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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윤리적 소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중이다. 덕분에 화장품 가게나 커피숍 등에 걸린 윤리적 소비에 관련된 카피 / 이미지들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윤리적 소비에 관한 서적이 국내에도 꽤 출간되었다. 대부분 윤리적 소비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책들이기 때문에, 개념 '설명', 관련된 현상 설명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천규석 씨처럼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보는 서적 또한 있다.
외국의 경우 예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회학자, 경제학자, 문화연구자 들의 견해들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특히 푸코의 '통치성'이론을 바탕으로, 윤리적 소비가 '자유의지'를 가장한 새로운 통치의 형식으로 시민들의 삶에 다가가고 있다는 견해가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역시 '통치성'론의 현대적 개입은, 사람들로부터 "뭘 이런 것까지 까고 있소?"라는 멘트, "너무 과장된 음모론의 일환이 아니오?"라는 의심을 받기 좋은 것이 사실이다) 비단 통치성론의 한계라고만 한정지을 수 없겠지만, 통치성론을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은 바로 기업을 '선과 악'의 틀에 종속시키는 것이다(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악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으로 인해 윤리는 상황들의 개별성을 사고할 수 없다"는 알랭 바디우의 지적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고는 '윤리적 소비' 안에서 윤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보다 입체적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고로 윤리적 소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해해야 할 윤리는 소비 행위를 통해 지향하는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로만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는 어렵다. 좋은 일 하고 있는 것 아니오?라고 하는 질문에 화려한 비판으로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소비가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은 듯한 현실에서, 비판은 이른 음모론이 될 수 있는 한계 또한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국내의 논의를 보면, 윤리적 소비가 개인의 일상에 그리 친밀하게 뿌리내리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윤리적 소비 확산론과 비판론이 거의 동시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확산론의 점진적 증대가 있은 후, 그것에 뒤따르는 비판론과 회의론이 시차를 두고 나오기 마련인데, 흥미롭게도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 또한 동시에 쑥쑥 커 가고 있다. 이건 문화연구 같은 문화이론과 정치적 의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소위 학습효과 같은 것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이동연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윤리적 소비가 하나의 독창적인 문화 실천이라곤 그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의 주장을 보면 그것이 가져다 줄 영향에 대한 비판과 회의는 사뭇 소비의 긍정성과 주체성에 비판적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문화연구의 한 경향과 흡사해 보인다. 즉 그런 비판론이 나오게 된 이전의 사례들에서 학습된 성과를 윤리적 소비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그런 사고틀이 보이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문화연구는 소비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냄으로써, 기업과 공명하고 있다는 의심을 주위로부터 많이 받아왔다. 그리고 그런 의심들을 떨쳐내기 위한 반성론이 국외를 시작으로 국내에도 꽤 오랫동안 논의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비자의 능동적 수용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견해들이 꽤 나타나는가 싶더니, 올해 관련 논문들을 보니 다시 이런 회의적 질문들에 대한 재반박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김수정과 같은 문화연구자는, 문화에 정치를 기입하려는 문화연구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의도적으로 논쟁을 펼치기 위해 도발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고 여기에 조금은 연한 응대로 이희은 같은 연구자가 '문화적 시민권'이란 개념을 통해 김수정의 논의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문 사회의 이 비겁하고 소심한 '동료 의식'은 김수정 선생의 도발을 외면하고 있다. 딱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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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소비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는 대표적 견해 중 하나는,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진정성'을 표출함으로써 나타나는 그 영향이 과연 노동자의 현실 자체를 좋은 쪽으로 인도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즉 노동 과정의 열악함, 특히 국제 정세를 볼 때, 열국의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는 국가 내부의 노동 현실을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인식한 나머지, 그런 입장의 강화가 오히려, 노동 현실의 세부적인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주장이 있다. 특히 소비 행위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 '상품화'를 떠올려보면, 이런 '진정성의 상품화'가 주는 감정 구조의 딜레마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기업이 노동 과정을 드러내고 그 과정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 현실을 소비자에게 '떳떳하게'보여주겠다는 건, 예전과는 다른 문제다. 물론 여기엔 소비자들 스스로 현대 사회의 위험 요소 안에서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실천도 가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윤리적 소비가 웰빙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판론이 계급에 대한 시각이다. 윤리적 소비는 정녕 노동자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문화 개념인가?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론자들은 할 말이 많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손을 건네고, 함께 노동자에게 허그를 합시다,라는 광경이 윤리적 소비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비판론자들은 여기서 소비자의 계급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랬을 때, 아직 윤리적 소비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기 만족의 문화적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는 강화된다. 이처럼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성찰을 드러냄으로써 시도하는 투명성과 비판론자들의 불투명성이란 대립 관계는 견고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업 나쁜 놈!'하고 규정해버린다면,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단순한 윤리에 대한 이해가, 윤리적 소비의 긍정적 가능성과 열린 비판에 대한 잠재성 모두를 폐쇄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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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윤리적 소비와 관련하여 고민하는 것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포르셍연구소에서 발간된 <도덕적 명령>이란 책을 보면 윤리적 소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에선 '도덕 사업'을 펼치는 기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도덕욕'이란 개념을 통해, 도덕 자체가 기업의 미래 준칙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랬을 때, 기업에게 상품 자체를 파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상품과 함께 따라오는 도덕의 의미와 언어들이 소비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업은 과거 국가가 하던 도덕의 의미 부여를 스스로 하게 된다.
제품 판매가 더 이상 유일한 종극 목적이 아니며, 기업은 동등하게 도덕과 국민의 주체이어야 한다.자신의 환경 안에서 기업은 점차 자신의 불투명성을 버리고,점점 더 국민과 책임자로서 위치하게 되고,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고 선언하며,사회적 사명(예를 들어 다논)(43)(과 건강을 위한 다논재단)을 이어받는다. - 43,44쪽
과거에 우리는 국가를 통해 도덕의 의미를 부여받고, 우리의 선배들은 이러한 삶에 익숙했다. 여기서 기업은 국가의 성취를 전시하는 기능을 맡았다. 기술 국가주의를 통해 기업의 기술적 성과가 세계에 도드라지면, 그러한 성과는 국가 내 위치한 개인의 내면을 고취시키고, 이것에 맞는 건전한 생활과 '일등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선전이 국가와 언론의 합작을 통해 나타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측면일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관계에서, 국가의 힘이 우세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국가는 기업에서만 통용되던 '경영'이란 표현을 정치에 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이러한 경영 개념이 국가의 정치 전술로 채택되면서, 기업은 자연스럽게 국가 내부에 종속된 기구가 아니라, 기업 스스로의 강화된 입지를 펼칠 수 있는 통로를 확장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윤리적 소비의 등장 이후, 이제 기업은 개인을 소비자의 범주에만 넣지 않고, '시민'에게 윤리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위치한 개인의 내면에 더 깊이 개입하길 원한다. 기업은 특히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세계-시민으로서의 역할, 권리를 소비자에게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려보지 않겠느냐라는 정치적 조언을 한다. 시민의 역사적 형성 과정엔 물론 자본의 기여도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이는 개인의 '시민-되기'현상은 나에게 제법 신선해 보인다. 여기엔 과거와 달리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고 해서 어느 국가보다 앞선 일류 국가의 시민이라는 집단적 우월의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선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는 그 실천의 '개인성' 그것과 관련된 개인화된 시민의식의 발현은 그 어떤 집단적 의지에 구속되지 않은 채 개인 스스로 자족하며 윤리를 체화하려는 현대 시민의 속성과 더 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통치성론을 통해 윤리적 소비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자유 의지를 노리는 국가와 기업의 의도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통치성론은 이런 통치 방식의 연성화가 가져다 주는 무시무시한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데는 적절한 개념이지만, 정작 그것의 무시무시함을 수용하는 주체의 개별적 실천에 대한 고려와 그 실천을 둘러싼 갈등에는 취약한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통치의 부정적 효과를 서술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수용자 또한 그 효과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 잠식되어 있다는 섣부른 가정이 숨어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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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기업은 정치를 하고 있는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윤리적 소비가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경영'이란 말과 찰싹 달라붙은 기업에게 정치란 말이 함께 배치됨으로써 발생하는 예견된 미래, 그것에 대해 과장된 함의를 설파할 필요는 아직 없을 듯하다. 다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인 소비자의 '시민-되기'는, 기업이 단순하게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일차적 이해에서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문구는 '착한 소비', '착한 기업', '착한 경영' 같은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왜 하필 '착한'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기업은 정녕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성찰을 몸소 보이기 위해 시민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려는 것일까? 비판론자들은 묻는다. 이 고해성사는 정녕 진실한 것일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개념은 진실성과 투명성이다. 노동과정이란 옷의 단추를 풀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에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온다. 혹은 만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윤리적 소비는 내가 스스로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만족과 더불어 따라오는 '옵션 형태의 나눔'정도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은 회의론자들은 말한다. 이런 옵션 형태의 나눔은 결국 중산층의 자기 만족에만 그칠 것이며, 정작 수혜자들은 없을 것이라고.
다시 정치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나은 정치의 언어를 시민들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업은 더 나아가, 소비자를 세계-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의 언어 발명에 실제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일전에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당시 '정직'이란 표현에 쏠려, 이건희를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에 더욱 더 크게 보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그가 '모든 국민'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다는 말이다. 한 기업의 총수가 한 국가 내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짚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싱거운 언사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내게 이 발언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기업이 도덕과 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은 윤리적 소비 등을 통한 도덕 사업을 통해, 때 아닌 '인간미'를 과시하는 듯하다. 시민 되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정치를 통해 학습하는 중요한 부분 하나가 바로 인권 등으로 비롯된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상품이란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미를 함께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실천이 '소비'라는 건 재미있는 측면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있다. 인권위원회 같은 기구가 생겨, 우리의 인권을 직제화된 곳을 통해 인식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인간의 최저선을 확인받아야 하는 이 마당에, 인간미를 판매하는 기업을 통해 소비라는 실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메시지가 "그래도 당신은 인간이군요"하는 그 섬뜩한 과정 말이다.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인간미, 그리고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인권을 판매하는 상황을 뒤돌다보면,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시키보다는,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 자체의 의지가 계속해서 나약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은 아닌가의 문제가 내 안에 들어오는 듯하다. 나의 인간미를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확인받아야 하는 그 상황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