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약국에서 나오면서 후회했다. 병원에서 ‘테니스 엘보’를 치료하기 위한 주사를 오른팔에 맞고 약국에 약을 사러 들어갔는데, 흰 가운 입은 여자 약사가 거스름돈을 내게 주고 나서 비타민 영양제를 먹어 보라고 준 것을 먹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먹기 싫은 것을 참고 받아먹은 것을 후회했다는 얘기다.

 

 

“이거, 먹어 보세요. 비타민 영양제인데 아주 좋은 약이에요.”
…….”
“이 영양제를 사라는 게 아니고 그냥 먹어 보라는 거예요. 씹어 먹으면 돼요.”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하는 약사의 이 말이, 내가 비싼 약을 공짜로 받아먹음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감지덕지하지도 않으면서 약사가 바라는 대로 감지덕지해 하며 받아먹었다. 순간적으로 까칠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약을 팔기 위해 홍보하는 것까진 좋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상대방이 무조건 공짜를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는 걸까? 왜 상대방이 먹기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을까? 왜 거스름돈을 만진 손으로 약을 주면 청결하지 못함에 상대방이 불쾌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할까?

 

 

난 돈을 만진 그 더러운 손으로 준 영양제를 받아먹기가 괴로웠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 뭘 먹기가 싫었다. 먹고 나면 입가심을 하고 싶잖아. 그런데 물이 없잖아. 설사 물이 있더라도 겨우 그 콩알만한 영양제를 먹고 배부르게 물 한 컵을 마시고 싶지 않잖아. 

 

 

다음부턴 먹지 않을 테다. 까칠한 사람으로 보여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다.

 

 

앞으로 또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연구해 봤다.

 

 

“이거, 먹어 보세요. 비타민 영양제인데 아주 좋은 약이에요.”

 

 

1) 지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2) 저는 뭘 먹으면 꼭 입가심을 해야 돼서 귀찮아 안 먹을래요.

3) (웃으면서) 하루 종일 돈을 만진 그 더러운 손으로 영양제를 주시면 어떡해요?

 

 

셋 중 어느 게 제일 나을까 생각 중이다. 까칠한 사람으로 보여도 할 수 없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철학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
철학자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청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철학자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186쪽)

 

- 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저, <미움받을 용기>에서.
..........

 

 

앞으로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겠다.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걸 감수하며 살겠다. 자유롭게 살겠다.

 

 

나, 깔끔 떠는 까칠한 사람 맞다. 이렇게 인정하고 말 테다.

 

 

 

 

 

 

 

 

 

 

 

 

 

 

 

 

 

 

 

 

 

 

................................
<후기>

 

여러분은 이럴 경우에,

 

 

까칠한 사람으로 보여서 받는 스트레스의 크기와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어서 받는 스트레스의 크기 중 어느 것이 더 클까를 생각해 보면 되겠죠?

 

 

상대방이 무안할까 봐 억지로 먹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건 먹을 것을 권할 땐 상대방이 싫어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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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3-1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전 먹는거라면 다 받아 먹어요^^ 먹을거 잘 받아 먹는것= 복이 온다고 하잖아요.
적고보니 그래서 살이 찌나봐요. ㅜㅜ
저도 낼부턴 무조건 안받을테얏~~~~ ㅎㅎ

페크pek0501 2015-03-14 11:07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냥 세실 님은 받아 드시는 게 좋겠어요. 정말 복이 오나요? 그럼 먹어야겠는걸요...
여기서 님과 저의 성격 나옵니다. 저보단 님이 더 성격이 좋다는...
이미 저는 님의 글에서 눈치챘사옵니다. 글은 정직해서 그 사람을 드러내거든요.
저는 까칠한 편에 속하면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형이에요.
남이 보면 무난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제 친한 친구들은 잘 알죠.

조직 생활을 할 땐 제 주장을 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에 맞추어 주는 스탈이에요.
쫄병 기질이 있어서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해요.
전, 쫄병이 좋아요. 헤헤~~

2015-03-13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4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3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4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5-03-1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먹기 싫으면 `됐습니다!`합니다. 별로 생각하지 않고 제 느낌을 바로 말해버리는 스탈이라서뤼~ㅎㅎ

근데, 페크님은 세심하게 생각하시는 듯~^^
거절한다해서 까칠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요~ 상대편을 생각지 않고 무작정 권한 사람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5-03-14 11:26   좋아요 0 | URL
딩 동 댕...
야무 님이 정답을 말씀하셨습니다. ˝됐습니다.˝라고... ㅋ

거절하려면 까칠을 생각하게 되어요. 아마 제겐 까칠하게 보여선 안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있는 모양이에요. 이것도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사는 증거일까요?

어쨌든 이런 글까지 올렸으니 앞으로 제가 달라지겠죠.
저에게 용기를(남에게 미움받을 용기) 주고자 썼습니다.
다짐의 글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마녀고양이 2015-03-14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언니, 고민하시는 모습이 완전 이뽀여.... 까칠해보이는 것이 두려운 맘과 먹기 싫은 것을 먹어야 했던 불쾌감과 더불어... 나는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부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편감...이 저는 가끔 드는데 언니는 어떠셔요? ♡♡

페크pek0501 2015-03-17 09:09   좋아요 0 | URL
오우!!!!! 마고 님 안뇽? 반가워요.

요즘 뭔가 판단하려 할 때 두뇌 작동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상대방이 싫어할 것 같은 상황에선 거절을 못하고 나중에 후회한답니다.

말이란 한 번 내뱉고 나서 후회가 되어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어려워요.
말하기보단 글쓰기가 쉽지요. 수정할 수 있으니까요.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있구나, 요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총명함, 명석함... 뭐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그래도 랄라~~
자주 봐요 마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