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은 외향적인 사람인가, 내향적인 사람인가
수전 케인 저, <콰이어트 Quiet>
오늘날 세상은 내향적인 사람보다는 외향적인 사람을 우대한다. 교육 또한 외향적인 사람으로 키워 내려는 방향으로 설정된다. 학교에서의 수업 시간에도 발표를 못하는 학생보단 발표를 잘하는 학생을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소극적인 내향형인 학생보단 적극적인 외향형의 학생을 선호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적극적인 외향형의 사회인을 우대한다. 우리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셈이다. 이것은 내향적인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위축된 내향적인 사람들을 찬양하는 책이 있다. 수전 케인 저, <콰이어트 Quiet>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내향성의 장점을 부각시켜 오히려 세상을 바꾼 건 내향적인 기질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저자 자신도 내향성을 가졌다면서, 내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기질을 가진 것이지를 강조한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섬세하고 감수성이 높고, 통찰력이 깊다고 한다.
“우리 삶은 성별이나 인종에 따라 달라지듯이 성격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성격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내향성-외향성 스펙트럼 중에 어디쯤에 위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 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친구와 짝을 선택하고, 대화를 풀어나가고, 차이를 해소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신이 내향성의 사람이냐, 외향성의 사람이냐 하는 사실은 중요해진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틀릴 위험이 있을 때조차 빠른 판단을 선호한다. 팀으로 일할 때 능률이 높아지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더 똑똑하고, 잘생기고, 재미있고, 바람직한 친구로 평가된다.” 그런 반면에, “내향성은 (그 친척뻘인 섬세함, 진지함, 수줍음과 함께) 이류로 여겨지고 있는 성격 특성으로, 실망스러운 일 아니면 병적인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저자는 ‘외향성 이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중대한 실수라고 지적한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 예술, 발명품 등 수많은 것들이 조용하고 이지적인 사람들에게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향적인 사람들이 없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력의 법칙, 상대성의 법칙, W. B. 예이츠의 <재림>, 쇼팽의 <녹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피터 팬,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 (…) 구글, 해리포터” 등.
(내가 가장 주목해서 본 것은 이 부분이다.) 이것들을 보면, 정작 세상을 바꾸는 건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향적인 사람들이 기죽어 지낼 필요가 없겠다.
“200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라면 절대로 손을 들지 않을 사람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2천 명, 아니 200만 명이 보는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한다.”는 건 기억해 둘 만하다.
2.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나누었던 카를 융
일찍이 카를 융은 인성을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나눴다.
에드워드 암스트롱 베넷 저, <한 권으로 읽는 융>
이 책에 따르면 “외향성은 에너지가 주로 바깥으로 분출하며 의식의 내용이 주로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향성은 의식의 내용이 개인의 내부에 있는 주체를 향한다. 정신적 에너지가 흐르는 방향이 바뀌면 그 효과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똑같은 대상을 두고서도 외향적인가 내향적인가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견해도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순수한 유형이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백 퍼센트 외향적인 속성을 지닌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내향성이 완벽하게 쇠퇴해 버린 사람 같은 경우는 없는 것이다. 다만 두 범주의 서술적인 타당성을 널리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카를 융은 “모든 개인들은 외향성과 내향성의 메커니즘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중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우세한가에 따라 유형이 결정된다.”고 말했다.
“두 가지 일반적인 태도의 유형인 외향성과 내향성은 각기 사고 ‧ 감정 ‧ 감각 ‧ 직관의 기능을 지닌 네 가지 묶음으로 세분된다. 따라서 이것들이 조합되어 모두 여덟 가지의 요소가 생겨난다. 즉 외향적인 사고 ‧ 감정 ‧ 감각 ‧ 직관과, 내향적인 사고 ‧ 감정 ‧ 감각 ‧ 직관이 그것이다. 융의 경험에 따르면 그 네 가지 기능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고를 통해 관찰하는 대상의 의미나 목적을 알고 그것에 대한 관념을 구성한다. 감정은 그 대상이 우리에게 지니는 가치를 알게 해 준다. 감각은 시각 ‧ 촉각 등의 감각기관으로 얻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직관은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시간관념을 갖게 해 준다.”
3.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
톰 버틀러보던 저,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
이 책은 심리학의 명저 50권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한스) 아이젠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유형을 명랑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냉정하거나, 침울한 네 부류로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내향성자와 외향성자를 구분한 카를 융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한스 아이젠크는 외향성과 내향성을 이렇게 구분해 놓았다.
외향성
- 외향성자의 뇌는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내향성자의 것보다 흥분성이 약하다.
- 내적 경향성이 약하며, 외적 자극 및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삶의 느낌을 얻는다.
- 객관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되, 사건에 대한 인식적 고뇌는 덜한 편이다.
- 대체로 명랑하고 낙천적이나, 침착하지 못하고 모험을 즐기며 신뢰성이 부족하다.
내향성
- 내향성자의 뇌는 쉽게 흥분하는 탓에 감정적인 상처를 잘 받으며, 내면적인 삶을 강렬히 지향한다.
- 민감한 내적 감각을 지닌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정신적 부담을 주는 지나친 사회적 상호작용을 피한다. 혹은 풍요로운 내면의 삶으로 인해 과도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 매사를 강렬하고 집중적으로 경험하며, 삶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경향이 있다.
- 대체로 진지하고 차분하고 염세적이며, 자존감이 약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브릭스 마이어스는 오늘날처럼 외향성 위주의 사회에서는 보조 수단으로 내향성을 계발하지 못한 외향성자보다, 외향성을 계발하지 못한 내향성자들이 훨씬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에서 ‘4가지 선호 성향’을 보니 흥미롭다.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ST_감각과 사고가 결합한 경우
SF_감각과 감정이 결합한 경우
NF_직관과 감정이 결합한 경우
NT_직관과 사고가 결합한 경우
네 가지 유형
1) ST(감각/사고) 유형의 사람들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기본적인 사실을 추종한다. 실용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직종은 외과의사, 법률가, 회계사, 엔지니어 등 객관적 분석을 요하는 직종이다.
2) SF(감각/감정) 유형의 사람 역시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지만, 사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결론을 내린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인간적인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간호나 교육, 봉사, 판매, ‘웃으면서 하는 서비스직’에 잘 맞다.
3) NF(직관/감정) 유형의 사람들도 따뜻하고 친절한 성향을 지녔지만, 눈앞의 상황이나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실의 변화 가능성이나 미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일을 선호한다. 교사나 성직자, 광고인이나 상담가, 심리학자, 작가, 학자 등이 그것이다.
4) NT(직관/사고) 유형의 사람들도 미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들은 합리적 분석으로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차이가 있다. 독창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분야에 주로 종사하며, 과학, 컴퓨터, 수학, 금융 등의 과학적인 직종에 잘 맞다.
“감각, 직관, 사고, 감정 중에 무엇을 선호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특정 가치와 요구, 습관, 특성 등을 결정한다.”
* 중요한 것은...
외향형과 내향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우월한 것인지 가릴 수는 없다. 위의 네 가지의 유형도 마찬가지다. 그저 성향의 차이일 뿐이니까. 어떤 것이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이니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고, 독약도 잘 쓰면 양약이 될 수 있다. 그저 자신의 특성을 잘 살려 장점으로 만든다면 좋을 것이다.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선 이런 유형도 필요하고 저런 유형도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이 좋고 나쁨의 ‘차별’을 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겠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실성과 노력이 아니겠는가.
** 나는...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나는 내향성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특히 다음의 글에 공감이 간다.
“민감한 내적 감각을 지닌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정신적 부담을 주는 지나친 사회적 상호작용을 피한다. 혹은 풍요로운 내면의 삶으로 인해 과도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네 가지의 유형 중에서 (직관/감정) 유형에 속하는 것 같다. 이 유형의 직업을 보니 성직자만 제외하곤 교사, 광고인, 상담가, 심리학자, 작가, 학자 등, 내가 다 좋아하는 직업들이기 때문이다.
“(직관/감정) 유형의 사람들도 따뜻하고 친절한 성향을 지녔지만, 눈앞의 상황이나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실의 변화 가능성이나 미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일을 선호한다. 교사나 성직자, 광고인이나 상담가, 심리학자, 작가, 학자 등이 그것이다.”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걸 먼저 보고 나서 거기에 알맞은 직업을 보는 게 맞는 순서인데, 나는 직업을 먼저 보고 내가 (직관/감정) 유형의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본다. 어떤 직업을 좋아하는가 또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할 테니까.
당신은 어느 유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