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논문이 거의 막바지 작업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짬을 내어 학회 세미나에 다녀왔다. 한국언론정보학회와 한국언론학회는 비슷한 이름을 가졌지만 조금 성향(?)이 다르다고 늘 들어왔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조금 무겁기도 하고, 거칠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한국언론정보학회의 분위기는 대학원생들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예전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제 작은 토론회에서, 내가 늘 학술적으로 존경해왔던 한 연구자의 소논문 발표를 듣고 왔다. 그는 석사 시절부터 늘 문화연구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으며,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래서 플로어 토론 시간 때 이런 내 마음을 전했고, 그 후, 그 분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나에게 그 분의 집념은 대단해 보였지만, 그 집념이 가진 유연성은 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 분과 같은 학교에서 오신 한 분의 성토도 이해가 갔다. 화해의 지점? 소통의 지점? 뭐 그런 것을 마련하는 건 사실 이상적인 게 아닐까.  

난 조금 더 급진적인 무엇을 꿈꾼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연구자들끼리의 성찰게임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바로 선언과 이론을 같이 가져 가려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론화를 통해 선언을 말하려는 자들은, 그 글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올곧게 만드는 지침서를 만들 수 있어도, 그들이 정작 아쉬워하는 어떤 부분을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차라리 그들이 그렇게 바라는 '옳은' 문화연구를 지향한다면, 선언이 주는 파장에 기댄 이론보다는, 그것과 무관한 이론을 통해, 그 이론이 주는 파장을 기반으로 한 학술적 대화가 더 건설적일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을 직접 실천해보고, 그 방식의 옳고 그름을 지적으로 적용하여,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던지. 하지만, 그런 작업도 한국의 문화연구자 몇몇이 실행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론과 선언의 관계에서 주는 그 '태도'라는 측면이, '비판'이라는 좋은 용어를 갖고 있지만, 결국 자신을 이론적 순혈주의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신은 게토화된 이론의 공간 안에 빠질지 모른다. 

이것을 깨닫는 데, 2년이 걸렸다.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내기 위해, 그 지향점을 향한 이론화의 밑받침은 엄청나게 어렵다. 차라리, 그 지향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꿈꾸는 변화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러한 글은 굳이 논문이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리고 난 이 생각을 당분간 철회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분의 그 화려한 문체, 그리고 열정적인 태도에 늘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 집념이 성장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었다.성찰과 비판이라는 좋은 개념이 다른 이에게 '죄의식 마케팅'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일단, 나는 계급을 사유한다고 해서, 다시 맑스로! 하는 구호는 반대다. 그리고 계급을 문제화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퇴색된 비판의식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나는 하드한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일부 문화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진보인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을 탓하는 지식인들도 결국 그 자신이 학술을 통해 꾀하는 현실 감각이 둔함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내게 그럼 답이 뭐요 물어본다면, 나는 맑스보다 피터 싱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대들이 바라는 진보적 문화연구가 아니겠냐라는 답을 꺼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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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4-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섣부른 생각이겠지만, 얼그레이님 글을 보면 '진보적인 이론과 절차가 진보적인 정치적 함의까지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란 문제의식과 회의에서 머물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그리고 당연히 얼그레이님은 정치적 실천이 확보되지 않는다면(최소한 연계되지 않는다면)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은 회의를 느끼시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제 느낌엔 이론 자체가 원래 그런 한계를 가진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론이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게되면(혹은 전개한다고 선언하면) 기본적으론 그 논의가 대상으로 삼는 기존 일반지식이론과 정치 자체가 '외부'에서는 그대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혜량하옵소서.) 요컨데 이론 자체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거친 경험주의가 쉬운 답이 될 수 있을 성싶지도 않고요. 쓸데없이 잡소리를 늘어놓았네요. 얼그레이님의 글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려운 문제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시니 해답이 나오겠죠. 힘네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4-20 21:20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생각 고맙습니다. 음, 이 글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진보적인'이론이 있을까란 생각을 한답니다..중요한 것은 그걸 '진보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겠지요. 빵가게님이 잘 지적해주신 부분. 이론이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게 되는 것. 이 부분은 사실 제가 대학생이 되고..그리고 대학원 들어와서..작년 까지..이론은 반드시 비판적,정치적 함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고 싶어요. 근데..공부를 하다보니..그 생각이 제 '아집'이라는 걸..요즘 느끼게 되고,,이론과 실천에 대한 차분한 관계를 모색하는 중이랍니다. 만약 제가 계속 과거의 생각을 밀어붙인다면..빵가게님 말처럼, 일반지식이론과 정치가 오히려 더 고립되는 형국이 발생하는데..이 '실천이론'이라는 것..그것 만큼 신중하게 써야 할 개념은 없는 것 같다란 자기비판을 하게 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을 너무 각박하게 인식하지 않았나..^^ 공부를 계속 할 사람으로서,,요즘 제게 어떤 인식 전환의 계절이 오긴 온 것 같습니다. 좋은 덧글 덕분에..또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4-20 21:57   좋아요 0 | URL
아이고, 별 말씀을요.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이고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인다고, 훨씬 깊은 생각을 하시네요.^^ 제 한계가 그 정도라서 그정도 내용으로만 보였는 모양입니다.^^;;; 졸업논문 잘 완성하시고요. 일교차가 심한데 감기조심하시고요.(이미 걸려있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총총합니다...
 

이틀 전, 문화연구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느꼈던 것은 교수나 학생이나 똑같은 유령에 홀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령은 한 때 나도 홀려있던 것이기도 했다. 2008년 수업 시간과 연구실에서 나는 동기들에게 '민속지학의 강령'을 외쳤다. 그것은 한때 나의 확신에 찬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그 신념, 그 강령은 무엇이었던가. "아, 우리는 삶과 동떨어진 연구를 하고 있어. 이론의 틀에 우리 너무 얽매여있는 것 아냐? 우리 삶에 더 신경을 쓰자. 우리 더 현장에 가까이 가자구!" 그런 외침이 한때나마 행복감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그 강령은 내 지성의 힘을 소모시켰다. 2009년 그때 나는 슬럼프였던 것 같다. 다들 질적연구방법론 시간에 "선생님, 우리가 기자와 다른 것이 무엇이죠?"라고 하며, 연구자 스스로의 정체성에 회의감을 표출할 때 쯤이었다. 나 또한 그 회의감 표출을 거들었지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편치 않은 것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이론에 대한 갈구'. 그러한 갈구가 바로 찾아오지 않은 것은, 상식적인 문제였다. 즉, 이론은 늘 삶과 괴리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이것만한 오류적 신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현재 내 입장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입장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세미나에서 교수들은 모두 미셸 드 셰르토의 강령에 취한 듯 했고, 너무나 상식적인 분위기에서 상식적인 멘트를 즐기며, '이론의 부정'을 쉽게 내뱉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장에 대한 눈치가 강했다. 그들은 촌스럽게 '거리(distance)'로 이론을 부정하며, 기술(description)친화적인 발언을 해댔다. 그러나 과연 이론과 기술이라는 것, 특히 민속지학자들이 늘 강조하는 그 '거리감'의 문제가 이론의 거리와 기술의 거리를 조정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시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이론이 삶과 멀리 있다는 신화는 깨져야 한다. 오히려 더 깨져야 할 신화는  삶의 '기술'이 더 그들의 삶을 가깝게 조망할 수 있다는 신화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민속지학자들이 늘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문구들이 다시 나오자 발끈한 것이다. "이론적 개입, 해석의 틀이 연구대상자들의 생동성을 죽이는 것 같습니다"라는 지적 말이다. 그것만한 진부한 문제제기는 없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이론적 개입에 눈치를 봄으로써, 민속지학자들이 결정적으로 범하는 오류가 있다.  

그것은 '기술'과 '이론'을 통해 채워진 그 현장성에 대하여, 연구자들이 자신이 세워 본 가설과 이론의 '엇나감'을 초래한, 현장 내 우연성을 마치 연구자 스스로의 성찰성으로 지나치게 신념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이론은 논문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도구적 대용물로 전락하고, 수사적 전략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서 결국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을 즐기는 자들은 문화연구의 이론이 부재하다는 관행적 지적을 즐기고 있다니. 

한국 문화연구자들, 특히 민속지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론을 설정하는 부분, 개입하는 부분에 있어 그 이론적 깊이에 대한 지점들을 더욱 심도있고 강력하게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추구가 이루어지 않으면, 민속지학은 '인본주의적 소비'에 갇혀, 연구대상자에 대한 연애편지만을 쓰는 사태를 계속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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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희대학교 네오 르네상스관에서 한국방송학회 문화연구분과 주최로, 문화연구 내 생산자 연구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나도 어제 참여를 하였는데, 생각하는 바가 몇 개 있어 잊기 전에 기록해둔다. 

발표는 두 개 였다. 

하나는, "한국 방송산업의 계급구성과 디지털 테크놀로지:6mm 디지털 카메라의 정치학" 

다른 하나는, "지식 저널리즘과 텔레비전 문화:<지식채널 e를 중심으로>"이다. 

 

1

나는 개인적으로 어제 자리가 불만이었다. 그것은 뭔가 뛰어넘지 못하는 적당히 소프트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연 문화연구 내에서 '생산'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 개념 안에서 어떤 갈등들이 있는가의 문제인데, 다들 아티클 안에서의 논의를 통해, 세세한 사례에 기반한 접근을 할 뿐, 큰 문맥을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아쉬웠다. (좀 열이 받아서, 엄청 깐 것 같은데, 다음부터는 흥분모드를 최대한 자제해야겠다)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문화연구 진영 내에서 '생산자 연구', 특히 미디어,문화연구 진영 내에서는 '방송 종사자'들 간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그 안의 동학(dynamics)가 발생되는가에 주요한 성과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오현 교수의 kbs <인물현대사> 제작진 연구, kbs <개그콘서트>스탭과 출연진 연구, 김영찬 교수의 kbs <연예가중계>제작진 연구, 좀 논의를 확장시켜, 김예란 교수의 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증가한 소위 '문화백수'등을 포괄하는 문화예술가들의 삶 연구, 임영호교수의 <에로 영화 감독의 생애사>연구 등등이 있었다. 

이러한 '생산자 연구'의 성과들 아래서, 김동원 박사가 발표한 <6mm 디지털 카메라의 정치학>은 기존의 논의들보다 비판적 정치경제학적 틀이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다고 볼 수 있고, 이영주 교수가 발표한 <지식 저널리즘과 텔레비전 문화>는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을 통해 지식정보사회에서 미디어가 추구하는 '지식의 구성과 배치'그것에 관련된 인간의 감각 구조를 문제화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이 사이에 개입되어야 할 '문화연구의 전유 전략'이 논의가 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화연구에서 '생산'을 둘러싸고 어떻게 이야기 되어 왔는가는 이미 90년대 중반 니콜라스 간햄과 로렌스 그로스버그 간의 논쟁이 있었다. '문화연구'의 소위 '능동적 수용자 이론'에 기반한 '미국적'문화연구와 그것에서 내재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에 대한 누적된 성과들이 지나치게 '탈정치적'이 아니냐는 비판론이 대두되었고, 니콜라스 간햄은 그래서 문화연구가 '하드한'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렌스 그로스버그는 간햄에게 "간햄 자네는 문화연구가 아예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이 부재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니다. 문화연구는 예전부터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문화적인 것'의 개입을 통해 어떤 급진적인 '정치경제학'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기원적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반론과 문화연구의 탈정치성에 대한 반론을 동시에 제시했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생각으로 돌아가 

그렇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하여 문화연구의 원로들이 아예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을 버렸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단 알튀세르를 비롯하여 이른바 '경제 결정주의'에 관한 사고들을 처음부터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논의의 참조점이었고, 그 참조점 안에서 경제 결정주의를 넘어서는 문화적인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로스버그는 결국 간햄에게 잊혀진 역사를 다시 한 번 상식선에서 상기시켜줬던 것 뿐이나, 과연 그로스버그가 주장한 '문화연구적'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은 무엇인가에 대해 속시원하게 생각을 털어놓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제 세미나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았고, 이론적 논의들을 회피했다. 나는 이 점이 불만이었다. 

6MM 디지털 카메라의 정치학은 하드한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의 원류로 돌아가, 에쓰노그래피 형식을 통해 디지털 카메라가 그것이 방송 조직 내 계급 구성과 노동의 분할과 그 인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 아티클은 경제결정주의와 기술결정주의의 모호한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특히 내가 묻고자 했던 건 이 아티클이 기술결정주의를 저자 스스로 정작 배격한다고 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기술결정론적으로 6MM카메라의 '효과와 영향'이 사회의 임팩트보다 더 있다는 것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전유에 대한 측면이 이상하게 고리가 연결이 잘 안되는 느낌이 들었다.  

플로어에서는 이 논문이 너무 지나치게 이론적 해석틀에 연구참여자들의 디스크립션을 끼워맞춘 것이 아닌가라고 반론을 제기했는데, 나는 사실 그 입장에는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문화연구자들, 특히 민속지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론적 개입에 너무 눈치를 많이 보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연구 가설은 이렇게 세웠는데, 알고보니 이게 아니더라고 하는, '우연적 효과'를 이른바 연구자의 성찰성이라는 개념으로 치환시켜 '자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 뭔가, 이론은 결국 '수사'로 전락하라는 말인가.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오히려 이론적 개입을 통한 적극적 해석을 좀 해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자. (다들 민속지학에 있어 지나치게 타인의존적이다.) 

그렇지만, 내 반론 자체가 에쓰노그래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또 아니었는데, 아마 전달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소유, 계급구조 이런 것에 너무 천착하여 보는 이론적 해석틀 자체가 생산자 내부의 생동성을 죽이는 게 아닌가라는 몇몇 반론에 대해,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동안 '민속지학'연구를 통해서 가장 많은 문제제기가 되었던 것은 소위 권력의 힘 자체가 간과된, '그들만의 하위문화를 인정하자'는 수평적 차원의 연구가 범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 생각에 동의를 하는 차원에서, 지금 '비판적 패러다임'이 죽은 미디어 연구 내에서 미디어문화연구가 갖는 '정치성'의 기획을 살리기 위한 외부적 요청 하에서 생산자 연구의 정치성은 국가-기업-개인의 모순을 파헤치는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수평적 차원'의 연구를 위한 이론적 접근의 지나친 겸양을 갖다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또 다른 맥락의 '(탈정치적)능동적 생산자 연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능동적 수용자 이론'이 공격받아온 부분을 살짝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술책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생산자연구 안에 들어가 있는 '권력 관계'의 배치와 구성은 보다 급진적인 사유를 동원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속지학이라는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니나, 그 안에서 이론적 개입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다만, 이런 '강한'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 자체를 비롯해, 이런 이론적 개입이 인본주의적으로 전유되고, 도덕적으로 소비되는 것, 엘리트적 온정주의로 갈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 개념을 통해 정치 미학으로서 매체와 그것을 다루는 생산자의 기획 안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정치적 잠재태를 제안하는 아티클은 '소프트한 수사'아래 가장 급진적인 해방의 기획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을 좀 더 신중하게 썼어야 할 것 같고, 이것이 빌렘 플루서, 키틀러, 맥루언 같은 사람들의 매체 철학 기획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의 접점 찾기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글을 포함하여 두 아티클이 준 소중한 교훈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 내부의 기술과 지식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재배치하는가의 문제는 계속되는 관건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처음엔 '혁명'적 의미로 그 숭고의 대상이 되었다가, 사회적 전유를 통해 '탈기능화'의 과정을 겼고, 지식은 '비지식화'의 위치로 내려간다는 요지가 두 아티클의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이 사회적 전유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바로 그게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하는 문화연구의 쟁점 그리고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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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낳은 중요한 성과를 '시민의 자기계발'에 두는 것은 이 연구가 가진 핵심을 얕게 훑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을 뛰어넘는 이 연구가 제시한 잠재적 중핵은, '기업문화'가 가지고 있는 전략.기업이라는 영역 안에서,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종교학,철학,역사학, 문학 등등의 지식이 자본주의 논리에 맞춰 '문화'라는 항을 통해 재구조화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문화라는 항을 통해 지식을 재구조화하는 전략은 새삼 새로운 전략은 사실 아니다. 다만, 더 진화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진화는 대략 2단계로 진행되는 것 같다.

 1단계

우리가 이런 사례에서 너무나 잘 떠올리는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의 수작 <혁명을 팝니다>가 제기한 문제처럼, 자본주의는 '저항'과 '혁명'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잠재태를 '문화적 상징주의'로 재현하면서, 그것을 절묘하게 소비 사회의 틀로 편입시켰다. 이를 통해, '실체적 적대'는 '문화적 적대'와 혼동되었다. 더불어 '실체적 저항'과 '문화적 저항'의 조합은 시험대에 올랐다.자본주의의 이러한 '문화적 상징주의(Cultural Symbolism)'에 대하여, '반문화주의자'를 비판하는 이들은, 과연 어떤 변화를  꿈꾸어야 하는가의 딜레마를 제기했다.  

2단계 

서동진이 '자기계발 비판 담론'을 통해 중요하게 지적했듯이, 국가와 '자본'으로 대변되는 기업의 전략, '자기계발'전략이 어떻게 지식을 재구조화하는가의 문제다. 이 구조의 문제 틀 안에서, '창의력'이라는 개념은 순수한 진공 상태에 머무를 수 없었고, 이러한 개념의 물질성이 시민 영역의 생활상에 진입하면서, 지식은 하강하였지만, 지식의 하강과 맞물린 딜레마는, '창의력'이라는 개념이 자본에 경도되면서 생성된 '라이프스타일 성'지식의 범람을 제시했다. 이 생활 양식 속에서, 지식을 둘러싼 테마는 '생산 결핍'을 동기화하여,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기 확신, 자기주도성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가상적 내면 공간'을 마련했다. 이 공간은 한 신체 안에서 움직이며, 지식은 이 공간의 융성함을 촉진하기 위한 유연한 에너지로 작용한다. 지식은 곧 무한한 결핍을 원동력으로 삼아, 개인의 일상을 제약한다. 그리고 '창의력'이라는 개념이 진공상태를 깨고 자본중심적 경향의 모토로 강화되었듯이, 이제 '일상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문화주의적 발상'에 착안한, 인정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넘어, 자본의 진화된 책략 안에서, 그 나름대로의 섬세함을 자가-계발하고 있다. 

내가 2단계를 넘어 2.5단계 차원에서 고민하는 것이 바로 '경영인문학'의 도래다. 사실 이 용어가 널리 쓰여지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있는 용어인지 모르겠으나, 몇 년 전부터 한 유명 원로 지식인의 <ceo를 위한 인문학>등의 강좌가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 스티브 잡스가 좋아하는 사람이 블레이크 같은 문학가라는 점을 종종 떠올리게 하면서, 이런 '경영인문학'의 확산이 낳는 오늘날 현대자본주의의 전략을 심층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2.5단계인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자기계발 담론'의 분석 기획 방향은 여전히 시민들의 일상성에 침윤된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적 개념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수용자 연구'로 정리될 수 있다면, '경영인문학'연구는 기업의 리더쉽과 그 리더쉽을 발휘하는 주체와 연관된 네트워크 체제가, 어떻게 인문학적 지식을 재통합, 재구조화시키는가라는 '생산자 연구'를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구를 고민하는 차원은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같은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이건희가 평소 많은 양의 비디오를 본다더라, 영화광이라더라 정도의 가십을 조금 더 깊이 파헤치는 정도로 가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1인의 카리스마 리더쉽을 바라보는 차원을 부연하는 '부연적'지식의 개입이 아니라, 오늘날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로 대변되는 기업가들의 두뇌 안에 들어가있는 전략이, 갈수록 삶의 영역과 친밀해 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상성의 긍정적 측면과 맞닿는 전략의 개발을 통해, 그러한 기업가들의 두뇌 안에서 전유되는 지식의 성향들 자체가 '문화적'으로 친밀하게 '테크놀로지'속에 스며들어간다는 점의 주목은, '경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지식친화적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경영인문학 비판'은 특히 기업문화의 구조안에서 경영자들과 지식인들이 어떤 관계 안에서 갈등하고, 서로 조합을 맺는지에 대한 중층 결정점을 잡을 수 있다는 점. 즉 '경영인문학'을 가르치는 자들의 커리큘럼을 통해, 우리는 그 강의를 배우는 사람들의 입장과 그 강의를 직접 수행하는 자들의 입장을 서로 비교분석할 수 있다.   

+ '서동진'의 '자기계발 담론'이 운동의 전술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되려면 

나는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둘러싼 반론을 몇몇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확인하면서, 그들이 서동진이라는 아이콘을 갖고, 상당한 '운동의 전술'을 이 책이 강조하는 '자기계발'개념과 엮어보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들이 '운동가'서동진에게 기대했던 '운동적 전술'로서의 자기계발 전략에 대해 왜 그리 모호했는가 같은 '책망하는 뉘앙스'가, 얼마나 이 책이 갖고 있는 중핵 혹은 잠재성을 갉아먹는 짓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무조건 시민의 '자기계발'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진화된 구조주의'다. '진화된 구조주의'안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무조건 간과하는 구조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구조주의. 개인의 능동성에 문을 열어놓은 듯한 구조주의. 이 구조주의의 틀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에 너무 닫힌 채로, 그것을 일상적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시민적 삶의 차원 안에서 이른바 '학문적으로 '소비'하는 연구를 넘어서야 한다. 지금 그 책에 운동적 전술을 갈구하는 자들이 잡아야 할 방향타는 오히려 시민의 차원을 넘어 기업의 전술에 대한 고민의 심화가 아닐까. 이른바 기업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말이다. 더 깊은 문제, 문제를 생산하는 문제적 주체(기업)들에 '자기계발'의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진정 필요한 '운동적 전술'이라고 본다. 고로, 다시 문제는 '일상성'이라는 개념을 더욱 더 섬세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계발하게 된 매개는, 기업 경영가를 비롯해 지식을 구성하는 기업 주체들의 지식 재배치 작업이다. 베버식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대한 언급을 넘어, 단순히 지식이 부연적 기능으로 기업 조직의 엘리트의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것을 넘어, 지식 자체가 어떻게 기업가 주체들의 생산 전략에 재구성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과정 안에서 오늘날 인문학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어떤 순응과 대립의 역학을 만들어가는지를 조망해봐야할 것이다.   

문제는 기업 주체들의 반발이다. 그들은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지식 섭취 과정을 단순히 일상 안에서 편하게 구현하는 스타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은 그 스타일의 이면을 넘어, 기업 주체의 지식 섭취 -> 조직 네트워크 안에 확산,분포, -> 내부 논의되는 과정과 그 생산물이며, 여기에 우리가 '비판적이며 성역이라고 여겼던' 진보적 지식인들의 메시지들은 기업 주체들의 가면에 선함을 덧씌워주는 전략으로 자리잡는다.  

공부라는 것을 하는 우리들에게 정녕 지식은 우리들의 편이었다는 희망은 점점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이 적극적 회의주의에 기반한 도전적 물음, 사회학적 사유를 좀 오랫 동안 고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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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ot 2010-02-1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 제목이 아무래도 '자기계발의 의지'이다 보니 그 부분에 많이 천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책의 목적 자체는 거기서 더 나아가잖습니까. 결국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작업이구요. 그러나 실은 저도 '경영 인문학'이 과연 후속논의의 주제가 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탁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도 좀 더 밀고 나가서 특히 교육 부분에서는 어떤 분석이 가능할지 기대해보고 있습니다. 물론 책에서 어느 정도 다루고는 있지만 단지 담론 형성 과정에서 그 맥을 따라가는데 그쳤다고 보고, 현재 상황과는 아무래도 좀 유리되어 있지요. 그 시간적, 과정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작업들이 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덧. 그러고보니 네트에 재미 있는 서평 하나가 떠나니더군요. 본 책에도 인용되는 공병호 씨께서 서평을 쓰셨는데 그렇게도 수용할 수 있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한낮 2010-0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브 잡스 운운하며 '시詩'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책도 나왔군요.
 

한국 학문 사회 안에서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사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만큼 "누구나 한 번 발을 담궈봤다"는 관용어구를 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 장 내부 안에서 문화연구를 돌아보자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정해져있다. 강명구, 유선영 정도가 원로에 다가가고 있다면, 전규찬, 원용진이 한때 뜨겁게 문화연구에 대한 자성적 분위기를 지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이영주와 박성일 등이 '주기적으로' 문화연구에 관한 성찰론을 논문의 형태 혹은 학술적 에세이 형태로 내놓고 있다. 여기에 이상길이 <문화연구의 아포리아>라는 아티클로 내가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의 관행적 성찰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 정도다. 이기형은 좀 다른 형태로 성찰론을 제시하는데, 즉 자신이 제시하려는 안을  하나의 대안적 연구를 통해 사례화로 만들어 놓고, 그 사례를 수행하면서 생긴 사유를 중심으로 문화연구에 현존하는 문제점들을 (우회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밝히는 편이다.  이렇듯, 문화연구를 성찰하는 자들은 기존의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목소리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제시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문화연구를 연구 성과로 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회적으로 문화연구의 부정성을 파헤친다.  

그러나, 대부분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 학문 사회 내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스승의 위치에 있다면 말이다, 그들이 왜 '교육'의 차원에서 문화연구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오류는 없는지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문화연구의 기본'을 대충 깔아놓은 상태에서, "문화연구는 대개 이런 흐름이야, 알았지? 이제 할 수 있겠지?"라는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화연구의 교육적 현실이라면, 나는 여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스승의 입장에 있는 그들은 많은 문화연구 생도들이 스튜어트 홀과 레이먼드 윌리엄즈 등의 견해를 다 통달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은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엄 터너의 <문화연구 입문> 하나 달랑 읽고, 거기서 '문화연구'를 다 알았다고 자부하는 그 오만함의 팽배는 사실 지금 문화연구를 수행하는 많은 젊은 생도들에게 확산되어 있는 태도이다. 그렇기때문에 어느 세션에 가보면, 문화연구자들이 백전백패하는 것은, 늘 새로운 이론의 경연장이 열리면, 꿀먹은 항아리가 되거나 터무니 없는 수사로 덮어버린 견해로 자신의 논지를 설득력있게 포장하는 못된 방법만 터득하는 것이다. 리처드 호가트의 <읽고 쓰는 것의 효용>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문화와 사회>등의 원전을 대부분 제대로 공식적 제도 안에서 공부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화연구의 초보자들은 입문서 하나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중급반'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특히 언론학에 회의를 품고, 좀 새로운 형태로 미디어 연구를 하고 싶거나, 아니면 미디어 연구 자체에 회의를 품은 자들은 버밍엄문화연구소의 업적과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미디어,문화연구의 정전들 , 데이비드 몰리나 이엔 앙, 래니스 재드웨이 등이 누적시킨 성과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계속 '새로운 것' 타령을 한다. 이 '새로운 것'타령이 안전한 이론적 습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회의 변화와 경향'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문화연구적 성향이 연구자의 태도로 체화되는 것의 한계는, 이론적 안정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문화연구의 정전을 꼼꼼하게 읽어봄으로써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수고로움을 거부하고, 늘 근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 트렌드에 의지한다. 나는 그래서 최근 이영주, 박성일 등이 쓴 미디어,문화연구의 비판적 성찰에 대해 심각한 반발감을 갖고 있다. 왜 그들은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또 외부적 지식에 기대려 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또 스스로 문제의 굴레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수고로운 역사적 분석을 통한 논쟁의 장을 마련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문화연구의 비판적 견해, 그것도 제법 명망있고, 유력해보이는 위상으로서의 견해 한 가지를 가지고 와, 거기에 접붙이기 정도로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살피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유력한'견해를 '무력하게'전유하여 '색채없는' 관행적 성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과잉진술은 지나친 '문화연구에 대한 위기론 표출'이다. 내가 보기에 문화연구의 과거에도 위기는 없었고, 오늘날에도 위기는 없었다. 그 위기론 마저도 문화연구가 경계하는 이론의 실용적 수입으로 느껴질 정도다. 문화연구의 위기담론은 솔직히 말해서, 문화연구 내부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만한 성과가 안 나왔다는 '옹알이'의 과장이다. 즉, 문화연구가 학문 사회 안에서도 주변화되어 있고, 대중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이,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론 자체는 사실 어느 학문도 다 겪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지나치게 위기론을 '특수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위기의 텅 빈 실체 안에서, 스스로 적대를 만들거나, 혹은 적대를 과장되게 포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문화연구의 이 '없는 위기'를 다루는 위기론 자체의 주기적 표출과 과잉이, 문화연구의 지지부진한 성과보다 더 심하게 '문화연구의 종언'을 예고하는 듯하다. 

문화연구의 과소진술은 문화연구를 성찰하는 자들이 문화연구 내부 안에서 그동안 논의되어왔던 견해의 싸움들을 중요한 참조점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 제시한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과 유관하다. 그들은 아감벤이니,랑시에르니 하면서 이론의 소비 시장에 우수한 소비자로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강한 반면에, 몰리 같은 이들의 견해를 너무 쉽게 '이론적 박물관'의 기념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연구를 비판할 때, 자신들이 제시한 견해가 상당히 새로운 비판적 지점에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의 시간은 순환한다. 이 순환이 주는 교훈은 비판적 태도를 단순히 허무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자들이 정작 문화연구의 텍스트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화연구자들 개인의 정치적 스탠스와 더불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진보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좌파 문화연구자들에게 제시하는 내 조언이다. 사실상 이기형이 계속 도시로 돌아가자, 미디어라는 연구 주제 범주에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확장시켜보자라며 민속지학적 연구, 현장중심적 연구를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목소리를 제시하면서 계속해서 이론의 인본주의적 과잉 전술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여기에서 이영주나 박성일,전규찬 등은 일부 만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론의 인본주의적 과잉 전술을 보면, 과거 리처드 존슨이 민속지학자들에게 내렸던 무서운 판단, 즉 엘리트적 온정주의로 문화연구를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문제제기(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늘상 들어온 비판이지만)와 묘하게 겹쳐있다. 즉, 과거에 비해 민속지학적 연구와 현장중심적 연구가 '이론적 깊이'를 갖추고 연구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에서 정작 그들이 성취하고 싶은 목적은 '연구와 결부된 운동'임을 볼 때, 그들은 운동과 연구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즉 그들이 이론적 깊이를 더하면 할수록, 이것이 운동의 전술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여전히 이러한 비판 전술 안에서 문화연구를 둘러싼 위협이자 위험은 사실상 학문 사회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의 인정투쟁이 문화연구를 발전시키는 성찰론에 교묘히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성찰론이라는 제법 과학적이며 진정성있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이것은 정말 '제스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연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런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은 요즘 들어 문화연구를 퇴행적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놓여진 것은 그냥 지금 이 상태로 문화연구를 하는 것이든지, 혹은 아예 작심하고 문화연구에 대한 철저한 내부 성찰에 돌입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런데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에서, 이런 철저한 내부 성찰이 오랜 시간 유지되려면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비판한 기원 회귀의 전략이 아니다. (나는 이영주 등이 주장했던 결국 문화연구의 문제는 신좌파적 사유의 상실이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오히려 우리는 '문화연구의 형성 시기'를 다시 탐독하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문화연구'를 창조,전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무자비한 문화연구적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과거를 탐독하면서, 거기서 걸러내야 할, 혹은 새롭게 바라봐야 할 견해들을 제시하고, 그것의 충분한 바탕 안에서 현재와의 대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과정이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젝이니 아감벤이니 하는 인기있는 현재인들과의 대화를 바로 시도,유입하려하니 문화연구는 더욱 이론의 연골이 닳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적어도 이러한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망각되었던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보물같은 성찰론을 마치 새로운 발명품 같은 (그리고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그동안 부재했던 담론이었던 듯 말하는 ) 성찰론으로 대체,포장하는 환영 효과가 계속해서 나타나리라 본다. 이것이야말로 문화연구의 문제적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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