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길을 가다가 다리를 저는 소녀를 봤다.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소녀를 보자 제일 먼저 내 다리의 건강함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다리를 절지 않아서 참 감사한 일이야.’라고. 그 다음엔 그 소녀가 가엽다는 생각과 함께 수술을 잘 받아 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타자의 불행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이다.
행복에 대해서도 그렇다. 누군가의 행복을 접하면 겉으론 축하하면서 동시에 마음속으론 ‘그런데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왜 비교하게 되는 걸까? 이런 비교 심리가 친구 사이에서 우정이 깊게 자리 잡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강준만 저, <감정독재>에 따르면 행복과 불행은 이웃과의 비교에서 생긴다. 그래서 이웃이 성공하면 ‘나는 뭔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기 십상이란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웃의 불행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겠다. ‘나는 저 정도로 불행하지 않으니 이 정도면 행복한 거야.’라는 생각으로.
에밀 시오랑은 “모든 우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드라마이며 미묘한 상처의 연속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어쩌면 우정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친구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건 어렵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친구에게 진심으로 기뻐해 주지 못하는 것은 친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없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비교하게 되어 그런 게 아닐까? 비교하지 않고 그저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 될 텐데.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자신이 손해 보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건 절대 아닐 텐데.
친구의 불행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라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친구가 가난하여 편안한 인생이 되지 못해 돈을 꿔 달라고 부탁하거나, 오갈 데 없으니 당분간 얹혀살겠다고 부탁할 때 받는 스트레스가 이에 해당하겠다. 아마 이런 스트레스를 겪고 나면 친구가 행복해지는 일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을까 싶다.
친구의 불행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친구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불행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에 있지 않고 친구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에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 이 글을 쓸 때 염두에 둔 글 **
...............
행복은 이웃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이웃은 물리적 이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친척과 친구 등 늘 이웃처럼 소통하는 사람들도 포함한다. 그래서 이웃이 성공하면 “나는 뭔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기 십상이다.(144쪽)
- 강준만, <감정독재>에서.
...............
...............
“우리는 우리보다 뒤처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행복해하기보다는 우리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행해진다.” 프랑스 사상가 미셸 몽테뉴의 말이다.
“현실보다는 비교가 사람을 행복하거나 비참하게 만든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풀러의 말이다.
“행복한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의 말이다.
“거지는 자신보다 많은 수입을 올린 다른 거지들을 시기할망정 백만장자를 시기하진 않는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142~143쪽)
- 강준만, <감정독재>에서.
...............
...............
모든 우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드라마이며 미묘한 상처의 연속이다.(143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
...............
‘행복’하기 위해선 자신이 용케 모면한 불행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늘 떠올리고 있어야 할 일이다.(79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