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둘째 아이가 하는 말이 웃겨서 막 웃었다. 내가 닮았다며 어떤 여자 연예인을 말했는데 그녀는 주책맞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연예인이었다. 나 같은 지성인을 왜 그런 사람과 닮았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둘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머릿속엔 지성이 있는지 몰라도 요즘 보면 하는 게 비슷해.”
“까르르~~~” 웃으면서 내가 말했다.
“나, 밖에 나가면 안 그래. 너희와 재밌게 말하려고 그러는 거지, 밖에 나가면 얼마나 깐깐하게 보이는 타입인데.”
(여기서 여자 연예인이 누구인지는 비밀이다. 그 사람이 알면 명예 훼손 혐의로 나를 고소할지 모를 테니. 그리고 나를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말한 부분은 집에서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니 읽는 분들이 이해해 주시길. ㅋ)
둘째 아이가 한 말로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나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은 상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 또 하나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내가 좀 변한 것 같다는 것.
예전에 한 남자 후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한테 말 한 번 잘못하다가는 뺨을 맞을 것 같다는 말. 내가 그렇게 깐깐해 보였다는 것이겠다. 언제부턴가 느끼는 건데 이젠 나를 깐깐하게 보는 사람이 적어진 것 같다. 이것 좋은 현상이겠지?
2.
요즘 부쩍 느끼는 건데 예전엔 내가 아이들한테 지적을 하는 쪽이었는데 이젠 아이들이 나한테 지적을 한다.
“엄마,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추워. 따뜻하게 입고 나가.”
“엄마, 빗길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다녀.”
“엄마, 혼잣말 하지마. 늙은 티 나.”
어쩌다가 내가 자식들한테 잔소리를 듣는 쪽이 되었을까. 이젠 내가 자식들한테 조언을 구해야 하는 쪽이 된 게 흐뭇한 일인지 서글픈 일인지 모르겠다.
3.
이른 아침에 (남편이 신문을 집어 올 때가 더 많지만) 현관문 밖에 있는 신문을 내가 집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난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만약 이 신문에 누군가가 똥을 묻혀 놨으면 어쩌지? 난 이 신문을 침대에 가져가서 보느라 신문이 이불에 닿기도 해서 이불에 똥이 묻을 텐데. 만약 나한테 어떤 복수를 계획하는 이가 있다면 이건 확실한 복수가 될 거야. 난 똥이라면 질색이니까.’라고.
상상력이 주는 공포.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일 년 중 어느 날 당신이 신문을 보려고 펼쳐 드는 순간 경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 년 중 어느 날에 제가 당신 집 현관문 밖에 있는 신문 속에 똥을 크게 묻혀 놓을 것이니까요.”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공포에 떨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공포에 떨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뭐, 똥이 별거야? 실내에서 개를 키우며 사는 사람들은 수시로 개똥을 치우며 사는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별일 아닌 게 되어 버린다.
난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상상력이 주는 공포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에 대해서.
4.
친구가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나의 대답 : 건강, 돈, 좋아서 하는 일. 그 다음으로 사랑과 우정을 꼽겠어.
5.
친구가 물었다. 나중에 죽는 날을 위해 스스로 묘비명을 짓는다면 뭐라고 지을 거냐고.
나의 대답 : 묘비명 - 깝죽대다가 어느 날 자빠졌다.
부연하여 설명하면 이러하다. 깝죽대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생을 마감했다는 것.(예를 들면 책을 낼 계획이었는데 책을 내 보지도 못하고 삶의 시간이 끝나 버렸다는 것.)
그래도 난 깝죽대는 삶이 깝죽대지 않은 삶보다 좋다고 생각하겠어. 그래서 후회하지 않겠어.
12월에 찍은 감나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