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단상(44) 우정은 (情)이오’라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을 올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와 우리 친구들을 술꾼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겠다 싶었다.
그저 한 친구가 멀리서 온 친구들 셋을 대접하느라 우리를 끌고 여기저기 맛있는 음식점을 다녔을 뿐인데... 평소에 해 보지 않던 음주를 곁들였을 뿐인데... 반가움에 주고받는 술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냥 술이 있는 가을날의 낭만에 취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리 말이 많으냐, 라고 물으신다면 술꾼이라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답하겠다. 그럼 당신이 술꾼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증명해 보겠다.
첫째, 진정한 술꾼은 안주보다 술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술보다 안주를 더 좋아한다. (평소엔 먹성이 좋은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안주는 맛이 있다.)
둘째, 진정한 술꾼은 술을 자주 마시는데,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쯤 마신다. (이것, 우리 친구들도 들어오는 블로그라서 거짓말 못한다.)
셋째, 진정한 술꾼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술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책을 꼽겠다. (이건 이 블로그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넷째, 이게 제일 중요한데, 내가 장(腸)이 약하다. 술을 마시면 며칠 동안 설사로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자리를 피하는 편이다. 피할 수 없으면 적게 마신다. (소주로 말하면 세 잔까지는 마셔도 된다. 참고로, 그까짓 설사, 라고 하시는 분을 위한 부연 설명 들어간다. 설사하면 살이 빠지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 내가 제일 싫어 하는 게 살이 빠지는 것이다. 이건 마른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듯.)
(아, 유치하다. ㅋㅋ 뭐 이런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다니. 나의 친구 ㅎㄹ이가 하하하 웃겠다. 그리고 한마디 할 것 같다. “술꾼으로 오해 좀 받으면 어때? 재밌잖아. 하하하.” 또는 “그래 나 술꾼이다, 어쩔래?, 좀 이렇게 살아라. 하하하.” 나도 이 친구처럼 소심하지 않게 살고 싶다. 나의 이상형 친구다. 그런데 그를 닮는 것, 쉽지 않다. 나중에 그 친구의 옆집으로 가서 살아야겠다. 그를 닮기 위해서.)
글샘 님이 댓글에서 내게 추천한 책이 있다. 세이쇼나곤 저, <마쿠라노소시>라는 책이다. 처음엔 180쪽밖에 되지 않아 얇은 책이라 좋아했는데, 다 읽고 나선 그 점이 오히려 아쉬웠다. 더 읽고 싶어서다. 그만큼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에 있는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은 ‘일본 수필문학의 효시로 대표적인 고전문학 작품’이다. 수필을 감상하듯, 시를 감상하듯 읽었는데, 어느 부분에선 그윽한 정취를 맛보았고, 어느 부분에선 폭소를 터뜨렸다. 인상 깊게 읽었으므로 기억해 두고 싶어서 이 페이퍼를 쓴다. (아, 그리고 내가 술보다 문학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쓴다.)
내가 좋았던 구절들을 뽑아 나열했고, 나도 따라 써 보았다.
1.
설렘―가슴 두근거리는 것
(53쪽) 참새 새끼를 기르는 것.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곳 앞을 지나가는 것. 고급 향을 태우며 혼자 누워 있는 것. (…) 신분이 높은 남자가 내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시종에게 뭔가 묻는 것. (…) 약속한 남자를 기다리는 밤은 빗소리나 바람 소리에도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 세이쇼나곤
설렘―가슴 두근거리는 것
무심코 창밖을 보았을 때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풍경이 보이는 것.
어느 찻집에서 시집을 읽다가 빗소리가 들려 창밖을 보는 것.
주문한 책 몇 권을 배달해 주는 사람이 누른 초인종 소리를 듣는 것.
기대하고 기다렸던 책의 첫 장을 펼치는 것.
반신욕을 하기 위해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는 것.
모처럼 식구들이 집을 비워 나만의 일박이일의 시간이 생기는 것.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 책 한 권 옆에 끼고 산책하다가 숙소로 들어가는 것. (이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상상만으로 설렌다.) - pek0501
2.
밉살스러움―얄미운 것
(46쪽~47쪽) 다른 사람 몰래 오는 사람을 알아보고 눈치 없이 짖는 개도 얄밉다. 또 남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곳에서 코를 골며 자는 사람이나, 몰래 찾아오는데 높은 에보시를 쓰고 와서 남의 눈을 피한답시고 허둥지둥 들어오다가 물건에 부딪혀서 소리를 내는 사람도 얄밉다. (…) 삐걱거리는 우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도대체 귀머거리인지 화가 치민다. 주인이 타고 있으면 그 차 주인까지도 미워진다. 또 얘기할 때 잘난 척 앞질러가는 사람이나 얘기 중간에 말참견하는 사람은 어른이든 애든 다 보기 싫다. 가끔 오는 애들을 귀여워하며 좋아하는 것을 줘서 보냈더니, 그것에 맛을 들여 계속 찾아와서 마치 자기네 집인 것처럼 함부로 드나들며 물건을 어지르는 것도 정말 밉다. - 세이쇼나곤
밉살스러움―얄미운 것
누군가를 험담해서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
누군가를 무시하는 말투로 말하는 사람.
누군가가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
거짓말을 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
모른 척하며 남의 약점을 건드리는 사람.
모든 이성이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
남이 말할 땐 딴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말할 땐 신이 나서 말하는 사람. - pek0501
3.
부조화―어울리지 않는 것
(79쪽~80쪽) 천한 것들 지붕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것. 게다가 달까지 환하게 비치면 정말이지 달빛이 아깝기만 하다. 달 밝은 밤 지붕 없는 우차. 또 거기에 누런 황소까지 매달고 있으면 최악이다. 나이 든 여자가 임신해서 산만한 배를 안고 돌아다니는 것도 꼴불견이다. 젊은 남편 얻는 것만 해도 가관인데, 그 남편이 다른 여자네 집에 가서 자기 집에 안 온다고 화내는 것은 참으로 볼 만하다. (…) 애인인 여방의 방에 살짝 들어가 고상하게 향 피워놓은 휘장 위에 흰색 하카마를 벗어서 제멋대로 걸쳐놓은 것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정말이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이다. - 세이쇼나곤
부조화―어울리지 않는 것
얼굴은 미남인데 심하게 사투리를 쓰는 남자.
교양 있게 생긴 얼굴로 크게 소리 내며 껌을 씹는 여자.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집주인.
짬뽕에 반찬으로 김치를 먹는 사람.
여행지에서 (커피 잔이 없어) 밥그릇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 - pek0501
4.
있기 어려운 일―흔치 않은 것
(100쪽) 장인한테 칭찬을 받는 사위나 시어머니한테 귀염받는 며느리. 또 털 잘 뽑히는 족집게. 주인 험담 안 하는 시종. 전혀 결점이 없는 사람도 흔지 않다. (…) 남녀관계뿐만 아니라 여자끼리라도 변치 말자고 굳게 약속한 사람이 끝까지 사이가 좋은 경우도 드문 일이다. - 세이쇼나곤
있기 어려운 일―흔치 않은 것
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건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상상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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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니 평범하다, 평범해. 평범함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래서 4번은 여러분을 위해 남겨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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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님의 안목 높은 추천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좋은 책을 읽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추천해 주실 분은 이 책처럼 얇은 책으로 해 주세요. (이것, 두꺼웠으면 사 보지 않았을지 몰라요. 결국 얇아서 아쉬웠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