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야구 경기를 보면, 박정권 타석이 될 때마다, 늘 이택광 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선생님, 죄송합니다.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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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5-1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저의 간질간질한 기시감의 정체를 확실히 까발려주셨군요 동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2 01:13   좋아요 0 | URL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군요.^^;;
 

 

고생했어요. 숀. 부디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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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5-11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찜했어요.
고맙습니다, 이 영상 올려주셔서. 보고싶었거든요. 레슬매니아는 봤는데, 이걸 놓쳐서 내내 아쉬웠어요.

그의 경기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할거라면 저기 저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은데, 그걸 못한다는게 정말 안타까워요. 영상이라도 종종 봐야겠습니다. 흑 ㅜㅡ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50   좋아요 0 | URL
저도 종종 틀어서 본답니다. ㅜ.ㅜ 흑흑.

알로하 2010-05-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정말로 은퇴하나요? 세상에나... 마지막 게임을 봤었는데 언더테이커도 이긴 후에 예의를 표시하더라고요. 짠했는데... 정말로 은퇴할 줄이야ㅜㅜ

다락방 2010-05-11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언더테이커가 이긴 후에 예를 갖추는 걸 보고 짠했어요. ㅜㅡ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보니 더 짠하군요. 힝.
 

오랜만에 한국 문화연구 영역에서 좋은 논문이 나왔다. 그 주인공은 김수정 선생이 쓴 <수용자연구의 해독모델과 존 피스크에 대한 재평가 : 수용자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열린 논쟁을 위하여>이다. <언론과 사회>2010년 봄호에 실린, 이 논문은 지금 문화연구자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감히 생각한다.  (김수정 선생은 현대 문화연구자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본 논문의 중심 테마인 능동적 수용자론의 형성에 주요 지침이 되는 데이비드 몰리의 연구를 이론적으로 다시 파악하여 발표한, 몰리에게 큰 인상을 남긴 연구자이다. -참고로 몰리의 책을 보면, 김수정 선생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문화연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한 번 찾아보시길.)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연구가 국내에 활황을 이루면서, 과연 '한국의 문화연구는 있는가?'란 문제가 제기되었다.(이는 조한혜정, 김영민 선생 등이 강조했던, '이론의 식민화 과정과 글쓰기'와 결부된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연구자인 원용진 선생은 '술이부작'이란 표현까지 써 가면서, 해외 이론의 습득에만 능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구성/반박/재창조하지 못하는 연구 풍토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적 수사들 또한 한때 활황을 이루면서, 내가 '문화연구자들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 내부의 비판적 아티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태도 지적적/지향적 중심의 아티클'을 썼기 때문에, 확실한 현실 분석이 없었다. 고로 인상 비평에 머무른 윤리적 태도의 정립으로 마무리 될 운명에 처한 논문들이 누적되어 갔다.  

참고로 문화연구 영역은 워낙 다양해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문화연구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학문 분과 영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일례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인가?' 문화에 대한 연구(studies on cultural)'인가의 구분도 고민한다. (이러한 구분에 대한 언급은 국내 학자로는 문화연구 내 신진학자로 명명되는 이영주 선생의 논문, 그리고 해외에서는 대표적인 문화연구 지식인 크리스 바커의 책 등에 소개된다.) 그래서 언론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은, '미디어/문화연구'라는 학문 분과 명칭을 단독적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칭 자체가 때로는 미디어의 범주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를 또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기형 선생 같은 경우, 마샬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보여준 것처럼, '범미디어주의'를 표하며, 도시공간 연구로 연구 테마를 확장시키고 있다. 주로 신문,방송,뉴 미디어와 같은 우리가 쉽게 '미디어'라고 부르는 영역에 대한 저항이기도 한 이기형 선생의 연구 방식은, 국내 문화연구의 또 다른 고민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강준만 선생이 예전부터 보여준 그 노력의 결실, 최근 '간판'을 미디어로 간주하고 연구하며, 논문으로 발표하는 그 색깔 있는 주제 선택과 문제 의식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내려진 또 다른 연구적 도전이자 밝은 미래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에게(이 표현이 참 불편하지만, 학계의 보수성과 급진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위해 쓰겠다) 아니, 간판을 미디어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나?라고 반문이 들어올 수 있으나, 실제로 학문 영역은 꼼꼼하게 따지고, 논문으로서 이게 될까 성공할까 망할까의 여부를 단칼에 잘라버리거나, 기존의 것을 따라가라는 식으로 정해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이런 연구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외부적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하겠다. 다시 김수정 선생의 논문 이야기로 돌아오자. 김수정 선생의 주장은 아마 내가 예전에 빵가게재습격님과 나누었던 고민과 비슷한 것이다. 즉, 빵가게재습격님은 내가 이론을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것에서 지나치게 정치성/비판성을 강박적으로 이어붙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중한 지적을 해주셨다. 사실 이런 유연하고 올바른 지적이 있음에도, 그것을 심적으로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간은 길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기존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모순들이 점증해가면서, 발생하는 내 스스로의 당위성을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 이론에 다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었나. 이런 반성을 지적 을 통해 견고히 하게 된 것이다. 즉, 이론은 또 한 번 소비되고, 재구성/재창조될 공간,시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리석은 공부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김수정 선생은 인상적인 언급을 한다. 

   
  필자는 텍스트나 수용자의 해독을 더 부정적(negative)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비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동시에 긍정적(affirmative)평가가 꼭 대중추수주의적(populist)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40쪽)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는 것이 김수정 선생의 논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스튜어트 홀은 현대 문화연구의 창시자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해독의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면서, 텍스트와 수용자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데 노력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공부하면서, 문화주의 경향에 경도되어 있던 문화연구 내 구조주의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하면서, 영국의 대처리즘을 문화정치학적으로 비판하는 사유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전술과 활동을 진행해왔다.' 

 

즉, 스튜어트 홀이나 존 피스크 같이, 수용자 이론에 중심 토대가 되었던 학자들의 이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 국내 연구자들은 기존 텍스트를 부정적으로,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능동적이며, 그것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수동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선보였다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당연하지만, 간과되어 왔다. 고로, 국내 문화연구는 지나치게 옳은 정치적 시민의식의 상을 간주하고, 능동적수용자론을 그 상에 끼워맞춘 꼴은 아니었을까? 김수정 선생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분한 재점검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 논문의 성과는 스튜어트 홀이 말한 '반대적 해독'과 존 피스크가 말한 '저항적 해독'의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김수정 선생의 이런 지적이 나오기 이전까지 국내 연구는 이 개념을 혼용해서 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적 스탠스를 갖추고, 비판 사회이론을 강조하는 흐름 안에서, 이 '비판'이라는 단어에 지나친 경직성, 규범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한 나머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을 표출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냥 무시된 것이다. 김수정 선생은 스튜어트 홀은 텍스트에 대한 반대적 의미를 고민해보는 '양식'에 더 집중한 연구자였고, 존 피스크는, 텍스트에 대한 그 반대의 해석(내용)과 그 내용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맺는 관계에 더 고민한 연구자였다고 구분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존 피스크는 우리에게 '기호학적 민주주의'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이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 문화 연구를 통해 '즐거움'과 해독이라는 중요한 해석의 모델을 연구했다. 그는 저항과 즐거움이란 테마로 인하여,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너무 능동자들의 능력을 과대포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피스크에 대한 새로운 기념적 학술 연구가 시도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도 이 지점에 있다. 김수정 선생은 국내 연구자들이 존 피스크의 수용자 모델 이론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김수정 선생은, '능동적 수용자','능동적 수용자'우리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우리가 지나치게 수동적 수용자의 측면은 가볍게 보거나, 안일하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동적 수용자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능동적 수용자에 대한 언급을 바로 앞세웠다가는, 수용자가 텍스트를 접하는 그 복잡한 과정에서 오는 해독의 교섭 상태를 지나쳐버린다고 설명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은 특히 진보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아포리아. 현실 세계의 비판적 사유를 위해, 하나의 이론을 공부할 때, 그 이론의 당연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풍토를 꼬집을 수 있는 간접적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런 지적과 언급은 자주 /쉽게 나올 수 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또 활발하지 않다는 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론에 대한 열정을 재점검하게 만든다.  

김수정 선생이 지적한대로, 한때 한국 문화연구 계를 휩쓸었던 수용자 연구가 좀 시든 감이 없지 않다. 그것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아예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문화연구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논쟁을 위한 꼼꼼한 이론적 검토이다. 괜히 '급진'이니, '비판적'이니 라는 수사를 앞에 붙여 놓고, 문화연구 이래선 안 된다라며, 그 주장을 감싼 화려한 정치 철학 이론을 갖다 붙이는 시각은, 내가 늘 주장하는 '선도부장'역할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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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어려운 공부를 하시는군요?
남편이가 요즘 이 비슷한 공부를 하고 있어서....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중인데...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52   좋아요 0 | URL
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한국의 디자인 02: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박해천 외 지음 / 디플Biz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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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은 내부의 질서를 조율해 줄 그 무엇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조응해 등장하는 것이 바로 텔레비전이다. 일단 텔레비전은 편재적으로 존재하는 공중파의 신호를 자신의 브라운관에 집결시킴으로써, 발코니 창이 아파트 주변 환경의 여건상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던 외부 세계로의 조망을 제공한다.바로 이런 이유로 텔레비전은 거실 공간에 자리한 점유자들의 시선을 유인하는 기능을 지닌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을 때 블랙 박스에 불과하지만, 전원이 들어오고 브라운관에서 빛 입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145) 거실의 시선은 이 움직임을 외면하기 힘들다.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은 놀라운 흡입력을 발휘하여, 주사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에 시청자를 몰입시키는 것이다.-145,146쪽

안방에서 거실로 이동한 텔레비정은 바로 이러한 흡입력을 바탕으로 사물의 배치를 위한 기본 구문법을 완성해 나간다.그 구문법이란 극장의 원리다. 극장의 한편에 스크린이 있다면,다른 한편에는 관람객의 좌석이 있다.그와 마찬가지로 거실 한편에 텔레비전이 있다면,그 맞은편에는 소파가 있다.이러한 텔레비전과 소파의 대응성은 소실점을 대신해 사물 배치의 원리를 창출하고,거기에 시각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텔레비전은 더 이상 다리가 넷 달린 '목제 기구'의 형태를 흉내내기를 그만두고, 좀 더 현대적인 분위기의 단순한 플라스틱 박스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한다.-146쪽

김현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아파트가 거주공간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즉, 중산층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146쪽

올림픽이 국가 단위의 나르시시즘적 상상계를 완성하는 데 그쳤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특히 88올림픽의 예고편처럼 1984년 한여름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뜨겁게 달궜던 LA올림픽은 당시의 소년소녀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욕망을 학습할 기회를 제공했다.일단,자연스러운 몸짓을 펼쳐 보이며 개막식의 무대를 블록버스터 버라이어티쇼로 승화시킨 팔등신의 육체들이 그 시작이었다.<월간팝송>을 구독해 보던 몇몇은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 라이오넬 리치가 어설픈 브레이크댄스를 배경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기계체조식의 매스게임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이 육체의 향연은 임계점을 넘어선 흥분을 안겨주었다. / 이상 박해천, 1980년대,아파트,올림픽,나이키,공전하는 파편들 - 80년대 시각문화에 대한 몇 가지 기억 중에서 -150쪽

김희선,1989년>대우 요요 AHS-202K,위안의 정서를 만나다 중 / 모든 기억 가운데 가장 달콤한 것은 '믹스테이프'와 관련된 것이다.공테이프에 곱게 녹음된 노래들은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동량과 인내심을 수반한 '우정의 증표'와도 같았다. 기본적으로 워크맨의 녹음 기능은 그 음원-주로 라디오-을 놓치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느 날 밤, 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던 신해철의 다음과 같은 멘트 다음에 일제히 '녹음'버튼을 눌렀을 전국의 그 수많은 손가락들을 상상해 보는 일은 지금도 흐뭇한 웃음을 자아낸다."저희 방송이 무슨 뉴트롤즈 팬클럽도 아니고, <아다지오>가 신청곡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노래 시작 전후에 확실한 공백을 두고,노래 중간에 멘트를 치고 들어가는 일도 절대 없이 <아다지오>를 틀어드릴 테니, 모두 녹음 준비하십시오.그리고 다시는 신청곡 보내지 마십시오."-240쪽

김윤구,1997년 보체디비나 소프라노 스피커,오디오는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중 / 오디오는 음악만을 들려주는 기기가 아니다. 오디오는 집에서 가구의 역할도 하고 인테리어 역할도 한다.배치에 신경을 쓰다보면 오디오는 공간을 구획하는 역할도 하게 되며,때문에 사람과 공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방에 놓인 오디오와 거실에 놓인 오디오는 많은 의미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그래서 오디오는 일반적인 가전제품과는 다르며 개인 휴대용 전자기기와는 완전히 다른 상품이다. 어떤 오디오를 고르라는 것인가와 가장 비슷한 질문은 어떤 소파를 살 것인가가 될 것 같다.-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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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읽었을 때, 나는 어떤 흉내를 내고 싶었다. 이름하여,  

 

'세상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그 방법이 뭘까 생각하다가, 결국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생각나는대로 글쓰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코의 팬들에게 미안하지만, 조금 흉내를 내볼까 한다.  

 

세상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뉴스 검색을 해서 알 수 있는 문제를, 커뮤니티 유저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을 싫어한다.(오늘 맨유 대 첼시 경기 몇 시에요? 같은.이런 사람들 대부분, 정말 그 문제를 모르기보다는, 그냥 관심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란, 내 못된 심보가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글에 덧글로, "그냥 찾아보시면 될 것을, 뭘 이런 질문을 올립니까?"라고 까칠한 덧글을 다는 사람도 싫어한다.(질문한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는 그 태도가 싫기 때문이다.)나는 그 질문에 답글이 안 달릴 때, 결국 자신의 글을 지워버리는 사람도 싫어한다.(일단 올렸으면 친절하게 누군가 답해줄 때까지 기다려도 될 텐데, 현대인 특유의 소심함을 보는 것 같아서 싫다.)   

블로그에서 

인기지수가 반영되어 있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나서,방문자 수와 나머지 포인트들을 지웠다 살렸다 하는 사람이 싫다. 

(그래서 나는 한때 내가 싫다. 혹은 순수한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의도의 불순함을 파헤쳐보려고 괜한 프로이드 놀이를 하는 내가 더욱 싫다.)

카페에서

나는 카페에서 뻔히 자리가 몇 군데 비었는데도, 사람들 눈치 보면서 그냥 가자고 재촉하는 여자가 싫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갈수록 많이 보게 되는 그 진부한 풍경도 싫다. 더군다나 그 진부한 풍경의 주인공이 가끔 나일때는 더욱 싫다. 나는 카페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노트북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누군가가 전화했을 때, "음, 나 일중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이건 예전에 내가 적은 에세이에 그 뜻이 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의 심리를 파헤쳐보고, 뒷담화하는 내가 더 싫을 때가 많다. 

 대학원에서 

나는 오랜만에 간 학교 연구실에서 동료들을 만날 때, 내게 '졸업논문 잘 되가'라는 그 인사를 하는 동료가 제일 싫다. 대학원에서 그런 가식적인 우월함과 안정감을 확보하게 되는 인사가 '졸업논문 잘 되가'라는 것, 그리고 그 인사에 전염된 사람들은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게 더 싫다.  

- 수업 시간에 

수업 시간에 텍스트는 꼼꼼히 읽었다는 성실함을 확인받기 전에, 그 텍스트에 대한 집중적인 탐독은 접어두고, 찜찔방 대화로 바로 돌입하는 친구들의 태도가 싫다. 그들은 아감벤도 랑시에르도 하루면 다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불성실한 탐독 태도를, 성실함과 우월감으로 바꾸려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것을 간파한 교수의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엄청난 고함과 침묵을 유도하는 무반응이 아니라, 겸연쩍은 미소, 활짝 핀 미소라는 데서 그 무서움을 빛을 발한다. 하지만, 대부분 어리석은 제자들은 그 미소를 자신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혹은 그 미소의 뜻을 간파만 할 뿐, 다음에 더 날을 세운 채, 이론적 습득의 성실함 대신 자신의 지적 과시를 위한 연장을 다듬는다.  

# 다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학교 졸업 예정자인데, 자신의 높은 학점을 자랑하며, 스펙을 자랑하다가, 결국 이런 자랑 뒤에, 앞으로 교수가 되고 싶은데, 어느 대학원이 전도유망할까요라고 인터넷 커뮤니티 유저들에게 물어보는 멍청이가 싫다. (이런 것 보면, 공부머리와 인생머리는 따로 있는 듯 해서, 공부를 모욕하는 사람인 것 같아 더욱 싫다.)

- 지하철에서 

나는 지하철에서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 먹은 사람에게 젊은 놈들이 어디 이 자리를 앉냐며 큰 소리로 꾸짖는 노인들을 다 싫어한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관찰하며 책 읽기 좋아하는 내 집중된 태도를 방해하기 일쑤라 더 싫다. 다시 인터넷 커뮤니티 문제로 돌아가서, 그런 껄끄러운 문제를 올리면, "너희도 늙어봐라"는 투로 훈계하려는 '젊은 영감'들이 더 싫다. 그렇게 모범적인 친구들이 대낮에 마음에 드는 처자의 싸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한 번 가져와봤는데, 이 얼굴 평가해주세요?라고 그런 장면을 발견할 때, '젊은 영감'들에 대한 나의 증오는 배로 증가하는 것이 당연한 듯 하다.  

- 연애에 관하여

연애할 때, 왜 이리 고기를 못굽냐며 나를 타박하던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런 사람들의 첫 말이 "너 외아들이지?'일 때, 더욱 싫다.  몇 달을 주기로 연애 대상이 바뀌는 건 좋은데, 싸이월드에 상대방 사진을 듬뿍 올리는 남/여자를 싫어한다 투데이 이즈에 흐렸다가 맑았다가가 너무 자주 바뀌고, 그것이 연애 주기와 겹칠 때 더욱 싫어한다. 결정적으로 싸이월드 일촌공개도 아닌 전체공개로, 현재 사귀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발산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 극장에서 

영화볼 때, 머리가 큰 것은 용서가 되는 데, 내 뒤에서 계속 자신의 발 힘을 자랑해보려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한다. 차라리 그들이 발가락양말을 신고 꼼지락꼼지락 거리는 건 용서가 될 정도로, 그 쿵쿵거리는 묵직한 소리는 어느새 노트 긁는 소리와 함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되었다.  

- 연예인에게 

열애설 터지면, 옛날과 다르다고, 당당모드를 밝히며, 애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그 애정을 안주 삼아 오락프로그램에 나와 다 밝히는 연예인을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연예인에 대한 불만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불만은 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 야구 좋아하는 사람에게 

케이리그 서울 구장에 몇 만명 왔는데, 그 구장 내 관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무료 입장이라며, 축구 관중 많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싫다. 

- 축구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국에서 야구가 더 인기가 많아요? 축구가 더 인기가 많아요?라고 괜한 분란글 올리는 축구팬이 싫다. 

- 소설을 오랜만에 읽는다는 인문사회과학 탐독자들에게 

오랜만에 소설을 몰아서 읽는데, 소설 재미가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너무 과장된 감탄을 하는 "저는 사회과학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도장인사 하며, 그 재미를 늘어놓는 사람이 싫다. 소설을 모처럼 읽었는데, "요즘 한국 소설, 너무 밥맛이야.."라고 하는 사람도 싫다. 

 

-휴대폰 

휴대폰에 웃음 (^^)이모티콘 안 들어가 있다고,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을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웃음 표시 좀 넣으라고 구박하는 사람도 싫어한다. 그리고 말줄임표..(..)만 넣으면, 이상한 사람 기운 빠진 사람 취급하는 것도 싫어한다. 단체 문자 보내지 말라고, 협박 넣는 사람도 싫어한다. 가장 싫은 협박은,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 텔레비전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상의 흔적들이 남녀탐구생활에 나오거나, 달인에 나올 때 더 싫다.  (이 프로그램들은 일상의 발견을 점점 진부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개그로 만든다. 사람들은 공감과 진부함 사이에에서 웃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웃음의 기간은 그 프로그램들의 폐지를 유도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즉 그 프로그램들은 발견의 진부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나에게 

결국 이 싫어함의 대상에 내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을 때가 가장 싫다. 쓰고 나니, 안 풀리는 논문이나 더 붙잡고 있을 걸, 머리 푼다는 핑계로 이 잡글에 열중한 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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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달기가 무서버서...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47   좋아요 0 | URL
재미로 써 본 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5-11 23:4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냥 소심하게 글쓰기로 풀죠 뭐..ㅡ.,ㅡ ;;

웽스북스 2010-05-1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몇개 찔리는 게 있는데요. 저도 검색하면 될 걸, 커뮤니티 유저는 활동중인 커뮤니티가 없어서 안물어보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잘 물어요. 그게, 더 간편해서...(예..죄송합니다...)

그리고, 축구는 안좋아하지만, 미술관에 저는 돈내고 갔는데, 무료티켓 들고온 사람들이 절반도 넘어서 1시간 정도 기다려야 됐을 때 짜증냈었는데...(그래도 미술관은 좀 다르...지...않을까요? ㅎㅎ) 하지만 저도 공짜 티켓이 생기면 좋아해요. (하하하. 뭥미 이런...;;;;;)

아. 그러고보니 다음에는, 짜증글에 저는 이런데 괜찮아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싫다, 라고 쓰시는 건 아니겠죠? (어라. 갑자기 두려워진다. 하지만 낙장불입. 확인 누릅니다. ㅋㅋㅋ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2 09:46   좋아요 0 | URL
이런 리플 환영입니다.^^ (밤새고. 글을 확인해서. 글이 짧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ㅡ.ㅜ)

saint236 2010-05-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미나 교안을 만들기 싫어서 쉰다는 이유로 알라딘 서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일을 뒤로 미루는 내가 싫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11   좋아요 0 | URL
^^; 아, 그리고 네. 그 차(tea)의 의미가 맞습니다.^^ 평소에 얼그레이를 좋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