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개는 물지 않아요.’라고 말하지 않기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큰 개가 달려들어 깜짝 놀라며 무서워한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튀어 나온 개였다. 끈으로 묶여 있지 않아 무서워하는 내게 개 주인이 말했다. “이 개는 물지 않아요.”
내가 M. L의 집에 들어서자 그 집 개가 내게로 달려나와 짖어댄다. 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M. L이 말한다. “뭘 그렇게 겁을 내?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잘 알잖아.” 내 대답 : “나야 알지. 하지만 개도 그걸 알까?”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32쪽.
"이 개는 물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개 주인을 보면 답답하다. 내가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데 ‘개가 물지 않음’이 중요할까?
예를 들어 본다. 내가 숲 속을 지나가야만 하는데 밤이라서 무서움에 떨고 있다. 그럴 때 누군가가 말해 준다. “이 숲 속에선 귀신이 나오지 않아요.”라고. 이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무섭지 않을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무서울 것이다. 여기서 귀신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지 않는 개’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을 한 번도 물지 않던 개도 물 수 있다는 걸 티브이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 어느 동네에서 누군가가 개에 물려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개 주인이 말하기를, 여태껏 한 번도 사람을 문 적이 없는 개라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개에 물려 본 경험이 있다. 그 개는 친구네 개였는데 나를 물기 전까지 한 번도 사람을 물어 본 적이 없는 개였다.
개 주인들은 알까?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런데 개를 끈으로 묶어 다니면 개가 불편하려나?)
2. 보이는 대로 보지 않기 : 며칠 전, 비가 곱게 내렸다. 비 오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 풍경 속에서 나무들이 비에 흠뻑 젖어 갈증을 풀고 푸름을 빛내는 듯했다. 그러나 나무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랴. 비의 첫 모금만 좋았을 뿐, 계속 비에 젖는 건 싫었을지도 모를 일.
나무들이 서로를 미워하며 저마다 공간과 빛을 독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숲 속에 들어가면 강제수용소 같은 증오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집 정원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떤 나무들은 사라지고 어떤 나무들은 엄청난 크기로 자란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8~19쪽.
우리 집에서 창밖으로 숲을 볼 수 있다. 내 눈엔 숲 속의 나무들이 이웃 나무들과 다정하게 모여 있는 것만 같은데, 이웃 나무들과 소곤소곤 정다운 얘기라도 나누고 있는 것만 같은데 그게 아니란 말이네. 내가 보는 숲과 다르다는 게 놀랍다. 나무들도 경쟁하다니.
"이해라는 것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수전 손택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숲을 보이는 대로 보지 않을 때 숲에 대한 이해가 비로소 시작되겠다.
인간은 뭐든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게 문제다.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게 문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기도 한다.
3. 마음을 안다고 확신하지 않기 : 오늘은 늦잠을 자도 되는 휴일인데 새벽에 눈이 떠졌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이사를 하느라 서재에 소홀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방문자 수가 많아서 내가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아니다. 그래서가 아니다. 방문자 수를 보니깐 새 글이 없어 허탕치고 돌아간 분들의 수인 것만 같아서 이 글을 쓴다. 아니다. 단순히 서재 관리 차원에서 이 글을 쓰는 건지도. 결과적으로 다 맞는 얘기다. 여러 이유가 있겠다. 인간이 하는 행동의 이유가 어찌 하나뿐이겠는가.
오늘 휴일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새벽에 눈이 떠지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방문자 수가 많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내가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허탕치고 돌아간 분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서재를 관리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 맞는 얘기라는 것이다.
지금 또 하나 생각났다. 이사로 인한 집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하기 싫어서 글을 쓰는 것. 이렇게 말하는 게 가장 진실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집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거리로 글쓰기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일이다. 진짜 이유는 그러니까 가장 큰 이유는 내일 밝혀질지도 모른다. 혹은 그 이유가 며칠 뒤인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뇌리를 스칠지도 모른다. 내 경험에 따르면 어떤 일의 진실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밝혀질 때가 많다.
진실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진실만을 말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남의 마음의 진실을 헤아려 아는 게 가능할까?
4. 같다고 생각하지 않기 : 최근에 바보짓을 했다. 이 얘기를 글로 쓰면 멍청한 페크가 될 것 같아서 쓰지 않기로 한다. 친구에겐 전화로 말해 버렸다. “난, 왜 이렇게 바보 같니?”라고 말하면서.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 “그래도 바보짓을 해 놓고 바보짓을 한 것도 모르는 것보단 바보짓을 했다는 걸 아는 게 낫잖아. 그건 바보가 아니라는 거지.”
바보짓을 해 놓고 그게 바보짓이었다고 (똑똑히) 아는 바보가 여기에 있다. 바로 ‘나’다.
우리 마을 정육점 주인 : “투르니에 씨, 나처럼 진짜 당신을 잘 아는 처지라면 당신이 쓴 책 같은 것은 안 읽어도 되는 거죠, 안 그래요?”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87쪽.
(아니죠. 읽어야 하죠. 당신이 만난 손님 투르니에와 작가 투르니에는 다르니까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페크와 나는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이 서재에선 적어도 내가 한 바보짓에 대해선 쓰지 않으므로. 그래서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바보짓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모르므로.
여러분이 페크에 대해 매긴 점수에서 30점쯤을 빼면 내 점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혹시 페크에 대해 30점을 매긴 사람은 30점을 빼고 나면 빵점이 되려나. ㅋ)
5. 때론 현명하지 않기 : 내가 현명하지 않아서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인용 : “골프를 잘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보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도움은 된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94쪽.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보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도움은 된다. - 페크
내가 바보이기 때문에 1992년부터 갖게 된 글쓰기 취미를 지금까지 갖고 산다. 다시 말해 내가 바보이기 때문에 별 소득이 없는 글쓰기에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 주인 페크로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론 기꺼이 바보가 되리라.
앞으로도.
글감이 많은 책이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