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정복자, 페르세우스

다나에, 그라이아이, 메두사, 페가수스, 아트라스, 안드로메다, 케토스...

 

1

아르고스(Argos)의 왕 아크리시오스에게는 자식이라곤 딸 다나에(Danae)’ 하나밖에 없었다. 왕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딸을 두었지만, 든든한 아들이 없는 것을 늘 아쉬워했다. 어떻게 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는지, 또 언제 바람이 이루어질지 궁금해하던 왕은, 더는 막연히 기다릴 수 없어 아테나 여신의 신탁을 들어보기로 했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 아크리시오스 왕은 길일을 택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테나 신전으로 향했다. 그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아테나 여신에게 경배를 드린 후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모르는 것이 약일 수도 있는 것을, 그가 들은 것은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다.

그대는 절대 아들을 가질 팔자가 아니다. 헛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딸 간수나 잘하라, 그대는 딸의 아들에게 죽을 운명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신전을 나오면서도 아크리시오스 왕은 섬뜩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머리를 흔들어 잊으려 해도 신탁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신전으로 향할 때와 달리 유독 멀고 길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왕은 몇 일간 두문불출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제 목숨 아깝다고 차마 아비로서 천륜을 끊고 사랑하는 딸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탁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왕은 괜하게 신의 뜻을 물었다 싶었다.

그렇게 고민고민 머리를 쥐어짠 끝에, 마침내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하나 있었다. 아들을 낳게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손자를 보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사람은 한 가지 생각을 밤낮없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생각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이 무렵 아르고스의 왕이 딱 그 상태였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애지중지 키워 온 무남독녀 외동딸, 다나에를 청동으로 둘러싸인 지하 밀실에 가두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물건 달린 사내라면 더더욱 안될 일이었다. 밀실로 들어가는 청동문은 묵직한 자물통으로 잠그고 열쇠는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궁전 뒤뜰에 있는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대신 천장 지붕에 작은 공간을 열어두어 먹을 것과 마실 것, 빛과 공기가 오로지 그곳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말해 무엇하랴! 아르고스의 공주, 다나에의 영문도 모르는 감금 생활은 더없이 참혹했다. 그녀로서는 화려한 왕실에서 갑작스럽게 축축한 지하로 추락한 것에서 오는 비현실감 때문에 더 혹독했으리라.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벌레들과 차갑고 눅눅한 느낌, 그리고 밀려드는 외로움의 나날들, 죄수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러나 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저 하늘 위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구름만 신세 한탄하듯 상상해 볼 뿐이었다.

바로 그즈음 올림포스의 지배자이자 신들의 아버지, 강한 남성의 대명사, 여인의 정복자, 변신의 귀재 제우스(Zeus)’가 아르고스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호기심 속에서 유심히 보고 있었다. 신은 팔짱 상태로 턱을 문지르며 고개도 갸웃거렸다. 다나에가 아름답기도 했거니와 쉬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제우스의 마음속에 정욕의 불을 확 지폈다. 우리는 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제우스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이때 제우스는 아주 특별한 변신을 시도했다. 하다 하다 그는 황금 빗물로 몸을 바꾸어 이 감옥의 유일한 입구인 천장의 작은 틈새 사이로, 흡사 밤안개가 도시를 감쌀 때처럼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두려움과 외로움에 지친 공주 다나에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우스 신은 여인의 남편으로 몸을 바꾸어 아내를 속이는가 하면, 수소 같은 들짐승부터 뻐꾸기, 백조, 독수리 따위의 날짐승으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황금 빗물에 와서는 누구든지 이 으뜸 신의 창의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일의 전인지, 나중인지 모르겠지만 제우스 신이 검은 구름으로 변신하여 이오(Io)’를 품에 안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변신 능력은 황금 빗물에 오면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엄지 척이다.

그건 그렇고, 제우스가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청동 밀실을 다녀가고 몇 주 후, 새 생명을 품은 산모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다나에는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심하지 않은 입덧이었다. 그리고 산달이 되자 혼자서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어머니는 이 아이의 이름을 페르세우스(Perseus)’라고 지었다.

 

2

다나에는 몇 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음습한 지하 밀실에서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비밀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라서, 구름이 잔뜩 드리운 어느 우중충한 날, 아이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바람에 아버지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손자는 맑고 초롱초롱한 눈, 오뚝하게 솟은 코, 앙다문 입술이 첫눈에도 영웅의 기질이 보였다.

몹시 당황하고 화가 난 아크리시오스 왕이 목과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딸에게 꾸짖어 물었다.

저 아이의 아비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다나에는 겁에 질려, 어미의 본능으로 아기 페르세우스를 자신의 뒤쪽으로 숨겼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제우스 신이라고 사실대로 여쭈었다. 그러나 왕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믿으려 하지 않더니, 애먼 자신의 아우를 잡아 족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했다. 평소에도 동생 놈이 다나에에게 검은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의심해왔기 때문이었다.

아우를 죽인 왕은 다음으로 딸과 손자의 처리가 문제였다. 저 아이가 커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던 왕은 다시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다나에를 청동 감옥에 가둘 때처럼 왕은 괴로움에 빠졌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었기에 왕은 결국 딸과 손자를 이 나라에서 추방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아랫사람들을 시켜 딱 어른 한 명, 아이 한 명 들어갈 정도의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다. 덮개도 함께 만들되 위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신선한 공기가 흐를 수 있도록 했다.

나무 궤짝 방주가 다 만들어지자, 아크리시오스 왕은 열흘 분량의 물과 음식만 딸려, 방주 안으로 딸과 손자를 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직접 덮개를 닫고 청동 망치로 못을 치면서 매정한 작별의 말을 뱉었다.

아비를 원망하지 말고, 너의 지아비를 원망하거라.”

피붙이들의 삶과 죽음을 운명에 맡긴 왕은, 신하들이 커다란 나무 궤짝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걸 확인하고야, 돌아서서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 그 운명이 저 아이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다. 하늘은 높아 푸르렀으며 바람은 산들산들 시원했으나, 왕의 주름진 눈 아래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불쌍한 모자는 방주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숨죽인 채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뱃멀미도 속에 뭔가가 들어있어야 하는 법, 어미 몫의 먹을 것, 마실 것은 떨어진 지 오래라 멀미도 멈추었다. 다행히 아기는 방주를 요람 삼아 잘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아기의 순진무구한 옹알이가 어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헬리오스(Helios)’가 지나가도 어미와 아들은 햇빛을 볼 수 없었고, ‘셀레네(Selene)’가 아는 척을 하려 해도 부질없었다. 밤낮이 번갈아 찾아오고 돌아갔지만, 시간이라는 것을 가늠하기에 어미 다나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우스 신이 아우이자 형인 포세이돈(Poseidon)’ 신에게 부탁하여, 가여운 다나에 모자가 타고 있는 궤짝이 폭풍우에 난파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두 모자는 오직 잔잔한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다는 것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나 어미의 의식이 흐릿해질 즈음, 갑자기 어디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에 이끌려 궤짝이 옮겨지고 있음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정적, 모자가 갇혀 있는 궤짝이 멈추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뚜껑이 열리고 한 줄기 빛이 수척한 두 모자의 초점 흐린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궤짝은 다시 그늘진 곳으로 이동했고 그제야 다나에의 눈에 환한 세상과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넣어 주었던 물과 음식이 모두 바닥나고 사흘 정도의 시간이 지났나 싶을 때였다.

나무 궤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세리포스섬의 늙은 어부 딕티스(Dictys)’였다. 그는 세리포스 섬나라 왕의 피붙이 형이었지만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후 아내와 함께 소박한 어부의 삶을 살고 있었더랬다.

노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어슴푸레한 이른 새벽에 어구를 손질하러 나왔다가 해안으로 떠밀려온 웬 낯선 궤짝을 발견했고, 주변 사람들과 힘을 모아 구원의 손길을 뻗었던 것이었다. 마침 자식이 없었던 딕티스 부부는 다나에와 어린 페르세우스를 자신들의 딸과 손자처럼 어여삐 여겼다. 비록 피가 섞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었고, 조용했던 노부부의 소박한 집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로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3

그리고 시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열여섯 살이 된 페르세우스도 다부진 체격에 힘과 용기가 남다른 대장부로 훌륭하게 자랐다. 딕티스 노인의 지혜도 그에게 전해져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두루 건강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나 다나에는 다시금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조짐을 보았다. 세리포스섬의 왕 폴리덱테스가 저잣거리를 행차하다가 우연히 다나에를 보고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마침 홀몸이었던 왕은 발정기 개처럼 무턱대고 다나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페르세우스가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도 다나에의 미모는 여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우스 신이 반한 미모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왕은 졸렬하고 포학한 사람이었고, 다나에는 그런 사람과 결혼할 마음이 발톱의 때만큼도 없었다. 청년 페르세우스는 이 쓰레기 같은 구혼자가 어머니에게 추근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스토커처럼 괴롭히는 왕과 그의 부하들의 행패로부터 여러 차례 어머니를 보호하기도 했더랬다.

폴리덱테스 왕은 자신의 결혼에 페르세우스가 방해된다고 여겼다. 왕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체면을 구기지 않고 손톱 밑에 박힌 가시 같은 페르세우스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생각하느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폴리덱테스 왕은 왕가의 혼인을 더는 미룰 수 없으니 이제라도 다른 나라의 공주에게 청혼해야겠다고 문무백관들 앞에서 선포했다. 모여든 많은 사람은 왕의 예상치 못한 발표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서로 바라보며 웅성거렸지만, 왕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짐이 이웃 나라 공주에게 청혼하려면 그만한 지참금이 필요하오. 명문가 젊은이들은 결혼 선물로 쓸 말 한 필씩 내게 바치도록 하오. 부디 이 사람을 부끄럽지 않도록 해주기 바라오.”

일종의 세금이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강제징수였다. 작은 섬나라로서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뜻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왕의 흑심을 알 리가 없는 젊은이들은 더러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뜻에서, 더러는 괜하게 밉보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앞다투어 왕을 위해 최고의 명마를 바치겠다고 나섰다.

딱하게도 살림이 어려웠던 딕티스 집안의 페르세우스만이 말을 선물할 형편이 못되었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어머니만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야 무엇이든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사악한 메두사(Medusa)’의 머리라도 갖다 바치겠노라고 공개적으로 호언장담하기에 이르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폴리덱테스 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메두사를 만나 지금까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옳거니 너 잘 걸렸어하고 쾌재를 부르며 페르세우스를 불러 그 말에 책임지라고 다그쳤다. 결혼 선물로는 메두사의 머리만큼 훌륭한 선물이 없을 것이라며 꼭 약속을 지키라고 다짐을 받아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으로 왕을 모욕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메두사는 그 모습이 너무나 흉측해서 자신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갑고 딱딱한 돌로 만들어 버리는 최악의 괴물이자 마녀였다. 내로라하는 용사 중 이 괴물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가 열에 열 명이었으니, 당시 그리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누구든지 이는 곧 화약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무모한 도전이 되었던 위험한 과업, 청년 페르세우스가 그 함정에 발을 담그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메두사는 어떻게 해서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 것일까? 그녀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4

메두사는 세 명의 괴물 자매인 고르곤(Gorgon)’ 중의 한 명이다. 막내인 메두사가 제일 널리 알려져 있으나 스테노’, ‘에우리알레까지 이렇게 셋이 꼭 함께 다녔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들은 당시 그리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흉측했던 두 언니와 달리,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뭇 남성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을 미인이었다. 그런데 오만해진 그녀는 자기 잘난 맛에 감히 아테나(Athena)’ 여신과 미모를 다투다가 여신의 미움을 산 것도 모자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연애질을 하면서 신성한 아테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하긴 여신의 신전을 더럽힌 부분은 그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포세이돈 신이 그녀에게 눈이 뒤집힌 나머지 화려한 새로 변신하여 그녀를 납치해 데려간 곳이 하필 아테나 신전이었으니 따지자면 포세이돈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모욕감을 느낀 처녀신 아테나는, 신들 사이에서는 인간들과 엮인 일로 상호 간섭하거나 저주를 내릴 수 없다는 천상의 규칙에 따라 인간이었던 메두사에게 대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 저주라는 것이 비참하고 끔찍하기가 여인이 홀로 오롯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저주는 아름다운 처녀 메두사를, 머리카락이 뱀처럼 늘어지고 뻐드렁니와 청동 손을 가진 괴물 메두사로 바꾸어 놓았다. 눈알은 강한 독기를 품어 툭 튀어나왔고, 톱니 같은 뾰족뾰족한 이빨, 멧돼지 엄니에다 긴 뱀의 혀를 갖게 되었으며, 언니들처럼 황금색의 날개까지 달린 끔찍한 괴물이 되고 만 것이었다. 메두사의 변한 모습에 비하면 두 언니는 요괴 축에도 낄 수 없을 정도였다.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메두사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이내 자신의 두 자매와 함께 서쪽에 있는 죽은 자들의 나라 근처로 도망쳐 그곳에서 숨어 살았다. 그곳은 걸어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멀고 험한 곳이었다.

그녀들은 가끔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사는 도시나 숲속에 나타나서 그곳에 사는 존재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며 떠돌아다녔기에 분명한 주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다른 자매였던 그라이아이(Graiai)’들만이 항상 그녀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설사 메두사의 머리를 베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황금 날개를 달고 있는 그 자매들을 어떻게 따돌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메두사와 달리 그들은 누구도 죽일 수 없는 불사의 존재라 하지 않았는가? 딱하게도 정작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이 마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으며 행동이 운명을 결정하는 법, 말을 함부로 뱉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생각 속에서만 머물러야 할 것은 그냥 거기에 넣어 두어야 함을 깨닫기에 청년은 너무 젊었다.

 

5

불행 중 다행히도 페르세우스에게는 그를 돕는 신들이 있었다. 먼저 메두사를 증오하던 아테나 여신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하고 있던 청년 페르세우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를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돌로 변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다시 말하건대 절대로 괴물 메두사의 눈을 직접 바라보지 말라.”

아테나 여신은 이런 짤막한 경고와 함께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자신의 방패를 페르세우스에게 주었다.

다음으로 아테나 여신의 이복형제이자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헤르메스는 페르세우스에게 다이아몬드로 만든 천하의 명검을 선물로 주었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가 직접 벼른 검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헤르메스는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도 추가로 일러주었다. 바로 날개 달린 신발, 메두사의 머리를 봉인할 주머니, 그리고 투명모자가 있어야만 메두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북쪽 너머 어딘가 신비한 곳에 사는 요정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면서도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 요정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곳에서 사는 괴팍한 노파들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들만이 요정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파들은 두더지처럼 종일 어두운 곳에 사는 그라이아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자매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백발에다 주름살투성이였는데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었지만 몸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고, 날개 끝에 손가락이 붙어 있는 요괴에 가까웠다.

거기에 이 늙은 마녀들은 하나의 눈과 하나의 틀니를 나누어서 사용하는 해괴망측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그 눈은 무엇이든 볼 수 있는 천리안이었고, 번갈아 사용하는 틀니는 그걸 끼고 있을 때면 젊게 보이게 하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게 해주는 신비한 틀니였다.

이들은 한 명이 눈을 이마에 붙이고 있다가 다른 이가 볼 것이 있어 요구하면 눈을 떼어 건네준다. 건네받은 노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마에 그 크고 둥그런 눈을 붙이는 것이다. 눈이 옮겨지는 중에도 천리안으로 기능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눈이 이동 중에는 시각을 인식할 시신경이 뇌와 연결될 수 없었을 테니 결국 셋 모두 봉사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그라이아이 세 자매가 살고 있다는 음침하고 지저분한 토굴 같은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입구에서부터 심한 악취를 풍겼다. 구석구석에 썩은 음식물과 오물이 뒤섞여 있었다. 거미줄이 모퉁이마다 너저분하게 있었고, 그 위로 집주인인 크고 작은 거미들이 먹이를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코를 틀어막고 자매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들어가서 다짜고짜 요정들이 사는 곳과 메두사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다. 노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페르세우스를 맞이하더니 그중 제일 뚱뚱한 노파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는가 했더니 우리 자매, 메두사를 만나겠다고? , 우리 형제를 죽이려고? 썩 물러가라! 이놈아, 여기는 너 따위가 함부로 드나들 그런 곳이 아니다.”

물론 페르세우스도 이 노파들이 자신의 물음에 순순히 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페르세우스는 이미 이들의 입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거추장스럽게 물어본 것은 그것이 순리이고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욕만 듣고 쫓겨난 첫 번째 시도 후, 페르세우스는 물러가는 척하다가 숨기 좋은 바위틈에 몰래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노파들이 저희끼리 하나뿐인 눈과 틀니를 번갈아 옮겨가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다. 또다시 한 명이 눈을 떼어 그것을 자기 형제에게 넘겨주려 할 때 페르세우스가 빠른 동작으로 다가가 순식간에 그 눈을 빼앗아 버렸다.

눈을 빼앗긴 늙은 마녀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우왕좌왕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고 하면서 대혼란에 빠졌다. 셋이서 일제히 악을 쓰며 떠들어대니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대개가 욕설과 고통에 찬 절규이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결국, 노파들은 페르세우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어디에 가야 요정들을 만날 수 있는지, 또 메두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들은 후에야 페르세우스는 그녀들의 하나뿐인 눈을 돌려주었다.

페르세우스는 그라이아이가 일러준 대로 메두사를 처치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요정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또 막막해졌다. 어디라고만 들었지 도무지 어떻게 해야 그곳에 갈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배를 타도, 걸어서도 갈 수 없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위치만 물어보고 가는 방법을 묻지 않았던 건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하고 있는데, 그 순간 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누구의 조화인지, 페르세우스 앞에 새로운 길이 펼쳐진 것이 아닌가. 그 길은 무지개 같기도 하고 오로라 같기도 했으나, 뭐라고 하기에는 적당한 수사가 떠오르지 않는 길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빠르고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뎠다. 청년은 그 길을 따라 아흐레 밤낮을 걸어 비교적 손쉽게 요정들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나라는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행복한 땅으로,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과 나비들이 서로 어울렸고, 생명이 움트고 자라나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곳에 사는 요정들은 페르세우스가 도착하자 그를 환영하며 축제를 열어주었다. 풍족한 음식과 술, 춤과 노래, 칭송과 찬양으로 넘치는 환대가 계속되었다.

황홀경에 빠져 있던 페르세우스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요정들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였다. 더 지체했다가는 이곳 분위기에 취해 주저앉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요정들의 지도자는 페르세우스의 부탁을 듣고 날개 달린 신발과 위험한 메두사의 머리를 집어넣을 자루, 그리고 몸이 보이지 않게 하는 투명모자를 기꺼이 건네주었다. 두 번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떠나는 영웅에게 축복을 섞어 기쁘게 배웅하였다. 요정들에게는 작별도 축제 같았다.

 

6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페르세우스는 거칠 것 없이 메두사가 살고 있다는 곳에 도착하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깊은 곳, 신비에 싸인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와 그 근처에는 사람 모양, 짐승 모양의 석상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반듯이 서 있는 것도 있었지만 누워있는 것도, 심지어 깨진 석상도 한둘이 아니었다. 누구의 예술 작품이 이보다 뛰어날 수 있을까, 이 석상들은 다름 아닌 신이 만든 예술품이었다.

인간 모습의 석상들은 모두 건장한 장수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메두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돌로 변한 듯 보였다. 아마 괴물 메두사를 잡기 위해 호기롭게 나섰던 사람들인 것 같았다. 제각기 활이며 창, 어떤 이는 몽둥이까지 다양한 병장기를 들고 있는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무장한 용사들보다 더 측은한 것들이 따로 있었다. 곰이며 멧돼지, 사자 등과 같은 맹수뿐 아니라 사슴, 다람쥐, 고슴도치, 토끼 등과 같은 연약한 동물들까지 여기저기 돌덩이로 변해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독수리며 기러기, 뻐꾸기, 딱따구리 따위의 날짐승도 더러더러 눈에 띄었다. 나비, 메뚜기, 잠자리 같은 곤충들까지, 그것들에게선 어떤 적의도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선의의 희생자들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침착하게 동굴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에게는 아테나 여신이 준 방패와 헤르메스 신이 내려준 다이아몬드로 만든 검, 요정들에게 받은 날개 달린 신발이 있었지만,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년은 한 손으로 땀을 훔쳐내며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마침 고르곤 세 자매는 잠들어 있었다. 아테나 여신과 헤르메스 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메두사가 누구인지 페르세우스에게 알려주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봐서는 안 된다는 신들의 말대로 반짝이는 방패를 거울처럼 이용하여 천천히 한 걸음씩 접근했다.

방패에 반사된 메두사는 듣던 대로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모두 징그러운 뱀의 모습이었고, 그것들은 제각기 꿈틀거리고 있었다. 메두사의 두 눈은 닫혀 있었으나 뱀들은 모두 깨어 있었다. 저 괴물이 눈을 뜨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사람 냄새를 맡은 메두사가 눈을 뜨고 말았다. 이때다! 페르세우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재빠르게 검을 뽑아 메두사의 목을 단칼에 싹둑 잘라버렸다. 이미 거리를 재두었기 때문에 검은 빗나가지 않았다.

메두사는 목이 잘렸으되 눈을 부릅뜬 채였으며, 뱀 머리카락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러나 마지막 발악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로부터 피가 다 쏟아지자 뱀 머리카락도 하나둘씩 힘을 잃고 땅 위로 몸을 떨구었다.

그런데 이때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땅에 스며든 메두사의 피에서 메두사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거인 크리사오르와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Pegasus)’가 솟아올라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메두사는 죽을 때 이 두 쌍둥이를 수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바다의 신이면서 말의 신이기도 한 포세이돈의 자손을. 페르세우스, 앞으로 물가, 특히 바닷가를 조심해야겠다.

페르세우스는 잘린 메두사의 머리를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가져온 주머니 자루에 그 징그러운 덩어리를 재빠르게 담고 자루의 주둥이를 묶었다. 바로 그때 메두사의 자매들이 잠에서 깨어 무섭게 소리치며 페르세우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쇳소리가 적막을 깨는 순간이었다. 저들한테는 메두사의 머리도 무용지물이므로 페르세우스는 서둘러 투명모자를 썼다. 고르곤 자매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페르세우스를 찾아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비행화를 신고 투명모자를 쓴 페르세우스를 찾을 수 없었다.

날개 달린 신발과 투명모자 덕분에 불사의 존재로 알려진 고르곤 두 자매의 매서운 추적을 피한 페르세우스는 괴물들의 소굴을 안전하게 떠날 수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때 전령의 신이자 모험의 신, 헤르메스도 조용히 같이 날아올랐다.

이때부터 메두사의 머리는 페르세우스의 위대한 과업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동시에, 이 젊은 영웅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음은 두 번 말하면 잔소리다.

한편,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잠자코 지켜보던 아테나 여신은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벨 때 나온 피를 거두어 아폴론 신의 아들이자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에게 주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왼쪽 혈관에서 나온 피는 심한 독기를 품고 있었지만, 오른쪽 혈관에서 나온 피는 죽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 타이탄(Clash of the Titans, 2010)은 영웅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그린 영화이다. 타이탄의 분노(Wrath of the Titans, 2012)까지 두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페르세우스는 날개 달린 신발이 아니라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신화에서 페르세우스는 페가수스를 탄 적이 없다. 페가수스를 탄 영웅은 벨레로폰(Bellerophon)’이다.

아마도 영웅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이야기를 뒤섞어 훨씬 짜릿한 시각적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할리우드 영화제작자가 처음은 아니었다. 많은 고전 화가들이 두 영웅의 이야기를 뒤섞어 페가수스를 탄 페르세우스를 화폭에 담았으니까.)

 

7

고르곤 자매 중 하나인 메두사를 죽이는 과업을 달성하고 전리품을 자루에 넣은 페르세우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땅 위든 바다 위든 가리지 않고 온 천지를 날아다니면서 페르세우스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없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페르세우스는 어두워질 무렵, 태양이 떨어지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다가 어느덧 그 끝에 다다랐다. 그는 석양이 아름다운 그곳에서 아침까지 푹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나라는 타이탄족 아트라스(Atlas)’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트라스는 힘이 장사인 걸로 유명한 거인이다. 올림포스 신들이 타이탄족과의 전투에서 타이탄족을 굴복시켰을 때, 그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세계의 끝, 정확히 말해 태양이 지는 서쪽 끝에서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 서쪽 끝이란 지금의 모로코를 말하는데, 그곳에 아트라스 산맥이 있다. 이제부터 아트라스 산맥이 생긴 까닭을 살펴보자.

아트라스는 말과 소 같은 가축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으나 이런 가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석양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황금사과 나무였다. 황금사과는 황금빛 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황금빛 잎에 둘러싸여 더 고귀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황금사과 나무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으뜸 신 제우스와 결혼하는 헤라(Hera)’ 여신에게 결혼 선물로 준 것이었다. 헤라는 이 사과나무를 헤스페리데스(Hesperides)’라고 불리는 요정들에게 돌보게 했다. 헤스페리데스는 저녁의 여인들이라는 뜻이었는데 이 정원이 해가 지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자매들의 아버지가 바로 아트라스였다. 따라서 아트라스는 자기에게 황금사과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아트라스 왕에게 읍하여 절하고 나서, 무례를 무릅쓰고 당당하게 청했다.

저는 손님으로 온 나그네입니다. 혹 대왕께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을 대접하시고 싶으시다면 저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니 대왕의 뜻에 부합할 것이고, 혹 위대한 업적을 이룬 영웅을 대접하신다고 하시면 제가 바로 메두사를 물리친 영웅이니 이 또한 대왕의 뜻에 부합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하룻밤 유숙을 청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트라스는 옛날 자기에게 내려진 신탁이 마음에 걸렸다. 아트라스는 제우스의 아들이 황금사과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오래전 신탁을 되새기며 짧게 대답했다.

허하지 않겠다.”

아트라스는 이 말을 끝으로 페르세우스를 밖으로 내쳤다. 페르세우스는 힘으로는 거인을 당해낼 수 없었으므로 뒤로 물러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저를 이렇게 하찮게 여기신다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선물이나 하나 드리고 가겠습니다.”

페르세우스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제 얼굴을 뒤로 돌리며 허리춤에 매달린 자루를 풀었다. 이어서 메두사의 머리를 꺼낸 그는 이 치명적인 무기를 아트라스의 목전에 쑥 내밀었다. 그러자 아트라스의 거대한 몸이 우지끈소리를 내며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수염과 머리카락 같은 몸에 있는 털들은 한 올도 남지 않고 모두 숲과 나무가 되었고, 양팔과 두 어깨는 절벽이 되었으며, 머리는 산꼭대기가 되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뼈들은 모두 크고 작은 바위로 변해 버렸다.

아트라스 몸의 각 부분이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되기까지 그 크기가 시시각각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빛나는 별들로 가득 찬 밤하늘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와 앉을 정도가 되자, 신들이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그렇게 아트라스는 산맥이 되어 세상의 끝에서 지금도 힘겹게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 아트라스는 황금사과를 훔쳐 갈 도둑이 페르세우스라고 생각하고 그를 홀대하는 바람에 이런 황당한 처지가 되어 버렸지만, 사실 아트라스가 받은 신탁에서 말한 도둑놈은 다름 아닌 천하제일의 마초 헤라클레스(Herakles)’였다. 그러고 보면 헤라클레스는 참 끼지 않는 곳이 없다.

 

<미련한 거인의 대명사, ‘아트라스의 이름은 오늘날 지도책’, ‘세계지도를 뜻하기도 한다. 대부분 아트라스를 등 뒤에 지구를 지고 있는 강인한 존재로 생각한다. 이런 모습의 사진이 초등학교 지리 교과서의 표지에 인쇄되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훨씬 후의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지구가 구체 모양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트라스의 사진은 16세기 지리학자 헤르하르뒤스의 생각이었다. 1536년 그가 아트라스 : 세계의 지리학적 묘사라는 제목의 지도책을 폈는데, 표지에는 아트라스가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그림이 나와 있었다. 그 이후로 아트라스는 지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아트라스는 말이 자주 쓰인다. 의학에서는 머리를 직접 받치는 첫 번째 목뼈를 아트라스라고 한다. 인간의 머리를 이고 있는 1번 목뼈가 하늘을 이고 있는 아트라스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발코니를 받치고 있는 남자 형상의 기둥을 아트라스라고 부른다. 또한, 자기들의 제품명으로 이 거인 신의 이름을 딴 건전지를 판매하는 회사도 있다.>

- 폴임 저 신화 오디세이에서 일부 발췌

 

8

아트라스 산맥을 만드는 대역사를 마친 페르세우스는 어머니 다나에가 있는 세리포스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훌륭한 전리품을 담은 주머니가 자랑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는 리비아와 이집트를 거쳐 북동 아프리카에 있는 에티오피아 하늘을 날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바닷가 바위 위에 묶인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나라 케페우스왕과 허영심 가득한 카시오페이아(Cassiopeia)’ 왕비의 딸, ‘안드로메다(Andromeda)’ 공주였다.

사연은 이랬다. 아름다운 검은 미녀 카시오페이아 왕비는 제 미모를 뽐내기를 좋아했다. 왜 가진 자 중에는 이토록 겸손하지 못한 이가 많은지, 처녀 메두사도 이러다가 괴물이 되는 형벌을 받았는데, 조짐이 아주 좋지 않은 것을 독자들도 느낄 것이다. 미모의 반만큼만 겸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쯧쯧.

어쨌거나, 그럼 자신과 동급인 사람과 그 미모를 다투면 충분했을 것을, 한번은 바다의 요정네레이데스들과 그 아름다움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요정들은 아버지 포세이돈 신에게 가서 이 오만한 왕비를 벌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포세이돈은 거대하고 사나운 바다 괴물인 케토스(Ceto)’를 보내 딸들의 앙갚음을 했다.

이 바다 괴물은 포세이돈 신의 명을 받자마자 에티오피아 해안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는 마을은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케페우스 왕은 이집트의 제우스, ‘암몬(Ammon)’ 신에게 그의 백성들을 구할 방법을 물었다. 그러나 왕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바다의 신을 노하게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대의 딸이 답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처음에 왕은 신탁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 제사장이 앞으로 나와 그 뜻을 해석하기를,

안드로메다 공주를 제물로 바쳐 노한 바다신을 달래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환란을 멈출 수 있는 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왕비는 머리를 잡고 쓰러졌고 왕은 긴 탄식을 뱉었다.

그 후 신하와 백성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못 이긴 케페우스 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딸을 바닷가 바위에 청동 사슬로 묶어 두고 무서운 괴물의 먹이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운명이 정해 준 그 날이었다.

하늘에서 보이는 안드로메다는, 얼굴이 창백한 상태로 사슬에 묶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물로 가득한 눈과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없었더라면 누구나 그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여인의 미모에 놀라 날개 달린 신발의 날갯짓도 잊을 뻔했다. 사랑의 신 에로스(Eros)’가 그새 활시위를 당기고 다녀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실의에 빠진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 여인이여! 사랑의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할 그대가 그런 흉측한 사슬에 묶여 있다니, 내게 이 나라가 어딘지, 그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까닭을 말해 줄 수 있겠소?”

안드로메다는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파도 소리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자 눈을 들어 애처로운 입을 열었다. 잠자코 있으면 마치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하여서 이 꼴로 묶여 있는 것이라고 상대방이 오해할까 두려워서였다.

이곳은 아버지 케페우스 왕이 다스리는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이고, 저는 이 나라 공주 안드로메다라고 합니다. 어머니 카시오페이아가 바다 요정들의 미움을 사.”

그런데 안드로메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다 저쪽에서 시끌벅적 물보라가 일더니 거대한 괴물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은 작은 바위산 만한 크기는 됨직해 보였다. 두껍고 어두운 비늘로 덮여 있는 몸뚱이는 곳곳에 해초, 따개비, 바다 이끼 따위 등이 들러붙어 있었다. 수백 미터 밖이었지만 드러난 크기에 너무도 압도당한 나머지 나와 있던 모두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괴물이 귀청이 터질듯한 괴성과 함께 세차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여인의 아비와 어미는 왕과 왕비가 아니라 아비 된 마음, 어미 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르며 탄식과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페르세우스가 큰소리로 외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제우스 신의 아들입니다. 고르고 메두사의 정복자이기도 합니다. 신들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 괴물을 물리치고 그 보답으로 따님을 얻고자 합니다.”

안드로메다의 부모는 이를 승낙하고 지참금으로 나라까지 넘겨줄 것을 서둘러 약속했다. 어느새 괴물은 바위 가까이 안드로메다가 묶여 있는 곳까지 접근했다. 영웅은 몸을 하늘 위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스스로 여기 까지다 생각한 높이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몸을 거꾸로 뒤집더니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검을 꼭 붙잡고 앞으로 내밀어 바람을 갈랐다. 페르세우스는 그대로 괴물의 등줄기를 내리꽂듯이 찔렀다. 이어서 괴물의 겨드랑이와 거친 비늘 사이사이를 찌르고 베었다. 마치 하늘 높은 데서 한가로이 햇볕을 쬐다가 독사를 발견한 독수리가 수직으로 내리꽂아 그 목을 물고 비틀 때처럼 그 동작은 빨랐고 치명적이었다.

괴물은 미쳐 날뛰며 바닷물을 사방으로 튀겨 댔다. 그것은 커다란 해일이 돼서 마을을 덮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괴물은 맹렬한 사냥개에 둘러싸인 멧돼지처럼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며 페르세우스에게 반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두 발의 날개 덕분에 괴물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나서, 괴물의 약한 맨살만 찾아 보이는 대로 옆구리, 배때기, 등짝, 꼬리를 오가며 찔러댔다. 바람을 가르는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괴물은 몸뚱이 이곳저곳에 치명상을 입고 붉은 피를 흘렸다. 고통에 겨운 짐승의 소리가 넓은 해안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괴물이 콧구멍으로 피 섞인 바닷물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용사의 날개가 그 피에 흠뻑 젖어 비행 기능에 장애가 발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불쑥 솟아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 몸을 의지한 채 자신을 향해 마지막 발악을 하며 돌진하는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마쳤다.

괴물이 대가리를 쑥 내밈과 동시에 그 엄청난 아가리를 벌려 페르세우스를 한입에 삼키려고 하자, 영웅은 주저 없이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깊고 어두운 동굴과 같았다. 페르세우스는 괴물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의 몸을 씹어댈 수 없도록 곧바로 목구멍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헤르메스의 은총을 입은 검으로 괴물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울부짖던 괴물의 괴성이 멈추었다. 솟구쳤던 괴물도 정지화면처럼 잠시 멈추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괴물의 커다란 몸뚱이는 건물이 무너지듯, 아름드리나무가 넘어가듯 그렇게 바다 위로 고꾸라졌다. 그 위로 페르세우스가 날아오르니, 해변에 모여 있던 군중은 바다에 잔잔한 파동이 일 만큼 일제히 큰 환호성을 질렀다.

안드로메다는 사슬에서 풀려났고 딸의 부모는 기쁨에 겨워 딸과 사윗감을 얼싸안고는 우리 가문과 이 나라의 구세주가 났다면서 추켜세우기 바빴다. 감격과 환희 앞에 체통이고 뭐고 없었다.

페르세우스는 이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버지 제우스와 수호여신 아테나, 그리고 든든한 지원군 헤르메스 신에게 이 거대한 괴물의 몸뚱이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바다의 으뜸 신 포세이돈은 코가 한자나 쑥 빠져,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9

안드로메다 공주와 영웅 페르세우스는 왕과 왕비의 손에 끌려 궁전으로 돌아왔다. 지나는 거리마다 환호가 넘쳐났고 기쁨에 찬 노래가 울려 퍼졌다. 궁전에서는 이미 잔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가 축제의 흥에 빠져 즐겁게 먹고 마셨다. 그런데 축제가 한창이던 궁의 뜰 한쪽에서 돌연 거친 함성이 일더니 그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케페우스 왕의 아우이자 안드로메다의 약혼자였던 피네우스가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축제장에 난입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약혼자를 돌려달라고 염치없는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닌가. 형인 케페우스 왕은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자초지종을 대략 설명하고, 아우를 돌아보며 제법 공정하게 다음과 같은 소리로 나무랐다.

네놈이 내 딸을 요구할 생각이었다면, 내 딸이 괴물의 산 제물로 바위에 묶여 있을 때 마땅히 요구했어야 했다.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네놈이 강 건너 불구경할 때 우리의 계약은 이미 물 건너간 것, 이는 죽음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네우스는 왕이자 형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갑자기 페르세우스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페르세우스가 이에 응수하자 축제장은 순식간에 전투장으로 바뀌었다. 잔칫상이 엎어지고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삽시간에 흩어졌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양측이 뒤엉켜 대등하게 싸우는 것 같았지만 페르세우스 측은 수에서 매우 열세였다. 아군은 케페우스 왕의 호위병 정도가 전부였으니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페르세우스가 일당백으로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밀리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페르세우스가 외쳤다.

오냐, 나의 적이 날 보호하게 할 수밖에! 그땐 무뢰한들이 땅을 치고 후회에도 이미 늦으리라. 나의 편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라!”

그리고 자루에서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 번쩍 들어 올렸다. 무방비로 메두사의 얼굴을 보게 된 적들이 하나둘씩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창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 던지려던 자세 그대로 돌로 굳었고, 다른 병사는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로 그렇게 되었다. 검을 치켜든 석상도 만들어졌다.

피네우스는 자기가 도발한 이 싸움이 돌아가는 판을 보니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했다. 제 편 군사들을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결국은 놀라 도망치는 어정쩡한 자세로 온기 없는 돌이 되고 말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젊은 영웅 페르세우스와 아름다운 안드로메다 공주는 더 이상의 방해꾼이나 장애물 없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모두의 축복 속에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냈다. 이들에게는 그 누구도, 신조차도 질투나 시기하는 자가 없었다.

 

10

그리고 1년 후, 영웅 페르세우스는 아내 안드로메다와 함께 어머니 다나에가 있는 세리포스섬을 향해 출발했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 함께 메두사의 머리를 가지고 개선장군처럼 자신이 자란 제2의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보고 싶은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그동안 어부 딕티스는 폴리덱테스 왕으로부터 어머니 다나에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왕의 핍박에 못 이겨 숨어 살고 있었더랬다.

동네 사람 한 명이 그간에 있었던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페르세우스가 떠나자마자 폴리덱테스 왕은 어머니 다나에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심지어 겁탈하려고까지 하였으나, 그때마다 딕티스 노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수모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격분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케토스를 죽일 때 사용한 검과 청동 방패를 가지고 폴리덱테스 왕을 만나러 궁전으로 향했다. 물론 그의 허리춤에는 자루에 담긴 메두사의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궁전은 한창 흥청망청 술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폴리덱테스 왕은 이미 거나하게 취했어도, 먼발치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거꾸로 메두사가 목이 잘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연실색한 왕은 왕좌에서 달려 나와 영웅의 발 앞에 엎드렸다. 싹싹 빌며 살려달라고 영웅에게 애걸복걸했지만, 페르세우스는 그동안 폭정을 일삼으며 어머니를 괴롭힌 폴리덱테스 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곧바로 즉석 재판이 열렸고, 왕은 그 죄가 인정되어 죄에 합당한 징벌로 왕좌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폴리덱테스가 왕좌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섬나라 안팎으로 퍼지자, 폭군에게 시달려 왔던 주민들은 일제히 궁으로 몰려들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리고 페르세우스를 연호하며 이 나라의 새 왕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아직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불효를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선 어머니를 찾아야겠어요.”

그때 군중 속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영웅의 가족은 위대한 암몬 신의 집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페르세우스는 한달음에 신전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영웅은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그간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르세우스는 어머니와 생명의 은인인 딕티스 노인 부부를 모시고 왕궁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는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새 왕을 몸소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궁전의 앞뜰. 페르세우스는 지금껏 어머니를 보살펴 준 현명한 인물, 딕티스를 왕의 자리로 모셨다. 전 왕의 형으로서 원래 왕좌에 앉을 권리가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 백성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함성으로 이 온당한 결정을 환영했다. 이로써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날개 달린 신발과 투명모자를 원래 주인인 요정들에게 돌려주고,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며 모든 과업의 영광을 신께 돌리는 일이었다.

아테나 여신은 메두사의 머리를 염소 가죽으로 만든 자신의 방패, ‘아이기스(aegis)’에 붙박아 놓았다. 이로써 아이기스 방패는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무적의 방패가 되었고, 방패를 장식하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악한 힘이나 적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마법의 힘을 얻게 되었다.

권력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 의한 보호를 뜻하는 영어의 ‘aegis’ 는 방패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이기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에는 바로 메두사의 머리가 지닌 마법적 힘에 대한 기억이 간직되어 있다. 미국의 항공모함인 이지스함도 바로 이 방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1

영웅의 가족에게는 이제 마지막 여정만 남았다. 페르세우스 부부는 어머니 다나에를 모시고 페르세우스가 태어난 곳, 아르고스 땅으로 되돌아갔다. 아들의 기억이야 뭣이 있겠나만 어머니 다나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청동으로 둘러싸인 지하 감옥에 갇혀 홀로 아이를 낳고 길렀던 기억이 생생한 곳, 방주에 실려 생사를 운명에 맡겨야 했던 곳, 무정한 아버지의 나라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자와는 달리 오래전에 갓 태어난 손자와 딸을 방주에 가둔 채 물에 띄워 보낸, 이제는 노인이 된 아크리시오스 왕은 젊은 영웅 페르세우스가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소리소문없이 달아나버렸다. 다나에의 아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옛날 예언이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탁이 괜히 신이 맡겨놓은 운명이라고 불리겠는가? 그는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내려진 신탁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살펴보자.

아크리시오스 왕이 도망해서 정착한 라리사(Larisa)에서는 마침 죽은 자들을 위한 운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운동회에는 당대에 명성을 얻은 영웅이 거의 모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꽤 볼만했다.

라리사 왕의 호의를 입은 아크리시오스는 라리사 왕의 바로 옆자리에서 이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극구 사양했다. 그는 왕의 자리와 멀리 떨어진 일반석에서 군중들과 뒤섞여 경기를 관람하기를 원했다. 혹시 페르세우스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한편, 영웅 페르세우스는 고향 땅 아르고스에 도착하자마자 외조부를 뵈러 궁전으로 향했다. 아무런 원한도 사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미 외조부는 손자를 피해 이웃 나라 라리사로 떠났다고 하니 영웅의 마음은 허망했다. 영웅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떤 무기도 없이 라리사로 향했다.

페르세우스가 라리사에 도착했을 때는 운동경기 열기가 한창 절정에 있을 때였다. 페르세우스를 알아본 사람들은 이 영웅의 기량을 보고 싶어 경기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페르세우스 또한 영웅들과 자신의 기량을 겨뤄 보고 싶었다. 영웅은 외조부를 찾는 일은 잠시만 늦추기로 했다.

페르세우스는 우선 그가 가장 자신 있었던 원반던지기에 참가했다. 몇몇 다른 참가자들이 경기를 마치자 드디어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힘차게 원반을 잡고 큰 호흡으로 숨을 고른 다음, 힘껏 땅을 지치면서 몇 바퀴를 빙그르르 돌아 소리와 함께 창공으로 원반을 날려 보냈다.

빗나간 것인지, 영웅의 조준이었는지, 아니면 강한 바람이 심술을 부린 것인지 알려진 바 없으나, 영웅이 날려 보낸 원반이 공교롭게도 일반 관람석 쪽으로 날아가 어느 노인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리고 말았다. 전에는 웬만해서는 하지 않은 실수였다.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사고에 영웅은 서둘러 관람석으로 달려갔다.

그 노인은, 여러분도 짐작했다시피 페르세우스의 외할아버지이자 영웅을 나무 궤짝에 가두어 강에 버렸던 아크리시오스 왕이었다. ‘하는 짧은 탄식이 늙은 왕의 살아생전 마지막 음성이었고, 이렇게 하여 아크리시오스가 딸의 아들에 의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자기가 던진 원반에 맞아 죽은 사람이 외조부라는 것을 알고, 절규했다. 비탄에 잠긴 영웅은 축 처진 어깨로 외할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고향 땅,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아테나 신전에 외조부를 모셨다. 그리고 저승길로 떠나는 외조부의 두 눈 위에 지하 세계의 뱃사공 카론에게 줄 노잣돈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올려 드렸다.

 

12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를 낳았다. 그중 몇 명은 유명한 영웅으로 자라나 유력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알카이오스’, ‘메스토르’, ‘엘렉트리온(Electryon)’ 등은 그들의 아들이며, 헤라클레스는 그들의 증손자이다.

숱한 위업을 남긴 후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의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설마다 내용이 다르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부부가 아들 페르세스와 함께 아시아로 가 페르시아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반던지기 대회에서 자신 때문에 외조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르고스 영토를 티린스와 맞바꾸고 티린스를 다스리면서 안드로메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티린스 왕이 물려주는 왕위를 받아 미케네를 건설했다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 진다.

아무튼,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낭만적이고 모험 가득한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는 신화에서 매우 보기 드문 결말이다.

그들은 죽어서도 영광이었다. 페르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바친 보답으로 여신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를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 주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예를 누리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하나 더, 안드로메다의 부모 케페우스 왕과 카시오페이아 왕비도 죽어서 포세이돈 신에 의해 별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포세이돈은 카시오페이아를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어서, 왕과 왕비가 죽자 포세이돈이 그들을 벌하기 위해 보냈던 바다 괴물, 큰 뱀자리 옆에 그들을 자리하게 했다. 그래서 포세이돈은 그녀가 한해의 대부분을 발을 위쪽으로 한 채, 하늘에 거꾸로 있게 만들었다.

 

13

괴물이나 용을 죽이고 위험에 처한 아름다운 공주를 구출해 내는 페르세우스의 낭만적인 모험담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거듭 새로운 버전들을 만들어 내며 전해져 왔다.

이어서 보게 될 이아손(Iason)’, ‘테세우스(Theseus)’의 영웅담에서도 여러분은 괴물이나 용의 등장과 이를 퇴치하는 영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괴물이나 용을 퇴치한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 보답으로 아름다운 공주와 탈출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영웅들과 페르세우스 신화가 다른 점은 첫째, 공주가 괴물()의 직접적인 위험에 놓여 있지 않고 오히려 공주들의 도움으로 괴물을 물리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공주들은 모두 적국의 공주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두 번째 큰 차이점이 하나 생기는데, 이아손과 테세우스 이야기는 각각 아리아드네(Ariadne)’메데이아(Medeia)’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주가 적국의 영웅을 도왔다는 것은 고국을 배반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영웅의 반대편에 있는 왕과 나라는 패망 내지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옛사람들은 사랑만을 좇은 여인들을 좋게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르세우스 신화는 성 게오르그(St. Georg)’ 신화로 직접 이어진다. 성 게오르그는 중세에 가장 사랑받던 성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기사들의 모범이었으며 영국의 수호성인이었다. 성 게오르그는 용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아이아라고 하는 아름다운 공주를 구해주고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

이 구조는 비단 서양의 옛날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를 읽어보기 바란다.

로버트 문치의 동화 종이 봉지 공주는 한술 더 떠 이야기의 전복을 보여준다. 공주와 영웅의 역할을 뒤바꾸어 공주가 용을 퇴치하고 왕자를 구한다. 그러나 왕자는 엉망이 된 공주를 보고 진짜 공주처럼단장하고 다시 오라고 한다. 전형적인 이야기 뒤틀기이다.

할리우드의 히트작 킹콩(King Kong, 2005)의 구조는 또 어떠한가. 왕자가 킹콩이라는 괴수로 바뀌었을 뿐 미녀가 등장하고, 용이 등장한다. 킹콩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으로부터 미녀를 구하고 남성성을 과시한다.

이렇게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신화 이래로, 용을 죽이고 아름다운 공주를 구해내는 영웅의 이야기는 작가들이 즐겨 이용하는 모티브가 되어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의 독자나 관객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오락과 감동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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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2023-04-2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포스팅 내용을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스 신화 관련하여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데,
더 쓰신 글은 어디서 볼 수 있는지요? (혹시라도 직접 쓰신 글이 아니라면, 출처를 알 수 있을지요? 찾아봤는데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여쭈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