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학문 사회 안에서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사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만큼 "누구나 한 번 발을 담궈봤다"는 관용어구를 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 장 내부 안에서 문화연구를 돌아보자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정해져있다. 강명구, 유선영 정도가 원로에 다가가고 있다면, 전규찬, 원용진이 한때 뜨겁게 문화연구에 대한 자성적 분위기를 지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이영주와 박성일 등이 '주기적으로' 문화연구에 관한 성찰론을 논문의 형태 혹은 학술적 에세이 형태로 내놓고 있다. 여기에 이상길이 <문화연구의 아포리아>라는 아티클로 내가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의 관행적 성찰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 정도다. 이기형은 좀 다른 형태로 성찰론을 제시하는데, 즉 자신이 제시하려는 안을 하나의 대안적 연구를 통해 사례화로 만들어 놓고, 그 사례를 수행하면서 생긴 사유를 중심으로 문화연구에 현존하는 문제점들을 (우회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밝히는 편이다. 이렇듯, 문화연구를 성찰하는 자들은 기존의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목소리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제시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문화연구를 연구 성과로 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회적으로 문화연구의 부정성을 파헤친다.
그러나, 대부분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 학문 사회 내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스승의 위치에 있다면 말이다, 그들이 왜 '교육'의 차원에서 문화연구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오류는 없는지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문화연구의 기본'을 대충 깔아놓은 상태에서, "문화연구는 대개 이런 흐름이야, 알았지? 이제 할 수 있겠지?"라는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화연구의 교육적 현실이라면, 나는 여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스승의 입장에 있는 그들은 많은 문화연구 생도들이 스튜어트 홀과 레이먼드 윌리엄즈 등의 견해를 다 통달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은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엄 터너의 <문화연구 입문> 하나 달랑 읽고, 거기서 '문화연구'를 다 알았다고 자부하는 그 오만함의 팽배는 사실 지금 문화연구를 수행하는 많은 젊은 생도들에게 확산되어 있는 태도이다. 그렇기때문에 어느 세션에 가보면, 문화연구자들이 백전백패하는 것은, 늘 새로운 이론의 경연장이 열리면, 꿀먹은 항아리가 되거나 터무니 없는 수사로 덮어버린 견해로 자신의 논지를 설득력있게 포장하는 못된 방법만 터득하는 것이다. 리처드 호가트의 <읽고 쓰는 것의 효용>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문화와 사회>등의 원전을 대부분 제대로 공식적 제도 안에서 공부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화연구의 초보자들은 입문서 하나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중급반'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특히 언론학에 회의를 품고, 좀 새로운 형태로 미디어 연구를 하고 싶거나, 아니면 미디어 연구 자체에 회의를 품은 자들은 버밍엄문화연구소의 업적과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미디어,문화연구의 정전들 , 데이비드 몰리나 이엔 앙, 래니스 재드웨이 등이 누적시킨 성과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계속 '새로운 것' 타령을 한다. 이 '새로운 것'타령이 안전한 이론적 습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회의 변화와 경향'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문화연구적 성향이 연구자의 태도로 체화되는 것의 한계는, 이론적 안정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문화연구의 정전을 꼼꼼하게 읽어봄으로써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수고로움을 거부하고, 늘 근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 트렌드에 의지한다. 나는 그래서 최근 이영주, 박성일 등이 쓴 미디어,문화연구의 비판적 성찰에 대해 심각한 반발감을 갖고 있다. 왜 그들은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또 외부적 지식에 기대려 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또 스스로 문제의 굴레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수고로운 역사적 분석을 통한 논쟁의 장을 마련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문화연구의 비판적 견해, 그것도 제법 명망있고, 유력해보이는 위상으로서의 견해 한 가지를 가지고 와, 거기에 접붙이기 정도로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살피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유력한'견해를 '무력하게'전유하여 '색채없는' 관행적 성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과잉진술은 지나친 '문화연구에 대한 위기론 표출'이다. 내가 보기에 문화연구의 과거에도 위기는 없었고, 오늘날에도 위기는 없었다. 그 위기론 마저도 문화연구가 경계하는 이론의 실용적 수입으로 느껴질 정도다. 문화연구의 위기담론은 솔직히 말해서, 문화연구 내부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만한 성과가 안 나왔다는 '옹알이'의 과장이다. 즉, 문화연구가 학문 사회 안에서도 주변화되어 있고, 대중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이,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론 자체는 사실 어느 학문도 다 겪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지나치게 위기론을 '특수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위기의 텅 빈 실체 안에서, 스스로 적대를 만들거나, 혹은 적대를 과장되게 포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문화연구의 이 '없는 위기'를 다루는 위기론 자체의 주기적 표출과 과잉이, 문화연구의 지지부진한 성과보다 더 심하게 '문화연구의 종언'을 예고하는 듯하다.
문화연구의 과소진술은 문화연구를 성찰하는 자들이 문화연구 내부 안에서 그동안 논의되어왔던 견해의 싸움들을 중요한 참조점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 제시한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과 유관하다. 그들은 아감벤이니,랑시에르니 하면서 이론의 소비 시장에 우수한 소비자로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강한 반면에, 몰리 같은 이들의 견해를 너무 쉽게 '이론적 박물관'의 기념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연구를 비판할 때, 자신들이 제시한 견해가 상당히 새로운 비판적 지점에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의 시간은 순환한다. 이 순환이 주는 교훈은 비판적 태도를 단순히 허무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자들이 정작 문화연구의 텍스트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화연구자들 개인의 정치적 스탠스와 더불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진보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좌파 문화연구자들에게 제시하는 내 조언이다. 사실상 이기형이 계속 도시로 돌아가자, 미디어라는 연구 주제 범주에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확장시켜보자라며 민속지학적 연구, 현장중심적 연구를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목소리를 제시하면서 계속해서 이론의 인본주의적 과잉 전술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여기에서 이영주나 박성일,전규찬 등은 일부 만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론의 인본주의적 과잉 전술을 보면, 과거 리처드 존슨이 민속지학자들에게 내렸던 무서운 판단, 즉 엘리트적 온정주의로 문화연구를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문제제기(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늘상 들어온 비판이지만)와 묘하게 겹쳐있다. 즉, 과거에 비해 민속지학적 연구와 현장중심적 연구가 '이론적 깊이'를 갖추고 연구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에서 정작 그들이 성취하고 싶은 목적은 '연구와 결부된 운동'임을 볼 때, 그들은 운동과 연구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즉 그들이 이론적 깊이를 더하면 할수록, 이것이 운동의 전술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여전히 이러한 비판 전술 안에서 문화연구를 둘러싼 위협이자 위험은 사실상 학문 사회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의 인정투쟁이 문화연구를 발전시키는 성찰론에 교묘히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성찰론이라는 제법 과학적이며 진정성있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이것은 정말 '제스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연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런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은 요즘 들어 문화연구를 퇴행적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놓여진 것은 그냥 지금 이 상태로 문화연구를 하는 것이든지, 혹은 아예 작심하고 문화연구에 대한 철저한 내부 성찰에 돌입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런데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에서, 이런 철저한 내부 성찰이 오랜 시간 유지되려면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비판한 기원 회귀의 전략이 아니다. (나는 이영주 등이 주장했던 결국 문화연구의 문제는 신좌파적 사유의 상실이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오히려 우리는 '문화연구의 형성 시기'를 다시 탐독하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문화연구'를 창조,전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무자비한 문화연구적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과거를 탐독하면서, 거기서 걸러내야 할, 혹은 새롭게 바라봐야 할 견해들을 제시하고, 그것의 충분한 바탕 안에서 현재와의 대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과정이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젝이니 아감벤이니 하는 인기있는 현재인들과의 대화를 바로 시도,유입하려하니 문화연구는 더욱 이론의 연골이 닳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적어도 이러한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망각되었던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보물같은 성찰론을 마치 새로운 발명품 같은 (그리고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그동안 부재했던 담론이었던 듯 말하는 ) 성찰론으로 대체,포장하는 환영 효과가 계속해서 나타나리라 본다. 이것이야말로 문화연구의 문제적 이데올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