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뿐 아니라 글을 쓰는 자라면 아마 누구나 글이 길지 않은 한 편 한 편에 하나의 주제를 담는 수필에 매료되어 본 경험이 있으리라.
좋은 수필을 만날 때마다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면 친구들에게 그 영화를 꼭 보라고 말하고 싶듯이, 좋은 수필집을 읽고 나면 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그 수필집의 일독을 권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열정적인 ‘책 애호가들’에게 추천한다. 민혜의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라는 수필집을.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를 읽고 내가 밑줄을 긋고 싶은 대목을 다음과 같이 뽑아 보았다.
고독이란 정체된 듯싶으면서도 실은 보이지 않게 꿈틀거리는 생물이었다. 나름의 맛과 감촉도 지녔다. 어느 날은 쌉쌀하면서도 달착지근하여 그대로 머물고 싶어지는가 하면, 어느 날은 날감자 맛처럼 아리고, 중증의 증상으로 덮쳐올 때면 땡감처럼 떫어 내 심신을 오그라지게도 했다. 사전은 다시 쓰여 져야 하리라. 고독이란 단어의 정의만큼은. - ‘고독이나 한 잔’ 중에서.
눈물은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다. 어떤 명징한 이론을 들이댄다 해도 눈물이란 내게는 여전히 신비의 액체다. 눈물은 투명한 액체로 희비를 이끌어내지만, 격정을 담은 피눈물이라도 장대비처럼 억세게 긋는 법이 없다. 서리서리 한 얽힌 눈물도 그저 유순하고도 맥없이 아래를 향해 흐를 뿐이니 동(動)이되 정(靜)의 성정을 지닌 듯하다. 거짓 감정을 섞기에도 웃음 쪽이 눈물보다 수월할 거란 생각에 나는 인간이 내보이는 웃음보다 눈물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 ‘크라잉 룸’ 중에서.
안타깝게도 삶의 극점에서 인간은 간혹 자살로 비극적 결말을 내기도 한다. 우리 나라는 자살률이 OECD국가 중 1위라고 한다. 그러나 자살이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동물성의 선택일 뿐 식물들이라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낼 것 같다. 그 선험적 직감으로, 인내와 끈기로, 영특한 전술로.
사는 일이 위기라고 여겨질 때마다 나는 홀로 산에 들어 내가 보다 식물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초목에도 저마다의 곡절과 간난신고가 있어 나는 그네들이 온갖 수형으로 보여주는 정경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묵언과 은유의 대가들이 풀어내는 아포리즘을. 한데 인간을 관장하는 뇌의 외피에 하필 식물원을 조성한 것은 조물주의 은미(隱微)한 기호(記號)가 아니었을까. - ‘어느 날의 데포르마시옹’ 중에서.
근래 읽은 어느 책을 보니 파리지앵이 되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싼 옷이라도 튀지 않게, 싼 옷이라도 고급스럽게 보이게.’
이쯤 되면 우리와는 뭔가 달라도 크게 다른 것 같다. 그 의식 속엔 부자와 빈자를 아울러 배려하는 인문학적 사고가 깃들여있는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착각이라 할 것인가. 아무려나 우리의 정서로는 아직은 어림없을 얘기일 것 같다. 돈 들여 비싼 옷 구입하고 튀지 않게라니, 상대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면 자진신고를 해서라도 눈길을 끌어 모아야 본전 뽑는 일 아니겠나. - ‘파리지앵처럼 살아보기’ 중에서.
좋은 수필집을 한 권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드디어 찾았다.
해드림 출판사에서 수필집 공모를 통해 당선시킨 원고로 만든 수필집이다.
당선작으로 뽑힌 책인 셈이다.
목차
작가의 말-삶이란 결국 저마다의 위치에서 웃고 우는 일 | 4
키스에 대한 고찰 | 14
마늘 까던 남자 | 19
비아그라 두 알 | 26
베토벤을 만났을까 | 31
산 | 36
들 | 43
너에게 보낸다 | 49
모던 타임즈 | 55
예외적 인간 | 60
남편을 빌리던 날 | 65
비 오는 날 오후 세시에 | 70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 75
비스듬히, 비스듬히 | 79
하트 세 개 꾹꾹꾹 | 85
(이하는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