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구절>


우리가 아는 것은 일부일 뿐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어 왕>은 리어 왕이 세 명의 딸들 중에서 효심 있는 셋째 딸의 진심을 모르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첫째 딸과 둘째 딸의 거짓말을 진심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큰 불행을 겪는 비극을 보여 준다. 역시 그의 작품 <오셀로>는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가 다른 남자와 밀통하고 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오셀로가 의처증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내를 목 눌러 죽이고, 나중에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슬픔과 회한으로 자살하는 비극을 보여 준다. 이 모두 진실을 몰랐던 대가였다.


리어 왕도 오셀로도 진실을 몰랐던 것은 그 대상의 일부만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상의 전체 중 어느 일부만 알았던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몰랐던 것. 리어 왕은 세 딸에 대해서, 또 오셀로는 아내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그저 그것의 일부만 알 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 무엇도 전체를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무엇을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다음은 브레히트의 시이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대동하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브레히트,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중에서





이처럼 언어가 어떤 대상의 본질을 알게 하는 데에 한계가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또한 그것을 아는 데에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소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바비큐 꼬치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연인들은 상대방의 어떤 요소들을 꼬치에 꿰고 나머지는 무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자는 자기의 연인 남자에 대해, 미남 - 큰 키 - 팝송을 좋아함 - 폐소공포증 - 솔직함 - 게으름 - 산책을 싫어함 - 검정색을 좋아함 등을 꼬치에 꿰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 대해 보고 느낀 것 중에서 그의 특징들만 골라내어 꼬치에 꿰어 그 상대를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대상의 일부만 알고 그 나머지는 모르면서도 마치 전체를 알고 있는 듯 착각하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오류를 범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총체적으로 알기보다 부분적으로만 잘 알고 있어서 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나 자신의 의외의 면에 대해 깜짝 놀라며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하고 의아해 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나는 그에 대해 잘 안다’라는 말은 ‘나는 그의 어떤 면을 잘 안다’로 고쳐 말해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데 누구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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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와 친숙해져서 인터넷 악성 댓글에 대한 피해가 생기고 그것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된 바 있다. 최근엔 모 방송인의 싱글맘 생활에 대한 비난의 댓글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얻은 것에 대한 비난으로, 아버지가 없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쓴 글이었다. 이것을 보며 자신에 대해서도 총체적 파악이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입을 떼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싱글맘 중에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삶을 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또는 자식을 갖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였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그저 싱글맘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만 알 뿐이다.


누구든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선 무엇에 대해서든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직접 경험하기 전엔 그 무엇의 일부만 아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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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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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09-08-1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서^^ 글 잘 읽고 갑니다.자주 제가 쓴 것처럼 공감이 되거든요.

페크pek0501 2009-08-20 09: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글을 완성하고 나면 고쳐야 할 결함이 눈에 띄어 완벽한 글을 쓰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도 글을 쓰는 건 제 마음 설레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글의 결함이 생각나 수정하러 들어왔어요. 싱글맘 댓글 얘기는 이 글에서 사족인 듯하여 <후기>라는 글로 빼냈습니다.

옹달샘 2009-08-28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되는 글입니다. 나 자신도 나를 모를 때가 있는데 남을 완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모든 걸 안다면 시시할 것 같은 생각도 드네요. 연애하는 사이라면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09-08-29 00:16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글쟁이 친구! 상대에 대해 백 퍼센트를 알아버리면 사랑하기 힘들걸요. 인간의 검은 마음, 응큼함, 속물근성까지 다 알고나면 사랑의 감정이 생길까요. 아주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몰라두요. 아마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타인의 일부만 아는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도 빠질 수 있으니...
 
셰익스피어 4대 비극 - 개정판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리어 왕’을 읽고 - 진실은 왜 멀리 있을까



노인이 된 리어 왕은 세 명의 딸들에게 ‘자신을 누가 가장 극진히 사랑하는지’를 말해 달라고 하면서, 세 딸의 말을 들어보고 큰 재산을 주겠노라고 한다. 이에 첫째 딸 고네릴과 둘째 딸 리건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셋째 딸 코델리아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리어 왕은 아무 할 말이 없다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 코델리아는 마지못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언니들이 정말 아버님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어째서 남편을 얻었단 말입니까? 저도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마도 저의 배우자인 주인께서 제 애정과 관심과 의무의 반은 빼앗아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언니들같이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께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이 대답에 리어 왕(아버지)은 그것이 진심이냐고 격노하면서 셋째 딸과의 인연을 끊는다. 이 말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늘어놓은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 재산을 나눠 준다. 그러나 이 두 딸은 효도는커녕 아버지를 학대하기에 이른다. 결국 불효하는 두 딸로 인해 리어 왕은 불행한 파국을 맞는다. 너무 솔직했던 셋째 딸의 말에서 진심을 읽지 못한 대가는 그렇게 혹독했다.


리어 왕은 어째서 딸들로부터 사랑의 표현을 듣고 싶어 했을까, 왜 진실을 몰랐을까, 그리고 솔직한 것은 나쁜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여기서 인간의 특성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인간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 둘째,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을 만큼 외롭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 셋째, 같은 말인데도 인간은 해석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것. 넷째,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는데, 솔직함이 지나쳐서 아버지를 분노케 할 만큼 셋째 딸은 어리석었고, 딸의 진심을 모르는 아버지 역시 어리석었다.


이 작품은 리어 왕의 충신인 글로스터 백작의 비극도 함께 전개되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백작은 서자인 에드먼드에게 속아 장남인 에드거를 불행 속으로 빠뜨리고, 자신도 에드먼드에게 배반당하고 눈알을 뽑히고 만다. 이 역시 진실을 몰랐던 대가였다.


진실은 왜 알 수 없을까. 리어 왕뿐만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도 무엇의 진실(진심)을 제대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텍쥐페리 저, <어린 왕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보이지.” 이 말은 겉만 보지 말고 그 속도 헤아려서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마음으로 보는 것 또한 소용없는 게 아닐까. 차라리 수전 손택(소설가, 평론가)의 말에 믿음이 간다. “이해라는 것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말.


나 역시 나의 진실이 왜곡되는 일을 경험하곤 하였다. 나는 ‘A’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B’라고 알아듣는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말을 그렇게 왜곡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그것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거짓임이 밝혀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없는 거라고 여겨졌다. 우리가 지금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서 반 정도는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진실은 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저 산 너머에 핀 꽃과 같은 것이라서.


진실은 잘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뒤늦게 발견되는 것’이라는 게 이 작품의 메시지다. 이 책처럼 명작이란 오래 전에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유용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카알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위대하게 평가 받았던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현재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그 사실은 실제로 진실이 아닐 확률이 많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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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구절>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들은 장님이 된다는데, 아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친절하다네. 운명의 여신은 매춘부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문을 잠그네.(본문 중에서)


<내가 쓴 구절>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이 확실한 진실임을 확신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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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 - 이혼율이 높을 이유를 제시하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남녀차별이 예전만큼 심하진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남녀평등이 이뤄진 건 아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전히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문제로 대립하게 된다면 강자와 약자로서가 아닌, 옳은 자와 옳지 않은 자의 대결로써 해결해야 한다. 이때 물론 옳은 자가 승리해야 좋은 세상일 것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살기엔 얼마나 잘못된 세상인가를 말해 주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여자들(혜완, 경혜, 영선)은 남자들에 비해 약자이며, 그런 약자가 보는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고 모순투성이다. 이로 인해 그녀들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세 여자의 삶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혜완의 삶이다.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건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증거




“그까짓 한심한 책들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버려두고 (직장에) 나가려는 니 저의가 대체 뭐야?”

“아이를 키워 놓고 (직장에) 나가란 말이야. 그땐 내가 말리지 않을게.”

“직장과 가정 둘 중에서 택하란 말이야. 난 그꼴 못봐.”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은 회사를 다니던 혜완(아내)이 회식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온 날 밤에, 화가 난 남편이 혜완에게 퍼부은 말이다. 우리는 이것만 읽어도 남자의 말인지, 여자의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부가 주고받는 말 중에서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직장과 가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남편의 말에 혜완은, 왜 직장은 여자만 포기해야 하는지에 분노하고 억울해 한다. 어느 아내든 남편에게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육아는 엄연히 여자의 몫이라는 건 이 사회의 고정관념이다.


흔히 남편들은 부부싸움 중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당신이 참고 살면 안돼?”라고. 그러면 아내들은 말할 것이다. “당신이 참으면 되잖아. 왜 꼭 여자가 참아야 하는데?”라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참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 한 쪽이 참아야만 평화롭게 유지되는 가정을 가져야 하지?’ ‘누구를 위한 가정이길래?’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을 짓밟고 이루는 평화가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쪽의 희생을 담보로 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공평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똑같은 비중으로 양보하고, 동등하게 희생하고, 균등하게 참아야 하는 것, 그래서 함께 힘들고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자들은 말이야 이 사회에서 멸시당해도 싸다구...... 자기들과 같은 성을 낳아서 좀더 권리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안하고 남자를 낳아서 다른 여자들을 구박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 아니니? 딸을 낳는다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구박을 하는 사람의 부당함과 싸워야지 아부를 하다니...... <본문 중에서>




이것은 남아선호사상을 가지고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탓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런 여자들은 남존여비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탓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항변할 게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여자로서 받은 설움을 딸이 고스란히 받게 될까 봐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라고.


이런 남아선호와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여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든지 아니면 그런 부당함과 싸워 나가며 살든지…. 그런데 이 시대 여자들은 이런 부당함에 맞춰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판단할 줄 알 만큼, 이미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받는 불이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예전에 비해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마 이혼율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난 이 소설에서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를 알아내었다. 남녀의 인지의 차이, 그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즘, 결혼한 뒤 남과 여, 이 두 개의 다른 성은 한 세계 속에 살면서 서로의 인지의 차이를 확인할 터이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마땅히 여자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아내는 시대가 변했다며 집안일과 육아를 나눠서 남자도 여자와 똑같이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둘의 관계가 악화되고, 급기야 회복할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땐 이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출간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다. 특히 결혼을 앞 둔 연인에게 이 책을 꼭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결혼한 뒤 남편으로서의 할 일과 아내로서의 할 일에 대해 서로 의논해서 미리 정하고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문제 말고도 결혼생활에서 또다른 문제들이 생기겠지만 이 문제만이라도 해결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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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관련한 다른 책들의 구절


“우리들의 결혼은 다만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나는 당신의 장난감 인형 아내였을 뿐이에요.”(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 - 입센 저, <인형의 집> 중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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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구절>



사유하지 않음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 p35~36.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상대가 친구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다. 문제는 도와 주려는 자신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움이라는 것의 의미는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한 쪽에서 생각한 그 ‘도움’이 상대방에겐 ‘도움’이 아닌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는 상대방이 고맙게 여기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옷 정리를 하다가 키가 커진 아들들이 입지 못하는 옷들을 모아 이웃집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해진 옷도 아니고 다만 크기가 맞지 않아 버리기 아까운 옷이었으므로 당연히 받는 사람이 고마워할 줄 알았다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이웃 사람이 그 옷들을 받는 걸 거절하더라는 것이다. “난 우리 애들한테 남이 입던 옷 안 입혀요.”하는 냉정한 말로써 그 불쾌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을 듣고는 그 친구는 멍해졌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우리 애들이 입지 못하는 것들을 추려서 이웃에게 갖다 주곤 했기 때문이다. 어디 옷뿐이랴. 우리 애들이 학년이 바뀌어 쓰지 못하는 동화책이나 참고서까지 갖다 주곤 하는 나로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내게서 받았던 그 사람도 어쩌면 언짢은 걸 억지로 참고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또 이런 얘기도 들었다. 한 친구가 어느 모임에 갔다가 모임이 파해 귀가할 때였다. 자신만 빼고 모두들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차가 없는 자신을 위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를 배려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정말 그 마음은 고마웠다고 함)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이 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문제였다. 그 친구는 차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자각되면서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해 줄 때는 꼭 그 사람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진리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잘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에서 저자 정희진은 사유하지 않음이 폭력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또는 타인)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린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너와 내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성차별을 비롯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등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로 인해 상처가 생기는데, 그 차별이란 것도 결국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불쾌하거나 상처 받는 일은 거의 ‘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한다. 무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달라서 말은 가까이 있지 않아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 독기를 품어낼 수 있다. 가령 자신에 대해 누군가가 심하게 험담한 사실을 제삼자의 전화통화로 전해 받고선 괴로워할 수 있다. 그래서 무기보다 말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친절로써 한 선의의 말인데도 마치 험담처럼 상대방에게 마음의 병을 앓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인간관계가 좋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서로 같은 처지에 있어 보지 않은 각각의 타인들이다. 또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열등감을 갖고 있기 쉽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의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주위엔 결혼하지 않은 것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학벌 열등감이나 외모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또 가난함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는 부분에 대해선 타인이 무심코 던진 말도 민감하게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에게 어느 대학 졸업했냐고 물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은 자신의 생활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다. 만약 방송을 통해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한다면, 직장인은 내일 출근시 우산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산 장수는 내일 얼마나 우산이 팔릴지를 기대하며, 비가 새는 집에 사는 이는 내일 지붕이 샐 것을 걱정할 것이다. 지붕이 샐 것을 근심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비 오는 날의 낭만을 얘기하며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늘어놓는다면 그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알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또는 세상)에 대해 사유를 게을리 함으로써 약점 있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게 되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다. 열등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열을 가리는 우리 사회의 산물이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열을 가려야 하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타인을 위해 ‘사유’하는 일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그 사유로 인해 타인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예전보다 줄어든다면 그것은 좋은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걸 의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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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09-08-2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앓다가 시간이라는 약으로 인해 아물고 상처엔 딱지가 앉게 되지요. 딱지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놔두면 되는데 긁어부스럼을 만들기도 하고 다시 덧나게 하기도 하여 한참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살기도 하지요. 한번더 생각한 뒤에 말하고 행동해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09-08-29 00:14   좋아요 0 | URL
그래요, 조심해야겠단 생각 들어요.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걸 새삼 느끼며 살게 돼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요하겠죠.
 


논술은 생활 속에 있다


대입시험에서 논술이 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이 많다. 여느 과목과는 달리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닌 논술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들도 있다. 이는 논술이 우리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잘 몰라서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논술을 접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아이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시청에 빠져 있어서 어머니가 이렇게 묻는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니?” 어머니의 이 질문을 논술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방송 프로그램이 왜 재밌는지 그 이유를 논술하시오.’ 라고 고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결혼 적령기의 딸이 결혼할 상대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사윗감인 남자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내 딸과 결혼하면 어떻게 살 건가? 그리고 자네의 직업관에 대해 말해보게.” 이를 논술문제로 표현하면 ‘결혼생활과 직업관에 대해 논술하시오.’와 같이 된다.


어디 이뿐인가. 제품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체에 취직한 회사원도 논술과 접하는 일이 많다.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회의 시간에 팀장이 회사원들에게 말한다. “어떤 신제품을 만들면 좋을지 발표해 보시오.” 또는 “그 제품의 장단점을 설명해 보시오.” 이 모두가 논술로 답변해야 되는 물음들이다.


이렇듯 논술은 우리 생활 속에 있다. 학생들이 논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대입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문장력과 사고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 생활에서 논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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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옮겼습니다. 물론 제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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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7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