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이야기 시즌 2는 처음에 존 앨빈이나 드류 스트러잔 같은 아티스트 별로 그들이 남긴 영화포스터를 감상하는 컨셉으로 기획했었다. 실제로 존 앨빈의 포스터 작품을 중심으로 시즌 2의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첫번째 포스팅을 마치고 인터넷을 살피다가 이미 비슷한 주제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정리해둔 블로그를 발견하고 그 이상은 자신이 없어 접었다.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포스터 아티스트들이 궁금하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아주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naver.com/gkaals1004/110041930298 )

 

어떻게 시즌 2를 꾸며볼까 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한참 생각한 끝에 시즌 1의 틀을 유지하면서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정 주제를 하나의 스타일로 묶는 방식 말이다. 포스터를 주욱 훑어 보았다. 시즌 2의 첫번째 이야기 주제로 눈에 확 들어오는 스타일이 보인다. 바로 '길 스타일(road style)'이다.

 

어린 시절 TV에서 안소니 퀸 주연의 이탈리아 영화 [라 스트라다]를 본 이래로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알마즈 귀니 감독의 [욜],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 베리 레빈슨 감독의 [레인맨], 리들리 스콧트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 구스 반 상트의 [아이다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길위에서 펼쳐지는 '로드무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되었다. '길'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느껴지는 스잔함이나 고난, 그리고 의외성도 그렇거니와 인생을 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대가 또 어디 있을까.

 

영화뿐만이 아니다. 반드시 로드무비가 아니더라도 '길'을 소재로 한 영화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을 넘어 저절로 숙연해 지곤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포스터 하나 하나를 뜯어 보면서 그 이유를 찾아봐야 겠다.

 

 

 

[디투어, 1992]

 

 

웨이드 윌리엄스 감독의 1992년 영화 [디투어]의 포스터를 보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1945년에 이미 영화화 된적이 있다. 당시 주인공 알 로버츠 역은 톰 닐(1914 ~ 1972)이 맡았는데 1992년에 리메이크 하면서 톰 닐 주니어가 같은 배역을 맡음으로써 대를 이어 동일 인물을 연기한 드문 경우를 만들었다. 스토리는 이렇다.

알 로버츠(톰 닐 분)는 뉴욕의 나이트 클럽의 피아니스트로 거기서 노래하는 수와 결혼하려 하지만, 야심적인 수는 스타를 목표로 할리우드에 가버렸다. 로버츠는 히치하이크를 하면서 할리우드에 가기로 하고 하스켈이라고 하는 남자의 차를 타게 된다. 하스켈과 교대로 운전하게 된 로버츠는 돌연 비가 내리자 오픈카 지붕을 닫기 위해서 자고 있던 하스켈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하스켈은 움직이지 않는다. 문을 열자 하스켈이 차에서 떨어지며 돌에 머리를 부딪친다. 아무래도 차를 타고 있을 때부터 죽어 있던 것 같지만, 경찰이 믿어 줄 것 같지 않아 시체를 숨기고 하스켈 행세를 하고 차를 몬다. 다음 날, 베라라고 하는 여성을 태우지만, 그녀는 로버츠가 하스켈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자 LA에 도착해서 둘은 부부 행세를 하고 방을 빌린다. 베라가「하스켈이 죽음을 앞둔 부자의 상속인으로 가족은 몇 년이나 그를 만났던 적이 없다」라고 하는 신문 기사를 찾아낸다. 베라는 로버츠를 하스켈로 위장시킬 계획을 세우지만, 몹시 취한 베라가 전화선을 목에 감은 상태로 죽어 버리는데...

다음 영화   

우연히 두 건의 죽음에 휘말린 로버츠는 가던 길을 되돌리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파국을 피할 '우회도로'가 있기는 한 것일까? "그녀는 사랑하기에 위험하지만 미워하기엔 더 위험하다"는 포스터 카피와 함께 쭉 뻗은 고속도로, 담배연기, 중절모의 신사가 영화의 느와르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정오의 열정, 1990]

 

 

이미 [이지 라이더]라는 걸작을 만든 바 있던 배우이자 감독, 데니스 호퍼의 범작 [정오의 열정]의 포스터도 중앙에 곧게 뻗은 도로를 배치했다. 그런데 도로 위를 질주해야 할 핑크 캐딜락이 도로 한가운데 횡으로 정차해 있다. 느와르를 표방한 이 영화도 이미 포스터에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에로틱하고도 위험한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이란 것이 복선으로 깔려 있는 듯하다.

미국 텍사스의 한 마을. 중고차 세일즈맨인 해리 매독스(돈 존슨 분)는 이곳을 자신의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다. 그는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로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해리는 회계부서의 청순한 여인 글로리아(제니퍼 코넬리 분)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사장의 젊은 부인 돌리(버지니아 매드슨 분)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후였다. 자신의 벌이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글로리아와 돌리 부인 사이에서도 갈등을 하던 해리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마을 중심부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놓은 뒤 은행을 턴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완전범죄를 수행했다고 믿는 해리, 하지만 보안관은 새로운 이주자인 그를 의심하는데...

다음 영화 

욕망에 사로잡힌 젊은이의 위험스런 도박, 인생이란 무대에서 그가 연기하는 퍼포먼스는 영화 원제 'The hot spot' 의 의미처럼 그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물고 있는 붉은 립스틱의 강렬한 이미지가 이 포스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

 

 

 

[자유의 2차선, 1971]

 

 

요즘에야 카레이서 영화하면 누구나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남자들의 로망인 멋진 자동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은 보는 쾌감과 시원함이 남다르다. 1971년에는 몬티 헬만 감독의 [자유의 2차선]이 있었다. 헬만 감독은 세르지오 네오네 감독과 함께 [황야의 무법자]를 공동 연출한 경력이 있는데, 그는 서부영화와 범죄드라마 같은 장르영화에 주력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그의 대표작들은 "미국인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암울한 사회상을 실재했던 모습 그대로 반영하였다"는 평을 들었는데 [자유의 2차선]이 꼭 그렇다.

1955년형 시보레를 타고 미국 남서부 전역을 돌며 경주할 차를 찾아 헤매는 카레이서(제임스 테일러 분)와 정비사(데니스 윌슨 분). 자동차광인 이 콤비는 오로지 차에만 미쳐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말도 건네지 않는다.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여자(재클린 헬만 분) 그리고 주유소에서 만난 중년의 허풍선이 G.T.O.(워렌 오테스 분)가 이들의 여정에 합류하고, 그들은 각자의 차를 걸고 워싱턴 DC까지 경주를 하기로 하는데...

다음 영화 

카레이서에게 도로는 진정 '자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삶과 죽음 사이에 자유가 존재한다면 그 배경은 결국 '길 위'가 아닐까? 포스터는 도로에 정차한 차를 배경으로 주요 배역들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배치되어 있다. 펜화 기법의 흑백톤이 건조한 느낌을 준다. [배니싱 포인트]와 더불어 70년대 가장 유명한 자동차 로드무비 이자 컬트 영화이다.

 

 

 

[아이다호, 1991]

 

 

키아누 리브스의 젊은 시절과 리버 피닉스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걸작, 구스 반 상트의 '내 마음의 고향 [아이다호]' . 두 배우가 바이크를 타는 장면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영화다. 지쳐 연약한 청춘이 고향 아이다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다룬 로드무비인데, 긴장만 하면 잠들어 버리는 기면발작증에 걸린 마약중독자이자 남창인 마이크 역의 리버 피닉스를 세상에 알린 이 영화의 포스터도 '길'과 담배가 등장한다. 흔들리는 젊음을 상징하듯 곧게 뻗은 도로를 배경으로 꼴라주 기법을 활용한 두 배우의 모습은 흐릿하고 헝클어져 있다. 캐스트 & 스탭을 설명하는 글자들도 평행이 아닌 사선 형태로 불규칙하게 배열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 같다.

 

 

 

[레인맨, 1988]

 

 

영화의 스틸컷을 활용한 이 포스터는 천재적인 포스터 아티스트 존 앨빈의 작품이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왔던 두 형제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걷고 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과 궁지에 몰린 동생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받게될 상속 재산 때문에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비행기에 대한 공포로 인해 3시간이면 될 여정을 3일에 걸쳐 하게되는 이 형제는 서로 잊고 살아왔던 형제애,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동생 찰리(톰 그루즈 분)의 기억속 '레인맨'이 사실은 형 레이몬드(더스틴 호프만 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찰리는 재산보다 더 소중한 가족의 가치를 알게 된다.  형제에게 '길'은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복원이자 새로운 관계의 시작과 다름 아닌 것이다. 맴도는 대사 "One for bad, two for good"이 모든 걸 집약한다.

 

 

또 다른 길, 철도...

 

 

자동차가 다니는 포장도로만이 '길'은 아니다. 포스터에서 자주 활용되는 또하나의 길, 기찻길도 있다. 그런데 기차가 달리는 모습 보다는 사람이 걸어가는 장면이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길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터벅터벅. 대표적인 포스터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를 보자.

 

 

 

 [파리, 텍사스, 1984]

 

 

포스터 이야기 시즌 1에서 이미 '사진 스타일', '지도 스타일', '그림자 스타일'을 살펴 봤지만 이 포스터야 말로 어떤 카테고리에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상징을 활용한 포스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번 편에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해리 딘 스탠든의 초점 잃은 표정이 아직도 생생한 이 영화는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다루었다. 현대 사회의 소통 부재 및 단절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는 영화이다.

 

 

 

[아웃사이더, 1983]

 

 

청춘 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아웃사이더]도 철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포스터로 유명하다. 남쪽의 부자 백인 마을과 북쪽의 가난한 백인 마을로 양분되어 있는 오클라호마의 어느 도시, 북쪽의 아이들은 부모가 아예 없이 학교도 못 가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가 하면, 매일 부부 싸움을 하는 부모가 싫어 집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그 빈민촌 청춘들로 분한 패트릭 스웨이즈, 롭 로우, 토마스 하우웰, 랄프 마치오, 맷 딜런,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톰 크루즈, 그리고 다이안 레인 같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만으로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은 영화다. 

 

 

 

[세 아들, 1989]

 

 

평화로운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개발 열풍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세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상처와 방황으로 얼룩진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배우로 훨씬 큰 명성을 쌓은 여성 감독 리 그란트의 작품이다. 포스터 속 휘어진 철길이 굴곡있는 형제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역경을 극복하고 철길을 따라 걷고 있는 세 형제들의 얼굴이 그닥 심각하지 않다.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함께'한다면 희망이 있다고 웅변하는 듯한 느낌이다. 

 

 

'길'을 소재로 한 영화나 포스터가 남다르게 숙연한 느낌을 드는 이유? 아마도 그건 내가 걸어온 세월을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어서인가? 아니, 그게 다라면 뭔가 부족하다.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면 '길'은 계속 이어진다.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에 이르기 전까지 삶도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남은 가야 할 길이 평탄치 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길'은 그렇게 인생과 동의어다. 가끔은 이정표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하긴 요즘엔 '네비게이션'과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긴 하다) 후회가 적은 삶을 위한 나름의 지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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