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프로크루스테스, 메데이아, 미노타우로스, 파이드라, 페이리토오스...

 

1

이제 아테네(Athens)로 눈을 돌려보자. ‘테베크레타와 달리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비교적 약소국에 속했던 아테네가 어떻게 그리스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트로이 전쟁 이전까지 헤라클레스(Herakles)’와 더불어 전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인 테세우스의 탄생과 성장을 보면 알 수 있다.

테세우스는 아테나의 왕 아이게우스(Aegeus)’와 트로이젠의 공주 아이트라(Aithr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출생과정에는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이 아이게우스가 아이트라와 관계를 갖기 전후에 아이트라의 침실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사실인지 알아보자.

아이게우스 왕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들이 없었다. 몇 해 전에 두 번째로 맞이한 칼리오페 여왕에게도 역시 태기가 전혀 없었다. 왕실에 2세가 없는 기간이 계속되자 야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게우스 왕의 아우 팔라스와 그의 50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호시탐탐 왕좌를 노리기에 이르렀다. 나이가 불어날수록 점점 불안을 느낀 이 아테네 왕은 아무래도 파르나소스 산허리에 있는 델포이 신전으로 가서 아폴론(Apollo)’의 신탁을 들어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내용이 두루뭉술하기로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신탁내용은 이번에도 헷갈리는 것이었다.

왕이여, 돌아가는 길에 술 부대의 주둥이를 조심해라!”

밑도 끝도 없는 신탁을 받아든 아이게우스 왕과 일행은 고향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에 변방의 자그마한 도시국가 트로이젠이라는 곳에 잠시 들러 쉬어가게 되었다. 당시 트로이젠은 현자 피테우스 왕의 통치 아래에 있었는데, 피테우스 왕은 아테네의 영웅 아이게우스를 평상시부터 흠모해 왔었다. 그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융숭한 손님 대접을 한다면 좋은 인연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마셔라, 부어라호응하면서 여독을 풀다가, 아이게우스는 피테우스 왕의 뜻대로 잔뜩 취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이트라의 침실로 옮겨진 아이게우스는 다음 날 아침 자기 옆에 누워있는 아이트라 공주를 보고서야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게우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밤,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아이트라의 침실을 찾아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게우스만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트라 역시 아버지 피테우스 왕의 바람대로 아이게우스 왕하고만 사랑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나중 일이지만 그때 태어난 테세우스도 아이게우스를 생부로 여겼음이 신화 이야기 곳곳에 발견되니 친생자 확인은 이 정도로 하자. 앞으로 테세우스는 바다 위에서만큼은 곤욕을 치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 테세우스가 태어나기 전인 어느 화창한 날 아이게우스는 자신의 나라 아테네로 떠날 채비를 마친 후 아이트라와 마주했다. 아이트라의 눈에는 진작부터 눈물이 글썽였다. 공주의 눈물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아이게우스는 자기 칼과 가죽신을 커다란 섬돌 밑에 넣어두고는, 장차 아들이 태어나거든 그 아이가 다 자라 그 돌을 들어 올릴 힘과 용기가 생겼을 때 자신에게 보내라고 당부했다. 그때 이 칼과 가죽신을 징표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여러 해 동안 왕자를 잉태하지 못해 상심해 있을 칼리오페 여왕이 있는 아테네의 궁전으로 함께 가자는 말은 선뜻 하지 못했다.

아이게우스 왕이 떠나고 아이트라의 아랫배는 점점 불뚝해지기 시작했다. 달이 모두 차자 아이트라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기쁨에 찬 공주는 아버지 피테우스 왕과 상의하여 이 아들의 이름을 테세우스(Theseus)’라고 지었다. 그 이름의 속뜻은 묻혀 있는 보물이라는 뜻이었다. 테세우스는 태어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고 울음소리 또한 우렁찼다. 테세우스는 외가인 트로이젠 궁전에서 최고의 스승들로부터 왕가의 법도를 배우고, 가장 훌륭한 전사들로부터 싸우는 법을 익히며 무럭무럭 자랐다.

테세우스의 어린 시절 일화 중, 헤라클레스를 만났던 일을 빼놓을 수 없겠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헤라클레스가 맨손으로 키타이론산의 사자를 때려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헤라클레스의 나이는 아마 열일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마스코트이자 시그니처인 사자 가죽을 쓰고 나타나자 애어른 할 것 없이 진짜 사자가 나타난 줄 알고 모두 혼비백산 도망치는데 오직 여섯 살배기 테세우스만 도끼를 들고 뛰어나왔다. 헤라클레스야 뭐 당돌한 꼬마의 행동에 씨익 한번 웃어주고 갈 길 갔겠지만, 아무튼 두 영웅의 첫 만남은 이랬다.

그리고 세월은 또 활을 떠난 화살같이 흘렀다. 그렇게 테세우스가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유난히 힘이 세고 영리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특히 그의 레슬링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나날이 발전했는데, 트로이젠에서는 아무도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외조부 피테우스 왕이 손자를 보고 포세이돈 신의 아들이라고 확신하는 마음이 생겼을까.

청년 테세우스는 몸만 튼튼해진 것은 아니었다. 워낙 어려서부터 영리했으니 단순한 지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무언가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왜 아비가 없는지 궁금했다. 테세우스에게 사춘기가 왔던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근본에 대한 당연한 물음이었다.

테세우스는 가장 확실한 답을 알고 있는 어머니 아이트라에게 물었다. 아이트라는 오래전 아이게우스가 말한 때가 되었음을, 아들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이트라는 아들의 손을 이끌고 옛날 아이게우스가 떠나면서 일러두었던 섬돌 앞에 서서 아들에게 섬돌을 들어보도록 했다. 그러자 테세우스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돌을 들어 올리고 그 밑에 있던 아테네 왕가의 칼과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신었던 가죽신을 발견했다. 아이트라는 칼과 가죽신을 아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아테네의 아이게우스 왕이시다아버지를 찾아 뵈어라! 이 칼과 신발이 그 신표이다.”

어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테세우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아주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테네의 정당한 왕위계승권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까지 깨달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아마도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겨준 가죽신을 신고 아테나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칼을 찬 채 아버지와의 만남을 향해, 아테네를 향해 길을 나서기로 했다. 칼집의 칼은 제 소명을 다하기 위해 트로이젠 최고의 대장장이가 이미 벼려 놓은 상태였다.

당시 육로에는 흉포한 도적 떼가 빈번하게 출몰하여 길손의 목숨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 아이트라뿐만 아니라 외조부 피테우스 왕은 한결 가깝고 수월한 바닷길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용기백배 열혈청년 테세우스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처음 만나게 될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를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도 당시 한창 이름을 떨치던 헤라클레스처럼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테세우스도 이 여행이 무척이나 멀고 험한 여행이 될 것이며,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온 세상에 증명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2

때는 그리스 전역에 있는 도둑 떼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던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힌 것 때문에 죗값을 치르느라고 옴파로스 땅의 옴팔레 여왕 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세상은 헤라클레스의 오랜 부재로 다시 도둑 떼가 날뛰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도둑을 죽여도 꼭 그 도둑이 나그네를 죽이던 방법으로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일찍이 종살이를 하기 전, 나그네를 잡아 제물로 쓰던 부시리스라는 도둑을 죽일 때는 잡아서 제물로 썼고, 씨름 겨루기로 나그네를 죽이는 안타이오스를 만나서는 씨름으로 온몸을 부러뜨려 죽였다. 또 박치기의 명수 테르메로스는 박치기로 머리를 깨뜨려서 죽였다. 못된 짓거리를 뜻하는 테르메로스의 장난(Termerian Mischief)’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헤라클레스의 열혈 팬, 테세우스는 어떻게 했을까? 팬은 인기스타를 따라 하기 마련이다. 테세우스도 아버지를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만나는 도둑들을 죽일 때면 헤라클레스가 하던 대로 똑같이 하게 된다.

테세우스가 첫 번째 도적을 마주친 곳은 에피다우로스라는 도시였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과 경기장이 있는 아담한 도시였지만, 그곳에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아들인 야만인 페리페데스라는 자도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쇠막대인지 청동곤봉인지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도적질을 일삼았던 이 야만인은 테세우스를 보자마자 늘 하던 대로 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여느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단 한 번에 페리페데스를 패대기친 테세우스는 몽둥이를 빼앗아 야만인이 남들에게 한 것처럼 쳐 죽이고 나서 청동 몽둥이를 전리품 목록 제일 상단에 올려놓았다. 그때부터 테세우스는 항상 이 청동 몽둥이를 지니고 다녔다. 마치 헤라클레스 코스프레처럼.

다음으로 만난 악당은 코린토스 지방의 시니스라는 거인이었다. 이 거인은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큰 전나무 구부리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후, 나무가 끝까지 다 휘어 팽팽하게 되면 얼른 그 나무를 놓아버렸다. 그렇게 되면 멋모르고 그를 도와주던 사람은 하늘 높이 내던져져 결국 온몸이 박살 나게 된다. 테세우스는 시니스가 즐기던 이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그를 죽였다. 시니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잘생기고 듬직한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이 처녀는 테세우스를 유혹하여 그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었다. 테세우스도 그녀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테세우스는 훗날 이 처녀가 좋은 남편을 만나 잘 살도록 끝까지 돌봐주었다.

테세우스의 세 번째 업적은 페리페데스로부터 획득한 몽둥이를 사용해서 흉악한 멧돼지를 처치한 일이었다. 이 멧돼지는 암퇘지로 인근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것을 막아서는 농부들을 무참히 죽여 모든 사람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막다른 길목에서 이 짐승과 맞닥뜨리자 대번에 문제의 그 암퇘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수리를 향해 청동 몽둥이를 휘둘렀다. 딱 한방이면 충분했다.

네 번째 과업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 절벽에는 스케이론이라는 노상강도가 살고 있었는데, 이 불한당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절벽을 등지게 하고 자신의 발을 씻도록 강요한 후, 수틀리면 발로 걷어차서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뜨려 죽여왔다. 절벽 밑에는 항상 굶주려 있는 늙은 거북이 한 마리가 큰 입을 벌리고 있다가 떨어진 사람을 잡아먹었다. 이 강도도 자기가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섯 번째는 레슬링이었다. 아테네에서 멀지 않은 메가라(혹은 엘레시우스)라는 곳에 이른 테세우스는 이곳의 왕 케르키온과 레슬링 시합을 해야 했다. 이 왕은 자신은 결코 패배를 모르는 레슬링 선수라고 자부했다. 그는 자신과 시합을 벌여 패배한 사람을 죽이는 재미로 사는 폭군 중의 폭군이었다. 테세우스는 이 왕을 백드롭이나 헤드록 같은 다양한 레슬링 기술을 써서 때려눕힌 후 다시 길을 떠났다. 레슬링이라면 테세우스의 가장 큰 장기였던 것을 케르키온은 알 리가 없었다.

메가라에서 아테네로 향하는 마지막 노정에서 테세우스는 마침내 이 여정의 최악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와 만나게 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들이고는 자신의 침대까지 안내해 침대에 눕게 했는데, 침대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흠씬 두들겨 침대 길이 만큼 늘여서 죽이고, 침대보다 키가 큰 사람은 침대 밖으로 나온 머리나 다리를 잘라내어 죽이는 사이코패스였다. 그의 이름도 바로 이 엽기적인 행각에서 비롯되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바로 잡아 늘이는 자또는 두드려서 펴는 자를 뜻한다. 테세우스는 이 엽기 연쇄살인마도 지금껏 유지해온 원칙을 지켜 그 방식대로 죽였다. 이 일화에서 무언가를 자신만의 기준대로 억지로 끼워 맞춰놓은 것을 이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말이 생겼다.

, 이 정도면 자신을 충분히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까? 친자 증명을 넘어서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갖춘 후계자임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테세우스는 무사히 아테네 궁전에 입성하여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그보다 앞서, 그들이 비록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무작배기, 무뢰한이었다 하더라도 테세우스 자신의 손에 묻힌 피의 죗값이 가볍지 않은데, 이대로 괜찮을 것인가?

 

3

발 없는 말()이 말 없는 발()보다 빠르다고 했던가, 그의 영웅적인 행적에 대한 소문은 그보다 앞서 아테네에 도착했다. 테세우스가 아테네 국경에 이르렀을 때 척 보아도 내공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현자 몇 명이 테세우스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나라를 찾은 당신은 아티카 사람들의 근심거리를 말끔히 해결해 주었구려. 그러나 당신의 이 업보는 어쩌겠소, 이 늙은이 말대로 따라줄 수 있겠소?”

당시 그리스에는 남자가 죄를 닦을 때 여장을 하는 풍습이 있었더랬다. 테세우스는 무슨 말인지 짐작하고, 자신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피얼룩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 수염이 가장 희고 무성했던 현자가 테세우스에게 옷 한 벌을 내밀었다. 소박한 여인의 옷이었다. 이렇게 해서 테세우스는 자신의 죗값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여장을 한 채 아테네의 국경을 넘게 되었다.

여장한 테세우스가 아폴론 신전 옆을 지날 때였다. 가옥의 지붕을 수리하던 아테네 사람 한 명이 그를 보고 여인에게 희롱하듯이 하대하며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던 테세우스는 아무 말 없이 근처에 정차에 있던 우마차 쪽으로 가더니, 묶여 있는 황소 두 마리를 멍에에서 풀어, 차례로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황소는 지붕보다 더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즉사하고 말았다. 그 광경에 화들짝 놀란 아테네 사람도 지붕에서 떨어졌다. 그 후부터 테세우스를 희롱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여기는 아테네의 궁전. 이제는 늙어 기력이 약해진 아이게우스 왕은 이 영웅이 자신의 씨에서 자란 아들인 줄은 모른 채 길손을 대우하는 예로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왕실에는 테세우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아이게우스의 후처 중 한 명인 악녀 메데이아(Medeia)’였다.

메데이아는 당대를 호령한 또 다른 영웅이었던 이올코스의 이아손(Iason)’과 끔찍하게 헤어진 뒤, 도망쳐 나와 아이게우스의 아내가 되어있었던 차였다. 왕비 메데이아는 자신이 낳은 아들 메도스가 왕좌를 물려받게 하려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테세우스를 해치울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테세우스가 선동을 일삼는 왕의 동생 팔라스와 한통속이라고 이미 총기가 많이 사라진 남편 아이게우스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테세우스를 시켜 당시 아티카 동쪽의 마라톤 지방을 소란하게 하던 괴물 황소를 잡아 오게 하라고 왕을 부추켰다. 이때 메데이아는 자신의 장기인 마법을 사용했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간절하게 고대했던 테세우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 또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추가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괴물 황소와 대결해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지만, 테세우스는 오래지 않아 이 괴물을 산 채로 잡아 와 성대한 제의의 희생 제물로 바쳤다.

악녀 메데이아는 첫 번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자,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테세우스 제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테세우스의 공훈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연회석상에서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 왕에게 독이 든 포도주잔을 건네주며 무서운 황소를 무찌른 이 용감한 용사에게 전해주라고 말했다.

저 사람은 당신에게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될 거예요. 팔라스 일가와 손잡고 당신을 해하려 들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왕께서는 걱정거리를 미리 없애셔야 해요. 자요, 여기 이 포도주를 상으로 내리시기만 하세요.”

그 말을 옳게 여긴 아이게우스 왕이 가득 찬 포도주잔을 들어 올리며 뜻을 전하자, 테세우스가 왕이 하사하는 포도주잔을 건네받기 위해 아버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메데이아의 사악한 의도가 실현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독배를 받아들고 막 마시려던 순간, 아이게우스는 이 영웅이 차고 있는 칼이 바로 예전에 자신이 징표로 트로이젠 땅 아이트라 공주에게 맡겨놓은 칼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영웅이 신고 있는 가죽신 쪽으로 눈을 돌렸다. 비록 세월의 때가 묻어 낡고 거칠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만난 아이게우스 왕은 가눌 수 없는 기쁨에 두 팔로 테세우스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두 팔에는 딱 그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다. 이 바람에 독배는 테세우스의 손에서 떨어져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동시에 메데이아의 사악한 계획도 흩어진 독 포도주처럼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부자지간의 상봉은 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고, 마녀 메데이아의 음모는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녀는 아들 메데스와 함께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동쪽에 있는 아시아 땅으로 쫓겨갔다. 후일 메데이아는 그곳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이 나라가 바로 구약성서메데라고 부르는 뒷날의 페르시아이다.

테세우스는 숙부 팔라스와 그의 아들들까지 축출하고, 아이게우스 왕의 적통으로서 모든 아테네 국민 앞에 아테네 왕자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다. 바야흐로 아테네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테세우스에게 있어 지금까지의 모험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위험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다가오는 위험은 단순히 도적을 물리치고 짐승을 퇴치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치러야 할 진짜 시험이 남아 있었다.

 

4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 테세우스가 태어나기 전으로 잠시 다녀오자. 한 세대 앞, 당시 그리스 일대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바다 건너 크레타의 미노스(Minos)’ 왕에게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자신의 아내 파시파에가 간통으로 낳은 반은 소이고 반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가 바로 골치를 아프게 하는 화근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이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가 지어 준 미궁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강대국의 왕으로서 인근 아테네에 명령을 내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쓸 제물을 보내라고 했다. 이미 미노스 왕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던 약소국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아테네는 해마다 일곱 명의 여자와 일곱 명의 남자를 크레타로 보내야 했다. 아테네 왕은 때가 되면 아테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릇에 담아 놓고, 제비뽑기로 열네 명의 희생자를 뽑았다. 제비뽑기 철이 돌아오면 아테네 전역은 비통함으로 가득 찼다. 몇 차례 그렇게 아테네 사람들이 제물로 크레타로 보내지고 있을 때, 아이게우스 왕과 편모슬하에서 반듯하게 장성한 테세우스 부자가 우여곡절 끝에 상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자간의 이루지 못한 정을 나누던 어느 날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날은 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한가롭게 산책을 하던 테세우스는 바닷가에서 슬피 울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과 모래 위에 정박해 있는 검은 색 돛을 단 배를 발견했다. 상가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된 테세우스는 분노했고 한탄했다. 그는 스스로 희생자 무리에 끼어 크레타로 건너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노스의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결심했다.

어떻게 해서 되찾은 아들인데 다시 사지로 몰아넣을 수 없었던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아들을 말렸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불같은 테세우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하물며 자기 나라와 자기 백성에 관한 것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 인들 구출에 성공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어 달고 돌아오겠다는 굳은 약속과 함께 기어이 크레타로 향하는 배 위에 올랐다. 떠나는 배 위에는 가려 뽑은 열세 명의 젊은 남녀를 뒤에 두고 테세우스가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동 몽둥이를 움켜쥔 그의 손과 팔뚝은 굳은 각오를 웅변하듯 푸르스름한 힘줄이 또렷하게 올라와 있었다.

 

5

미노스 왕은 어김없이 이번에도 아테네의 희생양들이 도착하자 직접 크레타 해안으로 마중 나갔다. 아테네의 왕자까지 왔다니 나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미노스 왕은 틀림없이 오래전 아테네에서 열다섯 나이에 비명횡사했던 아들, 안드로게오스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왕의 뒤에는 그의 아름다운 딸 아리아드네가 다소곳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미노스 왕과 달리 테세우스를 알아본 그녀의 눈빛은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의 심장도 방망이질하듯 뛰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다.

미노스는 테세우스를 포함한 열네 명의 희생자 무리를 손재간으로는 당대 최고인 다이달로스가 만들어 준 크노소스 궁전에 가두었다. 정해진 때가 되면 그들은 미궁으로 던져진 후 괴물의 밥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그곳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질 날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이 안에 갇혀 있는 동안 테세우스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미노스 왕의 통치술을 곁눈질로 배웠고, 가장 앞선 크레타 문명을 몸소 체험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미노스의 아름다운 딸 아리아드네를 알게 되었다.

적국 아테네의 왕자를 사랑하게 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어찌어찌하여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 해도 어떤 수로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끝없이 헤매다가 결국에는 지쳐 쓰러져 굶어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안될 일이었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지게 될 어느 날 이른 저녁, 감옥 주변을 서성이는 수줍은 그림자가 있었다. 테세우스에 대한 연정이 점점 커져 이제 스스로 그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살릴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사랑하는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므로 그 전에 행동해야 했다. 아리아드네는 어두워지기 전 시종의 도움을 받아 횃불과 청동 몽둥이, 그리고 털실 한 뭉치를 가지고 감옥으로 찾아가 테세우스에게 건네주었다.

이 횃불로 길을 밝히세요. 그리고 이 털실 한쪽 끝을 미로 입구 기둥에 묶고 돌아올 때 이정표로 삼으세요. 소저는 그대를 위해 아버지를 배신한 몸, 떠나실 때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저의 바람은 그것뿐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돌아갔고 드디어 시간이 되었는지 테세우스와 열세 명의 젊은이들은 험악한 간수들에게 이끌려 미궁의 입구에 다다랐다. 간수들은 아리아드네 공주의 부탁으로 테세우스의 손에 들린 청동 몽둥이를 보고도 눈감아 주었다. 간수들은 그깟 몽둥이쯤으로 생각했고, 미노타우로스에겐 무용지물이라고 여겼으며, 공주로부터 받아 챙긴 금화의 대가치곤 하찮은 배려라고 생각했다. 간수들은 털실의 존재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간수들은 테세우스 일행을 입구 너머로 밀어 넣고 철커덩청동 문을 닫고 사라졌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일러주는 대로 털실 한쪽 끝을 기둥에 묶고 털뭉치를 술술 풀어가며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꼬불꼬불 어디가 어딘지 작은 횃불 하나로는 분간하기 힘들었다. 오늘따라 별도 달도 빛을 내지 않았다. 그나마 군데군데 벽에 붙은 촛대 받침에서 타고 있는 불빛이 있어 다행이었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테세우스는 희미하게 짐승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괴성은 갑자기 가깝게 들리다가도 다시 멀어지고 또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크게 들리기를 반복했다. 가까이 들릴 때는 거친 숨소리마저 느껴졌다. 뛰어오는 소리와 벽을 긁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테세우스는 두 손으로 청동 몽둥이를 부여잡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발길에 부딪히는 유골들, 뚫린 천장을 통해서 들려오는 밤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복잡한 미로를 좌측으로 우측으로 헤매길 계속하는데 갑자기 고막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행렬 뒤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난 것이다.

재빨리 뒤쪽으로 달려간 테세우스는 드디어 괴물과 맞닥뜨렸음을 알았다. 뒤이은 젊은이 하나가 소리 난 쪽으로 횃불을 드리우자, 미노타우로스가 첫 번째 희생자의 다리 한쪽을 마저 입에 넣고 있었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더니 들고 있던 횃불과 벽에 붙어 있던 불들을 꺼뜨려 버렸다. 갑작스러운 암흑,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쪽으로 냅다 달려나갔다. 상대도 그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뛰어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때다 싶어 청동 몽둥이를 뒤로 제쳤다가 힘차게 휘둘렀다. 타격감이 테세우스의 손에 진동을 주었다고 생각한 찰나, 아테네 사람들은 소리와 함께 털썩하고 주저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중에 한 명이 어디서 횃대에 불을 붙여 가져왔다. 그 순간 테세우스가 왼손으로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몽둥이를 들어 올려 짐승의 대가리를 강타했다. 괴물은 죽었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테세우스를 연호하며 진정한 영웅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구름에 가려진 셀레나가 어둠을 밝혔다. 테세우스는 꾸물거릴 겨를이 없었다. 테세우스는 일행들과 함께 거의 풀리다 싶은 실뭉치를 들고 늘어진 실을 따라 왔던 길을 되짚어 서둘러 미로를 빠져나갔다. 미로의 입구에는 약속대로 아리아드네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오늘날 우리가 복잡한 상황을 헤쳐나가거나 난해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흔히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라고 부르게 된 유래이다.

실뭉치를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 다이달로스였는지 아니면 아리아드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맞을 듯싶다. 비록 다이달로스가 아테네에서 죄를 짓고 미노스 왕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지만, 고국에서 온 왕자를 흉측한 괴물의 한 끼 식사 거리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설혹 괴물을 죽인다 해도 자신이 지은 미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테세우스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가볍지 않게 되는 것이고,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한 반역자로 영원토록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이후 미노스 왕이 취한 행동을 보면 그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테세우스는 미궁에서 나오자마자 야밤을 틈타 아리아드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과 함께 크레타를 빠져나와 아테네로 향했다. 아리아드네가 미리 손을 써 탈출선을 준비해 두었고, 미노스 왕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테세우스가 탈출선에 오르기 전 일행들과 함께 크레타의 모든 함선의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신출귀몰할 기습작전 탓에 바다의 지배자 미노스는 달아나는 테세우스 일행을 눈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생부일지도 모를 막강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이 젊은 영웅을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즐겨 이야기했다.

이후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이 될 테세우스가 이룬 이 바다에서의 성공담이야말로 B.C. 6세기에 아테네가 농업국에서 해양국으로 발돋움하여, 오래전부터 크레타의 미노스가 장악해 왔던 에게해의 패권을 탈취하는 데 자극제가 되었다.

 

6

테세우스 일행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휴식을 위해 낙소스 섬에 들렀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그곳에 아리아드네를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이를 두고 혹자는 테세우스가 이제 쓸모없어진 그녀를 버린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아리아드네를 보고 아내로 삼으려고 디오니소스 신이 개입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비록 그녀의 도움으로 괴물을 죽이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감사할 일일 뿐 사랑으로 보상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법이 아니다. 하물며, 천륜과 인륜까지 저버린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은 위험할 수도 있다. 테세우스는 그 점을 우려했던 것일 게다.

테세우스 일행을 태운 배는 며칠을 더 항해해 해가 떠오를 때쯤 아테네의 항구에 닿았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아니면 낙소스(Naxos)섬에 아리아드네를 떼어놓고 온 것에 대한 죗값이었을까, 그만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개선장군과 같은 자신의 귀향에 모두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이 슬피 우는 것에 테세우스는 불길함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이 늘 그러하듯이 테세우스의 예감도 적중하고 말았다.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이 배의 검은 돛을 보고, 자신의 사연 많은 아들이 죽었음을 확신하고 실의에 빠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 일로 해서 테세우스는 생각보다 빨리 아테네의 왕이 되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기려 아테네 주변의 바다를 에게해라고 이름 지었다. 에게해는 아이게우스의 바다라는 뜻이다.

아테네 국민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나먼 크레타에서 이루어낸 테세우스의 영웅적 업적에 열광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왕이 된 테세우스는 민중들로부터 얻은 막강한 권력과 신망을 이용하여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아티카 지방의 많은 도시를 흡수하여 아테네를 그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아테네가 후에 고대의 가장 중요한 도시국가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따르면 테세우스는, 혼자서 통치하는 군주제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통치자였다.

 

7

테세우스와 익시온(Ixion)’의 아들 페이리토오스의 예사롭지 않은 우정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페이리토오스(Peiritoos)’걸어서 다니는 자라는 뜻이다. 이들의 우정은 거의 모든 브로맨스의 효시로 어린 애들처럼 싸우면서 싹텄다.

한 번은 페이리토오스가 마라톤 평원을 침범하여 아테나 왕 테세우스 소유로 되어있는 소 떼를 끌고 가려 했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테세우스의 영웅적 업적에 대하여 귀가 따가울 만큼 들어왔던 타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일부러 도발했더랬다. 테세우스 왕은 자기의 재물을 지켜야 했으므로 이 약탈자를 퇴치하러 출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갈 것이 하나 있다. ‘소 떼 훔쳐 가기는 당시 명문가의 젊은이들이 즐겨 했던 일종의 레저 활동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아예 명칭을 소 떼 몰고 가기라고 해야 할까, 이는 마치 숲속에서 들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나쁘지 않게 보았던 것과 비슷하다.

들판의 소 떼를 성공적으로 몰고 자신들의 영토에 부려 놓으면 도적질했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었다. 원래의 소 떼 주인이 그런 약탈(?) 행위를 미리 막거나, 나중에 되찾아 오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놀이에도 항상 정도가 있는 법, 그게 지나치면 간혹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시대에 이런 짓을 했다간 대번 절도죄를 입건되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잣대로 보면 신화 읽기가 고달프게 되니, 이해하고 넘어가자.

여기는 다시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가 대치하고 있는 들판. 테세우스가 평원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페이리토오스를 발견하고 추격에 나섰다. 페이리토오스는 자신이 유리한 지형까지 테세우스를 유인했다고 생각한 순간, 말머리를 돌려 테세우스와 합을 겨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잠시 뒤로 물린 두 영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매료당했다.

지금까지 적으로 마주했던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있었던 전투와는 다른 공기 냄새를 맡았다. 마주한 지 오래지 않아 말로만 듣던 위풍당당한 테세우스의 모습에 경탄한 페이리토오스는 화평을 제안하는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대왕의 물건에 손댄 이 사람의 죗값을 마땅히 물어 주시오. 내가 무엇으로 이를 배상하면 좋겠소?”

그러자 아직 영웅의 면모가 남아 있던 테세우스 왕도 화끈하게 화답했다.

그대의 우정이면 충분하다.”

걸어 다니는 자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우정을 서약했다. 맞잡은 손과 마주치는 눈빛은 이미 십년지기 친구 같았다. 그 후 두 사람은 그때의 서약을 중히 여겼고 이들의 우정은 오래 계속되어 많은 모험을 같이 겪게 된다.

그날 이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페이리토오스의 결혼식 날이었다. 테세우스도 친구의 청첩을 받고 이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 그런데 잔치 도중 켄타우로스(Kentauros)’ 족과 라피타이 족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켄타우로스 족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페이리토오스의 신부를 겁탈하고 다른 여자들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때 테세우스는 친구를 도와 수많은 켄타우로스 족을 해치웠다.

 

8

테세우스가 한번은 테베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테세우스는 평소 흠모하던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를 만났다. 사실은 여섯 살 때 한번 본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변에서 이야기해준 기억이지 테세우스 자신은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하여 아테네 왕의 자격으로 만난 것이니, 진짜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여러 가지로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 그날도 포도주를 많이 마시기는 했으나 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날의 일은 헤라클레스에 대한 노여움이 극에 달한 어머니 신 헤라(Hera)’의 권능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여신의 뜻대로 미쳐 발광한 나머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는 씻지 못할 대죄를 저질렀다. , 테세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만난 것은 자기 가족들을 죽인 헤라클레스가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바로 직후였다. 헤라클레스가 피 묻은 손을 들여다보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때 테세우스가 사건 현장으로 기척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대강을 짐작한 테세우스가 다짜고짜 헤라클레스의 그 피 묻은 손을 덥석 붙잡았다. 테세우스의 손에 그 피가 묻은 것은 물론이다. 헤라클레스는 눈을 부라리며 테세우스를 나무랐다.

이 피는 내가 죽인 내 아내와 내 자식의 피다. 이 피를 그대 손에 묻히면 내가 받을 죗값을 나누어 받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가?”

헤라클레스의 말에 테세우스는 그의 손을 놓지 않고, 더 힘주어 잡으며 대꾸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기꺼이 이 죗값을 나누어 치르겠습니다. 그대와 나의 믿음이면 능히 이 죄를 닦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헤라클레스의 손을 이끌고 죄 닦을 방법을 물으러 델포이 신전이 있는 파르나소스산으로 향했다. 테세우스는 아폴론 신이 맡긴 뜻을 물어 헤라클레스의 죄를 씻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신탁을 받았다.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과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일로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으니 테세우스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나중에 그에 합당한 보상으로 되돌려 준다.

 

9

테세우스는 앞에서 본 것처럼 헤라클레스의 죄 많은 손을 잡아 그의 죗값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약속을 실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헤라클레스의 아홉 번째 과업에 동행한 것이다. 아홉 번째 과업이란 적대적인 바다, 흑해 연안의 호전적인 여인족, 아마조네스의 여왕 히폴리테(Hippolyta)’의 허리띠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아마조네스(Amazones)’는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없다는 뜻의 유방을 뜻하는 마조스가 결합한 것으로, 그녀들이 활을 쏘는데 거추장스러웠던 오른쪽 유방을 제거한 데서 유래한다. 그리하여 젖가슴이 없는 종족이라는 뜻의 아마조네스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아마조네스는 오로지 종족 보존을 위해서만 이방의 남자들과 일시적으로 관계를 가졌다. 태어난 남자아이들은 내다 버리거나 불구로 만들어 노예로 부려먹었고 여자아이들만 거두어 길렀던 잔혹한 종족이었다. 이들은 이렇게 모계사회를 이루면서 주변국들과 계속 갈등 관계를 유지하였고, 히폴리테 여왕 시대에 이르러 그들의 영향력을 프리기아 지방으로 확대하였다.

이즈음에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가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손에 넣기 위해 아마존 원정길에 나선 것이었다. 결국, 헤라클레스는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손에 쥐었고, 그 결과 히폴리테의 아마조네스와 테세우스의 아테네는 전면전에 가까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테세우스는 아마존족을 격퇴하고 이 아마존 여왕을 아테네로 데려오는 데에 마침내 성공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포로로 잡혀 왔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자발적으로 왔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마존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들은 포로로 잡혀간 여왕을 구출하겠다고 아테네로 쳐들어와 이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오랜 전투 끝에 결국 아테네가 이들을 무찔렀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서로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후자의 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 싶다. 왜냐하면, 테세우스 왕과 히폴리테 여왕 사이에 아들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의 증거인 아들 히폴리투스와 평화조약에도 불구하고 히폴리테는 테세우스에게 버림받는다. 그리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아마존족의 이인자 펜테실레이아(Penthe sileia)’가 그녀를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10

테세우스는 히폴리테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증의 섬나라 크레타를 치고 그 나라 왕의 누이 파이드라(Phaedra)’를 데려와 두 번째 아내로 삼았다. 당시 크레타는 미노스 왕의 사후, 그의 아들 데우칼리온(Deucalion)’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렇다,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또 다른 딸이자, 자신이 이용하고 버렸던 아리아드네와 자매간인 파이드라를 왕비로 맞은 것이다. 부적절한 정욕의 대명사 파시파에를 어머니로 둔 여인 말이다.

파이드라는 아름답기도 했거니와 개성과 자존심이 몹시 강한 여자였다. 다시 반복되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이드라는 의붓아들 히폴리투스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상사병에 걸려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가자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전처소생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여왕을 딱하게 생각한 몸종이 주제넘게도 조심스럽게 말씀을 건넸다.

자존심도 중요하시겠지만, 목숨이 걸린 문제이니 한번 마음만이라도 전해보시지 그러세요.”

파이드라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자존심을 꺾고 애절한 마음을 담은 사랑의 편지를 히폴리투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는 이성이든 동성이든 연애감정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자신의 몸을 수련하고 지식을 갈구하기에도 바빴던 청년이었다. 하물며 의붓어머니라니! 의붓아들의 반응은 냉담하지 못해 야멸찼다. 청년은 다음과 같은 송곳 같은 말로 계모의 접근을 거부했다.

더러운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하듯이, 이 더러운 글은 보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파이드라의 연서를 들고 갔던 몸종은 돌아와서 히폴리투스가 한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주인에게 고했다.

파이드라의 길잃은 사랑은 증오로 변했다. 그녀는 남편 테세우스 왕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잠옷을 갈가리 찢은 다음 알몸상태로 자결했다. 그 편지에는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는 거짓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아들, 히폴리투스를 벌하소서.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히폴리투스가 제 어미와 다름없는 저를 능멸하고 희롱했습니다. 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참을 수 없고, 저는 히폴리투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지붕 아래 살 수가 없답니다. 부디 먼저 가는 저를 용서하소서!”

이 편지를 읽고 분노를 참지 못한 테세우스는 아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대신 복수해 달라고 빌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적잖이 불던 어느 날, 패륜아로 낙인찍힌 히폴리투스가 이륜차를 몰고 해변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히폴리투스의 얼굴빛만큼이나 스산하게 어두운 정오 무렵이었다. 바닷바람이 거세지더니 잔잔했던 바다에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귀청을 파고드는 굉음과 함께 파도를 헤치고 거대한 바다 괴물이 뛰쳐나와 달리던 말을 기겁하게 했다. 깜짝 놀란 백마가 발광하며 날뛰자 고삐가 올리브 가지에 걸리면서 이륜차는 산산조각이 났고, 히폴리투스는 고삐에 온몸이 감긴 채 큰길로 나뒹굴었다. 억울한 히폴리투스는 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때 히폴리투스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에 불과했다. 이렇게 비참한 운명의 충격은, 종종 당사자들이 아닌 다음 세대의 자손들을 향해 거대한 해일처럼 닥치곤 한다.

당시 히폴리투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 억울한 죽음을 가엽게 여겼는지 아르테미스는 명의 아스클레피오스를 시켜 히폴리투스를 되살렸다. 아르테미스는 이 히폴리투스를 의심 많은 아버지의 권력에서 해방시키고자 이탈리아로 데려가 에게리아라고 하는 요정에게 보호를 맡겼다.

암튼 이 의붓아들에게 사랑을 느낀 파이드라 이야기에서 심리학 용어가 하나 생겼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랑을 느껴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일컫는 파이드라 콤플렉스(Phaedra Complex)’라는 말,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1

떠돌이 영웅 페이리토오스가 친구를 찾아 아테네로 온 것은 테세우스가 후처 파이드라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페이리토오스는 왕비와 아들을 잃고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테세우스 왕을 위로한답시고 엉뚱하다 못해 황당한 제안을 했다.

제우스 신의 딸이 천하의 미인이라고 합니다. 쌍둥이들의 누이 헬레네(Helene)’ 말입니다. 이 처녀를 데려다 부인으로 삼으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헬레네? 그녀는 신화의 시대를 통틀어 그리스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여인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인정한 천하일색이다. 그녀의 미모 때문에 저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으뜸 신 제우스의 딸이면서 쌍둥이 영웅인 카스토르(Castor)’폴리데우케스(Polydeuces)’의 동생이었다. 함부로 추근댔다가는 뼈도 못 추릴 상황이 전개될 것이 뻔한 제안을 페이리토오스가 위로랍시고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테세우스의 태도였다. 친구의 제안에 덧붙여 페이리토오스에게도 제우스 신의 딸을 신부로 맞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터무니 없는 제안에 그가 맞장구를 치다니, 이것도 영웅의 특권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정통한 이윤기 선생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Ⅰ」 테세우스 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영웅에게는 상승과 하강의 주기가 있다. 영웅도 때가 되면 쓰러진다. 외부의 적에 의해 쓰러지기도 하고 내부에서 싹트는 오만에 휘둘리다 쓰러지기도 한다. 오만이 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오만했고 부주의했다. 부인과 아들을 잃은 상실감이 그것들의 정도를 더했을 수도 있다. 언감생심 제우스의 딸을 납치할 마음을 먹다니, 예로부터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했다지만 이 오만은 백 퍼센트 테세우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오만이었다.

제우스의 딸을 아내로 얻고 싶다는 이 두 사람의 공통의 똘끼가 이 오만한 대화를 말장난으로 끝내지 않고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는 헬레네를 붙잡아 테게아 땅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당시 테세우스는 쉰 살 중늙은이인데 견주어 헬레네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테세우스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너무 어린 헬레네를 아테네로 데려가는 대신 친구에게 잠시 맡겨두고 헬레네의 나이가 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헬레네가 납치되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오빠들인 스파르타의 범 같은 쌍둥이 장수,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군사를 이끌고 동생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그리스 반도를 샅샅이 뒤져 헬레네를 구출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헬레네 있는 곳을 쌍둥이 장수에게 귀띔해 준 사람은 아테네 출신 아카데모스였다. 쌍둥이 장수들은 아카데모스의 공을 높이 사 아테네 근방 올리브 숲이 울창한 그의 고향을 아카데메이아(Academeia)’로 명명하고, 아테네를 공격할 때 이 마을만은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아카데메이아는 아카데모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후일 플라톤이 여기에다 학교를 세우고 철학을 강의하면서부터 이 땅은 아주 유명해졌다.

그러나 오만한 두 납치범은 헬레네가 오라비들 손에 이끌려 스파르타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페이리토오스는 테세우스에게 이번에는 약속대로 자기의 신붓감을 찾으러 가자고 졸랐다. 페이리토오스는 딱하게도 암흑의 나라 하데스(Hades)’의 왕비 페르세포네(Persephone)’를 골랐다. 페이리토오스, 아무래도 잠시 정신 줄이 외출했었던 게 틀림없다.

테세우스는 위험한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통이 큰 친구를 위해 함께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으로 물어물어 내려갔다. 곧바로 두 사람은 저승에서 하데스 손에 잡혔다. 하데스는 살아서 땅밑에 내려온 침입자들로부터 내려온 연유를 듣자 그만 자신도 모르게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지하 세계의 으뜸 신, 하데스는 살다 살다 이렇게 어이없는 일은 처음이었다. 암흑의 여왕 페르세포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데스는 두말하지 않고 침입자들에게 그에 맞는 합당한 벌을 내렸다. 죽음의 궁전 앞 레테의 바위에 앉아 반성 좀 해보라고 한 것이었다. 레테의 바위는 망각의 의자였다.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 저승으로 들어오고도 한이 많아 이승의 일을 잊지 못하는 망령을 위해 마련된 의자였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의 이 의자에 앉자마자 땅 위의 일을 까맣게 잊었다. 한낱 인간인 주제에 죽지도 않았는데 저승 세계에 얼쩡거리더니 꼴이 아주 우습게 됐다.

이때 두 짝패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열두 가지 과업을 수행 중인 헤라클레스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러 하데스의 나라에 내려와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마지막 임무는 머리 셋 달린 저승의 파수꾼, ‘케르베로스(Kerberos)’를 지상으로 데려가는 과업이었다. 그는 볼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망각의 의자에 앉아 죗값을 치르고 있는 테세우스를 발견했다.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를 보자마자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아내와 자식들 피가 묻은 내 손을 잡아 그 죄를 나누어지고자 했던 테세우스 아닌가? 그대는 필시 그 죗값을 치르느라고 여기 이 망각의 의자에 붙잡혀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내 손을 잡거라. 내가 그대의 죄를 함께 닦을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망각의 의자에 앉아 있는 테세우스가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스가 말하는 말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멍하니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망각의 의자에 한 번 앉으면 그 엉덩이를 뗄 수 없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한번 앉으면 영원히 앉아 있어야 하는 망각의 의자에서 무작정 테세우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테세우스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데스의 권능은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한차례 실패한 헤라클레스가 소리를 내며 다시 힘을 썼다. 그러자 테세우스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는데, 가만히 보니 엉덩이 살은 고스란히 바위에 붙어 있었다. 이때부터 테세우스는, 뾰족 엉덩이로 세상을 나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온 그리스 사람들이 아티카(아테네) 사람들을 뾰족 궁둥이들(Lean bottoms)’이라고 놀려먹는 것도 그들이 대부분 테세우스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를 내려놓은 헤라클레스는 이번에는 페이리토오스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시칠리아 밑에 묻혀 있던 거인 엔켈라두스(Enceladus)’*가 돌아눕는 바람에 대지와 함께 저승 땅이 크게 흔들렸다. 이 바람에 페이리토오스의 겨드랑이에 들어가 있던 헤라클레스의 두 손이 쑥 빠지고 말았다. 저승에서는 한번 놓친 손은 다시 잡을 수 없는 법, 헤라클레스는 하는 수 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페이리토오스의 초점 없는 표정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헤라클레스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를 어깨에 둘러멘 채 테세우스의 손을 잡고 황급히 스틱스강 쪽으로 내달아, 이윽고 저승문을 벗어났다. 그때 테세우스 왕은 세상의 빛이 이토록 밝고 좋은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12

테세우스가 페이리토오스와 함께 지하 세계에서 허송세월하던 사이, 헬레네의 오빠 폴리데우케스와 카스토르는 스파르타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진군했다. 무주공산인 아테네를 함락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었다. 두 쌍둥이 장수는 아테네에 새로운 왕을 세우고, 테세우스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얼마지 않아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테세우스가 아테네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의 영광은 한 줌 기억으로만 남은 뒤였다.

새로 아테네의 왕이 된 메네스테우스는 헬레네를 납치하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테세우스를 비판하며, 아테네 시민들이 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했다. 아테네에 테세우스가 설 자리가 없었다.

테세우스의 인생은 숱한 모험과 승리의 연속이었지만 종말은 이토록 슬펐다. 테세우스는 마침내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아테네에서 쫓겨났다. 하는 수 없이 테세우스는 파이드라의 오빠 데우칼리온이 다스리던 애증의 섬 크레타를 향해 출발했다. 데우칼리온이 그의 보호를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탄 배가 길을 벗어나는 바람에 스키로스섬의 왕 리코메데스의 궁전에 몸을 의탁해야 했다. 리코메데스 왕은 처음에는 이제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늙은 영웅 테세우스를 환대했으나 결국은 등을 돌리고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비겁하게도 늙고 힘없는 테세우스를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이렇게 위대한 왕 테세우스는 쓸쓸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 젊은이들을 태우고 돌아왔던 탈출선은 잘 보관하여 기념물로 삼았으면서도, 테세우스에 대해서는 좀처럼 과거의 존경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테네 군대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맞붙어 싸울 때 아테네 병사들은 하나같이 그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테세우스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테네 군대가 밀릴 때 테세우스가 자신들과 함께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는 환영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신기한 목격담은 아테네 사람 전체에게 퍼져 이제라도 자신들의 영웅에 대하여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아테네 장군 키몬(Kimon)’은 스키로스섬으로 건너가 테세우스의 유해가 묻힌 곳을 수소문하였다. 그는 어느 날 하늘을 선회하는 독수리 한 마리가 갑자기 어떤 언덕에 앉더니 부리와 발톱으로 쪼고 할퀴는 것을 보았다. 그 장소를 파보았더니 과연 인골이 발견되었고 기몬 장군은 그 유해를 테세우스의 것이라고 여겨 수습해서 아테네 땅으로 이장했다. 이 유해는 영웅 테세우스를 위해 세운 테세이온이라는 신전에 안치되었다. 그때부터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를 신처럼 섬겼다.

 

13

테세우스는 반은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여러 종족을 통합하고 아테네를 수도로 삼아 아티카 땅을 단일 국가로 만들었다. 이 대사업을 기념하여 그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위해 판 아테네(범 아테네 축제)’를 창시했다. 이 축제가 그리스의 다른 경기와 다른 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이 축제에는 아테네 사람들만 참가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엄숙한 행진이 축제의 주류를 이룬다는 점이다. 이 행진을 통해 페플론’, 곧 아테나의 성의(聖衣)파르테논 신전으로 운반되어 이 여신상 앞에 봉헌되는 것이다.

신화학자들은 테세우스가 반신반인이었던 헤라클레스와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본다. 즉 아테네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인 테세우스를 헤라클레스라는 거울에 반사 시켜 아테네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의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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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 원정대장, 이아손

이노, 황금 모피, 아르고 원정대, 피네우스, 메데이아...

 

1

옛날이야기이다.

테살리아지역 보이오티아에 아타마스(Athamas)’네펠레(Nephele)’라고 하는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아들, 딸 남매가 있었다. 그러나 왕비 네펠레는 남매만 남겨놓고 일찍 죽고 말았다. 아타마스 왕은 오래지 않아 이노(Ino)’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여러분은 테베를 세운 카드모스(Cadmos)’와 조화의 여신 하르모니아(Harmonia)’의 딸 이노를 기억할 것이다. 맞다, 바로 그 이노이다.

아타마스 왕은 구름의 요정이었던 전처 네펠레로부터 얻은 헬라프릭소스남매를 금쪽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이노에게는 그 어린 남매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왕비 이노는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 프릭소스와 헬레를 없애기 위해 무시무시한 계략을 꾸몄다. 그들 남매가 후일에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노 왕비는 왕궁의 시녀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어 여염집 아낙들에게 보냈다. 명을 받은 시녀들은 여자들에게 각자의 집안에 저장해 놓은 밀알 씨앗을 남편들 몰래 달달 볶아 놓으라고 시켰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농부들은 싹이 돋아날 수 없는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으니, 아무리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아무리 신들에게 경건한 기도를 드려도 볶은 씨앗에서 싹이 날 리가 없었다. 몇 해 동안 계속된 흉작이 이어지자 급기야 나라 안의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우환의 까닭을 알 수 없었던 아타마스 왕은 답답한 마음으로 언제나 지침이 있는 그곳, 델포이 신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노 왕비가 이를 미리 알고 선수를 쳤다. 사람을 시켜 재물욕이 많은 여사제 하나를 매수해서 왕을 속일 작정이었다.

델포이 신전에 도착한 황이 절차대로 신의 뜻을 묻자, 여사제는 영매 퓌티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이 나라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 왕자와 공주 탓이라고 거짓말로 고했다.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야 할 사랑을 네 피붙이에게만 주고 있으니 어느 신이 좋아하겠는가? 쯧쯧.”

그러면서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 제사를 올려야만 신들이 응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청천벽력같은 말을 떠안고 돌아온 아타마스 왕은 의아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신을 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납득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 이 소식이 나라 곳곳에 퍼지자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도 모두 왕자와 공주를 탓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폭동으로 번질 조짐이 보이자, 아타마스 왕은 눈물을 머금고 왕으로서의 책무를 우선하여 자식들을 희생시키기로 했다.

정해진 운명의 제사 날짜가 가까워지자 제단을 쌓는다, 술을 빚는다왕궁 안팎이 소란스러워졌고,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남매도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로 알게 됐다. 자신들의 짧은 운명을 원망하듯 왕자와 공주는 돌아가신 어머니 네펠레를 부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매의 어머니 네펠레는 죽어서도, 억울하게 죽게 된 자식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제우스(Zeus)’ 신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때마침 그 순간 하늘의 흰 구름 몇 점이 하나로 모이더니 예술가가 작품을 빚듯 모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곧 구름은 금빛을 발하면서 날개 달린 황금빛 양이 되어 남매 앞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제우스 신이 구름의 요정 네펠레의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네펠레는 황금양의 등위로 아들과 딸이 차례대로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숨과 함께 위대한 제우스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금양은 남매를 등에 태운 채 하늘로 날아올라 진로를 동쪽으로 잡았다. 금양은 남매의 눈높이로 구름 무리가 지나쳐 갈 정도의 고도로 날아 어느덧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가로놓인 해협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태어나 처음 높은 하늘에서 아찔한 아래쪽 풍경을 바라보던 헬레가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헬라가 엉겁결에 한 손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대는 순간 그녀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오빠 프릭소스는 자신도 무섭고 정신이 없었던 터라 뒤쪽에 있는 누이가 떨어진 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헬레가 황금 양털을 부여잡은 손으로 오빠의 허리를 둘러쳤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무튼 그 뒤로 이 바다는 헬레의 바다라는 뜻의 헬레스폰토스(Hellespontos)’라고 불렸다.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금양은 계속해서 하늘을 날아 드디어 흑해 동해안에 있던 겨울왕국 콜키스라는 나라에 당도했다. 금양은 여기에다 네펠레의 아들 프릭소스를 내려놓았다. 왕자는 황금양의 등에서 내려온 뒤에야 뒤에 있어야 할 누이가 없는 것을 알고 슬피 울었다.

이때 콜키스는 아이에테스라는 욕심 많은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왕은 변방을 지키던 장군으로부터 프릭소스의 착륙 사실을 보고받고 처음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국의 왕자가 타고 왔다는 황금양을 보자 얼굴빛을 확 바꾸어 왕자를 따뜻하게 대접했다.

프릭소스는 금양을 산 제물로 제우스 신에게 올리고, 금양의 털은 벗겨 아이에테스 왕에게 바치며 자신을 거두어 줄 것을 청했다. 왕은 겉으로라도 사양한다는 말은 일절 없이 마치 빌려주었던 제 물건 돌려받듯이 넙죽 받았다. 왕은 그 황금 모피를 귀하게 여겨 전쟁의 신 아레스(Ares)’에게 봉헌한 숲속에 두고 잠들지 않는 용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국의 왕자 프릭소스를 첫째 딸 칼키오페와 짝을 지어 주고 사위로 삼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제우스 신은 황금양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 양을 별자리로 만들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프릭소스의 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에테스 왕의 사위가 된 후 여러 해가 흘러 장인이 신탁을 받았는데, 내용인즉슨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다소 모골이 송연한 것이었다. 당시 콜키스 나라의 이방인은 프릭소스 뿐이었으므로 왕은 신탁을 피하려고 사위를 살해하고, 자신의 맏딸을 과부로 만들었다. 그때 프릭소스와 칼키오페 공주는 네 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주인공 이아손이 태어나기 약 50년 전, 그가 아르고 원정대를 이끌고 콜키스를 향해 출항하기 약 70년 전의 일이다.

 

2

테살리아에는 아타마스 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올코스라는 또 하나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이 항구도시는 아타마스 왕의 가까운 친척 아이손(Aeson)’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아이손 왕은 젊어서도 영웅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벌써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했다. 게다가 그다지 현명하지도 못해서 나라 살림 꾸려나가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힘이 없고 말도 앞뒤가 정연하지 못하니 신하들에게도 영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 신하들이 왕 생각하기가 지나가는 똥개보다 하등 나은 것이 없었다. 왕은 왕 자리가 하루하루 힘겨웠다.

다행히도 늦둥이 아들 이아손(Iason)’은 자신과 달리 영특한 면이 있어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으나,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젊고 야심 많은 이복동생 펠리아스(Pelias)’는 서서히 야망을 드러내며 중신들의 마음을 얻고 있어 왕과 왕비는 연일 앉은 자리가 편안하지 않았다.

왕은 늙어 힘이 없고, 왕자는 너무 어리고, 야심에 찬 왕의 이복 아우가 호시탐탐 왕좌를 노린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보았던, 우리 역사 단종애사에서 보았던, 좋지 않은 전형적인 그림이다. 폭풍전야가 이럴 것이다. 숨 쉬지 않는 바위와 말없이 서 있는 건물도 긴장감에 숨죽이고 있는 상황,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들고 있는 바로 그런 기분.

마침내 중신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척, 왕의 결단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망설이다가, ‘왕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아우 펠리아스에게 잠정적으로 왕위를 물렸다. 참 지켜지기 어려운, 하나 마나 한 약속이었다. 평화로운 왕위계승을 가장한 실질적인 찬탈이었다. 찬탈은 평화를 가장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피바람을 일으키는 법, 늙은 부왕 부부는 어린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다른 형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한적한 마을로 쫓겨나기 직전에 아이손은 어린 아들 이아손을 아무도 모르게 빼돌렸다. 이올코스에다 두면 아무래도 아우 펠리아스가 해코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손은 자신을 오랫동안 옆에서 보필했던 늙고 충실한 부하의 손에 어린 이아손을 맡기며 당부를 전했다.

이 아이의 운명을 자네 손에 맡기네. 펠리온산으로 가서 현자 케이론(Chiron)’을 만나거든, 사정 이야기를 고하고 이 아이가 스스로 구실 할 수 있을 때까지만 돌봐주십사 부탁드리게나.”

케이론은 허리 위로는 사람이나 허리 아래로는 말인 켄타우로스(Kentauros)’ 족이다. 그는 혹독한 교육법으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스승이었다. 악타이온,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도 케이론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이아손도 펠리온산에 숨어 살면서 현명한 케이론으로부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 활 당기는 법, 검 쓰는 법, 병 고치는 법, 수금 타는 법, 배 짓는 법, 길보는 법, 쟁기질하는 법에다 웅변술까지 배울 수 있는 것은 죄다 배웠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펠리온산 최고의 무림고수로부터 피땀 나는 수련을 받은 소년 이아손은 어느 순간부터 가슴 한쪽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수의 불꽃이었다. 그 칼날은 따로 갈지 않았어도 날카로웠고, 점점 더 예리해졌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3

스스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된 이아손은 스승 케이론에게 하산을 허가해 줄 것을 청했다. 케이론은 늠름한 제자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10년 전, 어린 이아손을 맡을 때의 상황을 알아듣게 다 이야기한 후,

마지막으로 너에게 두 가지만 당부하겠다. 첫째, 한 번 한 약속은 그것이 누구와의 약속이든 반드시 지키도록 해라. 그리고 너를 보살펴 주시는 신들에게 영광 돌리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제자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이아손은 스승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고 숙부에게 왕위를 요구하러 이올코스 땅으로 향했다. 눈빛은 비장하였고 걸음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펠리온산에서 내려와 이올코스로 가려면 자그마한 강을 하나 건너야 했다. 이 강은 평상시에는 물이 많지 않은 강이었음에도 그날은 좀 달랐다.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 부분이 잘 서술되어 있어 몇 글자만 바꾸고 덜어 그대로 옮긴다.

 

<이아손은 물살이 약하고 깊은 곳보다는 물살이 강하더라도 깊지 않은 여울목을 찾으려고 강 아래위를 둘러보았다. 이아손이 가까스로 찾아낸 여울목에는 먼저 온 듯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여울목을 찾고도 물살이 세어 건널 마음을 내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노파는 이아손에게 자신을 강너머로 건너게 해줄 것을 청했다.

이아손은 등에 메고 있던 창 두 자루를 벗겨 한 손에 모아 쥐고 노파 앞으로 다가가 등을 돌려대었다. 노파는 아무 말 없이 이아손의 잔등으로 올라왔다. 이렇게 이아손은 노파를 등에 업고 여울목으로 들어서는데 강은 여울목인데도 깊어서 한 발 들여놓자 무릎이 잠기고 두 발 들여놓자 엉덩이까지 찼다.

할머니는 입고 있던 옷자락이 물에 젖자 두 팔로 이아손의 목을 감고 위로 자꾸만 기어올랐다. 이아손은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건너 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에 가벼웠던 할머니가 자꾸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폭도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이, 마치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놈아! 왜 이리 꾸물거리는 게냐! 옷이 다 젖는다, 다 젖어.”

노파의 갑작스러운 호통 때문이었을까, 그 순간 이아손은 바위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운 돌을 밟았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가죽신 한 짝을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말았다. 가까스로 강 건너편 언덕에 닿은 이아손은 노파를 내려놓은 다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파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괴이하다 여기고 발아래를 바라보는데 가죽신이 한쪽에 맨발이 한족이었다.>

 

이 노파는 결혼과 가정의 수호여신 헤라(Hera)’가 변장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이올코스 왕 펠리아스가 헤라의 신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남편 있는 여인을 강압적으로 취해 배다른 자식을 여럿 낳은 것이 여신의 화를 돋게 했다. 그래서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해 이 못된 가정파괴범을 혼내 줄 영웅으로 이아손을 낙점하고 일종의 시험을 치른 것이었다. 헤라 여신이 보기에 이아손은 완력과 인내도 좋을뿐더러 겸손하고 믿음직스러운 감이 있었다. 이때부터 이아손은 헤라 여신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아손이 이올코스로 들어가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한쪽 신밖에 신지 않은 청년을 보고는 수군거렸다. 가죽신을 한 짝만 신은 청년,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긴 청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이 청년을 보고는 다들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까닭을 알 길 없는 이아손은 저잣거리를 오가는 행인에게 물었다.

어찌 사람들이 저를 보고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지요?”

당신이 가죽신을 한 짝만 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 어때서요? 강을 건너다 잃어버린 것뿐인데요.”

펠리아스 왕이 얼마 전에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신탁이 참 요상했지요. ‘모노산달로스(Monosandalos)가 내려와서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신을 한 짝만 신고 있지 않소.”

모노산달로스한쪽 신만 신은 사나이라는 뜻이다. 그제야 이아손은 강을 건널 때 자신이 업어 같이 건너게 해드렸던 노파가 천상의 신중 한 분이었음을 깨닫고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임무를 확실하게 정했다.

 

4

이올코스에서 이아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에 살고 계신 지부터 수소문했다. 아비 어미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계실지 궁금했다. 혹시 돌아가셨다면? 다행히도 두 분은 지금은 왕이 된 배다른 아우의 관심 밖에서 생존해 계셨다. 주름살 깊게 패인 늙은 부모와 젊은 아들의 10년 만의 해후, 어느 용사와 견주어도 듬직한 아들을 본 부부는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바다를 이루었다.

세 식구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당장 현실적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맡겨두었던 왕좌를 되찾는 문제였다. 그러나 펠리아스 왕이 순순히 넘겨줄 왕좌라면 처음부터 가져가지도 않았을 터, 왕가에 거센 태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를 일이니 문제는 큰 문제였다.

이아손은 늙은 부모를 좋은 말로 안정시키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선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왕궁으로 숙부를 찾아가기에 앞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새 신발을 장만하는 일이었다. 신탁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숙부를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가죽신으로 바꾸어 신은 이아손은 이올코스 궁전으로 들어가 숙부 펠리아스 왕의 알현을 청하였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을 보자 가볍게 놀란 표정을 두꺼운 낯으로 가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온 자이고, 짐을 찾아온 까닭은 무엇인가?”

저는 펠리온산에서 얼마 전에 내려온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이 나라 왕을 지내신 아이손 왕이시고 어머니는 이 나라 왕비이셨던 알키메데(Alkimede)’이십니다, 숙부.”

펠리아스 왕은 옛날 아이손 형님과 약속했던 것을 들먹이며, 적법한 왕위 계승자, 이아손이 나타난 것을 크게 반기는 뜻에서 나라가 시끄러울 만큼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아손은 숙부가 의외로 쉽게 자신을 조카로 인정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숙부 펠리아스가 악랄하고 교활한 인간임을 알았던 이아손이 그 검은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 위험의 모습과 크기를 섣불리 가늠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예상 밖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숙부와 조카가 상봉한 지 엿새째 되는 날, 펠리아스 왕이 조카 아이손을 불러 잔뜩 뜸을 들였다가 준비된 말문을 열었다.

조카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니 프릭소스의 황금 모피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친척이 되는 프릭소스는 차가운 콜키스 땅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이 나라에 있었더라면 나라의 보물이 되고 남았을 황금 모피는 지금 머나먼 콜키스 땅에 있다. 어떠냐? 콜키스 땅으로 가서 황금 모피와 프릭소스의 유해를 수습해 오지 않겠느냐? 나는 이미 늙어 이룰 수 없는 꿈을 네가 이루고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어떠하냐?”

펠리아스로서는 가겠다고 해도 좋고 못 가겠다고 해도 좋을 양날의 검 같은 제안이었다. 머나먼 콜키스. 황금 모피가 있다는 콜키스 땅은 그리스인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땅이다. 그리스인들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땅이다. 적대적인 바다 흑해 너머, 아득히 먼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던 미지의 땅이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땅이다.

만일 이아손에게 그럴 힘과 용기가 있어서 콜키스로 떠나겠다고 한다면 펠리아스는 제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아손을 죽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험한 바다, 야만의 땅,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 그리고 콜키스 왕이 황금 모피를 빼앗으러 온 이아손에게 여기 있소하며 쉽사리 넘겨줄 리도 없지 않은가. 그건 고사하고 단칼에 목을 베기가 쉽다. 더군다나 일설에 따르면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이아손에게 그럴 힘과 용기가 없어서 콜키스로 떠나지 못하겠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이 비록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하나 힘도 없고 용기도 없는 풋내기를 위해 왕의 자리를 비워 줄 그렇게 도리에 밝은 위인이 아니었다. 숙부 펠리아스는 이런 흑심은 두꺼운 낯으로 가리고 짐짓 위엄을 갖추고 제안을 한 것이었다.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여 마음의 고삐를 풀게 한 다음에 불리한 조건을 달것임을 짐작하고 있던 이아손은 다음과 같은 말을 홀연히 남기고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마땅히 가서 찾아와야지요. 100일 말미를 주시면 새 배를 짓고 뱃사람을 모아 떠나겠습니다.”

 

5

숙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이아손은 곧 원정 준비에 들어갔다. 이아손은 당시 배 짓는 기술로서는 첫째가는 아르고스(Argos)’에게 명하여 자그마치 100명 가까이나 태울 수 있는 범선을 짓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크기였다.

아르고스는, 노잡이가 노를 놓쳐도 노가 물결에 떠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노의 손잡이와 노잡이의 자리를 가죽끈으로 연결하는 당시로선 참으로 획기적인 방법을 겨우 열두 살 때 고안해낸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는 방향잡이 키로는 배의 방향을 바꿀 때 힘이 많이 든다고 해서 바퀴처럼 생긴 키 손잡이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즈음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경우, 돛대 위에서 저절로 돌아 각도를 바꾸는 돛을 만들어 온 그리스 뱃사람들을 놀라게 한 천재였다.

아르고스가 배를 짓고 있는 동안 이아손은 모험을 좋아하는 온 그리스 땅의 젊은이들을 이 여행에 초청하느라 바빴다. 더러는 인편으로, 더러는 직접 찾아다니며 멀고 험난한 이 원정에 함께 할 용사들을 불러 모았다. 대략 헤아려 보니 그 수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젊은 용사들 대부분은 후일 그리스의 영웅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으니, 여기에 끼지 못하면 가짜 영웅 소리를 들을 판이었다.

본격적인 항해에 나서기 전에 우선 이 원정대에 포함된 영웅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근래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세계 극장가의 흥행사를 새로 썼던 어벤져스시리즈에 나오는 수퍼 히어로만큼이나 화려하다.

원정대원 중 가장 유명한 영웅은 뭐니 뭐니해도 헤라클레스(Herakles)’였다. 원정 기간 중 그의 옆에는 항상 휠라스(Hylas)’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중도에 대원 노릇을 그만두고 그리스로 돌아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당대 최고의 명가수 오르페우스(Orpheus)’도 대원이었다. ‘아폴론(Apollo)’ 신의 축복을 받은 그의 수금 연주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바위가 감동해 눈물을 흘렸고, 나무는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구부렸으며, 꽃은 때가 아닌데도 피어나고 강물이 선율에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디오스쿠로이(Dioskouroi)’로도 알려진 카스토르(Castor)’폴리데우케스(Polydeuces)’도 빼놓을 수 없. 카스트로는 거친 말을 길들이는 솜씨가 좋았고, 폴리데우케스는 권투를 썩 잘했는데 아르고 원정에서도 그의 권투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둘은 어찌나 우애가 좋았던지 무슨 일을 하건 꼭 함께했다.

이밖에도 칼리돈의 왕자 멜레아그로스(Meleagros)’, 활쏘기와 달리기로 알려진 여장부 아탈란타(Atalanta)’,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펠레우스(Peleus)’, 테세우스와 함께 지하 세계로 내려가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내놓으라고 했던 떠돌이 영웅 페이리토오스(Peiritoos)’, 훌륭한 인품으로 트로이 전쟁에도 참전했던 젊은 시절의 네스토르(Nestor)’ 50여 명에 이르는 영웅들이 참여했다.

테세우스(Theseus)’가 원정에 참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배척하기로 하겠다. 여러분은 앞으로 테세우스가 아버지의 신표를 가지고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갔던 일화를 보게 될 것이다. 이때 독약을 탄 술을 준비하고 테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계모 메데이아(Medeia)’였다. 그때 테세우스는 메데이아를 처음 대하듯 했다. 그가 아르고 원정대원이었다면 이아손의 아내가 되었던 메데이아를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그래도 자꾸 억지를 부린다면, 에이 아무리 신화래도 이건 좀 심하다.

 

6

이아손의 부름을 받고 당대 헬라스의 영웅호걸들이 파가사이로 모여든 것은 아르고스가 건조한 배의 이물 앞 대가리에다 말하는 헤라 여신상을 세운 직후였다. 아르고스는 모여든 장수들의 면면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수식 전날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선율로 배 지은 사람 아르고스의 이름을 따 이 배의 이름을 아르고(Argo)’로 명명하였다. 또 이아손은 원정대원들이 둘러선 자리에서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를 지목하며 이 원정의 대장으로 추천했으나, 헤라클레스가 극구 사양하며 이아손이 원정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다른 영웅들은 헤라클레스의 말을 옳게 여겨, 이 문제는 그대로 결론이 났다.

대장으로 추대된 이아손은 신들에게 성대한 제를 올렸다. 자신의 수호여신인 헤라에게 특별히 더 신경 썼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원정 중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고, 동료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로 서로 반목하는 일이 없도록 기원했다. 황금 양털을 무사히 가지고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녕도 기원하였다. 그런 후 함께 한 영웅들과 음복을 하며 먹고 마시는데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긴 항해를 위한 마지막 잔치를 거나하게 벌였다.

해가 다시 중천에 이르러 드디어 진수식 준비에 들어갔다. 아르고선이 진수될 때 배 위에 올라간 사람은 대장 이아손, 키잡이 티퓌스, 그리고 수금을 품에 안은 소리꾼 오르페우스뿐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일렬횡대로 놓인 통나무 위로 아르고선을 밀어야 했기 때문이다. 배가 바다에 몸을 담그자, 이윽고 대원들이 하나씩 아르고선에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헤라클레스가 올랐다. 뱃길 잘 보는 아르고스 사람 나우폴리오스가 돛줄을 풀자 돛이 오르면서 바람을 한아름 안았다.

이윽고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해안의 암초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바다로 나아간 아르고호는 곧 동력을 풀가동하여 쾌속으로 모험을 향해, 미지를 향해 힘차게 항해를 시작했다. 배 앞머리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오르페우스의 수금 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7

아르고 원정대는 테살리아 해안을 떠나 여인들의 섬 렘노스에서 기항하고, 키지코스 왕국에서 몹쓸 경험을 한 후, 뮈시아에 도착하였다.

오랜 항해 중에 식량도 떨어지고 피로가 많이 쌓인 대원들이 상륙한 곳은 강도 없고 시내도 없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대원들이 먹을 물을 얻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가 샘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제각기 물동이를 하나씩 들고 샘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는데, 다른 대원은 모두 물을 길어 내려왔는데도 미소년 휠라스만은 소식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헤라클레스와 함께하면서 영웅의 시중을 들던 조각과도 같은 소년이었다.

휠라스와 함께 올라갔던 대원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휠라스는 물동이를 샘가에 놓고 물끄러미 샘물을 내려다보고 있습디다. 그런데 샘 안에서 희고 고운 손이 하나 나오더니 그의 손과 팔을 잡더군요. 그렇게 둘이 속삭이나 싶더니 곧이어 샘 아래서 다른 손들이 하나둘, 나중에는 예닐곱이나 나와 휠라스를 끌고 물밑으로 들어가더라구요.”

그 소리에 헤라클레스가 화들짝 일어나서 휠라스가 올라갔던 방향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런데 한참을 지났는데도 헤라클레스는 내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발 빠른 쌍둥이 형제 칼라이스(Calais)’제테스(Zetes)’가 올라갔다. 헤라클레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바위틈에 있는 샘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샘가에는 휠라스의 항아리가 빈 채로 놓여 있었다. 이어서 이아손을 비롯한 대원들이 올라와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만 휠라스를 찾을 수 없었다. 샘은 바닥없이 아주 깊어 샘을 뒤지던 몇몇 대원들도 별 소득 없이 물 위로 올라왔다.

아침이 오자 핼쑥해진 헤라클레스가 이아손에게 자신은 휠라스 없이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누구라고 헤라클레스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이아손 일행은 결국 감쪽같이 행방불명이 된 휠라스와 휠라스 때문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헤라클레스를 그 땅에 남겨두고 동북쪽을 향해 떠나야 했다.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의 아르고 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니면 주인공 이아손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에게는 이 일 말고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8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원정대는 비튀니아라는 땅에서 폴리데우케스의 권투 실력을 구경한 후, 어느덧 운명의 힘에 이끌려 트라키아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일행은 눈먼 현인 피네우스를 만났고 그로부터 차후의 항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피네우스는 흑해가 두 개의 조그만 바위 섬으로 막혀 있다고 했다. 곧 이 두 개의 바위 섬은 해상에 떠있다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서로 부닥치는데 그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산산조각으로 부숴 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섬은 충돌하는 섬이라는 뜻의 쉼플레가데스라고 불린다고 했다. 피네우스는 아르고 원정대원들에게 그 위험한 해협을 통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 따르면, 비둘기를 이용한 시간차 공격만이 그곳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피네우스의 말대로 아르고선은 떠난 지 이틀 만에 쉼플레가데스 앞에 이르렀다. 겉보기에는 꼭대기에 구름을 거느릴 만큼 높고 험한, 두 개의 마주 보고 있는 섬에 지나지 않았다. 두 개 의 섬 저쪽으로 보이는 검은 바다, 그 바다가 아르고선을 향해 뿜어대는 듯한 싸늘한 역풍과 물보라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아르고 원정대는 까짓 그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섬 주위에는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부서진 갑판, 찢어진 돛조각, 끊어진 밧줄, 부러진 노자루가 그 바다의 적의를 증언하고 있었다. 물 위로는 부풀어 오른 사람의 사체가 떠다니고 있었고 물밑으로는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거대한 물고기가 섬 그늘로 모이고 있었다. 이아손은 키잡이 티퓌스를 타륜 앞에 세우고, 눈밝고 귀밝은 이도몬에게는 몹소스가 붙잡아온 흰 비둘기를 주어 뱃전에 세운 뒤 나머지 대원들을 모두 노자리에 않게 하고는 영을 내렸다.

이곳이 적대하는 바다의 문 쉼플레가데스, 곧 충돌하는 바위섬, 우리가 마땅히 넘어야 할 관문의 문턱입니다. 피네우스가 예언했듯이, 이 두 섬은 나는 것이든 뜨는 것이든 그 사이에 들어간 것을 향하여 양쪽에서 부딪쳐 옵니다. 우리가 힘과 용기와 지혜로 맞서지 못하면 아르고선은 난파선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섭리를 믿으세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케이론에게서 배운 웅변술이었다. 그러곤 이아손은 먼저 이도몬에게 군호를 보내어 흰 비둘기를 날리게 했다. 비둘기는 역풍을 타고 고도를 높이는 버릇이 있어서 똑바로 역풍이 불어오는 두 섬 사이로 날았다. 비둘기가 섬 사이로 들어가자 거대한 두 섬이 엄청난 속도로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르고 원정대의 귀에는 두 섬이 맞부딪쳐 오면서 양쪽으로 산 같은 물결을 일으키는 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는 누군가가 귓전에 대고 커다란 징을 연이어 때릴 때의 소리와도 같았다.

거대한 두 개의 섬이 흰 비둘기를 덮치는 형국은 거인이 눈앞을 날아가는 벌레를 두 손으로 잡는 형국과 비슷했다. 하늘이 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 섬이 한 덩어리로 맞붙었다. 섬의 바위산에서 뿌리째 뽑힌 나무와 바위가 우르르 쏟아져 내려와 맞붙은 섬 주위의 엄청난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갔다.

이아손이 한 손을 들었다. 노자리에 앉은 대원들은 일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티퓌스는 키를 잡고 아르고선을 맞붙은 두 개의 섬을 향하여 똑바로 몰고 들어갔다. 피네우스의 말 그대로였다. 아르고선이 뱃머리로 받을 듯이 맞붙은 두 섬을 겨누고 달려들자 두 섬은 조금씩 벌어지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티퓌스는 열리고 있는 두 바위섬 사이로 아르고선을 몰아넣었다. 두 바위섬이 아르고선을 향해 다시 부딪쳐 오기 위해서는 먼저 원래 있던 자리로 가야 했다. 두 바위섬이 원래 있던 자리고 돌아간 것은 아르고선이 이 섬 사이로 완전히 들어갔을 때였다.

저으시오! ”

키잡이 티퓌스가 타륜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대원들에게 들릴 리 없었다. 두 바위섬이 굉음과 함께 다시 부딪쳐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다는 바닥을 드러낼 듯이 아르고선 양쪽으로 치솟았다. 두 바위섬이 물을 가르는 소리 때문에 들리는 소리가 없었고, 제각기 되돌아오면서 일으킨 물보라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르고선이 두 섬 사이에서 온전히 벗어날 시간은 넉넉했다. 그러나 배는 두 바위섬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쉼플레가데스가 부딪친 순간 아르고선 고물의 키다리가 부서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때 맞붙은 이후로 쉼플레가데스는 아주 붙어버려 이 길로 들어서는 헬라스 배를 더는 부수지 않았는데 혹자는 어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아예 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쉼플레가데스의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두 섬의 자살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물건이나 상황의 금기가 깨지면 그것은 더는 금기가 아닌 것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벼랑 아래로 떨어진 스핑크스(Spinx)’처럼, 아르고선의 무사통과로 인해 쉼플레가데스는 충돌하는 섬으로서의 존재감이 없어진 것이니 일리 있는 해석이다. 공포나 두려움의 본질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닐까?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는 현인 피네우스 조언과 한 마리 비둘기의 활약으로 무사히 흑해에 접어들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9

드디어 아르고 원정대를 실은 아르고선은 목적지 콜키스에 도착했다. 그 사이 주요 원정대원 중 키잡이 퓌토스와 비둘기잡이 이도몬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아르고 원정대가 장대한 포부를 안고 파가사이 항구를 떠난 지 근 2년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 10년을 허비했고, 헤라클레스가 자기의 죄를 씻는 데 12년이나 걸렸으니 2년이면 양호했다.

콜키스는 예부터 시신을 거두어들이는 땅이라고 불리었다. 그만큼 위험한 땅이었다. 그러나 아르고호를 해안에 정박한 이아손은 단신으로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 궁전으로 향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무를 밝힐 심산이었다.

헤라 여신이 안개를 풀어 대장이 떠난 아르고선을 가려주었는데 어찌나 잘 가렸던지 아르고선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오르페우스가 뜯는 수금 소리만 안개 장막 뒤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이에테스는 먼 서쪽 테살리아의 이올코스에서 손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어 왕궁의 현명한 중신들과 용명한 장군들을 불러 모은 뒤 이아손을 맞았다.

이 자리에는 왕을 비롯하여 왕의 맏딸 칼키오페, 둘째 딸 메데이아도 나와 있었다. 메데이아라는 이름에는 온당하게 충고하는 여자라는 속뜻이 있다. 이 메데이아는 왕녀이자 헤카테(Hecate)’ 여신의 사제이기도 해서 요술과 기술에 능하고 사람 보는 눈이 신통했다. 그녀는 이국에서도 마치 제집 안방처럼 당당하게 행동하는 이아손에게 반하고 말았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장난기가 또다시 발동된 것이었다.

아이에테스 왕의 요청에 따라, 이아손이 아이에테스 왕에게 입국한 목적을 말하려 하자 메데이아가 나서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아버지 아이에테스에게 조언했다.

아바마마, 이분이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우선 뜨뜻한 물과 새 옷과 음식과 술을 베풀어 쉬게 한 연후에 온 까닭을 여쭙는 것이 대접하는 도리일 듯합니다.”

아이에테스는 딸의 온당한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마침 아이에테스의 궁전에는 헤파이스토스가 팠다는 네 개의 샘이 있었다. 우유의 샘, 포도주의 샘, 향수의 샘, 뜨거운 샘이 이것이다. 시간을 번 이아손이 헤파이스토스가 팠다는 뜨거운 샘의 물로 몸을 닦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은 마침 아이에테스 왕가의 점심때였다.

메데이아는 아이에테스 왕에게, 이아손을 점심상으로 불러 콜키스에 온 까닭을 물어보자고 했다. 왕이 딸의 말을 좇으니 이로써 아이에테스는 밥상을 함께 한 이아손을 적어도 자기 손으로는 해칠 수가 없게 된 셈이다. 밥상을 함께한 나그네를 죽이는 일은, 제우스를 섬기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자리가 무르익자 이아손은 비로소 자신이 온 목적을 왕에게 아뢰었다.

과거 전하의 사위이셨던 프릭소스는 저희 집안사람입니다. 제 숙부 되시는 이올코스 왕 펠리아스께서 프릭소스의 유해와 황금 모피를 가져올 권리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왕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아이에테스는 속으로 겸상한 것을 후회하면서, 한참을 뜸들이다가 황금 모피를 내놓겠다면서도 조건을 달았다. 이아손이 불을 뿜는 두 마리의 놋쇠 발 황소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갈고, 거기에다 카드모스(Cadmos)’ 왕이 퇴치한 저 용의 이빨을 뿌리는 데 성공하면 황금 모피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용의 이빨을 땅에 뿌리면 무장한 병사들이 돋아나 뿌린 자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아손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아이에테스 왕이 내건 조건을 수락한 다음, 다음 날 다시 오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아이에테스의 왕국을 나왔다.

이날 밤 콜키스의 왕궁에는 잠들지 못하는 여인이 몇 있었다. 아이에테스의 맏딸이자 프릭소스의 부인이었던 칼리오페가 그 하나요, 이아손에게 마음을 빼앗긴 둘째 딸 메데이아가 그 둘이었다. 메데이아의 가슴에는 에로스의 화살이 박혀도 너무 깊이 박힌 탓에, 이아손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애를 태웠다.

그녀가 아는 한 자신이 이 청년을 위해 손을 쓰지 않으면 이아손은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이 청년이 자기 앞에서 죽어가게 할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도와주려면 아버지를 배신해야 할 터라 이아손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과 싸웠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이성은 뜨거운 사랑의 불길 앞에서 너무나도 미약했다. 미노스 왕에 반했던 스킬라처럼, 테세우스 왕자에게 눈멀었던 아리아드네처럼, 적장 암피트리온에게 넘어간 코마이토처럼.

날이 밝기 전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신들의 도움으로 아무도 모르게 따로 만났다. 헤카테 여신이 가르침을 받아 마술과 요술을 터득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약, 산 사람을 죽이는 약도 능히 만들어 낼 수 있는 메데이아의 손에는 마법의 약병과 과거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가 가지고 다녔다던 돌 하나가 들려 있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피를 조금 뽑고, 그 피에다 가져온 고약을 으깨어 발라준 뒤, 아버지 아이에테스 왕의 시험에 나설 방도를 일러 주었다.

이 고약을 몸에 바르셨으니, 오늘 하루 용광로에 들어간다 해도 화상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돌은 불화의 돌이니 이 돌을 던지면 아레스 땅에서 나온 인간들끼리 싸우게 될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지체 말고 파시스강 상류로 가라고 일러 주었다. 군사들을 대동하지 말고 혼자 가야 한다고 알렸다. 강 상류의 성스러운 숲속에 있는 용을 만나거든 그곳이 황금 모피가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황금 모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혼자서 용을 굴복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자기의 모든 과업이 성공하면 아르고선을 타고 함께 이올코스로 가기로 약속했고, 메데이아도 이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드디어 새벽닭이 울고 날이 밝았다.

이아손은 원정대원의 반은 아르고선에 남겨두고 나머지 원정대원과 함께, 메데이아가 준 불화의 돌을 가슴에 품은 채 아이에테스를 찾아갔다. 아이에테스는 이미 아레스의 땅이라고 불리는 궁전 앞 공터에 무장한 군사들을 대동하고 나와 아이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은 왕좌에 앉았고 신민들은 산허리를 메우고 앉거니 서거니 했다. 왕좌 앞에는 커다란 쇠우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두 마리의 아레스의 황소, 그 앞에는 큼직한 쟁기가 한 틀 놓여 있었다.

이아손이 아이에테스 왕 반대편에 무장한 원정대원을 도열시키자 콜키스의 왕은 전에 보지 못했던 병력을 보고 많이 놀랐다. 그것도 하나같이 범 같은 용사들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자 시작해 보아라.”

이윽고 놋쇠 발 황소가 콧구멍으로 불길을 뿜으며 걸어 나오자 길가의 풀이 타들어 갔다. 황소 두 마리가 다가옴에 따라 용광로 안에서 쇳물이 끓는 소리가 났고, 생석회에 물을 뿌린 것처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아손은 담대하게 두 마리 황소 앞으로 나아갔다. 이아손은 황소가 내뿜는 불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황소의 노기를 가라앉히고는 두려움 없이 벌겋게 달아오른 목을 어루만졌다. 이어서 이아손이 솜씨 있게 황소의 등에 멍에를 채우고는 자신은 쟁기를 잡았다. 그런데도 이아손의 몸은 타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그을리지 않았다. 콜키스 사람들은 아연실색했고 그리스인들은 함성을 질렀다.

이아손은 아레스의 황소로 밭을 갈아 고랑과 이랑을 만든 후 아이에테스 왕 앞으로 가서 용의 이빨을 내어주기를 청했다. 아이에테스 왕은 이아손을 가까이 오게 하기가 두려웠던지 양가죽 주머니를 하나 이아손에게 던졌다. 이아손은 자루를 받아 갈아엎은 땅에 고루 뿌리고는 발로 흙을 덮어 용의 이빨을 모두 묻었다.

그러자 곧 땅이 꿈틀거리더니 무장한 병사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뿌린 씨앗의 수대로 병장기를 든 병사들이 쑥쑥 나왔다.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창을 이아손을 향하여 겨누고 달려들려고 하자, 이아손은 품 안에 있는 불화의 돌멩이를 그들 사이로 던졌다. 메데이아가 주었던 그 돌이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서로 누가 돌을 던진 것이냐고 따지면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찌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치명상을 입은 병사들이 픽픽 나가떨어지자, 영문도 모르고 지켜보던 원정대만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병사 하나만 남게 되자 이아손은 옆에 있던 원정대원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꺼내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렸다. 이 마지막 무사가 쓰러짐과 동시에 먼저 쓰러진 모든 병사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

아레스의 땅에서 승리한 이아손은 원정대원들과 함께 아르고선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황금 모피를 지키고 있는 용을 잠재우는 일뿐이었다. 그것도 간단했다. 메데이아가 미리 준비해 준 약을 몇 방울 용의 주위에 뿌리면 될 일이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시킨 대로 살며시 대원들에게 벗어나 홀로 파시스강을 따라 올라갔다. 이 강 상류에는 콜키스 사람들이 신성한 숲이라고 부르는 아레스의 숲이 있었다. 이아손이 들어가기까지, 아이에테스 왕을 제외하고는 이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던 숲이었다.

과연 메데이아의 말대로 숲을 지키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앞을 가로막는데 그 입이 어찌나 큰지 사람 한 명 정도는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아손이 재빨리 약병을 열어 용의 주위에 뿌리자, 용은 그 냄새를 맡고는 노기를 가라앉힌 뒤, 잠시 꼼짝 않고 서 있다가 한 번도 감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그 크고 둥근 눈을 감고 모로 누워 잠들고 말았다.

이아손은 재빨리 잠든 용의 뒤로 돌아가 아름드리나무에 걸려 있는 황금 양털을 내린 뒤, 서둘러 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급히 친구들과 함께 아르고선에 올랐다. 물론 메데이아도 함께였다.

아이에테스 왕에게 출항을 저지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지만, 그 과정에서 뒤쫓아온 콜키스 군대와 아르고선을 목전에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테스 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신탁은 실현된 셈이었다.

메데이아가 없었더라면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아손과 원정대원들은 아름답고 신비한 여인, 메데이아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잔인했다.

콜키스를 떠날 당시 아르고선에는 메데이아의 어린 동생, ‘압시르토스(Apsyrtos)’가 같이 타고 있었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메데이아가 붙잡아 온 인질이었다. 메데이아가 예측했던 대로 콜키스군은 군선이라는 군선은 다 동원하여 아르고선을 추격했다. 메데이아는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동생을 죽이고 그 시신을 아홉 조각으로 토막 내어 바다에 버렸다. 콜키스 함선이 승하한 왕의 막내아들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르고 원정대는 무사히 북방의 콜키스 해안을 빠져나와 테살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사히 귀환한 이아손은 지금껏 생사고락을 같이 한 원정대원들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황금 모피를 펠리아스 왕에게 건네주었는데 그 황금 모피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황금 모피가 소중한 물건이라고는 하나 이아손이 원정대와 함께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수고한 노력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으리라. 이아손이 진정으로 찾아온 것은 아마 자기 자신이 아니었겠는가.

 

11

황금 모피 이야기는 끝났지만, 이아손에게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숙부로부터 빼앗긴 왕좌를 찾아오는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펠리아스 왕이 황금 모피를 손에 넣고도 이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려달라는 왕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펠리아스 왕은 이아손이 황금 모피를 되찾아 온 것을 축하하는 큰 잔치를 열었다. 이아손은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아버지 아이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아손이 콜키스에 다녀오는 사이 그 자리에 올 수 없을 만큼 아버지 아이손이 너무 늙어버린 것이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한다.

아내여, 내 그대의 마법으로 오늘 이런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도 마음이 허전하오. 나를 위해 그 마법을 한 번 더 써줄 수 없겠소? 남은 내 수명을 빼내 아버지 수명에다 붙여 주었으면 하오.”

이아손은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러자 메데이아가 대답했다.

제 마법이 제대로 들어준다면, 그대의 수명에서 빼지 않고도 아버지 수명을 늘릴 수 있을 거예요.”

메데이아는 보름달이 밝은 밤, 산 것은 모두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홀로 일어났다. 고요한 밤, 메데이아는 먼저 별에게 기원하고, 달에게도 기원했다. 그리고 지옥의 여신 헤카테와 대지의 여신 텔로스에게 기원했다. 이러한 여신들이 마법에 쓰이는 식물을 키우기 때문이었다. 메데이아는 숲이나 동굴, 산과 골짜기, 호수와 강, 바람과 공기의 신들에게도 힘을 빌려줄 것을 기원했다.

메데이아가 이렇게 빌자 별들이 한층 더 빛나면서, 날개 달린 용이 끄는 이륜차 한 대가 나타났다. 메데이아는 이 이륜차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세상을 다니며 그 땅에서 나는 갖가지 약초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모았다. 아흐레 밤낮을 약초 찾는데 보내다가, 어느 정도 모으게 되자 두 개의 제단을 만들었다. 하나는 헤카테의 제단이었고 또 하나는 청춘의 여신 헤베(Hebe)’를 위한 것이었다.

메데이아는 이 제단에다 흑양 한 마리를 산 제물로 바치고 우유와 포도주를 제주로 헌작했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에게 노인의 생명을 너무 빨리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이윽고 메데이아는 시아버지 아이손을 모셔 들이게 하고 주문을 외어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고는 신선을 모시듯이 약초를 깐 침상에 눕혔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은 물론 잡인을 모두 그곳에서 내보냈다. 부정한 눈이 비법을 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메데이아는 머리를 풀고, 불을 붙인 나뭇가지로 산 제물의 피를 휘저으면서 제단을 세 바퀴 돌고, 그 나뭇가지를 제단에다 쌓아놓고 불을 지폈다. 그동안 솥에 넣을 약제가 준비되었다. 메데이아는 가지가지 모은 모든 약제를 솥에 넣고 마른 올리브 나뭇가지로 저으면서 끓였다. 이곳에 들어간 약제로 거북 껍질, 수사슴의 간장, 인간의 아홉 세대를 넘게 산 까마귀 머리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약제를 저었던 올리브 나뭇가지에서 잎이 돋고 올리브 열매가 맺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든 준비를 마친 메데이아는 아이손의 목 부위를 찢어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는 입과 상처 구멍을 통에 솥에서 끓인 즙을 부어 넣었다. 그 즙이 모두 몸속으로 들어가자 노인의 흰 머리와 수염은 그 흰 색깔을 버리고 검어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 초췌한 기색도 사라졌다. 혈관은 따뜻한 피가 흘렀고, 수족은 활기와 기운으로 넘쳐났다.

무려 4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아이손은 이름처럼 아이가 되었으니 세상이 뒤집힐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12

그런데 펠리아스의 딸들이 다시 젊어진 숙부 아이손을 보았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교활한 아비와 달리 효심이 지극했다. 딸들은 메데이아를 찾아가 자신들의 아버지도 숙부 아이손처럼 젊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메데이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전처럼 솥을 걸었다. 그리고 온갖 약초를 넣고 끓인 다음 딸들이 보는 앞에서 늙은 백양 한 마리를 솥에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자 새끼 양 한 마리가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기적을 직접 본 펠리아스의 딸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길일을 잡아달라고 메데이아에게 간청했다.

메데이아는 약속한 날에 다시 솥을 걸고 불을 피웠지만, 솥에는 흔하디흔한 평범한 물과 소들에게 먹이는 여물이 전부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메데이아는 딸들과 함께 펠리아스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부정 탄다며 호위병을 모두 물린 메데이아의 주문으로 왕은 쿨쿨 잠이 들었다.

딸들은 단검을 빼 들고 침대 모서리에 시립하고 있었다. 딸들은 메데이아가 아버지를 찌르라고 해도 차마 찌를 수가 없었던지 자꾸 머뭇거렸다. 메데이아가 딸들의 우유부단함을 꾸짖자 딸들은 고개를 돌리고 아버지를 마구 찔러댔다.

애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아비를 죽이려느냐?”

펠리아스의 말에는 힘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펠리아스가 말을 이으려 하는 순간, 이번에는 메데이아가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도려버렸다. 메데이아는 그러고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고깃덩어리가 된 펠리아스의 몸을 가마솥의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렇게 이아손의 숙부를 향한 복수의 과정에도 아내 메데이아의 활약이 있었다. 이아손은 이로써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13

그런데 이올코스의 왕으로 부족했던 이아손은 메데이아와 함께 이웃 나라 코린토스로 옮겨가 살았다. 이아손은 코린토스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 자신의 젊은 날을 상징하는 아르고선을 바쳤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위해 왕자 둘을 낳고 근 10년 동안은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아들 없이 늙고 병든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이 이아손에게 딸 글라우케를 주겠다고 말하자, 왕의 자리가 욕심난 이아손은 그 나라 공주 글라우케에게 청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배은망덕한 처사에 분개하여 자신의 복수심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하기로 했다. 그 무렵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델파이 신전을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코린토스에 잠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가 약속을 하나 받아냈다.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 그에게 원하는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까지 아들이 없었던 아이게우스는 이에 응했다.

이렇게 피난처까지 미리 마련한 메데이아는 신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신부에게는 선물로 독약을 칠한 웨딩드레스를 보냈다. 보기엔 너무 아름다운 결혼 의상이었으나 글라우케는 옷을 걸치자마자 무서운 불길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그런 다음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제 자식을 모두 죽이고 궁전에 불을 지를 뒤 용이 끄는 이륜차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쳤다. 그렇지 않았다면 메데이아는 이아손 왕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이 끔찍한 복수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아르고선이 있는 포세이돈 신전으로 찾아가 아르고선의 갑판 위에서 화려했던 젊은 날을 쓰라린 심정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낡고 빛바랜 아르고선의 돛대가 우지직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아손은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돛대를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아테네로 도망간 독녀 메데이아는 아테네에서 아직 아들 테세우스를 만나기 전의 아이게우스 왕과 결혼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 메데이아를 품은 아테네는 평온을 누릴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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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문명을 일으킨 미노스

스킬라, 다이달로스, 이카로스, 테세우스, 아리아드네, 탈로스, 황소 숭배...

 

1

크레타(Creta)는 그리스 남쪽 에메랄드 빛 푸른 바다, 동부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는 섬이다. 얼핏 날아가는 새 모양처럼 길고 폭이 좁게 생겼다. 이 섬의 원주민은 미노아 인(Minoans)’이라고 불리었다. 미노아 사람들은 황소를 신성한 동물로 숭배하였다. 고고학자들이 오랜 노력 끝에 발굴한 크레타 유적 곳곳에 그 흔적이 여럿 남아 있는데, 그중에는 미노아 인들이 황소 뛰어넘기같은 일종의 운동경기를 했던 자취도 많이 있다.

상상해 보자. 긴장한 빛이 역력한 한 소년이 맨손으로 경기장 안에 있고, 건너편에는 성난 황소 한 마리가 앞발로 거칠게 땅을 긁어대고 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의 함성으로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황소는 당장이라도 튕기듯 돌진해 올 것만 같다. 곧 거친 쇳소리와 함께 황소 앞을 가로막았던 청동 울타리가 올려지면, 소년은 맹렬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황소를 뛰어넘어야 한다. 성공하면 우레와 같은 큰 갈채를 받겠지만,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소년은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다. , 어떤가? 독자라면 자신 있겠는가?

황소 뛰어넘기는 신을 경배하는 축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미노아 인들은 올림포스의 절대자들이 그 경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경기가 끝나면 황소를 제물 삼아 신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은 제사를 올렸다.

한편으로 황소 뛰어넘기 경기는, 소년에서 전사가 되었음을 인증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면서, 재능이 뛰어난 소년을 전문적인 선수로 발탁하기 위한 오디션 역할을 한 것으로도 보인다. 발탁된 소년은 마치 지금의 프로스포츠 선수처럼 육성되어 민중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을 것이다.

크레타는 비록 농업국이었지만 미노아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로도 유명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크레타 해상에는 흉포한 해적들의 출몰이 잦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바다를 지배하는 특출난 민족이 없었기 때문에 해상은 해적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미노아 왕은, 지중해를 확보해야 다른 나라와 교역할 수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해적을 소탕해야만 했다. 미노아 인들에겐 튼튼한 전함을 만들 능력이 있었고, 왕은 의지가 있었으니 꾸물거릴 필요가 없었다. ‘미노스(Minos)’ 왕은 크고 작은 다양한 종류의 전선을 축조하고, 동시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막강한 해군을 길러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지중해 일대를 지배한 최초의 해양 왕이 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바다에서의 패권은 육지에까지 미쳐 크레타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주변국을 호령하기에 이르렀다.

미노아라는 명칭도 바로 이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자 그럼, ‘크레타(미노아) 문명의 시작을 연 미노스 왕을 쫓아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수소의 몸을 한 제우스(Zeus)’와 눈망울이 큰 소녀 에우로페(Europe)’가 크레타에 발을 디디자, 어두웠던 섬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타고 온 수소가 여느 황소가 아님을 알았다. 그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수소는 건장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 둘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이러한 사랑의 결실로, 당대를 넘어 후대까지 많은 그리스인으로부터 숭배를 받은 미노스 왕과, 공정하고 정직했던 라다만티스, 그리고 막내 사르페돈이 태어났다. 제우스는 에우로페와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때 자신이 변신했었던 아름다운 수소를 밤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황소자리이다.

그렇다, 크레타 문명의 아버지 미노스는 위대한 신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 가족관계를 대외적으로 유지하기가 곤란했는지 어머니 에우로페는 당시 크레타의 지도자 아스테리오스(Asterios)’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마침 아스테리오스 왕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삼 형제 중 장남인 미노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이 뭐 그렇게 썩 질서 있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에우로페의 두 아들 미노스와 라다만티스 형제는 어릴 때부터 티격태격 다툼이 잦았다. 막내 사르페돈은 두 형제와 나이 차이도 제법 있었거니와 유약하여 이 다툼에 끼어들지 않았다. 미노스와 라다만티스는 사소한 일부터 중요한 사안까지 거의 의견이 일치한 적이 없었고, 사사건건 서로 반목하고 헐뜯었다.

그러던 중 둘이 아주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던 그들이 동시에 한 소년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이다. 때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크레타 왕국이 형과 동생,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한창 물밑 암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 아스테리오스 왕은 형제 중 가장 정직했던 라다만티스를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형을 지지하는 세력이 판세를 뒤집었고, 미노스는 연적이자 정적인 동생 라다만티스를 크레타에서 추방하였다. 그 후 동생은 다시는 크레타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그리스 보이오티아 땅으로 피신했다가 그 삶을 다하자, 지하 세계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미노스는 의붓아버지 아스테리오스 왕을 계승하여 크레타 왕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미노스 왕의 진짜 정적은 다름 아닌 어머니 에우로페였다. 에우로페는 그 옛날 수소의 등에 업혀 크레타섬으로 넘어올 때의 그 순진한 처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혜롭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스스로 극복하는 것에 낯설지 않은 강인한 여성이었다.

에우로페는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나랏일에 자주 간섭하여 감 놓아라, 배 놓아라참견을 일삼았다. 일종의 강력한 정치적 견제세력으로 그 역할에 충실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미노스 왕은 어머니와의 정면충돌은 가능하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충돌은 고사하고 더 나아가 미노스 왕은 억지로라도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에우로페에게는 아버지 제우스가 사랑의 선물로 주었던 세 가지 무시무시한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가지 선물 중, 첫 번째는 절대 목표를 빗나가는 일이 없는 창이었다. 두 번째는 아주 빠르고 날쌔면서도 성질이 사납고 고약한 사냥개였다. 그리고 마지막 선물이 아주 유용하면서도 신기한 것이었는데, 거대한 청동 인간 탈로스(Talos)’가 바로 세 번째 선물이었다. 청동 인간이라니? 그렇다면 최초의 만들어진 인간’, 최초의 안드로이드인 셈이다.

사실 청동 인간은 제우스가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에게 명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성물이었다. 이 청동 로봇의 몸속에는 목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관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람의 혈관 노릇을 했다. 이 혈관을 통하여 신의 피 이코르가 흐르는데, 탈로스의 발뒤꿈치에 박힌 못을 뽑아내면 그 구멍으로 이코르가 흘러나와 작동을 멈추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못을 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곳에 접근하는 것이 사실상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탈로스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크레타의 도시 외곽과 해변을 순찰하면서 해안에 정박하려는 침략자들의 배를 물리치곤 했다. 크레타 왕국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수호신도 없었다. 한번은 사르데냐 사람들이 크레타섬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때 청동 인간 탈로스가 불 속으로 뛰어들어 제 몸을 벌겋게 달군 뒤, 적들을 하나씩 끌어안아 모두 태워 죽였는데, 미노스는 이때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청동 로봇이 어머니 에우로페의 소유였으니 미노스로서는 어찌 어머니에게 대놓고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어차피 어머니 소유의 모든 것이 크레타의 자산이므로 결국은 자기 것이 될 텐데 무리수를 둘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두 모자간의 긴장 관계가 유지되는 중에도 크레타 왕국은 나날이 번성하고 있었다. 제우스는 미노스에게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있도록 공정한 법률을 내려주었다. 크레타 시민들도 자신들의 왕이 제우스 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했으므로 미노스가 제시한 법률도 아주 공정한 것으로 생각하여 믿고 따랐다.

태양신 헬리오스(Helios)’는 크레타섬에 따스한 햇볕을 내려 열매와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거기에 더해 헬리오스는 자기의 딸이 미노스의 아내가 되는 것까지 흔쾌히 허락하였다. 당시 태양 숭배라는 것이 지중해 주변국에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미노스가 태양신에게 해마다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고, 푸짐하게 제삿밥을 올린 것을 어여삐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노스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 파시파에(Pasiphae)’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글라우코스안드로게오스’, 아리아드네(Ariadne)’파이드라(Phaedra)’를 낳았다. 올림포스의 최고 존엄인 제우스와 태양신 헬리오스의 축복까지 받았으니 미노스 왕과 그 자손들은 과연 평탄한 꽃길만 걸었을까?

 

3

신화는 그렇게 밋밋하지 않다. 그리스 신화에서 그 존재가 미약하여 자주 거론되지 않는 두 아들 이야기부터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첫째 아들 글라우코스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어느 평범한 날 오후 어린 왕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궁전 한 모퉁이에 있는 꿀단지를 발견했다. 본능에 따라 손을 담가 꿀맛을 본 어린아이는 그 달짝지근함에 반해 꿀단지 더 깊은 곳으로 손을 내밀다가 그만 단지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세 살 남짓한 아이가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가 어려울 만큼 단지가 컸던 것일까, 아니면 그 달콤한 유혹을 적정선에서 뿌리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을까, 어린 왕자는 그 달콤함 속에서 죽고 말았다.

미노스 왕은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왕자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결국, 미노스 왕은 델포이 신탁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미노스 왕은 신탁이 일러준 대로 점술에 능한 아르고스의 예언자 폴리에이도스(Polyeidos)’에게 사라진 왕자를 찾아줄 것을 의뢰했다. 아니, 명령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엉겁결에 왕가에 고용된 사설탐정이 된 폴리에이도스는 홀로 조용한 창고에 들어가 추리를 시작했다. 해결하지 못하면 뜻하지 않게 황천길에 들어설 수도 있는 문제여서 골똘히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고,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유분수지,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장에 답이 있는 법,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었다. 폴리에이도스는 왕자의 요람이 있는 침실부터 뛰놀던 궁전 안팎 여기저기를 다니며 작은 실마리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올빼미 한 마리가 궁중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이상한 생각이 든 그는 올빼미가 내려앉은 곳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 꿀단지가 있었고, 폴리에이도스는 그 안에서 이미 심장이 멈춘 왕자를 발견하였다. 왕자가 사라진 지 여러 날이 지났건만, 꿀 덕분이었는지 시신은 거의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폴리에이도스는 왕자를 찾아내는 것까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나, 이미 숨을 거둔 왕자의 생명을 되살릴 수는 없음을 미노스 왕 앞에 고백했다. 그러나 잡을 지푸라기가 없었던 미노스 왕은 막무가내였다.

아니다. 그대가 왕자를 찾았으니 아이의 생명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반드시 왕자를 살려내 짐을 기쁘게 하라.”

이렇게 해서 폴리에이도스는 싸늘하게 식은 왕자의 주검과 함께 정식 장례 전 시신을 보관하는 장소에 감금되었다. 그런데 감금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뱀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기어 나와 죽은 왕자의 몸으로 다가갔다. 폴리에이도스는 그 뱀을 가차 없이 밟아 죽였다. 왕자의 시신까지 훼손된다면 자신은 정말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디서 왔는지 다른 뱀이 죽은 뱀 위에 어떤 잎 넓은 풀을 가져다 놓자 그 뱀이 다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폴리에이도스는 죽은 글라우코스를 똑같은 풀로 회생시켰다. 하지만 그 후로 이 왕자가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 더 있을 법도 한데 글라우코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신화에서 좀 더 비중 있는 역할을 한 것은 다른 아들 안드로게오스였다. 안드로게오스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미노스 왕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자 아들에게 정성스럽게 작성한 추천장을 들려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Aegeus)’에게 보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크레타의 궁전에 전해졌다. 아테네에 잘 있어야 할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아이게우스 왕이 사냥을 하러 나갈 때 안드로게오스를 데려갔는데 그 사냥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는 말도 들리고, 아테네에서 열린 운동경기 대회에서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 사람을 제치고 우승하자, 이걸 시기하여 아테네 왕이 아들을 죽여버렸다는 소문도 들렸다. 마라톤 평원에서 미쳐 날뛰던 황소를 잡으러 나갔다가 미친 황소의 뿔에 치여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연유가 무엇인지 간에 죽은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아들의 죽음에 몸에 있는 모든 털이 곤두설 정도로 격분한 미노스 왕은 크레타섬에 있는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아테네를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몸소 최정예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 땅으로 가서 아직 약소국이었던 아테네를 인정사정없이 마구 짓밟았다.

당시 아테네는 설상가상으로 역병까지 돌아 많은 시민이 죽거나 기력을 잃어 제대로 된 응전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아테네 왕은 델포이 신탁의 뜻대로 미노스 왕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를 조건 없이 수락한다는 아주 굴욕적인 협정을 맺고 항복했다. 변명의 여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이어지는 미노스 왕과 아테네 이야기는 자세히 후술하기로 하고, 크레타로 돌아오는 귀향길에 있었던 또 다른 싸움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니 살펴보자.

 

4

아테네 땅에 한껏 분풀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노스 왕에게는 꼭 손을 봐야 할 나라가 또 있었다. 다른 주변국과 달리 사사건건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며 조공 바치는 것도 거부하고 있던, 알카토오스라는 나라였다. 더군다나 그 나라 왕 니소스(Nisos)’는 자기의 아들을 죽게 한 아테네 아이게우스 왕의 동생이었으니 그 나라를 혼내줄 명분은 충분했다.

그런데 이 니소스 왕의 정수리 백발 한가운데에는, 신의 은총인지 저주인지 모를, 보라색 머리카락이 한 줌 있었다. 그의 머리에 이 머리카락이 남아 있는 한, 어떤 정복자도 그 왕국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말하자면 니소스 왕에게 보라색 머리카락이란 마치 삼손(Samson)’의 긴 머리카락과도 같은 것이었다. ? 그런데 삼손의 그 머리칼, 결국에는 사랑하는 연인 데릴라의 손에 잘리지 않았던가?

싸움이 시작된 이래 여러 달이 지났으나 양국의 전세는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지루한 소강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쪽은 성을 포위한 채 어떻게 해서든 무너뜨리려 하고, 다른 한쪽은 성에 의지한 채 끈덕지게 버티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렇게 장기전이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니케(Nike)’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양쪽 진영의 하늘을 번갈아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카토오스 왕국 성벽에는 제법 높은 탑이 하나 있었고, 니소스 왕에게는 딸 스킬라가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음악의 신 아폴론(Apollo)’이 황금으로 만든 수금을 내건 이후로, 그 벽돌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선율이 스며들어 있다는 성벽이었다. 스킬라에게는 이 성벽 위의 탑으로 올라가 이 성벽에다 돌멩이를 던지며 거기에서 나는 소리를 즐기는 취미가 있었다.

스킬라는 미노스 왕과 자기 아버지의 군대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습관처럼 이곳으로 올라가 가까이서 벌어지는 전투 상황을 구경하고는 했다. 이러는 동안 스킬라는 적장 미노스 왕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와 장난꾸러기 신 에로스(Eros)’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다녀간 것은 그때였다.

스킬라의 눈에 비친 미노스는 한마디로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미노스가 깃털 장식 투구를 쓰고 있으면 투구가 미노스에게 그렇게 잘 어울려 보일 수가 없었고, 미노스가 번쩍거리는 청동 방패를 들면 그 방패가 미노스에게 그렇게 딱 어울려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 스킬라의 눈에는 미노스 왕이 누더기를 걸치고 깡통을 들고 있어도 좋아 보였을 것이고, 스킬라의 귀나 코에는 왕의 방귀마저 그 소리는 아름다운 선율이요, 그 냄새는 향긋한 꽃내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왕의 모든 것이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어쩌다가 미노스가 민얼굴을 드러내고, 흰 거품을 뿜는 말의 고삐를 잡아채는 것을 보면 스킬라는 그만 현기증으로 쓰러질 지경이었으니 말을 더해 무엇하랴. 이 모두가 미노스 왕을 향한 불타는 듯한 사랑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갈증 때문이었다.

스킬라는 나이 어린 공주에 지나지 않았으나 할 수만 있다면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들어가 미노스 왕을 만나고 싶었다. 급기야 그녀는 크레타 진영의 야영 막사를 바라다보고 이렇게 중얼거리기에 이르렀다.

미노스 왕은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이 전쟁을 일으켰다지. 그에게는 명분도 있고, 막강한 군대도 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질 게 분명해. 우리 운명이 그렇다면 사랑을 위하여 내가 성문을 열어주는 것이 낫지 않은가. 더 이상의 살육을 막고, 저분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이렇게만 하면.”

스킬라의 마음은 이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스킬라는 아버지의 왕국을 미노스에게 바치고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마음이 하루 밤낮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이쪽저쪽을 오고 가다가 마침내 사랑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성문을 열어야 하나? 적진에 편지를 묶은 화살을 날려야 하나? ! 아버지의 보라색 머리카락!

스킬라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속절없이 운명의 밤이 찾아 왔다. 스킬라는 이 평화로운 시간을 틈타 살며시 아버지의 침실로 숨어 들어가 기어코 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딸이 아버지의 머리로부터, 아버지의 목숨과 운명이 걸린 머리카락을 훔친 것이다. 데릴라가 천하장사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랐던 것처럼, ‘코마이토암피트리온(Amphitryon)’을 위해 아버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잘라냈던 것처럼.

보라색 머리카락을 손에 넣은 스킬라는, 곧바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미노스 왕 앞으로 갔다. 왕은 적국의 공주 스킬라가 이 야밤에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보고는 짐짓 놀랐다. 스킬라는 망설임 없이 아버지 니소스 왕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두 손 모아 바치며 미노스 왕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이 저에게 죄를 짓게 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사랑의 맹세와 이 보랏빛 머리카락을 받으시고, 이 머리카락이 단순한 한 줌의 머리카락이 아니고 제가 바치는 제 아버지의 머리인 줄 알아주소서.”

그런데 스킬라의 말을 듣고 있던 미노스 왕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미노스 왕은 매우 공정한 사람이어서 공정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공정했냐 하면, 죽어서도 하데스(Hades)’의 나라에서 재판관 노릇을 할 정도로 공정했다. 공정한 미노스는 공정하지 못한 스킬라가 저지른, 천륜을 저버린 전대미문의 죄악에 기겁하고는 스킬라를 크게 꾸짖었다.

이 시대에 너같이 더러운 것이 있었구나. 신들이시여, 대지는 저것을 내치시고, 어떤 땅 어떤 바다도 저것 에게는 허락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스킬라 너 잘 들어라, 내 아버지 제우스 신의 요람이었던 크레타섬에 너같이 더러운 것이 들어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미노스 왕은 그렇게 고국과 아비를 배신한 스킬라를 내치고, 운명이 정해준 그대로 니소스 왕의 궁전으로 들어가 니소스 왕을 굴복시켰다. 니소스 왕의 정수리에 있던 문제의 그 머리카락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공정한 정복자 미노스 왕은, 정복당한 적들에게 갖가지 합당한 조치를 한 연후에, 자신이 거느린 함대에 돛을 올릴 것을 명령했다. 출항 명령을 받은 함대는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차갑고 싸늘한 뒷모습만 남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미노스 왕은 자기가 크게 꾸짖은 스킬라의 행동을 자신의 사랑하는 딸, 아리아드네가 적국의 왕자 테세우스(Theseus)’에게 똑같이 저지를 줄을 이때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스킬라는 먼 바다로 나가는 군함을 반은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스킬라는 군함들이 파도를 타는 것을 본 다음에야, 자신의 철없는 행동이 가져온 수치스러운 결과를 뼛속 깊숙이 받아들였다. 죽은 아비를 살릴 수도 없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없는,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스킬라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어디로 가느냐, 이놈아! 그대에게 승리를 안겨준 나를 두고, 무정한 이여! 내 조국은 이제 망하고 말았다. , 아버지 니소스 왕이시여, 저에게 벌을 내리소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외침을 혼자 감당하면서 스킬라는 바다에 풍덩뛰어들었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 스킬라의 얼굴은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물기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멀어지는 함대 쪽을 향하여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증오에 찬 열정의 힘이었던가, 단숨에 크레타의 함대까지 헤엄쳐 간 스킬라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미노스 왕이 타고 있는 우두머리 배의 뱃전에 착 달라붙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서 왔는지 물수리 한 마리가 가까운 하늘에서 이를 내려다보고는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 뾰족한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뱃전에 매달린 공주의 손등을 찍었다. 물수리는 다름 아닌 보라색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후 미노스 왕에게 최후를 맞이하고 물수리로 몸이 뒤바뀐 스킬라의 아버지 니소스 왕이었다.

스킬라는 고통에 못 이겨 뱃전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스킬라는 물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뱃전을 놓는 순간 부드러운 미풍이 스킬라를 하늘로 감아올린 것이다. 깃털처럼 하늘로 오른 스킬라는 그제야 제 몸에 하얀 깃털이 돋아난 것을 알았다. 그녀도 아버지처럼 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물수리가 된 것이 아니라 그녀는 희디흰 백로가 되었다.

물수리는 오늘날에도 옛날에 품었던 앙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하늘 높이 날다가 백로를 발견하면, 부리와 발톱으로 백로를 사정없이 공격한다고 한다. 풀리지 않는 옛 시절의 한을 풀어보려는 몸부림처럼 말이다.

무사히 크레타로 돌아온 미노스 왕은 함대를 항구에 정박시키고, 떠날 때 했던 서약에 따라 백 마리의 소를 아버지 제우스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5

그런데 크레타 군이 아테네와 일전을 치르기 전, 미노스 왕가에 남부끄럽고 황당한 일이 있었다. 사실 미노스 왕이 약소국 아테네를 치게 된 명목상의 이유는 아들의 복수였으나, 겉으로 말하지 못할 다른 이유도 있었더랬다.

여러분은 미노스 왕이 아우인 라다만티스와 크레타의 왕권을 두고 다툴 때를 기억할 것이다. 둘이 다투다가 형 미노스의 미움을 사 동생 라다만티스가 크레타에서 쫓겨나 보이오티아로 밀려나고, 결국 형 미노스가 선왕의 뒤를 이어 크레타의 왕의 자리에 올랐던 일 말이다.

사실, 이 과정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이 개입하여 미노스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미노스가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에게 파도 거품으로 만든 크고 빛깔 고운 황소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미노스는 이 소가 탐이 났던지 약속대로 포세이돈 신에게 제물로 바치지 않고 왕궁에 딸린 화려한 외양간에 꼭꼭 숨겨두었다. 대신 들판에서 어슬렁거리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를 제물로 올려 바다의 신을 속이려 들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경배를 받지 못한 것에 화가 난 포세이돈은 이 일을 그대로 두고 볼 아량 있는 신이 아니었다. 가장 낯뜨거운 방법으로 미노스를 욕보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바다의 신은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자신이 미노스에게 보내준 늠름한 황소에게 비정상적인 감정을 품게 함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왕비 파시파에는 궁전의 외양간에 있는 이 잘생긴 황소를 볼 때마다 품지 말았어야 할 상상을 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하다가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만두었어야 했다. 파시파에도 그러려고 하긴 했다. 그만두어야지 수차례 허벅지를 꼬집으며 다짐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파시파에의 정욕은 그 무렵 크레타에 머물던 아테네 출신의 손재간 좋은 대장장이 다이달로스(Daidalos)’에 의해 실현되었다. 다이달로스가 누구던가?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수많은 건축물을 만든 당대 최고의 재간둥이 아니던가? 쿠마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 시칠리아의 아라본 강 저수지, 셀리노스의 증기 목욕탕 등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가 일단 마음먹으면 만들지 못할 것이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파시파에의 얼굴을 보다못해, 다이달로스는 작정하고 파시파에가 듣기 좋은 말을 했다.

여왕이 저 황소에게 느끼는 감정을 저 황소도 똑같이 여왕에게 느끼도록 할 요량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비밀 작업장에 틀어박혀 며칠 밤낮으로 뚝딱거리더니 왕비 파시파에 앞으로 기품마저 느껴지는 암소를 한 마리 대령했다. 파시파에는 속으로 왜 갑자기 암소?’라고 생각하며 다이달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아 숨 쉬는 진짜 암소가 아니라 다이달로스에 의해 만들어진 이른바 기계 암소였다. 다이달로스가 말해 주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암소였다. 다이달로스가 실제와 똑같은 암소를 만들었다면 아마 누구라도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인공 암소의 속을 파내어 그 안에 파시파에가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엉덩이 부분에는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파시파에의 두 팔은 암소의 앞발 자리에, 두 다리는 암소의 뒷발 자리에 꼭 맞게 들어갔다.

일러준 대로 바퀴 달린 암소 안으로 파시파에가 들어가자 다이달로스는 이 암소를 끌고서 포세이돈의 황소가 있는 외양간으로 갔다. 그러고는 살며시 암소만 소 우리에 밀어 넣고서는 자리를 피했다. 굳이 이후에 일어날 장면까지는 보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그것이 왕비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고 여긴 것이다. 이윽고 황소는 이 암소를 진짜 암소인 줄 알고 외양간이나 저 들판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교접을 이루었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나 달이 찰 만큼 차자 파시파에는 왕실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흉측한 핏덩어리를 출산했다. 그것은 울음소리도 여느 사람의 아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때 태어난 것이 바로 머리는 황소 대가리이고 그 아래는 인간인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이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이다.

미노타우로스는 곧바로 미노스 왕과 크레타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포악할 뿐만 아니라 꼭 먹어도 사람고기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아내의 간통으로 태어난 그런 흉측한 괴물이 이 나라를 활보하게 놔둔다면 미노스 왕은 두고두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미노스 왕은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절대, 도저히 저 괴물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결단코!

 

6

이야기의 흐름상 파시파에와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른 이 대담한 황소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미노스 왕에게 화가 많이 나 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분이 덜 풀렸는지 이 소에게 한가지 임무를 더 주었다. 때는 고대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Herakles)’가 자신의 처자식을 죽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저 유명한 열두 가지 과업을 한 창 치르고 있을 때였다.

포세이돈은 자신이 미노스에게 보낸 황소를 파시파에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만들어 놓고 곧바로 이 황소를 미치게 만들어 궁전의 외양간을 뛰쳐나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미친 황소가 크레타섬의 논밭을 인정사정없이 짓밟게 하여 백성들의 모든 원망이, 모든 재앙의 원인인 미노스 왕으로 향하게 손을 썼다. 정작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것은 미노스 왕이었는데도 말이다.

미노스가 아르고스 왕에게, 성미 거친 짐승 잘 잡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의 파견을 요청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아르고스 왕의 명을 받고 크레타섬으로 건너간 헤라클레스는 이다산 기슭에서 이 황소를 따라잡고 한참 힘을 겨루었다. 그러나 승부는 쉽지 않았다. 힘이 다한 헤라클레스와 황소는 서로 멀찍이 물러서서 숨결을 가다듬었다. 누가 짐승인지 대충 보면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양쪽 모두 불같은 야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싸움을 구경하던 미노스 왕이 답답한 마음에 큰소리로 헤라클레스에게 물었다.

나의 형제 헤라의 영광이여, 그대는 황소를 잡으러 온 사람인가? 아니면 어르며 같이 놀러 온 사람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네그려.”

헤라클레스는, 거룩한 짐승을 가로채어 왕위에 오르고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배다른 형제, 미노스 왕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왕은 포세이돈 신 덕분에 왕위에 올랐으면서도 신에 대한 의무에는 충실하지 못했소. 황소가 말하는데 장차 소 때문에 욕을 좀 보실 거라고 합디다.”

미노스는 그렇지 않아도 왕비 파시파에 때문에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던 참이어서, 헤라클레스의 이 말에 부끄럽고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 말한다. 약간 티는 났을 것이다.

그런가? 그러면 아우가 이 형님을 위해 저 발정난 황소의 숨통 좀 끊어주게나. 저 황소를 죽여 지금이라도 바다의 신께 사죄의 제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이제서요?”

이렇게 말하고 헤라클레스는 황소를 죽이는 대신 산채로 사슬로 묶어 타고 온 배에 싣고는 자기가 떠나온 곳, 아르고스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중 일곱 번째 과업이었다. 헤라클레스에게 별별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던 아르고스 왕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던지 크레타 원정 기념이라면서 그 황소를 헤라클레스에게 주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포세이돈이 보낸 짐승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던지 이 황소를 풀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황소는 온 그리스 땅을 다 헤집고 돌아다니며 크레타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갖은 행패를 부렸다.

이때를 전후하여 미노스 왕은 어지러운 나라의 상황을 피해 둘째 아들 안드로게오스를 유학 차 아테네로 보냈던 것인데, 아들이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복수로 앞서 본 것처럼 아테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 이후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전개된다.

 

7

헤라클레스에게 황소 문제를 맡겨놓고 있는 동안에, 미노스 왕은 더 중요한 문제로 바빴다. 이미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테네, 알카토오스와 오랜 기간 전쟁을 치렀고, 이제는 미노타우로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노스 왕은 이미 자신을 위해 세상에서 제일 멋진 궁전 크노소스(Knossos)를 지어 준 다이달로스가 자신의 아내 파시파에에게 요상한 소를 만들어 준 것이 불쾌했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빌릴 수밖에 없었던 미노스는 우선 다이달로스에게 철통 요새인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os)를 짓게 한 후, 그 안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버렸다. 그 미궁은 너무나 복잡한 미로로 되어있어 들어가면 그 누구도 살아나올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비록 철통같은 감옥에 가두었으나 미노타우로스를 굶겨 죽일 수 없었던 미노스는 강대국의 왕으로서 전후 협정에 따라 아테네에 명령을 내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쓸 제물을 보내라고 했다. 이미 미노스 왕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던 약소국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아테네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마다 일곱 명의 여자와 일곱 명의 남자를 크레타로 보내야 했다. 아테네 왕은 매년 아테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릇에 담아 놓고, 제비뽑기로 열네 명의 희생자를 뽑았다. 제비뽑기 철이 돌아오면 아테네 전역은 비통함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아이게우스 왕이 우여곡절 끝에 아들 테세우스와 재회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또 2년이 흘렀다.

이제 아테네의 왕자가 된 테세우스가 열여덟 번째 생일날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한가롭게 산책을 하던 테세우스는 바닷가에서 슬피 울고 있는 늙은 부모들과 모래 위에 정박해 있는 검은 색 돛을 단 배를 발견했다. 크레타로 향하기 전 괴물의 먹잇감으로 선발된 젊은이들과 가족들의 이별 장면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된 테세우스는 분노했고 한탄했다. 스스로 희생자 무리에 끼어 크레타로 가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노스의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결심했다. 아테네의 왕이자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는 아들을 말렸지만, 테세우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젊은 왕자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 인들 구출에 성공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어 달고 돌아오겠다는 굳은 약속과 함께 기어이 크레타로 향했다.

미노스 왕은 어김없이 이번에도 아테네의 희생양들이 도착하자 직접 크레타 해안으로 마중 나갔다. 아테네의 왕자까지 왔다니 나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미노스 왕은 틀림없이 오래전 아테네에서 열다섯 나이에 비명횡사했던 아들, 안드로게오스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왕의 뒤에는 그의 아름다운 딸 아리아드네가 다소곳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미노스 왕의 착잡한 마음과 달리 테세우스를 알아본 그녀의 눈빛은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의 심장도 방망이질하듯 뛰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다.

미노스는 테세우스를 포함한 열네 명의 희생자 무리를 우선 크노소스 궁전에 가두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그곳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질 날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갇혀 있는 동안에 테세우스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미노스 왕의 통치술을 곁눈질로 배웠고, 가장 앞선 크레타 문명을 몸소 체험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미노스의 아름다운 딸 아리아드네를 알게 되었다.

적국 아테네의 왕자를 사랑하게 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어찌어찌하여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 해도 어떤 수로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끝없이 헤매다가 결국에는 지쳐 쓰러져 굶어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로서는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지게 될 어느 날 이른 저녁, 감옥 주변을 서성이는 수줍은 그림자가 있었다. 테세우스에 대한 연정이 점점 커져 이제 스스로 그 감정을 누를 수 없었던 아리아드네 공주는 테세우스를 살릴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사랑하는 테세우스와 아테네 인들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므로 그 전에 행동해야 했다. 아리아드네는 어두워지기 전 시종의 도움을 받아 횃불과 청동 몽둥이, 그리고 털실 한 뭉치를 가지고 감옥으로 찾아가 테세우스에게 건네주었다.

이 횃불로 길을 밝히세요. 그리고 이 털실 한쪽 끝을 미로 입구 기둥에 묶고 돌아올 때 이정표로 삼으세요. 소저는 그대를 위해 아버지를 배신한 몸, 떠나실 때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저는 그대의 사랑을 대가로 태어나 자란 이 나라를 떠나려 합니다.”

테세우스는 별 대꾸 없이, 아리아드네가 일러주는 대로 해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실뭉치를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 다이달로스였는지 아니면 아리아드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맞을 듯싶다. 이후 미노스 왕이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에게 취한 행동을 보면 그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오늘날 복잡한 상황을 헤쳐나가거나 난해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Ariadne’s Thread)’라고 부르게 된 유래이다. 중세 영어에서는 을 의미하는 단어로 ‘clewe’를 썼다고 한다. 수수께끼 같은 어려운 문제를 푸는 단서, 실마리를 뜻하는 현대 영어 클루(clue)’의 어원이다. clue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다.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에르퀼 푸아로(Hercules Poirot)’ 같은 유능한 탐정들은 항상 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 온갖 재주를 동원한다. 일단 실타래만 잡으면 사건 해결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8

테세우스는 미궁에서 탈출한 직후 아리아드네와 함께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크레타섬을 빠져나와 아테네로 향했다. 아리아드네가 이미 이 상황을 대비하여 탈출선을 준비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테세우스는 출발하기 직전 일행들과 함께 크레타의 모든 함선의 밑바닥에 커다란 구멍까지 내놓은 상태였다.

이런 신출귀몰할 기습작전 탓에 바다의 지배자 미노스는 달아나는 테세우스 일행을 먼 산 바라보듯 눈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나라와 자기 아버지를 배반한 스킬라에게는 그토록 엄격했던 미노스 왕은 자신의 딸이 똑같은 일을 저지른 것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추측하건대 아마 똥 씹은 표정과 같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대왕마마, 집안 단속부터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미노스 왕이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 테세우스 일행은 귀향 중에 먹을 물도 구하고 잠시 쉬어갈 겸 낙소스(Naxos) 섬에 들렀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곤히 잠든 틈에 그곳에 아리아드네를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테세우스는 비록 그녀의 도움으로 괴물을 죽이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감사할 일일 뿐 사랑으로 보상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한 여인이 아닌가!

테세우스는 곧 아리아드네 공주를 미련 없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테세우스 일행은 며칠을 더 항해해 해가 떠오를 때쯤 고국 아테네의 항구에 닿았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아니면 낙소스섬에 아리아드네를 떼어놓고 온 것에 대한 벌이었을까,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개선장군과 같은 자신의 귀향에 모두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이 슬피 울고 있는 것에 테세우스는 불길함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은 늘 그러하듯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자신의 나라 해안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은 것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왕은 아들이 타고 떠났던 배가 검은 돛을 달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사연 많은 아들이 죽었음을 확신하고서는 실의에 빠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하늘을 보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자신의 경솔함에 저주를 퍼부었다.

어쨌거나 이 일로 해서 테세우스는 생각보다 빨리 아테네의 왕이 되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기려 아테네 주변의 바다를 에게해(Aegean Sea)’라고 이름 지었다. 에게해는 아이게우스의 바다라는 뜻이다.

 

9

잠시, 낙소스섬에 홀로 남겨진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의 뒷이야기를 살펴보고 가야겠다. 테세우스가 아테네 젊은이들을 데리고 낙소스섬을 떠난 후에야 잠에서 깬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배반당했다는 것을 알고 흐느껴 울었다. 올림포스 천상에서, 슬픔에 잠긴 아리아드네를 보고 있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녀가 가여웠다. 그래서 무정하게 떠나간 인간 세상의 애인 대신 천상의 애인을 짝지어 주겠노라 마음먹었다.

아리아드네가 남아 있던 섬은 포도주의 신이자 부활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os)’가 마음에 들어 자신의 거처로 삼고 있던 섬이었다. 그래서 티레노스의 선원들이 소년 모습의 디오니소스를 유괴하여 몸값을 받아낼 궁리를 할 때, 어떤 마음 착한 선원에게 무사히 그를 데려다주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했던 섬도 바로 낙소스였다.

디오니소스는 제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 그 모습이 눈과 마음에 들어 그녀를 위로하고 아내로 삼았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에게 결혼 선물로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황금관을 주었다. 아리아드네는 포도주 신과 함께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아리아드네가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첫 번째 마이나데스(Mainades)’였을 지도 모른다.

후일 아리아드네가 죽자 디오니소스는 결혼 선물로 주었던 황금관을 벗겨 하늘로 던졌다. 관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보석은 점차 그 빛을 더 밝게 발하더니 마침내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옛 모습 그대로, 아리아드네의 관은 지금도 밤하늘 한 귀퉁이에 박혀 왕관자리라는 이름으로, 무릎 꿇은 헤라클레스자리뱀자리사이에서 아름다운 별자리로 남아 반짝이고 있으니, 오늘 밤이라도 여러분은 그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집에서 가장 가까운 천문대를 찾아 천체망원경에 여러분의 눈을 가져다 대보기 바란다.

 

10

한편,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여전히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애지중지했던 딸이 자신을 배반하고 이국 사내에게 눈이 멀어 미노타우로스를 죽게 한 것도 화가 났고, 실타래를 이용해 미궁에서 나오는 방법을 아리아드네에게 알려주어 테세우스가 달아날 수 있도록 해준 다이달로스에게는 더욱더 화가 나 있었다.

결국,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를 그의 아들 이카로스(Icaros)’와 함께 미궁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다이달로스가 누구던가? 미궁을 직접 만든 장본인이 아니던가? 가장 뛰어난 제조기술을 지닌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후손이 아니던가? 게다가 아테네 사람으로서 이 도시의 수호여신인 팔라스 아테나(Pallas Athena)’로부터도 온갖 기술을 내려받은 이가 바로 그 아니던가? 사람들은 다이달로스를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사람과 신을 통틀어 그의 선조인 헤파이스토스 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해오지 않았는가? 다이달로스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그의 과거 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봐야겠다.

그는 아테네 사람이다. 그가 크레타섬으로 오게 된 연유는 이렇다. 다이달로스는 앞서 말했듯이 신의 축복을 받아 당대 최고의 기술자이자 과학자로 명성이 자자했으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그의 조카 탈로스(Talos)’도 있었다.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큼 솜씨가 좋았던 탈로스는 곧 뱀이나 물고기의 등뼈를 보고 톱을 발명했다. 그는 또 두 개의 쇳조각을 붙이고, 그 한쪽 끝은 못으로 고정하고 반대편 끝은 뾰족하게 갈고는 두 조각으로 다시 벌려 원을 그리는 양각기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톱과 양각기를 보고 청출어람이라며 그의 재주를 높게 샀다. 다이달로스는 장인으로서의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인성은 많이 부족했던지 이것을 질투했다. 그는 자기 능력과 업적에 지나칠 정도로 긍지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와 어깨를 겨룰 자가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다이달로스는 어느 날 탈로스와 함께 높은 탑에 올라갔다가 기회를 엿보아 조카이자 제자를 탑에서 밀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변을 당한 탈로스는 땅으로 추락해 뼈마디가 모두 으스러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저승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발명하는 재주를 총애하는 아테나 여신이 이 가여운 소년을 구하여 자고새로 변하게 했다. 이 새는 지금도 나무 위에는 집을 짓지 않고, 높이 날지도 않는다. 떨어져 혼이 난 기억이 높은 것을 피하는 것이리라.

살인자 다이달로스는 이 범죄가 발각돼 아테네 법정의 소환 명령을 받았으나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에 크레타로 도망쳤다. 미노스 왕은 도망자 신세였던 다이달로스를 받아들였고, 다이달로스는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같은 후대의 위대한 공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도와준 미노스 왕을 위해 봉사해 오다가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그가 미노스 왕을 배신한 죄로 다시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니, 사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시간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다시 여기는 크레타의 미궁, 죄수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말했다.

비록 우리가 이곳에 갇혀 있지만, 공기와 하늘은 뚫려 있다. 우리는 저 창공으로 날아가면 돼.”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다이달로스는 곧바로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미궁 안으로 떨어져 여기저기 널려있는 새의 깃털과 미로의 모퉁이와 골목을 밝히고 있는 횃불을 보고 궁리 끝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내 다이달로스는 새들의 깃털을 주워 모으더니 횃불의 밀랍을 이용해 아들과 자신에게 꼭 맞는 날개 두 쌍을 만들기 시작했다. 날개를 어깨에 달고 하늘을 날아 탈출하려고 한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이달로스 부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기발한 작전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마지막 주의사항을 말했다. 그는 아들에게 절대로 너무 높이 날아서도, 너무 낮게 날아서도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하늘 높이 날면 몸에 붙인 밀랍이 태양에 녹아 날개가 떨어져 죽을 것이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에 날개가 축축해져 역시 추락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아들이 그 아비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듯이 이카로스는 아비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이카로스는 자신의 몸이 둥둥 떠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더 높이 올라간다면 어떤 기분일까, 구름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바다 끝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날개를 퍼덕일수록 알고 싶은 것이 점점 늘어갔다.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점점 높이 헬리오스가 끄는 태양 마차 가까이 올라갔다. 다이달로스는 아들을 붙잡을 틈도 말릴 겨를도 없었다.

이카로스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린 순간 몸이 기우뚱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날갯죽지에 붙어 있어야 할 깃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밀랍이 녹아 흘렀던 것인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카로스는 떨어져 나간 깃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이카로스가 풍덩소리와 함께 바다 밑으로 사라질 때, 자고새 한 마리가 물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이후 이카로스는 후세 사람들에게 과학기술이 갖는 위험성의 상징이자 가능성의 한계를 깨뜨리려는 갈망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실패할 것이 두려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일컫는 이카로스의 날개(Wings of Icaros)’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바다에 추락한 이카로스의 시신을 수습하여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이가 헤라클레스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헤라클레스는 옴팔레(Omphale)’ 여왕 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꽤 자유분방하게 하고 다녔다.

헤라클레스는 돌리케섬 여행 중에 이카로스의 시신이 섬 해안으로 밀려온 것을 보았다. 그는 죽었으나 아직 수려한 미모를 잃지 않은 이카로스를 돌리케섬 햇볕 잘 드는 곳에 정성스레 묻어주고 이카로스가 죽어서 밀려왔던 섬 앞바다 이름을 이카로스의 바다라는 뜻으로 이카리아(Icaria)’라고 부르게 했다.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그 은공에 보답하느라고 그 장한 손재주로 헤라클레스 대리석상을 빚어 피사에다 세웠다. 헤라클레스는 살아 있는 동안에 대리석상으로 선 최초의 영웅일 것이다. 하지만 이 대리석상의 명은 길지 못했다. 한밤중에 자기 대리석상을 본 헤라클레스는 그것이 살아 있는 괴물인 줄 알고 돌멩이를 냅다 집어 던졌다. 천하장사 헤라클레스가 집어 던진 돌멩이를 맞았으니 그 대리석상,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11

다이달로스는 슬픔에 잠긴 채 무사히 시칠리아로 도망갔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 부자가 달아났다는 말에 어이없고 황당해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누구도 탈출 불가능하다는 천하의 요새라더니 벌써 횟수로는 두 번째, 사람 숫자로는 열여섯 명이나 도망간 꼴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노스 왕은 그리스 전역 방방곡곡에 방을 붙여 다이달로스 부자를 수배하였다. 직접 신고하는 자뿐 아니라, 사소한 풍문이라도 고하기만 하면 큰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감감무소식, 왕은 점점 조바심이 들었고 이렇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래 제 꾀에 넘어오도록 하자. 이렇게 하면 제깟 놈이 그 알량한 재주 자랑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묘안이란, 다이달로스가 늘 자부하던 문제해결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미노스 왕은 주변의 크고 작은 여러 나라에 무장한 함대를 파견하여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든 왕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하나 냈다.

소용돌이 모양의 소라 껍데기에다 한 번에 실을 꿰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소.”

그 문제를 푸는 자는 다이달로스밖에 없을 테니 이를 맞히는 왕의 나라에 다이달로스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얼마 후, 정말로 소식이 들려왔다. 시칠리아의 코칼로스 왕이 다음과 같은 기막힌 해답을 보내온 것이다.

꼬불꼬불한 소라 껍데기 끝에 구멍을 뚫고 허리에 실을 맨 개미를 그 구멍으로 들여보내면 됩니다. 개미가 결국 구멍 난 껍데기 끝으로 나오게 될 테니, 바로 이것이 한 번에 실을 꿰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물론, 이 대답은 다이달로스가 알려준 것이었다. 약속대로라면 코칼로스 왕은 상을 받아야 했으나 돌아온 것은 협박과 회유였다. 미노스 왕은 시칠리아 해안에 모든 함대를 집결시킨 후, 코칼로스 왕에게 죄인 다이달로스를 보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 코칼로스는 자기 품으로 날아온 새를 쫓는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번이 독재자 미노스를 죽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이달로스와 더불어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우선 코칼로스는 다이달로스를 돌려보내는 척하면서, 승리자 미노스 왕을 자신의 왕궁으로 초대해 귀한 손님 대접하는 관례대로 했다.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으로 미노스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나서 적당한 기회를 엿보다가, 미노스 왕에게 피로도 풀 겸 자신의 딸들이 준비한 커다랗고 화려한 욕조에서 목욕할 것을 권하였다. 승리에 도취 된 미노스는 의심은커녕 흡족한 마음으로 욕조에 몸을 담갔다. 완전한 무장해제였다.

미노스가 그렇게 알몸으로 탕 안에서 시칠리아 여인들과 희롱을 하고 있을 때, 코칼로스 왕은 미리 계획한 대로 배관 기술의 달인 다이달로스를 시켜 목욕탕과 연결한 관으로 펄펄 끓는 물을 틀게 했다. 코칼로스 딸들도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대로 바가지와 양동이를 이용하여 뜨거운 물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미노스는 뜨거운 물에 데어 죽었다. 문명을 일으킨 위대한 왕의 죽음은 이토록 허무했다.

신들이 미노스 왕의 죽음을 애도하여, 저승 세계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바로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저승 세계의 재판관이 된 것이다. 저승 세계의 법정에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이 살아생전에 선행을 베풀었는지, 악행을 저질렀는지 심판을 받는다. 세 명의 재판관들은 미노스, 아이아코스, 그리고 미노스의 아우였던 라다만티스였으니, 미노스는 죽어서 아우와 재회하게 된 셈이다.

미노스는 지하 감옥 타르타로스(Tartaros)’와 하데스의 궁전 뒤쪽 엘리시온(Elision)’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딱 버티고 앉아 혼령들을 기다리고 있다. 미노스는 그 혼령들이 저지른 이승에서의 죄에 따라 타르타로스로 보내야 할지, 엘리시온으로 보내야 할지 심판한다. 타르타로스의 재판관은 미노스의 동생 라다만티스였는데, 그는 혼령들을 심판하여 지상에서 지은 죄를 자백하게 한 다음 그 경중에 따라 벌을 내렸다.

 

12

인연은 좋든 싫든 끊어지지 않는 사슬로 엮여 있는가, 미노스와 테세우스의 악연은 미노스 왕이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왕이 된 테세우스는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Hippolyta)’와 결혼하여 아들 히폴리투스(Hippolytus)’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돌아갔던지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또 다른 딸이자 아리아드네의 누이인 파이드라(Phaedra)’를 후처로 맞았다.

다시 반복되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이드라는 의붓아들 히폴리투스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히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당한 파이드라는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 편지에는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는 거짓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읽고 분노를 참지 못한 테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대신 복수해 달라고 빌었다. 어느 날 히폴리투스가 이륜차를 몰고 해변을 달리고 있을 때 파도를 헤치고 괴물이 뛰쳐나와 말을 기겁하게 했다. 깜짝 놀란 말들이 발광하며 날뛰자 이륜차는 산산조각이 났고, 억울한 히폴리투스는 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때 히폴리투스의 나이는 열네 살에 불과했다. 이렇게 비참한 운명의 충격은, 종종 당사자들이 아닌 다음 세대의 자손들을 향해 거대한 해일처럼 닥치곤 한다.

암튼 이 의붓아들에게 사랑을 느낀 파이드라 이야기에서 심리학 용어가 하나 생겼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랑을 느껴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일컬어 바로 파이드라 콤플렉스(Phaedra Complex)’라고 한다.

 

13

아테네 인들은 전통적으로 미노스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테네의 중세 작가들은 시, 희곡, 전설 같은 여러 문학작품에서 미노스 왕을,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의 먹잇감으로 아테네 젊은이들을 던져주었던 인물로만 치우쳐서 묘사하곤 했다. 하지만 강력하고 공정한 통치자로서 재임 기간 그가 이룩한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그가 크레타 왕국을 크게 일으켜 유럽 최초의 문명인 크레타 문명을 일구어낸 장본인인 것을 잊어선 안 된다.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전 1400년경까지 존속한 지중해의 크레타섬에서 번영한 고대문명으로, 에게 문명의 일부이고 그리스 문화의 시작이었다. 곧 그리스인들의 뿌리이자 정체성 그 자체가 미노스가 일으킨 크레타 문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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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건설자, 카드모스

에우로페, 하르모니아, 세멜레, 디오니소스, 이노, 악타이온, 아가베, 펜타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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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를 크게 테베 전설권크레타 전설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전설권의 시작은, 신이든 인간이든 불문하고 미녀만 보면 그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올림포스의 으뜸 신 제우스(Zeus)’로부터 비롯되었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티로스(또는 시돈)’라는 도시가 있었다. 티로스는 바다의 으뜸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 아게노르왕이 통치하는 나라였다. 아게노르 왕에게는 에우로페(Europe)’라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에우로페는 눈망울이 큰 소녀, 또는 넓은 시각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이다.

어느 날 에우로페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두 개의 커다란 땅덩어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아시아 대륙은 에우로페에게 넌 여기 아시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에 있어야 한다.’라고 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에우로페의 이름으로 불릴 거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땅이 지금의 유럽 대륙이다.

얼마 후, 에우로페가 또래 친구들과 여느 때처럼 바닷가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였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이, 물을 튀기기도 하고 조약돌을 줍기도 하면서 뛰노는 소녀들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펼쳐진 해변 위로 잔잔한 파도가 밀려왔다가 한 움큼씩의 모래를 품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따사로운 풍경 속에 때 묻지 않은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가득 넘쳐났다. 누구라도 그 광경을 본다면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이 천상에 있는 난봉꾼, 제우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이때 제우스는 잠시만이라도 질투심이 심한 아내 헤라(Hera)’를 떠올렸어야 했는데, 늘 그랬듯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신 줄을 놓아버린 변신의 제왕 제우스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늠름하고 아름다운 수소로 변신했다. 물에서 헤엄쳐 나온 수소는 그 걸음도 당당하게 소녀들이 있는 해변으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에우로페 쪽으로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제자리에 멈춰서서 이 순진한 처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소의 눈을 가까이서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왕방울만 한 소의 눈만큼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것도 드물다. 다른 친구들은 뿔뿔이 달아났지만, 에우로페만은 도망가지 않고 놀란 눈으로 이 수소의 깊은 눈과 기품있는 모습을 호기심 가득 안고 바라보았다. 수소는 목주름이 굵고 깊게 패어 있었고 보석보다 화려한 뿔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녀를 홀렸을까? 마침내 에우로페는 용기를 내 수소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수소도 에우로페가 안전하게 올라탈 수 있도록 두 앞발을 가볍게 구부려 주었다. 에우로페가 탈 없이 등에 오르자 소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돌려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석양을 뒤로하고 바다를 가로질러 멀리 헤엄쳐 갔다. 에우로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느다란 두 팔로 두꺼운 소의 목을 꼬~옥 껴안았다.

수소의 등에 업힌 에우로페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 전에 본 적 없던 신기한 일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크고 드센 파도가 잠잠해지더니 바다 밑에서는 돌고래를 타고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Nereid)’가 나타났고, 인어 모습을 한 바다의 딸림 신 트리톤(Triton)’이 축복의 나팔을 불었다. 그녀의 나풀거리는 옷은 바닷물에도 젖지 않았고, 그녀의 살갗을 적시는 바닷물도 차갑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제우스의 형이자 아우인 바다의 대장 신 포세이돈이 관장하였다.

에우로페를 태운 수소는 무사히 지중해를 건너 마침내 크레타(Creta)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에우로페는 두 번 다시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있는 고향 땅, 티로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가지 않았다.

크레타섬은, 오래전에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Rhea)’ 여신이 독재자 아버지 크로노스(Kronos)’의 눈을 피해 어린 제우스를 숨겨두었던 섬이었으니 제우스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땅이었다. 제우스가 사랑스러운 에우로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자신의 요람 같은 이 섬에서 꿀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포근하고 아늑한 사랑, 꿈같은 사랑 그거 말이다.

이 사건을 사랑하는 연인들의 야반도주로 볼 것인가, 난봉꾼 제우스에 의한 공주(에우로페) 납치사건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하여 의견이 분분했다. 필자는 전자의 견지에서 이야기를 풀었지만,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엉겁결에 애지중지하던 딸을 잃은 아게노르 왕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딸의 친구들에게 그날 있었던 상황을 전해 들었을 아게노르 왕은 그 수컷 황소의 정체를 강하게 의심했을 것이다.

수소의 등에 올라탄 에우로페가 크레타섬에 별 탈 없이 도착한 이후,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불쌍한 아게노르 왕이 있는 티로스 땅으로 가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이야기는 계속된다.

 

2

티로스의 왕이자 에우로페의 아버지인 아게노르는 너무나도 딸을 사랑했기에 딸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에 크게 상심했다. 딸이 가출한 것인지, 누구로부터 납치당한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하루바삐 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아게노르 왕에게는 딸 에우로페 말고도 장성한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아게노르 왕은 아들들에게 불쌍한 여동생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오라고 명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도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다섯 아들 중에 카드모스(Cadmos)’가 가장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강인하게 보이는 어두운 갈색의 곱슬머리에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어찌나 선명한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짙은 음영이 생겨 때로는 더 용맹스럽게, 때론 우수에 찬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날씨와 밤낮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내는 그의 외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신뢰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카드모스 역시 다른 형제들처럼 에우로페를 찾아 길을 떠났는데, 그가 킬리키아 해안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수소 한 마리가 카드모스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카드모스를 어디론가 이끄는 것이 아닌가. 카드모스는 수소를 범상치 않게 여겨 수소가 이끄는 대로 홀로 발길을 옮겼다. 소가 도착한 곳은 킬리키아산 깊숙한 동굴 입구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동굴 안쪽에는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이 잠을 자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카드모스에게 수소가 입을 열어 내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올림포스의 제우스다. 그대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다. 저기 보이는 괴물은 튀폰(Typhon)’이라는 놈이다. 저 흉물이 나의 힘줄과 벼락을 가져가 내가 이 모양으로 어렵게 됐다. 내가 빼앗긴 물건을 찾아다오.”

수소는 말을 마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카드모스는 이거 예삿일이 아니로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바짝 긴장했다. 그 수소가 정말 제우스 신이 맞는다면, 카드모스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동굴 안에 있는 튀폰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시무시해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상반신은 우락부락한 거인의 모습이나 허리 아래로는 뱀처럼 미끌미끌한 비늘과 체액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그보다 작은 독사들 수십 마리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의 나무둥치만 한 팔뚝 끝에는 손가락 대신 뱀이 백여 마리나 달려 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 괴물의 몸집이 웬만한 집채보다도 커 보였다.

카드모스는 힘으로 대적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그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으뜸 신 제우스도 쩔쩔매고 망신을 당하지 않았는가.

동굴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궁리 끝에, 카드모스는 이게 될까?’라고 의심을 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니 생각한 대로 해보기로 했다. 우선 듣기 좋은 피리 연주로 자신의 선의를 보여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고, 적당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땐 또 다른 묘안이 떠오를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리 연주를 곧잘 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러 차례 찬사를 듣곤 했다. 그게 듣기 좋아 항상 피리를 지니고 다녔는데, 이참에 괴수를 상대로 솜씨를 들려줄 생각인 것이다. 자신의 연주를 듣는 사람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가지고 있던 적의마저도 얼음 녹듯 녹았었다. 이번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제우스 신이 나를 찾아온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어차피 별다른 대안도 없으니까.’

카드모스는 동굴 입구 근처 괴물은 볼 수 없는 곳에 무기를 내려놓고 목동처럼 피리를 불며 동굴에서 잠을 자고 있던 튀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감미로운 음악 소리에 튀폰은 몸을 뒤척이더니 잠에서 깨어 조용히 눈을 뜨고 아무 소리 없이 카드모스의 연주를 들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감미로운 소리였다. 카드모스가 정성스럽게 피리 연주를 마치자 튀폰이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굴 안이라서 그런지 괴수의 음성은 그 울림이 아주 웅장했다.

네 연주가 참으로 듣기에 좋구나, 나를 위해 더 불어줄 수 있는가? 내 너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 내가 너를 여신과도 짝지어 줄 수 있느니라.”

튀폰의 칭찬에 카드모스는 속으로 한 호흡을 가다듬고서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튀폰의 여러 가지 선물 제안은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생각한 한가지 꾀를 풀어냈다.

제가 피리도 피리지만 수금 연주 실력이라면 수금의 명수 아폴론 신보다 낫답니다. 예전에 아폴론 신과 수금으로 대결을 했는데, 모두가 저의 소리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제 실력에 자존심이 상한 제우스 신이 번개로 제 수금 줄을 잘라버렸지 뭡니까.”

그리고 튼튼한 수금 줄만 있으면 당장 줄을 이어 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데 아쉽다고 허풍을 떨었다. 튀폰은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갔다. 수금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 소리가 피리 소리보다 좋다는 말에 빨리 들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가 제우스의 벼락으로도 끊어지지 않을 줄을 줄 터이니 세상에서 제일 강한 수금을 만들어 나를 기쁘게 하라. 더구나 제우스의 벼락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면서 제우스의 힘줄을 카드모스에게 선물로 주었다. 카드모스의 손으로 제우스의 힘줄이 넘어오자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쩍 벼락이 치면서 우르릉천둥소리가 들렸다. 제우스가 끊어진 자신의 힘줄을 이어붙인 다음 재빨리 튀폰이 감추어둔 벼락을 찾아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우스 신은 되찾은 힘줄과 벼락을 이용해 다시 튀폰과의 일전을 치렀는데, 튀폰에게 한번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 승리를 쟁취했다. 튀폰은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쫓겨나면서 에트나 화산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천하의 으뜸 신이라는 제우스가 이런 수모를 겪게 되었던 것일까? 다소 복잡한 얘기지만 아주 짤막하고 단순하게 살펴보자.

튀폰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오만해진 올림포스 신들을 벌하기 위해 낳은 자식이었다. 가이아의 명령으로 튀폰이 천상의 신들에게 기습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난리 통에 제우스를 제외한 올림포스 열두 신들은 제각각 혼비백산, 동물로 변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유일하게 제우스만이 자신의 강력한 무기인 번개를 던지고 아다마스의 낫으로 튀폰을 상대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거의 무방비였던 제우스는 튀폰에게 낫을 빼앗기고 힘줄까지 잘리게 되었다. 제우스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동굴에 유폐되었고 제우스의 번개와 힘줄은 괴물이 지키게 되었다. 이때 카드모스가 킬리키아산을 지나가게 되었고 제우스가 수소의 형상을 보내 카드모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암튼 카드모스의 도움으로 거의 죽다 살아나게 된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드모스를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

 

3

카드모스는 다시 일행들과 합류하여 누이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가 방향을 잡아 도착한 곳은 헬라스 땅이었다. 남달리 영리했던 그는 그냥 무작정 헤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리스 전역에 영험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예언의 신 아폴론(Apollo)’이 맡겨놓은 신탁(Oracle)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신전은 세계의 배꼽이자 세상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델포이에 있었으므로 델포이 신전이라고 불렸다. 델포이가 그 이름을 얻고 세계의 배꼽이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상상력 사전에서 인용한다.

 

<어느 날 제우스는 뜬금없이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독수리 두 마리를 동시에 날려 보내고 두 독수리가 어디서 만나는지를 지켜봤다. 두 독수리가 만나는 지점을 옴파로스(Omphalos)’, 즉 세계의 배꼽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양 끝에서 출발한 두 독수리는 파르나소스산 중턱에 있는 한 동굴에서 만났는데, 이 동굴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놓아둔 거대한 뱀이 지키고 있었다. 아폴론은 이 뱀을 죽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신전을 세웠다. 그런 다음 신전을 지킬 사제들을 찾다가 크레타 사람들의 배를 보고 돌고래로 변신하였다. 돌고래로 변한 아폴론은 그들을 신전 쪽으로 이끌었는데, 그때부터 이곳은 델포이로 불리게 되었다.>

 

델포이 신전을 지키는 여사제 퓌티아, 신탁을 전할 때면 대지의 갈라진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에 취해 몽환적인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러면 주위의 다른 여사제가 퓌티아의 웅얼거림을 해석해 신이 맡겨놓은 말이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 도착한 카드모스가 예를 갖춰 아폴론 신이 자신을 위해 맡겨놓은 신탁이 무엇인지 묻자, 커다란 삼발이 위에 오른 영매 퓌티아는 황홀경에 빠진 듯, 무아지경에 빠진 듯 흐물거리다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누이를 찾지 마라, 찾아봤자 소용없다.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어가다 소 떼를 만나거든, 그중에서 옆구리에 반달 모양이 있는 암소를 찾아라, 반달 모양이 있는 암소를 발견하면 발길질을 한번 해주고 짐승이 달리는 대로 쫓아라.”

퓌티아는 이어서 카드모스에게 이르기를, 소가 드러눕는 그 자리에 도시를 세우라고 했다. 신탁은 원래 애매모호 하기로 유명하다. 카드모스와 그 일행은 여동생 에우로페를 찾아야 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그 뜻을 짐작하지도 못한 채 신탁이 일러준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정말로 옆구리에 반달 모양이 있는 암소를 발견했다. 카드모스와 일행은 조심스럽게 암소의 뒤를 따라갔다. 암소는 계속해서 케피소스 강 지류를 건너 파노페 들판까지 나아갔다. 이윽고 발걸음을 멈춘 암소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한바탕 크게 솟아오르더니, 대기를 그 울음소리로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신탁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자, 카드모스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카드모스는 대지에 무릎을 꿇고는 그 낯선 땅에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신에게 받은 큰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4

카드모스는 기진맥진 누운 소를 잡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특히 포이보스 아폴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제물을 깨끗이 닦을 물과 신에게 올릴 맑은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근처에는 누구의 손을 탄 흔적이 없는 신성한 숲이 있었고, 숲 깊숙이 풀과 이끼로 뒤덮인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동굴 깊숙이 맑디맑은 샘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물이 뽀글뽀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이 동굴에는 크고 사나운 용 한 마리가 이 샘물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용의 눈꺼풀 아래로 이글이글 불타는 눈깔이 숨어 있을 듯했고,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아무리 날카로운 창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날개는 접혀 있었지만 펼쳤을 때의 길이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컸다. 무시무시한 대가리 중앙의 뿔과 뾰족하게 솟아난 이빨은 어떤 적이라도 단번에 찢어버릴 것 같았다. 드러나지 않은 앞발의 발톱은 또 얼마나 치명적일지, 웅크리고 누워있는 몸뚱이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이 공포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티로스의 정예병이었던 카드모스의 부하들은 용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병에 샘물을 담았다. 그러나 그토록 주의를 기울였어도 물동이 속으로 샘물이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가져간 물동이의 첫 번째가 다 차지도 않았는데 용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이글거리는 눈알이 병사들 쪽으로 향했다. 용이 콧구멍 밖으로 뜨거운 증기를 뿜으면서 한 걸음을 옮기자 동굴 안에서는 확연한 진동이 느껴졌다.

병사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고, 두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용이 비늘 돋은 몸을 잔뜩 사렸다가는 고개를 위로 쳐들며 화염을 쏟아내자 어떤 병사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병사는 병장비를 팽개치고 부리나케 동굴 밖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그중 배짱 있는 일부 병사들이 용에 대항하려고 창을 겨누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병사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동굴 안팎에 널브러져 있는 그들의 팔다리가 현장의 처참함을 말해줄 뿐이었다.

카드모스는 신들에게 제사를 올릴 준비를 끝마치고 물을 뜨러 간 부하들을 기다렸지만, 시간이 되어도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자 손수 그들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는 사자 가죽을 붙인 방패가 있었고, 그의 등과 손에는 기다란 창과 날카로운 검이 있었으며, 그의 탄탄한 가슴에는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믿음직스러운 용기와 두둑한 배짱이 있었다.

부하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 카드모스는 동굴 입구에 다다라 즐비한 부하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멀지 않은 곳에서 부하들의 피로 몸뚱이를 붉게 물들인 채 앉아 있는 용도 발견했다. 그제야 전후 사정을 짐작한 카드모스는 분노에 휩싸여 숲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크게 부르짖었다.

, 나의 전우들이여, 제우스 신께 맹세코 내 피와 살과 같았던 그대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그대들의 뒤를 따르리라. 오라! 이 사악한 괴물아!”

카드모스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집어 들고서는 사악한 용을 향해 던졌다. 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능히 성벽도 부술 수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용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가격했으나 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을 뿜으며 카드모스를 위협했다. 방패를 이용해 불길을 가까스로 막은 카드모스는 오른손으로 투창을 부여잡고 용의 빈틈을 노리며 기회를 엿봤다. 잘못 던지면 용의 비늘이 창을 튕겨낼 것이기 때문에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생각했다. 카드모스는 비늘이 가장 가늘고 성성하게 박혀있는 용의 모가지 뒤쪽을 향해,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있는 힘껏 투창을 던졌다. 투창은 바위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비늘을 꿰뚫고 용의 뒷덜미 깊숙이 들어간 창머리는 용이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픔에 못 이겨 미쳐 날뛰는 이 괴물은 몸뚱이를 비틀어 뒤쪽에 있는 제 상처를 보려고 했다. 그리고는 창자루를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창자루는 동굴 입구 아치에 부딪혀 부러지고 창날은 계속해서 용의 몸속에서 괴물을 괴롭혔다. 괴물의 목은 독기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괴물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불꽃과 연기는 대기를 더럽혔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용의 괴성이 울창한 숲을 건드리자 놀란 들짐승, 날짐승들이 서로 앞다투어 튀어 올랐다. 괴물은 몸을 잔뜩 웅크리는가 하면 금방 바닥에 나 뒹굴다가 발작처럼 퍼덕거리기도 했다.

이윽고 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괴물은 카드모스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카드모스는 용의 앞에 딱 버티고 서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흉측한 용의 대가리를 향해 투창을 겨누었다. 용이 그 투창을 물어뜯으려 할 찰나, 카드모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괴물의 주둥이 깊숙이 창을 쑤셔 넣었다. 창은 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목구멍 깊고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이내 괴물의 턱주가리는 피거품으로 범벅이 되었다. 괴물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요동치자 주변의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지고 어떤 것은 뿌리가 통째로 뽑히기도 했다.

마침내 소리와 함께 용이 쓰러지기 무섭게 카드모스는 괴물의 머리에 올라타 아직 감기지 않은 용의 눈알을 내려 보았다. 이미 초점을 잃은 눈알이었다. 카드모스는 날카로운 검을 치켜세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 강력한 한방으로 가늘게 남아 있던 용의 숨통은 마지막 경련을 끝으로 영원히 끊어졌다.

 

5

이렇게 부하들이 모두 희생당한 후에야 카드모스는 용을 죽이고 샘물을 떠서 신들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카드모스는 큰일 났다. 그가 죽인 용은 전쟁 미치광이 아레스(Ares)’ 신의 것이었으니, 아레스가 자신의 신성을 침범한 카드모스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카드모스에게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아테나(Athena)’ 여신이 있었다. 카드모스를 어여삐 여긴 아테나 여신은 사건이 벌어지자 즉시 카드모스에게 화를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주었다. 카드모스는 누가 말하는 것인지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다음과 같은 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

용의 이빨을 모두 뽑아 서둘러 땅에 심어라! 곡식의 씨앗처럼 생각하고 여기저기 주변 땅에 심어라!”

카드모스가 아테나 여신의 뜻대로 용의 이빨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뽑아냈다. 거대한 용이었던 만큼 그 이빨의 크기도 장정 주먹만큼이나 컸다. 뽑은 이빨들은 한 달치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자루로 다섯 자루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카드모스는 땀이 식을 틈도 주지 않고, 주변에서 잡히는 대로 꼬챙이를 들어 땅의 고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랑마다 용의 이빨을 심고 흙으로 덮자, 곧이어 땅이 들썩이더니 그곳에서 창과 방패로 무장한 남자들이 쑤~욱 자라났다. 투구와 갑옷까지 제대로 갖춘 전형적인 병사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카드모스는 정체 모를 무장 병력의 출연에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카드모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창에 찔려 죽고, 다른 병사는 화살에 맞아 죽는 식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죽어버렸다.

얼떨떨한 카드모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다른 자루에 담겨 있던 용의 이빨을 땅에 던지자 아까랑 똑같이 땅이 들썩이고, 이내 아까와 같은 모습의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두 번째 자라난 남자들은 별로 싸우려는 기색이 없었다.

카드모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발 앞에 놓여 있던 주먹만 한 돌 하나를 주워 그들 사이에 던졌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이 돌을 던진 것이라고 오해하여 잘잘못을 따지며 또 치고받고 싸우고 죽이기 시작했다. 싸움은 앞선 것보다 더욱 치열했다. 카드모스는 이 인간들이 다섯밖에 남지 않자 큰 소리로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다섯 중의 하나가 무기를 내려놓고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우리 평화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소리에 나머지 무장 병사들도 제각기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내려놓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화해하더니, 카드모스 앞에 도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준비가 다 되었는지 일제히 왼 무릎을 땅에 꿇고 큰 소리로 충성을 맹세했다. 카드모스는 그제야 신들의 뜻을 이해하고 이들에게 씨앗을 뿌려 생긴 인간이라는 뜻의 스파르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때, 카드모스와 다섯 명의 생존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카드모스가 병사들 사이로 던졌던 돌멩이는 사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누이이자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Eris)’가 남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었는데, 이들이 화해와 충성 맹세를 하는 동안 그 불화의 돌을 게눈 감추듯이 슬쩍 집어가는 손이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정체 모를 그 손은 카드모스가 땅에 뿌리고 남은 용의 이빨도 같이 가져가 버렸다. 돌멩이는 그렇더라도 카드모스는 성물인 용의 이빨만큼은 간수를 잘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스파르토이는 스스로 맹세한 대로 카드모스의 편이 되어, 그를 위해 도시를 건설했다. 카드모스는 이 도시 이름을 테베(Thebes)’라고 부르게 했다. 이 때문에 테베는 카드모스와 그 다섯 명의 생존자가 세운 도시라고 전해진다. 훗날 헤라클레스, 니오베,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장대한 테베 전설권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6

한편, 전쟁의 신 아레스는 카드모스가 자신의 용을 죽인 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이 돌봐주고 있는 카드모스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칫하면 신들 사이에 큰 불화가 생길 것이므로 아레스는 궁리 끝에 아테나 여신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벌을 주기로 했다. 그래서 카드모스에게 8년간 자신에게 봉사하며 죗값을 치를 것을 명했다. 카드모스는 어쩔 수 없이 이 미치광이 전쟁 신 아레스에게 8년간이나 봉사했다. 그것에 만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레스는 8년이 지난 후 카드모스에게 자신이 아프로디테(Aphrodite)’와 바람을 피워 낳은 딸 하르모니아(Har monia)’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올림포스에 속한 불멸의 존재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아내로 주어진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신들은 모두 신계와 인간계의 이 경사스러운 결합을 축하해 주었는데, 특히 아프로디테의 남편이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는 자신의 의붓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그런데, 하르모니아 출생과정이 재미있다. 알고 보면 신들이나 인간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이므로 바쁘더라도 여기서 살피고 가야겠다. 웅진지식하우스의 신화 깊이 읽기아레스 편을 몇 글자만 바꿔 옮겨 적는다.

<변덕스러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희한하게도 온화하고 재주 좋은 남편 헤파이스토스보다 호전적이고 제멋대로인 나쁜 남자 아레스를 더 좋아했다.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태양신 헬리오스(Helios)’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대담한 연애 행각을 발견하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알려주었다.

손재주 좋은 헤파이스토스는 분개하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금속을 가늘게 늘여 촘촘한 그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뒹구는 침상을 찾아 그물을 펴둔 다음, 자신은 렘노스로 며칠간 휴양을 다녀오겠다고 신들 앞에 공표했다.

헤파이스토스가 떠나자마자 아프로디테는 물 만난 고기 마냥 아레스를 불러들였고, 두 신은 침대에 누워 불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몰래 지켜보고 있던 헤파이스토스는 이때다!’ 하면서 올림포스 신들을 대동하고 불쑥 방으로 들어왔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달아나려고 해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신들은 남신, 여신 가릴 것 없이 웃고, 손가락질하고, 저급한 말을 내뱉으며 즐거워했다. 그리하여 아레스는 모든 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때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불륜 행각으로 태어난 여식이 바로 하르모니아였다. 하르모니아의 출생은 그렇다손 쳐도 하르모니아의 결혼 생활은 테베의 왕 카드모스와 더불어 얼핏 보면 행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신들은 이 완벽해 보이는 부부에게 축복만 준 것이 아니었다. 신들의 시기와 질투심은 잊을만하면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7

카드모스가 비록 테베를 건설하고 그 도시국가를 위해 수많은 영웅적 업적을 쌓았지만,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는 말년에 테베 국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두 부부는 자신들의 고국을 떠나서 엔켈레이스 사람들의 나라로 옮겨가서 살았다. 엔켈레이스 인들은 이 둘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카드모스를 자기네 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자식들과 손자들이 당한 불행이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두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다. 어느 날 카드모스가 하늘을 올려보며 울적한 표정으로 이렇게 한탄했을 정도였다.

용의 목숨이 신들에게는 이렇게도 중요했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용이었던 것만 같지 못하도다.”

그런데 이 말을 마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이 카드모스의 입술을 떠나자마자 카드모스의 모습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줄어들어 없어지더니 몸이 가늘게 늘어나는가 하면, 이미 탄력을 잃은 피부에는 비늘이 돋아나 다시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하르모니아는, 남편의 운명이 그러할진대 자기 역시 남편과 그 운명을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버지인 아레스 신, 어머니인 아프로디테 신을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빌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용을 닮은 커다란 뱀이 되었다. 지금도 이 둘은 뱀의 몸으로 숲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전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는지라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치거나 헤치지 않는다.

다른 결말로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두 부부는 노년에 엘리시온(Elision)’으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영생을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엘리시온은 서쪽 끝에 있는 땅으로 정토낙원으로 여겨졌다. 이곳은 신들의 총애를 받던 인간들이 가는 곳인데, 여기에서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땅은 행복의 들’, 혹은 축복받은 자들의 섬이라고 불렸다.

그렇다면 카드모스 부부의 자손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두 부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만 했던 것일까? 지금부터는 카드모스의 자손들이 겪은 불행한 사연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봐야겠다.

 

8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는 아우토노에, 이노, 아가베, 세멜레 등 딸 넷과 아들 폴리도로스를 두었지만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노(Ino)’는 상처한 보이오티아의 왕 아타마스와 결혼했는데, 왕은 구름의 요정이었던 전처 네펠레로부터 얻은 쌍둥이 자식, ‘헬라프릭소스남매를 금쪽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이노에게는 그 어린 남매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독자들은 긴장해야겠다, 이거 뭐 시작부터 한눈에 보기에도 참 좋지 않은 구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재혼, 순진하고 어린 자식들, 질투심 많은 계모 등등. 심청전, 신데렐라나 백설 공주 이야기 등이 바로 이런 구도 아니던가.

예상했겠지만, 새로운 왕비 이노는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 프릭소스와 헬레를 없애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이노 왕비는 나라 안 여자들에게 집안에 저장해 놓은 밀알 씨앗을 남편들 몰래 뜨거운 냄비에 달달 볶으라고 시켰다.

남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싹이 돋아날 수 없는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아무리 신들에게 경건한 기도를 드려도 계속된 흉작에 먹을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아타마스 왕은 답을 찾으러 항상 해답이 있는 그곳, 델포이 신전으로 갔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왕비가 신전의 여사제 중 재물욕이 많은 여사제 하나를 이미 매수해 놓은 뒤였다.

여사제는 퓌티아의 말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왕에게 이 나라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 왕자와 공주 탓이라고 거짓말로 고했다. 그리고는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 제사를 올려야만 신들이 응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아타마스 왕이 망설이고 있을 때, 이 소식이 나라 곳곳에 퍼지자 백성들도 모두 왕자와 공주를 탓하기 시작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왕도 결국엔 백성들의 원성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남매를 벌하기로 했다.

정해진 날짜가 가까워지자 제단을 쌓는다, 술을 빚는다왕궁 안팎이 소란스러워졌고, 어린 남매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됐다. 자신들의 짧은 운명을 원망하듯 왕자와 공주는 생모 네펠레를 부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남매의 어머니 네펠레는 억울하게 죽을 자식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제우스 신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때마침 그 순간 하늘에서 황금빛 양이 내려와 그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제우스 신이 네펠레의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이렇게 남매는 금양을 타고 도망치다가 누이 헬레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어지럼증을 느껴 바다에 떨어져 죽고, 오빠 프릭소스만 무사히 머나먼 겨울왕국 콜키스에 도착하였다.

프릭소스는 금양을 신의 제물로 바친 뒤, 그 가죽은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훗날 영웅 이아손이 다른 동무 영웅들과 함께 쾌속선 아르고호를 타고 찾아 나서게 되는 황금 양털이다. 제우스가 황금 양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 양을 별자리로 만들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리가 그것이다.

이노의 음모로 자식들이 곤란을 겪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아타마스 왕은 순간 광기에 빠져 이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레아르크스를 죽였다. 아타마스 왕은 이노와 또 다른 아들도 제 손으로 죽이려 했다. 이노는 왕을 피해 다른 아들 멜리케르테스와 함께 도망가다가 막다른 벼랑에 다다르자 바다로 몸을 던져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자신의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노는 몰랐던 것일까, 이 또한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의 경계로 삼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운명이었다.

 

9

아우토노에의 아들은 사냥 솜씨로 보나 미모로 보나 그리스 최고의 사냥꾼으로 유명한 악타이온(Actaeon)’이었다. 이아손,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최고의 영웅들을 훈련 시킨 현자 켄타우로스 케이론(Chiron)’이 사냥 기술을 전수했다니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어느 화창한 날, 이 젊고 아름다운 사냥꾼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처녀신 아르테미스(Artemis)’와 요정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우연히보게 되었다.

그런데 악타이온은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우연이라도 처녀 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계곡 근처에서 여인들의 말소리나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꼭 그것이 여신의 일행이 아니었더라도 얼른 벌어지는 상황을 예상하고 발걸음을 돌렸어야 했다. 그런데 눈치 없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본 것이다.

악타이온은 이 일로 순결의 여신의 미움을 사 수사슴으로 몸 바뀜을 당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평소 사냥할 때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었다. 케이론은 악타이온의 충성스러운 개들이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자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은 악타이온의 동상을 만들어 개들의 슬픔을 달래 주었다.

세멜레(Semele)’아가베의 사연은 더 기가 막혔다. 세멜레는 제우스가 사랑에 빠진 여인 중 가장 불행한 여인이었다. 헤라의 저주가 그녀뿐 아니라 아들 디오니소스(Dionysos)’를 끈질기게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아가베는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디오니소스의 광신도가 되었고,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테베의 왕위에 있던 아들 펜테우스(Pentheus)’를 사자라고 착각하여 자매들과 함께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였다.

맏아들 폴리도로스는 펜테우스 왕의 뒤를 계승하여 테베의 왕이 되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젊은 나이에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만다.

제우스가 등장하고 디오니소스가 출연하는 세멜레와 아가베의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아쉽다. 조금 더 들어보자.

 

10

제우스는 세멜레의 아름다움에 빠져 주책바가지처럼 밤마다 그녀의 침실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고 지하 세계를 흐르는 강 스틱스(Styx)’에 대고 약속한 것이다. 이거 왠지 불안하다. ‘무엇이든지 해주겠다.’ 같은 절대 약속은 언제나 절대 비극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옛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다. 즉 절대 약속은 파멸의 전주곡이자 비극의 예고편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제우스가 스틱스강에 약속을 다짐했는지 그 내막부터 알아보자. 여기에는 사실 질투의 다른 이름, 헤라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헤라는 제우스의 사랑을 독차지한 세멜레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제까짓 게 무엇이라고 감히 으뜸 여신과 사랑을 두고 경쟁하려 한단 말인가. 헤라는 우쭐해 있을 세멜레를 혼내주기 위해,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계략을 꾸몄다.

헤라는 세멜레가 임신 6개월째 되었을 때 세멜레의 늙은 유모 베로에로 둔갑하여 세멜레를 찾아갔다. 헤라는 태연한 척 자애로운 유모의 얼굴로, ‘혹시 밤마다 찾아오는 그이가 제우스가 틀림없나요?’ 하고 여러 차례 물었다. 세멜레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틀림없다고 답했다. 노파로 위장한 헤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숨을 쉬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우스 신이 틀림없다면 어찌 아니 좋겠습니까 만은, 이 늙은이에겐 어쩐지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부렁을 내뱉는 자들이 많거든요. 한 번 직접 물어보세요. 제우스 신이 틀림없다고 하거든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천상에서 입는 갑옷을 몸에 두르고 오라고 하세요. 그러면 틀림없는 제우스가 맞는 것이겠죠.”

헤라의 꼬임에 넘어가 귀가 솔깃해진 세멜레는 천상의 신 제우스의 본모습, 헤라 앞에 나타날 때의 그 참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날 밤 자신의 침실로 찾아온 제우스를 보자 세멜레는 우선 부탁이 있다고 속삭였다.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애교를 섞어 졸라댔다. 제우스는 뭔가 평상시의 흐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세멜레를 위해 뒷일은 따져보지 않고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스틱스강에 걸고 맹세했다. 아뿔싸! 스틱스강에 맹세했다! 세멜레의 입술 밖으로 어떤 말이 새어 나올지 몰랐던 제우스는 조금 두려웠다. 아무리 제우스라고 해도 스틱스강에 한 약속은 절대 취소할 수도 없고 어겨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세멜레는 자기의 부탁이 무엇인지 수줍게 밝혔다. 세멜레는 낭군에게 제우스 신이 맞거든 신의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올림포스산에서 다른 신들과 함께 있을 때의 그 차림을 보여달라고 했다. 제우스는 세멜레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 입을 틀어막을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처음에 제우스는 세멜레의 청을 못들을 걸로 하려 했으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틱스강에 두고 한 맹세는 어떤 예외도 허락하지 않으므로 결국, 제우스는 침통한 얼굴로 세멜레의 침상에서 나와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멜레의 침실을 방문하기 위해 잠시 벗어 두었던 천상의 갑옷을 꺼내 입었다. 그러나 그 옛날 타이탄족들과 싸울 때 입었던 무시무시한 갑옷이 아니라, 신들 사이에서는 일상복 수준으로 여겨지는 아주 가벼운 갑옷을 입고 제일 작은 벼락을 하나 쥐었다. 그것이 이 순간 자신이 세멜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제우스는 약속대로 세멜레에게 신으로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순간 세멜레는 한마디 작별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신의 본모습을, 그것도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참모습을 본 사람은 그 찬란한 광휘를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세멜레의 배 속에 있던 태아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제우스는 헤라가 보지 못하게 불타는 세멜레의 몸속에서 아직 이목구비가 덜 형성된 디오니소스를 재빨리 끄집어내어 자신의 넓적다리에 숨기고 실로 꿰맸다.

그리고 다른 태아들처럼 열 달을 다 채운 후 아기 디오니소스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 제우스는 궁리 끝에 헤라가 찾을 수 없도록 아기 디오니소스를 인간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는 뉘사 계곡의 요정들에게 맡겼다. 이 뉘사의 요정들은 디오니소스가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낼 동안 헤라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맡아 길렀다. 그래서 뉘사의 제우스라는 의미의 디오니소스로 불리는 것이다.

 

11

이렇게 고난 끝에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요정의 사랑을 받으며 대지에 비를 내리고 포도를 여물게 하는 곡식의 신이자 술의 신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헤라는 그마저 용납할 수 없었는지 디오니소스를 미치광이로 만들고는 살던 곳에서 쫓아내어 세계 각지로 떠돌아다니게 했다. 제우스를 아버지로, 인간 세멜레를 어머니로 두었던 젊은 디오니소스는 이렇듯 처음엔 신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광인으로 떠돌던 디오니소스를 구원한 것은 제우스의 어머니이자 디오니소스의 할머니 여신인 레아였다. 디오니소스가 프리기아에 갔을 때 여신 레아가 그의 광기를 치료해 주고는 디오니소스 신앙의 독특한 특징이 되는 비밀 제례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다시 길을 떠난 디오니소스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땅을 두루 순방하며 사람들에게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양조법을 가르쳤다. 그는 인도에까지 가서 여러 해 동안 여행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또 이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제우스로부터 물려받은 신통력 사용법도 터득했다. 그리스로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세상을 주유하며 깨달은 진리로 진짜 신이 되어야겠다며 자신의 신앙을 만들었다.

디오니소스 주변에는 언제나 마이나데스(Mainades)’라고 불리는 여성 숭배자들이 무리를 지어 따라다녔다. 이 여성 숭배자들은 등나무로 만든 지팡이에 솔방울을 달고 이것을 휘두르며 춤과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그들의 신을 찬양하였으나, 신전은 만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나무들과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 약초, 포도, 우유 등의 음식과 술을 준 것은 디오니소스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이성을 잃는 순간까지도 이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으며, 특히 축제 때에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즐겼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축제는 광란의 축제로도 통한다. 정신 줄을 완전히 놓아버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 흥겹게 노는 축제였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신앙을 그리스 땅 전역에 전파하고자 했으나 그리스의 군주들은 이 새로운 종교가 불러일으킬 무질서와 광란을 꺼렸고 그래서 이 종교의 포교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테베의 왕 펜테우스도 마찬가지였다.

 

12

디오니소스는 광신도 무리를 데리고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드디어 어머니 세멜레의 고향인 테베에 도착했다. , 이거 뭔지 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고향을 오랜 시간 떠나 있다가 돌아오게 되면, 좋은 일보다 좋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벌어진다는 것쯤은 저 유명한 오이디푸스 이야기나 오디세우스, 이아손, 테세우스 등의 여러 영웅 이야기에서 이미 우리는 경험한 적이 있다.

각설하고, 디오니소스가 온다는 소식에 테베의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 행렬에 가담했다. 이때 테베의 왕은 카드모스의 외손자이자 아가베의 아들인 펜테우스였다. 그러니까 펜테우스와 디오니소스는 이종사촌 간이 되는 셈이었다.

펜테우스는 웬 젊은이가 발목까지 오는 긴 털옷을 걸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자 무리와 자신의 나라, 테베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펜테우스 왕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이모 세멜레의 아들이고 자신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또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세멜레 이모가 죽을 때 제우스가 살려낸 으뜸 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몰랐다. 펜테우스 왕은 오로지 현란한 춤을 추고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며 풍기를 문란케 하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 제식 금지령과 함께 부하들에게 디오니소스를 반드시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거라, 가서 저 미친 군중을 현혹하고 있는 떠돌이 미치광이를 잡아들여라. 그자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나, 내 이 진상을 밝혀 가짜 신앙을 내치겠노라.”

그런데 그때 그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왕이 죽이려고 하는 자는 새로운 신입니다. 그는 제우스가 생명을 불어넣어 준 세멜레의 아들이며 앞으로 최고 신들 사이에 앉게 되실 분입니다. 명을 거두어야 합니다.”

다름 아닌 테베 최고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였다. 그의 말에 발끈한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테이레시아스를 환영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의해 전달된 신의 음성을 애써 무시했다.

이윽고 디오니소스를 잡으러 갔던 펜테우스 왕의 부하들이 돌아왔다.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의 부하들에게 붙잡혔지만 저항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디오니소스가 아무런 동요 없이 엷은 웃음을 보이며 순순히 잡히자 오히려 그를 잡은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책임을 애써 모면하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순전히 펜테우스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우리를 원망하지 마시오!”

펜테우스 앞에 끌려간 디오니소스는 지그시 펜테우스 왕을 쳐다보며 자신을 감옥에 가두지 말라고, 감옥에 가두어도 헛수고라고 말했다. 펜테우스가 그 말을 무시하고 부하들을 시켜 디오니소스를 묶자 쇠사슬이 저절로 풀어지고 감옥의 문이 스스로 열려,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펜테우스에게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은 자신이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이곳 테베에 자신의 신앙이 전파되는 것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는 펜테우스의 화만 돋을 뿐이었다.

결국,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 왕에게 치명적인 제의를 했다. 그 근처에서 행해지는 여사제들의 의식을 훔쳐보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단 여장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펜테우스는 이 위험한 제안을 거부했어야 했지만, 디오니소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식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 대한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음흉한 관음증이 발동해서였다. 그러나 펜테우스의 이 위험천만한 호기심은 자신의 비참한 죽음을 예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3

펜테우스 왕은 체통 머리 없이 여장을 한 채 광란의 의식이 거행되는 키타이론산으로 향했다. 키타이론산은 신도들로 덮여 있었고 신도들이 지르는 소리는 산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펜테우스 왕의 노기에 불을 질렀다.

여인의 모습을 한 펜타우스 왕은 숲을 지나 춤판이 벌어지는 벌판으로 나가,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난교 의식을 지켜봤다. 벌판에서 벌어지는 의식은 그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펜테우스 왕이 바위 뒤에서 훔쳐보던 모습을 수상히 여긴 일단의 마이나데스 무리가 광기에 사로잡힌 동무들 앞으로 펜테우스 왕을 잡아끌었다.

펜테우스 왕의 어머니 아가베, 이모 아우토노에와 이노, 누이도 그곳에 있었다. 이미 광란의 제식에 취해 이성을 잃고 눈이 먼 펜테우스의 어머니 아가베는 불순한 야수가 자신들의 축제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에 격분하여 동아리 무리에게 외쳤다.

저기 사자인지 멧돼지인지 불경한 것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저 거대한 괴물이 이 숲을 망치고 있구나! 이 숲속을 휘젓고 다니는 저 괴물을 잡아야 한다. 오너라, 형제여 자매들아! 내 앞장서서 저 괴물을 무찌르리니 나를 따르라.”

그러고는 제일 앞장서서 펜테우스를 잡으러 나섰다. 그제야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엎드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성난 군중은 펜테우스 왕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뚱이를 잡아 뜯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이모 아우토노에와 이노는 펜테우스 왕의 양팔을 잡아당겨 그의 몸을 찢어 버렸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앞장서 아들을 죽인 것을 모르는 아가베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겼다, 이겼다! 이 영광을 우리의 신 디오니소스와 우리의 신앙에 바친다. 경배하고 찬양하라!”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죽인 괴물이 테베의 왕이자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가베는 경악했다. 마이나데스가 춤과 노래로 그녀를 달래 주었지만,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아버지 카드모스, 어머니 하르모니아와 함께 테베를 떠나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카드모스는 엔켈레이스 땅의 왕이 되었다가 하르모니아와 함께 용을 닮은 커다란 뱀으로 변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와 그의 자손들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의 전모이다.

 

14

카드모스는 페르세우스(Perseus)’와 더불어 거의 최초 세대의 영웅이다. 후세의 다른 영웅들과 달리 페르세우스처럼 조강지처와 마지막까지 함께 해 그의 이야기에는 막장 드라마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효성이 지극하고 충성스러웠으며, 부하들을 위할 줄 아는 훌륭한 리더였지만 신들에 의해 많은 풍파를 겪었다. 비록 제우스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제우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영웅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다른 신들로부터 질투를 샀던 것이었을까.

카드모스는 그리스에 페니키아 알파벳을 전해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알파벳의 첫 글자 ‘A’는 그리스어의 알파’, 페니키아어로는 알레프에 해당되는데, 이 글자는 다름 아닌 소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쯤에서 모두 궁금할 것이다. 제우스와 함께 크레타섬에 도착한 카드모스의 눈망울이 큰 여동생, 에우로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테베 전설권못지않게 크고 장대한, 오히려 그 이상인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 형성 과정이니, 채비를 다시 하고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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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정복자, 페르세우스

다나에, 그라이아이, 메두사, 페가수스, 아트라스, 안드로메다, 케토스...

 

1

아르고스(Argos)의 왕 아크리시오스에게는 자식이라곤 딸 다나에(Danae)’ 하나밖에 없었다. 왕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딸을 두었지만, 든든한 아들이 없는 것을 늘 아쉬워했다. 어떻게 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는지, 또 언제 바람이 이루어질지 궁금해하던 왕은, 더는 막연히 기다릴 수 없어 아테나 여신의 신탁을 들어보기로 했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 아크리시오스 왕은 길일을 택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테나 신전으로 향했다. 그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아테나 여신에게 경배를 드린 후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모르는 것이 약일 수도 있는 것을, 그가 들은 것은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다.

그대는 절대 아들을 가질 팔자가 아니다. 헛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딸 간수나 잘하라, 그대는 딸의 아들에게 죽을 운명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신전을 나오면서도 아크리시오스 왕은 섬뜩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머리를 흔들어 잊으려 해도 신탁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신전으로 향할 때와 달리 유독 멀고 길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왕은 몇 일간 두문불출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제 목숨 아깝다고 차마 아비로서 천륜을 끊고 사랑하는 딸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탁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왕은 괜하게 신의 뜻을 물었다 싶었다.

그렇게 고민고민 머리를 쥐어짠 끝에, 마침내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하나 있었다. 아들을 낳게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손자를 보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사람은 한 가지 생각을 밤낮없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생각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이 무렵 아르고스의 왕이 딱 그 상태였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애지중지 키워 온 무남독녀 외동딸, 다나에를 청동으로 둘러싸인 지하 밀실에 가두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물건 달린 사내라면 더더욱 안될 일이었다. 밀실로 들어가는 청동문은 묵직한 자물통으로 잠그고 열쇠는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궁전 뒤뜰에 있는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대신 천장 지붕에 작은 공간을 열어두어 먹을 것과 마실 것, 빛과 공기가 오로지 그곳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말해 무엇하랴! 아르고스의 공주, 다나에의 영문도 모르는 감금 생활은 더없이 참혹했다. 그녀로서는 화려한 왕실에서 갑작스럽게 축축한 지하로 추락한 것에서 오는 비현실감 때문에 더 혹독했으리라.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벌레들과 차갑고 눅눅한 느낌, 그리고 밀려드는 외로움의 나날들, 죄수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러나 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저 하늘 위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구름만 신세 한탄하듯 상상해 볼 뿐이었다.

바로 그즈음 올림포스의 지배자이자 신들의 아버지, 강한 남성의 대명사, 여인의 정복자, 변신의 귀재 제우스(Zeus)’가 아르고스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호기심 속에서 유심히 보고 있었다. 신은 팔짱 상태로 턱을 문지르며 고개도 갸웃거렸다. 다나에가 아름답기도 했거니와 쉬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제우스의 마음속에 정욕의 불을 확 지폈다. 우리는 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제우스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이때 제우스는 아주 특별한 변신을 시도했다. 하다 하다 그는 황금 빗물로 몸을 바꾸어 이 감옥의 유일한 입구인 천장의 작은 틈새 사이로, 흡사 밤안개가 도시를 감쌀 때처럼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두려움과 외로움에 지친 공주 다나에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우스 신은 여인의 남편으로 몸을 바꾸어 아내를 속이는가 하면, 수소 같은 들짐승부터 뻐꾸기, 백조, 독수리 따위의 날짐승으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황금 빗물에 와서는 누구든지 이 으뜸 신의 창의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일의 전인지, 나중인지 모르겠지만 제우스 신이 검은 구름으로 변신하여 이오(Io)’를 품에 안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변신 능력은 황금 빗물에 오면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엄지 척이다.

그건 그렇고, 제우스가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청동 밀실을 다녀가고 몇 주 후, 새 생명을 품은 산모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다나에는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심하지 않은 입덧이었다. 그리고 산달이 되자 혼자서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어머니는 이 아이의 이름을 페르세우스(Perseus)’라고 지었다.

 

2

다나에는 몇 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음습한 지하 밀실에서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비밀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라서, 구름이 잔뜩 드리운 어느 우중충한 날, 아이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바람에 아버지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손자는 맑고 초롱초롱한 눈, 오뚝하게 솟은 코, 앙다문 입술이 첫눈에도 영웅의 기질이 보였다.

몹시 당황하고 화가 난 아크리시오스 왕이 목과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딸에게 꾸짖어 물었다.

저 아이의 아비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다나에는 겁에 질려, 어미의 본능으로 아기 페르세우스를 자신의 뒤쪽으로 숨겼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제우스 신이라고 사실대로 여쭈었다. 그러나 왕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믿으려 하지 않더니, 애먼 자신의 아우를 잡아 족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했다. 평소에도 동생 놈이 다나에에게 검은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의심해왔기 때문이었다.

아우를 죽인 왕은 다음으로 딸과 손자의 처리가 문제였다. 저 아이가 커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던 왕은 다시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다나에를 청동 감옥에 가둘 때처럼 왕은 괴로움에 빠졌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었기에 왕은 결국 딸과 손자를 이 나라에서 추방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아랫사람들을 시켜 딱 어른 한 명, 아이 한 명 들어갈 정도의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다. 덮개도 함께 만들되 위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신선한 공기가 흐를 수 있도록 했다.

나무 궤짝 방주가 다 만들어지자, 아크리시오스 왕은 열흘 분량의 물과 음식만 딸려, 방주 안으로 딸과 손자를 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직접 덮개를 닫고 청동 망치로 못을 치면서 매정한 작별의 말을 뱉었다.

아비를 원망하지 말고, 너의 지아비를 원망하거라.”

피붙이들의 삶과 죽음을 운명에 맡긴 왕은, 신하들이 커다란 나무 궤짝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걸 확인하고야, 돌아서서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 그 운명이 저 아이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다. 하늘은 높아 푸르렀으며 바람은 산들산들 시원했으나, 왕의 주름진 눈 아래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불쌍한 모자는 방주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숨죽인 채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뱃멀미도 속에 뭔가가 들어있어야 하는 법, 어미 몫의 먹을 것, 마실 것은 떨어진 지 오래라 멀미도 멈추었다. 다행히 아기는 방주를 요람 삼아 잘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아기의 순진무구한 옹알이가 어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헬리오스(Helios)’가 지나가도 어미와 아들은 햇빛을 볼 수 없었고, ‘셀레네(Selene)’가 아는 척을 하려 해도 부질없었다. 밤낮이 번갈아 찾아오고 돌아갔지만, 시간이라는 것을 가늠하기에 어미 다나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우스 신이 아우이자 형인 포세이돈(Poseidon)’ 신에게 부탁하여, 가여운 다나에 모자가 타고 있는 궤짝이 폭풍우에 난파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두 모자는 오직 잔잔한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다는 것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나 어미의 의식이 흐릿해질 즈음, 갑자기 어디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에 이끌려 궤짝이 옮겨지고 있음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정적, 모자가 갇혀 있는 궤짝이 멈추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뚜껑이 열리고 한 줄기 빛이 수척한 두 모자의 초점 흐린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궤짝은 다시 그늘진 곳으로 이동했고 그제야 다나에의 눈에 환한 세상과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넣어 주었던 물과 음식이 모두 바닥나고 사흘 정도의 시간이 지났나 싶을 때였다.

나무 궤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세리포스섬의 늙은 어부 딕티스(Dictys)’였다. 그는 세리포스 섬나라 왕의 피붙이 형이었지만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후 아내와 함께 소박한 어부의 삶을 살고 있었더랬다.

노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어슴푸레한 이른 새벽에 어구를 손질하러 나왔다가 해안으로 떠밀려온 웬 낯선 궤짝을 발견했고, 주변 사람들과 힘을 모아 구원의 손길을 뻗었던 것이었다. 마침 자식이 없었던 딕티스 부부는 다나에와 어린 페르세우스를 자신들의 딸과 손자처럼 어여삐 여겼다. 비록 피가 섞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었고, 조용했던 노부부의 소박한 집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로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3

그리고 시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열여섯 살이 된 페르세우스도 다부진 체격에 힘과 용기가 남다른 대장부로 훌륭하게 자랐다. 딕티스 노인의 지혜도 그에게 전해져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두루 건강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나 다나에는 다시금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조짐을 보았다. 세리포스섬의 왕 폴리덱테스가 저잣거리를 행차하다가 우연히 다나에를 보고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마침 홀몸이었던 왕은 발정기 개처럼 무턱대고 다나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페르세우스가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도 다나에의 미모는 여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우스 신이 반한 미모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왕은 졸렬하고 포학한 사람이었고, 다나에는 그런 사람과 결혼할 마음이 발톱의 때만큼도 없었다. 청년 페르세우스는 이 쓰레기 같은 구혼자가 어머니에게 추근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스토커처럼 괴롭히는 왕과 그의 부하들의 행패로부터 여러 차례 어머니를 보호하기도 했더랬다.

폴리덱테스 왕은 자신의 결혼에 페르세우스가 방해된다고 여겼다. 왕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체면을 구기지 않고 손톱 밑에 박힌 가시 같은 페르세우스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생각하느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폴리덱테스 왕은 왕가의 혼인을 더는 미룰 수 없으니 이제라도 다른 나라의 공주에게 청혼해야겠다고 문무백관들 앞에서 선포했다. 모여든 많은 사람은 왕의 예상치 못한 발표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서로 바라보며 웅성거렸지만, 왕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짐이 이웃 나라 공주에게 청혼하려면 그만한 지참금이 필요하오. 명문가 젊은이들은 결혼 선물로 쓸 말 한 필씩 내게 바치도록 하오. 부디 이 사람을 부끄럽지 않도록 해주기 바라오.”

일종의 세금이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강제징수였다. 작은 섬나라로서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뜻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왕의 흑심을 알 리가 없는 젊은이들은 더러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뜻에서, 더러는 괜하게 밉보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앞다투어 왕을 위해 최고의 명마를 바치겠다고 나섰다.

딱하게도 살림이 어려웠던 딕티스 집안의 페르세우스만이 말을 선물할 형편이 못되었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어머니만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야 무엇이든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사악한 메두사(Medusa)’의 머리라도 갖다 바치겠노라고 공개적으로 호언장담하기에 이르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폴리덱테스 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메두사를 만나 지금까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옳거니 너 잘 걸렸어하고 쾌재를 부르며 페르세우스를 불러 그 말에 책임지라고 다그쳤다. 결혼 선물로는 메두사의 머리만큼 훌륭한 선물이 없을 것이라며 꼭 약속을 지키라고 다짐을 받아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으로 왕을 모욕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메두사는 그 모습이 너무나 흉측해서 자신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갑고 딱딱한 돌로 만들어 버리는 최악의 괴물이자 마녀였다. 내로라하는 용사 중 이 괴물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가 열에 열 명이었으니, 당시 그리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누구든지 이는 곧 화약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무모한 도전이 되었던 위험한 과업, 청년 페르세우스가 그 함정에 발을 담그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메두사는 어떻게 해서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 것일까? 그녀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4

메두사는 세 명의 괴물 자매인 고르곤(Gorgon)’ 중의 한 명이다. 막내인 메두사가 제일 널리 알려져 있으나 스테노’, ‘에우리알레까지 이렇게 셋이 꼭 함께 다녔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들은 당시 그리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흉측했던 두 언니와 달리,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뭇 남성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을 미인이었다. 그런데 오만해진 그녀는 자기 잘난 맛에 감히 아테나(Athena)’ 여신과 미모를 다투다가 여신의 미움을 산 것도 모자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연애질을 하면서 신성한 아테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하긴 여신의 신전을 더럽힌 부분은 그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포세이돈 신이 그녀에게 눈이 뒤집힌 나머지 화려한 새로 변신하여 그녀를 납치해 데려간 곳이 하필 아테나 신전이었으니 따지자면 포세이돈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모욕감을 느낀 처녀신 아테나는, 신들 사이에서는 인간들과 엮인 일로 상호 간섭하거나 저주를 내릴 수 없다는 천상의 규칙에 따라 인간이었던 메두사에게 대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 저주라는 것이 비참하고 끔찍하기가 여인이 홀로 오롯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저주는 아름다운 처녀 메두사를, 머리카락이 뱀처럼 늘어지고 뻐드렁니와 청동 손을 가진 괴물 메두사로 바꾸어 놓았다. 눈알은 강한 독기를 품어 툭 튀어나왔고, 톱니 같은 뾰족뾰족한 이빨, 멧돼지 엄니에다 긴 뱀의 혀를 갖게 되었으며, 언니들처럼 황금색의 날개까지 달린 끔찍한 괴물이 되고 만 것이었다. 메두사의 변한 모습에 비하면 두 언니는 요괴 축에도 낄 수 없을 정도였다.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메두사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이내 자신의 두 자매와 함께 서쪽에 있는 죽은 자들의 나라 근처로 도망쳐 그곳에서 숨어 살았다. 그곳은 걸어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멀고 험한 곳이었다.

그녀들은 가끔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사는 도시나 숲속에 나타나서 그곳에 사는 존재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며 떠돌아다녔기에 분명한 주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다른 자매였던 그라이아이(Graiai)’들만이 항상 그녀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설사 메두사의 머리를 베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황금 날개를 달고 있는 그 자매들을 어떻게 따돌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메두사와 달리 그들은 누구도 죽일 수 없는 불사의 존재라 하지 않았는가? 딱하게도 정작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이 마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으며 행동이 운명을 결정하는 법, 말을 함부로 뱉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생각 속에서만 머물러야 할 것은 그냥 거기에 넣어 두어야 함을 깨닫기에 청년은 너무 젊었다.

 

5

불행 중 다행히도 페르세우스에게는 그를 돕는 신들이 있었다. 먼저 메두사를 증오하던 아테나 여신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하고 있던 청년 페르세우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를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돌로 변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다시 말하건대 절대로 괴물 메두사의 눈을 직접 바라보지 말라.”

아테나 여신은 이런 짤막한 경고와 함께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자신의 방패를 페르세우스에게 주었다.

다음으로 아테나 여신의 이복형제이자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헤르메스는 페르세우스에게 다이아몬드로 만든 천하의 명검을 선물로 주었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가 직접 벼른 검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헤르메스는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도 추가로 일러주었다. 바로 날개 달린 신발, 메두사의 머리를 봉인할 주머니, 그리고 투명모자가 있어야만 메두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북쪽 너머 어딘가 신비한 곳에 사는 요정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면서도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 요정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곳에서 사는 괴팍한 노파들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들만이 요정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파들은 두더지처럼 종일 어두운 곳에 사는 그라이아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자매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백발에다 주름살투성이였는데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었지만 몸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고, 날개 끝에 손가락이 붙어 있는 요괴에 가까웠다.

거기에 이 늙은 마녀들은 하나의 눈과 하나의 틀니를 나누어서 사용하는 해괴망측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그 눈은 무엇이든 볼 수 있는 천리안이었고, 번갈아 사용하는 틀니는 그걸 끼고 있을 때면 젊게 보이게 하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게 해주는 신비한 틀니였다.

이들은 한 명이 눈을 이마에 붙이고 있다가 다른 이가 볼 것이 있어 요구하면 눈을 떼어 건네준다. 건네받은 노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마에 그 크고 둥그런 눈을 붙이는 것이다. 눈이 옮겨지는 중에도 천리안으로 기능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눈이 이동 중에는 시각을 인식할 시신경이 뇌와 연결될 수 없었을 테니 결국 셋 모두 봉사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그라이아이 세 자매가 살고 있다는 음침하고 지저분한 토굴 같은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입구에서부터 심한 악취를 풍겼다. 구석구석에 썩은 음식물과 오물이 뒤섞여 있었다. 거미줄이 모퉁이마다 너저분하게 있었고, 그 위로 집주인인 크고 작은 거미들이 먹이를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코를 틀어막고 자매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들어가서 다짜고짜 요정들이 사는 곳과 메두사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다. 노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페르세우스를 맞이하더니 그중 제일 뚱뚱한 노파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는가 했더니 우리 자매, 메두사를 만나겠다고? , 우리 형제를 죽이려고? 썩 물러가라! 이놈아, 여기는 너 따위가 함부로 드나들 그런 곳이 아니다.”

물론 페르세우스도 이 노파들이 자신의 물음에 순순히 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페르세우스는 이미 이들의 입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거추장스럽게 물어본 것은 그것이 순리이고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욕만 듣고 쫓겨난 첫 번째 시도 후, 페르세우스는 물러가는 척하다가 숨기 좋은 바위틈에 몰래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노파들이 저희끼리 하나뿐인 눈과 틀니를 번갈아 옮겨가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다. 또다시 한 명이 눈을 떼어 그것을 자기 형제에게 넘겨주려 할 때 페르세우스가 빠른 동작으로 다가가 순식간에 그 눈을 빼앗아 버렸다.

눈을 빼앗긴 늙은 마녀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우왕좌왕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고 하면서 대혼란에 빠졌다. 셋이서 일제히 악을 쓰며 떠들어대니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대개가 욕설과 고통에 찬 절규이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결국, 노파들은 페르세우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어디에 가야 요정들을 만날 수 있는지, 또 메두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들은 후에야 페르세우스는 그녀들의 하나뿐인 눈을 돌려주었다.

페르세우스는 그라이아이가 일러준 대로 메두사를 처치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요정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또 막막해졌다. 어디라고만 들었지 도무지 어떻게 해야 그곳에 갈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배를 타도, 걸어서도 갈 수 없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위치만 물어보고 가는 방법을 묻지 않았던 건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하고 있는데, 그 순간 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누구의 조화인지, 페르세우스 앞에 새로운 길이 펼쳐진 것이 아닌가. 그 길은 무지개 같기도 하고 오로라 같기도 했으나, 뭐라고 하기에는 적당한 수사가 떠오르지 않는 길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빠르고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뎠다. 청년은 그 길을 따라 아흐레 밤낮을 걸어 비교적 손쉽게 요정들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나라는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행복한 땅으로,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과 나비들이 서로 어울렸고, 생명이 움트고 자라나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곳에 사는 요정들은 페르세우스가 도착하자 그를 환영하며 축제를 열어주었다. 풍족한 음식과 술, 춤과 노래, 칭송과 찬양으로 넘치는 환대가 계속되었다.

황홀경에 빠져 있던 페르세우스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요정들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였다. 더 지체했다가는 이곳 분위기에 취해 주저앉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요정들의 지도자는 페르세우스의 부탁을 듣고 날개 달린 신발과 위험한 메두사의 머리를 집어넣을 자루, 그리고 몸이 보이지 않게 하는 투명모자를 기꺼이 건네주었다. 두 번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떠나는 영웅에게 축복을 섞어 기쁘게 배웅하였다. 요정들에게는 작별도 축제 같았다.

 

6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페르세우스는 거칠 것 없이 메두사가 살고 있다는 곳에 도착하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깊은 곳, 신비에 싸인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와 그 근처에는 사람 모양, 짐승 모양의 석상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반듯이 서 있는 것도 있었지만 누워있는 것도, 심지어 깨진 석상도 한둘이 아니었다. 누구의 예술 작품이 이보다 뛰어날 수 있을까, 이 석상들은 다름 아닌 신이 만든 예술품이었다.

인간 모습의 석상들은 모두 건장한 장수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메두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돌로 변한 듯 보였다. 아마 괴물 메두사를 잡기 위해 호기롭게 나섰던 사람들인 것 같았다. 제각기 활이며 창, 어떤 이는 몽둥이까지 다양한 병장기를 들고 있는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무장한 용사들보다 더 측은한 것들이 따로 있었다. 곰이며 멧돼지, 사자 등과 같은 맹수뿐 아니라 사슴, 다람쥐, 고슴도치, 토끼 등과 같은 연약한 동물들까지 여기저기 돌덩이로 변해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독수리며 기러기, 뻐꾸기, 딱따구리 따위의 날짐승도 더러더러 눈에 띄었다. 나비, 메뚜기, 잠자리 같은 곤충들까지, 그것들에게선 어떤 적의도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선의의 희생자들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침착하게 동굴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에게는 아테나 여신이 준 방패와 헤르메스 신이 내려준 다이아몬드로 만든 검, 요정들에게 받은 날개 달린 신발이 있었지만,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년은 한 손으로 땀을 훔쳐내며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마침 고르곤 세 자매는 잠들어 있었다. 아테나 여신과 헤르메스 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메두사가 누구인지 페르세우스에게 알려주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봐서는 안 된다는 신들의 말대로 반짝이는 방패를 거울처럼 이용하여 천천히 한 걸음씩 접근했다.

방패에 반사된 메두사는 듣던 대로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모두 징그러운 뱀의 모습이었고, 그것들은 제각기 꿈틀거리고 있었다. 메두사의 두 눈은 닫혀 있었으나 뱀들은 모두 깨어 있었다. 저 괴물이 눈을 뜨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사람 냄새를 맡은 메두사가 눈을 뜨고 말았다. 이때다! 페르세우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재빠르게 검을 뽑아 메두사의 목을 단칼에 싹둑 잘라버렸다. 이미 거리를 재두었기 때문에 검은 빗나가지 않았다.

메두사는 목이 잘렸으되 눈을 부릅뜬 채였으며, 뱀 머리카락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러나 마지막 발악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로부터 피가 다 쏟아지자 뱀 머리카락도 하나둘씩 힘을 잃고 땅 위로 몸을 떨구었다.

그런데 이때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땅에 스며든 메두사의 피에서 메두사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거인 크리사오르와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Pegasus)’가 솟아올라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메두사는 죽을 때 이 두 쌍둥이를 수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바다의 신이면서 말의 신이기도 한 포세이돈의 자손을. 페르세우스, 앞으로 물가, 특히 바닷가를 조심해야겠다.

페르세우스는 잘린 메두사의 머리를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가져온 주머니 자루에 그 징그러운 덩어리를 재빠르게 담고 자루의 주둥이를 묶었다. 바로 그때 메두사의 자매들이 잠에서 깨어 무섭게 소리치며 페르세우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쇳소리가 적막을 깨는 순간이었다. 저들한테는 메두사의 머리도 무용지물이므로 페르세우스는 서둘러 투명모자를 썼다. 고르곤 자매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페르세우스를 찾아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비행화를 신고 투명모자를 쓴 페르세우스를 찾을 수 없었다.

날개 달린 신발과 투명모자 덕분에 불사의 존재로 알려진 고르곤 두 자매의 매서운 추적을 피한 페르세우스는 괴물들의 소굴을 안전하게 떠날 수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때 전령의 신이자 모험의 신, 헤르메스도 조용히 같이 날아올랐다.

이때부터 메두사의 머리는 페르세우스의 위대한 과업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동시에, 이 젊은 영웅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음은 두 번 말하면 잔소리다.

한편,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잠자코 지켜보던 아테나 여신은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벨 때 나온 피를 거두어 아폴론 신의 아들이자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에게 주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왼쪽 혈관에서 나온 피는 심한 독기를 품고 있었지만, 오른쪽 혈관에서 나온 피는 죽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 타이탄(Clash of the Titans, 2010)은 영웅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그린 영화이다. 타이탄의 분노(Wrath of the Titans, 2012)까지 두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페르세우스는 날개 달린 신발이 아니라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신화에서 페르세우스는 페가수스를 탄 적이 없다. 페가수스를 탄 영웅은 벨레로폰(Bellerophon)’이다.

아마도 영웅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이야기를 뒤섞어 훨씬 짜릿한 시각적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할리우드 영화제작자가 처음은 아니었다. 많은 고전 화가들이 두 영웅의 이야기를 뒤섞어 페가수스를 탄 페르세우스를 화폭에 담았으니까.)

 

7

고르곤 자매 중 하나인 메두사를 죽이는 과업을 달성하고 전리품을 자루에 넣은 페르세우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땅 위든 바다 위든 가리지 않고 온 천지를 날아다니면서 페르세우스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없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페르세우스는 어두워질 무렵, 태양이 떨어지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다가 어느덧 그 끝에 다다랐다. 그는 석양이 아름다운 그곳에서 아침까지 푹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나라는 타이탄족 아트라스(Atlas)’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트라스는 힘이 장사인 걸로 유명한 거인이다. 올림포스 신들이 타이탄족과의 전투에서 타이탄족을 굴복시켰을 때, 그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세계의 끝, 정확히 말해 태양이 지는 서쪽 끝에서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 서쪽 끝이란 지금의 모로코를 말하는데, 그곳에 아트라스 산맥이 있다. 이제부터 아트라스 산맥이 생긴 까닭을 살펴보자.

아트라스는 말과 소 같은 가축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으나 이런 가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석양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황금사과 나무였다. 황금사과는 황금빛 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황금빛 잎에 둘러싸여 더 고귀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황금사과 나무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으뜸 신 제우스와 결혼하는 헤라(Hera)’ 여신에게 결혼 선물로 준 것이었다. 헤라는 이 사과나무를 헤스페리데스(Hesperides)’라고 불리는 요정들에게 돌보게 했다. 헤스페리데스는 저녁의 여인들이라는 뜻이었는데 이 정원이 해가 지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자매들의 아버지가 바로 아트라스였다. 따라서 아트라스는 자기에게 황금사과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아트라스 왕에게 읍하여 절하고 나서, 무례를 무릅쓰고 당당하게 청했다.

저는 손님으로 온 나그네입니다. 혹 대왕께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을 대접하시고 싶으시다면 저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니 대왕의 뜻에 부합할 것이고, 혹 위대한 업적을 이룬 영웅을 대접하신다고 하시면 제가 바로 메두사를 물리친 영웅이니 이 또한 대왕의 뜻에 부합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하룻밤 유숙을 청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트라스는 옛날 자기에게 내려진 신탁이 마음에 걸렸다. 아트라스는 제우스의 아들이 황금사과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오래전 신탁을 되새기며 짧게 대답했다.

허하지 않겠다.”

아트라스는 이 말을 끝으로 페르세우스를 밖으로 내쳤다. 페르세우스는 힘으로는 거인을 당해낼 수 없었으므로 뒤로 물러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저를 이렇게 하찮게 여기신다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선물이나 하나 드리고 가겠습니다.”

페르세우스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제 얼굴을 뒤로 돌리며 허리춤에 매달린 자루를 풀었다. 이어서 메두사의 머리를 꺼낸 그는 이 치명적인 무기를 아트라스의 목전에 쑥 내밀었다. 그러자 아트라스의 거대한 몸이 우지끈소리를 내며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수염과 머리카락 같은 몸에 있는 털들은 한 올도 남지 않고 모두 숲과 나무가 되었고, 양팔과 두 어깨는 절벽이 되었으며, 머리는 산꼭대기가 되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뼈들은 모두 크고 작은 바위로 변해 버렸다.

아트라스 몸의 각 부분이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되기까지 그 크기가 시시각각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빛나는 별들로 가득 찬 밤하늘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와 앉을 정도가 되자, 신들이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그렇게 아트라스는 산맥이 되어 세상의 끝에서 지금도 힘겹게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 아트라스는 황금사과를 훔쳐 갈 도둑이 페르세우스라고 생각하고 그를 홀대하는 바람에 이런 황당한 처지가 되어 버렸지만, 사실 아트라스가 받은 신탁에서 말한 도둑놈은 다름 아닌 천하제일의 마초 헤라클레스(Herakles)’였다. 그러고 보면 헤라클레스는 참 끼지 않는 곳이 없다.

 

<미련한 거인의 대명사, ‘아트라스의 이름은 오늘날 지도책’, ‘세계지도를 뜻하기도 한다. 대부분 아트라스를 등 뒤에 지구를 지고 있는 강인한 존재로 생각한다. 이런 모습의 사진이 초등학교 지리 교과서의 표지에 인쇄되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훨씬 후의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지구가 구체 모양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트라스의 사진은 16세기 지리학자 헤르하르뒤스의 생각이었다. 1536년 그가 아트라스 : 세계의 지리학적 묘사라는 제목의 지도책을 폈는데, 표지에는 아트라스가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그림이 나와 있었다. 그 이후로 아트라스는 지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아트라스는 말이 자주 쓰인다. 의학에서는 머리를 직접 받치는 첫 번째 목뼈를 아트라스라고 한다. 인간의 머리를 이고 있는 1번 목뼈가 하늘을 이고 있는 아트라스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발코니를 받치고 있는 남자 형상의 기둥을 아트라스라고 부른다. 또한, 자기들의 제품명으로 이 거인 신의 이름을 딴 건전지를 판매하는 회사도 있다.>

- 폴임 저 신화 오디세이에서 일부 발췌

 

8

아트라스 산맥을 만드는 대역사를 마친 페르세우스는 어머니 다나에가 있는 세리포스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훌륭한 전리품을 담은 주머니가 자랑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는 리비아와 이집트를 거쳐 북동 아프리카에 있는 에티오피아 하늘을 날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바닷가 바위 위에 묶인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나라 케페우스왕과 허영심 가득한 카시오페이아(Cassiopeia)’ 왕비의 딸, ‘안드로메다(Andromeda)’ 공주였다.

사연은 이랬다. 아름다운 검은 미녀 카시오페이아 왕비는 제 미모를 뽐내기를 좋아했다. 왜 가진 자 중에는 이토록 겸손하지 못한 이가 많은지, 처녀 메두사도 이러다가 괴물이 되는 형벌을 받았는데, 조짐이 아주 좋지 않은 것을 독자들도 느낄 것이다. 미모의 반만큼만 겸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쯧쯧.

어쨌거나, 그럼 자신과 동급인 사람과 그 미모를 다투면 충분했을 것을, 한번은 바다의 요정네레이데스들과 그 아름다움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요정들은 아버지 포세이돈 신에게 가서 이 오만한 왕비를 벌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포세이돈은 거대하고 사나운 바다 괴물인 케토스(Ceto)’를 보내 딸들의 앙갚음을 했다.

이 바다 괴물은 포세이돈 신의 명을 받자마자 에티오피아 해안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는 마을은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케페우스 왕은 이집트의 제우스, ‘암몬(Ammon)’ 신에게 그의 백성들을 구할 방법을 물었다. 그러나 왕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바다의 신을 노하게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대의 딸이 답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처음에 왕은 신탁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 제사장이 앞으로 나와 그 뜻을 해석하기를,

안드로메다 공주를 제물로 바쳐 노한 바다신을 달래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환란을 멈출 수 있는 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왕비는 머리를 잡고 쓰러졌고 왕은 긴 탄식을 뱉었다.

그 후 신하와 백성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못 이긴 케페우스 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딸을 바닷가 바위에 청동 사슬로 묶어 두고 무서운 괴물의 먹이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운명이 정해 준 그 날이었다.

하늘에서 보이는 안드로메다는, 얼굴이 창백한 상태로 사슬에 묶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물로 가득한 눈과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없었더라면 누구나 그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여인의 미모에 놀라 날개 달린 신발의 날갯짓도 잊을 뻔했다. 사랑의 신 에로스(Eros)’가 그새 활시위를 당기고 다녀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실의에 빠진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 여인이여! 사랑의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할 그대가 그런 흉측한 사슬에 묶여 있다니, 내게 이 나라가 어딘지, 그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까닭을 말해 줄 수 있겠소?”

안드로메다는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파도 소리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자 눈을 들어 애처로운 입을 열었다. 잠자코 있으면 마치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하여서 이 꼴로 묶여 있는 것이라고 상대방이 오해할까 두려워서였다.

이곳은 아버지 케페우스 왕이 다스리는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이고, 저는 이 나라 공주 안드로메다라고 합니다. 어머니 카시오페이아가 바다 요정들의 미움을 사.”

그런데 안드로메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다 저쪽에서 시끌벅적 물보라가 일더니 거대한 괴물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은 작은 바위산 만한 크기는 됨직해 보였다. 두껍고 어두운 비늘로 덮여 있는 몸뚱이는 곳곳에 해초, 따개비, 바다 이끼 따위 등이 들러붙어 있었다. 수백 미터 밖이었지만 드러난 크기에 너무도 압도당한 나머지 나와 있던 모두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괴물이 귀청이 터질듯한 괴성과 함께 세차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여인의 아비와 어미는 왕과 왕비가 아니라 아비 된 마음, 어미 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르며 탄식과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페르세우스가 큰소리로 외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제우스 신의 아들입니다. 고르고 메두사의 정복자이기도 합니다. 신들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 괴물을 물리치고 그 보답으로 따님을 얻고자 합니다.”

안드로메다의 부모는 이를 승낙하고 지참금으로 나라까지 넘겨줄 것을 서둘러 약속했다. 어느새 괴물은 바위 가까이 안드로메다가 묶여 있는 곳까지 접근했다. 영웅은 몸을 하늘 위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스스로 여기 까지다 생각한 높이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몸을 거꾸로 뒤집더니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검을 꼭 붙잡고 앞으로 내밀어 바람을 갈랐다. 페르세우스는 그대로 괴물의 등줄기를 내리꽂듯이 찔렀다. 이어서 괴물의 겨드랑이와 거친 비늘 사이사이를 찌르고 베었다. 마치 하늘 높은 데서 한가로이 햇볕을 쬐다가 독사를 발견한 독수리가 수직으로 내리꽂아 그 목을 물고 비틀 때처럼 그 동작은 빨랐고 치명적이었다.

괴물은 미쳐 날뛰며 바닷물을 사방으로 튀겨 댔다. 그것은 커다란 해일이 돼서 마을을 덮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괴물은 맹렬한 사냥개에 둘러싸인 멧돼지처럼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며 페르세우스에게 반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두 발의 날개 덕분에 괴물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나서, 괴물의 약한 맨살만 찾아 보이는 대로 옆구리, 배때기, 등짝, 꼬리를 오가며 찔러댔다. 바람을 가르는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괴물은 몸뚱이 이곳저곳에 치명상을 입고 붉은 피를 흘렸다. 고통에 겨운 짐승의 소리가 넓은 해안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괴물이 콧구멍으로 피 섞인 바닷물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용사의 날개가 그 피에 흠뻑 젖어 비행 기능에 장애가 발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불쑥 솟아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 몸을 의지한 채 자신을 향해 마지막 발악을 하며 돌진하는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마쳤다.

괴물이 대가리를 쑥 내밈과 동시에 그 엄청난 아가리를 벌려 페르세우스를 한입에 삼키려고 하자, 영웅은 주저 없이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깊고 어두운 동굴과 같았다. 페르세우스는 괴물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의 몸을 씹어댈 수 없도록 곧바로 목구멍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헤르메스의 은총을 입은 검으로 괴물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울부짖던 괴물의 괴성이 멈추었다. 솟구쳤던 괴물도 정지화면처럼 잠시 멈추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괴물의 커다란 몸뚱이는 건물이 무너지듯, 아름드리나무가 넘어가듯 그렇게 바다 위로 고꾸라졌다. 그 위로 페르세우스가 날아오르니, 해변에 모여 있던 군중은 바다에 잔잔한 파동이 일 만큼 일제히 큰 환호성을 질렀다.

안드로메다는 사슬에서 풀려났고 딸의 부모는 기쁨에 겨워 딸과 사윗감을 얼싸안고는 우리 가문과 이 나라의 구세주가 났다면서 추켜세우기 바빴다. 감격과 환희 앞에 체통이고 뭐고 없었다.

페르세우스는 이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버지 제우스와 수호여신 아테나, 그리고 든든한 지원군 헤르메스 신에게 이 거대한 괴물의 몸뚱이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바다의 으뜸 신 포세이돈은 코가 한자나 쑥 빠져,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9

안드로메다 공주와 영웅 페르세우스는 왕과 왕비의 손에 끌려 궁전으로 돌아왔다. 지나는 거리마다 환호가 넘쳐났고 기쁨에 찬 노래가 울려 퍼졌다. 궁전에서는 이미 잔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가 축제의 흥에 빠져 즐겁게 먹고 마셨다. 그런데 축제가 한창이던 궁의 뜰 한쪽에서 돌연 거친 함성이 일더니 그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케페우스 왕의 아우이자 안드로메다의 약혼자였던 피네우스가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축제장에 난입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약혼자를 돌려달라고 염치없는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닌가. 형인 케페우스 왕은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자초지종을 대략 설명하고, 아우를 돌아보며 제법 공정하게 다음과 같은 소리로 나무랐다.

네놈이 내 딸을 요구할 생각이었다면, 내 딸이 괴물의 산 제물로 바위에 묶여 있을 때 마땅히 요구했어야 했다.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네놈이 강 건너 불구경할 때 우리의 계약은 이미 물 건너간 것, 이는 죽음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네우스는 왕이자 형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갑자기 페르세우스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페르세우스가 이에 응수하자 축제장은 순식간에 전투장으로 바뀌었다. 잔칫상이 엎어지고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삽시간에 흩어졌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양측이 뒤엉켜 대등하게 싸우는 것 같았지만 페르세우스 측은 수에서 매우 열세였다. 아군은 케페우스 왕의 호위병 정도가 전부였으니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페르세우스가 일당백으로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밀리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페르세우스가 외쳤다.

오냐, 나의 적이 날 보호하게 할 수밖에! 그땐 무뢰한들이 땅을 치고 후회에도 이미 늦으리라. 나의 편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라!”

그리고 자루에서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 번쩍 들어 올렸다. 무방비로 메두사의 얼굴을 보게 된 적들이 하나둘씩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창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 던지려던 자세 그대로 돌로 굳었고, 다른 병사는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로 그렇게 되었다. 검을 치켜든 석상도 만들어졌다.

피네우스는 자기가 도발한 이 싸움이 돌아가는 판을 보니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했다. 제 편 군사들을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결국은 놀라 도망치는 어정쩡한 자세로 온기 없는 돌이 되고 말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젊은 영웅 페르세우스와 아름다운 안드로메다 공주는 더 이상의 방해꾼이나 장애물 없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모두의 축복 속에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냈다. 이들에게는 그 누구도, 신조차도 질투나 시기하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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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 후, 영웅 페르세우스는 아내 안드로메다와 함께 어머니 다나에가 있는 세리포스섬을 향해 출발했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 함께 메두사의 머리를 가지고 개선장군처럼 자신이 자란 제2의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보고 싶은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그동안 어부 딕티스는 폴리덱테스 왕으로부터 어머니 다나에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왕의 핍박에 못 이겨 숨어 살고 있었더랬다.

동네 사람 한 명이 그간에 있었던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페르세우스가 떠나자마자 폴리덱테스 왕은 어머니 다나에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심지어 겁탈하려고까지 하였으나, 그때마다 딕티스 노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수모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격분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케토스를 죽일 때 사용한 검과 청동 방패를 가지고 폴리덱테스 왕을 만나러 궁전으로 향했다. 물론 그의 허리춤에는 자루에 담긴 메두사의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궁전은 한창 흥청망청 술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폴리덱테스 왕은 이미 거나하게 취했어도, 먼발치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거꾸로 메두사가 목이 잘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연실색한 왕은 왕좌에서 달려 나와 영웅의 발 앞에 엎드렸다. 싹싹 빌며 살려달라고 영웅에게 애걸복걸했지만, 페르세우스는 그동안 폭정을 일삼으며 어머니를 괴롭힌 폴리덱테스 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곧바로 즉석 재판이 열렸고, 왕은 그 죄가 인정되어 죄에 합당한 징벌로 왕좌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폴리덱테스가 왕좌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섬나라 안팎으로 퍼지자, 폭군에게 시달려 왔던 주민들은 일제히 궁으로 몰려들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리고 페르세우스를 연호하며 이 나라의 새 왕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아직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불효를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선 어머니를 찾아야겠어요.”

그때 군중 속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영웅의 가족은 위대한 암몬 신의 집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페르세우스는 한달음에 신전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영웅은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그간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르세우스는 어머니와 생명의 은인인 딕티스 노인 부부를 모시고 왕궁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는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새 왕을 몸소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궁전의 앞뜰. 페르세우스는 지금껏 어머니를 보살펴 준 현명한 인물, 딕티스를 왕의 자리로 모셨다. 전 왕의 형으로서 원래 왕좌에 앉을 권리가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 백성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함성으로 이 온당한 결정을 환영했다. 이로써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날개 달린 신발과 투명모자를 원래 주인인 요정들에게 돌려주고,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며 모든 과업의 영광을 신께 돌리는 일이었다.

아테나 여신은 메두사의 머리를 염소 가죽으로 만든 자신의 방패, ‘아이기스(aegis)’에 붙박아 놓았다. 이로써 아이기스 방패는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무적의 방패가 되었고, 방패를 장식하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악한 힘이나 적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마법의 힘을 얻게 되었다.

권력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 의한 보호를 뜻하는 영어의 ‘aegis’ 는 방패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이기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에는 바로 메두사의 머리가 지닌 마법적 힘에 대한 기억이 간직되어 있다. 미국의 항공모함인 이지스함도 바로 이 방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1

영웅의 가족에게는 이제 마지막 여정만 남았다. 페르세우스 부부는 어머니 다나에를 모시고 페르세우스가 태어난 곳, 아르고스 땅으로 되돌아갔다. 아들의 기억이야 뭣이 있겠나만 어머니 다나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청동으로 둘러싸인 지하 감옥에 갇혀 홀로 아이를 낳고 길렀던 기억이 생생한 곳, 방주에 실려 생사를 운명에 맡겨야 했던 곳, 무정한 아버지의 나라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자와는 달리 오래전에 갓 태어난 손자와 딸을 방주에 가둔 채 물에 띄워 보낸, 이제는 노인이 된 아크리시오스 왕은 젊은 영웅 페르세우스가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소리소문없이 달아나버렸다. 다나에의 아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옛날 예언이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탁이 괜히 신이 맡겨놓은 운명이라고 불리겠는가? 그는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내려진 신탁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살펴보자.

아크리시오스 왕이 도망해서 정착한 라리사(Larisa)에서는 마침 죽은 자들을 위한 운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운동회에는 당대에 명성을 얻은 영웅이 거의 모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꽤 볼만했다.

라리사 왕의 호의를 입은 아크리시오스는 라리사 왕의 바로 옆자리에서 이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극구 사양했다. 그는 왕의 자리와 멀리 떨어진 일반석에서 군중들과 뒤섞여 경기를 관람하기를 원했다. 혹시 페르세우스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한편, 영웅 페르세우스는 고향 땅 아르고스에 도착하자마자 외조부를 뵈러 궁전으로 향했다. 아무런 원한도 사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미 외조부는 손자를 피해 이웃 나라 라리사로 떠났다고 하니 영웅의 마음은 허망했다. 영웅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떤 무기도 없이 라리사로 향했다.

페르세우스가 라리사에 도착했을 때는 운동경기 열기가 한창 절정에 있을 때였다. 페르세우스를 알아본 사람들은 이 영웅의 기량을 보고 싶어 경기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페르세우스 또한 영웅들과 자신의 기량을 겨뤄 보고 싶었다. 영웅은 외조부를 찾는 일은 잠시만 늦추기로 했다.

페르세우스는 우선 그가 가장 자신 있었던 원반던지기에 참가했다. 몇몇 다른 참가자들이 경기를 마치자 드디어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힘차게 원반을 잡고 큰 호흡으로 숨을 고른 다음, 힘껏 땅을 지치면서 몇 바퀴를 빙그르르 돌아 소리와 함께 창공으로 원반을 날려 보냈다.

빗나간 것인지, 영웅의 조준이었는지, 아니면 강한 바람이 심술을 부린 것인지 알려진 바 없으나, 영웅이 날려 보낸 원반이 공교롭게도 일반 관람석 쪽으로 날아가 어느 노인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리고 말았다. 전에는 웬만해서는 하지 않은 실수였다.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사고에 영웅은 서둘러 관람석으로 달려갔다.

그 노인은, 여러분도 짐작했다시피 페르세우스의 외할아버지이자 영웅을 나무 궤짝에 가두어 강에 버렸던 아크리시오스 왕이었다. ‘하는 짧은 탄식이 늙은 왕의 살아생전 마지막 음성이었고, 이렇게 하여 아크리시오스가 딸의 아들에 의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자기가 던진 원반에 맞아 죽은 사람이 외조부라는 것을 알고, 절규했다. 비탄에 잠긴 영웅은 축 처진 어깨로 외할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고향 땅,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아테나 신전에 외조부를 모셨다. 그리고 저승길로 떠나는 외조부의 두 눈 위에 지하 세계의 뱃사공 카론에게 줄 노잣돈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올려 드렸다.

 

12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를 낳았다. 그중 몇 명은 유명한 영웅으로 자라나 유력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알카이오스’, ‘메스토르’, ‘엘렉트리온(Electryon)’ 등은 그들의 아들이며, 헤라클레스는 그들의 증손자이다.

숱한 위업을 남긴 후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의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설마다 내용이 다르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부부가 아들 페르세스와 함께 아시아로 가 페르시아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반던지기 대회에서 자신 때문에 외조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르고스 영토를 티린스와 맞바꾸고 티린스를 다스리면서 안드로메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티린스 왕이 물려주는 왕위를 받아 미케네를 건설했다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 진다.

아무튼,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낭만적이고 모험 가득한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는 신화에서 매우 보기 드문 결말이다.

그들은 죽어서도 영광이었다. 페르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바친 보답으로 여신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를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 주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예를 누리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하나 더, 안드로메다의 부모 케페우스 왕과 카시오페이아 왕비도 죽어서 포세이돈 신에 의해 별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포세이돈은 카시오페이아를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어서, 왕과 왕비가 죽자 포세이돈이 그들을 벌하기 위해 보냈던 바다 괴물, 큰 뱀자리 옆에 그들을 자리하게 했다. 그래서 포세이돈은 그녀가 한해의 대부분을 발을 위쪽으로 한 채, 하늘에 거꾸로 있게 만들었다.

 

13

괴물이나 용을 죽이고 위험에 처한 아름다운 공주를 구출해 내는 페르세우스의 낭만적인 모험담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거듭 새로운 버전들을 만들어 내며 전해져 왔다.

이어서 보게 될 이아손(Iason)’, ‘테세우스(Theseus)’의 영웅담에서도 여러분은 괴물이나 용의 등장과 이를 퇴치하는 영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괴물이나 용을 퇴치한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 보답으로 아름다운 공주와 탈출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영웅들과 페르세우스 신화가 다른 점은 첫째, 공주가 괴물()의 직접적인 위험에 놓여 있지 않고 오히려 공주들의 도움으로 괴물을 물리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공주들은 모두 적국의 공주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두 번째 큰 차이점이 하나 생기는데, 이아손과 테세우스 이야기는 각각 아리아드네(Ariadne)’메데이아(Medeia)’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주가 적국의 영웅을 도왔다는 것은 고국을 배반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영웅의 반대편에 있는 왕과 나라는 패망 내지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옛사람들은 사랑만을 좇은 여인들을 좋게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르세우스 신화는 성 게오르그(St. Georg)’ 신화로 직접 이어진다. 성 게오르그는 중세에 가장 사랑받던 성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기사들의 모범이었으며 영국의 수호성인이었다. 성 게오르그는 용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아이아라고 하는 아름다운 공주를 구해주고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

이 구조는 비단 서양의 옛날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를 읽어보기 바란다.

로버트 문치의 동화 종이 봉지 공주는 한술 더 떠 이야기의 전복을 보여준다. 공주와 영웅의 역할을 뒤바꾸어 공주가 용을 퇴치하고 왕자를 구한다. 그러나 왕자는 엉망이 된 공주를 보고 진짜 공주처럼단장하고 다시 오라고 한다. 전형적인 이야기 뒤틀기이다.

할리우드의 히트작 킹콩(King Kong, 2005)의 구조는 또 어떠한가. 왕자가 킹콩이라는 괴수로 바뀌었을 뿐 미녀가 등장하고, 용이 등장한다. 킹콩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으로부터 미녀를 구하고 남성성을 과시한다.

이렇게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신화 이래로, 용을 죽이고 아름다운 공주를 구해내는 영웅의 이야기는 작가들이 즐겨 이용하는 모티브가 되어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의 독자나 관객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오락과 감동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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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2023-04-2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포스팅 내용을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스 신화 관련하여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데,
더 쓰신 글은 어디서 볼 수 있는지요? (혹시라도 직접 쓰신 글이 아니라면, 출처를 알 수 있을지요? 찾아봤는데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여쭈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