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패러디 전성시대라고 할만큼 요즘 인터넷이나 SNS를 보면 온갖 것을 비틀고 뒤집고 해체하는 게 유행이다. 한 때 극장가에서도 패러디 영화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찰리 쉰의 [핫 샷]시리즈나 [무서운 영화]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레슬리 넬슨은 이 장르를 통해 흥행배우로 나서기도 했다. [총알탄 사나이]시리즈를 보고 배꼽잡고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영화 포스터의 세계에서도 패러디물이 있다.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패러디 영화일 경우 포스터도 그런 경우가 많고, 영화와는 별개로 순수하게 포스터만 패러디 한 경우가 있다.

 

 

 

 

 

 

[롱풀리 어큐즈드, 1998]   [도망자, 1993]

 

 

 

 

 [롱풀리 어큐즈드, 1998]의 [타이타닉] 버전

 

 

   

 

1998년 제작된 패러디 영화 레슬리 넬슨의 [롱풀리 어큐즈드]는 5년전 영화 [도망자]의 포스터를 가지고 메인 포스터를 만들었다. 패러디 영화답게 1년전에 개봉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타이타닉]을 내버려둘리가 없었다. 국내 개봉 시 '[도망자]에서 시작해서 [타이타닉]으로 끝난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했을 정도다. 무려 24편의 유명 영화를 이 영화 한편에서 볼 수 있었다.

 

 

 

 

 [후레치 2, 1989]  

 

 

 

 

1989년 작 [후레치 2]는 50년 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포스터를 우습게 바꾸어 놓았다. 원본 포스터와 비교해 보시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또 다른 체비 체이스의 영화, '휴가'시리즈의 포스터를 살펴보라.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휴가 대소동, 1983]

 

 

 

 

[휴가 대소동-유럽, 1985]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코난 더 바바리안] 포스터와 흡사하지 않은가? 아래 포스터와 비교해 보시길...

 

 

 

  

[코난 더 바바리안, 1982]

 

 

 

그렇다면 포스터 아티스트 '레나토 카사로'의 이 작품을 보면 연상되는 포스터는 또 없는가? 다들 [스타워즈]가 떠오를 줄로 믿는다.

 

 

 

 

[스타워즈, 1977]

 

 

 

방금 본 경우처럼 다른 영화들의 가장 선망이 되는 영화 포스터는 아마 [스타워즈]의 다양한 포스터들일 것이다.

 

 

 

[패밀리 가이-블루 하비스트, 2007]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패밀리 가이]도 자주 [스타워즈] 시리즈의 포스터를 빌려 쓴다. 위 작품은 에피소드 4의 스타일 C 포스터를 패러디 했다.

 

 

 

 

[스타워즈, 1977]의 스타일 C 포스터

 

 

 

 

마지막으로 볼 포스터는 불후의 명작 [카사블랑카] 포스터를 오마주한 [착한 독일인]이다.

 

 

 

 

[착한 독일인, 2006]

 

 

 

 

[카사블랑카, 1942]

 

 

 

 

패러디가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러디물이 끊임 없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패러디(parody)는 '전통적인 사상이나 관념, 특정 작가의 문체를 모방하여 익살스럽게 변형하거나 개작하는 것, 또는 그렇게 쓴 작품'을 일컫는다. 흔히 당대 가치관의 허위를 풍자하고 폭로하는 방법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기득권 층이나 보수적 성향의 사람, 권위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화가 달가울리 없다. 꼭 선거철이 아니더라도 정치인을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 된 '패러디', 그러나 이 유희가 언제나 누구를 공격하거나 비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신혼부부, 신인 정치인, 상업 광고 등에서도 추억을 위해, 인지도 향상을 위해, 판매량 제고를 위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나는 패러디가 우리에게 소위 먹히는 이유는 '낯익음'에 있다고 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먹고 노래도 듣던 노래가 흥을 돋우기에 더 제격이지 않은가. 어지간한 인지도로는 패러디에 활용되는 재료가 되지 못한다. 선거송의 리듬은 대부분 국민가요급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이타닉], [도망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타워즈] 쯤 되어야 다른 영화에서 차용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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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11-14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뜨 버그만이 참 이뻤죠.ㅎㅎ 남자답기로는 험프리 보가트 같은 배우가 없었구요. 헐리우드에 Red Scare광풍이 몰아칠 때 레이건이 여기에 편승해서 종북몰이를 했던 반면에 보가트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켰다고 하네요.

호서기 2015-11-14 10:22   좋아요 0 | URL
잉그리드 버그만은 어린 시절 나에게 환상과도 같았답니다. [백야]에 출연했던 그녀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도 참 예뻤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스 여신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신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난 아테네 여신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지혜·전쟁·직물·요리·도기·문명의 여신으로 로마에서는 미네르바로 통하는 아테네는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투구, 갑옷, 창, 아이기스 방패(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 올빼미, 뱀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그녀의 집인데, 이 신전은 건축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여신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 이아손,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들을 도우며 그들을 수호하고 승리를 안겨주는 신이기 때문이다. 아테네 여신이 없었던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영웅들의 고난극복과 활약상을 맘편히 보고 즐길 수 있겠는가.

 

뭐 다른 신이나 영웅들도 그렇지만 아테네 여신도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오늘 아테네 여신으로 말머리를 잡은 것은 그 출생과정 때문이다. 제우스는 장차 자신과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가이아의 신탁을 듣고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신과 형제들을 집어 삼킨것처럼 임신한 메티스를 꿀꺽 삼켜버렸다. 이때 제우스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해 자신은 개구리로 메티스는 파리로 변신을 시켰다고 한다. 몇달 후 두통에 시달리던 제우스, 손재주꾼 헤파이스토스는 두통의 원인을 캐기 위해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갠다. 짜~잔,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미모의 여성이 칼을 손에 들고 튀어나왔는데 이 여성이 바로 아테네 여신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신들의 세계라 그런지 우리의 상상을 넘는다. 머리가 아프다고 도끼로 머리를 쪼개다니... 바꾸어 말하면 두통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뚜껑을 열었다'는 이야긴데, 그런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양들의 침묵]의 속편인 [한니발]에서 식인을 즐기던 렉터 박사가 영화 끝물 무렵 레이 리요타의 머리뚜껑을 따고 '뇌'를 먹는 장면 말이다. 레이 리요타는 무슨 약에 취했는지 렉터가 자기 뇌를 먹는데도 눈을 껌벅껌벅 하면서 횡설수설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늘 볼 포스터는 바로 '뚜껑열린 머리 스타일(open head style)'이다. 근데 생각보다 그리 끔찍하지 않으니 미리 겁먹지 마시길.

 

 

 

 

[전자 두뇌 인간, 1983]

 

 

 

도끼는 아니고 예리한 외과 수술용 메스로 처리했을 것 같다. '뚜껑'이 열렸는데 고통스럽기는 커녕 스티브 마틴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의사 스티브 마틴, 나사마개와 집록식 뇌 수술법을 개발했으니 그를 믿으세요. 통증 걱정 끝~'이라고 광고하는 병원 전단지 같지 않은가. 영화 줄거리가 궁금하다. 

 

아름답지만 사악한 여인 돌로레스(캐서린 터너 분)는 세계 최고의 두뇌 이식 전문가인 마이클(스티브 마틴 분)의 차에 들이받히게 된다. 마이클은 그녀를 치료해 주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신혼 여행을 겸해서 비엔나로 학술 강연을 가는데 이곳에서 계속해서 엘리베이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끔찍한 것은 살해된 시체의 뇌가 도난되는 것이다. 그곳의 두뇌 전문의인 네세시터가 마이클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뇌를 훔친 사람은 바로 네세시터임이 밝혀지는데, 그가 만든 주사약을 이용하면 몸은 죽지만 뇌를 죽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마이클은 그곳에서 앤이라는 이름의 여자 뇌와 텔레파시로 대화를 하면서 돌로레스에게 없는 정신적인 평화와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앤이 얼마 못살게 된다는 얘기를 들은 마이클은 두뇌만 있는 앤을 이식할 여자를 찾으러 다닌다. 한편 마이클이 뇌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안 돌로레스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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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의 상상력이란... 코미디 배우 스티브 마틴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기대되긴 하지만 글쎄, 그닥 보고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붉은 해적단, 1983]

 

 

 

무수히 많은 해적 영화가 있지만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성공한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문게 사실이다. 이 영화도 그러저러한 해적 영화 중에 하나인데 포스터 만큼은 무척 인상적이다. 노란 수염의 '뚜껑'을 열었더니 무려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자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잘려나간 '뚜껑'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고 멀리 해적선(?) 한 척이 항해를 하고 있다. 온갖 잡스러운 생각의 원천인 '머리'를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나는 '세상'과 갖지 않느냐고 운을 떼는 것 같다. 코미디 영화가 분명할 것 같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찾아 보았다.

 

모두가 무서워하는 해적 옐로비어드(그레엄 채프먼 분)는 영국군에게 잡혀 20년의 징역살이를 한다. 그러나 영국군들의 생각과는 달리 옐로비어드가 20년 후에도 말짱하자 영국군은 140년 연장을 명령한다. 20년을 참고 살아온 옐로비어드의 분노가 폭발, 그는 감옥에서 뛰쳐 나온다. 그는 감춰둔 보물을 찾기위해 애를 쓰는데 그를 추격하는 영국 군인들에 의해 그의 아들이 잡히게 되어 노예로 끌려간다. 배에 잠입한 옐로비어드의 숨은 도움 때문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아들을 대장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의 부인을 협박하여 뒤쫓아온 영국군에게 보물들이 넘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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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크리스찬, 1970]

 

 

 

코미디의 대가 피터 셀러스와 비틀스 멤버 출신 링고 스타가 함께 공연한 [매직 크리스찬]의 포스터에도 '뚜껑'열린 머리가 나온다. 우연인지 몰라도 [옐로우비어드]에도 출연했던 존 클리즈, 그레이엄 채프만이 이 영화에도 출연했다.  제우스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는 아테네 여신이 모습이 저랬을까?

 

 

 

 

[브라질(여인의 음모), 1985]

 

 

 

 

가상현실을 다룬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브라질]은 국내에서는 [여인의 음모]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로버트 드니로, 조나단 프라이스 출연했다. 여기서는 뚜껑이 아예 날아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머리 안에서 일본식 무사와 날개를 단 용사가 솟구쳐 나오는데 표정은 천연덕스럽다. '이것은 단지 마음 상태'라는 카피가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포스터와 달리 상당히 묵직한 메세지를 전한다.

 

모든 것이 문서화되어 통제되는 시공간이 애매한 어느 도시, 인간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회색빛 건물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일거수 일투족까지 감시하는 권력과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개인. 말단 관리 샘(조나단 프라이스 분)의 무기력한 삶 속에서 유일한 판타지는 바로 상상 속에서 펼쳐진다. 그가 상상하는 꿈 속에서는 자신은 무적의 수퍼히어로가 되서 무시무시한 악당으로부터 미녀와 세상을 구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단지 상상일 뿐이었을까? 전체주의 사회에서 놓여진 개인의 저항을 시니컬하면서도 통렬하게 풍자한 수작, [브라질]이었다.

 

 

 

 

[달 위의 아마존 여인, 1987]

 

 

 

 

제목이 1964년 영화 [first man in the moon]과 유사한 이 영화는 미국의 저예산 영화나 TV 심야프로그램에 대한 인정사정 없는 패러디 영화이다. 조 단테, 존 랜디스 등 5명의 감독이 참여했고 낯익은 배우 미셸 페이퍼, 로잔나 아퀘트, 스티브 쿠텐버그, 캐리 피셔 등의 이름도 보인다. 흑백 텔레비전 시대의 다양한 캐릭터가 역시 투명인간 캐릭터처럼 보이는 머리 안에서 빡빡하게 비집고 나오고 있는 포스터 처럼 영화 역시 여러 에피소드들이 광고, 토크쇼, 단막극 등의 형태로 어지럽게 왔다갔다 한다. "염치없는!(shameless!)"이라는 평가가 딱 어울리는 영화다.

 

 

지금까지 다소 끔찍한(?) '절개된 머리' 또는 '뚜껑열린 머리'를 활용한 영화 포스터 몇 가지를 보았다. 문자의 느낌과 달리 하나같이 다소 황당하지만 유쾌한 코미디나 판타지 영화라서 다행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두에 소개한 아테네 여신의 탄생 신화 역시 얼마나 황당한가. 그러나 이미 주지하다시피 그런 신화로부터 우리는 무수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받는다. 소설가이자 신화 전문가 고 이윤기 선생은,

 

"우리 정신을 드높이는 데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신화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이 상상력의 있고 없음에 따라, 가멸한지 가난한지에 따라 피흘리며 괴물과 싸우는 영웅의 자리와 손뼉치며 환호하는 구경꾼의 자리가 갈린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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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소통의 시대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미 IT최강국인 대한민국의 요즘만큼 소통의 수단이 많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업무나 친목 목적으로 10개가 넘는 SNS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어떤 때는 무음처리를 해놓지 않으면 다른 일을 못 볼 지경이다. 각각 그만한 필요가 있으니 임의로 탈퇴하기도 어렵다. 음성 통화는 또 어떤가. 스마트폰이 유용한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것이 과연 소통의 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물건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상당수가 대출권유나 보험가입 권유 등 광고성 전화이기 일수고, 정작 통화 기능보다는 인터넷 검색, TV시청, 게임 등 부가 기능이 우선시 된지 오래다.

 

스마트폰이나 휴대폰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는 집전화나 공중전화가 있었다.('삐삐'라는 물건도 있었다.) 그림엽서나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었다. 이러 시대에는 전화라는 통신 수단은 첨단 IT로 인정받았었다. 그 시절의 전화기는 영화 포스터에 어떤 형태로 등장할까? 원할한 소통수단의 순기능을 강조했을까? 지금부터 포스터 속 통신수단을 살펴보자. '전화 스타일(phone style)'이다.

 

 

 

[휴먼 팩터, 1979]

 

 

 

리처드 애튼버러, 존 길거드 경이 출연하고 오토 프레밍거 감독이 연출한 영국 스릴러 영화다. 그레이엄 그린의 1978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휴먼 팩터'란 IT용어로서 '인간에게 최적화된 기기나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이용되는 이론, 원리, 테이터를 포괄하는 과학적 전문 연구분야'를 말한다는데 영화 내용과의 밀접성은 검증된 바 없다.

 

포스터는 사울 바스의 작품이다. 사울 바스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몇 안되는 색상을 활용하여 단순하고 임팩트 있는 디자인이 돋보인다. 강렬한 빨간 바탕에 지금은 몇 남지 않은 공중전화 박스에나 일을 법한 수화기가 맥없이 축 늘어져있다. 저 수화기를 들고 있던 사람, 괜찮을까?

 

 

 

 

[클루트, 1971]

 

 

 

젊은 제인 폰다에게 골든글러브(제29회), 뉴용비평가협회(제36회), 아카데미(제44회) 트로피를 안긴 알란 J 파큘라 감독의 [클루트]의 포스터도 역시 선이 늘어진 전화기가 보인다. 제목 '클루트'는 도널드 서덜랜드가 분한 극중 캐릭터의 이름이다. 이 영화 역시 스릴러로 분류되는데 제인 폰다가 열연한 '브리'의 직업이 콜걸인 것을 감안하면 포스터 속 전화기의 등장이 이해가 간다.

 

다만 [휴먼 팩터]의 전화기가 힘없이 늘어진 수화기라면 [클루트]의 전화기는 누군가가 밑에서 잡고 있을 것 같은 혐의가 짙다. 선이 다소 긴장되어 있고 수화기는 선과 둔각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다만 두 포스터 속 전화기의 공통점은 '통화중'은 아니라는 것, 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큰 회사의 중견 간부인 톰 그룬만(로버트 밀리 분)이 갑자기 실종되자 그의 친구이며 사립탐정인 존 클루트(도날드 서덜랜드 분)는 그를 찾아 나선다. 톰이 남긴 유일한 증거인 음란 편지를 추적하다 미모의 콜걸이자 배우 지망생인 브리 다니엘스(제인 폰다 분)를 만나게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브리는 몸을 파는 것으로 정신적인 외로움을 달래고 생계를 유지한다.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클루트는 브리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사건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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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라디오, 1988]

 

 

 

제39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에 빛나는 에릭 보고시안의 연기가 일품인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88년 작품이다. 라디오 방송 DJ가 청취자와의 대화 도구로 사용되는 전화기를 포스터 전면에 내세웠는데, 어두운 바탕에 노동자단체 깃발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손, 그런데 전화선은 거칠게 끊어져 있다. 무언가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듯한 인상의 포스터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베리(에릭 보고시안 분)는 청취자에게 심한 욕설을 하면서 싸우는 방식의 특이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청취자의 상처까지 서슴없이 건드리는데, 청취자들은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다시 그 방송을 듣게되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는 점차 높아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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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폰, 1977]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에 한 명인 찰스 브론슨과 [더티 하리] 시리즈로 더 유명한 돈 시겔 감독이 만났다. 제목부터 '텔레폰', 즉 전화기다. 줄거리부터 보자.

 

오랫동안 버려졌던 미 군사시설이 계속해서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수십년전 KGB에서 세운 텔레폰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이었다. 이것은 요원들에게 언어적 최면을 걸어 요원 자신도 첩보원임을 모른채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게 한 뒤 전화를 통해 어떤 암호를 말하면 요원들은 무의식 상태가 되어 최면 걸 때의 지시대로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폐기된 이 작전이 혁명 사상에 정신이상이 된 말친스키에 의해 개시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의 충돌가능성이 커지자 스트렐스키 장군(패트릭 매기 분)과 마르첸코 대령(알란 바델 분)은 극비리에 말친스키를 처치하기 위해 유능한 첩보원인 보르조프 소령(찰스 브론슨 분)을 미국에 파견한다. 보르조프는 미국내 침투해 있는 첩자인 바바라(리 레믹 분)의 도움을 받아 말친스키를 처치할 계획을 세운다. 보르조프는 말친스키가 자신의 이름의 각 스펠링으로 시작되는 도시 순으로 해서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요원들에게 차례로 행동 지시를 옮기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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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화선이 끊어진 것도 부족해 수화기의 송신기 부분이 박살이 나 버렸다. 선이 보이지 않아 사실 박살난 부분이 입에 대는 송신기인지 귀에 대는 수신기인지 궁금했다. 잡고 있는 폼이나 [토크 라디오]의 포스터를 보니 전화기는 송신기가 부서진게 맞다. 송신기와 수신기의 구멍의 숫자가 다른 것이다.(사무실에 있는 모든 전화기의 수화기를 확인해 봤다. 포스터와는 달리 적어도 우리 사무실에 있는 수화기는 모두 수신기의 구멍이 송신기의 구멍보다 많았다.) 아무튼, 저 전화기로는 이제 '텔레폰 작전'은 무용지물이겠다. 


 

 

 

[타인의 눈, 1981]

 

 

 

앳된 제니퍼 제이슨 리를 볼 수 있는 켄 위더혼 감독의 슬래셔 공포영화. 강간하거나 살해하기 전에 반복적으로 희생자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스토킹하는 강간살인범 이야기다. 한 페미니스트 TV앵커가 그녀가 믿어왔던 이웃들 중 한 사람이 범인임을 의심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그닥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작품이다.

 

포스터는 공중전화 박스를 섬뜩하게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감금당해 있는 것이 분명한 잠옷 차림의 여성이 있는데 공중전화 박스 안은 온통 꽃으로 가득차 있어 움직일 수 조차 없어 보인다. 가까스로 수화기를 잡는다 해도 저런 상태라면 다이얼이든지 버튼이든지 찾을 수가 없을 테니 어디에 구조전화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5편의 영화 포스터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원거리 소통의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여야 할 전화기가 모두 불통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 수화기가 내려져 있거나 파손되어 있다. 혹시 불통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자 그렇다면 이제 제 기능을 발휘하는 전화들을 볼 차례다.

 

 

 

 

[국제 첩보국, 1965]

 

 

 

영국에서 제작된 시드니 J. 푸리에 감독의 스파이 첩보 영화다. 섹시하고 화려한 첩보원 제임스 본드(암호명 007)와는 대척점에 있는 현실적이고 서민적인 스파이 '해리 파머'를 마이클 케인이 연기했다. 실제로 원작자 렌 다이튼은 이안 플레밍의 007시리즈와 상반되는 스파이물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원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영국 스파이의 일인칭 소설이었으나 영화화 과정에서 제작사가 '해리 파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해리 파머 시리즈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베를린의 장례식, 1966], [빌리언 달러 브레인, 1967], [미드나잇 인 상트페테르부르크, 1996], [베이징 익스프레스, 1997]까지 이어진다.

 

 

 

 

[평결, 1974]

 

 

 

1974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합작 영화이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배우 장 가뱅과 소피아 소렌이 열연했다.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영화다. '살인자, 협박범, 유괴범... 미모의 여인이 이 세가지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카피가 영화의 내용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가 스릴러가 아닌 드라마로 분류된다는 점도 참고가 될까. 매우 진지한 법정 드라마일 것 같다.

 

 

아무튼 두 영화 모두 포스터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휴~~, 다행이다. 드디어 전화기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리 영화 [더 폰, 2015], [핸드폰, 2009]이나, 킴 베이징어가 열연한 [셀룰러, 2004], 콜린 파렐의 [폰부스, 2002] 등 전화기가 등장하는 많은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다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협박, 구조 요청, 위험에 대한 경고 등 비정상적인 상황하에서의 통화이다. '다들 스릴러 영화니까 그런거지'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의 소통은 정상적인가? 진실한가?

 

 

 

자, 아래에 구식 전화기가 한 대 놓여 있다. 당신이라면 누구와 어떤 말을 주고 받고 싶은가? 가까운 사람에게 좋은 소식 전하는 전화 한통을 기대하면서 마무리...

 

 

 

[웰컨 투 LA,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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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길 스타일(road style)' 포스터를 살펴보면서 마지막에 '이정표'를 언급했었다. 인생에 이정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할 때 적재적소에서 '이리로 가세요', '저리로 가면 행복이 나옵니다.'는 식으로 알려준다면 인생 참 편할것 같긴 하다.

 

영화 포스터에 이정표가 적지 않게 보이는 이유가 혹시 "갈팡질팡하는 현대인들의 방향상실에 대한 보상심리를 상업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주제는 '이정표 스타일(milestone style)'이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1989]

 

 

 

이 영화, 보고싶은 영화다. 영화는 1964년에 발표된 휴버트 셀비 주니어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소설이 발표되자 타임지와 뉴스위크지는 각각 "최고로 추잡한 쓰레기 소설", "현대 미국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놓으면서 논쟁의 중심에 섰다고 한다. 결국 버트란트 러셀, 사무엘 베켓과 같은 거물들이 "근래 출간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정리를 하고 나서야 미국내 논쟁이 일단락 되었는데 이후 영국 등 외국에서 출판될 때마다 엇비슷한 논란이 있었을 정도로 문제적 소설이었다. 영화 역시 개봉 당시 상당한 화제를 일으켰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영환지 궁금하다.

 

제목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출구'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비상구는 건물이나 열차 같은 곳에서 말 그대로 화재나 테러 등 비상시에 이용하는 출구니까. 브룩클린은 뉴욕의 네 구역 중 한 곳으로 당시 뉴욕에서도 가장 위험한 우범지역이었다고 하니, 영화의 제목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우범지역 '브룩클린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진입로' 쯤 될 것 같다. 포스터 속 표지판은 실제로 존 에프 케네디 공항과 브룩클린 중간 지점에 있는 고속도로 출구 표지판이었다고 한다. 당시 표지판을 그대로 활용해서 영화의 '타이틀'을 표현한 것이다.

 

또 하나 포스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경 구절이다. "I will arise now, and go about the city; I will seek him whom my soul loves. I sought him, but found him not.(Solomon 3:2)"  한글 성경을 찾아보았다.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아가 3장 2절)"

 

영화는 제목도 그렇고 인용된 성경구절도 그렇고 역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왜 국내에서는 '출구'나 '진입로'가 아니라 '비상구'라는 제목을 붙혔을까? 계속 제목을 읽어보니 '비상구'로 읽는 것이 비장미도 있고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비상구(또는 출구)'가 없다면 어떨까?  포스터에는 소요를 일으키는 군중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배경으로 트랄라 역을 맡았던 제니퍼 제이슨 리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혹시 아이스크림? 

 

 

 

 

[팔로우 댓 버드, 1985]

 

 

 

[머펫 무비, 1979]

 

 

 

 

미국의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로 명성을 얻은 짐 헨슨이 실사 영화 두편의 포스터를 보고 있다. 우선 첫번째 영화는 올해로 제작 30주년을 맞은 [팔로우 댓 버드]이다. 1985년에 제작된 뮤지컬 코미디 모험 영화이자 로드무비다. 인형들과 배우들이 연기하는 다양한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짐 헨슨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개봉한 '머펫 영화'로 알려져 있다. 포스터는 이정표 모양의 표지판에 제목을 박아 놓은 것이 재밌다. 마치 갈림길에서 이리로 갈지 저리로 갈지 헷갈리다면 고민말고 '저 새를 따라가라'고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 같다.

 

두번째 영화는 최초의 머펫 영화인 [머펫 무비]이다. 역시 로드무비의 외형을 갖고 있다. '머펫'이란 '마리오네트'와 '퍼펫'이라는 두 단어를 합성시켜 만든 단어인데 이 영화에는 '커밋 더 프로그', '미스 피기' 등의 머펫들이 등장한다. 헨슨의 머펫들은 고무, 플라스틱, 천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팔로우 댓 버드]의 '빅 버드'처럼 사람이 머펫 복장을 하고 연기하는 것도 있지만 '커밋 더 프로그', '미스 피기' 등 대부분 손가락으로 조종하는 꼭두각시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 포스터에는 '헐리우드까지 114마일'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 친구들 헐리우드로 가서 뭘 하려는 걸까?

 

짐 헨슨(1936.9.24~1990.5.16)

 

미국의 인형극가로 본명은 제임스 모리 "짐" 헨슨이다. '머펫'(Muppet)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꼭두각시 인형들을 고안해 텔레비전과 영화에 등장시켰다.1969년 머펫들을 등장시킨 아동용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가 방영되기 시작하자, 헨슨과 인간을 닮은 그의 동물 인형들은 전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편 1976년 영국에서 제작된 '머펫 쇼'가 100여 개 국가에서 방송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에 힘입어 [머펫 무비,1979]·[위대한 머펫 케이퍼,1981]·[머펫들 맨해튼을 차지하다,1984] 같은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1990년 5월 16일 황농성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다음 백과 및 한국어 위키백과 참고

 

 

 

 

[홍키 통키 프리웨이, 1981]

 

 

 

 

[부서진 세월], [미드나잇 카우보이], [마라톤 맨], [퍼시픽 하이츠] 같은 범상치 않은 영화들을 만들었던 존 슐레진저 감독의 코미디 영화다. 영화 자체 보다는 포스터가 멋진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 제목 'Honky Tonk'는 '야한 싸구려 카바레', '사기 흥행사'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교량이 파괴되어 고속도로는 막혀 있고, 트럭 한대가 부서진 교량을 건너뛰기 위해 점프를 하고 있다. 아이 방 벽지처럼 푸른 하늘에 구름이 뭉게 뭉게, 커다란 코뿔소 한마리가 난데 없이 이정표를 들이받아 어디론가 내달리는 그림이다. 다리는 끊어지고 길은 막혔으며 이정표 또한 사라진 고속도로, 상황은 절망적일 것 같은데 분위기는 유쾌하기 그지 없다.

 

 

 

 

[도날드 덕 : Donald's Better Self, 1938]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은 월트 디즈니의 고전 영화 중 한편이다. [Donald's Better Self]는 8분 분량의 단편인데 지금은 사라진 R.K.O. 영화사에서 배급했다. 내용은 이렇다. 도날드 덕의 내면에 있는 '선'은 도날드가 학교에 늦지 않게 하려고 빨리 잠에서 깨라고 하지만 또다른 한 축인 '악'이 아무 상관없으니 계속 자라고 유혹한다. 갈등하던 도날드는 결국 선한 양심의 승리로 학교에 가게 된다.

 

영화 포스터는 이 간단한 스토리를 일목 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도날드를 가운데 두고 뿔과 뾰족한 꼬리를 가진 '악'한 자아와 날개와 후광을 가진 '선'한 자아가 각자 자신들의 수단으로 도날드를 설득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뒤에 서있는 이정표는 내용이 없다. 단지 '선'이 가리키는 쪽의 이정표는 밝게, '악'이 지시하는 이정표는 어둡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마지막 영화 포스터에서 보는 것처럼 이정표가 있다 하더라도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인생인 것 같다. 결국 도로에서건 삶에서건 상황과 조건은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출구로 빠질 것인지 직진할 것인지, 왼쪽으로 갈 것인지 오른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먼출 것인지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이 다소 어렵고 힘들지만, 옳은 선택을 위해 지금 이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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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이야기 시즌 2는 처음에 존 앨빈이나 드류 스트러잔 같은 아티스트 별로 그들이 남긴 영화포스터를 감상하는 컨셉으로 기획했었다. 실제로 존 앨빈의 포스터 작품을 중심으로 시즌 2의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첫번째 포스팅을 마치고 인터넷을 살피다가 이미 비슷한 주제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정리해둔 블로그를 발견하고 그 이상은 자신이 없어 접었다.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포스터 아티스트들이 궁금하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아주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naver.com/gkaals1004/110041930298 )

 

어떻게 시즌 2를 꾸며볼까 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한참 생각한 끝에 시즌 1의 틀을 유지하면서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정 주제를 하나의 스타일로 묶는 방식 말이다. 포스터를 주욱 훑어 보았다. 시즌 2의 첫번째 이야기 주제로 눈에 확 들어오는 스타일이 보인다. 바로 '길 스타일(road style)'이다.

 

어린 시절 TV에서 안소니 퀸 주연의 이탈리아 영화 [라 스트라다]를 본 이래로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알마즈 귀니 감독의 [욜],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 베리 레빈슨 감독의 [레인맨], 리들리 스콧트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 구스 반 상트의 [아이다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길위에서 펼쳐지는 '로드무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되었다. '길'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느껴지는 스잔함이나 고난, 그리고 의외성도 그렇거니와 인생을 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대가 또 어디 있을까.

 

영화뿐만이 아니다. 반드시 로드무비가 아니더라도 '길'을 소재로 한 영화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을 넘어 저절로 숙연해 지곤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포스터 하나 하나를 뜯어 보면서 그 이유를 찾아봐야 겠다.

 

 

 

[디투어, 1992]

 

 

웨이드 윌리엄스 감독의 1992년 영화 [디투어]의 포스터를 보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1945년에 이미 영화화 된적이 있다. 당시 주인공 알 로버츠 역은 톰 닐(1914 ~ 1972)이 맡았는데 1992년에 리메이크 하면서 톰 닐 주니어가 같은 배역을 맡음으로써 대를 이어 동일 인물을 연기한 드문 경우를 만들었다. 스토리는 이렇다.

알 로버츠(톰 닐 분)는 뉴욕의 나이트 클럽의 피아니스트로 거기서 노래하는 수와 결혼하려 하지만, 야심적인 수는 스타를 목표로 할리우드에 가버렸다. 로버츠는 히치하이크를 하면서 할리우드에 가기로 하고 하스켈이라고 하는 남자의 차를 타게 된다. 하스켈과 교대로 운전하게 된 로버츠는 돌연 비가 내리자 오픈카 지붕을 닫기 위해서 자고 있던 하스켈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하스켈은 움직이지 않는다. 문을 열자 하스켈이 차에서 떨어지며 돌에 머리를 부딪친다. 아무래도 차를 타고 있을 때부터 죽어 있던 것 같지만, 경찰이 믿어 줄 것 같지 않아 시체를 숨기고 하스켈 행세를 하고 차를 몬다. 다음 날, 베라라고 하는 여성을 태우지만, 그녀는 로버츠가 하스켈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자 LA에 도착해서 둘은 부부 행세를 하고 방을 빌린다. 베라가「하스켈이 죽음을 앞둔 부자의 상속인으로 가족은 몇 년이나 그를 만났던 적이 없다」라고 하는 신문 기사를 찾아낸다. 베라는 로버츠를 하스켈로 위장시킬 계획을 세우지만, 몹시 취한 베라가 전화선을 목에 감은 상태로 죽어 버리는데...

다음 영화   

우연히 두 건의 죽음에 휘말린 로버츠는 가던 길을 되돌리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파국을 피할 '우회도로'가 있기는 한 것일까? "그녀는 사랑하기에 위험하지만 미워하기엔 더 위험하다"는 포스터 카피와 함께 쭉 뻗은 고속도로, 담배연기, 중절모의 신사가 영화의 느와르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정오의 열정, 1990]

 

 

이미 [이지 라이더]라는 걸작을 만든 바 있던 배우이자 감독, 데니스 호퍼의 범작 [정오의 열정]의 포스터도 중앙에 곧게 뻗은 도로를 배치했다. 그런데 도로 위를 질주해야 할 핑크 캐딜락이 도로 한가운데 횡으로 정차해 있다. 느와르를 표방한 이 영화도 이미 포스터에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에로틱하고도 위험한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이란 것이 복선으로 깔려 있는 듯하다.

미국 텍사스의 한 마을. 중고차 세일즈맨인 해리 매독스(돈 존슨 분)는 이곳을 자신의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다. 그는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로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해리는 회계부서의 청순한 여인 글로리아(제니퍼 코넬리 분)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사장의 젊은 부인 돌리(버지니아 매드슨 분)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후였다. 자신의 벌이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글로리아와 돌리 부인 사이에서도 갈등을 하던 해리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마을 중심부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놓은 뒤 은행을 턴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완전범죄를 수행했다고 믿는 해리, 하지만 보안관은 새로운 이주자인 그를 의심하는데...

다음 영화 

욕망에 사로잡힌 젊은이의 위험스런 도박, 인생이란 무대에서 그가 연기하는 퍼포먼스는 영화 원제 'The hot spot' 의 의미처럼 그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물고 있는 붉은 립스틱의 강렬한 이미지가 이 포스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

 

 

 

[자유의 2차선, 1971]

 

 

요즘에야 카레이서 영화하면 누구나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남자들의 로망인 멋진 자동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은 보는 쾌감과 시원함이 남다르다. 1971년에는 몬티 헬만 감독의 [자유의 2차선]이 있었다. 헬만 감독은 세르지오 네오네 감독과 함께 [황야의 무법자]를 공동 연출한 경력이 있는데, 그는 서부영화와 범죄드라마 같은 장르영화에 주력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그의 대표작들은 "미국인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암울한 사회상을 실재했던 모습 그대로 반영하였다"는 평을 들었는데 [자유의 2차선]이 꼭 그렇다.

1955년형 시보레를 타고 미국 남서부 전역을 돌며 경주할 차를 찾아 헤매는 카레이서(제임스 테일러 분)와 정비사(데니스 윌슨 분). 자동차광인 이 콤비는 오로지 차에만 미쳐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말도 건네지 않는다.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여자(재클린 헬만 분) 그리고 주유소에서 만난 중년의 허풍선이 G.T.O.(워렌 오테스 분)가 이들의 여정에 합류하고, 그들은 각자의 차를 걸고 워싱턴 DC까지 경주를 하기로 하는데...

다음 영화 

카레이서에게 도로는 진정 '자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삶과 죽음 사이에 자유가 존재한다면 그 배경은 결국 '길 위'가 아닐까? 포스터는 도로에 정차한 차를 배경으로 주요 배역들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배치되어 있다. 펜화 기법의 흑백톤이 건조한 느낌을 준다. [배니싱 포인트]와 더불어 70년대 가장 유명한 자동차 로드무비 이자 컬트 영화이다.

 

 

 

[아이다호, 1991]

 

 

키아누 리브스의 젊은 시절과 리버 피닉스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걸작, 구스 반 상트의 '내 마음의 고향 [아이다호]' . 두 배우가 바이크를 타는 장면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영화다. 지쳐 연약한 청춘이 고향 아이다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다룬 로드무비인데, 긴장만 하면 잠들어 버리는 기면발작증에 걸린 마약중독자이자 남창인 마이크 역의 리버 피닉스를 세상에 알린 이 영화의 포스터도 '길'과 담배가 등장한다. 흔들리는 젊음을 상징하듯 곧게 뻗은 도로를 배경으로 꼴라주 기법을 활용한 두 배우의 모습은 흐릿하고 헝클어져 있다. 캐스트 & 스탭을 설명하는 글자들도 평행이 아닌 사선 형태로 불규칙하게 배열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 같다.

 

 

 

[레인맨, 1988]

 

 

영화의 스틸컷을 활용한 이 포스터는 천재적인 포스터 아티스트 존 앨빈의 작품이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왔던 두 형제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걷고 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과 궁지에 몰린 동생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받게될 상속 재산 때문에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비행기에 대한 공포로 인해 3시간이면 될 여정을 3일에 걸쳐 하게되는 이 형제는 서로 잊고 살아왔던 형제애,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동생 찰리(톰 그루즈 분)의 기억속 '레인맨'이 사실은 형 레이몬드(더스틴 호프만 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찰리는 재산보다 더 소중한 가족의 가치를 알게 된다.  형제에게 '길'은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복원이자 새로운 관계의 시작과 다름 아닌 것이다. 맴도는 대사 "One for bad, two for good"이 모든 걸 집약한다.

 

 

또 다른 길, 철도...

 

 

자동차가 다니는 포장도로만이 '길'은 아니다. 포스터에서 자주 활용되는 또하나의 길, 기찻길도 있다. 그런데 기차가 달리는 모습 보다는 사람이 걸어가는 장면이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길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터벅터벅. 대표적인 포스터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를 보자.

 

 

 

 [파리, 텍사스, 1984]

 

 

포스터 이야기 시즌 1에서 이미 '사진 스타일', '지도 스타일', '그림자 스타일'을 살펴 봤지만 이 포스터야 말로 어떤 카테고리에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상징을 활용한 포스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번 편에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해리 딘 스탠든의 초점 잃은 표정이 아직도 생생한 이 영화는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다루었다. 현대 사회의 소통 부재 및 단절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는 영화이다.

 

 

 

[아웃사이더, 1983]

 

 

청춘 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아웃사이더]도 철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포스터로 유명하다. 남쪽의 부자 백인 마을과 북쪽의 가난한 백인 마을로 양분되어 있는 오클라호마의 어느 도시, 북쪽의 아이들은 부모가 아예 없이 학교도 못 가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가 하면, 매일 부부 싸움을 하는 부모가 싫어 집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그 빈민촌 청춘들로 분한 패트릭 스웨이즈, 롭 로우, 토마스 하우웰, 랄프 마치오, 맷 딜런,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톰 크루즈, 그리고 다이안 레인 같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만으로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은 영화다. 

 

 

 

[세 아들, 1989]

 

 

평화로운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개발 열풍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세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상처와 방황으로 얼룩진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배우로 훨씬 큰 명성을 쌓은 여성 감독 리 그란트의 작품이다. 포스터 속 휘어진 철길이 굴곡있는 형제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역경을 극복하고 철길을 따라 걷고 있는 세 형제들의 얼굴이 그닥 심각하지 않다.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함께'한다면 희망이 있다고 웅변하는 듯한 느낌이다. 

 

 

'길'을 소재로 한 영화나 포스터가 남다르게 숙연한 느낌을 드는 이유? 아마도 그건 내가 걸어온 세월을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어서인가? 아니, 그게 다라면 뭔가 부족하다.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면 '길'은 계속 이어진다.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에 이르기 전까지 삶도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남은 가야 할 길이 평탄치 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길'은 그렇게 인생과 동의어다. 가끔은 이정표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하긴 요즘엔 '네비게이션'과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긴 하다) 후회가 적은 삶을 위한 나름의 지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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