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98 

저녁에 정기구독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다가, 레슬링 좋아하시는 다락방님 생각이 나서, 글을 퍼왔습니다.^^ 

롤랑 바르트보다 색다른 시선은 아니지만, 언론인 다운 시선으로 나름 흥미롭게 분석하려는 노력이 보인 글이네요. 

빈스 맥마흔에 대한 글은 저도 좀 준비를 하고 써보고 싶습니다.   



 이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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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콜로라도주 덴버, 곰 조련사 같은 덩치에 꼭 끼는 양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무대로 걸어 들어온다. 관객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내고, 그의 뒤편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는 귀청을 찢을 듯 록음악을 뱉어낸다.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관객을 훑어보던 그는 쉰 목소리로 악을 쓴다.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고!”(It‘s all about money!)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케네디 맥마흔. 다름 아닌 미국에서 가장 큰 프로레슬링 연맹인 ‘월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WWE)의 주인이다. 개인 재산만 5억 달러(1)에 달하는 이 전직 레슬러가 가족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먼데이 나이트 로’(Monday Night Raw)는 시청자 수만 어림잡아 500만~600만 명에 이른다.(2) 경기마다 관중이 1만~2만 명 몰리고(대규모 경기에는 7만~8만 명), 각 경기는 43개 채널을 통해 전세계로 생중계되거나 녹화중계된다.

레슬링과 장터 흥행 오락이 접목된 프로레슬링은 규칙의 유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격투기 스포츠와 구별된다. 처음에는 심판이 셋을 셀 때까지 상대편 어깨를 링 바닥에 누르고 있으면 승리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러나 경기를 좀더 볼 만한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강조하는 새로운 경기가 속속 등장했다(팀 경기, 로열 럼블, 아이언 맨 매치, 실격 퇴장을 없앤 경기 등).

맥마흔이 1982년 WWE(3)의 전신인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를 인수할 때만 해도 그가 나중에 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맥마흔은 기껏 몇천 명의 마니아에게 인기 있던 프로레슬링을 본격적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맥마흔은 이 표현을 처음 쓴 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수익성 측면에서 프로레슬링은 이제 미국의 다른 인기 스포츠와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규칙 따위? 관건은 시나리오!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급격히 늘어난 TV 채널이 새로운 ‘콘텐츠’에 목말라하는 상황(4)뿐 아니라 맥마흔이 레슬링 경기의 개념을 새롭게 바꾼 덕택이다. 19세기 ‘자유형 레슬링’이라는 초보적 형태에서 현재의 프로레슬링으로 발전해오기까지, 사람들의 관심은 단순히 두 선수의 대결에 머무르지 않았다. 심리학적으로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인물 유형의 대결을 연출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였다.

마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정형화된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탈리아 전통 즉흥극-역자)의 주인공들처럼 각각의 레슬러는 특정한 인간 본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캐릭터 부여는 초보 수준에 머물렀다. 간악하고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는 ‘나쁜 편’(영어로 ‘Heel’)과 적을 존중하면서 경기를 펼치는 ‘좋은 편’(혹은 ‘Face’) 사이의 대결구도가 흔했다. 레슬러의 닉네임도 인물의 성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끔 붙였다. ‘하얀 천사’, ‘베튄의 형리’, ‘어린왕자’ 등은 1950~60년대 프랑스의 대표적 인기 레슬러다.

이런 방식을 좀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사람이 맥마흔이었다. WWF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1980대 말부터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만화 속 슈퍼 히어로들의 이미지를 잡다하게 뒤섞은 캐릭터를 창조했다. 갈수록 극단화되는 캐릭터는 당시 청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프로레슬링은 드디어 비주류 스포츠의 위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영화관에서 배트맨이나 슈퍼맨의 활약에 감탄하던 아이들은 언더테이커(‘묘혈을 파는 인부’라는 뜻), 릭 플레어, 헐크 호건 같은 레슬러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묘기를 보이는 모습에 열광했다. 오늘날 WWE의 주요 관객층은 35살 미만의 남성이다.(5) 프로레슬링의 경제적 성공과 점증하는 인기에 유럽 채널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프랑스의 <카날 플뤼스> <RTL9> <NT1>과 영국의 <스카이스포츠> 등). 완구 제작업체도 새로운 시장에 군침을 흘리며 몰려들었다. 갖가지 레슬러 모형, 레슬링 복장 세트, 레슬링 게임 카드, 기타 액세서리 등이 속속 출시되었다.

대부분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점점 더 복잡한 영웅 캐릭터를 고안해내고 있다. 이들은 거대 스포츠 이벤트의 성격과 TV 시리즈물의 서사를 결합한다. 경기 혹은 ‘에피소드’는 저녁 시간대 1시간 30분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관중으로 가득 찬 경기장에 레슬러가 입장하는 장면은 흡사 성대한 의식을 보는 듯하다. 때로는 선수 입장 장면이 5~6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끊임없이 중단되는 경기는 전체 이벤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카메라는 자주 링 바깥의 인물들을 잡는다. 경기장 관중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링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다. 경기(한 달에 한 번 정도)마다 의리와 배신, 동맹과 경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드라마는 각 영웅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몇 년 전부터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오히려 링 밖에서 벌어졌다. 레슬러들이 개입된 자동차 사고, 칼부림 사건, 협박 사건 등이 TV 화면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다. 레슬링 경기는 때로 몇 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이런 이야기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프로레슬러들은 이제 단순한 캐릭터(교활한, 공정한, 난폭한…)에 머무는 대신 자신을 새로운 등장인물로 등장시킨다. 이 등장인물들은 각 경기를 통해 이어지는 긴 이야기 속에 삽입된다. 프로레슬링은 픽션의 세계다. 가짜 이름과 가짜 줄거리, 가짜 KO, 가짜 격투가 판치는 세계다. 링 밖의 세계도 이 픽션의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심지어 프로레슬링연맹 책임자들이 링 위에 오르기도 한다.

 캐릭터의 진화는 계속된다

1980년대 말까지 프로레슬링 시나리오는 스포츠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부한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 가령승리한 자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진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링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회적 성공, 특히 경제적 성공이 점점 부정적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맥마흔과 그의 참모진이 직접 고안한 것인지, 관객의 반응에 항상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다.

‘백만불의 사나이’라고 부르던 테드 디비아시와 어윈 R. 샤이스터(일명 ‘IRS’라 부른 레슬러로 전통적인 미국 세무공무원 복장을 하고 링에 오른다)야말로 사회적 관계를 대조적으로 부각시킨 전형적인 예다. 1990년대 초반, 두 레슬러는 ‘머니 인코퍼레이트’(Money Inc.)라는 상징적 이름의 팀을 결성한다. 거의 1년 6개월 동안 이들은 노골적으로 온갖 연줄과 부패한 방식을 사용해 연일 승리를 거둔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들을 통해 미국 거대 기업주와 세무공무원의 의심스러운 도덕을 까발리며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들이 제시하려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했다. ‘반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 지배 방식이 링 위에서 재현되었다. 지식인(대학교수 복장을 한 딘 더글러스), 부자(백만장자 테드 디비아시가 자신의 충복 버질에게 온갖 모욕을 주는 장면이 오랫동안 WWF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심지어 미국 사회에 잘 맞지 않는 귀족이라는 캐릭터까지 등장했다.

가장 인기를 끈 레슬러 캐릭터는 하위계층 출신(경찰, 공장 노동자, 래퍼, 부랑자)이나 소수인종(라틴계, 흑인,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이다. 특정 사회계급과 직접 관련 없는 캐릭터가 일정한 공통점을 공유하는 관객에게서 인기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가령 2008년 하트브레이크 키드가 서브프라임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팬에게서 동정 어린 메시지가 빗발쳤다.

 악인 캐릭터의 위악적 승리

다른 프로 스포츠와 달리, 프로레슬링에서는 가장 실력 있는 선수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관중이 영웅으로 치켜세운 레슬러는 결코 오랫동안 정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 반드시 배신이나 제3자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정상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결국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인물이 정상을 차지한다.

시나리오 작가의 사회적 풍자 의도에서 비롯된 줄거리는 용감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위반하고 조작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미국의 주요 문화산업 장르(스포츠, 영화, TV)가 전파하는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철학을 맥마흔 자신만큼 잘 구현하는 인물은 없다. 피니어스 T. 바넘(6)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WWF의 주인은 자신이 직접 경기장 안에 등장함으로써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었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맥마흔은 단 한 번도 자신을 긍정적 캐릭터로 내세우지 않았다. 링 위에 올라선 그는 항상 폭군인데다 신경질적이고 무능한 ‘사장’을 연기했다. 사장 캐릭터는 그 자신이 연출한 세계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물이었다. 수년간 그는 많은 선수를 탈락시키고 자기 멋대로 경기 결과를 뒤집었다. 경기마다 관중은 그가 인기 레슬러의 싸움에 개입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장면을 즐긴다.

점점 더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던 맥마흔은 2006년 재기한 레슬러들에게 WWE의 ‘키스 마이 애스 클럽’(Kiss My Ass Club)에 들어오라고 권유한다. 맥마흔은 미국 전역의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링 위에서 바지를 내리고 불쌍한 레슬러에게 모욕을 준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야유와 욕설을 쏟아붓는 관중을 향해 소리친다. “당신들이 매일 사무실에서 하는 짓을 나라고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나는 최소한의 존경을 바라는 것뿐이다!”

글•발타자르 크뤼벨리에 Baltazar Crubellier
언론인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Connecticut Post, Bridgeport, 2009년 11월 19일.
(2) <USA Today>에 실린 미국 닐슨연구소 자료, McLean(Virginia), 2009년 4월 23일.
(3) WWE는 WWF가 경쟁상대인 두 레슬링연맹, WCW(World Championship Wrestling)와 ECW(Extreme Championship Wrestling)를 각각 2001, 2003년에 매각함으로써 출범했다.
(4) 호한 헤이브론 & 마르텐 반 보텐뷔르흐, ‘삶과 죽음 경계에 선 최후의 검투사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참조.
(5) WWE 미국 시청자의 81%가 18~34살 남성이다(comScore Media Metrix, 2009년 4~6월).
(6) Phineas Taylor Barnum(1810~91). 미국의 흥행사. 속임수와 흥행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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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님 글만 꾸준히 읽어도 상식박사 되겠구먼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4 02:24   좋아요 0 | URL
아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도움 되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 종종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