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철,김유성(2007). 63빌딩과 IMAX 영화관의 시각적 체험에 대한 연구 - 1980년대 서울, 집단적 꿈의 형성과 그것의 체험-영화연구 36호. 

234쪽 

소비문화의 확대와 발맞추어 개화된 80년대 이미지 공간은 전두환 정권이 제공하는 스펙터클-통금해제,컬러tv방송 시작, 프로야구 출범,심야영화관, 86아시안게임 과 88 올림픽 등-과 정권에 대항하는 스펙터클 -도시 빈민, 노동자 대투쟁, 민주화 항쟁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화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새로이 열린 이미지 공간에서 유희적 체험을 하기도 하고, 시대의 불합리에 맞서기도 했다. 이것은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억압적 유신과 일방향적 개발의 풍경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것으로,1980년대 새로이 형성된 이미지 공간은 경제적 풍요로움 속에서 '미학화'되기에 이른다.  

245쪽 

아이맥스 영화관히 63빌딩에서 처음으로 개장했던 1980년대 중반, 전술했듯이 한국사회는 기술집약적인 선진화를 모토로 성장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 시기 기술적 성장의 속도감은 아이맥스 영화의 비행적 리듬감으로 체현되었다. 더구나 이때는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라는 국제적 행사를 앞두고 세계의 이목은 서울(한국)을 재발견할 것이고,이에 따라 한국은 세계를 맞이할만한 역량을 갖추어야 했다. 이것은 한국으로 밀려들어올 세계를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학습이 필요했다. 

247쪽 

1980년대의 개방화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국을 국제자본의 순환처로 만드는 것이었고, 특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한국(247)을 매력적인 투자처로 스펙터클화하는 것이었다.(248) 

250쪽 

박정희 정권의 성장 위주의 정책이 '고속도로'처럼 막힘없이 뻗어나가는 직선적 이미지를 주요하게 형성했다면, 전두환 정권기인 80년대는 유희적인 이미지 공간을 촉발시키며 미적인 경관을 구성해냈다.  

(중략) 80년대 심미화된 서울 풍경은 기실 가시화된 축제의 풍경과 비가시화된 억압의 풍경이 첨예하게 긴장을 이루던 장이었다.  

이길성,이우석,이호걸(2004). 1970년대 서울의 극장산업 및 극장문화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18쪽 

TV가 영화관객을 흡수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격과 편이성이다. TV는 영화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매체가 아니다. 따라서 TV는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또한 앞서 지적했듯이 1970년대 들어와 급속히 악화된 서울의 교통 환경은 상대적으로 영화소비에 덜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중장년층의 영화소비를 감소시키는 요인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영화와 유사한 영상매체인 TV가 영화의 오락적 기능을 잠식하는 것이었다. TV의 영화기능의 잠식형태는 TV드라마, TV의 외화프로그램,TV쇼와 같은 형태가 존재했다. 

23쪽 

좌석간의 거리, 영사막과 좌석의 거리, 화장실의 규정은 매점,암표와 더불어 당국에 의해 주로 규제당하거나 관객의 불평의 대상이 되는 조건들이었다. 신문에는 자주 시설미비로 지적당한 극장들의 기사가 실리곤 했다. 특히 재개봉관 이하의 극장들은 빈번하게 지적당하여 경고 혹은 정관 처분을 받기도 했다. 

28쪽 

TV가 일반화된 시점에서 영화산업이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TV와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방화의 대표적 흥행 장르인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활극은 이러한 흥행전략이 효과적으로 구사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성애와 폭력의 스펙터클은 TV가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르들은 소구대상에 있어서도 TV와의 차별화를 성공한 사례이다.70년대 영화관객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 10대, 20대였다면, 활극장르는 10대를,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20대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30대 이상의 TV 시청자 층과 차별화했던 것이다. 

35쪽 

70년대 개봉관은 대략 12개 정도가 유지된다. 각기 변동사항은 조금씩 있지만 관객들이 개봉관으로 명확히 인식했던 극장은 종로구와 중구에 위치했던 단성사,명보,국제,국도,피카디리,스카라,대한,중앙,아세아,허리우드 등 10개관 정도이다. 

37쪽 

방화의 경우 다른 어떤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보다 국도에서 상영될 경우 흥행에 성공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국도극장의 위치가 주거단지와 시장의 부근이므로 여성 관객(특히 중장년층)이 다수이므로 방화의 수요가 많았고,주로 방화관(시기마다 방화와 외화의 주상영 영화가 달라지기는 하지만)이었던 국제극장 역시 근처 광화문의 직장여성들이 애용하는 극장이었다고 한다. 

개봉관의 구도의 변화 : 70년대의 방화관의 퇴조와 외화관의 증가 

방화관과 외화관의 구분 점점 사라짐. 흥행시기인 명절에 외화 트는 관행. 

49쪽 

대한 뉴스는 45년 광복 이후부터 49년간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더불어 67년 몇 개의 개봉관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던 애국가 영화는 71년부터는 모든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70년대는 극장에서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 애국가 영화,대한 뉴스,문화 영화가 순서대로 상영되었다.  

50쪽 

'마지막 회 상영이나 바쁜 경우 생략하는 수도 있었다'라는 극장 관계자의 언급으로 볼 때 당시의 국가 정책으로서의 이 영화들의 상영은 대중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게다가 60년대 전국의 대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대한 뉴스의 뉴스들이 신선할 수 있었지만,TV의 보급이 대량 이루어진 대한 뉴스가 가지는 정보력은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54쪽 

어린이 관객 의식한 아동영화 방학시즌에 개봉하는 관행.  

연휴,날씨 고교야구같은 이벤트 등은 영화 흥행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었다. 특히 인기있는 스포츠 경기는 영화 관객을 감소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76년 추석시즌 중에도 박대통령 쟁탈 축구대회로 고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영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상관관계> 

55쪽 

지역편중적인 도시 공간의 변화와 날로 혼잡해져가던 교통 체증은 관객에게 60년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영화관람을 번거로운 경험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70년대 종로구와 중구의 번화가에 밀집해 있었던 개봉관에서 영화관람은 단지 영화보기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또한 이 같은 도시공간의 변화는 개봉관을 보다 저연령층의 문화향유지로 만들었으며, 70년대 이후 서울 변두리의 재개봉관이 시기적으로 상영시기의 불이익을 감소하면서도 용이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지리적인 반사이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86쪽 

극장이 정비와 단속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극장이 안전한 공적 오락공간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극장은 일종의 우범지대나 저질,퇴폐문화의 온상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상대적으로 서울 도심 주요지역에 자리잡고 오랜 동안 영화문화의 중심지로 인식되어온 개봉관보다는 재개봉관,특히 3번관이하의 하번관에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90쪽 

쇼공연 열린 문화. TV에 대한 대응전략. 대형 무대와 공연의 직접성. 

93쪽  

1970년대의 극장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특징적인 현상은 <벤허>,<황야의 7인>,<젊은이의 양지>등과 같은 과거 상영된 적이 있었던 영화들이 다수 리바이벌되어 흥행에 성공한다는 점이다.

VTR과 같은 별다른 녹화,재생장치가 없었던 상황에서 리바이벌 영화들은 마치 TV의 주말의 명화와 흡사하게 관객들이 예전에 관람했던 영화들을 보며 과거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또한, 과거의 영화들이 개봉되었을 당시 관람 기회를 놓친 영화들을 다시 관람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95쪽  

개봉관 흥행작들의 장기상영 일반적, 재개봉관 상영기간은 짧음, 흥행 영화 기간 두고 반복 상영

재개봉관 이용-도시 하위계층집단 - 자막 읽는 수고로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문화자본 외화 <한국 

106쪽 

구술사 결과 

70년대 중국권법영화의 유행. 국제와 국도 -아줌마와 방화 / 단체관람,학생들. 

137쪽 

재개봉관에 오면 필름이 여기저기 이미 잘린 상태.  

139쪽 

교외지도. 연소자 관람가인 영화도 학교에서 관람 금지. 학생들은 단체관람 때만 영화를 볼 수 있었음. 상영관 내부에 들어가 학생들을 잡아내는 광경.  

이용우(1994). '개방화'와 한국자본주의. 경제와사회 94년 여름호(통권 제22호) 

103쪽 

'개방화'논리는 김영삼 정부 때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초반부터 자본의 필요에 따라 전개되었던 산업구조 조정의 연장선상에서 제기. 

113쪽 

전경련의 대내개방의 확대요구. 민간주도경제론. 80년대 초반의 자본(기업)의 요구는 자본 활동의 자유를 위해 정부의 개입을 축소, 대외개방은 시기를 늦추어 달라는 것. 

자본의 요구는 85년 한국경제가 흑자를 시현. 통상마찰이 가속화. 통상마찰의 심화. 대외개방의 불가피성을 인식.대외개방을 민간주도경제론과 결합할 것 요구.  

유선영(2007). 동원체제의 과민족화 프로젝트와 섹스영화. 언론과 사회. 2007년 여름 15권 2호. 

19쪽  

호스티스 영화, 1970년대의 의미구조와 망 속에서 두텁게 파고들어가야 할 임상적 에피소드(clinical episode)로 간주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 호스티스영화를 사회문화적 병리현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아님. 오히려 박정희동원체제의 산물로 봐아함을 주장. 

40 tv 반공물의 인기. 

43 대중문화는 억압된 시민사회에서 시민되기를 정지당한 대중에게 부여된 전체주의적 국가에 포위된 일종의 '자치구'였다. 이 안에서 대중은 국가와 거리를 둔 사적인 개인으로서 자의식과 정체성, 욕망의 분출 같은 사사화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43 박정희체제와 영화정책은 1970년대 저질화론에서 보듯, 국책영화들의 흥행참패에서 보듯,또 호스티스영화의 성행에서 보듯 실패이다. 과민족화 프로젝트 안에서 전체주의적 인간형을 겨냥한 정신개조론, 자유주의 법체제의 형식과 폭압적,국가경영간의 모순과 괴리, 근대적 개인들의 형성과 욕망을 억압하는 합법적 검열의 비합리성, 영화를 단순히 이데올로기 기구로만 간주하는 검열관들의 주관적 소신과 판단에 의한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검열, 분할검열체제와 같은 섹스묘사에 대한 이중(43) 적이고 모호한 대응, 영화의 저질화와 불황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적 담론, 국책영화의 전반적 실패, 대중문화 영역의 확장과 산업화,리얼리티의 불온성에 대한 과민한 반응과 금기 같은 요인들이 다층적으로 작용하여 호스티스 영화라는 하위 장르를 발생시킨 것이다.- 44 

48 

대중은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적 시민이 되기보다 문화의 장에서 퇴폐와 은밀한 전복을 동시에 즐기는 문화소비자로서 향락에 탐닉하는 대중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사화의 전복성과 양면을 이루는 주체의 파편화이기도 하다. 데카당스로의 월경은 비록 전복적 계기를 함축하고 있더라도 자기파괴적이고 분열적인 주체구성의 계기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연(1995). 한국관객의 미국영화 읽기 : 문화제국주의 이론의 비판적 검토. 언론과 사회.1995년 겨울 통권 제10호. 

- 문화주의적 접근으로,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검토하기.   

이상길(2005). 1990년대 한국 영화장르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 연구 : 영화장의 구조변동과 영화 저널리즘의 역할을 중심으로.언론과 사회.봄 13권 2호. 

64쪽 

1990년대 한국영화가 순전히 산업적인 차원에서만 도약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한국사회에서 '산업'으로서 영화의 발전은 영화의 '예술'로의 전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1990년대는 영화산업의 양적 팽창,영화작품의 질적 현상이 일어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영화를 예술로서 공인하고 본격적인 감상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사회적 인식이 고양된 시기였다. 

65쪽 

1990년대 동안 영화는 일상 속에 중요한 문화자원으로 급속히 자리잡았다. 대학 내에서 '영화학'의 제도화, 영화전문지의 증가,학교나 직장, 혹은 pc통신과 인터넷 등을 매개로 활동하는 수많은 영화동호회와 동아리의 형성,지역공동체에서의 영화상영 행사 등은 확실히 1980년대까지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에 관한 지식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영화에 대한 취향은 중요한 '문화적 구별짓기'의 규준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서 공인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71쪽 

영화에 관한 지식이 '학술적'이기보다는 '저널리즘적'으로 생산,소비되고 비평활동 자체도 기자와 저널리즘 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점을 고려하면, 저널리즘이 영화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에서 결정적 인자로 작용했으라고 추정할 수 있다. 

92쪽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일반기사보다 기획/연재기사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매스커뮤니케이션 상황틀의 구속(시사성의 요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사들이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비디오가 일반화되고 케이블 방송이 도입되면서,영화나 영상문화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추정된다. 

102쪽 

영화 저널리즘의 텍스트 가운데 비평은 영화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평 담론장르의 존재 자체가 영화를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해석의 가치가 있는'대상으로서 승인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화가 하나의 학문으로 충분한 제도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저널리즘 영화비평은 영화전공자들에게 대중적 인지도 제고를 통한 상징자본의 획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권력보상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물론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성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선 저널리즘이 제공하는 비평의 공간이 충분하지 않으며, 그 대상이 원칙적으로 비전문가인 일반 공중이기 때문에 분석의 엄격성보다는 저널리즘의 글쓰기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108쪽 

1990년대 저널리즘 영화비평에서 드러나는 몇몇 특징들은 평론가 집단의 상징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담론 전략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영화는 인접 예술분야나 인문사회과학분야와의 관련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문화적으로 정당한 대상으로서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들은 다양한 발화자-주체로서의 위치를 담론 속에 투사하였다. 관객과 영화의 매개자로서 비평가(108) 의 기본적 위치(즉, '발화자-관객', '발화자-평가자'등)에 '발화자-교육자'로서의 위치를 포개놓았던 것이다.  

이상길,이설희,김지윤(2008). 스크린 테크놀로지의 다양화와 영화소비 경험의 변화  

150쪽 

영화보기/관람(viewing of films): 영화텍스트에 대한 관객의 지각과 해독 

영화수용(film reception): 그러한 관람행위를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가리키는 용어 

영화소비(film consumption): '극장가기'만이 아닌, 다양한 미디어(텔레비전,비디오,위성과 케이블, 인터넷 등)을 통한 영화의 배급,상영과 관련된 수용행위들을 아우른다.(cf.Jancovich&Faire,2003,p.13) 

184쪽 

이미지가 현상하는 형식을 규정하는 지지체로서 스크린 테크놀로지라는 용어. 그것은 미디어로서의 구분이 명확히 보여주지 못하는 스크린의 현상적인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텔레비전과 비디오는 다른 미디어로 이해되지만, 스크린문화라는 관점에서는 사실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비디오가 텔레비전,스크린을 통해서만 내용물을 시각화할 수 있는 종속적인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테크놀로지라는 용어는 미디어를 그 자체의 기술적 속성보다는,수용자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지연(2009) .한국 영화의 매체적 전이와 문화적 전용에 관한 연구 : 영미 지역 배급사 타탄(Tartan)의 DVD 브랜드 '아시아 익스트림'의 경우를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53권 2호. 2009년 4월.  

99쪽 

매체적 전이란 영국 영화 배급 구조 속에서 이들 아시아 영화들이 극장보다는 DVD 매체를 중심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영화를 DVD로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매체의 포맷의 차이를 넘어 영화와 관객이 맺는 관계,영화가 감상되는 환경, 그리고 영화의 유통과 관련된 다른 산업적 구조와 시장 구조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100쪽 

문화적 전용 : 기존의 다른 계급적,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었던 문화적 기호들을 차용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맥락에서 새롭게 의미화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또한 문화의 전 지구화 과정에서 특정한 문화적 기호나 상품이 지역적 맥락 속에서 다른 의미와 문화적인 위치를 갖게 되는 과정 역시 문화적 전용이라 볼 수 있다.    

103쪽 

비디오 내스티 현상은 영국 대중문화 속에서 VCR의 영화적 경험이 특정한 B급 장르들-외국 공포,서스펜스,폭력물-과의 친화성 속에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주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비디오 시장을 초기부터 지배했던 미국에서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와 비디오를 통해 보는 영화 목록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극장에서 보는 주류 영화와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는 영화들이 차별적으로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비디오 매(103)체가 포르노 장르와 결합하면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면 영국의 비디오 내스티의 경우 포르노 대신 폭력,공포,서스펜스, 그리고 외국 영화들로서의 이국적인 특성이 비디오 매체와 장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은경(2006). 한국 문화연구의 형성. 한국학술정보. 

제6장 저널리즘의 장과 문화연구 간의 조응과 상동 효과 

147쪽-148쪽 

1990년대 들어 중앙 일간지들에서 문화담론의 생산과 관련하여 나타난 중요한 변화 양상 중의 하나는, 기존에는 문화면 속에 함께 게재되었던 다양한 기사들이 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독자적인 지면들을 확보해 나갔(147)다는 점이다. (중략)1993년을 전후하여 문화면이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책, 종교, 과학 관련 기사들이 점차 문화면으로부터 분리되어 별도의 지면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겨레신문>에서는 1994년부터 '한겨레 책세상','영화/비디오','음악/춤' 등의 지면이 등장하였으며, <조선일보>에서도 1993년부터 '비디오','가요','영화','해외문화'등과 같이 세분화된 지면 구성이 나타났다. 

163쪽 

시장의 힘에 종속적인 저널리즘의 장은 금방 싫증을 내는 독자 대중을 붙들어두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되고 이는 새로운 현상에 집착하는 글쓰기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결국 현상의 이면에 천착하는 기회를 갖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저널리즘의 장에서 생산되는 문화비평의 다수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신간 서적 소개 등 상업적 대중문화 텍스트에 집중되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 들어 급격하게 늘어난 매스미디어 채널들은 매일 새로운 텍스트들을 쏟아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텍스트 비평은 신진 문화연구자들로 하여금 새로움을 요구하는 저널리즘의 장에 부합하면서 동시에(163) 손쉽게 담론의 대상을 전유할 수 있는 방편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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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산업-경제적 합리화-규모의 경제 그리고 미디어 기업의 복합화 현상,-범위의 경제 안에서 비디오 산업과 영화 산업의 결합. 영화 기계가 되면서, 영화 산업의 논리에 복속된 비디오. 경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