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사이인 남자 세 사람이 만난 자리.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른 A에게 B가 심한 모욕을 줬다. 그것을 보고 있던 C는 심한 모욕을 받아 곤경에 처한 A에게 위로를 하기는커녕 쏘아붙이며 한 마디 거들었다. B로 인해 쓰러져 있는 친구를 밟기까지 한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엇이 옳은가? A가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모욕을 준 것이 옳은가? A가 잘못을 했으니까 밟기까지 한 것이 옳은가? A의 주위에 아무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고 구경을 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그는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모를 테니까 모욕을 줘야 하는 게 옳은가?

 

 

이런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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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요.” 90세의 노파는 현재, 미래, 상황의 진전 등에 관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대고 무슨 말을 외쳐대도, 계속 그렇게만 대꾸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뭐든지 다른 대답을 끄집어내고 싶어서 두려움, 불만, 불평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변함없는 “어쩔 수 없지요.”라는 말밖에 얻어내지 못한 나는 지친 나머지, 그녀와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자리를 떴다. 얼간이 같은 노파에게 마음을 열어 보일 생각을 하다니!
거리로 나오자 나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노파 말이 옳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되풀이한 이 구절이 진리를,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진리를 웅변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우리 속의 모든 것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221~222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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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요.’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 개선할 의지가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태도를 갖는 것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일 수 있겠다. 우리의 정신 건강엔 좋을 수 있겠다. 그래서 때론 우리에게 그런 태도가 필요할 때가 있겠다.

 

 

‘어쩔 수 없지요.’를 ‘어쩔 수 없었겠지요.’로 바꾸어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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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왜 그런 부도덕한 행동을 했나요?”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요.”

 

 

“B는 A에게 왜 그랬나요?”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요.”

 

 

“C는 A에게 왜 그랬나요?”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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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1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시오랑을 담아두고 구매를 잊었네요 이 기회에 이거랑 같이 ㅎㅎ 근데 이 책 표지가 참 마음에 들어요. 어쩔수없지요, 라는 태도의 미덕은 관용과 용서이기도 할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5-05-16 16:07   좋아요 0 | URL
아, 소설도 있군요. 저는 에세이만 찾았답니다. 왠지 시오랑은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나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읽으시고 나서 좋으면 저에게 추천해 주세요.

관용서 용서... 관용을 생각했는데 글에는 넣지 못했어요. 제가 이래요.
글을 쓰다가 스치는 수많은 생각 중 무엇을 잡고 글에 꼭 넣어야 하는지 모른다니까요. 쓰고 나서 그것도 며칠 지나서 생각나는 일도 있답니다.
행복한 5월 되세요.

프레이야 2015-05-16 16:35   좋아요 0 | URL
제가 왜 소설이라고 썼지요? 무의식이 부른 오타입니다. 댓글수정했어요 ^^

페크pek0501 2015-05-17 14:33   좋아요 0 | URL
하하 ~~ 그러셨군요. 소설이 있는 줄 알고 인터넷 찾아봤지 뭐예요.
약력을 보니 허무주의 철학자, 수필가로만 되어 있네요.^^

이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되고 아무 데나 펴고 봐도 좋답니다.
글이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서요. ^^

AgalmA 2015-05-1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쩔 수 없지요˝는 자기 중심적인 게 좀 더 강한 거 같고,˝어쩔 수 없었겠지요˝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더 묻어나서 듣기 좋습니다.
두 말 다 상황에 대한 자포자기 심정으로 쓰지는 말아야겠다 생각해봅니다.

페크pek0501 2015-05-17 14:36   좋아요 0 | URL
환영합니다.
예,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썼어요.

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태도겠지요.
아, 그럴 만한 일이 있어나 보다, 이렇게요.

반가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세실 2015-05-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도덕한 행위가 뭘까를 생각했어요.
어쩔수없지요는 왠지 포기와 관용의 중간?
그때그때 달라요ㅎ
어쩔수없었겠지요가 좀더 신중해보여요.

페크pek0501 2015-05-17 14:40   좋아요 0 | URL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쓰려다가 읽는 사람의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고 일부러 쓰지 않았어요. 회사 공금 횡령? 두 집 살림? 등등 많겠지요.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신중한 태도를 늘 가졌으면 합니다. ^^

yureka01 2015-05-1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바로 주문 했답니다...리뷰 써야겟어요.
예를 들어....아프리카 기아에 대하여 유니세프등 자선단체가 먹을 거 일시적으로 주기 보다는 차라리 피임약을 주는게 더 낫겟는가...고민이 되는 책...먹거리 조차 없이 낳고 굶기고 죽어가게 기아의 고통을 겪게 하는 고통 제도의 속성은 뭘까..싶었어요.

페크pek0501 2015-05-20 13:38   좋아요 1 | URL
주문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소설을 한 권 읽으면 생각할 거리(또는 글감)를 서너 개 얻게 된다면,
이런 에세이는 생각할 거리를 삼사십 개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요즘 소설보다 에세이를 주로 읽는 이유입니다.

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부담 주고 있나요?) ㅋ

yureka01 2015-05-20 14:49   좋아요 0 | URL
ㅎㅎ오늘 책 옵니다.장문의 리뷰 쓸거 같은 확실한 예감.^^.

페크pek0501 2015-05-20 15:04   좋아요 1 | URL
와아~~ 좋겠습니다.
책이 오는 날, 참 행복하지요...

후애(厚愛) 2015-05-20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오후되세요.^^

페크pek0501 2015-05-21 11: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후애 님도 즐거운 날 되세요. ^^

비로그인 2015-05-29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시오랑의 책이 또 있는지 몰랐네요. [절망의 끝에서]만 살짝 훑어본 정도에요. 체념하는 것과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는 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덮어버리는 것과 비워버리는 것의 차이랄까요. 그래도 역시 어려운 말이네요. 90세 노파가 아니라 20세 청년이 저런 말을 했다면, 왠지 다르게 들렸을 것 같기도 하구요. 페크님의 글은 삶에 적용시켜볼만한 유용성이 있어서 읽는 게 즐거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페크pek0501 2015-05-29 17:14   좋아요 0 | URL
에밀 시오랑, 저 위의 책이 맘에 들어요.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요.
저런 책이 있다면 또 사고 싶어요.

비워버리는 것... 그렇겠네요. 제가 댓글을 통해 배우는 게 많아요.
첨삭 지도 받는 것 같아요. ㅋ

비로그인 2015-05-29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고 나서 늘 드는 생각은, 왜 이런 부분에 대해서만 쓴 걸까, 에요. 쓰고 나서 다시 보면 내가 쓴 글이 이렇게 편향적이고 부분적인(일면만 비추는) 글이라니, 하고 절망까진 아니더라도 맥이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모든 입장을 관통하는 글을 쓰려는 게 욕심이기도 하겠지만.. 문장을 쓰더라도 내가 제한적으로 선택한 이 문장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오래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에세이를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소설만 읽었더니 하나의 이야기 흐름으로만 글을 쓰려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서요.

페크pek0501 2015-05-29 17:20   좋아요 0 | URL
저도 관심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어느 부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다방면이면 좋겠지만요...

내 글이 옳은 생각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선 자신감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 분들의 댓글에서 많이 배우려고 해요. 시간이 지나서, 그건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었어, 하는 글도 있어요. 뭐 어쩔 수 없음인 것 같아요. 완벽을 추구하다간 글 한 편도 쓰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여러 글을 쓰면서 시행착오 끝에 점점 향상되어질 거라는 믿음으로 써야 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