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글> 봄날의 갖가지 상념들


1. 비의 낭만을 잃은 날

어제 비가 내렸다. 경기도교육청은 각 초등학교가 학교장 재량으로 휴업하도록 했다. 비가 인체에 해로운지를 떠나 학부모들의 자녀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짐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젠 비가 갖고 있는 낭만의 이미지가 사라질 시점에 와 있다. ‘방사능 비’가 내릴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앞으론 비가 내릴 때마다 좋아하기보다 건강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비를 낭만적으로 맞을 수 있는 시대는 이렇게 해서 끝나는 것인가.


2. 우리는 하나

생선도 야채도 안심하고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원전사고는 일본에서 일어났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오고 있다. 역시 지구는 하나였고, 우리는 하나였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이 곧 나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이런 글이 떠오른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약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대륙이나 모래톱이 그만큼 작아지듯,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3. 인간의 한계

일본의 원전사고는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고 다음으로 문제를 파악하는 것으로써 한계에 이르는 존재로 태어났다. - 괴테어록 32쪽.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괴테어록, 32쪽.






오로지 인간만이 불가능한 것을 이룩할 수 있다. 인간은 구별하고 선택하고 판단한다. 인간은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 괴테어록, 33쪽.




4. 커피의 맛에 집중하기

3일 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잠을 푹 자고 싶어서다. 심각한 불면증 정도는 아니지만, 몇 시간에 한 번씩 자꾸 깨어 아침에 일어나면 푹 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문제다. 20프로 수면 부족의 느낌.


커피중독자인 내가 커피의 유혹을 이겨내고 3일이나 마시지 않았으니 오늘은 내게 상을 주기로 하고 커피를 마시기로 하였다. 원래 내 습관은 아침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실 때면 신문을 펼쳐 드는 것인데,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커피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커피보다도 신문의 내용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의 맛에 집중하기 위해 그 습관을 바꿨다. 신문을 볼 때는 신문만 보기로, 커피를 마실 땐 커피만 마시기로 했다.


우리 집은 방마다 벽의 한 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찻길 부근에 있는 고층 아파트라서 창가에서 활기찬 도시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창밖엔 자동차가 분주하게 오가고 사람들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난 이 풍경이 아주 맘에 든다. 요즘 숲 속에 있는 아파트가 인기라고 하지만 그런 아파트가 운치는 있겠지만 특히 밤에 느껴지는 적막한 숲보단 불빛이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이 난 좋다. 고독한 풍경이 아니라서 좋다.


그리하여 새로 만든 습관은 커피를 마실 때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앉는 것이다. 창밖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면 커피의 맛에 집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최대한으로 커피의 맛을 음미하며 마실 수 있다. 오늘 창가에서 며칠 만에 마시는 커피의 맛은 아주 달콤하여 그 좋은 느낌이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마셨을 때 커피의 맛을 50% 느낄 수 있다면, 이렇게 마시는 것은 100%의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생의 기쁨은 크지만, 지각이 있는 생의 기쁨은 더욱 크다. - 괴테어록, 39쪽.




이것을 흉내 내어 쓰면, 커피는 맛있지만 음미하는 커피는 더욱 맛있다.



작은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이미 큰 일을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라. - 괴테어록, 187쪽.




이것을 흉내 내어 쓰면, 커피를 마시는 작은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이미 큰 일을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라.


작은 것에 감사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


5. 처신의 어려움

어느 친척의 장례식장에서 밝은 웃음을 띤 얼굴을 한 적이 있다. 사촌 언니와 오빠, 동생 등 여럿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명랑하게 말하며 즐겁게 웃었던 것. 식사하는 자리에서였다. 삥 둘러앉은 낯익은 얼굴들을 보니 즐거운 모임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에 빠진 모양이다. 난 그때 그곳이 장례식장임을 잠시 잊었다.


물론 장례식장에 들어서며 영정을 보면서는 울음을 참지 못해 눈이 빨개지도록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자 그 울음이 웃음으로 변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례식장이란 장소에 맞지 않게 웃고 있던 내 모습이 생각나자 몹시 부끄러웠고 죄의식마저 느꼈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관찰이라도 했다면 나를 얼마나 한심한 사람으로 봤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줄 아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은 날이다.



6. 신정아 자서전

최근에 출판된 신정아의 자서전 ‘4001’이 많이 팔려 화제다. 그녀는 학력 위조 사건이 발생한 2007년 5월 이후 써 온 일기․메모 등에서 일부를 추려 책으로 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그녀는 어느 정치인을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슬쩍슬쩍 나의 어깨를 치거나 팔을 건드렸다”며 그는 “겉으로만 고상할 뿐 도덕관념은 제로였다”고 썼다고 한다.


이 글을 그(어느 정치인)의 가족이 보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에 대해서 그녀는 한 번쯤 생각해 봤을까. 한 남자의 가정이 파탄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글이면서 동시에 한 정치인의 생명력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아무리 거짓 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의 인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글이다. 그래서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책은 사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녀의 책 내용이 공개되기 전까지 난 그녀의 책 출판 소식을 알았을 때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책 출판을 재기의 기회로 삼아, 쓰러진 몸을 일으켜 다시 일어나길 바랐다.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해서 비난을 삼가고 싶은 연민이 일었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서 그녀가 쓴 책에 그런 내용의 글이 실렸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빠져 있다는 것은 의외다. 왜냐하면 한 번 아파본 사람은 그런 아픔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7. 카이스트 또 자살

카이스트 학생이 어제 또 자살을 했다. 올해 들어서 학생 4명이 잇따라 자살한 것이다. 성적 스트레스로 자살한 학생도 있다고 한다. 현재의 즐거움 없이 미래를 위해서만 산다면 그건 불행하고도 슬픈 일이다.  




미래를 위해 자신을 준비하며 현재를 즐겨라. - 괴테어록, 68쪽.




8. 황사

오늘은 전국적으로 황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봄은 곱게 오지 않았다. 흙먼지 일으키는 봄바람과 꽃샘추위와 황사를 동반하며 봄은 왔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완연한 봄인가 싶으면 바로 여름이 되고 만다.


예전엔 ‘봄’하면 떠오르는 것은 따스한 햇살이었는데, 이젠 ‘봄’하면 황사가 떠오르게 되었다. 시간에 따라 계절의 이미지도 변한다. 또 무엇이 변할까.


지금 이 시간에도 무엇인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을 것이다.


9. 괴테어록

괴테를 알고 싶어서 괴테어록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은 글은 이것.



재물을 잃는다는 것 - 이것은 얼마간을 잃는다는 것이다.

명예를 잃는다는 것 - 이것은 많은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용기를 잃는다는 것 - 이것은 모두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 괴테어록, 55쪽.




그러므로 무엇이 되고 싶고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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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좋은 사람의 기준


며칠 전, 몸의 한 쪽에서 통증이 느껴져 병원에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탔다. 처음 타는 것이라 버스요금이 얼마인지 몰라 요금을 묻는 나에게 운전기사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그러고는 버스요금을 말해 주었다.


그 활기찬 목소리는 친절함이 담겨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난 그때 내게 병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근심스런 생각으로 병원에 가는 길이어서 마음이 회색빛이었다. 그런데 운전기사의 그 인사말에 마음이 훨씬 밝아짐을 느꼈다. 그 한 마디에 기분이 확 바뀐 나 자신에게 우선 놀랐고, 그 한 마디의 위력에도 놀랐다. 그 작은 친절이 우울하던 타인의 기분을 환하게 변화시키는 게 경이로웠다. 친절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생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가져야 할 미덕은 ‘배려’가 아닐까 한다.


만약 그때 버스기사가 요금을 묻는 나에게 버스요금도 모르냐고 하면서 짜증 섞인 말로 불친절하게 대했다면 어땠을까. 근심하던 내 마음은 더 어두워져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운전기사가 참 고마웠다. 다행히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어렸을 적, 집으로 가는 길에 헤매다가,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는데, 내게 매우 친절하게 자세히 설명해 주는 어떤 사람을 보고 혹시 나를 도와주기 위해 하늘에서 잠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친절한 사람을 만날 때면 그 어린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다.


누구에겐가 천사의 역할을 해 본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닐까. 때로는 사랑을 받는 일보다 사랑을 하는 일이 더 즐겁듯이, 선물을 받기보다 선물을 주는 것이 더 즐겁듯이, 천사를 만나는 일보다 직접 천사가 되어 보는 일이 더 즐거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자기 기분에 빠져 남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인간은 선악이 공존하는 존재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음 한 구석엔 이기심이 있으며, 아무리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마음 한 구석엔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잔인하게 강도질을 한 남자가 그의 애인에게만큼은 착한 남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하나도 이상할 건 없다. 남을 괴롭히며 사는 사람도 그의 어머니 앞에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알고 보면 착하다, 라는 말이 있으리라.


그래서 좋은 사람의 기준을 생각할 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누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과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나누는 게 맞을 것 같다. 알고 보면 다 착한 사람들인데, 타인을 얼마나 배려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은 남의 눈을 찌푸리게 만든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들, 식당에서 자기네 애들이 떠들어도 주의를 주지 않는 사람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오히려 먼 타인보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배려하며 산다는 게 더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상대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상처 받을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생긴다. 어쩌면 우리가 늘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의 불행이 반으로 줄지도 모른다. 사람들로 인해 겪는 불행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재밌는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팀 보고에 따르면, 가난할수록 다른 사람의 느낌을 더 잘 알아본다고 한다. 더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남을 배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부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남들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감정을 배려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조선일보, 윤희영의 News English에서 인용함).” 이에 따르면 부자로만 산 사람들에 비해 가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남을 배려할 확률이 높다.

 

다음의 명언들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다른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이런 관심을 가지면 사람은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 법이다(J. 신들러).”


“관대하고 친절한 마음이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다(R. 번스).”





다음의 명언들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임을 알게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한다. 왜나하면 어진 마음 자체가 자신에게 따스한 체온이 되기 때문이다(파스칼).”


“남을 때린 자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남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것이 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플라톤).”


“가장 큰 쾌락은 남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이다(라 브뤼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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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이 글에 명언을 많이 넣었다. 명언을 많이 알고 있으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명언 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세계 위인들의 명언이 수록된 책들을 가까이 두고 자주 들춰 본다. 아무 데나 펴서 마음이 끌리는 낱말에 대해 살펴보는 게 재밌다. 가령 행복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성공에 대해서, 질투에 대해서, 어떤 말들의 명언들이 있는지 읽어보는 것은 흥미롭다.


내가 가장 많이 읽었던 것은 <주제별로 엮은 좋은말 사전>이란 오래된 책인데, 자주 펼쳐 보았더니 제본된 부분이 뜯어졌다. 그래서 사용하기 불편하여 새 책을 산 것이 <세계의 명언 1>과 <세계의 명언 2>라는 책이다. 꽤 두꺼운 만큼 아주 많은 명언 ․ 격언 ․ 속담들을 만날 수 있으며, 낱말이 가나다순으로 배열되어 있어 보기 편하다.


 




 

 

 

 

 

 

명언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두꺼운 책을 가지면 마음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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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1-05-1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좋은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좋은 사람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도일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1-05-15 21:3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들어왔군요. 매우 반가움.
늘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한다는 것,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요.
그런데 옹달샘님은 제가 보기에 좋은 사람 같음.ㅋ
 

<생활칼럼> 선의의 거짓말



적적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거의 매일 친정에 들른다. 그러다가 내가 몸이 아파 가지 못하는 날이 생긴다. 최근 감기몸살을 앓을 때도 그랬다. 우리 집과 친정은 걸어서 십오 분쯤 걸리는 거리인데 아픈 몸으로 찬바람을 쐬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도 나를 보면 금세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눈치를 채시므로 친정에 가지 않는 게 나았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아시면 큰 걱정을 하셔서다. 이럴 때 내가 하는 거짓말은,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엔, 감기가 들어서 오늘은 가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어 내게 갖다 주러 오신다. 그러고는 체중이 빠진 것 같다면서 마음의 그늘을 가지신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젠 거짓말을 하는 요령이 생긴 것이다. 이럴 때 거짓말은 친정어머니와 나, 두 사람 다 편하게 만든다.


우리 대부분은 진실해야 옳은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진실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또 상대방을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대체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고 여겨질 때 거짓말을 할 것이다.

만약 늘 진실해야만 한다면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게 될 듯싶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친구가 옷을 새로 사 입고 나와서 “이 옷 어떠니?”라고 묻는데, 느껴지는 대로 솔직하게 말한답시고 “별로 예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해 준다면 그 친구의 기분은 어떨까. 둘의 관계는 좋은 친구관계가 유지될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연히 어느 커피숍에서 친한 친구의 남편이 어떤 여자와 만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연인관계였다. 이 때 이 얘기를 그 친구에게 해 줘야 할까, 말까. 어떤 것이 그 친구를 위하는 일이 될까. 만약 그 얘기를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남편에게 속고 사는 바보가 되고 말 것이며 더 불행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남편이 비밀리에 연애를 하다가 언젠가는 연인관계를 정리할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굳이 진실을 말해서 그 친구를 불행에 빠뜨릴 필요가 없다.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가 있는데, 동생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어머니가 충격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이 사실을 숨겨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이것은 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내가 어머니라고 가정하고 어떤 답을 원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고 결정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사람은 심적으로 힘들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할 것이다. 그 선택에 따라 결정이 다를 것이다. 이럴 때 나라면 고통스런 진실보다 고통을 없애주는 거짓을 택할 것 같다. 사람이 진실해야 함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게 해 주는 경우라면 거짓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꼭 필요한 경우는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본 경우가 아닐까. 가령 어느 축구 시합에서 누군가가 반칙을 했고 그 반칙을 공개하지 않으면 상대편 선수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경우에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또 죽어가는 암 환자에게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해 의사나 가족이 말해 줘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이 환자에게 고통을 준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으면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은 것에 따른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19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석방된 장 발장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은 미리엘 신부였다. 그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신부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장 발장은 성당의 은그릇을 훔쳐서 도망쳐 버린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경관들에게 잡혀 성당으로 끌려온다. 그는 다시 도둑질을 한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장 발장에 대해 화를 낼 줄 알았던 미리엘 신부는 다음과 같은 뜻밖의 말을 한다.





“오, 수고들 많소. 그런데 장 발장이 아니시오? 당신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져가시라고 드린 물건 가운데 은그릇만 가져가셨기에 왜 은촛대는 안 가져가셨는지 궁금했습니다.” - 빅토르 위고 저, <레 미제라블> 중에서.



        

 

그러면서 신부는 벽난로 위에서 은촛대 두 개를 가지고 오더니 장 발장에게 내밀었다. 장 발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떨결에 은촛대를 받았다. 이 일에 감동한 장 발장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다.


미리엘 신부가 거짓말을 했던 것은 장 발장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이 그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은 장 발장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거짓말이 되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 미리엘 신부의 거짓말을 떠올린다.


‘거짓말도 잘만 하면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거짓말도 잘하면 처세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다. 어느 누구에게든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해로운 진실보다 이로운 거짓말이 나으며, 악의의 진실보다 선의의 거짓말이 낫다는 생각이다.


그 누구든 미리엘 신부를 ‘진실성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거짓말을 해도 되는 조건은 그처럼 ‘진실성 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의 거짓말인 경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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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살다보면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모를 때가 있다. 이 때 옳게 판단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올바른 판단력을 얻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고 독서가 필요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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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3-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주째 감기를 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감기 조심하시길...

옹달샘 2011-05-1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을 위한 거짓말보다는 나를 위한 거짓말을 더많이 하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페크pek0501 2011-05-15 21:34   좋아요 0 | URL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것,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려울 거예요. ㅋ
 


<책 속을 산책하다가 좋은 글을 줍다> 두 소설의 명문장


어느 날, 첫사랑인 사람으로부터 오랜만에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면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만약 이것을 소설로 쓸 경우, 전화를 받는 사람이 상대의 전화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면 이건 가짜다. 실지로 그런 대상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아마도 우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멎을 것처럼 긴장되어 말을 더듬거나 침묵으로 그냥 멍하니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 긴장감은 뜨거운 감정에 비례할 것이다.


경험한 것처럼 쓸 때 리얼하다


만약 길을 가다가 그리워하던 사람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는 어떨까. 갈등 없이 반갑게 달려가서 말을 건넨다면 이건 가짜다. 가짜가 아니라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연기일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린 아마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글을 잘 쓰려면 직접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경험한 것처럼 쓸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탁월해야 할 것이다. 내가 명작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도저히 경험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글’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혹시 책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연애소설부터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명작의 연애소설을 읽으라고 하고 싶다.



무릇 천지만물을 살피는 데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고, 사람을 보는 데에는 정보다 묘한 것이 없으며, 정을 살피는 데는 남녀 간의 정을 살핌보다 진실한 것이 없다. 18세기 문인 이옥의 말이다.

고미숙 저,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중에서.




18세기 문인 이옥의 말에 따르면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남녀 간의 정을 살피는 것이 으뜸이란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꼭 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은 직접 연애를 해 보는 것. 만약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연애에 관한 책이라도 읽어서 남녀 간의 정을 살펴봐야 한다.


소설은 결과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과정을 보여 주는 것


소설에서 “그 두 사람은 이별하였다.”라고만 쓴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싱거운가. 이런 식으로 쓴 글을 읽으면 독자 입장에서 어떤 감응도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런 감동도 없다. 다음은 내가 뽑은 명문장이다. 두 연인의 이별장면이다.



니나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내리려 했던 섬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배가 멎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릴 때 그 선객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섬을 바라보면서도 선장에게 항로를 섬 쪽으로 돌려 달라고 하기 위해서 종을 흔들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팔이 그를 붙들고 있고 그는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배는 계속해서 가고 섬은 대해의 한가운데에 그냥 떠 있다. 그 섬에는 다시는 어떤 배도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니나는 갔다.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이별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별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 풍경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글이다. 이런 글은 읽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들이 이별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밀한 묘사는 필수다.



1

책 소개



<생의 한가운데>는 린저의 대성공 작품으로서, 특히 그 형식의 참신성에 의해서 매우 찬탄을 받았다. 이 작품 속에서 린저는 이야기, 보고, 일기, 편지, 회상, 여주인공의 창작 등 여러 형식을 서로 섞어서 한 개의 새로운 형식을 낳고 의식적이고 기술적인 문체 구성을 시도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이며 남성적인 명성을 지닌 소설가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으로 풍요하게 장식된 ‘니나 부슈만’이다. 니나를 통해서 린저는 현재의 지성 계급에 속하는 여자가 자기의 의식 세계를 주위와의 분쟁 속에서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였다.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가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확 뒤집어 놓는 글은 좋은 글이다. 다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회를 주는 글이다.



만약에 신이 나를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행복 속에서도 선량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현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솟아온다. 그리고 도대체 현명이 행복이나 선보다 나은가 하는……


그리고 왜 도대체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도대체 원하지도 않는데 현명해져야 하는 것일까?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현명함’과 ‘행복’과 ‘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리석게 살더라도 행복한 게 나은가, 불행하더라도 현명한 게 나은가. 꼭 현명해져야만 선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까.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현명함’과 ‘선’, 둘의 가치 중에서 무엇인 먼저인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 있기는 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없는 게 아닐까.


일찍이 R. 타고르는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사람이란 매우 가변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십 년 전의 ‘나’와 다르고 또 십 년 뒤의 ‘나’와도 다를 것이다. 현재의 ‘나’만 해도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이 여러 면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성격만 해도 적극적이면서 소극적이고, 사교적이면서 비사교적이고, 활발하면서도 생기가 없고, 명랑하면서도 어두운 일면이 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로 나를 표현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많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은 몸을 굽히고 자기 자신 속을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나를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도 참 자기가 아니야. 아마 그 수백 개를 다 합치면 정말 자기일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믿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많은 자기 중에서 다만 하나만,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야.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이승우 저, <생의 이면>이란 소설에도 이와 같은 글이 있다.




나는 내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2

책 소개  



모든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은밀함이다. ...... 이 소설은 자전적이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작가의 말 중에서.





다음은 <생의 이면>에서 내가 뽑은 명문장이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役)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나는 내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안다.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이다. 과거란 결국 인상(印象)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이고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라는 것에 공감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기억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5년 전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싸웠던 이유와 그 과정에 대해 말할 경우 두 사람의 말이 각각 다를 수 있다.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관해 지금 말하는 내용과 10년 뒤에 말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어떤 것을 취사선택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또 (시간이 흐른 뒤엔)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에 불과하다.



왜곡된 진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일 수 있을까? 물 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 그것들을 달이 아니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해라고 말할 것인가, 꽃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것들은 달이 아니지만 달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것. 우리의 검열 받은 기억 속의 과거가 그러하다. 그것들은 한낱 인상에 불과하지만, 그 인상을 조작된 것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일뿐만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물 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과 같이 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므로 입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여기에 소개한 <생의 한가운데>와 <생의 이면>은 몇 번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명작소설이다. 이 두 소설은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고, 사색적인 글이 많고, 작가만이 알고 있는 생의 비밀을 포착하여 매력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마치 한 사람이 두 작품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


두 권의 책을 통해서 두 작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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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생의 한가운데>와 <생의 이면>이란 두 소설이 공통점이 많아서 놀라며 읽은 기억이 있다. 오랜 전에 읽었던 책들인데, 요즘 다시 꺼내 보고는 좋은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소개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나는 좋은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란 없으며 그저 다양한 변주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이 중복되어 있음을 발견하는데, 그것도 독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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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자살에 대하여


“17일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 자살한 대학생은 249명이나 됐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자살이 78건(31.3%)으로 가장 많았고, 경제 문제도 16건이었다. 2008년에는 전체 대학생 자살자 332명 중 175명(52.7%)이 염세․비관․낙망 등을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조선일보, 2011. 2. 18.).” 이 기사에 따르면 생활고에 쫓겨 극한 상황에 몰린 대학생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을 휴학 중에, 대출 받은 학자금 700만원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원리금 납입이 여러 차례 밀리는 등 심한 경제난을 겪다가 목을 매 숨진 경우도 있다.


자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자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이 비정상적이어서 자살한다는 것으로 심리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환경이 자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다. 뒤르켐(‘자살론’의 저자)은 자살의 이유를 개인의 심리적 원인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사회가 문명화할수록 도덕이 붕괴된다는 생각으로, 잘못된 현대사회에서 자살 이유를 밝혀내려 했다.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자면, 학비로 인해 빚을 져서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을 했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에 문제가 있어서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학비 걱정을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사회정책을 만들지 못한 사회 탓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결혼까지 약속하던 상대가 더 좋은 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변심해서 그 아픔으로 자살을 한 경우도 역시 사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부의 축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자살이 아닌 것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예전에 나는 자살하기 쉬운 특이한 인간형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어 ‘자살할 수 있는 사람’과 ‘자살할 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도로 불행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자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로가 된다


‘트리갭의 샘물(나탈리 배비트 저)’이란 동화책에는 ‘마시면 죽지 않는 샘물’이란 게 나온다. 그 샘물을 마시고 나면 신기하게도 총을 맞아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먹지 않아 현재의 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만약 스무 살 청년이 그 샘물을 마신다면 늘 스무 살 청년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 동화 속 터크네 가족은 샘물을 마셔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하지만 위니는 영원히 사는 것을 거부하고 샘물을 마시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샘물이 있다면 그 샘물을 마시는 게 좋을까.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언제나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큰 불행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위독한 암 환자는 죽는 날까지 큰 통증을 견디다가 죽는다고 하는데, 그런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면 인간에겐 자살이란 특권이 있다는 게 오히려 위안이 된다. 그래서 “자살은 죄악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충성서약의 거부다(체스터턴).”라는 말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로의 커다란 샘이다(니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자살은 왜 나쁠까


자살이 나쁜 이유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첫째,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타살과 마찬가지로 나쁘다는 관점이다. 칸트(독일 철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이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처분할 권리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내게도 없다. 칸트 생각에, 자살이 잘못인 이유는 타살이 잘못인 이유와 똑같다(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 172쪽).” 칸트는,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한 자살은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와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자살이 나쁘다고 주장한 다음의 명언들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문을 열고 달아날 권리가 없는 죄수다. 그는 신이 부를 때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플라톤).


자살은 참회의 기회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살인이다(커턴 콜린스).


둘째, 자살은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관점이다. 본인은 삶을 마감함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도피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은 세상을 지옥처럼 여기고 불행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자살하려 하는데, 이를 주위에서 말린다면, 어쩌면 그것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냥 지옥에서 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자살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겐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다(R. 오언).”라는 말보다 “환경이 인간의 산물이다(디즈레일리).”라는 말을 더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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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살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 마음이 아프다. 누구나 한 번쯤은 크거나 작은 일로 마음의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살’을 떠올려 봤을 것이다. 그럴 때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위안을 받아야지 실제로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죽음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편안히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좋은 사회’란 소수의 사람들만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잘 사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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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밀 뒤르켐 저)
 

 



    트리갭의 샘물(나탈리 배비트 저)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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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1-10-13 12:57   좋아요 0 | URL
제가 10년 전에 쓴 글을 읽으셨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