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 Dri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결말부 내용이 '약간' 있음)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봐야지 싶어서, 영화가 거의 씨가 마르려는 시점에 극장에 다녀왔다.

 

개봉 이후 이 영화 <드라이브>에 대한 평은 대체로 두 개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수많은 걸작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장면들과 환상적인 씬들이 가득한 영화광을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평과 다른 하나는 관습적이고 뻔한 스토리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유럽 영화의 소스와 멋진 음악을 살짝 얹어 그럴듯하게 포장한 영화라는 평(이러한 것은 영화 속 '버니'가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에 대해 자조적으로 냉소하면서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겹친다)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평들이 공유하는 지점도 역시 두 가지 정도 있는데, 그 하나는 그야말로 멋지고 환상적인 음악들이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는 유독 '폼'을 잡는 영화라는 점이다. 그것을 <씨네 21>의 김도훈은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표현했다(<씨네21> 829호). "<드라이브>는 그저 개폼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는 영화인가. 물론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폼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다만 우리는 좋은 개폼과 나쁜 개폼을 구분해야만 한다." 과연 '좋은 개폼'이란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쳐두고라도, 이 말은 적어도 한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 <드라이브>가 그 '폼'을 영화 내내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점, 도리어 그 폼을 영화 내내 과시하면서 뻔뻔하게 (거의 일부러)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액션 영화, 누아르 영화에서 그 폼을 일부러 내보이던 것은 거의 일종의 장르적 관습과도 같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과도한 '폼' 즉 허세 또는 '젠체'는 영화 전체를 너무 뒤덮고 있어, 약간은 기이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영화 <아저씨>와 비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설정상의 여러 부분을 <아저씨>와 공유하고 있다. 정체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한 남자가 이웃집의 여자와 어린 아이를 위해 전모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사건에 끼어든다는 것.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은 설정상의 부분일 뿐이고,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아저씨>와는 조금은 다른 측면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아저씨>는 거대한 조직과 일인의 대결 양상이다. 사건은 처음에 커다란 무게로 몰아닥치고, 주인공은 하나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해가며 적의 심장부로 잠입해 들어간다. 반면, <드라이브>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였던 사건이 점점 혼란스럽게 꼬여간다는 인상이 짙다. 예전 숀 펜이 나왔던 영화 <유 턴>처럼, 주인공의 사건은 조금씩 비틀어지며,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고, 처음의 작은 사건은 나중에는 그야말로 주인공의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커다란 사건이 되어 버린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 영화를 도대체 어떤 영화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아저씨>의 경우 전형적인 액션물이다. 즉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원빈의 머리깎기나 몸매이기도 하겠으나) 주인공의 액션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드라이브>를 액션물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따른다. 결정적이고 무자비한 액션이 몇 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액션 장면은 몇 장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거의 눈깜박할 새 지나가 버린다. 도리어 '액션 그 자체'보다 영화가 중시하는 것은 액션의 전후이다. 예를 들어 그 액션이 막 시작되기 이전의 숨막히는 긴장감, 액션이 시작되기 이전 그가 뒤집어 쓰는 가면, 적을 만나러 가면서 꺼내드는 장도리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액션 그 자체가 아니라, 액션을 둘러싼 아우라, 다시 말해서, 액션의 '폼'이다.

 

이것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저씨>는 대전 액션 게임, 혹은 슈팅 게임이다. 스테이지를 거쳐갈수록 적은 강해지며, 최종전에는 그 적의 보스를 무너뜨리고 '클리어'를 쟁취해야 한다. 물론 대전 액션 게임에도 스토리는 있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저 뒷 배경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 스테이지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만끽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에 반해서 이 영화 <드라이브>는 전략 시뮬 게임이다. 전략 시뮬 게임 같은 것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전략적인 사고, 빠른 판단력, 민첩한 행동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폼'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시뮬성, 현실감이다. 예를 들어 전장(戰場)을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 게임에서 헤드셋을 쓰고, 분대장의 지휘를 받고, 서로 무선교환을 하며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것. 그런 게임을 전혀 좋아하지 않거나, 겉에서 단순하게 볼 때는 그것은 그저 바보 같아 보이는 개폼일 뿐이다. 그러나 그 게임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적을 잘 조준해 총을 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실제의 전장에 있는 것 같은 시뮬성, 아우라, 폼을 느껴보는 것. (예를 들어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하는 사람들이 마치 실제의 전쟁인 것처럼 그렇게 피를 토하고, 게임에 임하는 게이머들에게 우주복처럼 생긴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게임을 잘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옷은 도리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뮬, 아우라, 신화화를 덧붙이는 것은, 그것에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려면, 다른 말로 해서 고도로 '상품화'하려면 필수적이다.) <드라이브>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그 폼을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주입시켜, 영화 속 어떤 것들을 거의 체험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의 시점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내일만 사는...' 하는 유명한 대사를 하는 장면과 비교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운전하는 원빈을 정면으로 잡는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멋있는 대사를 내뱉는 원빈의 얼굴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운전하는 라이언 고슬링을 정면으로 잡는 시점은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차에 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수정 주: 2-3개의 정면샷은 거의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눈깜빡할 사이 지나가버린다. 반면 원빈의 정면샷은 조명의 도움을 받고, 길게 지속된다.)) 경찰 무선과 농구 중계를 동시에 틀어놓고, 드라이버는 운전대를 잡고 5분의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의뢰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5분이 거의 다 되어, 그들이 나오고 경찰의 추격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의 모든 관객들은 드라이버와 같이 경찰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입장이 된다. 도로에서의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전략 시뮬 게임. 자 이제 어떤 전략으로 추격을 따돌릴 것인가. 물론 드라이버는 멋지게 미션을 클리어하고, 곧이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제목이 스크린에 떠오른다.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은 여기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졌을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적인 체험', 말 그대로 영화로 느낄 수 있는 것의 극대로구나!)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한편으로 이 이후이다. 대부분의 시뮬이 그 시뮬성을 자연스럽게 중화시켜 그 시뮬을 현실에서 체험하는 데에서 느끼는 모순을 최대한 덜 인식도록 하는 데에 비해, 이 영화는 그 시뮬성을 거의 의도적으로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시뮬을 이야기하는 시뮬레이션, 일종의 메타 시뮬이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라디오 속 농구 중계가 현실의 농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아까 말한 처음의 장면도 그러하거니와, 주인공의 직업을 스턴트맨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가면을 쓰도록 하거나, 버니와 같은 영화제작자를 등장시키는 것이 그러하다. 영화 속에서 스턴트맨으로서 가면을 쓰고 (주인공 대역으로서) 가상 영화의 스턴트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뮬 속의 시뮬이며, 동시에 영화라는 것이야말로 그 시뮬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의 최후의 액션이 그의 그림자로 보여지는 것이 이것의 일종의 상징은 아닐까. 그림자야말로 우리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뮬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당신이 손으로 '그림자 개'를 만든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다른 것을 연상하게끔 하도록 한다. 이 주인공의 기이한 무표정들과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들이 불러오는 이상한 SF의 뉘앙스들 말이다. 마치 우리가 시뮬로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를 볼 때에 오는 이상한 착각. 예를 들어 마지막 주인공이 그러한 공격을 받고도, 별 충격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일종의 해피엔딩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게임의 가상 캐릭터가 죽어도 다시 돈을 넣으면, 다음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따라서 이 영화를 누아르로 보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누아르라면 주인공의 비극적인 파멸이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영화 전체적으로의 보여지는 '시뮬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몇 장면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기이한 모순의 화법을 쓴다. 시뮬레이션은 결국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것, 즉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져야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그 시뮬을 행하는 자들에게 최후에는 인식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그것이 가진 기이한 모순성을 자꾸 끄집어내어 관객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위의 김도훈의 말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분명 개폼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개폼임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나 개폼 맞아. 그러니 이 개폼을 더 잘 보도록 해"라고 하며, 자꾸만 드러내는 개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좋은 개폼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하겠다.) 그것은 장병원이 리뷰에서 말한(<씨네 21> 830호 전영객잔) 신화적 세계의 히어로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경계의 모순, 즉 인간에 가까운 내면과 초인에 가까운 외면이 보여주는 모순이 이 주인공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나타나고, 로맨스와 극도의 폭력이 결합된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뇌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씬에서도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깔리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80년대 레트로 풍의 음악과 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폭력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화면들과의 불균질한 매치로서 보여지기도 한다.

 

그 음악들 중 처음 주인공 드라이버와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아이가 차로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과 나중에 영화 후반부에 다시 한 번 흐르던 'A Real Hero'라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그 반복되는 후렴구 "Real human being and a real hero". 가사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리얼의 인간과 리얼의 영웅. 진정한 인간만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시뮬레이션 속 가상의 드라이버는 리얼한 'Human Being'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리얼한 'Human Being'은 아닐지라도 리얼한 'Hero'였다. 캐릭터는 떠나갔지만, 나는 다시 동전을 집어 넣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게임 속 캐릭터는 결코 죽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게임이라고. 아니, 이게 바로 영화라고.

 

 

덧.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드라이브>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뭐 그럴 수도...라고 하겠지만,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캐릭터가 이 영화 속 '드라이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라이언 고슬링은 새로운 형태의 마초맨을 만들어냈다. 캐리 멀리건도 그 덕분에 아주 아름답게 나온다(상대역이 멋있어야 역할이 빛이 나는 법이니까). 라이언 고슬링에게 '올해의 캐릭터'를, 라이언 고슬링과 캐리 멀리건에게 '올해의 커플'을 내맘대로 수여.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1-12-2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그냥 달리는 영화로 보이는데, 저는 스릴러를 가장 좋아하고 그담이 범죄나 공포고, 사실 액션도 고만고만/멜로나 드라마는 거의 안봤어요, 지금까진.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될 수도 있을까요, 이 영화. 드라이버는, 제가 운전 자체를 못해서 논할만한 것도 못되고.. 아하! 영화음악은 맥거핀님을 떠올리며 볼 수도 있겠어요!^^

맥거핀 2011-12-23 12:05   좋아요 0 | URL
매우 추운 날,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서울이 아니라서 좀 덜 추우실 수도 있겠네요. 서울은 이번 겨울들어 간만에 매우 추운 날씨. 아무 대비없이 밖에 나갔다가 귀가 떨어져나갈뻔..ㅎㅎ

사실 이 영화는 제목이 드라이브지만, 드라이브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니구요. 뭐..개인적으로 멜로물로 볼 수도 있지 않나..생각됩니다. 저는 초반에 이 영화처럼 쭉 빨려들어가는 느낌은 간만이었어요. 거의 영화관에서 몸을 앞으로 빼고, 어...거리면서 봤지요.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 번쯤 보시는 게 어떨까 생각이 됩니다. 물론 영화음악도 좋구요.^^

Shining 2011-12-2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 읽지 않았습니다!(당당히 말하기) 왜냐하면 저는 이 영화 언제라도 꼭 보고 말거니까요ㅠ 그러니까 이 글은 영화 본 후에 읽을래요, 그래도 되죠?^^ 얼핏 듣기만 해선 모르지만, 이 영화 왠지 완전 제 스트라이크존 같거든요. 보고말테야..라고 타오릅니다ㅋ

맥거핀 2011-12-23 12:0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카피가 `당신의 심장에 드라이브를 건다..` 뭐 그런거였던 거 같은데요. 네..드라이브 겁니다. 강력 회전 스핀 드라이버 뭐 그런거. 저 같은 경우는 영화 후반부보다 전반부가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불안하고, 두근두근한 뭐 그런거. 영화 초반 30분까지는 거의 올해 영화 중 넘버원급이네요.

뭐 리뷰야 영화본 이후에 읽어주시는 게 저로서는 좋죠. 할 얘깃거리도 있구요. 영화를 안 본 분에게 아무리 얘기해봤자, 그거 뭐 결국 아저씨랑 똑같네..이런 소리밖에 못 듣죠. 대신 나중에 꼭 읽기로 합의합시다.-_-;

Shining 2011-12-24 14:12   좋아요 0 | URL
네, 합의할게요ㅋㅋ 영화 보고나서 꼭 읽겠습니다-_-*

2011-12-2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무지 언제쯤 이 영화를 보게 될지 몰라서, 일단 읽었습니다.
대놓고, 끝까지, 개폼 잡는 영화. 그런 영화 좋아해요. 게다가 음악과 장면이 모두 아름다운 영화라면 더 좋아해요.
시뮬을 얘기하는 시뮬이라.. 어떤 영화일지 궁금해집니다. 관심 가졌으니,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욧.^^

맥거핀 2011-12-28 12:50   좋아요 0 | URL
음..좋은 크리스마스를 보내셨는지, 괜찮은 연말을 보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언제쯤이 될지 모르지만 이 영화 꼭 한 번쯤 보셨으면 좋겠네요. 특히 더구나 개폼을 좋아하신다면 말입니다.^^ 이 영화는 뭐 개폼을 빼면 영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니까요. 음악도 정말 좋구요.

ICE-9 2011-12-2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정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멜빌의 `사무라이`를 강하게 연상시키기도 하더군요^ ^ 아무튼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한 영화에요.

맥거핀 2011-12-28 12: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평론가들이나 리뷰어들 사이에 멜빌의 그 작품을 비교하여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조금 있더라구요. (저는 사실 그 영화를 보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요. 고전영화 잘 몰라요.;) 저도 올해의 베스트에 뒤늦게 넣어 봅니다. 초반부 몰입감이 상당했어요.

Shining 2012-02-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약속대로 <드라이브> 보고 맥거핀님의 리뷰 읽었습니다-_-*
예상대로 제 스트라이크 존이었어요.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도, 캐리 멀리건의 샤방한 얼굴도 영화에 적합했다는 것에 동의하구요. 오오, 헤르메스 님의 댓글을 보니 멜빌의 <사무라이>를 떠올린 것이 엉뚱한 예측은 아니었군요.

그나저나, 저는 언제나 맥거핀님처럼 일관성있고 조리있게 글을 쓸까요(휴).

맥거핀 2012-02-21 00:02   좋아요 0 | URL
네..모두들 이렇게 Shining님처럼 약속을 잘 지킨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따듯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텐데, 라는 국정홍보처스러운 뻘생각을 뜬금없이 해봅니다.

그쵸..이 영화 상당히 괜찮습니다. 처음에 음악이 깔리고, 제목이 화면에 떠오를 때 두근두근하지 않았나요? 여러 분들이 멜빌 영화를 이야기하시니 한번쯤 봐서, 저도 나중에 다른 영화 얘기할 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Shining 2012-02-21 10:1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 아이리시스님한테도 의지짱이란 소리 들었는데ㅋ
저는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를 응원합니다-_-(이러기ㅋ)

맞아요, 두근두근하면서 뭔가 빠져드는 느낌. 엘리베이터신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이 영화의 백미는 오프닝+_+

맥거핀 2012-02-22 01:25   좋아요 0 | URL
요새도 오프닝에 깔렸던 음악을 가끔 듣고 있어요. 들을 때마다 뭔가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런 말은 오바인듯도 싶지만, 영화가 뭔가 아름다워요.
 
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내용이 글에 전반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기덕의 새영화 <아멘>에 대해 악의적인 리뷰를 쓸 참이다. 물론 이 첫문장을 보고 당신이 머금었을 희미한 웃음을 짐작한다. 대체로 '악의적인 무엇인가를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일수록 그 악의라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쓰기의 새로운 전략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 리뷰가 결국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임을 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을 결국 '해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이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잘게 나누어, 각각의 것을 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립하겠다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가 겨우 얻게된 마음의 안식이나 감동을 때로는 고스란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앗아가버린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해석이 애정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석인데다가, 그것이 감독의 현재 주위를 둘러싼 어떤 일들에 기초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감독 김기덕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부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이다. 영화가 그 의도한 바와 다르게 스크린 외부의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되며, 그 자장 안에서만 해석될 때, 영화는 때로 저열한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이 된다. 물론 나는 이제와서, 지금 이런 시대에, 영화의 순수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한 영화가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분리된 채,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영화 외부의 어떤 것들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은 그 영화 자체의 내적인 존재목적을 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그 영화는 그런 형태의, 그런 내용일 이유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은 누군가는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리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리뷰 자체를 아예 안쓰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악의적인 리뷰라도 이 영화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뒤에서도 잠깐 이야기하겠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무관심이며, 가장 잔악한 행동 중의 하나는 그 무관심을 무기로 휘두르려고 할 때일 것이므로.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관심의 무기에 맞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간곡한 호소일 것이므로.

 

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폐인설도 있었고, 후배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고, 계약이나 영화의 진행과도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고, 그 영화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832호에) 그리고 그 <아리랑>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이 병적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라면, 그에 대한 종교적 치유물일 <아멘>이 연이어 공개되었다. <아멘>은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여자(김예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다. 이 여자는 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니스, 아비뇽 등 여러 곳곳에서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다니는데, 이 '이명수'는 여자가 찾아가는 곳마다,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후다. 이 영화는 그런 여자를 그저 건조하게 쫓아다닐 뿐인데,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그 여자를 몰래 관찰하고 따라다니는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이 남자는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 물론 계속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남자는 야간열차 안에서 이 여자가 자는 틈을 타서 이 여자를 강간하는데(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후에 선명한 두 줄의 임신선을 통해 자신의 임신 - 당신은 이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 것을 알게 되고, 이 방독면을 쓴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향(한국)에 돌아가 낳아달라고, 자신은 자수를 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쪽지(아기신발과 군복에 쓴)를 보낸다. 그리고 낙태를 할 것 같아 보이던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으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만 본 분들은 또 그런 (변태적인) 이야기인가..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그간 해왔던 이야기에 비하면 그렇게 발전한 것도 없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초중반까지는 <나쁜 남자>의 프랑스 버전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이 여자와 방독면을 쓴 남자를 김기덕의 여러 다른 분신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사실 <아리랑>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은 인간 김기덕과 감독 김기덕의 여러 분신들이 출몰(충돌)하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러나 <아리랑>을 건너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단순하게 읽히는 측면도 있다. 군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남자를 쓴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김기덕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군복은 그간 김기덕 영화세계에서 주요한 클리셰들 중에 하나였고, 방독면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간단하게 외부세계와의 차폐적 의미로, 현재 외부와 차단된 그의 자폐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보호적인 측면으로는 보는 것이다. 방독면이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장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오염된 것은 외부세계이고, 보호되어야 할 순수한 것은 그 방독면 안에 있는 것, 즉 김기덕의 영화세계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여성을 생각해 보면, 이 여성(김예나)은 한국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관객들이다. 남자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갈 때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여자는 왠지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김기덕의 비유로 읽힌다. 상징적으로 볼 때도, 후반부에 이 여자의 대한민국 여권을 클로즈업하는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이 방독면을 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작품)를 낳아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결국 감독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기괴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아줄 것을, 즉 한국의 스크린들에 자신의 영화가 성황리에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국 잠든 여자에 대한 강간의 형식, 즉 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려 애쓰면서, 자신의 물건 - 겉옷, 군복, 아기신발 - 들을 여자에게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찾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이명수'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 파리에도, 베니스에도, 아비뇽에도, 즉 유럽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 여자는 돈이 떨어져 동냥을 하면서까지 이 실체없는 실체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이명수~!'라는 공허해보이는 외침을 내지른다. 이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도 행동이지만, 이 때만큼은 유독 더 바보같은(즉 아주 단순해보이는) 컷들과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간에 남자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외침이 가닿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줌인컷을 번갈아 넣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즉 이 행동들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이 결국 김기덕의 말인 셈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즉 그것은 이 여자가 결국 한국의 관객들을 상징한다는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은, 동냥을 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실체 없는 실체만을 찾아다니는 여자가 상징하듯이 외부(국)의 영화적 권위와 영화적 자본에 길들여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말해주는 것처럼 결국 이 '이명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기차로 지속되는 지금까지의 이 여행은 방독면을 쓴 남자가 준 돈으로 지탱되었다.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동냥으로는 거의 돈이 모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거금을 전해준 사람은 방독면을 쓴 남자였다. 이를 조금 더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화계는 지금껏 베니스에서, 그리고 칸에서 통할 수 있는 '이명수'를 찾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지만, 역설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고, 지지를 받고, 우리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그 베니스와 칸에 가깝게 데리고 간 것은 여자(관객)에게 그토록 외면받는 방독면을 쓴 남자 - 김기덕 감독인 것.)

 

영화 후반부, 여자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이명수'가 결국 방독면을 쓴 남자일지 모른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그리고 여자는 (낙태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고, 방독면을 쓴 남자는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여자는 열차 안에서 남자의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고, 한참 후 그것을 홀연히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스크린을 만들어 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남자가 입었던 군복과 방독면을 쓰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자신이 이제 앞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스크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와 주는 것. 여러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폐쇄된 자신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겨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국의 관객들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도 반성하고 새롭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경찰서로 걸어들어간 남자)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애타게 그의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다. 인간 김기덕과 현재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서 악의적인 리뷰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영화보다도,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 현재의 모든 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영화를 보고 싶다. (마치 그의 첫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첫 영화는 충격적이었고, 많은 관객들을 기꺼이 그의 안티로 만들거나,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이 <아멘>에서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아직도 어떤 성(聖)으로서 간단한 봉합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변성찬 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이 영화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성당 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덧.

 

<씨네21> 832호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한 반대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예술의 살인적인 또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의 비유라는 것 외에 김기덕의 영화팬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정식 개봉하지 않은 것은 김기덕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이기 전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아리랑>과 <아멘>에서 김기덕이라는 예술가가 에고를 과시하고 투정부리는 것을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매혈기>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준, 김영진 평론가의 평소 영화에 대한 견해들을 즐겨 읽고 때로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독자이나, 이러한 문장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평론가의, 한 영화에 대한 무관심의 선동을 나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영화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할 것을 이렇게 언론매체에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휘둘러져서는 안될 무기이다. 그가 말했듯 한사람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관객으로 읽는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그러니 이렇게 <씨네21>에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여기에 기고를 한 것인가). 물론 '반대'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와 '선동'은, 특히 '무관심에의 선동'은 단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2-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다른 분들은 어찌 말씀하실지 모르나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일 처음 제시한 두가지 기준이라면,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주관적 경험에 주관적 해석 아닙니까. 아무리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확하고 객관적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김기덕 감독을 좋아합니다만, 그를 보면 이번에 임재범 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흔히 천재, 또는 재능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만.. 애정을 갈구하고 인정을 갈구하지만
자신이 있는 그대로, 무엇을 하든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은 타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네요.. 일산에서는 이런 영화들 개봉 자체를 하지 않아요. ㅎ

맥거핀 2011-12-12 21:40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바대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해석이 객관적이라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해석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할 해석이겠지요. 다만, 저는 요즘의 어떤 해석들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해석이 지식인이 가하는 복수가 되어, 누군가의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잡아먹을 때의 두려움이요. (김기덕의 영화도 그간 많은 해석가 - 특히 심리적 해석가 - 들에 의해 난도질되어, 거의 사이코들의 영화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구요.)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여사의 말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예술가들이 종종 에고가 지나쳐 주위를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자신마저 망가뜨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의 경우 여러가지 벌어진 일들과 겹쳐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구요. 그의 이 영화가 그런 지나친 에고가 가득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만, <아리랑>이나 <아멘>은 조금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야 할 듯 싶구요, 그의 다음 영화가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산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이 상영하길 바라며..)

2011-12-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진짜 김기덕 영화는 너무 드러내 놓거나 너무 절제하거나 였던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좋아한 영화는 주로 절제한 쪽... (파란 대문이야말로 내가 젤 좋아할 듯도 한데, 안 봤으니까 패스~) 제가 좋아했던 것은 <빈 집>, <사마리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실 마지막 영화는 봤을 당시엔 앞의 것과 다름없이 좋았지만, 그 뒤에 기억에 남기론 앞의 두 영화가 더 좋아요.) <나쁜 영화>은 좀 힘든 설정들만 빼면 좋았고. <비몽>과 <파란대문>은 안 봐서 후회했고, <수취인불명>과 <섬>은 절대 못 볼 것 같고... <활>은 잘 모르겠고. <아멘>과 <아리랑>은 볼래야 볼 수가 없네요. 여튼 그가 맥거핀님 말씀대로 상처받기보단 좀 더 펼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여러 모로 굉장히 연구대상, 흥미로운 분입니다.
그나저나 영화광인 맥거핀님께 자랑 하나 지르자면, 저 18일 (일)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클로즈 업> + 관객과의 대화, 간답니다...으하하하ㅎ 맥거핀님이 젤 부러워해주실 듯 하여, 여기에다 자랑질...ㅋㅋㅋ

맥거핀 2011-12-13 22:12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김기덕 감독에게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약간 주저되지만, 항상 최고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지요(절대 빈정대는 말이 아니구요). 그만큼 스타성도 있는 감독이구요.
섬님의 댓글을 보고, 네이버가서 김기덕의 필모를 보면서 예전에 본 영화들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이나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같은 초기작이 좋았고 (나름)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미지들도 그러했지만(진짜 몇 장면은 큰 스크린으로 보며 다리가 후들후들했던 기억이..), 그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될대로되라 식의 주인공 설정 등이 그랬었지요(그래서 아직도 조재현 씨 보면 지금 이미지들에 몰입되지가 않아요). 그 후에 <시간>이나 <빈 집> 같은 중간의 작품들을 봐도 처음만큼 새롭지는 않더라구요. 아무튼 김기덕 감독의 경우 보여줄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인데, 뭔가 괴물같은 충격적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압바 감독이 한국에 왔군요. 몰랐어요. 하이...섬님께 미션 하나드리지요. 이란어로(한국어나 영어 안됨) 정곡을 찌르는 질문 하나 하시고 그 결과를 블로그에 알려주세요. 심통나서 드리는 말씀임!

2011-12-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야생동물보호구역, 씨네21에서 20자평이나 리뷰를 보며, 진짜 설정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제목 격 안난 영화가 <실제상황>이군요. 이 영화는 좀 보고 싶어요..ㅎ)
전, 선점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그니까 예를 들어 드라마도, 소문난 뒤에 5,6회부터 보는 스타일?! 그렇군요. 맥거핀님이 말한 초기작이 더 좋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당대에 해야, 특히 영화는 개봉관에서 봐야 제 맛이니 이미 놓친 거지요.^^

여튼 한국의 다른 먹물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말그대로의 독특함이 있는 감독 맞아요. 다만 그것을 낳은 그의 `비범한` 인생이 그에게 남긴 상처도 있는 듯 합니다. 여배우들에 대한 소문(좀 비하인드로 들은 거라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 생각되는 소문..)도 그렇고, 그 외에도 관객이나 평론가, 아니 한국 사람들 전체에 대한 그의 거칠고도 솔직한 + 양가적인 모습에서도 그렇구요. 어쨌든, 다른 무엇보다 `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말을 하는 사람이니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사람은 맞지요...
(그는 진짜 `궁금해지는` 인물인지라, 정성일이 엮은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이란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읽은 결과는, 역시나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구나.였지요.)

맥거핀 님의 미션에서 힌트 하나 얻었네요. 이란어 인사 하나 공부하고 + 뇌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질문 하나 던져서, 압바 감독님께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남겨드릴까요? 결과 인증은 압바감독님과 제가 함께 있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용. 으흐흐흐흐흐 (사실 적극성 결핍증이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둘 다.)

맥거핀 2011-12-14 23:24   좋아요 0 | URL
저는 키노였던가, 씨네21이었던가에서 계속 문제적 감독이니 어쩌니 논쟁들이 붙어서, 도대체 영화가 어떻길래..하고 처음에 김기덕을 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상황>의 경우 옛 여친님이 주진모 씨 광팬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취인불명> 같은 경우는 정말 극장도 황량했는데, 영화는 그보다 훨씬 황량했었구요.

사실 김기덕에 대한 가십들은 별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엄청 순수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얘기도 있는 걸로 아는데, 글쎄요. 사람을 가까이서 접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뭐 아무튼 감독은 작품으로 말하면 되니까요. 아주 큰 흠결이 있기 전에는 대체로 그의 작품이 좋으면 그를 지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밑에 제가 글을 쓴 로버트 알트만 감독 같은 경우에도, 사생활 측면에 있어서는 많은 소문을 가지고 다녔지만, 뭐 영화가 저렇게나 좋다면야...)

그리고, 뭐 그럼 이젠 압바 님과 섬 님의 인증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뭐 인증은 안하시더라도, 압바 님이 해주신 좋은 얘기 있으면 전해주세요.^^
 
르 아브르 - Le Havr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동화적인 기적, 혹은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기적적인 동화. 그러나 그 동화에 마음이 움직이질 않으니..기적은 스크린 위에만 있다고 (나는) 믿고싶은 것일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12-0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 1관과 2관의 분위기는 흡사 천국과 지옥이었다. 2관에서는 유머가 가득한 기적의 동화가 상영중이었고, 1관에서는 음울하고 세기말적이고 분열적인 수난극(혹은 수태고지극)이 상영중이었다. 한쪽은 사람들로 가득했고(맨 앞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끊임없이 웃음이 넘쳐흘렀으며, 영화를 보고서는 훈훈한 정담이 쏟아져나왔고,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그보다 훨씬 넓은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표정들은 굳어있었으며, 어떤 아저씨는 영화가 마친 후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거 돌아이 아니냐는(유 헤드 빙빙) 포즈를 지어보였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추웠다. 지독스럽게 추웠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나는 도리어 따듯한 천국을 지나고 나와, 그 추운 지옥에서 이상한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니............................................변태인가.

아이리시스 2011-12-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라면 1관에..^^ 따뜻이고 뭐고 방 구들장에서 군고구마랑 찐빵, 오뎅탕 같은 거 먹으면서 영화 보는게 제일 기적스럽다니까요, 히히.

그럼 저도 변태인가.. 그러니까 맥거핀님은 2관에 갔다가 실망하신 거 맞죠?

맥거핀 2011-12-10 00:41   좋아요 0 | URL
괜히 꼬아서 썼네요.(이렇게 문장을 써서 안된다는 전형적인 문장되시겠습니다.;;)
영화를 보기전에 생각했어요. 예정은 2관의 <르아브르> 이후에 1관의 <아멘>이었는데, 이걸 순서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아멘>으로 뭔가 시험에 든 다음, <르아브르>로 깨끗하게 치유,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여러가지 고려했을 때 도저히 시간을 맞출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종의 "각오"를 하고,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2관의 따스한 관객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어 "아..나만 이 영화가 썩 와닿지 않는걸까"하고 생각하다가, 1관에서 예상치 못하게 "그래도 영화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네, 단지 그런 이야기일 뿐이죠.^^

2011-12-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맥거핀 님같은 관객이 있어서, 1관 수태고지극의 감독이 위안과 희망을 얻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빨리 `수태고지극` 리뷰를 올려 주세요! ^^

맥거핀 2011-12-10 00:45   좋아요 0 | URL
네..가능하면 열심히, 별거는 없겠지만, 리뷰를 남겨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1관의 감독(김기덕 감독)이 얼마나 "자신의 영화를 보아줄 누군가"를 열망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겠어요. 그러니 섬님도 여력이 되신다면 언젠가 관람을..^^
 
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멘`. 진리, 확실하다 혹은 이루게 하소서의 뜻. 이 영화는 둘 중 어느 쪽인가. 영화에서 자꾸만 영화밖의 다른 것을 말하게 될 때....슬프면서도 여전히 그가 무엇인가 찍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1-12-0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그가 무엇인가 찍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 하는 건 맥거핀님인거죠? 감독이 하면 큰일날 것 같은데..( ..)

맥거핀 2011-12-10 00:35   좋아요 0 | URL
아..애매한 문장을 썼네요.(100자로 줄이다 보니까요.) 물론 접니다. 그냥 제가 소소히 안도하는 중이죠.
 
숏컷 - Short Cut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상영시간이 짧아도 매우 지루한 영화가 있고, 상영시간이 길어도 꽤 흥미로운 영화가 있다. 영화 <숏 컷(Short Cuts)>이 바로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여러개를 오려붙인, 미국 LA의 아홉 커플(여덟 쌍의 부부와 한 쌍의 모녀)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는 3시간 7분 짜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무수한 숏 컷들의 끊임없는 이어붙이기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고유의 리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동시에 그 모든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별 특이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어떠한 플래시백이나 과도한 점프를 사용하지 않으며(즉 영화는 이 아홉 커플의 현재의 시간을 무심히 쫓아간다. 다만, 회상씬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대화로서 이루어지는 회상은 있다. 뒤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 대화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과도한 카메라워크를 허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이들에 대한 차가운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영화의 놀라운 리듬감은 그 숏 컷과 숏 컷들이 붙여지는 순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니건 부부의 어린아들 케이시를 차로 친다. 아이는 별로 다친 것 같지 않지만,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는 도린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집에 돌아와 갑자기 급격한 이상 증세를 보이며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를 마시지 않고 긴 잠에 빠진다. 컵에 가득 따라져 있는 우유를 클로즈업하며 컷의 마무리. 컷의 연결은 TV속 재난에 대한 위험을 이야기하는 공익(보험?)광고로 이어진다. 화면 속 우유컵이 탁자에서 쓰러지며 우유가 바닥에 쏟아진다. 이 화면은 도린의 집에서 도린의 남편 얼이 보고 있는 것인데, 얼은 아이에게 큰 사고를 입힐 뻔했다는 도린의 말을 시큰둥하게 들으며, 오로지 그것을 경찰이나 누군가가 보지 않았다는 것에만 안도한다. 또다른 장면. 첼리스트 여자가 농구를 한참 한 다음 옷을 모두 벗더니 갑자기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마치 죽은 듯이 물에 떠 있다. 그것을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딸(첼리스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재즈여가수 어머니는 그녀에게 뻔한 수법(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수영장 청소부 제리가 있다. 그리고 컷의 연결. 한 여자가 나체로 물 속에 죽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계곡에 낚시를 하러간 스튜어트 일행이 발견한다. 이 장면들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연결 장면들이다.

예를 든 첫번째 장면과 두번째 장면은 모두 시각적으로 장면이 연결된다.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컵과 광고 속 가득담긴 우유컵, 그리고 수영장에 죽은 듯이 떠있는 나신의 여자와 죽어서 계곡에 떠있는 나신의 여자 시체. 그러나 이 연결들이 단순한 시각적인 연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적으로 볼 때 이 장면들은 이 등장인물들의 망가진 영혼들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사고를 당한 케이시의 컷 이후에 곧바로 그에게 해를 입힌 도린과 얼의 컷을 붙임으로써, 이들, 특히 얼의 추악한 진짜 속내를 드러내보인다. 두번째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영장에 들어간 여자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그에 이어지는 컷은 계곡에서 나신의 시체를 발견한 낚시꾼들이다. 이들의 행동은 어떨까. 그것은 익히 예상이 가능하다. 이들은 이 시체를 물에서 꺼낸다거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그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다(즉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놀라운 편집의 예술은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의미망 아래 층위에서 작동하며 일종의 복선의 구실을 함으로써 표층의 의미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첫번째 장면에서 우유는 광고 속에서 모두 바닥에 쏟아진다. 이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케이시가 처하게 될 운명을 암시한다. 두번째 장면에서 수영장에서 나신으로 시체처럼 떠 있는 여자 첼리스트, 그리고 이것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제리. 이것은 이 여자 첼리스트가 닥치게 될 앞으로의 일을 말해줌과 동시에, 제리의 미래까지도 보여준다. 동시에 그 계곡 속의 여자에게 닥쳤던 범죄(성폭행)가 무엇이었는지 관객이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두 가지 장면을 예로 들었지만, 이 영화에서의 무수한 컷과 컷의 연결에는 이러한 장면들이 많다. 즉 이 컷의 연결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을 하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하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역(逆)의 의미망 발생이 하나고, 그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잠재된 욕구와 미래의 운명을 암시하는 연결이 하나다. 이 영화 <숏 컷>의 지속적인 리듬과 의미의 발생에는 바로 이 컷과 컷의 연결, 즉 로버트 알트만의 놀라운 편집 감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정교한 기술이며, 놀라운 감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렇게 짧은 컷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교과서같은 편집이며, 전범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에 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말해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도 결코 도달하지 못한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의 유사성은 마지막의 예기치못한 재난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마지막 예기치 않은 개구리비가 쏟아졌듯이 이 영화에서는 마지막 예기치 않은 지진이 발생한다. 어쩌면 예기된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장률의 <중경>과 같이 폭발 직전의 욕망들이 끊임없이 누적된다는 인상이 있다. 아무튼 예기되었건, 예기치 않았건 간에 재난 그 자체보다는 재난 이후의 모습이 더 흥미롭다. 처음 이 지진이 발생할 때는, 시작부터 성적타락과 도덕적 해이가 가득한 추악하고 위선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에게 일종의 징벌로서 이 지진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지진은 그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지진은 진도 7인지, 진도 8인지에 대해 논쟁하게 하는 한낱 흥미거리일 뿐이며, 도리어 어떤 범죄를 덮어주는 좋은 기회일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진에 대한 리포팅을 영화 내내 가장 엉망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헬기조종사 스토미가 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들의 존재가 재앙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영화의 시작은 유럽 파리떼의 습격을 리포팅하는 TV뉴스와 그들을 박멸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뿌려지는 살충제들이다. 이 TV뉴스는 과장되어 있으며, 이들(파리)의 박멸을 일종의 전쟁과 거의 같은 급에 놓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파리와의 전쟁을 영화 시작부분에 이야기하면서도, 영화 중간에 파리 코빼기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멸하여야 될 파리는 무엇일까. 이 등장인물들의 집 지붕으로 쏟아지는 살충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 자체가 박멸되어야 할, 즉 유럽에서 온 재앙(미국인들)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 살충제를 뿌리고 차례로 내려앉은 헬리콥터들이 마치 파리처럼 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내 수많은 대사를 지껄인다. 때로는 너무 많이 지껄여대 이제 그만 좀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수많은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아무 의미가 없거나 음담패설이거나, 누군가를 욕하는 말들일 뿐이다. 발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주 보는 TV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유달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TV를 보는 씬들이 자주 배당된다. 그들이 무엇인가 바보 같은 대사를 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을 저지를 때면 어김없이 TV가 틀어져 있다. TV는 과장되어 있고(파리에 대한 리포팅처럼),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들이다. 앞에서도 말한 컷과 컷의 연결에서 등장인물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 이후 연결되는 컷들이 TV 속 만화(코믹스)인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플래시백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회상이 있는데, 이 회상은 반드시 말하는 자의 숨김이나 듣는 자의 외면으로 끝난다. 즉 회상은 결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불가해했던 과거를 애써 외면함으로서 현재의 추악한 자신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영화 속 가장 불가해한 일은 파리떼의 습격도 지진도 아닌, 케이시의 죽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케이시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죽음에 이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삶은 그렇게 불가해한 일로 가득차 있고 역설적인 일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역(逆)의 컷으로 계속 이어진다. 또 영화 전체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면이 있는데, 영화 속 위선으로 가득한 병든 영혼들 속에서도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사람을 찾자면, 웨이트리스 도린이다. 그러나 이 도린은 결국 영화 속에서 가장 중대한 잘못(케이시의 죽음)을 저지른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불가해한 역설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각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동시에 위선과 위악을 가득 담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만을 보고, 현재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것을 이 영화 <숏 컷>은 어떠한 회상도 없이 느리게 그들을 관찰하면서 붙여나간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숏 컷'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붙여질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2-06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마지막 문장, 멋진데요?!

맥거핀 2011-12-06 16: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ㅎ

Shining 2011-12-0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한 영화를 보시는군요. 맥거핀 님의 리뷰는 언제나 놀랍지만 가끔은 영화 목록만 훑어도 감탄할 때가 있답니다^^; 저는 편협한 성격이라ㅠ 이게 잘 안 고쳐지네요ㅠ

맥거핀 2011-12-06 23:39   좋아요 0 | URL
요즘에 여러 자잘한 영화제들도 많고, 여러 좋은 기획들도 많아서, 좋은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루트는 점점 늘어나는 편이지요.(뭐 하다못해 집에서 볼 수도 있구요.) 근데 뭐 영화는 많아도 시간이 잘 안받쳐주니..ㅠㅠ 알트만전 같은 경우에도 시간을 맞추다보니 보고 싶던 영화는 못보고 다른 영화들만 보고 왔네요.
근데 뭐 저도 편협한 건 마찬가지라..액션물이나 블록버스터 같은 것은 또 잘 안보네요.^^;

아이리시스 2011-12-0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말씀하셨을 때 훑어보다 이 영화에 관심이 갔는데 보셨군요. 저는 이제 영화 볼 때 100분 이상은 집중을 못하겠어요. 초딩의 집중력ㅋㅋㅋ

저 사진 한 장이 맥거핀님 글의 많은 부분을 상상가능하게 합니다. 사진이 막 시끄러워요, 으하하^^

맥거핀 2011-12-06 23:47   좋아요 0 | URL
아..저 장면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이에요. 마구 떠들던 인물들이 잡담은 이제 그만이라는 식으로 레몬을 한입씩 깨무는 장면입니다. 알트만의 위트라 할수도 있구요. 뭐 인생의 신맛좀 보라는..;
100분의 집중력이면 뭐 슈퍼초딩인데요.^^ 저도 요즘에는 한 120분이 넘어가는 영화면 시작부터 약간 긴장을 해요. 뭐 이렇게 아예 긴 영화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요. 중간에 졸리면 자자 이런 식으로.^^

아이리시스 2011-12-08 01:33   좋아요 0 | URL
상업영화 아닌 그래도 <영화>란 걸 좋아한다 말하려면 100분은 초딩 집중력 맞아요. 하하하. 100분은 다들 집중하고 견디잖아요. 마음을 비우는 방법 좋겠군요. 끝까지 꼭 봐야한다는 강박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맥거핀 2011-12-09 00:34   좋아요 0 | URL
사람이란 참 웃긴게, 뭐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지...하면 대체로 잠이 오니까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영화도 있어요. 저는 예전에 <엑스맨> 볼 때 극장에서 3번인가 4번인가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한 적도 있어요. 그것도 짧게 그런거도 아니고 한 20분 보다가 한 5분 자다가 깨고, 그리고 다시 정신차려서 한 20분보다가 또 졸고..제가 `맨`나오는 영화를 워낙 안좋아하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