에 올려놓고 비판하고 있으며, 넓게는 형이상학 전체에 교조주의의 혐의를 덧씌우고 있다.

즉 러셀은 묻는다. 이 모든 게, 즉 철학이니, 인류의 관념들이니, 과학이니, 수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이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이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며,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을 보존하고,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을 뿌리뽑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자문에 대한 자답은 이 정치의 기본바탕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은 이론적 목표와 실천적 목표를 같이 지닌다고 말이다. 즉 철학은 이론의 측면에서 과학이 아직 실험할 준비가 안된 방대한 범위의 가설을 세우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특정의 삶의 방식을 부단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정의 삶의 방식이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 사고의 대상을 보다 폭넓은 관계 속으로 넓히는 것, 그럼으로서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평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강조하는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관용과 자비와 박애이다. 러셀이 보기에 당시의 세계는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러셀은 말한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인류가 유례없는 재앙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지가 향후 20년 사이에 우리의 총체적 지혜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 혹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서로 공격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를 갖추고 서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손을 맞잡는가에 달려 있다. 글쎄. 러셀이 그렇게 말한 시기로부터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을까. 유례없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인류가 이런 위치에 놓인 것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즉 우리가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만을 더욱 더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러셀이 현상 파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이거나, 그가 헛된 것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일까(하기는 러셀이 현재의 미국이 벌이는 패악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현상파악이 틀렸고, 경험론과 민주주의에 근거하는 그의 관념이 낡아빠진 것이라고 해도, 그가 말하는 가치들, 특히 그 중에서도 관용과 자비와 박애가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인류가 재앙으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를 관용하는 것, 그리고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는 것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60여년 전의 러셀의 이야기가 지금으로서는 고루해보이지만, 지금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닳디닳은, 낡아보이는 가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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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1-0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에게 세상을 묻다]가 생각보다 아주 좋아서 빌릴 리스트에 넣어서 도서관에 갔어요. 그전에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있었는데 저였으면 당돌하게 도전해오는 비트겐슈타인을 러셀처럼 대하지 못했을 듯해서, 러셀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쓰여진 에세이에서 요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가치와 논점을 본다는 건 중요하고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겠죠. 저는 플라톤의 [국가론]이 완전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는데(어떤 이론적인 관점에서는 아니고) 러셀이 그렇게 생각했구나..(끄덕끄덕) 뭐 그런 건가요, 남이 하면 이론이고 자기가 하면 이론+실천인. 아, 저 이 책 아직 안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3-11-04 22:01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태블릿을 하나 샀는데, 전자도서관에서 이북 대여해서 보는 데에 맛들려서 신나게 보고 있습니다. 집 소파에 누워서 클릭 한 번으로 책을 대여해서 바로 읽을 수 있다니 이거 참 신세경이로구나 하면서 말이죠. 조금 아쉬운 건 책이 조금 다양했으면 좋을텐데, 소설 쪽은 그래도 괜찮은 작품들이 있는데, 인문학 쪽은 거의 읽을 만한게 없어서 아쉽습니다. (도서관 얘기 하셨길래 그냥 저의 도서관 근황을 말씀드렸어요.)

으하..사실은 비밀을 말씀드리면, (뭐 별 건 아니지만) 저는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최근에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그거는 전자도서관에 안 나오려나..

아이리시스 2013-11-05 12:59   좋아요 0 | URL
그런데 책을 안 읽긴 안 읽나봐요. 평소에는 거의 인지할 일도 없고 그러려니 하다가 도서관에서 책을 검색해보면 완소신간인데, 게다가 대부분 한 권밖에 안 들여온 책인데도 '거의 다' 대출가능목록에 있어요. (이런 신세경@.@)

태블릿(#.#) 좋겠다..(@.@) 웬만한 인문서가 전자도서관에 등장하는 날 우리나라도 독서국가로 발돋움하겠죠. 아니, 제가 <국가론>을 읽었다고 생각하시는 거 오해입니다..-.-;;;;;

맥거핀 2013-11-06 18:36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에 도서관에 가본지가 100만년전이라 잘 모르겠는데 요즘에 반질반질한 새 책이 도서관에 많나보죠? 저는 사실 내용보다도 '새 거 같은 책' 이런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막 헌 책 같고 그러면 도서관 책이라도 너무 읽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아이리시스님이 남들 잘 안 읽는 보물들을 잘 골라내는 걸지도 모르죠.

근데 요즘에 알라딘 중고도서점 가보면 저도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아니 이런 신간이 여기에 있네 싶은 책들이 많아요. 아니 한 일주일 전에 출간된 책인데, 중고서점에 막 돌아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건 좀 그렇지...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