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의 형성  

박은아,우석봉(2008), <한국인이 미디어와 소비 트렌드>, 커뮤니케이션북스. 를 읽고 나서. 

주요 자료: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실시한, 전국규모 6000명의 대상. 2005년 소비자행태조사(Media&Consumer Research:MCR) 

1. 문화생활에서 '검약적 소비'라는 실천. 

2. 소비의 목적에서 '효용성 추구'와 '감성적 만족'이라는 것

:영화 소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싼 값에 영화를 보기. 영화의 물질성. 영화의 내용을 소비하지만, 그 소비 과정 속에서 투자의 정도는 과한 것? 혹은 적당한 것? 되도록 싼 것?  

합리적 소비, 여가의 합리화.

71쪽 

혼자서 혹은 함께 

"한국인의 대표 여가활동인 tv시청을 누구와 함께하는지 살펴보았다. TV를 시청하는 방식을 홀로 시청,배우자와 시청,그리고 가족과 시청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약 30%의 사람들이 혼자서 TV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가정의 TV가 개인 미디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쾌락 소비(Hedonic consumption)라는 것에 대해 

117쪽 실용적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품의 구입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백욱인(1994). 대중 소비생활구조의 변화. 경제와 사회 94년 봄호.제21호. 

58쪽 표 참고하기. 1973~1991

60쪽. "특히 개인교통비와 교양오락비,가구가사비의 지출 증가가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승용차와 오락내구재,가전내구재의 소비지출이 1980년대 하반기에 급속한 속도로 증가함에 있어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61쪽. 가정오락내구재와 가사노동을 대체하는 효과를 갖는 가정내구재를 포함한 내구재 비중은 1973년의 2.1%에서 1991년에는 6.5%로 늘어났다. 

61쪽. 노동력재생산과 관련된 상품긴요도를 기준으로 하여 각 상품을 필수재와 선택재로 구분할 경우 필수재 구성비는 1983년의 79.9%에서 1987년에는 75.3%로, 91년에는 66.8%로 감소하고 있는 반면 선택재는 1983년의 20%에서 1991년의 33.1%로 늘어나고 있다.선택재의 증가율은 1983~87년간에 23.2%가 늘어난  

62쪽 데 비해 1987~91년에는 34.3%가 증가하여 1987 이후의 증가율이 더 높다. 

내구소비재 확대 

그 이유 : 62쪽, "1980년대에 이르어 중간제계층의 일부와 노동자계급 상층에 대해서는 내구소비재 중심의 생활상의 포섭이 제한된 수준이기는 하지만 빠른 속도로 행해지고 있다. 상대적 가격안정 / 할부판매제도를 통한 소비능력증대/국내수요와 시장확대 / 포디즘적 소비규범정착 요인에 의해 확대. 

남은영(2007). 1990년대 한국 소비문화: 소비의식과 소비행위를 중심으로 . 사회와 역사 제76집. 한국사회학회. 

189쪽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내 말까지가 '소비사회의 형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는 '소비사회의 성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1인당 국민소득이 10,000달러에 도달하며 표준화와 몰개성화를 강조하는 대중소비로부터 개성화,차별화,다양화를 추구하는 소비성숙단계로의 변화가 발생했다. 따라서 1990년대 한국에서는 소비문화의 뱐화 및 식생활,의생활,그리고 주생활 영역에서 양적 소비로부터 질적 소비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91쪽 

한국사회는 1960년대 이후 진행된 급속한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고도화,개인소득의 향상으로 1980년대 이후 소비영역이 급팽창하며 대중의 소비패턴과 생활양식의 변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3저 호황(저금리,저환율,저유가)'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는 중산층의 저변 확산이 이루어지면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대중소비시대,마이카-외식문화-여가의 시대로 변화하게 된다.

193쪽 

"80년대에는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제품들이 히트상품 대열에 올랐으나 90년대의 경우 차별화된 기능과 편의성,소비자들의 고급화 및 개성화 취향에 부응하는 제품들이 히트상품으로 선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 시기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비의 글로벌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90년대에 들어 시장개방정책이 가속화되었고,가격파괴를 내세운 창고형 할인점 등장으로 인한 국내유통시장의 구조개편,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의 전반적인 소비행태의 고급화 추세가 맞물리면서 국내외 소비시장의 경계가 급속히 허물어지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호소비에 대하여. 

218-219쪽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 실질적인 소비행위는 환경에 적응하여 신속하게 변하지만, 사람들의 태도나 관심은 경제적(218)인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적인 소비행위는 현실조건에 따라 적응하여 변화하지만, 사람의 취향이나 선호는 일단 형성이 되면, 객관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인다. 

 권호영,이종원(),한국 수용자의 소득과 미디어 지출 추세에 관한 실증적 분석(1966-1997).한국방송학보 14-1호.  

분석기간 : 1966~1997.  

62쪽 

상대적 불변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였을 때 기존 미디어에 대한 지출 변화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한 매체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때 다른 매체에 대한 지출이 감소해야 상대적 불변성은 성립된다. 

62쪽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컬러 텔레비전과 VCR의 보급으로 인한 하드웨어에 대한 지출이 급격히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이 현저히 감소하는 미디어는 없었다. 소득에 대한 영화의 지출 비율이  1979년의 0.16%에서 1987년의 0.064%로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하드웨어에 대한 지출의 증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김성재(2003). 가족과 커뮤니케이션 - 가족 간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변화 - 사회연구 1호.  

92쪽. 도시 형성 시대의 가족 커뮤니케이션 

극장형 담론의 특징. 

이 구조에 해당되는 예는 극장 그 자체뿐만 아니라,학교의 교실, 콘서트홀,특히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이다. 송신자의 등 뒤에 위치한 오목한 벽과 반원형으로 분포된 수신자들을 연결하는 채널이 이 구조의 특징이다. 오목한 벽은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우산 역할을 함과 동시에 송신을 위한 확성기 기능을 수행한다. 송신자는 분배될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다. 채널은 정보 분배에 사용되는 코드의 운반체다.(전통적인 극장에서는 소리를 나르는 공기),수신자는 분배받은 정보가 나중에 계속 전달될 수 있기 위해(정보를 발전시키기 위해)분배된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이다. 

(중략) 

극장형 담론은 대화를 위해 개방되어 있고, 언제라도 다시 대화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에 원래의 정보가 수신자의 기억을 송출하 (92)는 잡음에 의해 감염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동반한다. 간단히 말하면, 극장형 담론은 분배된 정보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이 정보에 대한 책임을 떠맡게 하고 그들을 미래의 송신자로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탁월한 구조다. 이 구조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주인을 중심으로 정보가 분배되기 때문에 가부장적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부분적으로 항의가 허용되지만,가정의 주인이 정보 흐름의 중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93쪽. 

 

원형극장형 담론의 특징  

93~97쪽 요약. 

아버지는 공장에 나가 일하는 임금노동자로 변하고,어머니는 가족 구성원들의 영양과 자식들의 가정교육을 책임지며,자식들은 국가적 의무교육의 도입과 함께 학교교육의 수혜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보낸다. 이제 가족간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도시형설 시대의 아버지와 자식들 중심의 극장형 담론에서 어머니와 자식들 중심의 극장형 담론으로 변화된다. 낮에는 상품생산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밤에만 혜성처럼 나타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는 어머니가 자식들을 상대로 훈육하는 거실로 대체되고,침대 머리에서 어머니가 동화를 읽어주는 어린이 침실이 대신한다.  

이 때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가치를 형성시킨다. 이 가치는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된 재화의 획득과 증식 그리고 미화와 관련된 것이다. / 94쪽 

산업사회의 성숙과 함께 진행된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위에서 언급된 담론구조를 크게 변화시킨다. 이제 텔레비전 수상기가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한다. 텔레비전은 그림으로 암호화된 정보를 배분하는 담론 매체의 기능을 떠맡게 되고,극장형 담론의 조개를 깨트림으로써 어린이 방과 거실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사방으로 송출하는 '원형극장형 담론'의 장소로 전환시킨다. 텔레비전 화면이 동화책을 대체함으로써 문자 코드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국어는 그 위상이 낮아지고 더 이상 국가주의와 역사적 의식을 프로그램화 하지 못한다.  

이 스케치는 극장형 담론에서 오목형 벽이 제거되고,무경계 또는 '우주적 개방성'의 담론 구조를 묘사한다. 이 담론 구조의 예로는 신문,텔레비전,플래카드와 같은 소위 대중매체가 있다. /95쪽 

이 구조는 본질적으로 단 두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분배될 정보가 계획되어 있는(95) 기억으로서 빈 공간 속에서 떠다니는 송신자와,둘째 이 구조에 맞게 특별히 완성되어 정보 분배 코드를 운반하는 송출 채널들이 그것이다. 채널들이란 신문지,헤르츠 전파, 혹은 필름 등을 의미한다. -96쪽. 

97쪽 

산업화 시대에 거의 모든 가족은 원형극장담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족간의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대화는 점점 더 후퇴하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분배하는 담론이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다. 그 결과 거실의 한 가운데 놓인 텔레비전은 과거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역할과 위상을 넘겨받는다. 이로써 가족간의 대화는 사라지고 담론만이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남게 된다.  

임종수(2008). 1970년대 텔레비전, 문화와 비문화의 양가성.언론과 사회.2008년 봄 16권 1호. 

52쪽.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인쇄매체의 텔레비전 비평이 대체로 비판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는 매체간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 글 전체의 해석상의 주의를 요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특정 담론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론 그런 인식이 당대에 무척이나 설득적이었음도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73쪽. 

텔레비전은 가정 외적인 사회적 공간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 삶과 권력 관계도 크게 변화시켜 놓았다. 텔레비전은 당산나무 그늘 아내라 촌장집과 같은 전통적인 공적 담화 공간의 힘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공간을 지배하고 공론을 이끌어가던 촌장의 지위도 함께 약화시켰다. 대신 다방,전파사,약국 등에 놓인 텔레비전이 단순히 볼거리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서 새로운 공적 담화의 공간이자 주요 출처로서 대신했다.  

1970년대 영상 퇴폐주의와 부추겨진 데카당스라는 표현에 대한 생각. 

임종수(2004). 1960~70년대 텔레비전 붐 현상과 텔레비전 도입의 맥락. 한국언론정보학보.48권 2호. 

81쪽. 

텔레비전 도입의 맥락으로서 텔레비전이 위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러한 텔레비전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심리 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은 개발 연대의 유용한 수단으로서 근대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근대화의 물결에서 가장 손쉽게 개인의 삶을 근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91쪽.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신기효과는 그 자체의 신기로움뿐만 아니라 외양적 세련됨과 더불어 새로운 콘텐츠가 창출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중략)따라서 미디어의 신기효과는 확산 초기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확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창출된다고 할 수 있다. 

94쪽  

텔레비전이 본격적인 대중화 단계에 들어선 이 시기의 가장 성공적인 장르가 드라마(일일극)였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96쪽 

주류문화 편입의 기제 측면 고민. 

102쪽 

결국 1960~70년대 텔레비전 도입에는 국가권력의 발전주의 전략,텔레비전 신기효과가 보여주는 유용성,주류문화에의 편입 심리 등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는 텔레비전이 근대화라는 역동적 변화가 요구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위한 중심적 표상체였음을 의미한다. 

임종수(2003). 텔레비전 안방문화와 근대적 가정에서 생활하기.언론과 사회.2003년 겨울 12권 1호.   

110쪽-111쪽 

거실이 남긴 갑작스런 넓은 공간,갑작스런 넓은 벽면은 아래 최정호의 지적처럼, 가족의 이력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갖가지 물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대규모(110)로 발굴된 각종 문화재와 장서,사진,그리고 피아노와 같은 세련된 서양악기 역시 그 집안과 가족의 이력을 보여주는 유용한 장신구였다.여기에 온 가족이 이용하는 텔레비전이 자리잡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문화에서 낯설기 짝이 없는 대청(거실)에 텔레비전을 보는 자리라는 뚜렷한 기능이 부여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이게 거실은 가족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족실임과 동시에 주택의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이동로이자 외부 세계로 연결된 탈출구였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지극히 공적인 공간이 공존했다. 

 

 126쪽 

안방극장은 텔레비전과 사적 세계의 결합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용어였다. 텔레비전의 다른 말로 통용된 안방극장은 안방이 가족들이 공유하는 가족실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새로이 들어서는 문화주택에서의 거실 공간이 안방의 기능을 점차 대체해 오고는 있지만(이와 더불어 개별 시청화되고 있다)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안방은 한국인들이 사적으로 가장 내밀한 영역으로 지향했던 공간이었다.따라서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였다는 것은 텔레비전이 외부와 차단된 가족들만의 정서적 공동체성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 대표적인 테크놀로지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중략)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텔레비전은 사적 세계의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고 즐기는 근대 오락이었던 것이다.  

김수정(2010). 수용자연구의 해독모델과 존 피스크에 대한 재평가.언론과 사회 봄 18권 1호. 

31쪽 

중요한 것은 능동적 수용자와 수동적 수용자를 가르는 일이 아니라, 또는 수용자가 얼마나 능동적인가라는 문제보다,수용자의 능동성이 발현되는 방식과 상황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텍스트와의 교섭과정 내 어떠한 계기에서 수용자는 특정 담론을 불러 들어오게 되며, 수용자의 이해와 논리를 특정 방식으로 구성하게 되는가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용자를 본질적으로 취급할 위험이 있는 '능동적 수용자'와 '수동적 수용자'의 개념보다는, 일정 정소 습관성을 가진다고 해도 맥락과 관심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능동적 해독방식'과 '수동적 해독방식'이라는 개념화가 더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37쪽 

필자는 국내 수용자연구에서 흔히 발견되는 연구자의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관심이 수용자연구의 지평을 너무나도 이데올로기 문제로 축소시키고, 수용자의 '해독을 해독'하는데 장애로 작용한다고 판단한다. 

38쪽 

저자의 과도한 규범적 기대라는 표현에 대해 고민하기. 

39쪽  

지배이데올로기의 단순성과 복잡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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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야구 경기를 보면, 박정권 타석이 될 때마다, 늘 이택광 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선생님, 죄송합니다.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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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5-1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저의 간질간질한 기시감의 정체를 확실히 까발려주셨군요 동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2 01:13   좋아요 0 | URL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군요.^^;;
 

 

고생했어요. 숀. 부디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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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5-11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찜했어요.
고맙습니다, 이 영상 올려주셔서. 보고싶었거든요. 레슬매니아는 봤는데, 이걸 놓쳐서 내내 아쉬웠어요.

그의 경기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할거라면 저기 저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은데, 그걸 못한다는게 정말 안타까워요. 영상이라도 종종 봐야겠습니다. 흑 ㅜㅡ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50   좋아요 0 | URL
저도 종종 틀어서 본답니다. ㅜ.ㅜ 흑흑.

알로하 2010-05-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정말로 은퇴하나요? 세상에나... 마지막 게임을 봤었는데 언더테이커도 이긴 후에 예의를 표시하더라고요. 짠했는데... 정말로 은퇴할 줄이야ㅜㅜ

다락방 2010-05-11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언더테이커가 이긴 후에 예를 갖추는 걸 보고 짠했어요. ㅜㅡ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보니 더 짠하군요. 힝.
 

오랜만에 한국 문화연구 영역에서 좋은 논문이 나왔다. 그 주인공은 김수정 선생이 쓴 <수용자연구의 해독모델과 존 피스크에 대한 재평가 : 수용자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열린 논쟁을 위하여>이다. <언론과 사회>2010년 봄호에 실린, 이 논문은 지금 문화연구자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감히 생각한다.  (김수정 선생은 현대 문화연구자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본 논문의 중심 테마인 능동적 수용자론의 형성에 주요 지침이 되는 데이비드 몰리의 연구를 이론적으로 다시 파악하여 발표한, 몰리에게 큰 인상을 남긴 연구자이다. -참고로 몰리의 책을 보면, 김수정 선생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문화연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한 번 찾아보시길.)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연구가 국내에 활황을 이루면서, 과연 '한국의 문화연구는 있는가?'란 문제가 제기되었다.(이는 조한혜정, 김영민 선생 등이 강조했던, '이론의 식민화 과정과 글쓰기'와 결부된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연구자인 원용진 선생은 '술이부작'이란 표현까지 써 가면서, 해외 이론의 습득에만 능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구성/반박/재창조하지 못하는 연구 풍토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적 수사들 또한 한때 활황을 이루면서, 내가 '문화연구자들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 내부의 비판적 아티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태도 지적적/지향적 중심의 아티클'을 썼기 때문에, 확실한 현실 분석이 없었다. 고로 인상 비평에 머무른 윤리적 태도의 정립으로 마무리 될 운명에 처한 논문들이 누적되어 갔다.  

참고로 문화연구 영역은 워낙 다양해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문화연구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학문 분과 영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일례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인가?' 문화에 대한 연구(studies on cultural)'인가의 구분도 고민한다. (이러한 구분에 대한 언급은 국내 학자로는 문화연구 내 신진학자로 명명되는 이영주 선생의 논문, 그리고 해외에서는 대표적인 문화연구 지식인 크리스 바커의 책 등에 소개된다.) 그래서 언론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은, '미디어/문화연구'라는 학문 분과 명칭을 단독적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칭 자체가 때로는 미디어의 범주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를 또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기형 선생 같은 경우, 마샬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보여준 것처럼, '범미디어주의'를 표하며, 도시공간 연구로 연구 테마를 확장시키고 있다. 주로 신문,방송,뉴 미디어와 같은 우리가 쉽게 '미디어'라고 부르는 영역에 대한 저항이기도 한 이기형 선생의 연구 방식은, 국내 문화연구의 또 다른 고민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강준만 선생이 예전부터 보여준 그 노력의 결실, 최근 '간판'을 미디어로 간주하고 연구하며, 논문으로 발표하는 그 색깔 있는 주제 선택과 문제 의식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내려진 또 다른 연구적 도전이자 밝은 미래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에게(이 표현이 참 불편하지만, 학계의 보수성과 급진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위해 쓰겠다) 아니, 간판을 미디어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나?라고 반문이 들어올 수 있으나, 실제로 학문 영역은 꼼꼼하게 따지고, 논문으로서 이게 될까 성공할까 망할까의 여부를 단칼에 잘라버리거나, 기존의 것을 따라가라는 식으로 정해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이런 연구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외부적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하겠다. 다시 김수정 선생의 논문 이야기로 돌아오자. 김수정 선생의 주장은 아마 내가 예전에 빵가게재습격님과 나누었던 고민과 비슷한 것이다. 즉, 빵가게재습격님은 내가 이론을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것에서 지나치게 정치성/비판성을 강박적으로 이어붙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중한 지적을 해주셨다. 사실 이런 유연하고 올바른 지적이 있음에도, 그것을 심적으로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간은 길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기존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모순들이 점증해가면서, 발생하는 내 스스로의 당위성을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 이론에 다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었나. 이런 반성을 지적 을 통해 견고히 하게 된 것이다. 즉, 이론은 또 한 번 소비되고, 재구성/재창조될 공간,시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리석은 공부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김수정 선생은 인상적인 언급을 한다. 

   
  필자는 텍스트나 수용자의 해독을 더 부정적(negative)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비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동시에 긍정적(affirmative)평가가 꼭 대중추수주의적(populist)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40쪽)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는 것이 김수정 선생의 논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스튜어트 홀은 현대 문화연구의 창시자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해독의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면서, 텍스트와 수용자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데 노력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공부하면서, 문화주의 경향에 경도되어 있던 문화연구 내 구조주의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하면서, 영국의 대처리즘을 문화정치학적으로 비판하는 사유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전술과 활동을 진행해왔다.' 

 

즉, 스튜어트 홀이나 존 피스크 같이, 수용자 이론에 중심 토대가 되었던 학자들의 이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 국내 연구자들은 기존 텍스트를 부정적으로,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능동적이며, 그것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수동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선보였다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당연하지만, 간과되어 왔다. 고로, 국내 문화연구는 지나치게 옳은 정치적 시민의식의 상을 간주하고, 능동적수용자론을 그 상에 끼워맞춘 꼴은 아니었을까? 김수정 선생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분한 재점검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 논문의 성과는 스튜어트 홀이 말한 '반대적 해독'과 존 피스크가 말한 '저항적 해독'의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김수정 선생의 이런 지적이 나오기 이전까지 국내 연구는 이 개념을 혼용해서 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적 스탠스를 갖추고, 비판 사회이론을 강조하는 흐름 안에서, 이 '비판'이라는 단어에 지나친 경직성, 규범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한 나머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을 표출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냥 무시된 것이다. 김수정 선생은 스튜어트 홀은 텍스트에 대한 반대적 의미를 고민해보는 '양식'에 더 집중한 연구자였고, 존 피스크는, 텍스트에 대한 그 반대의 해석(내용)과 그 내용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맺는 관계에 더 고민한 연구자였다고 구분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존 피스크는 우리에게 '기호학적 민주주의'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이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 문화 연구를 통해 '즐거움'과 해독이라는 중요한 해석의 모델을 연구했다. 그는 저항과 즐거움이란 테마로 인하여,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너무 능동자들의 능력을 과대포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피스크에 대한 새로운 기념적 학술 연구가 시도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도 이 지점에 있다. 김수정 선생은 국내 연구자들이 존 피스크의 수용자 모델 이론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김수정 선생은, '능동적 수용자','능동적 수용자'우리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우리가 지나치게 수동적 수용자의 측면은 가볍게 보거나, 안일하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동적 수용자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능동적 수용자에 대한 언급을 바로 앞세웠다가는, 수용자가 텍스트를 접하는 그 복잡한 과정에서 오는 해독의 교섭 상태를 지나쳐버린다고 설명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은 특히 진보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아포리아. 현실 세계의 비판적 사유를 위해, 하나의 이론을 공부할 때, 그 이론의 당연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풍토를 꼬집을 수 있는 간접적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런 지적과 언급은 자주 /쉽게 나올 수 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또 활발하지 않다는 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론에 대한 열정을 재점검하게 만든다.  

김수정 선생이 지적한대로, 한때 한국 문화연구 계를 휩쓸었던 수용자 연구가 좀 시든 감이 없지 않다. 그것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아예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문화연구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논쟁을 위한 꼼꼼한 이론적 검토이다. 괜히 '급진'이니, '비판적'이니 라는 수사를 앞에 붙여 놓고, 문화연구 이래선 안 된다라며, 그 주장을 감싼 화려한 정치 철학 이론을 갖다 붙이는 시각은, 내가 늘 주장하는 '선도부장'역할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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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어려운 공부를 하시는군요?
남편이가 요즘 이 비슷한 공부를 하고 있어서....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중인데...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52   좋아요 0 | URL
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한국의 디자인 02: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박해천 외 지음 / 디플Biz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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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은 내부의 질서를 조율해 줄 그 무엇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조응해 등장하는 것이 바로 텔레비전이다. 일단 텔레비전은 편재적으로 존재하는 공중파의 신호를 자신의 브라운관에 집결시킴으로써, 발코니 창이 아파트 주변 환경의 여건상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던 외부 세계로의 조망을 제공한다.바로 이런 이유로 텔레비전은 거실 공간에 자리한 점유자들의 시선을 유인하는 기능을 지닌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을 때 블랙 박스에 불과하지만, 전원이 들어오고 브라운관에서 빛 입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145) 거실의 시선은 이 움직임을 외면하기 힘들다.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은 놀라운 흡입력을 발휘하여, 주사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에 시청자를 몰입시키는 것이다.-145,146쪽

안방에서 거실로 이동한 텔레비정은 바로 이러한 흡입력을 바탕으로 사물의 배치를 위한 기본 구문법을 완성해 나간다.그 구문법이란 극장의 원리다. 극장의 한편에 스크린이 있다면,다른 한편에는 관람객의 좌석이 있다.그와 마찬가지로 거실 한편에 텔레비전이 있다면,그 맞은편에는 소파가 있다.이러한 텔레비전과 소파의 대응성은 소실점을 대신해 사물 배치의 원리를 창출하고,거기에 시각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텔레비전은 더 이상 다리가 넷 달린 '목제 기구'의 형태를 흉내내기를 그만두고, 좀 더 현대적인 분위기의 단순한 플라스틱 박스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한다.-146쪽

김현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아파트가 거주공간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즉, 중산층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146쪽

올림픽이 국가 단위의 나르시시즘적 상상계를 완성하는 데 그쳤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특히 88올림픽의 예고편처럼 1984년 한여름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뜨겁게 달궜던 LA올림픽은 당시의 소년소녀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욕망을 학습할 기회를 제공했다.일단,자연스러운 몸짓을 펼쳐 보이며 개막식의 무대를 블록버스터 버라이어티쇼로 승화시킨 팔등신의 육체들이 그 시작이었다.<월간팝송>을 구독해 보던 몇몇은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 라이오넬 리치가 어설픈 브레이크댄스를 배경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기계체조식의 매스게임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이 육체의 향연은 임계점을 넘어선 흥분을 안겨주었다. / 이상 박해천, 1980년대,아파트,올림픽,나이키,공전하는 파편들 - 80년대 시각문화에 대한 몇 가지 기억 중에서 -150쪽

김희선,1989년>대우 요요 AHS-202K,위안의 정서를 만나다 중 / 모든 기억 가운데 가장 달콤한 것은 '믹스테이프'와 관련된 것이다.공테이프에 곱게 녹음된 노래들은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동량과 인내심을 수반한 '우정의 증표'와도 같았다. 기본적으로 워크맨의 녹음 기능은 그 음원-주로 라디오-을 놓치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느 날 밤, 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던 신해철의 다음과 같은 멘트 다음에 일제히 '녹음'버튼을 눌렀을 전국의 그 수많은 손가락들을 상상해 보는 일은 지금도 흐뭇한 웃음을 자아낸다."저희 방송이 무슨 뉴트롤즈 팬클럽도 아니고, <아다지오>가 신청곡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노래 시작 전후에 확실한 공백을 두고,노래 중간에 멘트를 치고 들어가는 일도 절대 없이 <아다지오>를 틀어드릴 테니, 모두 녹음 준비하십시오.그리고 다시는 신청곡 보내지 마십시오."-240쪽

김윤구,1997년 보체디비나 소프라노 스피커,오디오는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중 / 오디오는 음악만을 들려주는 기기가 아니다. 오디오는 집에서 가구의 역할도 하고 인테리어 역할도 한다.배치에 신경을 쓰다보면 오디오는 공간을 구획하는 역할도 하게 되며,때문에 사람과 공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방에 놓인 오디오와 거실에 놓인 오디오는 많은 의미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그래서 오디오는 일반적인 가전제품과는 다르며 개인 휴대용 전자기기와는 완전히 다른 상품이다. 어떤 오디오를 고르라는 것인가와 가장 비슷한 질문은 어떤 소파를 살 것인가가 될 것 같다.-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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