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이젠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술을 같이 마실 수 있다는 게 흐뭇하다. 가족 넷이 모여 앉은 저녁 식탁에서 가끔 맥주를 마시는데 이럴 때 나는 맥주를 반 캔 정도 마시면 적당하다. 음식은 차가운 걸 싫어하지만 맥주만큼은 차가워야 맛있는 것 같다.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맥주를 컵에 따라 마실 때의 첫 모금을 즐길 줄 안다. ‘아,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탄성을 지를 정도다. 나처럼 맥주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래전 지인 K를 만난 적이 있다. 어느 찻집에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술 얘기가 나오자 K가 내게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난 딱 맥주 반 캔이 좋던데.”라고 답했더니 “아직도 맥주야?”라고 말하더니 양주를 마시면 맥주를 안 찾게 된다며 열변을 토했다. 그 순간 나는 맥주나 마시는 가난한 서민이 된 것 같고 K는 고급 양주를 마시는 부유층에 속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맥주 마시냐?” 또는 “아직도 소주 마시냐?”라는 언어에서 묻어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경험이었다.
언어에는 그 사람의 인간관이 반영되어 있어서 말할 때 적절한 어휘를 사용하는 게 중요함을 알고 있다. 적절한 어휘의 사용이 중요함을 또 한 번 깨닫게 해 준 글을 최근에 읽었다.
『오래전 일이다. 당시 업무 때문에 옛 용산구청 앞을 자주 지나야 했다. 구청에는 “세입자가 구청에 와서 떼를 써도 소용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떼를 써도, 라는 글자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떼를 써도, 라는 말의 행간에 묻어나는 짜증과 혐오, 눈앞에서 빨리 치워버리고 싶다는 마음, 공무원이 시민에게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 글로 써 붙이는 게 가능한 시대정신. 그것은 아마도 용산 참사의 전조였을 것이다.』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에서 읽은 글이다. 시민을 떼쓰는 아이 취급을 하는 사회라니. 경악할 일 아닌가.

오래전 일이다. 당시 업무 때문에 옛 용산구청 앞을 자주 지나야 했다. 구청에는 "세입자가 구청에 와서 떼를 써도 소용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떼를 써도, 라는 글자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떼를 써도, 라는 말의 행간에 묻어나는 짜증과 혐오, 눈앞에서 빨리 치워버리고 싶다는 마음, 공무원이 시민에게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 글로 써 붙이는 게 가능한 시대정신. 그것은 아마도 용산 참사의 전조였을 것이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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