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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749년 봄의 파리. 의학을 공부하던 프랑수아 보니라는 학생이 경찰이 고용한 첩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왕(루이 15세)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시를 읽어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며, 그도 누군가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보니를 비롯한 총 14명이 왕을 비난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유포시킨 혐의로 연쇄적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이 시의 원저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법학생, 의학생, 철학과정 학생, 성직자, 법률서기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프티 브르주아이지만 단지 약간의 학식을 가진 보통의 대중에 가까웠고, 경찰이 벌인 일련의 조사에서도 이들이 이 시의 원저자라고 밝혀낼 만한 핵심적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들에게 본보기로서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이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시인을 체포하라>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14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턴은 당시의 경찰 기록 및 여러 문헌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미를 세심하게 추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리 경찰 당국 및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은 왜 (어떻게 보면 하찮은)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왜 이 14인은 대중 속에서 끌려나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시들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이 시들은 대중 속에 어느 정도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은 어떠한 기능을 했을까? 당대의 대중들은 이 시들을 노래하며 어떤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의 향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이 질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여론'이라는 것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사건으로 당대의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을까?

'여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논의를 따른다면, 여론에 관한 역사연구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입장이 있다. 하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입장으로 여론을 인식론과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입장으로 여론을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 도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저자의 나중의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는 철학적 형태의 여론으로 진실의 확산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형태의 여론으로 의사소통 회로를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p.149). 단턴의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경험적인 연구이며, 하나의 실제사건을 놓고 실제의 메시지의 형태와 그 유통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중들에 보이는 반응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며, 그것에서 도출되는 대중의 면모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다. 즉 이 사건에서 단턴이 보는 대중의 면모는 어떤 진실의 담지자이거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이 작동하는 무엇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엇,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실체를 가진 수많은 목소리를 가진 힘에 가깝다.

 

어떤 "여론"인가? 그것은 이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모를레와 콩도르세가 채택한 철학의 개념과 멀게라도 닮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종물인 메르시에의 "대중이라는 분"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이제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다. (중략) 그러나 철학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이라는 분은 철학자들이 여론에 관해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여론조사자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대중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파리에서 구체제 특유의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중은 계몽사상가들이 상상해낸 추상이 아니었다. 대중을 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시도에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이,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중은 거리에서 길어 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이미 14인 사건의 시기에도 분명하게 보였고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었다. (p. 155~156)

 

즉 단턴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다. 역사학자로서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여론이라는 것의 어떤 거대한 맹아라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드러난 초기적 정보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이며, 불확실한 가설보다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재빨리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즉 그는 이 '14인 사건'에서 드러난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와 프랑스 대혁명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18세기 중반의 파리는 시와 노래라는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는 것이다(즉 이 시와 노래들은 현재의 호외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종의 공적 사건에의 개입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부록과 주석을 빼면 162페이지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의 논의 방식과 서술 형태를 볼 때 대중서라기보다는 연구논문에 가깝다. 이 연구논문에서 단턴의 방법론은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문헌연구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주제에서 문헌연구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문헌을 통해 당대에 실제로 유통되었던 시나,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의 경과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퍼져있었는지(페이스북 '좋아요' 개수나 트위터 팔로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대중들이 어느 정도 그것에 열광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노래하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밝혀내기란 어렵다(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은 대체로 일반대중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와 노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불렸는지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악보로 곡조와 가사가 남아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 음울하게, 혹은 활기차게, 혹은 비꼬듯이 - 불렀는지는 정확히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역으로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그 방법론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턴은 철저하게 문헌연구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헌연구에 다양한 시도들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찰기록, 일기, 샹송집, 재판기록, 벽보 등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는 소재적인 면에서, 또는 통계를 내거나, 노래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인 배경을 추론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노래를 실제로 녹음하여 그것을 독자들이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이 그러하다(그 외에도 옮긴이는 이 책 자체가 시집이나 노래책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하는데...글쎄?). 물론 이는 단턴의 논의대로, 아마도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단지 문자로서 시와 노래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도 그로 인해 이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힘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턴의 논의를 따라 이 14인 사건에서 나타난 구어적 의사소통망과 4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경찰과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이 이 '14인 사건' 등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일벌백계를 가하는 등 이 시와 노래의 유통과 확산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결코 대중들의 입에서 이러한 노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원저자의 추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원본이나 사본을 없앤다고 해도, 그것의 여러 다양한 변형본들은 계속 대중들에게서 대중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문자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암기와 가창이라는 구어적 형태로서 말이다.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이야기와 노래들, 혹은 그 대중들의 비판적이고도 풍자적인 의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즉 당시 18세기의 파리는 시와 노래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였으며, 이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인터넷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다른 것이 지배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3세기나 지났지만, 위정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비슷하다. 지난 정상회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건, 혹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에서 보듯,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의사소통체계에 틈입하여, 그것을 조작하거나 부수려 한다. 그러나 대중의 머리와 의식이 남아있는 한, 그 입을 완전히 막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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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3-0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나 소재는 좋은데 쉬이 읽히지가 않아서, [고양이 대학살]을 찔끔찔끔 몇개월째 읽고있는걸보면요, 그것보다 이게 더 논문같을 듯하네요. 예전엔 조금 언론, 정보, 대중 이런것들에 관심 있었는데 요새는 별로 없어요. 인문학이랑 다르게 사회과학도서에는 이상하게 별관심이 안생겨요. 희한한 글쓰기방법론인건 분명한듯해요. 그런데 단턴이 계속 단테로 읽히는건 제가 요즘 단테를 읽고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여기서도 구어,민담,마더구스이야기 같은 소재들이 보이네요. 암기와 가창..

맥거핀 2014-03-04 00:46   좋아요 0 | URL
<고양이 대학살>을 언제 읽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책 대학 때 과제 때문에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이 책이 참 오래된 책이긴 한듯..아무튼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도 조금 재미있으려니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더 딱딱한 책이었어요. 확실히 논문같은 느낌도 있구요. 근데 또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또 특이한 면도 있어요.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뭐 그런 인상이랄까..지나친 추론과 섣부른 결론을 상당히 경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근데..요새 단테는 왜 읽어요? 재미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28   좋아요 0 | URL
표지보면 이책은 정말 유들유들하고 재미있어보여요. 기대했는데 맥거핀님 리뷰보면서 또 내 생각이랑 달랐구나 했어요. 그렇지만 소재나 주제, 방식면에서 저는 단턴이 괜찮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식의 글쓰기라니, 제가 시대사,문화사 좋아해서 그런것도 있고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좋네요.

그냥 단테 있길래.. 신곡은 어려워서.. 연암서가에서 나온 아우어바흐의 '단테'요. 신곡해석해주겠죠, 단테어떤사람인지 알려주겠죠, 책도 대여중이기때문에 저렴하죠, 여러모로 읽을수밖에 없었........^-^

맥거핀 2014-03-07 00:46   좋아요 0 | URL
저도 '신곡'을 실제로 읽었다기보다는 해설서로 주로 봤는데, '신곡'이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방대하며,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더라구요. 아무튼 해설서들을 나름 꽤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모르겠군요. 찾아보니 꽤 최근에 출판된 책인듯 합니다.

네..그래도 소재가 신선해서 기본적인 재미는 있었어요. 당대의 시와 노래들도 나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구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재미있는 건 누군가를 까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ㅋ

희선 2014-03-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노래가 퍼졌다는 말을 보니, 이정명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는 감옥에서 책을 돌아가면서 읽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겠죠 시와 노래를 사람들이 보고 듣고 생각한 일... 아니 어쩌면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조금 달라졌지만 사람 마음은 아주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대중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큽니다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올바른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겠죠 위에서 누르려고 해도 누워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하니 김수영 시 <풀>이 생각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0:53   좋아요 0 | URL
위정자들은 항상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지만, 대중들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알 건 어느정도 알죠. 다만 알아도 비겁해지거나, 혹은 눈을 감아버릴 때도 있는 것 뿐이죠. 물론 그건 저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겠구요. 어떨 때는 정말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위선적이죠.

그래도 결국 희선님 말대로 사람 마음은 결국 비슷해서 아마도 어떤 발전방향, 혹은 역사라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간에 어떻게, 얼마만큼 에둘러 가는가의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이 책에서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는 않지만, 결국 이 시와 노래들과 프랑스 대혁명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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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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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 가지의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아니, 아마도 이런 경험은 한번쯤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굳이 실제의 실험을 행하지 않고 사고실험으로 그쳐도 좋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교통비만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이 넓은 도시에서 홀로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넓은 도시에는 참으로 갈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거리에는 수많은 건물과 상점과 공공기관과 종교시설과 영화관과 은행과 커피숍과 쇼핑몰들이 있지만, 우리를 반겨주는 곳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기껏해야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이나 공원 정도일까. 그러나 도서관은 어서 이 도서관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수많은 무리 혹은 갈곳 없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인해 점령당한지 오래고, 대형서점은 점점 책을 읽을만한 공간들을 없애나가고 있으며, 공원마저도 긴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도심의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곳의 출입자격은 여러가지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양복을 차려입고 공원에 장시간 앉아있다면 딱딱한 나무로 된 벤치를 견뎌내는 것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견뎌내는 일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머니에 현금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꽤 다르다. 각종 다양한 상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문화시설에서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은행에 들어가 VIP고객 대접을 받으며 장시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커피숍에 들어가 오랜시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 귀찮다면 호텔이나 모텔같은 숙박시설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도 있다. 즉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의 많은 곳은 출입자격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아예 돈이 없다면 출입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공간도 있고, 어떤 공간들은 출입은 할 수 있되, 어떤 어색함, 빨리 나가줄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자괴감, 비우호적인 눈초리, 물리적인 불편함등을 견뎌내야만 한다(예를 들어 요즘의 상당수의 은행들은 출입구에 안내원을 세워놓고 번호표도 뽑아주고, 어떤 업무인지도 물어보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서비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시'나 '걸러내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은행의 편의시설은 그 은행에 돈을 많이 예치한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 사회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출입자격은 누가 결정하는가. 그것은 자본이 결정한다.

 

아마도 그것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자 류신, 혹은 그의 분신인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서른 일곱살 룸펜 구보가 서울 거리를 산책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과 소설가 구보씨를 끌고 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 구보가 하루동안 서울거리를 전전하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것을 이야기라도 불러도 좋을까. 작품에 대한 평론과 인문학적 단상과 창작된 소설과 저자의 실제경험이 혼재되어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구보는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입구를 돌아 다시 서울의 강남으로 내려가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을 거친다음 다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간다. 즉 그가 돌아보는 곳은 소위 서울의 중심가들이다. 그리고 중심가라는 의미는 이 자본이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라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 가장 자본이 집약되고 있는 공간들이라는 의미도 된다. 아마도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 이유이어야 할 것이며, 이 책이 그저 '서울 프로젝트'가 아니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이유일 것이다.

 

아케이드(arcade)란 "원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 책에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p.11)"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생애 말년 13년 동안 19세기 초반 '세기의 수도'로 군림했던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아케이드)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하려 했으며, 이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저자는 이 책에서 '파사주(passage)'라는 용어가 아케이드보다 더욱 적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과 개념을 빌어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 무형의 쇼핑 공간(아케이드)에 서려 있는 자본주의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는 시도다. 아니 역으로 말해서 자본이 출입자격을 결정하는 이 서울의 공간들에 기어이 출입자격을 얻기 위해 발터 벤야민을 과거로부터 소환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은 발터 벤야민 외에 저자와 사상적으로 동행한 또하나의 인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하릴없이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씨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가 구보씨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가 벌이는 행위, 즉 '산책'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공간에서의 미덕은 그저 단 두 가지, 즉 그저 빠르게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자본을 소비하며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들은 자본이 없는 자들은 어서빨리 스쳐지나가도록 하고, 자본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이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산책은 이 두 가지에 모두 반하는 행위다. 산책은 조용히, 천천히, 혹은 유유히 공간안으로 들어가 공간 속에서 어떤 사유를 수행한 후 다시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사유는 개인적인 사유일수도, 공간이 연상시키는 어떤 작품에 대한 사유일수도, 혹은 다른 인문학적 사유일수도 있다. 즉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생활에 편입되지 않고 문학과 공간을 사유하던 소설가 구보씨와 2010년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자본과 유리되어 공간에서 문학과 사유를 곱씹는 룸펜 구보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 식민지 현실에, 혹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완전한 저항이나 급진적인 저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들은, 그리고 그와 거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이 현실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현실의 단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정보지상주의, 어떤 인간관계의 단절, 사유의 정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스마트폰을 누구보다도 오래 손에 쥐고 있는 자들이며, 그것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각종 고가의 물건들을 파는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대가 가득한 지하의 아케이드를 돌아보는 다음의 사유는 어떤가. 아...우리는 그 아케이드에 가면 결국 우울하게 나오게 될 자신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케이드로 발걸음을 돌리고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혹은 어쩌면 산책이 그런 것이 아닐까. 즉 우리가 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굳이 그것을 '돌아보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정미경 <호텔 유로, 1203>)"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101)


그러나 소설가가 혹은 저자가 이 양가적 감정에 휘둘리는 누군가, 즉 어쩌면 당신을 등장시킨 것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스스로가 진자처럼 오가면서 이 물신이 지배하는 도시 서울을 기꺼이 걸어가고 있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인간의 욕망이 정치적, 혁명적 실천의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p.268)" 그리고 저자 역시도 홀로 긴 시간 서울 거리를 산책하고 돌아온 구보와 그를 기다리는 지친 노모에게 작은 위안을 선사한 다음, 어떤 희망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것은 공간에 매몰되지 않고 그곳을 꿋꿋이 산책하고 있는 산책자 자신, 혹은 수많은 '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소설가 구보씨와도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며("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인용한 다음의 문장과도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니 길이 생긴 것이다. (루쉰, <고향>)"

 


덧 1.
사유의 기본은 세심한 관찰이다. 이 책은 적절한 인용도 인상적이지만, 세심하고도 집요한 관찰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구보는 맥도날드에서 고객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이 보이지 않는 매뉴얼에 충실히 따랐다. 시장이 반찬인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먹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라지만 먹는 과정은 매끄럽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빵 두 조각이 힘겹게 덮고 있는 고기 패티와 야채 더미를 손에 쥐고 먹는 일이란 여간 힘들고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포장지에 압사당한 야채들이 기필코 틈을 비집고 탈출에 성공하기 일쑤였고, 소스는 노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구보는 포장지 안으로 햄버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가능하면 토핑을 떨어뜨리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씹어 심키려는 자신의 허기와 맹목적인 식탐에 비애를 느꼈다. 햄버거는 거인 같았고 그걸 감당하기에 자신은 난쟁이 같았다. 구보는 자기가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가 자신을 집어삼킨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햄버거 속 토마토가 먹잇감을 보고 날름거리는 표독한 독사의 혀 같았다. (p.125)


덧 2.
혹시 어쩌면 누군가 한명쯤은 이 묘사를 보고 한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는 거의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도 어쩌면 한 남자의 서울 유랑기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주인공 영수(신하균)를 계속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다니는 서울타워이다. 아마도 구보가 드넓은 서울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이 서울타워는 상당부분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노모에게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구보는 서울타워에 오르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노모에게 돌아온 영수를 여전히 서울타워가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비극 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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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첫 문단을 보고 서울에도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서울을 한바퀴 도는 버스도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주 적은 돈으로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산에라도 올라가면 모를까^^

어딘가에 들어가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니 조금 우울한 이야기네요 그래도 그런 것에 기죽지 않으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은행,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나 그런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희망을 찾기를 바라고 이 글을 쓴 것 같군요 산책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도 막을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들어가서 깊이 생각한 적은 별로 없군요 그냥 걸을 때나 이것저것 생각하지, 다음에는 어딘가에 들어가면 한번 잘 살펴보고 싶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3 17:52   좋아요 0 | URL
불성실한 서재에 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깍제깍와서 얘기도 나누고 그래야 하는데..많이 늦었네요.

저는 아주 가끔 위의 실험을 실제로 행해보고는 합니다. 뭐 의도할 때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고,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서울 거리를 걷는 걸 나름 즐깁니다.

위에 쓰지는 않았지만, (참 갈만한 데가 없다는 것과) 동시에 느끼는 것은 참 이곳은 빠르게 많은 것이 바뀌는 도시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참 이상하게도 늘 갈만한 곳이 제일 빨리 없어지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명동 거리를 돌아다닐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참 조용한 데가 필요하다 싶으면 가는데가 있었습니다. 명동의 중앙시네마인데, 참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은 영화관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요.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없어진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꼭 영화관만은 아니고, 서울 거리는 이상하게도 조용한 꼴을 못 보는 듯 싶습니다. 여기 조용해서 참 좋네..하면 이상하게도 요란시끌벅적한 무엇인가가 어느 틈에 들어서 있고는 합니다. 참 왜들 그러나 싶을 정도죠. 그럼에도 아직도 참 좋은 몇몇 군데가 있어서 저는 여전히 서울이 (어느정도는) 좋고요. 앞으로도 가끔은 여전히 산책을 나갈 것 같습니다.

희선님 댓글을 읽다보니 왠지 여유가 조금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네요. 우리 기죽지 말고 살아야겠죠.^^

아이리시스 2014-03-0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2014-03-03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3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03-03 18:42   좋아요 0 | URL
새로운 형식 실험 아니고, 맥거핀님, 하고 뭐 써야지 하다가 비밀로 해야될 부분있으니 비밀로 쓰자 하고 바꾼 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4-03-0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 특히 좋네요. 제 마음에도 쏙 드는(응?) 글, 주제이기도 하고요.

요새 몸이 좀 둔해진 듯 싶어 걷는 양을 늘렸는데 걸을만한 길을 갖는 것도 실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산책 코스가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유령처럼 걷다 오면 미세먼지는 있어도;; 마음은 좀 나아져요. 한 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반드시 숨은 장소 몇몇은 찾을 수 있고 아직은 나 혼자 바람 쐴 곳이 있다는 것도 안도 될때가 있죠. 산책 코스에 앉아서 책을 읽게 되는 장소가 있는데 거의 앉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 없다보니 날씨가 좋을 땐 간식을 먹거나 헤드폰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는데. 말은 안 되도 저는 그게 '제 자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런 곳들을 찾다보면 가끔 흡연하러 오시는 분과 조우하게 되는 뻘쭘한 상황이.....

맥거핀 2014-03-07 00:33   좋아요 0 | URL
요즘 Shining님 마음에 드는 글들이 늘어가고 있군요. 다행입니다.ㅋ

음..산책코스에 책을 읽을 만한 장소가 있나요? 그것 참 좋습니다. 요즘에는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희귀해진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말 그대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만한 곳이 참으로 찾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공유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집 근처에 나름의 산책코스가 있기는 한데, 책을 읽을만한 장소는 없구요. 그저 거리가 그래도 보기 좋고 조용한 편이라서 가끔 나가고는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참 공기가 너무 안좋아서 잘 안나가게 되는군요.

안 그래도 공기도 안 좋은데, 담배까지 피면...아무튼 흡연자들이 여러모로 민폐이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4-03-0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은 특히 더 좋네요!
제가 하고픈 말씀을 요 위에 샤이닝님께서 하셔서 한번 더 따라 씁니다. ^^

저 대략 이십년 전쯤에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던 적이 있었어요.
신천(여기서 선배한테 술을 얻어 먹었거든요.) -> 잠실 -> 신촌 -> 종로 -> 대학로 등등
혼자였고,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서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걸었어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돈이 없으면 머물 공간이 마땅히 없다는 것.
맥거핀님의 멋진 표현들을 읽으며 새삼 깨닫습니다,

맥거핀 2014-03-07 00: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늘 좋습니다.^^

저는 태어나기도 서울이고, 대학도 서울에서 다녔고, 일도 서울에서 했고..아무튼 거의 서울을 벗어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 거리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점점 또 시간이 흐르다보니 제가 잘 모르는 곳도 참 많더군요. 아무래도 서울에 살아도 늘 가는 곳만 가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한 장소들은 거의 다 그래도 아는 곳들이라 반가웠습니다.)

요즘에는 시간도 잘 없고, 체력도(...) 없어서 잘 못 그러지만 학교 다닐때는 참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고,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같이 돌아다녔던 사람들도 생각나구요. 물론 그 때도 돈은 별로 없었지만요. 그래도 젊다는 패기로 그냥 그래도 즐겁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제로 그런건지, 아니면 제가 패기가 없어져서 그런건지 요새는 돈이 없으면 아예 가기가 겁난다고 해야할까요..그런 곳들이 너무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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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문장을 매우 잘 쓴다거나, 묘사력이 뛰어나다거나, 읽다보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거나, 늘 참신한 소재를 이야기한다거나, 혹은 놀라운 서사 전개 능력을 보여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날 소설의 신이 나타나, 그간 소설이라는 무용한 것에 시간을 낭비한 벌로(혹은 상으로) 남은 삶을 내가 읽은 소설들 중에 어느 하나로 반드시 들어가 보내야 한다며, 대신 그 중 어느 소설을 고를지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준다고 한다면, 나는 그다지 주저하지 않고 윤성희의 소설들 중에 하나를 고를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녀가 그려내는 소설 속 세계만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윤성희의 소설 <구경꾼들>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야기들의 연쇄이며, 이유와 결과의 퍼레이드이다. 주인공 '나'를 비롯한 나의 가족들, 그리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변인물에게는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며, 어떠한 행동, 즉 결과에는 거의 반드시 그 행동을 하게 된 이유, 원인이 따라붙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성추행을 당할 뻔한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의 한 대목을 보자. "아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상가 이층에서 파마를 하던 여자였다. 여자는 파마를 말던 미용실 원장에게 무슨 소리 안 들려? 하고 물었다. 젊었을 적에 뚱뚱했던 여자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여자는 늘 귀를 쫑긋하며 걸었다. 저 여자 좀 봐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침을 뱉곤 했다. 더 심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쫓아가 심한 욕을 퍼붓기도 했다. "무슨 소리요?" 미용실 원장이 되물었다. 여자는 그후로 삼십 킬로그램이나 감량을 했지만 청각만은 여전해서 멀리서도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틀림없어. 비명소리네." 미용실 원장과 여자는 파마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결석이 잦은 주인공에게 담임이 찾아오는 다음의 대목. "커피는 굳어 있었다. 할머니는 뜨거운 물을 커피 통에 부어 간신히 커피 물을 우려냈다. 하지만 프림이 없었다. 할머니는 대신 설탕을 네 스푼이나 넣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커피의 비율은 커피 두 스푼, 프림 두 스푼 반, 설탕 세 스푼이었다. 커피를 마신 담임이 얼굴을 찌푸렸다. 담임은 단 것을 싫어했다. 일곱 살 무렵에 집을 나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준 음식이 설탕물이었다. 담임은 두 동생들과 난방이 되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설탕물을 마시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마시다가 담임은 이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엄마를 떠올렸고, 그러고는 갑자기 무단결석을 한 나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두 여자가 달려와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젊었을 때 뚱뚱했던 여자의 청각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담임이 무단결석이 잦은 주인공을 용서해주었던 것은 커피가 달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단 커피가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이렇게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이 소설을 촘촘하게 구성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세계가 단지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된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작동하는 것이 단지 인과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뒤로 돌아가 보자. 두 여자가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청각이 발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청각이 발달한 여자가 그 시간에 상가 이층에 파마를 하러 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담임이 주인공을 용서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필이면 커피가 굳었기 때문이며, 주인공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음식이 하필이면 설탕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인과의 법칙들의 빈 구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많은 우연들이다. 어떤 우연들. 그 우연들은 때로 인과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인과들은 또 우연의 충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우연과 인과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죽음들이다. 언뜻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던 이 소설은 순간순간 독자를 멈칫거리게 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죽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차가 뒤집어지는 큰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주인공 가족에게 예기치 않은,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주인공의 큰삼촌이 치료받던 병원 건물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병원 옥상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린 여자에게 깔려 죽은 것이다. 물론 인과와 이야기의 퍼레이드인 이 소설에서 이 두 사람이 거기에서 바로 그 시각에 부딪히게 된 것에는 나름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충돌을 단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온전히 필연적인 죽음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인과가 작동하였다고 해도, 그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에 결국 작동하는 것은 인과보다는 우연이다. 큰 삼촌이 커피를 조금만 더 늦게 마셨더라도, 혹은 여자가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길을 건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발견했다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인과는 사실상 우연이 빚어낸 인과, 혹은 인과로 가장한 우연이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말이다. 주인공의 아버지, 그러니까 죽은 큰삼촌의 형은 어느날 신문을 본다. 거기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실려있었고, 그 내용은 자신들이 겪은 사건과 동일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한 여자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하필이면 그 아래를 지나가던 한 남자를 덮쳤지만, 놀랍게도 둘 다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두 개의 사건이 한날한시에 벌어졌을 것이라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기적을 찾아가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우연의 집합체인 기적이라기보다는 인과와 우연이 혼합된 나름의 긴 이야기이다(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이 한날한시라는 기적에 대해 묻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만남을 계기로 주인공의 부모는 여러가지 기적과 같은 사연을 만나는 긴 여행을 하지만, 그것들도 역시 단지 기적이라기보다는 인과와 우연이 교차하는, 그것들이 빚어낸 수많은 각각의 삶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삶에 작동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시간이다.    

즉 기적의 반대편에서 작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기적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 중의 하나는 시간을 압축시키는 것이다. 두 시간 전에 서울에 있던 사람이 그 후에 부산에 나타난다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테지만, 그러나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현재의 우리는 그것이 '시간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단지 기술적으로 시간을 압축시킨 것임을 안다. 마찬가지로 현재에는 30분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것은 기적으로 보일테지만, 미래의 어느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즉 기적적으로 보이는 일도 아주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한 예는 바로 이 주인공의 성장이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소설 <구경꾼들>이 결국 이 주인공 '나'의 성장담이라는 사실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잉태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추억하는 주인공 나의 기억으로 끝난다.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모자란 단지 아주 작은 것이었다가 어느덧 누군가를 추억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가 된 이 아이의 이러한 성장은 기적과 같은 무엇이 작동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긴 시간이 작동했을 뿐이다. 윤성희는 긴 시간 속에서 인과와 우연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시키면서 그저 차분히 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다. 그것이 아마도 이 소설에 '구경꾼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스펙테이터(spectator)로서의 구경꾼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긴 시간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과 비슷하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지켜보는 자들이 그 지켜보는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은 지켜보되,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냉소나 방관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것을 공을 들여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그 긴 시간을 어떻게든 같이 견뎌내며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윤성희의 '어떤 태도'다. 우연과 인과, 혹은 인과가 만들어내는 우연이나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과는 우리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작은삼촌은 퇴근을 하자마자 내 운동화부터 살펴보았다. "정말 달렸네." 나는 작은삼촌에게 사인받은 종이를 주었다. "두 시간 삼십 분 걸렸어."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작은삼촌이 종이를 보더니 맨 아래에 있는 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니가 몰래 하려다 실패한 거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작은삼촌에게 조카를 폭력청소년으로 만들어서 좋았냐고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작은삼촌이 거짓말쟁이가 될까봐 꾹 참았다고 나는 덧붙였다. 내 뒤통수를 때릴 줄 알았지만 작은삼촌은 예상과 달리 내 두 손을 잡고는 미안해, 하고 말했다. "불쌍한 놈이 되는 것보다는 한심한 놈이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작은삼촌이 말했다. 나는 햇볕에 그을린 작은삼촌의 얼굴을 보았다. "작은삼촌!" 나는 조용히 불러보았다. 작은삼촌이 왜? 하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작은삼촌, 작은삼촌, 하고 두 번을 더 불러보았다. 영원히 작은삼촌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또 고모가 막내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어떻게 견뎠을까? 내겐 이젠 삼촌이 한 명밖에 남지 않았고 고모에게도 오빠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삼촌, 오빠, 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 "사인한 종이, 선물로 줄께요." 나는 작은삼촌에게 학교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학교도 가고 일요일마다 달리기도 하겠다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식구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제가 잘하는 건 요리가 아니라 청소예요." 어머니는 소파 아래에 쌓인 먼지나 화장실 변기의 찌든 때를 닦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삼촌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걸 싫어했다.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할머니는 며느리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할머니도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발가벗은 채로 화장실을 청소하곤 했다. "나도 그렇단다." 누가 뭐라 해도 큰며느리는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할머니는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으면 직접 해먹어. 아님, 요리사를 고용할 만큼 돈을 많이 벌든지."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입안에 있던 밥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목이 메어왔고, 물을 두 컵이나 마신 후에도 계속 마음이 아려왔다. "얘야, 넌 장래희망이 뭐였니?" 괜찮니, 라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현모양처는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봐주었던 그날의 아침식사를 떠올렸다. 그러면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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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2-13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을 들여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그 긴 시간을 어떻게든 같이 견뎌내며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윤성희의 '어떤 태도'다. 우연과 인과, 혹은 인과가 만들어내는 우연이나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과는 우리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깝네요..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4-02-14 12:5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새벽숲길님. 닉네임이 참 좋네요. 새벽숲길..저야말로 시간내서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2014-02-13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도 맘에 들고 (빨리 읽어보고 싶다! 고 생각했어요.) 이 글도 맘에 들어요. 둘 다, 속할 수 있다면 속하고 싶은 세계입니다.^^

맥거핀 2014-02-14 12:52   좋아요 0 | URL
여행에서 돌아오셨군요, 섬님.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좋은 소설이예요. 재미도 있구요. 윤성희 작가의 특유의 따듯한 시선들이 있는데, 그게 참 좋습니다.

희선 2014-02-15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소설, 갑자기 저는 그런 게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있었지만 지금 생각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죠 아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소설이 있다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저 바라보기만 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일이 일어나게 할 건가요 소설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에서 지난날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일어나는 일을 알잖아요 어쩌면 소설 안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될 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니...^^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시간이 필요하죠 이것은 실제 경험해서 알기보다는 글이나 다른 것을 보고 깨닫는 것 같습니다 기적처럼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 뒤에는 많은 사람과 많은 시간이 있었야 했겠죠 말을 꺼냈지만 제대로 못 끝내겠습니다^^

윤성희 라는 이름 알고 책도 조금 봤는데, 사실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다 단편 하나만 기억에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 남자의 책 198쪽>입니다 도서관과 책이 나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4-02-17 23:2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소설 속 세계가 일어났던 일이 일어나는 세계인지, 아니면 새로운 일들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세계인지는 생각을 안해봤습니다. 되도록이면 제가 주인공이 되어 다른 일들을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죠. 아..그렇게 되면 그 소설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걸까요?

윤성희 작가의 소설이 대체로 좋지만, 이번 소설은 뭐랄까..읽다가 중간중간 울컥거린다고 할까요, 마음을 건드린다고 할까요..뭐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 책들을 찾아서 읽으려고 하는 편이라, 윤성희 작가의 책들은 꽤 찾아서 본 편입니다. <그 남자의 책 198쪽>도 분명히 읽은 기억은 나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사실 생각이 정확히 안나는군요. 아마 제 기억으로는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있었죠.

Shining 2014-02-1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굉장히 재밌게 읽었고 좋아합니다. 다만 다른 단편소설들을 그리 인상깊지 않았던 걸 보면 저는 윤성희가 아닌 이 책, 이 좋았던것 같기도 하고요. 평가단과 영화 외 책 리뷰는 오랜만인 것 같아요 맥거핀님. 이 책을 다시 읽으신건지, 문득 리뷰가 쓰고 싶어진건지. 어떤 연유인지 궁금합니다 :) 좋네요, 책이 떠올라서, 리뷰도 좋고, 오랜만에 제가 읽은 책 써주셔서;; 더 좋아요^^

맥거핀 2014-02-17 23:37   좋아요 0 | URL
태블릿을 하나 샀거든요. 처음에는 여러 용도로 쓰다가 최근에는 밤에 잠이 안올 때 그걸로 책을 보고는 합니다. 몰랐는데, 전자도서관이라는 것도 있고, 그냥 클릭 몇 번으로도 책을 대여해서 볼 수 있더군요.

근데 대부분 인문서는 조금 쓸만한 책들이 별로 없고, 소설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래서 소설들을 보고 있지요. 물론 밤이나 새벽에 잠이 안올때만 보는 터라 진도는 상당히 느릿느릿한 편입니다만, 덕분에 좋은 소설들을 여럿 읽기는 했습니다. 의외로 최신간도 있구요. (위에 인용에 페이지가 없는 건 전자책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읽다보니까 리뷰를 써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리뷰를 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책이나 영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저 어떤 느낌을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뿐이죠.

올해는 소설 리뷰를 써볼까요. 아무래도 소설들을 새벽에 잠이 안올 때 읽어서 그런지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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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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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책 <명작순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화 49점을 중심으로 명작의 내력과 거기에 깃는 예술적 가치를 소개하는 책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읽을 때에는 좋으나, 리뷰를 쓰기에 가장 난감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중심주제나 스토리가 없이 여러 미술작품을 나열하는 형식인 책의 구조도 그러하거니와 책에 있는 미술작품을 보는 나의 안목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목 자체가 모자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며, 이 책의 목적은 저자 유홍준 교수가 밝히고 있듯 나같이 안목이 부족한 독자에게 명작을 감상하는 아주 기초적인 안목을 길러주고자 함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리뷰를 써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떠한 작품을 단지 글과 사진을 통해 2차적으로만 감상한 느낌인 데다가, 그마저도 안목이 떨어지는 자의 필터를 거친 거친 감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유홍준 교수는 나와 다르게 일생을 거쳐 한국미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며, 대중들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달해 온 말 그대로 이 분야의 전문가이고, 그의 필터는 적어도 수없이 단련이 되었다는 점에서 범인의 필터와는 다르다. 그러나 아마 그의 고민도 결국에는 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즉 그 고민이란 이 좋은 작품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며, 어떻게 읽는 이에게 이 감상을 조금이라도 덜 훼손시킨 상태에서 전달할 것인가라는 고민이다. 그런 그의 고민은 이 책의 서문에서도 절실히 드러나거니와 한편으로는 그가 여러 교양프로그램, 혹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텐데, 그것은 우리 역사 속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나라의 사람들이 알아보고 깊이 감상할 안목을 길러주기 위한 그 나름의 다양한 방책들일 것이었다.

예술작품의 감상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그 작품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오로지 작품 자체에 천착하며 그 작품의 의미와 숨겨진 함의를 해석하고 찾아내어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 여러 작품들과 동시에 놓고 비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작품의 아쉬운 점이나 모자란 부분을 비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떠한 방법이든 간에 그것은 유홍준 그 자신이 많이 사용하기도 한 다음의 용어, 즉 추체험(追體驗)이란 용어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 추체험이란 간략하게 말해서 타인의 체험을 자신의 체험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고, 유홍준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추체험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홍준의 체험의 정도와 독자들의 체험의 정도는 안목의 차이로 인해 결국 비슷한 수준에라도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홍준이 고민끝에 택한 실제적인 방법론은 약간은 우회적인데, 그것은 감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의 전단계를 전달하는 것이며, 그것은 유홍준 자신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그의 감상도 결국 이런 지식의 집적에서 시작했을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나의 작품 보는 안목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작품 감상은 되도록 절제했다. 대신, 한 화가가 어떤 계기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사회적·예술적 배경이 있었으며, 화가의 예술적 노력과 특징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액면 그대로 친절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림의 기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도록 마음 쓴 것이다. (p. 4)

 

 

그래서 유홍준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작품의 기법상의 특징이나 역사적 의의, 혹은 예술적인 특질이나 인문적인 비평이 아니라 그 작품을 그린 작가가 누구이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삶이 이 예술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이미 잘 알려진 화가의 경우에는 작품을 제작할 당시의 상황을 중심으로, 그리고 비교적 생소한 화가의 경우에는 간략한 전기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달마도>로 유명한 연담 김명국의 경우 작가보다는 작품만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다양한 기행들을 소개하고(그는 조선시대 회화사의 3대 기인 중의 한명이다. 17세기 인조 때의 연담 김명국, 18세기 영조 때 호생관 최북, 19세기 고종 때 오언 장승업이 그들이다), 그가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널리 명성을 떨쳐 그림주문이 쇄도했던 일화 등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그의 명성을 듣고 왜인이 몰려들어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경우에는 그의 일생보다는 어떤 작품이 탄생한 배경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서원아집도>나 <기로세련계도>의 경우 각 작품의 탄생 배경과 작품 자체에 주목하여 비교적 세세하게 작품에 대해 논하며, 작품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예술적인 감상법으로 말하자면 유홍준 그 자신의 글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봉래 양사언의 글씨에 얽힌 '비자설(飛字說)'을 소개하는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다(p.210~213). 그의 현판 글씨 중 가장 잘 써졌다고 자평하던 '날 비(飛)'자를 쓴 족자가 없어진 날이 그가 먼 곳에서 객사한 날과 일치한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데, 유홍준은 이것을 소개하며, 이는 양사언의 혼과 함께 그의 예술작품이 사라진 것이라고 해석하며, 예술론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즉 예술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미적대상론(美的對象論)에 입각한 '자연의 모방'이다. 근대적인 정의로는 미적체험론(美的體驗論)이 말하는 '예술은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현대미학에서는 미적상관론(美的相關論)에서 '예술은 이미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양사언의 전설이 말하는 예술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은 혼(魂)이다."라는 말이며, 다른 용어로는 예술은 '에스프리(esprit)'라는 것이 유홍준의 주장이자 오늘의 예술가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유홍준의 이 책에 담긴 글들은 그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예술에 담긴 모방의 정밀도나 표현의 참신성이나 이미지의 감수성이 아닌, 그 예술가들의 혼이다. 그 예술가들의 어떠한 삶의 태도와 정신과 사상, 즉 혼이 이 그림을, 혹은 이 글씨를 낳게 했는가를 보라고 유홍준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양사언을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을 "혼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맺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추가하고 싶다. "예술가들의 혼을 보려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예술 감상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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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을 말해주는 책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잘 몰라도 그림 보는 것을 조금 좋아하기도 했는데, 책을 보고 쓰고 난 다음부터는 그런 책은 거의 안 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책만 봐도 될 텐데, 그렇다고 예전에 그런 책을 자주 본 것도 아니군요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책에 실려있는 그림이라도 자주 보면 그림을 보는 눈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과 글씨도 마찬가지겠죠 옛날에 그림을 그린 사람 가운데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글씨는 김정희밖에... 이 분은 그림도 잘 그리셨군요^^) 그저 잘 알려진 사람밖에는, 여기에는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 같은 사람도...

예술은 혼이다, 예술가들은 혼을 담아서 작품을 만들겠죠 그것도 제대로 봐야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4-02-07 23:5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시간도 있고, 마음의 여유도(물론 돈의 여유도) 조금 있을 때에는 미술관에 가서 그림도 보고 했었는데요. 최근에는 거의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뭐 하긴 그 때도 알고 본 거는 없구요. 그냥 유명하다니까, 혹은 남들이 보러간다니까 따라나서는 정도였지요.

아무튼 저도 안목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알수가 없어요. 특히나 서예나 추상미술 쪽은 더하구요. 근데 아무튼 미술이든 영화든 간에 지름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많이 알고, 많이 봐야죠. 그냥 보기만 하는 건 또 소용없고, 열심히 그만큼 알고 읽어야 하고, 또 그냥 읽기만 하는 것도 소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시간과 돈과 마음을 투자해야 하는데, 적절하게 그 비율을 유지시킨다는 것이 참 생각보다는 어려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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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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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써왔다. 언어학, 문학, 역사학, 법학, 철학, 비교종교학, 윤리학 등등의 소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학문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학, 과학, 예술, 종교 등 여타의 다른 부분에서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특질과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것은 인간을 수식하는 수많은 용어들의 범람에서 그 결과물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예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 등등의 넘쳐나는 수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넘쳐나는 설명들에도 인간이라는 이 특수한 종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거의 영원한 난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이 책 <지구의 정복자>는 이 영원한 난제에 도전한 또 하나의 시지푸스적 시도이자 사회생물학자가 내놓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질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윌슨의 화두는 한편의 그림이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거의 모든 것을 뭉뚱그린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보통 사람이라면 움츠러들고 말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사회생물학에 천착해 온 노학자는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시작은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인간이라는 종을 이렇게 특수하게 만들었는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여타의 종들과 다르다. 각종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며, 서로 언어로서 소통하고, 상당한 지능을 소유하였으며, 사회를 이루고, 때로는 협력하고 경쟁한다. 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자들이 진사회성 동물(eusociality animal)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p. 27).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런 존재로 만들었을까.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내놓은 답은 다르다.

그의 답은 인간이 몇 가지의 선적응(preadaptation)을 거쳐 이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선적응은 육지에 살았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선적응은 지구 역사상 육상 동물 중 소수만이 갖춘 수준의 큰 몸집이었다. 이 두 가지 선적응은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을 가져다 주었는데, 기술의 발전에는 불의 사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선적응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그 다음의 선적응은 사물을 쥐고 조작할 수 있도록 진화한 부드럽고 납작한 손가락이 달린 움켜쥐는 손의 출현이었다. 이는 기술의 발달을 촉진할 뿐더러, 지능의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의 선적응은 혹은 그로써 일어난 결과는 상당한 양의 고기가 포함되는 쪽으로 식단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편으로 다른 여러가지 것과 연관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뇌를 발달시킬 정도의 충분한 에너지를 고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는 일차적인 사실 외에도 다른 중요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은 '무엇을' 사냥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냥하는가의 문제였는데, 고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보금자리와 사냥하는 동안 그 보금자리를 지켜줄 협력이 필요했고, 이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은 다른 말로 '진사회성 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진사회성 진화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들을 포함한다. 윌슨 박사는 개미, 흰개미 등 진사회성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다른 여러 (무척추) 동물들을 살펴봄으로서 이 조건들을 밝혀내고 있는데, 이는 집단의 형성, 집단을 치밀하게 만드는 선적응 형질 조합의 출현, 특히 그 중에서도 가치 있고 방어 가능한 보금자리(그리고 그에 대한 의존), 집단의 지속성을 빚어내는 돌연변이의 출현 등을 포함한다. 곤충들의 경우에는 로봇같은 일꾼과 같은 창발적 형질들이 '집단 수준의 선택'을 통해 군체의 생활사와 사회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며, 때로는 기이한 초유기체까지 발전하기도 한다(즉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의 경우 어떤 개미는 계속 번식기능만 담당하고, 어떤 개미는 계속 먹이를 구해오는 데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데,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집단 수준에서의 선택은 유전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의 결합이다. 

이는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즉 같은 진사회성을 갖추었으면서도 우리 인간과 곤충을 갈라놓는 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윌슨이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는 아주 조악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별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제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성인의 젖당 내성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전의 모든 인류에게서는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효소인 락타아제는 유아에게서만 생산되었다. 그러다가 9천에서 3천년 전에 북유럽과 동아프리카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목축이 발달했을 때, 성인이 되어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락타아제를 계속 생산하는 돌연변이가 문화적으로 퍼졌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주요 식량 원천으로서 소의 가축화를 가능케했다. 즉 이 돌연변이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이로웠기 때문이다(다른 집단보다 성인이 우유를 마시는 집단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근친상간의 금지, 색깔의 인식, 언어의 발달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언어를 더 잘 배우고, 특정의 색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유전자가 문화적 발달에 따라 진화했기 때문에, 혹은 문화가 어떤 유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의 전제이자, 이 책의 일종의 분기점, 혹은 논란지점이다. 즉 유전자-문화 공진화에는 그것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전자의 변이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전제로 깔려있다. 즉 이것에는 집단 수준의 이타주의적 본능이 조금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윌슨이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개별 구성원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압과 집단 전체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다른 선택압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p. 72). 다시 말해서 인간은 각각의 개체 수준에서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킬지 몰라도 전체 집단 수준에서는 이타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킨다고 윌슨은 말한다. 바로 그것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 등의 다른 진사회성 곤충과 다른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나 흰개미의 경우에는 집단이 거의 하나의 초유기체로 보일 정도의 극단의 이타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의 선택압이 다르며, 그것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거나 혹은 충돌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준 선택에서의 상호작용과 충돌이 도덕, 종교, 창작예술 등등의 기원과 발전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윌슨은 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혹은 인간의 유전자는 개체 수준에서는 약간은 이기적일 수 있으나 집단 수준에서는 결국 이타적이라고 윌슨 박사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결국 이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를 지배한 원동력이라고 그는 본다. 이는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그간 학계를 지배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그동안 주장했던 혈연선택의 관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이 포괄 적합도 및 근친도 개념에 기반한 혈연선택에 대해서는 솔직히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었는데, 해설을 한 최재천 교수가 "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적합도와 근친도 개념은 수많은 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의조차 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남아 있"다고 하셔서 힘을 얻기로 했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최교수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하겠는가. 다만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윌슨의 이 다수준선택에 기반한 자연선택으로의 회귀는 급작스러운 반동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회귀이며, 그것들이 그렇게 완전히 대립되는 것만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는 우리의 미래, 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긍정적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p. 363)." 그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동력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선택이며, 그 이타성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혹 인간은 개미의 군체와 비슷하게 될까). 그러나 윌슨의 이 주장에 그대로 올라타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책을 통해 제기된 물음들이 계속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으며, 명확한 결론은 아직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질문과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일 것이다. 이 노학자의 통섭의 결과물들도 결국 가능성 있는 하나의 추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노학자가 우리에게 가지기를 권하는, 과학에 기반한 태도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역시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와 열린 마음이다. 나는 다만 이 노학자의 긍정성에 나의 소박한 긍정을 더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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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도 사람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서 아직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는군요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이것은 진화하고는 조금 다른 것이기도 하군요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 사람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사람이 어떻게 바뀌어왔다고 배웠다 해도... 진화는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군요^^

그런데 22세기라니, 그때 저는 이 세상에 없겠군요 이 글을 쓴 분도... 그래도 누군가 이어서 이 문제를 알아가고 있겠죠


희선

맥거핀 2014-02-08 00:0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지금의 인간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로 진화하고 있을 겁니다. 이 책을 쓰신 윌슨 박사는 상당히 긍정적이신 입장이지만, 저는 부정적인 인간이라, 그렇게 좋은 쪽으로 진화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솔직히 그렇게 크게 되지가 않네요. (예를 들어 저도 이 인터넷 상당히 좋아합니다만, 이것이 인간을 긍정적으로 진화시키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뇌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아무튼 윌슨 박사는 인간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이타적으로 진화해 갈 것으로 보고 있고, 인간이라는 군체도 일종의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게 혹시 인간종에게는 좋을지라도 지구 수준에서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