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가상의 발문을 쓰고 싶었다. 나는 사실 서른이 되기 전, 정성일에 관한 책을 쓰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책이 곧 나올 예정이란다. 놀랍게도 그렇게 오랫동안 영화평을 써 왔지만, 처음 내는 영화비평집이란다. 그와 그의 글은 우리 시대가 보호해줘야한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이 시대에, 더욱 더. 평범한 블로거의 오마쥬) 

1

 오늘, 정성일을 기억하는 자는 누굴까. '씨네클럽'을 경유하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의 추억으로 밤을 지새우는 세대들? 서강커뮤니케이션센터를 밥먹듯이 드나들며, 영화학교 서울을 기억하고, 무슨 말일지는 모를지라도, 귀하게 구한 '삐'자 비디오에 담긴 예술 영화에 환호하던 느낌을 간직하던 세대들? 나는 그 세대가 아니라서, 그 세대의 영화 문화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어릴 적, 외할머니와 함께 멀뚱멀뚱 굴렁쇠 소년을 보던 7살 소년에게 '영화'는 비디오였던 세대, 강시와 환영도사, 수라왕과 후레쉬맨, 헐크호간과 레슬매니아의 추억이 '곧 영화를 보던 시절'이었음을 고백하는 나에게, 사실 정성일의 진가를 제대로 판단한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성일을 알고 있다.  

2 

개인적으로 영화평다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제 영화저널리즘 바닥에도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영화학'의 그물 속에서, 우연히 걸린 학문적 열정의 논리로 여기저기 찔러보는 자들의 언어만이 횡행한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  지식꾼밖에 안 된다) 매년 신춘문예의 심사소감엔 논문이 아닌 영화비평을 보고 싶다는 지적이 올라온다. '영화'는 '학'이 됨으로써, 영화와 인간의 관계를 가깝게 했는가? 우리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까칠하게'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의 존재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괜한 대중과의 싸움 같고, 영화에 대한 패배주의적 시각은 이상한 '취향 존중'속에서 갈등 회피를 조장한다. 그러나, 외롭게 싸우는 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정성일이다.   

 

 

3 

야구계의 '괴물'이 류현진이라면, 영화계의 괴물은 정성일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 나온 모든 영화를 다 볼 기세로 영화로 하루를 시작하고 영화로 하루를 끝낼 것 같은 사람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기뻐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분노한다. <로드쇼>가 서서히 망해 갈 무렵에, 나는 이 세상에 가장 저급한 영화 잡지가 <로드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로드쇼>의 초창기를 헌 책으로 구입했을 때, 어색한 '격문'들이 붙어 있었다. 이 사람 뭐지? 왜 이렇게 영화에 죽니 사니 하는거야?  그는 정말 영화 때문에 살고 영화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영화에 격분하고, 영화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늘 자신이 봤던 영화에 대한 황홀감으로 지금 평하는 영화를 사유했다. 그는 지식이 영화를 죽이는 걸 싫어했고, 영화가 영화를 살리는 '소생술'에 늘 고심했다. 그리고 대중에게 제발 이 소생술을 알아달라고 간구하는 듯했다.(최근 씨네21에서의 행보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4 

그렇다고 그가 영화만 보는 인간은 아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볼 기세로 책을 '판다'. 그는 극장 밖에 일어나는 현실을 사유했고, 그것을 지독하게 영화 '안'에서 고민하려 했다.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냉소주의를 우려하기도 했고(그는 우석훈의 칼럼집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추천사에서 이 부분을 밝혔다) 지성의 흐름을 헤엄치면서, 지식의 상영관에 나오는 언어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이미지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잊지 않았다.  

5 

그를 모른다면, '키노'는 알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친구들은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백치들'이 커버였던 <키노> 몇 호를 끼고 다니며, 영화 동아리방을 들락나락거렸다. 나는 소심하게 친구들 잡지를 얻어 보다가, 알란 탐과 왕조현 사진을 선전하지 않아도, 이렇게 두터운 내용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 놀랐다.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것 같지만, 어느새 하나, 둘 보이는 그 잡지. <키노>는 악명이 높았지만, 정성일은 그 악명을 애초부터 즐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영화에 관한 '순혈주의자', '순수주의자'인가? 그는 아마 이 명칭을 싫어하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영화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저버리지 않은 채, 그는 영화가 넘쳐나고, 영화 이야기가 넘실대던 시대에 오히려 우려를 표한다. 이것은 지극히 영화광 다운 태도이다.    

"우리는 주변에 이미 수없이 많은 영화에 관한 담론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사랑과 증오가, 풍자와 자살이, 패배와 절망이 서로 뒤섞여 알 수 없는 농담(?)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드문 사람! 그리고 세상을 점령해버린 것 같은 황당무게한 테크놀로지의 천년왕국론과,근거없는 비난을 일삼는 자해극들, 게다가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모르는 속임수는 심지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키노>1995.05.영화의 '지나간'100년' 키노의 '새로운'101년 中 -

 6 

'존재'를 둘러싼 갈등은 늘 논쟁의 중심에 선다. 영화 또한 그랬다. 영화에 대한 존재론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신생 매체와 영화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왔다. 많은 이들은 이른 '수용'에 바빴지만, 정성일은 달랐다. 그는 '영화의 죽음'담론 뒤에 과연 남을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사뭇 폭력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그는 영화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의연하게 '영화의 죽음'담론에 대처한다. 그가 책에 '필사적'이라는 표현을 넣은 것은 그의 영화 인생을 안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정말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글을 써 온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때론 과격하고, 때론 눈물겹다.  너희들이 안 하면, 나라도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는 영화의 종말, 영화의 죽음을 종용하는 담론들과 투쟁하면서, 영화를 외롭고 작게 만드는 매체들과의 사투를 잊지 않았다. 가령 비디오는 '시네마'의 황홀함을 점점 앗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비디오에 스며든 그 자본의 폭력성,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존중도 없는 무자비한 절단에 분노했다. 그리고 싸웠다.  

7 

그리고 90년대 한국 영화 문화에 들어온 '컬트' 현상'의 기이함도 비판했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영화광의 덕목이 되어버린 시대를 슬퍼하며, 그는 아벨 페라라를 들먹거리는 좋아하는 '백과사전'식 영화매니아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들은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가? '진퉁'영화광과 '짝퉁'영화광의 대립? 정성일이기에 가능했던 진정성있는 문제제기였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격분하겠지만.) 정성일은 오늘날 시네필을 사유하며, '노트북 세대'의 시네필을 이야기한다. 더 이상 영화의 '서사'가 주는 흥분엔 관심이 없는 시네필, 오직 영화의 '정보'만을 흡수하고, 그 정보를 제대로 언급했는가, 아니었는가의 판별에만 관심있는 시네필, 그렇기때문에 그는 그것이 가짜 갈등이라고 말한다. 오직 남은 건 빈 덧글 끼리의 대립일 뿐. 인터넷 세대, 게임방 세대의 시네필,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VCR 세대의 시네필. 그는 지금 이 시대를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매달렸다.   

8

그는 더 나아가 당신은 영화관에 가는 것인가? 영화를 보는 것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그는 이 질문을 아주 오래전부터 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름에 영화를 보러간다고 말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무더운 여름에 도시에서 외곽지역으로 이동해서 여가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냉방장치를 갖추고 시간을 낭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찾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관에 가는 것은 서로 다른 행위이다. " 

"사람들은 자동차를 끌고 영화관에 와서 팝콘을 사고 콜라를 마시면서 영화를 소비한다.실제로 영화는 그렇게 부주의하게 볼 만큼 친절한 담론의 양식을 갖고 있는 매체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주의한 상태로 만든다. 이렇게 부주의한 관객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영화는 스스로의 장점을 포기하고 구구절절히 설명을 늘어놓아야 하며,시선의 한계-체험을 버리고 이야기를 통해 기승전결을 일러주어야 하며,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쉽사리 집중력을 상실하는 지속을 계속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해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넣어야 한다" 

                                                                           - TTL CINEMA CLUB 영화교실 2001.5.14, 영화관의 아우라?中

9 

그는 약 십오년 전, 어떤 글에서 영화평론가는 '실패한 영화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언제나 이런 고백이 자기도 모르게 스노비즘으로 빠지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그래서 이 고백은 혹시나 같은 시행착오에 빠질지도 모르는 '미지'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격려이며 서둘러 고백하며 만일 피할 수만 있다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길 기대하는 작은 희망에서이다. (중략) 

말하자면 영화평론가는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서, 순진한 영화광과 진정한 영화광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이다. 또는 '실패한'영화광이다. (중략) 이미 고다르는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불가능하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영화 그 자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물론 이런 것과 싸운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구조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하거,페미니즘을 말하고, 정신분석학을 언급하고,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실증주의를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그저 책 몇 권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중략)하지만 번번히 그 노력을 실패로 이끄는 것은 여전히 고다르의 충고였다. 영화에 관한 이론을 영화가 아니 다른 것(나의 경우에는 대부분 글쓰기에 의존하여)으로 시도할 때마다 거꾸로 글쓰기의 논리가 영화읽기와 노력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다.

                               - <비디오 무비>,1995,05. 어느 낯선 영화광으로부터 보내온 편지, 또는 영화를 다시 생각하며 中 - 

10 

다들 알만한 트뤼포의 시네필에 대한 이야기. 정성일은 시네필의 약속을 지켰다. 영화를 좋아하는 진정한 영화광이라면, 첫째, 영화를 두 번 다시 보고, 둘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는 것이며, 셋째,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는 것. 그에게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일상다반사였을 것이며,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쓴다는 건 그가 아마 신체적인 한계가 올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셋째, 그는 드디어 자신이 감독한 첫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나는 문화에 대한 충성과 열정이 퇴색된 시대에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 한 대목을 같이 나누고 싶다.  

오늘날 '문화'를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문화'란 기본적인 생활세계의 범주로서 등장한다.예를 들어,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말로 믿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을 지키는 것뿐이다(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율법을 지키는 경우 등)."내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된/치환된(disavowed/displaced)믿음을 표현하는 지배적인 양식인 듯하다. 문화적 생활양식이란, 산타클로스를 믿지는 않지만 해마다 12월만 되면 집집마다 또 공공장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닐까? - 13쪽

즉 '문화'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 '진지하게 생각하지'않으면서 실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얼그레이효과 생각 - '지칭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시대, 문화의 위상이 아닐까)과학이 이러한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 역시 과학이 너무 진짜라는 사실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근본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반문화세력,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겁도 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문화 속에 매개 없이 속해 있는 사람들,자신의 문화에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 14쪽  <죽은 신을 위하여> 中 - 

이제 영화를 '믿는 '세대는 사라지고, 영화를 '관리'하는 세대만이 남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정성일은 이러한 시대에 고집스럽게 '시네필의 존재론'을 주창한다. 그는 최근 씨네21에서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며, 동료들과 함께 고민했다. 쌓여가는 담배, 시간을 잊은 시계, 자신들에게 황홀함을 안겨다 준 감독들의 세계관을 쉴새없이 주고받기.. 이제는 보기 힘든 영화문화 속에서, 정성일은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적대와 환대의 정치학을 계속하여 시도할 것이다.  

"마무리 얘기를 하자면, 시네필이 영화에서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성립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이 영화에서 매혹이란 게 뭔지 설명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영화적 순간이란 시네필의 동의어입니다."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학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영화학이 감히 그 매혹을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순간 유명한 수술대의 교훈이 성립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 죽었어,라고 그렇게 시네필들이야말로 미라가 될 뻔한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아닌가 합니다." 

"시네필의 핵심 경험은 마법적 황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20대 때 기호학,구조주의,마르크시즘,정신분석학 책들을 열심히 봤습니다. 얻은 교훈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아무리 열심히 봐도 거기에 답이 없다는 것, 두 번째가 사실 중요한 데 이 연구들의 공통된 목표는 이 마법적 황홀함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공부를 덮으면서 하게 된 결심은 이 마법적 황홀함을 방어야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영화학에 대한 시네필들의 저항, 앞서 얘기한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방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게 공부하지 말라는 말로 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우리는 시네마틱이라는 단어로 방어하고 공격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씨네21>.2010.6.22.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中 - 

영화에 대한 믿음이 아닌, 영화 정보에 대한 믿음만이 하나의 '신앙'이자, 합리적 라이프스타일로 당연하게 자리잡은 시대에 정성일의 주장은 외롭고 또 외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없어도 잘 살 것이다. 왜냐면,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책이 아직 도착하기 전 글이라, 책 속 내용이 없는 '발문'의 취지를 제대로 못 살린 글임을 밝힌다. 책을 다 읽고, 세세한 평가를 다른 페이퍼를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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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8-10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정성일의 책이 드디어 나왔군요!! 예전에 인터뷰에서 책 낸다는 얘기는 진작에 들었던 거 같은데. 내일 다시 들어오겠습니다ㅋ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7   좋아요 0 | URL
바라님, 반갑습니다. 저도 최근에 알았네요. 구입해서 읽고 영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네요.

미지 2010-08-10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 씨 글은 거의 음악의 경지죠... 책 얼른 사야겠습니다.^^ 영화가 개봉이 아직 안 되어 안타깝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8   좋아요 0 | URL
영화가 아직 참..일반 극장 개봉이 안 되었죠? dvd라도 나왔으면 하는데..음.

stella.K 2010-08-1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는 잡지라고 해도 거의 눈문집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노무 잡지가 글이 깨알 같이 박혔던지...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는 게 정말 아쉬웠어요.ㅜ

얼그레이효과 2010-08-10 23: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터넷에 pdf파일이라도 종종 떠다니던데..이젠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집에 몇 권 있다는 것을 위안삼습니다.

dorati 2010-08-1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의 PDF들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user.chol.com/~dorati/kino 물론 99호 전부는 아니지만, PDF파일로 떠다니는 파일들은 여기가 시작이었으니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1 18:11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2010-09-1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1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헤는밤 2010-09-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받은 감동이 다시금 살아나네요. dorati 님의 고급정보도 얻어가게 되어 기쁩니다.ㅎ
제 블로그에 원문 링크하였는데 괜찮을지요? ^^ 종종 찾아뵐게요.ㅎ

까만진주씨 blackpearls.tistroy.com

얼그레이효과 2010-09-27 18: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어릴 적, 만화를 보면 자주 나오는 악당 캐릭터 중 하나는 '젊은 놈의 혈기'를 빨아먹고 영생의 길을 가려는 요괴였다. 물론 그 길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지만, 어린 시절, 젊은 놈을 먹는다고 늙은 놈이 오래 산다는 생각이 좀 신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만화'같은 일이 만화에서만 일어나리란 법은 없다.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이번 8.8 내각을 통해 주목받는 국무총리 내정자, 김태호. 그를 둘러싼 언론의 수사는 역겹고, 이 정부의 사고는 참 저급하다. '39년만에 파격 발탁된 40대 총리'라는 식의 수사, 그리고 그를 뽑은 이유가 '젊은 세대와의 소통 필요'때문이라는 정부 측의 설명. '나이(age) 마케팅'은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사실 자주 나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김연아와 빅뱅을 팔더니, 이제는 정치에서 '젊음 = 나이'라는 등식으로 국민들에게 '서비스'를 하겠다고 밝혔다. 

마치 일일드라마에서 생전 집안 일 신경 안 쓰던 남편이 그래도 아내와 자식들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 쉬는 날 앞치마를 두르고 폼을 잡으며, "내가 다 할께. 오늘은 편히 쉬세요"라며 생색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난 그래서 남편들이 꼭 요리를 할 때, 앞치마를 두르고 폼을 잡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오면 참 싫다. 꼭 그렇게 앞치마라는 기호를 우리 눈 앞에 전시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트위터 할 줄 알아요", "나도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용어 알아요"같은 말들이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미덕'이 된 것이 안타깝다. 그것이 그들이 할 줄 아는 소통, 그들이 정의내리는 '젊은 세대에 대한 소통'이라면?  

그들은 사실 '젊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암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그들의 '젊음 암기'가 영생의 길을 가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어 두렵다. (이들의 영생은 막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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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에 운동을 하러 가면, 중,고딩 친구들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는 모습을 종종 본다. 늘 궁금한 건, 그들은 왜 멋지게 침을 뱉으려 하는가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같은 대열에서 조깅하는 여자들이 지나가면, 그들의 '껄렁한'모습은 더 커진다. 어깨를 더 터프하게 움직이면서, 눈은 여자들은 안 본 척, 힐끗힐끗. 그러면서 그들은 카악,하는 소리는 절제한 채, 하얀 침 덩어리 하나를 바닥에 하나, 둘 떨어뜨린다. 입에서 조용히 떨어지는 것 보다는, 멀리 나가기 대회를 하듯, 자신의 침을 '과시형'으로 뱉는 모습. 사실 그리 나도 '유경험자'로서 낯설진 않다. 

2 

학교에 가면, 코에 난 왕여드름을 거울 앞에서 꼭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 옆에 있는 여중생 무리들이 지나가면, 나는 친구들을 따라 침을 뱉곤 했었다. 계획을 세우고 침을 뱉어서, 마음에 들어야겠다는 것보다는, 친구들이 침을 뱉길래, 따라 뱉은 것이 시작이었고, 정확히 그 친구들이 침을 뱉는 이유를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본능의 연대'라고 믿었다. 정확히 이유도 모른 채 나가는 침. 그리고 꼭 정자세보다는 어딘가 '껄렁해야'한다는 강박 아래, 뱉어냈던 침들.  

3 

깊이 생각해보면, '침'은 인간에겐 '정복과 소유'의 도구로 쓰인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도시락에 맛있는 계란옷 입은 소세지가 있으면, 침을 뱉어 '내꺼"하던, 악동 짝꿍이 생각난다. 연인의 키스는 서로가 각자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침의 교환'이 아닌가. 정복과 소유의 도구 속에서, 침이 갖는 최종 상징은 '약속'이다. 침을 뱉어, 이건 "내가 먹을 반찬"이란 약속을 하고, 연인은 깊은 키스를 통해, 서로의 타액을 나누며, "넌 내꺼"라는 약속을 교환한다.  

4 

살아가면서 아직 '침을 멋지게 뱉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대부분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침'을 뱉는다는 것 자체는 내 앞을 지나가는 그녀들에 대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현실감'안에서 이뤄진 무의식적 행동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침이 적어도 상당한 성적 지향성을 띠고 있음 또한 생각해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운동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 원 참. 이러다 저 친구들 침에 맞으면 어쩌나.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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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8-09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심리학 주제 같은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09 09:1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반갑습니다. 놀랍게도 로쟈님 덧글 보기 전, 오늘 아침 눈비비고 일어나 문득 집은 책이 <오래된 연장통>이었네요.^^

穀雨(곡우) 2010-08-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하나로 많은 걸 보셨네요. 침으로 매개된 게 생각해 보면 많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09 11:05   좋아요 0 | URL
운동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구요.^^;; 좀 엉뚱하죠? 크크.

미지 2010-08-0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잘 읽었습니다^^!
근데 얼그레이님, 침 계속 뱉다 보면 목마르지 않으시던가요?^^
애들 한 오분 간격으로 침 뱉으며 놀이터 벤치에 내내 앉아 있는 거 보노라면
울렁거리는 호기심과 함께 안쓰러움이...
침의 성적 지향성... 뭔가 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09 21:33   좋아요 0 | URL
목마르죠..^^ 뭔가 오시다니 다행이네요.ㅎ 뻘글은 안되었나봅니다.

미지 2010-08-0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 저는 알라딘 블로그 초보입니다만^^ 꾸벅, 얼그레이님 문장이 참 좋아서, 혹시 저서 내신 것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좀 세게 듭니다. 결례가 아니라면...^^

얼그레이효과 2010-08-09 22:37   좋아요 0 | URL
아고,박미지님. 저는 책은 낸 적은 없구요(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ㅡ.ㅜ), 그냥 오래 '원딩(대학원생)'으로 지내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지 2010-08-0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꼭 쓰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에게 유익한 책이 될 겁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09 23:53   좋아요 0 | URL
노력하겠습니다!
 

  

  

 

 

 

 

 

 

 

1 

<의심에 대한 옹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렇다. '의심'보다 필요한 건 '괴롭힘'이라고. "나를 괴롭혀주세요"라는 부탁의 대상은 밀리언셀러클럽의 스릴러 소설이나 끝나기 5분 전 관객의 뒷골을 땡기는 영화만 속하는 건 아니다. '학문'도 충분히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출판계를 점령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제스츄어는 무엇인가. "자, 여기 불 따끈따끈하게 피워 놨어. 저기 안락 의자 보이지? 간식도 몇 개 챙겨놓았어. 자. 이 정도면 내 이야기 들을 준비 충분하지?" 권장할만한 자세다. 하지만 그 자세가 정체된 자신의 지식을 보호하는 데 이용되어선 안 된다. 굳이 긴 이야기로 꾸미지 않아도, 자신이 세운 이념형의 논리적 조각을 잘 맞추었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과로 이 세상에 대한 '열정'을 도모하려는 건 속된 말로 '날로 먹는 것이다'. 

2 

<의심에 대한 옹호>엔 '의심'의 물질성이 없다. 저자들은 민주주의의 열정을 복원하기 위한 실천 윤리로 '의심'을 제안하지만, 여기서 '의심'은 논리적으로 잘 맞춰진 퍼즐 혹은 쌓여진 탑일 뿐이다. 즉, 그 '형식미'에서는 박수를 쳐 줄 만하다. 그러나, 그 '형식미'가 일상 속에 있는 행위자, 사람들에게 더 '친밀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점은 다른 층위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버거와 지터벨트는 내가 이 정도로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잘 정리를 해 보았으니, 제안한 이 개념, 충분히 쓸모 있지 않아?라고 전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의심을 둘러싼 담론의 역학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의심'의 대당인 믿음, 그 믿음과 확실성에 가려진 '관성화'된 사고를 고쳐보도록 하자는 '건전송'만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3 

오래전 버거는 루크만과 함께 <지식형성의 사회학>에서 사회학자로서의 사명을 밝힌 바 있다. (이 구절은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가져 왔다)

우리의 목적이 일상생활의 현실 - 더욱 자세히 말해서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유도하는 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있으며,또한 여러가지 이론적 안목에 있어서 이러한 현실이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다양한 이론적 조망으로 비추어지는가에 대하여 오로지 관심이 있으므로, 먼저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의 상식에 이용될 수 있는 현실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사회학자로서 그가 가진 소신의 일관성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나타난 그의 서술 태도를 보면, '상식의 재구성'수준에도 못 나가고 있는 듯하다.(사실 가만히 있던 '의심'이란 개념을 통한 '상식의 재구성' 이것이 저자가 노린 의도였을텐데 말이다)  

a란 사고 잘못 되었지? b란 사고 허점이 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a의 장점만 취하고, b의 단점을 피해서 c란 대안을 일상 속에서 생각해보자구. 그게 바로 내가 '의심'을 통해 추구하고 싶은 '중용의 정치'라는 거야.  

하지만, 여기엔 오직 '상식의 되풀이'만 남았다. 내가 요즘 가장 우려하는 지식 시장의 종교적 현상, 바로 '반복을 도모하는 예배의 언어'들, 그것의 넘쳐남 말이다.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기독교의 핵심에는 '반복'이 있다고 했다. 고로 기독교에 필요한 건 신자의 순결함이 아니라, 신자의 타락이다. 타락이 없다면 기독교가 갖는 '반복'의 힘. 예배당에 와서 반복적 회개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정당화를 획득할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시장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게 말해 미안하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책에서 보여주는 사고와 태도는 '나'의 지적 타락을 도모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회학적 개념과 원칙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개념 '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계보학적'탐색이 보이지 않는다.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성과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이들이 주창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이념형'을 만들어내는 정도다. 고로 이 책은 한창 사회학에 빠져든 한 대학원생의 페이퍼가 갖고 있는 정돈된 열정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정작 그 '열정'에는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4 

무엇보다 불만스러운 건, 상대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과정 자체다. 상대주의에서 발견되는 니힐리즘을 깨고,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절대성'이라는 광신을 깨기 위한 무엇의 발견. 두 저자는 "우리는 광장의 언어에 무심하지 않아"같은 제스츄어를 드는 사례 및 직접적인 몇몇 구절로 넌지시 표시해두지만, 정작 이들이 무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장'의 복잡다단함이었다. 그들은 학문의 언어가 갖고 있는 개념의 건실함을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설명'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정작 '일상생활'의 심층적인 부분들에는 '테두리식 접근'에만 머무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주창하려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자신이 독자들의 세계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에 대한 옹호>는 이 질문에 대한 선명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원칙의 검토와 확인'만이 있을 뿐, 오히려 자신이 사고하고 밀어붙이는 '원칙'에 대한 믿음이 도리어 강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의심을 '예찬'하면서, 자신들이 주창하는 그 의심 자체에 대한 '믿음'을 강화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게 바로 그들이 추구하자고 제안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건실함을 지탱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건, 앞에서 말했다시피, '의심'자체에 대한 물질성, 그것이 사회 세계에서 언어의 물질성을확보하고, 사회를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교류되고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심'자체의 진공상태가 확정된 상황에서, 그것을 위해 깔아놓은 논리적 무기들은,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에 더 가깝지, 그것이 그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윤리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의심을 제대로 옹호하기 위해선,자신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뒷골을 오싹하게 할 공포스러운 '이단적 언어의 창조와 재구성'. 그것이 주는 '괴롭히는 사회학적 태도'의 강화여야 했다. 

그들은 '맛난 밥상'의 선결 조건은,  바로 '맛있음'에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음식은 어디서 시켜먹든, 밥이야 햇반으로 하든, 일단 친절하게 밥상만 잘 차려보자라는 식의 태도가 불편하다. 정작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먹어보니, 준비한 태도에서 나오는 저자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도덕적 건강함'만이 조금 느껴질 뿐이다. 상식의 재론에 큰 일 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학자들과 상식에 너무 과장된 찬사를 보내는 시민들의 신앙 가운데, 점점 크는 건 시민들의 망각을 노리는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늘날 보편화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인 '명강의의 언어'에 들뜨고, 잊어버리면 또 그 명강의의 언어에 은혜를 받고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던 죄를 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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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니 읽을 마음이 샥~ 살아지는데요~ㅎㅎ 아, 그나저나 쓰신 글 중에서 의문사항이 있어서요..'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치는 것과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의 차이가 그렇게도 큰 것인지요? 의심에 대한 과감학 계보학적 탐색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논의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흄이 했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책이 '정치하지 않다'로 받아들이는데..맞는지요? 그리고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민주주의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요? 보편화된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EBS 명강의의 언어..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요..쓰신 글의 맥락상 이런 언어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을 획득할 수 없어 보이는데...그렇다면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 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ㅠㅠ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22   좋아요 0 | URL
아고, 부족한 글(사실 책에 대한 기대와 어긋난, 제 분노에 치우친 글)에 덧글 고맙습니다. 덧글이라 시각상으로 잘 나타나질 진 모르겠지만, 당시 제가 이 글을 썼던 마음의 상태와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yamoo님의 지적 중, '계보학'에 대한 이야긴, 푸코 쪽이었습니다. 사실 '제목'도 그랬고, (물론 출판사의 부가적인 타이틀 부각도 있었지만) '계보학적 탐색'이 갖고 있을 때, 주는 그 언어의 변동 양상이라고 할까요. '의심'이 사회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역사 속 그 단절의 순간, 그러면서 애초에 우리가 몰랐던 '의심'이라는 개념 자체의 새로운 시각을 함께 고민해보기. 사실 이런 걸 기대했었습니다. '의심'을 둘러싼 언어-지식-권력, 이것에 대한 세세한 역사적 탐색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들, 뭐 이런 것에 대한 저자들의 귀기울임을 기대했었거든요. 그런데, 책의 구조가, 이미 '의심'은 신의 의자에서 놀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은 우리가 최상의 목표로, 우리 시대의 실천 윤리로, 행동 강령으로 정해놓은 상태란 말이지" 원제가 비록 '의심 예찬'이긴 하나, 이런 예찬은 기대했던 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두번째, 교양민주주의 언어 측면에서, 요즘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지식과 지식 수용에 있어 발생하는 목회자- 양들 간의 관계라고 할까요. 사실 상식의 재론 수준에 머무는 책 자체가 갖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을 위한 목가'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이런 것에 대한 제 비판적 시각을 적어본 것인데, 고민의 세밀함이 아직 더 해, 제 진심의 강도는 아직 약한 것 같습니다.^^;;(노력해야겠습니다.) '상식화된'민주주의, '정보제공자'로 추락한 지식인들..또 그런 책들의 출간 러쉬..같은 것.(전 개인적으로 유명 지식인들 몇몇 출판사에서 짬뽕으로 이리저리 넣어, '다시,민주주의를 말한다'같은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거든요. 그런 지식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제 의견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이라는 표현은, 담론에 대한 제 생각을 넣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심 자체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술'(테크놀로지)에 의해 맺어진 하나의 양식인가, 그 양식은 시대를 거쳐가며 변해왔는가,시대의 권력자들, 지식을 소유한 이들은 '의심'을 어떻게 전유했는가, 변용시켜왔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의심'을 구성해왔는가 등등의 생각들이요. 그런데 <의심에 대한 옹호>에는 그런 시각이 없더라구요.(개인적으로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책이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같은 책을 기대했었던지라, 제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2010-08-1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함 자체의 가치 절하를 말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것과는 다른 결의 주장인데, 아직 제 생각이 채 여물지 못한 듯 합니다. 꼼꼼한 지적 고맙습니다!

2010-08-12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진지하게 잘 들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신중함은 사실 참 중요한 것인데, 저도 이 참에 다시 제 포스트 하나, 둘 돌아봤네요. 성의있는 주고 받음을 위한 다리 놓기라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절판


20세기에 들어 수립된 종교사회학에서는 근대를 종교 쇠퇴의 시기로 보려는 이런 시각을 '세속화 이론'이라고 부른다.이 이론에 따르면,과학 지식이 널리 보급되고 근대 사회제도가 신앙의 사회적 기반을 허묾에 따라 세속화, 즉 사회와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의 지속적 축소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이런 시각은 어떤 반종교적인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그 시각을 뒷받침하는 여러 경험적 자료에 근거한다(그런 자료는 대부분 유럽에서 찾을 수 있으이 의미심장하다).-15쪽

참된 다원성이 존재하는 조건은 지식사회학에서 '인지 오염cognitive contamination'이라고 부르는 용어로 풀이된다.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 행태에 바탕을 둔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뒤섞이다 보면,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된다.그렇게 '오염'이 일어나면,남들의 신념과 가치를 이상하다,기묘하다,사악하다 등으로 규정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차차,하지만 확실히,다른 사람들도 존중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그것은 앞서 당연시했던 현실 인식이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5쪽

전경과 배경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배경적 행동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거의 숙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이때 개인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반면 전경적 행동은 숙고를 필요로 한다.이렇게 할까,아니면 저렇게 할까 하고 묻는 과정이 필수적이다.-30쪽

적극적 관용과 소극적 관용을 구분 짓는 것이 유용하다.적극적 관용은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개인 또는 집단과 마주쳤을 때 순전한 존중과 개방성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반면 소극적 관용은 무관심을 나타낸다."저희들 멋대로 하라고 해."여기서 '저희들'이란 다른 신념이나 행동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용은 대체로 두 번째 유형이다.-54쪽

진리에 이르기란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상대적 포용론의 최종 국면은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며 폐기되어(84)야 한다는 입장이다.우리는 처해 있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른 편향성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며,결국 그처럼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극단적 상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고,심지어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조차 없다고 한다.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내세우는 입장-84,85쪽

인식론적 엘리트는 유일하게 진리를 담지하며,다른 모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결국 상대주의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그 엘리트이며,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91쪽

집단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도덕을 고려하게 하는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다.또한 그것은 데카당스로도 볼 수 있다.사회를 지탱하던 규범이 유명무실화되고,허울뿐이거나 숫제 조롱의 대상이 되며,누구나 남들도 그런 규범에 따라 행동하리라 믿지 않게 되는(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퇴폐적인 사회상,그것이 데카당스인 것이다.-106쪽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극단적인 불확실성도 극단적인 확실성도 위험하다.-132쪽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한다.한 가지 근본적인 요소는 '제도의 필수성 institutional imperative'이다.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도(에밀 뒤르켐의 정의를 따르면,행동,사고,감각의 전통적인 패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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