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 해 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책은 어떤 책이었을까? 특히 어떤 글 때문에 그런 책을 좋아했을까? 여러 책 중에서 열 권만 뽑아 정리해 보았다.
1.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누구나 중년을 넘어서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은퇴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강제적으로 은퇴할 수도 있고 스스로 은퇴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은퇴란 그동안 머물렀던 친숙한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여 다른 낯선 곳으로 이동함을 말한다. 아름다운 곳에서 덜 아름다운 곳으로 이동함을 말한다. 그래서 은퇴엔 즐거움보단 쓸쓸함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은퇴한 뒤 직업 없이 살면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직업 없이 사는 노년의 삶에서도 즐거움은 있다고 한다. 인간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잘 적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은퇴한 뒤에도 즐거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은퇴한 지 몇 년쯤 지나면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즐겁게 이야기한다. 시간이 남기는커녕 오히려 부족하다고 불평한다. 심지어 과거에 어떻게 직장 생활을 견뎌냈는지 의아스러운 기분도 든다. (…) 아울러 새로운 취미도 생긴다.(270쪽)
-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저,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에서.
외면엔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가 하얗게 세더라도 내면엔 무엇이든 새롭게 보려는 젊음이 숨 쉬고 있다면 늘 젊은 기분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비록 시력은 저하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데 새로운 (은유적) 안경이 생긴다. 젊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실제로 젊어지는 것보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이기 때문이다.(283쪽)
-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저,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에서.
2.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만약에 당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동료 사원이 그 남자와 결혼한다고 갑자기 발표를 한다면 당신의 반응은?
그럴 때 당신은 상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로하게 되지 않을까? 모리모토처럼 마음속으로 ‘힘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와이 : 저기, 사실은 할 얘기가 있어. 아직 이른 얘기지만, 결혼하기로 했어.
모리모토 : 오~
이와이 : 그래서 일은 그만 두려고.
모리모토 : 계속 하지 왜~
이와이 : 나도 계속하고 싶은데, 있잖아, 저기, 나카다 매니저와 결혼해.
모리모토 : 뭣? 너무해~ 정말 전혀 몰랐어!! 축하해~ (힘내~) 언제부터 사귄 거야? (슬퍼하는 건 집에 돌아가서부터.)
이와이 : 모리모토 씨는 동료사원이기도 하고,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어서.(88쪽~89쪽)
- 마스다 미리 저,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하하~~ 이 글을 읽고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만화이긴 하지만 이런 솔직한 표현에 매료되어 이 저자의 책을 몇 권 더 사 봤었다.
3. <초역 니체의 말 2>
우리가 어떤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세계 자체만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이 보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눈이 오는 풍경’도 누구에겐 즐거운 풍경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겐 쓸쓸한 풍경이 될 수 있는 것.
이를 시적으로 표현한 니체의 글이 있다.
사람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렌즈처럼 앵글에 비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투과시키지 않는다. 가령 석양에 물든 산자락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도 자연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는 마음을 비우고 본다 생각할지라도, 실상은 바라보는 대상 위에 영혼의 얇은 막을 무의식적으로 덮어씌운다. 그 얇은 막이란 어느 사이엔가 성격이 되어버린 습관적인 감각, 찰나의 기분, 다양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풍경 위에 이러한 막을 얹고, 막 너머를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란 이미 그 사람의 일부이다.(21쪽)
- 프리드리히 니체 저, <초역 니체의 말 2>에서.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내 마음을 담아서 보는 세계일 터.
니체의 글을 읽으면 산문을 읽는다기보다 시를 읽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4. <인간의 굴레에서 1>
2014년 한 해 동안 나를 가장 즐겁게 해 준 책이다. ‘다시 읽어 볼 책 10위’ 안에 드는 책.
이 책의 저자인 서머싯 몸으로 말하면 내게 글감을 가장 많이 준 저자다. 그의 저작을 읽고 26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세어 보니 이 서재에 26편의 글을 올렸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리는 그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었으니까.(405쪽)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1>에서.
내가 글을 쓰면서 소모했던 육체적 노동력과 시간에 대해 아까워해 보지 않았다. 내가 쓴 글들이 설령 책으로 묶어 나오지 못하고 휴지 조각이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글을 쓰면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으니까. 글을 쓰면서 기쁨, 즐거움, 설렘, 만족, 보람 등을 다 얻었으니까.
5. <인간의 굴레에서 2>
<인간의 굴레에서 1>에 이어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책이다.
난 말야, 아주 행복하다네. 이것 봐. 내 시 교정지일세. 알아두게.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불편에 괴로워할지 몰라도 난 아랑곳하지 않네. 꿈을 가지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가 되기만 한다면, 생활 환경이 무슨 대수겠는가.(169~170쪽)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2>에서.
감옥에서도 열정을 가지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말이다.
6.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어느 자원봉사자에게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누군가를 돕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봉사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봉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게 많다는 것을.
소년이 무슨 일인가로 잔뜩 기분이 상하고 풀이 죽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면 엄마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얘야, 너 오늘 영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알지? 얼른 나가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좀 도와줘보렴.”(39쪽)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서.
‘우울할 땐 누군가를 도와주기.’
참 멋진 말이다.
7.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얼마 전 나는 수영장에 갔다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수영장에 입장권을 사지 않고 뒷문으로 몰래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고는 곁눈으로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가 나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상한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따질지, 아니면 수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지 고민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췄다. 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이어가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는 풀 안으로 들어가서 수영을 했고 건너편에서 그 여자가 헤엄을 치며 내 쪽으로 다가오자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결코 친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서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나는 마음이 상한 원인을 그녀의 잘못으로 돌려주었다. 근거도 없이 함부로 남을 의심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지 내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230쪽)
- 배르벨 바르데츠키 저,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에서.
‘근거도 없이 함부로 남을 의심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지 내 탓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것.
8. <외면일기>
내가 느낀 대로, 나무들이 서로 사이좋게 잘 어울리며 자라나고 있는지 알았다.
나무들이 서로를 미워하며 저마다 공간과 빛을 독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숲 속에 들어가면 강제수용소 같은 증오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집 정원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떤 나무들은 사라지고 어떤 나무들은 엄청난 크기로 자란다.(18~19쪽)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에서.
무엇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꼭 한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보이는 대로만 보려고 할 때 진실을 왜곡하게 된다.
9.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마음이 아픈 것은 싫지만 아픔을 경험함으로써 마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위안이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 이 슬픔은 우리가 더 행복한 시절이라면 회피했을 일종의 정신적 체육 활동을 거치도록 해준다. 실제로 그의 말에 담긴 암시란, 우리가 정신 능력의 발달에 진정한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는 만족보다는 오히려 불행한 채로 있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다.(95쪽)
- 알랭 드 보통 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불행이나 슬픔을 겪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할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10. <영원의 철학>
깨달음을 주는 글은 언제나 좋다.
배 한 척이 강을 지나가고 있는데 사람이 없는 빈 배가 와서 충돌하려 한다고 가정해보라. 아무리 성마른 사람이라도 버럭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에 누군가 타고 있다면, 다가오지 말하고 소리칠 것이다. 만일 소리쳐도 듣지 못하고 여러 번 고함을 지르게 만든다면 결국 욕설을 퍼붓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화를 내게 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 그 배가 비어있었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채로 삶을 살아간다면 누가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장자>
(190쪽)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에서.
마음을 비우게 되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함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은 독서 덕분이다.
더 많이 깨닫기 위해 책을 계속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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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 며칠 고단하게 보냈다. 그래서 병이 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휴식의 날’을 보내기로 했던 며칠 전, 깨달았다. 쉬기만 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티브이를 보고 있자니 지루했고 누워만 있자니 지루했고 낮잠을 청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휴식의 날’을 보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컴퓨터를 하는 것보단 책을 읽는 것이 덜 고단하겠지, 생각하면서.
책 없이도 내가 살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반복해 온 생활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을까? 이미 난 독서하며 사는 습관의 노예가 된 것 같다. 책 없이 산다는 게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 같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물론 좋은 거겠지.
글쓰기 : 내가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를 최근 새롭게 찾았다. 내가 특별하게 잘하는 게 없다 보니 글이라도 잘 쓰고 싶은 것이다. 글쓰기가 취미니까 취미가 재능이 되길 바랐던 것. 하나라도 잘하면 사는 데에 힘이 날 것 같아서다. 글을 잘 쓰면 그 재능이 소중한 자산이 되어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의 열등감을 날려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나에겐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글을 잘 써서 받는 상장을 타 본 적이 없을뿐더러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작가들은 어릴 적부터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고 글을 잘 써서 상장을 받은 경험도 있으리라.) 다만 일기 쓰는 걸 좋아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다는 게 중요하다면 중요한 사실이다. 매일 쓴 것은 아니고 한 달에 몇 번씩 꾸준히 써 왔는데 지금까지 30년 넘게 쓰고 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결혼하기 전, 이십 대에 잡지사 기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기사를 쓰면서 글쓰기와 친하게 되었다. 밖에 나가 취재하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기사 쓰는 게 더 좋았다. 글쓰기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 이때다. 이 발견은 중요하다. 나의 삶의 지도를 바꾸어 버렸으므로. 감히 글을 쓰겠다고 덤빈 것이 바로 그때 발견한 글쓰기의 매력 때문이었으므로.
결혼하고 나서 4년 뒤부터 모 교육기관에서 소설과 드라마 강의를 들었다. 나중엔 교육기관을 옮겨서 시 강의도 들었다. 이런 배움의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이 아닌 것 - 책 - 에 대해 설렘을 가져 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책에 대한 설렘은 ‘문학’, ‘독서’, ‘작가’ 등의 낱말만 들어도 설렘을 느끼는 것으로 이어졌다.
pek0501의 서재 : 왜 사람은 일을 벌이며 살 필요가 있는가? 이걸 알아냈다. 마음이 우울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바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마음이 울적한 숲을 거닐 때가 있겠지만 그 숲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바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바쁨을 내게 선물한 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이다. 책 읽기와 글쓰기가 없었다면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내 인생 속에 책 읽기와 글쓰기를 끼게 해 준 것이 이곳 서재이다. 그래서 이곳 서재는 내게 중요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나의 즐거운 놀이터이면서 삶의 위안의 장소이다.
2014년을 보내며 : 책이 있어서 행복한 2014년을 보낸 것 같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을 만나서 행복했고, 서머싯 몸의 책을 만나서 행복했고, 미셸 투르니에의 책을 만나서 행복했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 글 쓰는 방법만 배운 게 아니라 사고하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 건 큰 수확이었다.
오늘 하루가 가고 나면 해가 바뀐다.
2015년엔 또 어떤 책이 내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게 될지 모르겠다.
새해에도 크고 작은 기쁜 일들과 함께 크고 작은 슬픈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책이 내 옆에 있는 한, 행복한 2015년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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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5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