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말한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실언했음을 알게 된다는 얘기다. 나도 경험이 있다. 40대 초반에 문학을 배우는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기소개를 하려고 의자에서 일어나 내 이름과 직업 따위를 간략히 말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초보자의 자세로 배우겠습니다’라고….
‘초보자의 자세’라고 말한 게 실수임을 알아차린 것은 강의가 끝나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 있을 때였다. 내가 ‘초보자의 자세’라고 한 것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싶어서였는데 오히려 나의 자만심을 나타내고만 꼴이 되었다.
예를 하나 들어 본다. 당신은 맥주를 좋아한다. 특히 집에서 남편과 함께 마시는 맥주를 즐기는 주부다. 저녁 식탁에서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맥주를 컵에 따라 마실 때의 첫 모금에 당신은 감탄한다. ‘아,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탄성을 지를 정도다. 그런데 당신이 어느 날 친구와 만났을 때 맥주를 즐겨 마신다는 얘기를 하자 친구의 입에서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맥주야?”라는 한마디가 돌아온다. 이어서 친구는 맥주를 마시는 건 아직 고급 양주의 깊은 맛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양주의 장점에 대해서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런 친구의 말에서 당신은 그가 배려심이 깊지 않음을 읽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맥주나 마시는 가난한 서민이 된 것 같고 상대편은 고급 양주를 마시는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으로 느껴져서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맥주 마시냐?” 또는 “아직도 소주 마시냐?”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가능성이 크다.
말을 하든 글을 쓰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자신의 삶과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떠한 마음을 가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언어는 우리 생활과 생각의 산물이라서 자신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설령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아무리 자기 미화를 한다고 해도 자신을 완전히 숨기기 어렵다. 만약 누군가의 인간관이나 사회관을 알고 싶다면 그에게 그것과 관련한 질문을 하며 30분쯤 얘기를 나누면 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정치인과 경제인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측근들에게 언어폭력의 갑질을 한 사실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심심치 않게 보아 왔다. 결국 ‘언어’란 본인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니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할 일이다. 언어는 그 사람의 일부다.
.......................................
제가 칼럼니스트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경기일보 오피니언 지면에 실렸습니다.
원문은 ⇨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63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