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호(1990). 비디오수용성의 연구과제와 전망. 정보사회연구,가을. 

58쪽 

미국에서의 비디오수용실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케이블 tv의 보급이 주로 지방지향적으로 치중하는 반면 비디오의 보급은 도시지향적으로 확산되어 간다는 것이다.  

67쪽 

텔레비전 수상기와 함께 수출상품으로 부각되던 국내비디오생산이 80년대 후반에 대외무역상 덤핑관세와 관련된 교역 차질이 생기면서 내수판매로 전환, 국내 비디오 보급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국내 비디오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진 기간은 86년 이후 2~3년 간에 불과하다. 또 다른 확산배경으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주요 비디오생산업체 및 일부 대기업들이 외국 비디오 영화제작사와 독점 판권계약을 서둘러 체결하므로써 외국의 비디오물이 양적으로 증가되기 시작했던 점이다. 이와 동시에 비디오 구입자의 욕구를 부추겼던 요인으로써 당시 법적 규제장치가 허술한 상황하에 불법복사테이프가 공공연히 유통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결국 정확한 불법유통구조가 추적되지 못한 채 불법비디오의 범람은 주로 국내 미개봉의 해외영화와 포르노 필름으로 그 주류를 이루었다. 그 결과 잠재수요자의 실질구매를 증폭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더욱이 비슷한 시점에서 소수 독립 비디오제작사가 설립되었으나 자본의 영세성으로 인하여 자체 제작보다는 외화테이프의 수입에 급급하였다. 

68쪽 1989년 텔레비전 과외방송의 개시 

70쪽 정부는 올해 90년 중반에서야 비디오문화의 통제차원에서 현행 "음반에 관한 법"을 "음반 비디오물에 관한 법"으로 개정하고 유해 비디오의 제작, 배포 및 판매에 대한 제재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결국 다른 뉴미디어(70)에 비해 국내 비디오 수용의 사회문화적 관심은 그도안 학계보다 오히려 각계 사회단체들에 의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되어 정부의 제도적 각성을 촉구했다고 본다.  

이소형(1989). 기능대안론을 통한 뉴미디어 수용에 관한 연구 - 홈비디오(VCR)를 중심으로 -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시청각 전공. (학위논문) 

15쪽 뉴미디어의 '비동시적 특성(asynchronocity)' - 녹화와 시간전환기능(time-shifting function) 생각해보기. 

동시성은 특정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영되는 실제 시간(real time)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야 하는 시간과 행동의 구속이 있었음. 그러나 홈비디오를 통해 그러한 제약 벗어남. 

39쪽 패키지(package)계 미디어   

 279명 대상 조사 - 가장으로 하여금 응답하도록 요구된 질문. 가장 평균연령 48세.

53쪽 비디오 이용시간 평일 늦은 밤 시간(38.7) / 평일 저녁 시간(21.6) / 평일 오후 시간(31.6) / 평일 오전 시간(7.8) 

-> 시간전환기능을 생각할 때, 편성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시청한다는 것의 의미에서 다시 고려? 비디오도 정해진 시청 시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텔레비전 시청이 아직 커서, 그 시청 이외의 시간에 비디오를 보는 것.   

54쪽 자녀들이 77.7% 프로테이프 빌려오는 가족 성원 부모 21.6%  

       자녀 대학생 49.8 / 중,고생 19.4 / 국민학생 8.5  

선호하는 프로테이프 미국영화 52 / 중국 29 / 어린이 24 / 취미,전문 필름 12 / 국내 영화 6 

55쪽 프로테이프 시청기능이 에역녹화기능보다 앞서 있음.  

56쪽 홈비디오 기기에 대한 평가  

가격이 너무 비싸다 70.3 /29,7 전반적으로 만족한다 33.2 / 66.8 아프터서비스를 받기 어렵다 55.4 / 44.2 등 

72쪽 

대체성의 의미가 반드시 옛것이 새것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어 버리거나 쓸모가 없어지는 절대적인 교체현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성은 정도의 차이를 수반하는 경향(tendency이다.

74쪽  

오락 위주의 영화 필름이 프로테이프의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선택이 영화 필름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바꾸어 말하면 아직까지 홈비디오를 통하여 다양한 내용 또는 전문적인 내용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톤에 대한 문제 의식. 다양한 기능 대 오락 기능의 대립. 거기서 오는 연구자의 규범 효과.

 75쪽 

뉴미디어가 발휘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술적 기능과 수용자가 채택하여 이용하는 기술적 기능은 항상 똑같지 않다. 이는 모든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수용과정에서 빈번히 지적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홈비디오의 경우 다른 매스 미디어에 비해서 몇 개의 혁신적인 기능을 겸비한 가정용 뉴미디어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홈비디오를 채택한 개인들이 그와 같은 기능을 이용하는 유형과 빈도는 고유의 기술적 기능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뉴미디어의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기능적 괴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하는데 역점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뉴미디어가 기존의 매스미디어를 기능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설문조사의 규범에 대하여, 고민하기

90쪽 

문항 : 24. 귀하께서는 성인용 포르노테이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절대로 근절시켜야 한다 / 반드시 근절시킬 필요는 없다 

25. 귀하께서는 성인용테이프, 즉 포르노테이프를 빌려서 시청하신 적이 있습니까? 

- 있다 / 없다   

원우현,최현철,남궁협,박천일(1990).한국언론학보.5.15. 신문학보.제25호. 

127-128 

비디오에 관한 연구분야.  

1.비디오의 생산과 유통 구조 분석 2. 비디오 테잎(공 테잎과 영화 테잎)의 생산과 유통 구조 분석 

3. 비디오 산업과 관련산업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 4. 비디오 수용자 연구  

138쪽 

비디오의 유용성 인식에 대한 질문. "귀하께서는 일반적으로 비디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롭다, 가치가 있다. 흥미가 있다라는 구체적인 항목.   

159쪽 

오락적 시청의 기능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 

"현재에는 비디오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개발하여 발전시키기보다는 기존 영화와 같은 오락적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도구로 전락되는 감이 없지 않다. 즉,비디오 문화는 영화를 보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조광희(1990). 한국 비디오산업의 문화적 종속성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 인쇄매체전공. 

4쪽 

비디오산업의 중요성은 인간의 의식과 관념 등 정신적 가치를 전달하는 의식산업이라는 데 있다.따라서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경제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락이나 흥미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창을 제공하는 것이다. 

33쪽 

한국 비디오산업의 성립 

우리나라의 비디오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 대우,금성,삼성 등의 대기업이 비디오그램 산업에 진출하면서부터이다. 또 영화시장의 개방과 함께 영화,비디오 배급회사인 UIP-CIC가 1987년부터 직배를 시작하면서 미국의 대형 영화사 작품들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VCR이 맨처음 개발된 때는 1979년 삼성이 기계식 VCR을 개발하면서부터이며, 그 이듬해에는 금성에서 전자식 VCR을 개발했으며,뒤이어 대우전자의 전신인 대한전선에서 Beta방식의 전자식VCR을 개발했으며, 가전 3사간의 치열한 기술개발 및 내수시장 확보경쟁이 시작되었다.그러나 VCR이 비교적 고가의 소비성 제품이었기 때문에 대중화되지 못하다가 1982년 정부의 첨단기술 육성방안에 따른 특별소비세를 40%에서 4%로 대폭인아, 당시 98만원대의 가격이 66만원대로 낮춰졌다. 따라서 전 가구수의 1%정도가 VCR을 구비, 초기형태의 유통구조나 문화적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첨단산(33)업에 대한 의욕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시장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국내 VCR의 생산량은 1984년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성장을 계속하다가 1985년에 들어 각 가전사의 신제품, 기술 개발에 대한 노력의 결과로 30만원대의 VCR이 시판되면서 국내수요가 급증되었다.  

38쪽 

국내 VCR이 충분히 보급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디오그램 시장은 협소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국내의 제작사는 비디오그램의 생산을 통해서보다는 공공단체나 관공서의 홍보물을 제작해서 대행하거나, 기업 광고물의 제작을 대행함으로써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다. 

47쪽 

한국의 비디오그램 시장에 국내의 대기업이 진출하게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VCR의 보급률이 30%에 가까이 육박하면서 시장의 채산성이 확보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다. 

50쪽 

현재 비디오그램제작과 판매에 참여 중인 재벌기업은 대우,금성,선경,삼성 그리고 미국 비디오 직배회사인 CIC 등이다. 특히 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비디오그램 산업에 진출한 대우는 국내 비디오그램시장의 40%이상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영화산업사들인 RCA/컬럼비아 MGM/UA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데다, 지난 1990년 3월에는 CBS/FOX와 작품 공급 계약을 맺었으며, 오라이언 트라이스타의 판권까지 확보하고 있다. 또한 삼성은 1987년 스타맥스 라는 업체를 세워 비디오그램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1990년 7월부터는 월트 디즈니사의 작품을 국내에서 시판하고 있다. 선경은 워너 브라더스사의 작품을 판매하며,파라마운트사와 유니버설사는 한국 내 직배회사인 CIC를 통해 작품을 공급하고 있다.  

70쪽 

일본에서 제작된 수입 비디오그램의 증가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두드러진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1988년에 비해 89.7%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방송용 위성을 발사한 후 우리나라에서도 파라볼라 안테나를 설치한 가정에서 일본의 영화 등을 쉽게 시청할 수 있음으로 해서 일본의 문화에 익숙해져 일본의 인기 프로그램을 찾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석호(1991). 홈비디오의 이용실태에 대한 사례연구. 『신문학보』, 제26호, 287 ~ 314.




  1) 본 논문의 전략적 선택




  학위 논문을 제외하고, 기존 학술지에 투고된 비디오 관련 연구 논문이 극소수인 상황에서, 비디오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연구하기 위해 전석호 교수의 논문을 일종의 '역사적 자료'로 원용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연구자의 내용 자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기술(description)을 위한 증거로 인식하기보다는, '당시'라는 시제에 맞추어, 비디오를 둘러싼 일종의 큰 가설들을 설정하는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이 연구자의 역사쓰기에 관한 윤리적 측면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다. 즉,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비디오 관련 프레임에 본 논문의 연구 결과 속 내용을 '확보'하는 차원이 아닌, 내용의 비판적 검토를 통한 또 다른 역사적 질문을 시도하려는 바임을 밝힌다.




2) 연구 내용 정리 및 개념화 시도

 

 본 연구를 통해 연구자는 당시 '뉴 미디어'라고 명명된 비디오에 대한 학술 연구의 부진을 지적하고, 본격 연구의 확산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매체 일반', '비디오 일반'의 차원에서 비디오의 속성을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본 연구의 내용을 정리한 결과




 (1) '뉴미디어'의 조기 채택자의 성향 - 주로 상류층에 속해 있음

  ① 뉴미디어의 구입 및 유지 비용이 결코 저렴하지 않음

  ② 뉴미디어에 대한 중요성의 인지 및 구매동기의 부여가 높게 요구됨

  ③ 새로운 혁신에 대해 특히 관심이 높은 전문집단이 먼저 수용대상으로 이루어짐

 # 80년대 초의 사례나 80년대 후반, 미국의 실증조사를 종합한 결과, 비디오 소유자는 소유자에 비해 수입과 교육이 상대적으로 높고, 젊은 연령층이었음. 비디오소유 가정은 자가용소유, 가족구성원수, 주택소유, 주택크기와 정적인 상관관계 보임

- > 나 : 그러나 본격적인 비디오 기기의 보급화 이후, 이런 일반성이 그대로 유지될 것인지는 의문임




 (2) 비디오와 타 매체 이용

  ① 비디오의 수용 이후 전반적으로 텔레비전 시청 증가(비디오와 텔레비전의 관계 포착)

  ② 비디오 기능과 관련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예약녹화 행위 및 녹화된 비디오테이프의 재시청행위 축소

  ③ 비디오채택의 초기 단계 : 텔레비전방송에 대한 보완적 활용

  ④ 비디오채택의 후기 단계 : 텔레비전방송이나 영화관람을 대신하는 대체적 활용

  # 비디오소프트웨어의 확대, 즉 다양한 비디오 영화테이프가 일반 소비자시장에서 급속히 확대된 환경적 요인의 영향 감안




 (3) 연구 방법 / 연구 내용의 특징 분석 통한 역사적 가설 설정

  ① 연구자가 서울 강남지역 5개의 아파트단지, 4개의 주택단지, 2개의 연립주택단지에 거주하는 총 350여가구에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에 대하여 - > 뉴미디어가 갖고 있는 '위계적 측면'에 대한 검토 필요. 특히 초기 비디오 수용이 여타 매체가 겼었던 계급 구조의 층위를 재현하는 기계로서 작용했는지를 사료를 통해 입증할 필요성 제기

  ② 응답 결과, 교육수준은 대다수가 고등교육을 마쳤고, 매달 평균 3권 이상의 잡지를 구입, 평균 1.59개의 신문 구독, 일주일에 1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봄

 - > 평소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매체 속 내용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유형 파악, 그리고 그것을 VCR이란 매체로 엮어본다면?

  ③ 비디오 이용 시간대의 경우, 오전시간 15.9% / 오후시간 24.1%/ 저녁시간 32.1%/늦은밤시간 27.9% 분포 - > 특히 비디오의 시간성 관련, 비디오가 한국 사회 내 밤 문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점. 연구 결과, 시간의 경우 비디오를 통해 '수면시간의 감소'도 발견됨




④ 선호하는 비디오테이프의 유형 : 국가로는 미국영화 45.6% / 중국영화 25.0% - > 비디오의 전성기 시절, 홍콩 영화를 비롯한 특정 국가 관련된 비디오테이프의 인기 파악 가능? 장르별로는 액션 및 폭력물 46.7% / 성인애정물 28.2% - >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불법음란비디오의 존재와 확산에 대한 근거들 더욱 굳건하게 만들 필요성 제기




⑤ 비디오테이프 선택의 자의성

 ⅰ) 자의형 이용자 : 스스로 비디오테이프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재노출 또는 타인에게 권유하는 경향이 강함

 ⅱ) 의존형 이용자 : 비디오테이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주로 비디오대여점의 주인에게 의존하여 피동적인 노출경향을 띠고 있음

 ⅲ) 적극형 이용자 : 새로 나오는 비디오테이프는 무엇이든지 빌려보거나 구입까지 행하는 적극적 이용자 집단

# 비디오가 나오고, '라이브러리'의 개념이 생성되면서, 수용자가 영상을 소유할 수 있는 특징이 나타남. 각 이용자에 기인한 문화적 속성들을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어떻게 도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




⑥ 비디오 노출에 따른 심리효과

 ⅰ) 자기계발효과 : 비디오테이프를 보고나면 대화소재나 새로운 간접경험들을 체득하고 자신의 가치관도 재고

 ⅱ) 기분전환효과 : 비디오는 수용자에게 동반감을 주는 매체이자 비디오를 이용함으로써 물리적, 심리적, 압박감을 벗어날 수 있는 전환적 만족감 획득

 ⅲ) 강박감 조성 효과 : 비디오노출에 따라 시간을 낭비했다는 회의감 또는 너무 심한 노출습관으로 인한 심리적부담의 경험

# 비디오에 관한 큰 맥락에서 한국 사람들이 비디오라는 매체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긍정적, 부정적으로 나누어 그림을 그려볼 필요가 있음. 그 후에 '중층적'인 측면을 다시 생각해보기

김은진(2001). 한국 '에로비디오'와 수용자 욕망의 재구성 연구. 여성학연구,제11권,제1호. 

 

2쪽 

최근 에로비디오 장르는 수용자에게 전달되는 일방향적인 텍스트의 역할을 넘어섰다. '에로비디오'를 특히 즐겨보는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에로비디오'잡지와 동호회,'에로비디오'에 출연하는 배우의 팬클럽도 생겨났다. 그들은 더 이상 '에로비디오'를 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에로비디오'베우를 '스타'로 자신을 '매니아;로 부른다.  

 

10쪽 

'o양 비디오'를 비롯하여 '백양 비디오'등의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을 담은 몰래카메라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것을 봐야만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에로비디오라는 장르, 그리고 포르노는 이제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으로 취급되어,포르노 보기라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유도되고 암암리에 강요되는 경향이 있다. 

 

11쪽 

특히 '성에 대한 개방'은 진보, '성에 대한 무지'나 '포르노 비판'은 곧 보수로 연결되는 우리 사회에서, 신세대 여성들은 포르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중략)이제는 여성들도 여성을 상품화, 대상화하는 포르노에 대한 지식을 겸비하고 당당하게 말해야만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고 집단 내의 생활에 잘 적응하는 사람, 즉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0쪽 

에로비디오는 하드코어 포르노와 달리 일단 외형적으로는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인터뷰 대상자들 뿐 아니라 동호회 회원들도 에로비디오의 뻔한 스토리를 비웃고 좀 더 나은 내러티브를 요구하면서도, 전체 영화를 자세히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리모콘을 이용해 적당히 돌려서 재미있는 부분, 즉 섹스장면이나 여성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보여지는 부분만 정상 속도로 본다는 것이다. 

 

27쪽 

 

수용자들이 에로비디오를 보는 이유는 자연 발생적인 성욕에 의한 것은 아니며, 에로비디오 수용을 통해 성욕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에로비디오의 수용은 호기심과 일상적 욕구불만 때문이기도 했으며, 에로비디오 수용을 통해 수용자는 더욱 심한 욕구를 느꼈다. 수용자들은 에로바디오를 성행위의 매개물로 사용하고 성적 교본으로 받아들였고 에로비디오가 제공하는 기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성에 익숙해(27)졌다. 

 

28쪽 

 

에로비디오라는 장르,그리고 포르노는 이제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으로 취급되어, 포르노 보기라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유도되고 암암리에 강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특히 남성들이 더하다. 불법 포르노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대여할 수 있는 에로비디오를 시청하는 데에도 남성 관계망의 역할은 매우 크다. 남성 집단에서는 일상대화를 하다가도 에로비디오를 비롯한 포르노에 관한 대화가 흔히 이루어지며 이속에서 정보가 공유되고 서로 권유하며 같이 보기도 한다. 에로비디오를 남성 관계의 매개물로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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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98 

저녁에 정기구독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다가, 레슬링 좋아하시는 다락방님 생각이 나서, 글을 퍼왔습니다.^^ 

롤랑 바르트보다 색다른 시선은 아니지만, 언론인 다운 시선으로 나름 흥미롭게 분석하려는 노력이 보인 글이네요. 

빈스 맥마흔에 대한 글은 저도 좀 준비를 하고 써보고 싶습니다.   



 이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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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콜로라도주 덴버, 곰 조련사 같은 덩치에 꼭 끼는 양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무대로 걸어 들어온다. 관객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내고, 그의 뒤편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는 귀청을 찢을 듯 록음악을 뱉어낸다.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관객을 훑어보던 그는 쉰 목소리로 악을 쓴다.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고!”(It‘s all about money!)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케네디 맥마흔. 다름 아닌 미국에서 가장 큰 프로레슬링 연맹인 ‘월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WWE)의 주인이다. 개인 재산만 5억 달러(1)에 달하는 이 전직 레슬러가 가족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먼데이 나이트 로’(Monday Night Raw)는 시청자 수만 어림잡아 500만~600만 명에 이른다.(2) 경기마다 관중이 1만~2만 명 몰리고(대규모 경기에는 7만~8만 명), 각 경기는 43개 채널을 통해 전세계로 생중계되거나 녹화중계된다.

레슬링과 장터 흥행 오락이 접목된 프로레슬링은 규칙의 유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격투기 스포츠와 구별된다. 처음에는 심판이 셋을 셀 때까지 상대편 어깨를 링 바닥에 누르고 있으면 승리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러나 경기를 좀더 볼 만한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강조하는 새로운 경기가 속속 등장했다(팀 경기, 로열 럼블, 아이언 맨 매치, 실격 퇴장을 없앤 경기 등).

맥마흔이 1982년 WWE(3)의 전신인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를 인수할 때만 해도 그가 나중에 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맥마흔은 기껏 몇천 명의 마니아에게 인기 있던 프로레슬링을 본격적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맥마흔은 이 표현을 처음 쓴 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수익성 측면에서 프로레슬링은 이제 미국의 다른 인기 스포츠와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규칙 따위? 관건은 시나리오!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급격히 늘어난 TV 채널이 새로운 ‘콘텐츠’에 목말라하는 상황(4)뿐 아니라 맥마흔이 레슬링 경기의 개념을 새롭게 바꾼 덕택이다. 19세기 ‘자유형 레슬링’이라는 초보적 형태에서 현재의 프로레슬링으로 발전해오기까지, 사람들의 관심은 단순히 두 선수의 대결에 머무르지 않았다. 심리학적으로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인물 유형의 대결을 연출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였다.

마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정형화된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탈리아 전통 즉흥극-역자)의 주인공들처럼 각각의 레슬러는 특정한 인간 본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캐릭터 부여는 초보 수준에 머물렀다. 간악하고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는 ‘나쁜 편’(영어로 ‘Heel’)과 적을 존중하면서 경기를 펼치는 ‘좋은 편’(혹은 ‘Face’) 사이의 대결구도가 흔했다. 레슬러의 닉네임도 인물의 성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끔 붙였다. ‘하얀 천사’, ‘베튄의 형리’, ‘어린왕자’ 등은 1950~60년대 프랑스의 대표적 인기 레슬러다.

이런 방식을 좀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사람이 맥마흔이었다. WWF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1980대 말부터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만화 속 슈퍼 히어로들의 이미지를 잡다하게 뒤섞은 캐릭터를 창조했다. 갈수록 극단화되는 캐릭터는 당시 청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프로레슬링은 드디어 비주류 스포츠의 위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영화관에서 배트맨이나 슈퍼맨의 활약에 감탄하던 아이들은 언더테이커(‘묘혈을 파는 인부’라는 뜻), 릭 플레어, 헐크 호건 같은 레슬러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묘기를 보이는 모습에 열광했다. 오늘날 WWE의 주요 관객층은 35살 미만의 남성이다.(5) 프로레슬링의 경제적 성공과 점증하는 인기에 유럽 채널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프랑스의 <카날 플뤼스> <RTL9> <NT1>과 영국의 <스카이스포츠> 등). 완구 제작업체도 새로운 시장에 군침을 흘리며 몰려들었다. 갖가지 레슬러 모형, 레슬링 복장 세트, 레슬링 게임 카드, 기타 액세서리 등이 속속 출시되었다.

대부분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점점 더 복잡한 영웅 캐릭터를 고안해내고 있다. 이들은 거대 스포츠 이벤트의 성격과 TV 시리즈물의 서사를 결합한다. 경기 혹은 ‘에피소드’는 저녁 시간대 1시간 30분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관중으로 가득 찬 경기장에 레슬러가 입장하는 장면은 흡사 성대한 의식을 보는 듯하다. 때로는 선수 입장 장면이 5~6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끊임없이 중단되는 경기는 전체 이벤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카메라는 자주 링 바깥의 인물들을 잡는다. 경기장 관중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링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다. 경기(한 달에 한 번 정도)마다 의리와 배신, 동맹과 경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드라마는 각 영웅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몇 년 전부터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오히려 링 밖에서 벌어졌다. 레슬러들이 개입된 자동차 사고, 칼부림 사건, 협박 사건 등이 TV 화면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다. 레슬링 경기는 때로 몇 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이런 이야기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프로레슬러들은 이제 단순한 캐릭터(교활한, 공정한, 난폭한…)에 머무는 대신 자신을 새로운 등장인물로 등장시킨다. 이 등장인물들은 각 경기를 통해 이어지는 긴 이야기 속에 삽입된다. 프로레슬링은 픽션의 세계다. 가짜 이름과 가짜 줄거리, 가짜 KO, 가짜 격투가 판치는 세계다. 링 밖의 세계도 이 픽션의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심지어 프로레슬링연맹 책임자들이 링 위에 오르기도 한다.

 캐릭터의 진화는 계속된다

1980년대 말까지 프로레슬링 시나리오는 스포츠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부한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 가령승리한 자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진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링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회적 성공, 특히 경제적 성공이 점점 부정적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맥마흔과 그의 참모진이 직접 고안한 것인지, 관객의 반응에 항상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다.

‘백만불의 사나이’라고 부르던 테드 디비아시와 어윈 R. 샤이스터(일명 ‘IRS’라 부른 레슬러로 전통적인 미국 세무공무원 복장을 하고 링에 오른다)야말로 사회적 관계를 대조적으로 부각시킨 전형적인 예다. 1990년대 초반, 두 레슬러는 ‘머니 인코퍼레이트’(Money Inc.)라는 상징적 이름의 팀을 결성한다. 거의 1년 6개월 동안 이들은 노골적으로 온갖 연줄과 부패한 방식을 사용해 연일 승리를 거둔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들을 통해 미국 거대 기업주와 세무공무원의 의심스러운 도덕을 까발리며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들이 제시하려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했다. ‘반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 지배 방식이 링 위에서 재현되었다. 지식인(대학교수 복장을 한 딘 더글러스), 부자(백만장자 테드 디비아시가 자신의 충복 버질에게 온갖 모욕을 주는 장면이 오랫동안 WWF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심지어 미국 사회에 잘 맞지 않는 귀족이라는 캐릭터까지 등장했다.

가장 인기를 끈 레슬러 캐릭터는 하위계층 출신(경찰, 공장 노동자, 래퍼, 부랑자)이나 소수인종(라틴계, 흑인,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이다. 특정 사회계급과 직접 관련 없는 캐릭터가 일정한 공통점을 공유하는 관객에게서 인기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가령 2008년 하트브레이크 키드가 서브프라임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팬에게서 동정 어린 메시지가 빗발쳤다.

 악인 캐릭터의 위악적 승리

다른 프로 스포츠와 달리, 프로레슬링에서는 가장 실력 있는 선수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관중이 영웅으로 치켜세운 레슬러는 결코 오랫동안 정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 반드시 배신이나 제3자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정상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결국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인물이 정상을 차지한다.

시나리오 작가의 사회적 풍자 의도에서 비롯된 줄거리는 용감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위반하고 조작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미국의 주요 문화산업 장르(스포츠, 영화, TV)가 전파하는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철학을 맥마흔 자신만큼 잘 구현하는 인물은 없다. 피니어스 T. 바넘(6)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WWF의 주인은 자신이 직접 경기장 안에 등장함으로써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었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맥마흔은 단 한 번도 자신을 긍정적 캐릭터로 내세우지 않았다. 링 위에 올라선 그는 항상 폭군인데다 신경질적이고 무능한 ‘사장’을 연기했다. 사장 캐릭터는 그 자신이 연출한 세계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물이었다. 수년간 그는 많은 선수를 탈락시키고 자기 멋대로 경기 결과를 뒤집었다. 경기마다 관중은 그가 인기 레슬러의 싸움에 개입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장면을 즐긴다.

점점 더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던 맥마흔은 2006년 재기한 레슬러들에게 WWE의 ‘키스 마이 애스 클럽’(Kiss My Ass Club)에 들어오라고 권유한다. 맥마흔은 미국 전역의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링 위에서 바지를 내리고 불쌍한 레슬러에게 모욕을 준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야유와 욕설을 쏟아붓는 관중을 향해 소리친다. “당신들이 매일 사무실에서 하는 짓을 나라고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나는 최소한의 존경을 바라는 것뿐이다!”

글•발타자르 크뤼벨리에 Baltazar Crubellier
언론인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Connecticut Post, Bridgeport, 2009년 11월 19일.
(2) <USA Today>에 실린 미국 닐슨연구소 자료, McLean(Virginia), 2009년 4월 23일.
(3) WWE는 WWF가 경쟁상대인 두 레슬링연맹, WCW(World Championship Wrestling)와 ECW(Extreme Championship Wrestling)를 각각 2001, 2003년에 매각함으로써 출범했다.
(4) 호한 헤이브론 & 마르텐 반 보텐뷔르흐, ‘삶과 죽음 경계에 선 최후의 검투사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참조.
(5) WWE 미국 시청자의 81%가 18~34살 남성이다(comScore Media Metrix, 2009년 4~6월).
(6) Phineas Taylor Barnum(1810~91). 미국의 흥행사. 속임수와 흥행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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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님 글만 꾸준히 읽어도 상식박사 되겠구먼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4 02:24   좋아요 0 | URL
아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도움 되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 종종 찾아보겠습니다.
 

책 읽는 습관 혹은 공부하는 습관  하나. 자취를 한 지, 거의 13년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습관이 있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집에서 공부할 때, 모든 미디어를 다 틀어놓고 하는 편이다. 일단 컴퓨터를 켜고, 벅스플레이어에서 좀 마음이 안정되는 템포의 R&B를 틀어놓는다. 그 다음에 텔레비전을 틀어서,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채널로 맞춰 놓는다. 눈은 페이퍼에 가 있다. 잘 깎아놓은 2B연필로, 중요한 문장에 별 표시를 한다. 그러면서, 귀로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중계를 '본다'. 텔레비전이 '라디오'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해, 못 챙긴 사회 이슈들을 점검해본다. 웹페이지를 클릭할 때마다, 나는 컴퓨터 특유의 탈칵 소리가 들리면, 더 마음이 안정 된다.  이런 생활이 구체적으로 자리잡은 건, 대학교 일 학년 때부터 였는데, 습관이 되니, 오히려 소음이 없으면 공부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학우가 있었는데, 그 학우의 형과 같은 버스에 타게 되었다. 도착지가 먼 거리라, 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소리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더랬다. 지금 기억으론 정확히 무슨 과인지 모르겠다. 다만, 아직도 기억하는 건, 자신은 음악과 소음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음악도 멜로디, 리듬 이렇게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공부하는 과학적 기준에 부합하는 그런 특정한 소음으로 여기고, 습관적으로 분석하게 되어버린단다. 놀라운 건, 그 분은 그래서 자신에게 고요함은 자신의 연구거리가 줄어드는 의미라고 말한 것이다.  

나도 가끔 스스로를 연구거리로 삼고, 실험할 때가 있다. 하루는 정말 조용한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지, 마음 먹고 연필을 잡았는데, 실패했다. 손이 나도 모르게 스포츠 채널로 가고, 인터넷 벅스플레이어로 갔다. 어쩔 때는 아예 신나는 댄스 가요를 틀어놓고, 텔레비전도 출연진들의 웃음 소리가 큰 예능 프로그램(특히, 강호동이 출연하는 프로)을 틀어놓고, 공부를 한 적이 있더랬다. 또 이건 너무 소리가 컸는지, 공부가 되지 않았다.  

요즘 가장 공부가 잘 되는 조건은, 인터넷으로 장한나 베스트 콜렉션을 틀어 놓고, 텔레비전엔 CNN이나 전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스포츠만을 중계하는 스타 스포츠로 채널을 골라 놓은 때이다. 이제 이런 소음이 방해꾼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떠는 수다같다.  언젠가 메탈리카의 battery를 무한 반복 듣기로 해놓고, 무릎팍도사나 강심장,스타킹만 나오는 채널이 있어, 그것만 골라놓고 공부를 내가 계속할 수 있다면, 나는 나만의 '엠시스퀘어'회사를 차릴 방안을 강구할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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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5-1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고등학교 때 워크맨을 엠씨스퀘어라고 불렀어요. 소음 차단용. 음악 소리는 거슬리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그 원인을 스스로 발견하기를.

저는 초 이기적 인간이어서요, 제가 만든 소음은 하나도 안거슬려요. 아무리 커도. 그런데 다른 사람이 만드는 소음은 정말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음악을 트는 편이 더 집중이 잘 되는 거죠. 참, 이기적인 인간이죠. 꼭 소음 뿐만 아니고요, 방도, 제가 어질른 건 하나도 안거슬리는데, 남이 뭐 조금만 어질러놓으면 그게 또 그렇게 거슬려요. 참,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말이죠. 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2:46   좋아요 0 | URL
웬디님, 저랑 비슷하시네요.^^;;

L.SHIN 2010-05-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당한 소음은 오히려 집중력에 도움이 될 때가 있죠.
다른 소리입니다만,
저는..아주 시끄러운 하드/메탈 락 음악을 들으면서 꾸벅꾸벅 잘도 잔답니다.
그것도 일종의 '익숙함'과 '반복성'에서 오는 요상한 습관이 된 거 같아요(웃음)

얼그레이효과 2010-05-14 00:06   좋아요 0 | URL
shin님, 오우 메탈 음악에 주무신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밤에 혼자 잘 때,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 놓고 자는 버릇은 있는 것 같네요. 일종의 알람 기능으로 쓰기도 한답니다. 눈 뜨면 뉴스 이런 식으로. (웃음)

Alicia 2010-05-1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은소리에 민감해요. 특히 전자제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음을 싫어해요.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문자찍는 소리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이런거요.
그런데 밖에서 농구하면서 소리지르는 거, 음대 성악과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이런건 괜찮아요.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5 00:10   좋아요 0 | URL
저랑 어떤 면에선 '소리 취향'이 비슷하신듯^^
 

문재철,김유성(2007). 63빌딩과 IMAX 영화관의 시각적 체험에 대한 연구 - 1980년대 서울, 집단적 꿈의 형성과 그것의 체험-영화연구 36호. 

234쪽 

소비문화의 확대와 발맞추어 개화된 80년대 이미지 공간은 전두환 정권이 제공하는 스펙터클-통금해제,컬러tv방송 시작, 프로야구 출범,심야영화관, 86아시안게임 과 88 올림픽 등-과 정권에 대항하는 스펙터클 -도시 빈민, 노동자 대투쟁, 민주화 항쟁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화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새로이 열린 이미지 공간에서 유희적 체험을 하기도 하고, 시대의 불합리에 맞서기도 했다. 이것은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억압적 유신과 일방향적 개발의 풍경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것으로,1980년대 새로이 형성된 이미지 공간은 경제적 풍요로움 속에서 '미학화'되기에 이른다.  

245쪽 

아이맥스 영화관히 63빌딩에서 처음으로 개장했던 1980년대 중반, 전술했듯이 한국사회는 기술집약적인 선진화를 모토로 성장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 시기 기술적 성장의 속도감은 아이맥스 영화의 비행적 리듬감으로 체현되었다. 더구나 이때는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라는 국제적 행사를 앞두고 세계의 이목은 서울(한국)을 재발견할 것이고,이에 따라 한국은 세계를 맞이할만한 역량을 갖추어야 했다. 이것은 한국으로 밀려들어올 세계를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학습이 필요했다. 

247쪽 

1980년대의 개방화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국을 국제자본의 순환처로 만드는 것이었고, 특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한국(247)을 매력적인 투자처로 스펙터클화하는 것이었다.(248) 

250쪽 

박정희 정권의 성장 위주의 정책이 '고속도로'처럼 막힘없이 뻗어나가는 직선적 이미지를 주요하게 형성했다면, 전두환 정권기인 80년대는 유희적인 이미지 공간을 촉발시키며 미적인 경관을 구성해냈다.  

(중략) 80년대 심미화된 서울 풍경은 기실 가시화된 축제의 풍경과 비가시화된 억압의 풍경이 첨예하게 긴장을 이루던 장이었다.  

이길성,이우석,이호걸(2004). 1970년대 서울의 극장산업 및 극장문화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18쪽 

TV가 영화관객을 흡수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격과 편이성이다. TV는 영화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매체가 아니다. 따라서 TV는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또한 앞서 지적했듯이 1970년대 들어와 급속히 악화된 서울의 교통 환경은 상대적으로 영화소비에 덜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중장년층의 영화소비를 감소시키는 요인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영화와 유사한 영상매체인 TV가 영화의 오락적 기능을 잠식하는 것이었다. TV의 영화기능의 잠식형태는 TV드라마, TV의 외화프로그램,TV쇼와 같은 형태가 존재했다. 

23쪽 

좌석간의 거리, 영사막과 좌석의 거리, 화장실의 규정은 매점,암표와 더불어 당국에 의해 주로 규제당하거나 관객의 불평의 대상이 되는 조건들이었다. 신문에는 자주 시설미비로 지적당한 극장들의 기사가 실리곤 했다. 특히 재개봉관 이하의 극장들은 빈번하게 지적당하여 경고 혹은 정관 처분을 받기도 했다. 

28쪽 

TV가 일반화된 시점에서 영화산업이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TV와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방화의 대표적 흥행 장르인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활극은 이러한 흥행전략이 효과적으로 구사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성애와 폭력의 스펙터클은 TV가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르들은 소구대상에 있어서도 TV와의 차별화를 성공한 사례이다.70년대 영화관객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 10대, 20대였다면, 활극장르는 10대를,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20대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30대 이상의 TV 시청자 층과 차별화했던 것이다. 

35쪽 

70년대 개봉관은 대략 12개 정도가 유지된다. 각기 변동사항은 조금씩 있지만 관객들이 개봉관으로 명확히 인식했던 극장은 종로구와 중구에 위치했던 단성사,명보,국제,국도,피카디리,스카라,대한,중앙,아세아,허리우드 등 10개관 정도이다. 

37쪽 

방화의 경우 다른 어떤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보다 국도에서 상영될 경우 흥행에 성공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국도극장의 위치가 주거단지와 시장의 부근이므로 여성 관객(특히 중장년층)이 다수이므로 방화의 수요가 많았고,주로 방화관(시기마다 방화와 외화의 주상영 영화가 달라지기는 하지만)이었던 국제극장 역시 근처 광화문의 직장여성들이 애용하는 극장이었다고 한다. 

개봉관의 구도의 변화 : 70년대의 방화관의 퇴조와 외화관의 증가 

방화관과 외화관의 구분 점점 사라짐. 흥행시기인 명절에 외화 트는 관행. 

49쪽 

대한 뉴스는 45년 광복 이후부터 49년간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더불어 67년 몇 개의 개봉관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던 애국가 영화는 71년부터는 모든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70년대는 극장에서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 애국가 영화,대한 뉴스,문화 영화가 순서대로 상영되었다.  

50쪽 

'마지막 회 상영이나 바쁜 경우 생략하는 수도 있었다'라는 극장 관계자의 언급으로 볼 때 당시의 국가 정책으로서의 이 영화들의 상영은 대중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게다가 60년대 전국의 대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대한 뉴스의 뉴스들이 신선할 수 있었지만,TV의 보급이 대량 이루어진 대한 뉴스가 가지는 정보력은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54쪽 

어린이 관객 의식한 아동영화 방학시즌에 개봉하는 관행.  

연휴,날씨 고교야구같은 이벤트 등은 영화 흥행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었다. 특히 인기있는 스포츠 경기는 영화 관객을 감소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76년 추석시즌 중에도 박대통령 쟁탈 축구대회로 고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영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상관관계> 

55쪽 

지역편중적인 도시 공간의 변화와 날로 혼잡해져가던 교통 체증은 관객에게 60년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영화관람을 번거로운 경험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70년대 종로구와 중구의 번화가에 밀집해 있었던 개봉관에서 영화관람은 단지 영화보기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또한 이 같은 도시공간의 변화는 개봉관을 보다 저연령층의 문화향유지로 만들었으며, 70년대 이후 서울 변두리의 재개봉관이 시기적으로 상영시기의 불이익을 감소하면서도 용이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지리적인 반사이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86쪽 

극장이 정비와 단속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극장이 안전한 공적 오락공간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극장은 일종의 우범지대나 저질,퇴폐문화의 온상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상대적으로 서울 도심 주요지역에 자리잡고 오랜 동안 영화문화의 중심지로 인식되어온 개봉관보다는 재개봉관,특히 3번관이하의 하번관에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90쪽 

쇼공연 열린 문화. TV에 대한 대응전략. 대형 무대와 공연의 직접성. 

93쪽  

1970년대의 극장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특징적인 현상은 <벤허>,<황야의 7인>,<젊은이의 양지>등과 같은 과거 상영된 적이 있었던 영화들이 다수 리바이벌되어 흥행에 성공한다는 점이다.

VTR과 같은 별다른 녹화,재생장치가 없었던 상황에서 리바이벌 영화들은 마치 TV의 주말의 명화와 흡사하게 관객들이 예전에 관람했던 영화들을 보며 과거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또한, 과거의 영화들이 개봉되었을 당시 관람 기회를 놓친 영화들을 다시 관람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95쪽  

개봉관 흥행작들의 장기상영 일반적, 재개봉관 상영기간은 짧음, 흥행 영화 기간 두고 반복 상영

재개봉관 이용-도시 하위계층집단 - 자막 읽는 수고로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문화자본 외화 <한국 

106쪽 

구술사 결과 

70년대 중국권법영화의 유행. 국제와 국도 -아줌마와 방화 / 단체관람,학생들. 

137쪽 

재개봉관에 오면 필름이 여기저기 이미 잘린 상태.  

139쪽 

교외지도. 연소자 관람가인 영화도 학교에서 관람 금지. 학생들은 단체관람 때만 영화를 볼 수 있었음. 상영관 내부에 들어가 학생들을 잡아내는 광경.  

이용우(1994). '개방화'와 한국자본주의. 경제와사회 94년 여름호(통권 제22호) 

103쪽 

'개방화'논리는 김영삼 정부 때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초반부터 자본의 필요에 따라 전개되었던 산업구조 조정의 연장선상에서 제기. 

113쪽 

전경련의 대내개방의 확대요구. 민간주도경제론. 80년대 초반의 자본(기업)의 요구는 자본 활동의 자유를 위해 정부의 개입을 축소, 대외개방은 시기를 늦추어 달라는 것. 

자본의 요구는 85년 한국경제가 흑자를 시현. 통상마찰이 가속화. 통상마찰의 심화. 대외개방의 불가피성을 인식.대외개방을 민간주도경제론과 결합할 것 요구.  

유선영(2007). 동원체제의 과민족화 프로젝트와 섹스영화. 언론과 사회. 2007년 여름 15권 2호. 

19쪽  

호스티스 영화, 1970년대의 의미구조와 망 속에서 두텁게 파고들어가야 할 임상적 에피소드(clinical episode)로 간주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 호스티스영화를 사회문화적 병리현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아님. 오히려 박정희동원체제의 산물로 봐아함을 주장. 

40 tv 반공물의 인기. 

43 대중문화는 억압된 시민사회에서 시민되기를 정지당한 대중에게 부여된 전체주의적 국가에 포위된 일종의 '자치구'였다. 이 안에서 대중은 국가와 거리를 둔 사적인 개인으로서 자의식과 정체성, 욕망의 분출 같은 사사화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43 박정희체제와 영화정책은 1970년대 저질화론에서 보듯, 국책영화들의 흥행참패에서 보듯,또 호스티스영화의 성행에서 보듯 실패이다. 과민족화 프로젝트 안에서 전체주의적 인간형을 겨냥한 정신개조론, 자유주의 법체제의 형식과 폭압적,국가경영간의 모순과 괴리, 근대적 개인들의 형성과 욕망을 억압하는 합법적 검열의 비합리성, 영화를 단순히 이데올로기 기구로만 간주하는 검열관들의 주관적 소신과 판단에 의한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검열, 분할검열체제와 같은 섹스묘사에 대한 이중(43) 적이고 모호한 대응, 영화의 저질화와 불황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적 담론, 국책영화의 전반적 실패, 대중문화 영역의 확장과 산업화,리얼리티의 불온성에 대한 과민한 반응과 금기 같은 요인들이 다층적으로 작용하여 호스티스 영화라는 하위 장르를 발생시킨 것이다.- 44 

48 

대중은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적 시민이 되기보다 문화의 장에서 퇴폐와 은밀한 전복을 동시에 즐기는 문화소비자로서 향락에 탐닉하는 대중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사화의 전복성과 양면을 이루는 주체의 파편화이기도 하다. 데카당스로의 월경은 비록 전복적 계기를 함축하고 있더라도 자기파괴적이고 분열적인 주체구성의 계기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연(1995). 한국관객의 미국영화 읽기 : 문화제국주의 이론의 비판적 검토. 언론과 사회.1995년 겨울 통권 제10호. 

- 문화주의적 접근으로,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검토하기.   

이상길(2005). 1990년대 한국 영화장르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 연구 : 영화장의 구조변동과 영화 저널리즘의 역할을 중심으로.언론과 사회.봄 13권 2호. 

64쪽 

1990년대 한국영화가 순전히 산업적인 차원에서만 도약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한국사회에서 '산업'으로서 영화의 발전은 영화의 '예술'로의 전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1990년대는 영화산업의 양적 팽창,영화작품의 질적 현상이 일어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영화를 예술로서 공인하고 본격적인 감상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사회적 인식이 고양된 시기였다. 

65쪽 

1990년대 동안 영화는 일상 속에 중요한 문화자원으로 급속히 자리잡았다. 대학 내에서 '영화학'의 제도화, 영화전문지의 증가,학교나 직장, 혹은 pc통신과 인터넷 등을 매개로 활동하는 수많은 영화동호회와 동아리의 형성,지역공동체에서의 영화상영 행사 등은 확실히 1980년대까지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에 관한 지식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영화에 대한 취향은 중요한 '문화적 구별짓기'의 규준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서 공인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71쪽 

영화에 관한 지식이 '학술적'이기보다는 '저널리즘적'으로 생산,소비되고 비평활동 자체도 기자와 저널리즘 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점을 고려하면, 저널리즘이 영화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에서 결정적 인자로 작용했으라고 추정할 수 있다. 

92쪽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일반기사보다 기획/연재기사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매스커뮤니케이션 상황틀의 구속(시사성의 요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사들이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비디오가 일반화되고 케이블 방송이 도입되면서,영화나 영상문화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추정된다. 

102쪽 

영화 저널리즘의 텍스트 가운데 비평은 영화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평 담론장르의 존재 자체가 영화를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해석의 가치가 있는'대상으로서 승인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화가 하나의 학문으로 충분한 제도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저널리즘 영화비평은 영화전공자들에게 대중적 인지도 제고를 통한 상징자본의 획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권력보상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물론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성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선 저널리즘이 제공하는 비평의 공간이 충분하지 않으며, 그 대상이 원칙적으로 비전문가인 일반 공중이기 때문에 분석의 엄격성보다는 저널리즘의 글쓰기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108쪽 

1990년대 저널리즘 영화비평에서 드러나는 몇몇 특징들은 평론가 집단의 상징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담론 전략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영화는 인접 예술분야나 인문사회과학분야와의 관련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문화적으로 정당한 대상으로서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들은 다양한 발화자-주체로서의 위치를 담론 속에 투사하였다. 관객과 영화의 매개자로서 비평가(108) 의 기본적 위치(즉, '발화자-관객', '발화자-평가자'등)에 '발화자-교육자'로서의 위치를 포개놓았던 것이다.  

이상길,이설희,김지윤(2008). 스크린 테크놀로지의 다양화와 영화소비 경험의 변화  

150쪽 

영화보기/관람(viewing of films): 영화텍스트에 대한 관객의 지각과 해독 

영화수용(film reception): 그러한 관람행위를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가리키는 용어 

영화소비(film consumption): '극장가기'만이 아닌, 다양한 미디어(텔레비전,비디오,위성과 케이블, 인터넷 등)을 통한 영화의 배급,상영과 관련된 수용행위들을 아우른다.(cf.Jancovich&Faire,2003,p.13) 

184쪽 

이미지가 현상하는 형식을 규정하는 지지체로서 스크린 테크놀로지라는 용어. 그것은 미디어로서의 구분이 명확히 보여주지 못하는 스크린의 현상적인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텔레비전과 비디오는 다른 미디어로 이해되지만, 스크린문화라는 관점에서는 사실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비디오가 텔레비전,스크린을 통해서만 내용물을 시각화할 수 있는 종속적인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테크놀로지라는 용어는 미디어를 그 자체의 기술적 속성보다는,수용자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지연(2009) .한국 영화의 매체적 전이와 문화적 전용에 관한 연구 : 영미 지역 배급사 타탄(Tartan)의 DVD 브랜드 '아시아 익스트림'의 경우를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53권 2호. 2009년 4월.  

99쪽 

매체적 전이란 영국 영화 배급 구조 속에서 이들 아시아 영화들이 극장보다는 DVD 매체를 중심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영화를 DVD로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매체의 포맷의 차이를 넘어 영화와 관객이 맺는 관계,영화가 감상되는 환경, 그리고 영화의 유통과 관련된 다른 산업적 구조와 시장 구조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100쪽 

문화적 전용 : 기존의 다른 계급적,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었던 문화적 기호들을 차용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맥락에서 새롭게 의미화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또한 문화의 전 지구화 과정에서 특정한 문화적 기호나 상품이 지역적 맥락 속에서 다른 의미와 문화적인 위치를 갖게 되는 과정 역시 문화적 전용이라 볼 수 있다.    

103쪽 

비디오 내스티 현상은 영국 대중문화 속에서 VCR의 영화적 경험이 특정한 B급 장르들-외국 공포,서스펜스,폭력물-과의 친화성 속에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주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비디오 시장을 초기부터 지배했던 미국에서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와 비디오를 통해 보는 영화 목록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극장에서 보는 주류 영화와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는 영화들이 차별적으로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비디오 매(103)체가 포르노 장르와 결합하면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면 영국의 비디오 내스티의 경우 포르노 대신 폭력,공포,서스펜스, 그리고 외국 영화들로서의 이국적인 특성이 비디오 매체와 장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은경(2006). 한국 문화연구의 형성. 한국학술정보. 

제6장 저널리즘의 장과 문화연구 간의 조응과 상동 효과 

147쪽-148쪽 

1990년대 들어 중앙 일간지들에서 문화담론의 생산과 관련하여 나타난 중요한 변화 양상 중의 하나는, 기존에는 문화면 속에 함께 게재되었던 다양한 기사들이 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독자적인 지면들을 확보해 나갔(147)다는 점이다. (중략)1993년을 전후하여 문화면이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책, 종교, 과학 관련 기사들이 점차 문화면으로부터 분리되어 별도의 지면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겨레신문>에서는 1994년부터 '한겨레 책세상','영화/비디오','음악/춤' 등의 지면이 등장하였으며, <조선일보>에서도 1993년부터 '비디오','가요','영화','해외문화'등과 같이 세분화된 지면 구성이 나타났다. 

163쪽 

시장의 힘에 종속적인 저널리즘의 장은 금방 싫증을 내는 독자 대중을 붙들어두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되고 이는 새로운 현상에 집착하는 글쓰기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결국 현상의 이면에 천착하는 기회를 갖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저널리즘의 장에서 생산되는 문화비평의 다수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신간 서적 소개 등 상업적 대중문화 텍스트에 집중되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 들어 급격하게 늘어난 매스미디어 채널들은 매일 새로운 텍스트들을 쏟아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텍스트 비평은 신진 문화연구자들로 하여금 새로움을 요구하는 저널리즘의 장에 부합하면서 동시에(163) 손쉽게 담론의 대상을 전유할 수 있는 방편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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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산업-경제적 합리화-규모의 경제 그리고 미디어 기업의 복합화 현상,-범위의 경제 안에서 비디오 산업과 영화 산업의 결합. 영화 기계가 되면서, 영화 산업의 논리에 복속된 비디오. 경험재.
 

가끔 안타까운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괜찮은 사람이었다가도,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통화. 참 싫다. 학벌에 대한 문제 또한 그렇다. 더 정확하게 범위를 좁혀보자면, 학벌을 둘러싼 무의식 같은 거다. 난 학부는 3류를 나왔어, 그래서 편입을 생각해. 혹은 좋은 네임 벨류의 대학원으로 가려 해. 이건 지난 번에 '죄인 게임'이란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을 했다. 내가 말하는 건, 3류라고 간주되는 대학을 나와서, 대학원은 사회가 속된 말로 '쳐주는 곳'을 나온 사람들의 불쑥 튀어나오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난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대학교를 나오진 못했다. 하지만 대학원은 -또,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곳을 다닌다.(하지만, 이 '좋은 곳'의 의미와 범위는 과연 무엇일까?-'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갈치를 먹다 걸린 가시같은 질문이다) 그러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선배들이나 몇몇 지인들이 전화를 하면, 대뜸 난 묻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선생이 좋아야 해. 대학원 이름이 좋은 게 다가 아니라구."란 말은 한다. 그러면서, "아, -예전에 다닌- '우리'대학에 대학원 있었으면 편히 다닐텐데."란 말로 친절하게 자신의 심리를 설명한다.  혹은 '결국 사회에서 쳐주는 건, 학부 학벌이더라구. 대학원 학벌이 아니더라.'는 말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꺼내는 대학원 선,후배들이 있다.  왜 그런 말을 나만 만나면 먼저 하는 것일까. 나는 2년 전부터, 누적된 이런 경험에 신경질이 나서, 그냥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안타까운 풍경은, 대학원 내에서, 자신의 대학교 학벌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공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짊어지고 가는 대학원 친구들이다. 간접적으로 많은 위로와 자신감 불어넣기를 해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 들을 때, 그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그러한 '결정주의'가 "난 솔직히, 이 대학원 온 거 그런 목적도 좀 있단다..'라는 말과 엮어질 때, 그 모호한 분위기는, 공부한다는 것의 외부와 내부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 풀기 어려운, 현실과 이상의 고리와 벽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시선이 이른바 권력을 비판하고, 그것에 나는 좌파요와 진보요를 꼭 표시하거나 들먹거리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올 때, 자신들이 다니던 옛 대학을  '지성의 온정적 향수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정체성, 그 정체성을 보존하는 교수들의 지성을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그 대학의 외부 현실에 대해서는, 이상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대학 사회의 더러움으로 환원시킨다. 그 더러움 안에, 자신이 다녔던 학교는 좋은 선생이 가득하고, 다른 곳은 속물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하며, 지성의 정수를 훼손시키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가는 의견들이 있다.  

그런 이들 중  공부보다, 공부 외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교수들의 신상 캐기에 더 바쁜 것이 씁쓸하다.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 그러한 담론의 감옥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 안에서 학문의 순수와 불순의 경계를 만들어버리려는 '의로움으로 포장된 것 같은 지적 분노'가 불편하다. 한편으론, 하나의 이슈를 꺼내면, 그 이슈에 이상한 지적 참조를 달면서,  자신은 열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투로 지적 전투에 임하는 친구들도 안타깝다.  

그러면서, 공부가 좋아서, 선택한 곳으로서의 대학원은 이데올로기에 복속되고, 나는 그런 선택의 자유에 대해 늘 사회가 간주하는 현실 세태의 눈 안에서 분석된다. '좋은 대학원 가니 좀 나아진 게 있던가?'라는 호기심, 그리고 그 질문에서 새어 나오는, 전도된 학문 세계에 대한 비판 의식. 과잉된 분노가, 과장된 비난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진중권-되기'의 열망으로, 이름 알리기에 열심인 친구들도 있다. 텍스트에 무조건 정치라는 말을 넣기 좋아하고,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너무 '저널리즘적'으로 보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깊이 있는 텍스트에 시의성의 개입을 시도하고, 그 텍스트를 쉽게 풀어쓰고, 타인에게 전달하고, 그 타인의 반응에 힘을 쏟는 친구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대학원을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이건 내가 우석훈의 책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북 리뷰에서 '이름값 효과에 대한 단상'으로 돌아본 적이 있는 내 주위 현상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네 지도교수가 누구냐, 묻고. 아, 그 교수.. 그리고 이어지는 현황 공개와 분석. '잘 지내니'라는 말 뒤에 바로 나오는 그런 말들로 귓가를 따갑게 만드는 지인들의 안부 인사가 참 싫다.

편하게 공부를 하고 싶다. 사람들을 제대로/깊이 안 만난 지 2년이 넘었다. 참고로, 2년은 내가 대학원을 다닌 기간이다.  

학문을 가십거리로 만드는 이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기간이기도 하다.  

학벌과 학문을 섞어 만든 칵테일을 권하는 이들의 이름을 휴대폰에서 지운 기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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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집과 자존심이 멋진 얼그레이님의 홀로서기!
ㅎㅎ홧팅!!!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