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3에 작성된 페이퍼에서 슬픔과 관련한 문제를 냈습니다.
답은 몽테뉴의 <에세 1>에 있습니다.
(프랑스 왕공들 중 한 분인) 그분은 체류 중인 트렌토에서, 온 집안의 지주요, 영광이었던 맏형의 사망에 연이어 두 번째 희망이던 아우의 사망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이 두 번의 애사를 감탄스러우리만큼 의연하게 견딘 그가 며칠 뒤 자기 수하 중 하나가 죽게 되자 이 마지막 참사에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전의 꿋꿋함은 간데없이 어찌나 슬퍼하고 원통해하던지, 어떤 이들은 이 마지막 충격만이 그의 급소를 찌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미 슬픔으로 꽉 차서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 하나라도 더 얹히자 인내의 방벽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46~47쪽)
몽테뉴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 이야기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캄비세스가 프사메니투스에게 아들과 딸의 불행에는 미동도 않다가 친구의 불행에는 그토록 참을 수 없어 하는 까닭을 묻자, 그가 “마지막 불행만이 눈물로 표할 수 있는 것이었고, 앞의 두 불행은 표현 가능한 모든 수단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덧붙이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47쪽)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장면을 그릴 때, 그 아리따운, 죄 없는 소녀의 죽음에 대해 각자가 기울이는 관심의 정도에 따라 참관자들의 고통을 묘사해야 했던 고대 화가가 생각해 낸 것도 아마 이 주제와 연관되리라. 자기 기교의 마지막 역량까지 다 짜낸 그는 소녀의 아버지 차례가 되자, 어떤 모습으로도 그 같은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가린 모습으로 그렸다.(47쪽)
페트라르카의 말.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뜨겁지 않은 불 속에 있는 것
페트라르카
(49쪽)
⇨ 슬픔으로 말하면 얼마나 슬픈지 눈물로 표현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슬프지 않은 것이고, 큰 슬픔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네카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은 슬픔들은 말하고, 큰 슬픔은 침묵한다.
세네카
(50쪽)
마찬가지로 뜻밖의 기쁨도 우리의 얼을 빼놓는다.(50쪽)
자기 아들이 칸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하다 죽은 로마 여인, 기쁜 나머지 죽음으로 건너간 소포클레스와 참주 디오니시우스, (중략) (50쪽)
미셸 드 몽테뉴, <에세 1>
몽테뉴는 이 책에서 큰 슬픔을 느꼈을 때 인간의 반응에 대하여 “이미 슬픔으로 꽉 차서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 하나라도 더 얹히자 인내의 방벽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보다 “마지막 불행만이 눈물로 표할 수 있는 것이었고, 앞의 두 불행은 표현 가능한 모든 수단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더 무게를 둡니다.
결론은 매우 슬프거나 매우 기쁘면 인간은 넋이 나가고 몸이 굳어져 버린다는 것. 어떤 사람은 큰 슬픔이나 큰 기쁨을 견디다 못해 실신까지 한다는 것.
너무 슬프면 눈물도 안 나온다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네카가 말했듯이 큰 슬픔은 침묵하게 되나 봅니다.
“이미 슬픔으로 꽉 차서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 하나라도 더 얹히자 인내의 방벽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라는 말도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2번과 3번으로 하겠습니다.
* 문제의 답을 댓글에 쓰신 분들은 슬픔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므로 그 ‘유익한 시간’이 상품이 되겠습니다. 문제를 낸 제 덕분에 답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ㅋㅋ
....................<후기>
큰 슬픔에는 침묵한다는 세네카의 글에 동의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추가로 씁니다.
위의 글은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처음 알았던 순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큰 충격을 받았던 첫 순간인 거죠. 큰 충격으로 침묵하게 되는 수가 있다는 걸로 해석하면 좋을 듯합니다. 실어 상태가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울겠지요.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