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왜 한쪽에서만 보시나요?
우리는 흔히 ‘자연 보호’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훼손되는 일이 많아 생겨난 말이다. 자연의 소중함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다.
<젊음의 탄생>에서 이어령 저자는 ‘자연 보호’라는 말은 잘못된 말임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해 왔지 언제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 왔느냐고 말하며, ‘자연 보호’라는 말 속에 이미 자연을 파괴하는 원인인 인간의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 사실 ‘자연 보호’란 말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생긴 말이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궁극의 목적이라고 여겨서 인간을 주체로 보고 자연을 객체화시킨 결과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에 익숙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애가 없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말하는 것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몇 년 전만 해도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누어 장애인에 대해 비정상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백인 중심의 사고가 ‘유색 인종’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이 역시 흑인 중심에서 보면 백인은 ‘무색 인종’이 되는 것이다.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시하는 뜻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는 말들에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드러난다. 즉 강자가 되는 쪽의 말이 널리 사용된다. 이렇게 양쪽에서 보지 않고 한쪽에서만 보는 시각은 한쪽을 유리하게 만들고 다른 한쪽을 불리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자연의 일부인 곤충에 대해서도 매미 쪽에서 보지 않고 인간 쪽에서만 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매미의 삶에 대한 시각이 그렇다. 매미는 보통 유충으로 6~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낸 뒤에 지상으로 올라와 성충이 되어 1~3주 만에 죽는다. 즉 유충으로 길게 살다가 성충이 되어서는 짧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상에서의 짧은 생을 살기 위해 긴 시간을 지루하게 땅속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해석해 놓은 여러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매미의 중요한 삶을 땅 위의 삶으로 보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매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삶은 유충으로 사는 땅속에서의 삶이라고 말이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게 그들의 운명이듯이 매미는 땅속에서 사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볼 수 있다. 개체 변이를 염두에 둔다면 매미가 지하에서 살기엔 성충보다는 유충으로 사는 게 환경에 적응하기 편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미가 지상의 짧은 삶을 위해 지하에서 긴 시간을 지루하게 보냈다는 것은 인간의 난센스일 수 있다. 매미의 전성기는 유충으로서의 삶일 수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 인간도 전성기는 장년기가 되기 전의 아동기와 청년기가 아닐는지.
한쪽에서만 보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가족이든 친구든 타인에 대해 배려가 없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서로 자기 입장에서만 보는 시각 때문일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친구 관계에 있는 갑이란 사람과 을이란 사람이 동업하여 회사를 차렸다. 그런데 서로 자신이 회사를 위해 한 일만 생각하고 상대방이 한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갑은 내 자본금이 을의 것보다 더 많이 들어간 회사이니 자기의 덕이 크다고 생각하고, 을은 이 회사를 차리자고 아이디어를 맨 처음 낸 것은 자신이라며 자기의 덕이 크다고 생각한다. 갑은 자신이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니 자기가 을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생각하고, 을은 회사에 큰 수익을 올린 계약을 자신이 해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기 쪽에서만 보니 동업을 하면 깨진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현상은 두 사람이 만나는 친구 관계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자동차를 타고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졌는데, 한쪽에서는 자신이 점심을 샀으니 다음에 만나면 상대방이 점심을 사야 한다고 여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점심값보다 자신의 자동차 기름값이 더 들었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각자가 자신은 상대방에게 많이 베푼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것은 적게 여겨져서 손해를 본 느낌을 갖는다.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에 이런 글이 있다. “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진리만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만큼 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 이 글을 한쪽에서만 보면 안 된다는 말로 읽었다.
* 어느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20번째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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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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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진리만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만큼 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239쪽)
사람을 유익하게 꾸짖고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할 때는 그가 어떤 방향에서 사물을 보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방향에서 보면 대체로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옳은 점은 인정하되 그것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이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는 화내지 않지만 틀렸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본래 사람은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또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그 방향에서는 본래 틀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감각이 인지하는 것들은 항상 진실된 것이므로.(15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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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에 따르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만 당신이 한쪽만 봤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걸 알아 두면 남에게 조언을 할 때 편리하겠다.
한쪽에서만 보면 한쪽만 보인다. 참고로 나도 한쪽만 보기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