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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오랜만에 내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이름때문에 별명이 '레드 드래곤'인 친구이다. 하긴 꼭 이름뿐만이 아니다. 몸짓이 커서 누가 봐도 '드래곤'의 위용이 느껴지던 친구였으니까. 가만 있자.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아니 적어도 15년은 된 것 같다. 간간히 통화를 한 적이 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이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난 연후라니. 한때 항상 붙어다니던 패거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간에 무심하긴 했다.

 

책상 정리를 하는데 깊은 곳에서 불쑥 튀어나온 서류봉투 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뭔가 보니 사람들한테 받았던 편지꾸러미다. 한때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버려지지 않고 보관되었다니 신기하다. 그 중에 레드 드래곤한테 온 편지도 한묶음이다. 신년카드도 있고 성탄절 카드도 있다. 생긴것과는 달리 글씨체는 계집애처럼 곱다. 아무런 그림이나 문구 없는 편선지에 쓴 것도 있고 대학노트를 좌~악 찢어 갈겨 쓴 것도 있다. 대부분 내가 군에 있을 때 '위문편지'라고 쓴 것이다. 한결같이 누렇게 빛이 바랬다.

 

어째거나 편지꾸러미가 발견된 타이밍이 절묘하다. 마치 일부러 찾기나 한 것처럼. 그렇지만 이런 우연은 생각보다 자주 목격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문득 작정했다. 내일 만나면 친구한테 받은 것을 돌려주겠다. 나도 새삼스럽고 부끄러운데 직접 쓴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그런 편지를 썼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질지도 모른다.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지 모르니 만남이 파할 무렵 불쑥 주어야지.

 

주고나면 아쉬울 때니 몇몇은 내용만이라도 보관해야 할 것 같다.

이산화탄소같은 남자 호석군에게

 

호석아! 너와의 만남이 어느새 1년이 다돼가는구나. 나에게 너를 친구로 만났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너로써는 힘들고 또 외로웠던 일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힘들고 외로울 때는 항상 너의 뒤에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해라.

슬픈일 고달픈 일은 93년의 뒤로 다 떨쳐버리고 희망차고 기쁘게 94년을 맞이하거라

그리고 우리의 우정이 새해에는 더욱 두텁게 그리고 항상 신선한 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잘못된 점을 충고해주는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만사이 만사 만사이(황비홍 4 주제가)

 

산소같은 남자가

  성탄절 카드다.

보고싶은 친구 호석이에게

 

그동안 전화 여러 번 했다는데 한 번도 못 받아 미안하다

니가 전화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때 좀 더 일찍 올 걸 하는 생각과 목소리라도 득고 싶었는데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이렇게 편지를 받으니 기쁘기 한량 없구나.

나는 좀 바쁘게 지낸다. 도서관(4열람실)에서 매일 지낸다. 고시공부한다고 갑쭉거리고 있다. 그리고 과외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있다(00하고)

이런 것들이 나를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

00쓰니까 니가 의아해 할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나?

사귄지는 한 4개월 됐다. 그동안 너에게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확신이 없어서 그랬다. 애인있다니까 부럽지 짜싸.

그동안 나를 잡아주었던 학회일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서 나를 바쁘게 하기 위해서 일을 자꾸자꾸 만들어 간다.

우러 학회 94학번은 다 나갔다. 94학번은 이제 없다. 이제 학회를 위해 흘린 눈물도 없구나. O.T.때 생각난다. 너하고 같은 조 "얼씨구 좋구나 7조"

이런 얘기 고만하고 연극부는 영문학제 때 연극할려고 열심히 하고 있다. 밤 늦게까지 연습하는 열성이 부럽기도 하고 보기 좋더라.

내가 안 도와줘도 잘하는 같더라. 그렇지만 연극은 꼭 보러갈 것이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스트라이커 권호석(하하하) 미완의 대기가 이제야 물이 오르는구나. 나는 족구도 별로 못한다. 실력 다 죽었다. 너 휴가나올때 같이 공도 차고 땀도 흘려보고 같이 부대끼고 싶구나.

반복되는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면 휴가나올 때 책좀 사가 읽어라 짜싸.

그리고 나에게 친구들에게 편지 자주 쓰고 펜팔이라도 해. 그리고 글좀 써서 붙이고. ......

니가 준 '솔'은 잘 피웠다. 니 생각하면서 폈다.

물론 나중에 두가치는 버렸지만. 미안하다.

건강하다니까 다행스럽다. 그래도 항상 건강에 유의해라.

힘들 때는 친구들 생각하고.

편지 자주 쓸께. 편지 늦어 미안해.

 

1994. 9. 23. 밤 11:50분에

현재에도 친구고 미래에도 영원히 우정을 나눌 친구

호석이에게

내가 군대에 간것이 1994년 6월이었으니까 이 편지는 이등병으로 한참 박박 기고 있을 무렵 보낸 것 같다. 친구가 쓴 편지를 주~욱 읽다보니 태반이 술 한잔 먹고 쓴 것 같은 느낌이다. 자주 쓰겠다던 편지는 지금 세어 보니 여섯 통 남짓. ㅋ

땅콩 형제에게

 

아직까지 줄 것이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담배뿐입니다.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깐 조금씩만 피우세요.

그리고 군생활 열심히 하세요. 건강하세요.

 

땅콩 형제가

마지막 것은 편지봉투가 없어 언제 보낸 것인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소린지...

 

잊었던 순간들이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싱싱하게 떠오른다. 친구는 어떻게 변했을까. 카톡에 사진 한 장 안올린 녀석.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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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낮이 가고 밤이 오고, 다시 밤이 가고 낮이 오기가
몇 번을 거듭하도록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내리는 비에 몸속까지 흠뻑 젖어도 보고, 지쳐 길거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어느 날, 커다란 소용돌이가 쳤고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은 어둠뿐이었다.
마치 안대를 한 술래처럼 먼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한발 내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일 것만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못생겼다고 놀이에 끼워주지도 않던 동네 아이들,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사람들이 악몽처럼 눈앞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추웠지만 이마와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은, 특히 혼자서 하는 여행은 참 외롭다.
바람만 뒹구는 거리에서 뚜벅 뚜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라치면
내가 걷는 것인지 길이 나를 삼키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작렬하는 햇빛아래 개구리 한 마리 도로를 횡단하다가 차바퀴에 깔려 압사당하는 비극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먼지는 이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바탕 땀을 흠뻑 흘리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도 같았다.

잠시 허리를 굽혀 신발 끈을 고쳐 맸다. 구멍 난 운동화 틈사이로
때 절은 새끼발가락이 생뚱맞게 나와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은은한 백합 내음이 콧속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향기가 시작되는 곳이 어딘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인기척 없이 냄새만 유혹처럼 먼지의 발걸음을 잡았다.
분명 사람의 냄새였기에 기다리기로 하고 길가 풀 섶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집을 언제 떠났는지 어림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고되고 외로운 여정이었다.

 

“자니?”

 

먼지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따뜻한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기의 주인인 듯 달콤한 내음이 공기 중에 있었다.

 

“피곤한가 보구나. 곧 일어나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한참 동안이나 곤하게 자더구나.”

 

먼지는 깜빡 잠이 들었음을 알고 코를 골지는 않았는지,
침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니?”
“그래...”

 

정말 수수하게도 생겼다고 먼지는 생각했다.

 

“난 먼지야,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니?”
“너 친구를 찾고 있지?”
“...”
“어떻게 알았냐구? 네가 자면서 말하더라. ‘친구야 어딨냐’구.”

 

먼지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졌다.

 

“난 달이야.”

 

달이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하자,

먼지도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달은 먼지 옆자리에 앉아서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있었고 눈은 바라보는 거리만큼 깊고 고요했다.
먼지는 그런 달의 옆모습을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꿀꺽' 먼지가 침을 삼기는 소리다.

 

“외롭니?”

달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외로워.”

먼지는 어렵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누굴 사랑하고 있니?”
“난 사랑이 뭔지도 몰라.”
“먼지라고 했지? 
 내가 얘기 하나 해줄 테니 괜찮다면 들어볼래?”

 

먼지는 달이 참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토록 진지하게 말을 건넨 기억이 없었다.

 

달이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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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먼지가 처음 만난 사람은 한눈에도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반갑게 다가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그 예쁜 숙녀는 먼지를 본체만체 유유히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먼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숙녀가 먼지 앞을 스쳐갈 때 재빨리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쳇, 넌 누구니?”
“나랑 친구 할래?”

 

그녀는 먼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더니, 갑자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꼬마야, 난 너랑 친구할 마음이 없단다.  
 너처럼 볼품없고 못생긴 아이와 친구를 한다면
 모두들 나를 비웃을 거야!”

 

그녀는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아랑곳없이 품에서 거울을 꺼내더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작은 손가방에서 빨강 립스틱을 꺼내더니 분홍색이었던 입술을

빨갛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먼지는 그저 그녀가 하는 대로 바라만 보다가 말했다.

 

 

“그럼 그냥 이름이라도 일러주지 않으련?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불러 줄게.”

 

숙녀는 한참동안 먼지를 바라보다가,

 

“흔히들 나를 '수성'이라고 부르지만, 내 진짜 이름은...

아니, 내가 뭐하는 거지? 꼬마야, 나중에 나를 우연히 만나더라도 아는 척 하지 말았음 해.”


“---. 귀찮게 해서 미안해.”

 

먼지는 고개를 떨군 채 진짜 이름을 말해주지 않은 '수성'에게 사과했다.
수성과 친구로 지내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예쁘고
자신은 정말이지 형편없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난 비록 못생겼지만 창피하지 않아. 
 그래도 저 넓은 세상 어디쯤에는 나를 맞아줄 친구가 있을 거야.'

 

빠른 걸음으로 멀리 사라지는 '수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먼지는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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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멀고 먼 우주 한 귀퉁이 은하계, 이름도 없는 조그만 행성에 참 지지리도 못생긴
아이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먼지’라고 부르며 놀려댔다.
결국 ‘먼지’는 그 아이를 이르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다.
울퉁불퉁 외모에 다닥다닥 주근깨, 눈은 보일 듯 말 듯 했으며
키는 또 왜 이리도 작은지 모든 게 불만투성이였다.
동네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먼지와 친구를 하려 하지 않았다.
먼지는 퍽 외로웠다. 언제나 혼자였다.
'삶'이라는 것이 너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먼지는 계속 야위어 갔다.
그런 먼지를 바라보던 엄마가 어느 화창한 날 먼지를 앉혀놓고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무엇이 너를 붙잡는 줄 모르겠다.

 저 은하계 너머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는데 어째서 나서지 않는 거니?

 이 곳에서 힘들어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오렴.”

 

바깥세상? 그곳에는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그렇게 편견으로만 가득한 곳은 아닐 거야. 
언제까지나 이렇게 외롭게 살아갈 순 없어. 

어딘가에 나를 받아줄 친구가 있을 거야.’

 

먼지는 집을 나서면서 앞으로 닥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먼지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은 눈앞에 반듯이 펼쳐져 있었지만 한 참을 갔는데도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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