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독서 목록에 따르면) 2004년에 읽었고 이번에 재독하였다. 예전에 읽을 땐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이번에 깊이 음미할 수 있었던 게 재독의 수확이었다. 첫 문단에서부터 인물 묘사가 뛰어난 작가임을 알았다. 읽다 보면 군데군데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 묘사도 탁월해서 문장력을 키우고 싶은 이들이 필사해 보면 좋을 작품으로 꼽겠다.

 

 

이 책 한 권을 필사한다면 여러 권의 소설을 읽는 것보다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한스의 아버지를 묘사하는 글을 밑줄긋기 박스에 넣어 봤다. 요즘 이런 글을 읽는 재미에 빠졌다.

 

 

다음 글을 열 번쯤 읽은 것 같다.

 

 

(7쪽)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에 견주어볼 때, 그에게는 장점이나 특성이랄 것이 없었다. 여느 사람처럼 그는 넓은 어깨에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한 장사 수완을 지닌 그는 황금을 숭배하는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7~8쪽) 그의 종교 의식은 약간 개방적이기는 했지만,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신(神)과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였고, 시민적인 예의범절의 확고한 불문율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맹목적인 복종심을 보였다. 그는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한 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만한 일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형식적으로 허용되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8쪽) 그의 내면 생활은 속물적이었다. 그가 지녔던 정서(情緖)는 이미 오래전에 먼지가 되어버렸다. 낡고, 우악스럽기만 한 가족 의식과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이따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즉흥적인 자선, 이러한 것들이 겨우 그의 정서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정신적인 역량은 엄격하게 한계가 그어진 타고난 교활함과 계산적인 술책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읽는 것은 신문뿐이었다. 그의 예술 감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는 해마다 개최되는 시민 단체의 소인극(素人劇)과 가끔 열리는 서커스 공연이면 충분했다.

(8~9쪽) 그가 이웃의 어느 누구와 이름이나 집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영혼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부분, 즉 우월한 힘과 인물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감, 그리고 일상적이지 않은, 보다 자유롭고 세련된 정신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에 있어서 그는 그 도시의 다른 모든 가장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적대감은 옹졸한 질투심에서 싹튼 것이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1-05-15 16: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레바퀴 아래서‘는 딸아이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시기에 제가 반대를 해, 서로 갈등이 있는 시기에 읽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내용들이 아프게 저를 찌르는 바람에 탁월한 문장들을 발견 못하고 지나간 것 같아요~~세상에 읽을 책도 많고 재독하고 싶은 책도 많고 몸은 안따라주고 마음만 바빠지는 것 같아요 ㅎㅎ

페크pek0501 2021-05-15 12:59   좋아요 3 | URL
그런 때에 읽으셨다면 소설에 공감하며 읽으셨겠어요.
저는 2004년에 읽을 땐, 공감도 못하겠고 참 재미 없구나 생각했어요. 줄거리 위주로 읽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땐 이미 줄거리를 알기 때문에 문장 표현에 관심을 두고 읽었어요. 탁월한 작가는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엄청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어요.
필사할 작품이 있다면 이 작품을 꼽겠습니다. 저도 부분 필사를 하고 있어요.
좋은 문단을 찾아 책의 3분의 1만 필사해 보려 합니다.
페넬로페 님의 댓글 마지막 문장은, 저도 동감입니다.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1-05-15 19: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르만 헤세의 책은 학생시절에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데미안부터 시작해서 소개가 많이 되기도 했고요.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건 알지만, 좋은 문장을 필사하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떤 문장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외국어 공부를 하는 것처럼 쓰면서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페크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1-05-16 17:0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은 학창 시절에 독서광이었나 봐요.
요즘 데미안도 재독하고 있답니다. 재독하니까 작품의 진가를 알겠더라고요.
처음 읽을 땐 줄거리 쫓아가느라 제대로 문장 감상을 못 한 것 같더라고요.
책은 꼭 두 번 읽어야 유익하단 생각을 이번에 굳혔어요.

붕붕툐툐 2021-05-15 2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독을 하면 확실히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군요. 재독은 엄두도 못내고 늘 다른 책을 찾아 헤매는 저이지만, 이런 장점이 있구나 배우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21-05-16 17:05   좋아요 2 | URL
붕붕툐툐 님, 저도 재독은 엄두고 못내다가 이번에 재독하게 된 거예요.
재독의 이점이 확실히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희선 2021-05-16 0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어봐서 어떤지 알기는 하는데, 이런 건 거의 그냥 지나쳤던 것 같네요 이런 글이 있어서 한스 아버지가 어떤지 알 듯도 합니다 그래서 한스가 많이 힘들었군요


희선

페크pek0501 2021-05-16 17:07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 읽을 땐 그냥 지나쳤어요. 밑줄을 긋지 않았더라고요. 이번에 재독하면서 밑줄을 그은 곳이 많았어요. 문장 감상 하는 기회를 갖기 위해 꼭 필사해 보고 싶은 작품이랍니다.
첫장부터 아들 한스의 운명이 암시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비가 시원하게 오는 날입니다. 잘 지내세요...

잉크냄새 2021-05-16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있는데, 예전에 읽을 때 밑줄 친 글을 만나며 그 내용이 공감이 되냐 아니냐에 따라 그 시절의 제가 반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더군요.

페크pek0501 2021-05-16 17:09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 님, 안녕하세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답니다. ㅋ 어떤 땐 왜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지? 하고
어떤 땐 왜 이런 문장에 밑줄을 안 그었지 하고요. 그래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르다는 걸 깨닫습니다.
반갑습니다. 댓글,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