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상적으로 본 장면이 있어서 KBS 2TV 주말연속극 <아이가 다섯>이라는 드라마로 이 글을 시작한다.
혼전에 임신하게 된 순영이는 고민 끝에 상대 남자의 부모 집에 찾아가기로 결정한다. 찾아가기 전에 자기가 일하는 식당의 주인 미숙에게 물어 본다. “아줌마하고 아저씨 같으면 저 같은 며느리 괜찮겠어요? 기댈 부모님도 없구요, 배운 것 도 없고 거기다 혼전 임신까지 하고 이런 여자가 떡하고 나타났는데 좋아하시겠어요? 아줌마 같으면 어떠실 거 같으세요?”라고.
이 물음에 미숙은 “순영아 우리 같으면 그렇다, 솔직히 ‘오냐, 며늘아’ 그렇게 반기지는 못하겠지만 반대는 안 해.” “우리 자손까지 가졌는데.”라고 대답하며 순영이를 응원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순영이가 찾아가려던 그 부모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알고 미숙은 경악한다. 순영이가 자기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그러자 미숙의 태도는 돌변한다. 더 이상 순영이를 위로하고 응원했던 미숙이 아닌 것이다. 미숙은 말한다. 순영이가 자기 며느릿감으로 싫다고.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인간을 제대로 보여 주네, 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남의 일로 볼 때는 심성이 착한 순영이가 며느릿감으로 좋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일이 되고 나면 배움이 없고 가난하고 고아나 다름없는 순영이가 며느릿감으로 싫은 것이다. 순영이를 가엾게 여길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도 자기 며느릿감을 고를 땐 욕심이 앞서는 것. 이런 이중성을 가진 게 인간인 것이다.
이 드라마처럼 인간을 보여 주는 소설이 나는 좋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해 알게 되는 것. 그것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재미 중 가장 큰 재미다.
어느 작가에 따르면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점 서가에 꽂힌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굳이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 김영하, <읽다>, 101~102쪽.
이 글에 내가 동의한다면 이렇게 덧붙이겠다. ‘소설 읽기’란 인간에 대해 몰랐던 점을 알게 되면서 ‘이런 게 인간이었어?’ 하면서 헤매는 것. 헤매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쓴다면 이렇게 정리하리라.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인간의 베일을 한 장 벗겼을 때 느껴지는 재미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베일에 싸여 있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베일 하나를 벗길 때마다 드러나는 인간의 존재를 민낯으로 보는 재미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그리고 덧붙여, 가장 모르는 게 ‘인간’이고, 가장 알아야 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겠다.
1.
호시 신이치 저, <도련님과 악몽>이란 소설집에 담겨 있는 <의자>라는 소설이 있다. 특별히 친하게 지낸 대학 동창생 둘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공통점이 있다. ‘그’는 성공한 듯했으나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기만 한다. ‘그’는 ‘나’에게 얼마 전에 한 번 찾아와서 돈을 빌려간 적이 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게다가 돈을 빌리러 온 주제에, 망했다는 표정이 아니라 싱글벙글 웃는 게 명랑”했다.
어느 날 ‘나’는 마음에 걸려 ‘그’를 찾아간다. ‘그’는 쓰러져 가는 싸구려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실의에 빠진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밝고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이 방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것은 그의 표정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였다. ‘나’는 ‘그’를 보자 화가 치밀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된 거야? 자네는 인간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았군. 어쨌든 절교하기 전에 일전에 빌려준 돈을 돌려받겠네. 자네와는 대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라, 사정이 있다면 무리하게 받아낼 생각은 없었네. 하지만 멍하니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고 싶다면, 빚을 갚고 나서 하도록 해.” 그러자 ‘그’는 돈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돈이 없다면 그 의자를 가져가겠네.”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는 비로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기, 기다려줘. 이 의자만은 봐 주게나.”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그가 타락한 원인은 그 의자에 있는 듯하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의자를 빼앗아야 한다.”라고 생각한 ‘나’는 “우정을 위해 다소 거칠게 굴었다.” ‘나’는 함께 간 운전수의 도움을 받아 그 의자를 빼앗아 돌아온다. ‘나’는 “사장실로 옮겨온 문제의 의자를 혼자서 가만히 바라본다. 부드러운, 흐르는 듯한 곡선을 가진 그 늙은 의자는 걸터앉도록 나를 유혹했다. 나는 거기에 졌다.”
“부드럽고 풍성한, 어딘가 모르게 온기를 품은 감촉이 전해져 왔다. 지금까지 쭉 추구해 온, 무언가를 닮은 감촉.” “그것을 생각해내려고 노력한 끝에 겨우 알아냈다.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은 역시 이 의자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는 감촉이었다. 먼 기억의 구름에 싸여 있긴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어릴 적의, 모든 불쾌한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또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했다.”
“사장님, 왠지 즐거워 보이시네요. 그나저나 회의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더 이상 회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일 따위가 가능하겠는가.”(여기서 소설은 끝남.)
‘그’가 사회적인 성공이나 돈에 관심 없고 오로지 그 의자에 앉아 행복함을 느꼈듯이 ‘나’도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의자>를 읽고 생각한 것들 :
1) 남들에겐 평범한 의자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한 의자일 수 있다는 것.
2) 인간은 의자 같은 물건 하나에서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3)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물건이라도 의미를 부여하여 특별한 물건으로 여기는 게 인간이라는 것.
4) 만약 새엄마가 들어와 전처의 자식이 자기 엄마의 물건을 소중히 가지고 있는 걸 보고 전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의 안정감을 빼앗는 행위가 된다는 것.
5) 인간에겐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
6)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구석이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7)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을 싸고 있는 베일 하나를 벗김으로써 달라진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봄.
큰아이가 돌이 지났을 때였는지 그 전이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찾으며 울 만큼 어린아이였을 때에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콘도에 묵으면서 부모님에게 큰아이를 맡기고 우리 부부는 밖에 바람 쐬러 나갔던 것 같다. 어려서 말도 잘하지 못하던 아이가 나를 찾으며 울더란다. 아이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이 울기만 하더란다. 그런데 그렇게 울던 아이가 어느 순간 울음을 뚝 그치더란다. 어디서 찾았는지 내 옷을 자기 손에 쥔 다음부터 울지 않더란다. 밥을 먹여도 내 옷을 손에 꼭 쥐고 먹고 텔레비전을 봐도 내 옷을 손에 꼭 쥐고 보더라는 것. 내 옷이 아이에게 안정을 찾게 해 주었던 것. 내 옷이 아이에겐 곧 엄마였던 것이다. ‘의자’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소설 속의 사람처럼 아이도 그랬던 것이다.
이 소설을 김영하 저, <읽다>의 시각으로 읽는다면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헤매게 되리라. ‘사람으로부터 받은 위안도 아니고 단지 물건 하나로 큰 위안을 받다니 이해가 안 되네. 인간에 대해 모르겠단 말이야.’
2.
다니자키 준이치로 저, <만(卍) ·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라는 책에서 읽은 <만(卍)>은 야한 소설이다. 그런데 사실 야한 장면은 없는 그러나 야한 소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소설이다. 부부 사이에 여자가 끼인 삼각관계이다. 아니다. 두 여자의 연인 사이에 한 남자가 끼인 삼각관계이다. 아니다. 또 한 남자가 있으니 사각 관계라고 해야 하겠다. 어쨌든 사랑에 깊이 빠져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흡인력이 있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역시 사랑은 병이다. 정신병이다. 읽으면서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의 말로가 궁금했는데 그들 삶의 끝엔 예상한 대로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 있고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 있는 이야기다. 괴로워하던, 삼각관계에 있는 세 사람은 결국 자살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셋 중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남편을 둔 여자였다. 그 여자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이 소설은 진행된다.
저세상에 가면 더는 질투 같은 건 하지 말고 부처님 양쪽에 서 있는 보살들처럼 사이좋게 같이 있자고 남편이 말했어요. 그런 다음 남편과 제가 미쓰코 씨를 가운데 두고 베개를 나란히 한 채 같이 약을 먹고 누웠던 거예요. ......네? 그야 그렇죠. 어떻게 그때 저만 혼자 남겨질 거라고 생각했겠어요.
- 다니자키 준이치로, <만(卍) ·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181~182쪽.
사랑에 깊이 빠져 버린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에 주목해 읽을 만하지만, 인간의 특징을 잘 관찰한 소설로도 읽을 만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 중심의 소설일 뿐 사색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흡인력이 있어서 시간 보내기에 좋은 소설임에 틀림없다.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에겐 유익한 소설이겠다.
<만(卍)>을 읽고 생각한 것들 :
1) 세 사람의 머릿속엔 온통 사랑만 들어 있다. 하루 종일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한다. 나중엔 하루라도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불안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인간은 사랑에 깊이 빠지면 그렇게 되는구나.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본 것 같다.
2) ‘집착과 질투’라는 감옥에 한번 갇히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조심해도 소용없다는 것. 사랑에 빠지면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없어지니까.
3) 사랑에 대한 열정이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는 것. 사랑은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 ‘적당히’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 같아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을 할 땐 중심을 잃지 않고 할 것.’ 그런데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어디 그게 사랑인가 하는 생각.
4) 인간에겐 그런 특성이 있다. 사랑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데 뜨거운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간에게 그런 특성이 있는지 모를 수밖에 없다. 뜨거운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쓴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을 통찰했다는 점에서 빼어난 소설이고.
5) 사랑을 할 땐 상대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태도를 겸비해야 할 것 같다. 이러려면 성숙한 정신을 밑바탕으로 해야겠고. 그렇다면 좋은 사랑의 조건은 성숙일 터.
6) 미성숙한 사람이 사랑에 빠져 감정 조절을 못하면 큰일 나는 건 치정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다.
7)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을 싸고 있는 베일 하나를 벗김으로써 달라진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봄.
3.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는 유명한 소설이다. 개츠비는 옛 연인이었던 데이지와의 재회만을 목표로 삼아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매일 파티를 여는 목적은 바로 데이지와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서다. 그가 집을 산 목적도 건너편에 있는 데이지의 집을 보기 위해서다. 개츠비는 오로지 데이지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하지만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데이지와의 재회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참으로 기묘한 우연이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아니라니요?”
“개츠비가 그 집을 산 것은, 데이지가 바로 그 만 건너편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6월의 밤에 그가 그토록 애타게 바라보던 것은 밤하늘의 별만이 아니었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116쪽.
이렇게 데이지만을 그리워하는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무엇으로 보답했을까? 물질을 숭배하고 양심도 없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없고 성숙하지 못한 데이지는 결국 개츠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개츠비가 데이지와 재회하지 못했다면 개츠비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독자에 따라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는 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 이야기인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생각한 것들 :
1) 상대에 대해 배려할 줄 모르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데이지는 과연 한 남자의 사랑을 받을 만한 여자였는가? 그런 여자에게 인생을 바칠 만큼 집착하는 개츠비는 가치 있는 사랑을 한 것인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사랑에 둘 만큼 맹렬하게 사랑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이런 의문들을 품게 되는 소설이다.
2) 혹자는 개츠비와 같이 뜨거운 사랑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뜨거운 사랑을 하였으되 사랑에 성공하지 못하고 어이없게 죽게 된 개츠비는 가여운 사람일까 아니면 행복한 사람일까?
3) 작가가 개츠비 앞에 ‘위대한’이라는 낱말을 붙인 걸 보면 개츠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 것 같다. 사랑에 대한 열정과 순수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일까?
4) 실제로 개츠비와 같은 남자가 데이지와 같은 여자와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 둘 다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서로 많이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다툴 것이고 나중엔 서로 싫증이 날 것 같다.
5) 작가가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위대한 개츠비>는 우리가 성취하고 싶은 것들을 향한 열망의 어리석음, 부질없음, 허망함을 보여 주는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6) 인간은 무엇에 끌리면 정신을 못 차리고 오로지 그것에만 열중한다는 것.
7)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을 싸고 있는 베일 하나를 벗김으로써 달라진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봄.
* 맺는말
1)
<의자>는 의자에만 정신을 쏟는 사람을, <만(卍)>과 <위대한 개츠비>는 연인에게만 정신을 쏟는 사람을 그린다. 이 세 소설의 공통점은 무엇이 마음에 꽂히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 게 인간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2)
내가 경험하지 못해 몰랐던 ‘인간의 어떤 점’을 보여 주는 소설이 나는 좋다. 인간을 싸고 있는 베일 하나를 벗겨 인간의 낯선 모습을 보여 주는 소설이 나는 좋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게 인간이었어?’ 하고 헤매는 시간이 나는 좋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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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 : 당신은 소설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나의 대답 : 인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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