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소통의 시대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미 IT최강국인 대한민국의 요즘만큼 소통의 수단이 많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업무나 친목 목적으로 10개가 넘는 SNS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어떤 때는 무음처리를 해놓지 않으면 다른 일을 못 볼 지경이다. 각각 그만한 필요가 있으니 임의로 탈퇴하기도 어렵다. 음성 통화는 또 어떤가. 스마트폰이 유용한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것이 과연 소통의 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물건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상당수가 대출권유나 보험가입 권유 등 광고성 전화이기 일수고, 정작 통화 기능보다는 인터넷 검색, TV시청, 게임 등 부가 기능이 우선시 된지 오래다.
스마트폰이나 휴대폰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는 집전화나 공중전화가 있었다.('삐삐'라는 물건도 있었다.) 그림엽서나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었다. 이러 시대에는 전화라는 통신 수단은 첨단 IT로 인정받았었다. 그 시절의 전화기는 영화 포스터에 어떤 형태로 등장할까? 원할한 소통수단의 순기능을 강조했을까? 지금부터 포스터 속 통신수단을 살펴보자. '전화 스타일(phone style)'이다.

[휴먼 팩터, 1979]
리처드 애튼버러, 존 길거드 경이 출연하고 오토 프레밍거 감독이 연출한 영국 스릴러 영화다. 그레이엄 그린의 1978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휴먼 팩터'란 IT용어로서 '인간에게 최적화된 기기나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이용되는 이론, 원리, 테이터를 포괄하는 과학적 전문 연구분야'를 말한다는데 영화 내용과의 밀접성은 검증된 바 없다.
포스터는 사울 바스의 작품이다. 사울 바스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몇 안되는 색상을 활용하여 단순하고 임팩트 있는 디자인이 돋보인다. 강렬한 빨간 바탕에 지금은 몇 남지 않은 공중전화 박스에나 일을 법한 수화기가 맥없이 축 늘어져있다. 저 수화기를 들고 있던 사람, 괜찮을까?

[클루트, 1971]
젊은 제인 폰다에게 골든글러브(제29회), 뉴용비평가협회(제36회), 아카데미(제44회) 트로피를 안긴 알란 J 파큘라 감독의 [클루트]의 포스터도 역시 선이 늘어진 전화기가 보인다. 제목 '클루트'는 도널드 서덜랜드가 분한 극중 캐릭터의 이름이다. 이 영화 역시 스릴러로 분류되는데 제인 폰다가 열연한 '브리'의 직업이 콜걸인 것을 감안하면 포스터 속 전화기의 등장이 이해가 간다.
다만 [휴먼 팩터]의 전화기가 힘없이 늘어진 수화기라면 [클루트]의 전화기는 누군가가 밑에서 잡고 있을 것 같은 혐의가 짙다. 선이 다소 긴장되어 있고 수화기는 선과 둔각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다만 두 포스터 속 전화기의 공통점은 '통화중'은 아니라는 것, 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큰
회사의 중견 간부인 톰 그룬만(로버트 밀리 분)이 갑자기 실종되자 그의 친구이며 사립탐정인 존 클루트(도날드 서덜랜드 분)는 그를 찾아 나선다. 톰이 남긴 유일한 증거인 음란 편지를 추적하다 미모의 콜걸이자 배우 지망생인 브리
다니엘스(제인 폰다 분)를 만나게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브리는 몸을 파는 것으로 정신적인
외로움을 달래고 생계를 유지한다.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클루트는 브리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사건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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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라디오, 1988]
제39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에 빛나는 에릭 보고시안의 연기가 일품인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88년 작품이다. 라디오 방송 DJ가 청취자와의 대화 도구로 사용되는 전화기를 포스터 전면에 내세웠는데, 어두운 바탕에 노동자단체 깃발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손, 그런데 전화선은 거칠게 끊어져 있다. 무언가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듯한 인상의 포스터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베리(에릭 보고시안 분)는 청취자에게 심한 욕설을 하면서 싸우는 방식의 특이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청취자의 상처까지 서슴없이
건드리는데, 청취자들은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다시 그 방송을 듣게되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는 점차 높아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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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폰, 1977]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에 한 명인 찰스 브론슨과 [더티 하리] 시리즈로 더 유명한 돈 시겔 감독이 만났다. 제목부터 '텔레폰', 즉 전화기다. 줄거리부터 보자.
오랫동안 버려졌던 미 군사시설이 계속해서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수십년전 KGB에서 세운 텔레폰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이었다. 이것은 요원들에게 언어적 최면을 걸어 요원
자신도 첩보원임을 모른채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게 한 뒤 전화를 통해 어떤 암호를 말하면 요원들은 무의식 상태가 되어 최면 걸 때의 지시대로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폐기된 이 작전이 혁명 사상에 정신이상이 된 말친스키에 의해 개시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의 충돌가능성이 커지자 스트렐스키 장군(패트릭 매기 분)과 마르첸코 대령(알란 바델 분)은 극비리에 말친스키를 처치하기 위해 유능한 첩보원인 보르조프 소령(찰스 브론슨
분)을 미국에 파견한다. 보르조프는 미국내 침투해 있는 첩자인 바바라(리 레믹 분)의 도움을 받아 말친스키를 처치할 계획을
세운다. 보르조프는 말친스키가 자신의 이름의 각 스펠링으로 시작되는 도시 순으로 해서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요원들에게 차례로 행동 지시를 옮기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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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화선이 끊어진 것도 부족해 수화기의 송신기 부분이 박살이 나 버렸다. 선이 보이지 않아 사실 박살난 부분이 입에 대는 송신기인지 귀에 대는 수신기인지 궁금했다. 잡고 있는 폼이나 [토크 라디오]의 포스터를 보니 전화기는 송신기가 부서진게 맞다. 송신기와 수신기의 구멍의 숫자가 다른 것이다.(사무실에 있는 모든 전화기의 수화기를 확인해 봤다. 포스터와는 달리 적어도 우리 사무실에 있는 수화기는 모두 수신기의 구멍이 송신기의 구멍보다 많았다.) 아무튼, 저 전화기로는 이제 '텔레폰 작전'은 무용지물이겠다.

[타인의 눈, 1981]
앳된 제니퍼 제이슨 리를 볼 수 있는 켄 위더혼 감독의 슬래셔 공포영화. 강간하거나 살해하기 전에 반복적으로 희생자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스토킹하는 강간살인범 이야기다. 한 페미니스트 TV앵커가 그녀가 믿어왔던 이웃들 중 한 사람이 범인임을 의심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그닥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작품이다.
포스터는 공중전화 박스를 섬뜩하게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감금당해 있는 것이 분명한 잠옷 차림의 여성이 있는데 공중전화 박스 안은 온통 꽃으로 가득차 있어 움직일 수 조차 없어 보인다. 가까스로 수화기를 잡는다 해도 저런 상태라면 다이얼이든지 버튼이든지 찾을 수가 없을 테니 어디에 구조전화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5편의 영화 포스터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원거리 소통의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여야 할 전화기가 모두 불통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 수화기가 내려져 있거나 파손되어 있다. 혹시 불통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자 그렇다면 이제 제 기능을 발휘하는 전화들을 볼 차례다.

[국제 첩보국, 1965]
영국에서 제작된 시드니 J. 푸리에 감독의 스파이 첩보 영화다. 섹시하고 화려한 첩보원 제임스 본드(암호명 007)와는 대척점에 있는 현실적이고 서민적인 스파이 '해리 파머'를 마이클 케인이 연기했다. 실제로 원작자 렌 다이튼은 이안 플레밍의 007시리즈와 상반되는 스파이물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원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영국 스파이의 일인칭 소설이었으나 영화화 과정에서 제작사가 '해리 파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해리 파머 시리즈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베를린의 장례식, 1966], [빌리언 달러 브레인, 1967], [미드나잇 인 상트페테르부르크, 1996], [베이징 익스프레스, 1997]까지 이어진다.

[평결, 1974]
1974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합작 영화이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배우 장 가뱅과 소피아 소렌이 열연했다.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영화다. '살인자, 협박범, 유괴범... 미모의 여인이 이 세가지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카피가 영화의 내용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가 스릴러가 아닌 드라마로 분류된다는 점도 참고가 될까. 매우 진지한 법정 드라마일 것 같다.
아무튼 두 영화 모두 포스터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휴~~, 다행이다. 드디어 전화기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리 영화 [더 폰, 2015], [핸드폰, 2009]이나, 킴 베이징어가 열연한 [셀룰러, 2004], 콜린 파렐의 [폰부스, 2002] 등 전화기가 등장하는 많은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다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협박, 구조 요청, 위험에 대한 경고 등 비정상적인 상황하에서의 통화이다. '다들 스릴러 영화니까 그런거지'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의 소통은 정상적인가? 진실한가?
자, 아래에 구식 전화기가 한 대 놓여 있다. 당신이라면 누구와 어떤 말을 주고 받고 싶은가? 가까운 사람에게 좋은 소식 전하는 전화 한통을 기대하면서 마무리...

[웰컨 투 LA,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