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입문'이란 표현이 가능하다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두 학자가 있다. 한 명은 레이먼드 윌리엄스, 다른 한 명은 스튜어트 홀이다. 최근에 교보문고에 들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가 출간된 걸 확인했다. (의미의 '과장'이 좀 필요하겠지만) 난 이 출간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문화연구하는 친구들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텍스트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을 좀 풀어보자면, 꼭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거쳐야하는 필요성을 모르는 '새로운 문화연구 세대'의 도래. 이것이 지금 '문화연구의 흐름'이다. 오히려 요즘 문화연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는 과거 '레이먼드 윌리엄스 급'의 텍스트, 그 자리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들어왔다고 본다.  

왼쪽에 링크를 걸어놓은 [New Cultural Studies]란 책은, 바로 '새로운 문화연구 세대의 도래'를 알리는 국외 텍스트이다.(아직 번역되진 않았다.) 게리 홀이라고 하는 신진 문화연구자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이 컴필레이션 텍스트의 서문은 '지금' 문화연구 세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채워져있다. 이 서문의 내용을 구성하는 가장 큰 기준에 문화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한 '버밍엄 학파'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문화연구의 기초를 닦았던 이들, 이미 문화연구의 '판테온'에서 '명예고문'으로 있는, 호가트, 톰슨, 윌리엄스, 홀 등등등.

그러나 이 서문에는 '문화연구'하면 으레 떠오르는 사람들의 업적 나열이 없다. 요즘 문화연구자들은 분산되어 있고, 각자가 옹호하는 이론가 /이론도 다르다. 목차를 보면, 맥루언이나 윌리엄스 대신 키틀러가 들어가 있고, 문화연구- 정치를 담당하던 스튜어트 홀의 자리엔 지젝, 아감벤이 들어가 있다. 어쩌면 이건 문화연구 특유의 빠른 '흡수력'이란 장,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인지 모른다. 고로 뉴 컬쳐럴 스터디즈란 책의 개정판이 몇 년 후에 나와, 내용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자리에 다른 이론 /이론가들이 들어가 있다는 건 전혀 상상 외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은 단순히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이론을 옹립하려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 시대의 문화연구자들이 더 이상 과거 '버밍엄 학파'의 유산에 구속되지 않은 채, (과거 책을 읽은 내 기억을 좀 되살려보자면) '문화연구자'로 정의될 수 없는 문화연구자들, 이 시대의 흐름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로 나타나는 듯하다.   

(책의 표현처럼) "버밍엄이여 영원하라!, 버밍엄은 죽었다"  의 시대, 이것이 지금 문화연구의 시대이다.

이 맥락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누군가에게는 '유품'으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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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9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1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킬레우스 2010-10-11 11:02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의 관찰자는 더이상 실증주의 과학의 초연한 입장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완전한 참여자도 아닌 것이다.그는 상응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는 분석하려고 하는 어떤 가치들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 반성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일종의 "심층 사회학"과 관계가 된다. 여기에 관해 어떤 확증을 갖고 있진 못해도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른바 '낭만적 사회학'에 관여하는 것이다. 사회의 이곳 저곳을 탐색하면서 그들은 많든 적든 그들 스스로 이미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대해 그의 저서 중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장에서 페라로티는 '상호작용으로서의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 개인연대기 그 자체가 경험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연대기가 '체험'을 고려하게끔 상정되기 때문이다. 

                                                                     - 미셸 마페졸리(1989), 일상생활의 사회학 : 인식론적 요소들 중에서 - 

한때 '일상생활의 사회학'이란 테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일상생활연구회라는 것도 덩달아 국내에 생겨났던 기억이 있다) 이 테마의 두 '본좌'를 꼽으라면, 앙리 르페브르와 미셸 마페졸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르페브르가 현대의 기호와 언어를 통해 현대성을 규정하는 이미지들의 시선에 대한 해부를 놓치지 않았다면, 마페졸리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사유의 방법과 틀을 제조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사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두 본좌의 유명세를 비교하는 것은 흔한 '가십'일 수 있으나,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르페브르보다, 나는 마페졸리의 사고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라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원딩' 초창기 시절, 그 시간에서 나온 고민의 어떤 형태를 마페졸리가 설명하는 구절들로 치유를 받았다고 할까? 그런 것에서 오는 감사함과 소중함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내가 '문화연구'라는 학문 사회 내 하나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 자체를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다니"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른바 '문화'라는 개념 아래 그 문화를 다룬 연구가 오늘날처럼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간은 사실 그리 길다고 볼 수는 없다. (문화연구적 수업의 특징일지 모르지만)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수업 시간에 자신의 하루를 나누고, 그 하루 안에 특징지워진 삶의 순간들을 공유한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 당연한 태도인 듯하지만, 여전히 신기하다. 자신이 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징들, 자신이 늘 타고 다니는 지하철 내 풍경들, 요즘 고민하는 가족 내 문제들 등등이 수업 시간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그것이 하나의 연구 논문으로 작성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는 "먹물로 뒤덮어진" 심층 에세이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이것은 학문과 그것을 마주치는 인간이 함께 노력하여 만든 우리 삶의 또 다른 행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수업 시간을 채우는 연구 동료들의 수다 안에서 나는 여전히 이론이 갖고 있는 중심이 그리웠고, 그 중심 안에서 이론이 나에게 던져주는 '소유하고 싶은 무거움'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한창 공부하고, 수업을 열심히 듣던 시간에는 몰랐다가, 졸업 논문 관계로 약 1년을 학교 밖에서 지내면서,  밀폐된 내 방에서 연출되는 나와 나의 대화, 거기서 다시 내가 끄집어냈던 책이 <일상생활의 사회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마페졸리의 부분을 반복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쉽게 쓰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게 '사회성'이란 것이었다. 마페졸리는 사회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상생활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새삼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나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이 새로운 붆석형태라기보다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조망이라는 사실을 길게 설명한 적이 있다.(중략)그렇다고 이러한 관계들이 결코 존재한 일이 없다거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들 사회관계가 어떤 에토스, 그 속에서 현대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어떤 '에토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다. 이것은 내가 사회성이라 부르고자 제안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진 잔여요인으로 할 수 없이 인정하는, 단순한 사교성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이다. 사회성은 유기적 연대,상징적 차원(커뮤니케이션)','비-논리적인 것',그리고 현재에의 관심을 포함한다.(중략) 우리에게 사회성이라는 주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체계가 영속적인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환경의 기반 내에서, 사회적 환경의 다양한 요소들 간에 항시 일어나는 역전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현상이며, 그리고 그 현상에 개입되는 지식이다. 지식은 단순히 사회를 바라보는 개입의 도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진부함'으로 치부하는 것들을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연구의 방식이자 관점이 된다. (최근에 발간된 피터 버거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피터 버거 역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주창하던 이였고, 그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상식과 지식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에 접근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상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의 술자리 등에서 주고 받는 통속적인 지혜 그 자체가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감각이라고 주장한다.(그는 이 감각을 '사회적 전신감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회성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사회 안에서 연결짓게 하는 일련의 방식을 의미한다. 마페졸리에게 그런 면에서 '사회성'이란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페졸리는 알프레드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을 비롯해, 고프만이 펼쳐 놓았던 '연극무대로서의 삶과 의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삶을 연구한다는 행복과 열정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내 해석이지만) 마페졸리는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정체성, 흔히 '역할 놀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비난의 차원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의 역사'를 쓰는 것은 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지혜, 그리고 매일 부딪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잡담을 꾸준히 지켜보며, 거기서 사회의 묘미를 만끽하는 사람에게 솔깃할 듯한'제3의 장소'라는 개념은  이 개념을 주창한 사회학자 레이 올덴부르그의 재미있는 학술적 에세이를 지탱하는 힘이다. 집과 일터를 벗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술집, 카페, 식당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고, 전혀 모른 사람과의 영화적인 만남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3의 장소'라고 불리는 이러한 공간의 소비를 통해 넓어진 사회적 관계를 체험한다. '제3의 장소'를 통해 사람들은 '이웃'의 발견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주는 흥미가 쌓이면서, '제3의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즐기며 발설한다. 이 공간은 오히려 그 '누군가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3의 장소'를 통해 마페졸리가 정의한 '사회성'을 체험하고 또 소비하면서, 그 공간에서 가능한 사회적 의례를 학습한다. 그리고 그 의례가 설정한 사회적 역할 놀이를 즐긴다. 여기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은 매일 정해진 것일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다발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하루와 너무나 예상치 못한 하루. 그것이 사회니까. 오히려 이러한 진부한 설명 자체의 회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에서 나는 사회라는 것의 흥미를 느낀다.  

'진부해서 안된다'라는 강박에서 늘 헤메이던 시절, "그럼 진부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나에게 마페졸리가 했던 조언은 "일단 새끼야, 진부함하고 부딪혀 봐"라고 지금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함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다시 창조적 풍경으로 탈바꿈된다는 것. 그래서 나를 '일상적인 사람'으로 불러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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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5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에겐  <관용>으로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의 신간이 미국에서 곧 발간될 예정인 듯하다. 찾아보니 미국 일자로 10월 31일로 잡혀 있었다. 웬디 브라운의 책은 제목들이 다 좋은데, 이번 책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무엇보다 그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제목인 것 같아서 좋다) 이번 책 제목은 뜬금없이 지어진 것은 아니고, 위키의 힘을 빌려보니 2008년 그녀가 이 책의 제목과 유사한 제목의 강연을 했다는 걸 발견했다.  

그 강연의 제목은 Porous Sovereignty, Walled Democracy 이었다. porous의 뜻을 찾아보니 '다공의' 즉 구멍이 많다였는데, waning (시들해진, 약해진)과 무엇과 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마 그녀는 푸코의'통치성' 논의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아감벤 냄새도 난다.) 책에 대한 정보가 아마존에 몇 줄 나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는 내가 생각해본 그녀의 관심사와 초점을 표시한 것이다)

Why do walls marking national boundaries proliferate amid widespread proclamations of global connectedness and despite anticipation of a world without borders? Why are barricades built of concrete, steel, and barbed wire when threats to the nation today are so often miniaturized, vaporous, clandestine, dispersed, or networked?

In Walled States, Waning Sovereignty, Wendy Brown considers the recent spate of wall building in contrast to the erosion of nation-state sovereignty. Drawing on classical and contemporary political theories of state sovereignty in order to understand how state power and national identity persist amid its decline, Brown considers both the need of the state for legitimacy and the popular desires that incite the contemporary building of walls. The new walls—dividing Texas from Mexico, Israel from Palestine, South Africa from Zimbabwe—consecrate the broken boundaries they would seem to contest and signify the ungovernability of a range of forces unleashed by globalization. Yet these same walls often amount to little more than theatrical props, frequently breached, and blur the distinction between law and lawlessness that they are intended to represent. But if today's walls fail to resolve the conflicts between globalization and national identity, they nonetheless project a stark image of sovereign power. Walls, Brown argues, address human desires for containment and protection in a world increasingly without these provisions. Walls respond to the wish for horizons even as horizons are vanquished.  

이론의 수입이냐, 아니냐 이런 차원의 문제보다 내가 요즘 중요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은 '세계 문제'에 너무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아마 그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각성중이다) 한국의 언론만큼 '내 나라 소식 전하기'에만 골몰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소식을 괜히 끄트머리에 부착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세계로 인해 연결된 하나의 망으로써, 우리의 삶이 곧 세계의 흐름과 직결되어 있음을 언론종사자들은 계속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관용>에 이어 이번에도 언급되는 외국의 사례들은, 비단 '내 나라 밖의' 문제로만 취급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웬디 브라운이 강조하는 저 '벽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세계를 바라보려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아, 그래서 이 말이 한국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거야?"라는 조급한 문제 제기 대신, 우리는 그녀가 든 사례들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과 그것에 연유한 고민의 다발들을 챙겨보게 될지도.


이 책의 내용을 예고한 강의의 프리뷰를 잠시 보려면  

http://depts.washington.edu/uwch/katz/20072008/wendy_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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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분열된 이야기, 하지만 찬찬히 보면 연결된 이야기. 

  1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3~4절)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중 하나인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 성경 구절과 연관된 소설 <어린 사환의 신(1929), 시가 나오야 작>이 논의의 중요한 길로 제시된다. 신이치는 모스의 증여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소설의 내용을 살펴봤는데, 나는 신이치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이야기다. 한 어린 사환이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고 싶어하는데, 자신에겐 그 초밥을 먹을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그 모습을 본 A는 사환의 사정을 알고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A는 이 사환에게 자신이 돕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싫어한다.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겠다는 뜻, 자신이 돕는 사람인지 몰라야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지난 후, 사환 몰래 그가 배불리 먹을 초밥 값을 초밥집 주인에게 주고, 뛰쳐나온다. 소년은 생각한다. 이런 선물을 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심지어 사환은 그를 신의 존재로 생각한다. 여기서 더 빠지면 신이치가 마련해놓은 사유의 길로 가게 된다. 여기서 잠시 중단)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A가 느끼는 괴로움이다.  길지만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A는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얼마 전에 소년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동정을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식으로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우연히 기회가 주어져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년도 만족했을 터이고, 그러니 나 자신도 만족해도 좋을 것이다. 남을 기쁘게 해준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나는 당연히 어떤 기쁨을 느낄 만한 자격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왜 이렇게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이런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마치 남몰래 나쁜 짓을 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어쩌면 나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우쭐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본래의 진정한 마음이 그런 의식을 비판하고 배반하고 비웃기 때문에 이런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닐까? 자신이 한 일을 좀더 가볍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사실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구속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닌 건 분명하다. 적어도 불쾌한 느낌을 갖고 있지는 않아도 좋을 듯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23쪽) 

 인터넷에 이런 고민을 고백하는 한 유저의 글이  올라왔다고 치자. 이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마 "님 좀 짱^^!"이란 덧글을 달며, 그의 선행을 응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 이 글이 어느새 그 날의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고,  어떤 사람이 그 게시물을 뒤늦게 읽어본다."아니, 뭐 도와주면 도와준거지. 이런 것도 엄연히 자랑 아니야. 쳇". 물론 예상 가능한 반응이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와 착함을 덧붙인 지금 이 시대를 비판하는' 자선파티의 정치경제학'이다.

2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요즘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자주 들려온다. 읽고 있는 여러 저널에도, 또 알라딘을 비롯해 주요 서점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채우고 있는 몇몇 책들의 테마도, 이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내가 썼던 <윤리적 소비와 인간미를 판매하기>(http://blog.aladin.co.kr/717962125/3950531)와 연결될 수 있다. 윤리적 소비, 생태 자본주의, 문화적 자본주의, 자본주의화된 사회주의. 지젝부터 스퐁빌까지.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헷갈린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심심한 참에 잘 되었다고 달려들거나,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 같다.  유명한 영화 감독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자들이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착해져서 당황스럽다고. 며칠 전  지인이 사는 어느 신도시의 거리를 같이 걷다가,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 동네 뭔가 있어. 사람들이 다 있어 보이는데, 뭔가 다들 선하고 여유로워 보여" <어린 사환의 신>에서 A는 어린 사환을 돕는 것까지 모자라, 아예 그 도움 자체로 괴로워하고 있다. 누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누구는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지금 그것을 실행한다면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돌을 맞을 확률이 크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숙이고, 가면을 벗길 준비를 한다.  

 

종영된 KBS 드라마 중 <부자의 탄생>이란 작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던 드라마였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그려보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이 드라마는 결국 부자가 되고 싶은 한 가난한 사나이가 결국 부자였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결국 부자의 아들이었던 자는, 가난한 자의 삶에 잠시 내려온 것 뿐. 여기서 드라마는 부자가 되는 방법 대신 혈연으로 모든 것을 덮는다. 남는 건 이시영이 보여주는 부자의 삶에 대한 희화화. 결국 서민들이 부자의 삶에 깊게 다가가는 길이란 없다. 이 드라마는 애초의 목표를 시원하게 배신하면서, 그저 부자를 바라보라고 한다. 아니면 정말 부자는 우리 시대의 '로또'인 것이다. (당신이 이 로또를 맞기 위해 쇼핑몰을 차린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연애 프로그램에 나오는 그 잘나가는 쇼핑몰 CEO 대신, 홈페이지 만들고, 거래처 조금 잡다가 종 치는 CEO들이 수두룩하니까)  결국, 우리 시대의 서민이 던지는 최고의 항의는 <서울의 달>과 같은 서민들의 드라마를 제발 만들어달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부자들을 구경하는 시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정녕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멀어져 가게끔 만드는 미디어의 책략. 분석 대신 분노와 투영만이 깃든다.

 

 

 

 

 

 

 

 

 

자본주의는 정말 사회적 나눔으로 인해 발산되는 소모의 쾌락, 소모됨으로써 솟구치는 오르가스무스의 길을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았는가? (그래도 정액은 끊임없이 공급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모되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정액. 그것이 우리를 둘러싼 자본의 현실 아니겠는가) 조르주 바타이유를  꺼내오자면,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조금 비튼 상태로 함부로 / 거칠게 원용하자면, 이 착한 부자들의 원천은 '파괴'일 것이다. 이 파괴의 의미를 돈으로 연결짓자면, '써도 또 써도, 그 '씀'으로 하루 하루를 버텨나가는 자들. '자선파티의 정치경제학'은 여기서 '기부의 이면'을 보라고 충고한다. 가령 구조조정 뒤에 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의 문제. 구조조정을 한 B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B의 기부금으로 인생을 미약하게 연명하거나, 아니면 그 기부금이 전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 B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심지어 그가 한때는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황당함 이상의 반응들을 세심하게 펼쳐볼 수 있을까) 

한 쪽에서는 너무 심한 것 아니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반응이, 다른 한 쪽에서는, 여러분 지금 그거 달다고 덥썩 물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독이 든 과일이 될 거에요,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허락된 '가지 않은 길'은 무엇일까.  혹자는 강경하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드는 어투로) 자본주의의 착함 운운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주장한다. 결국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도, 그 기술의 유해와 이로움은 사람의 사회적 사용에 달려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자체의 사회적 활용을 우리가 잘 해야하는 문제로 덮을 수 있는 것일까?    

 

 5

 그렇다고 우리가 가면을 벗기기 귀찮아서 / 힘들어서 랩으로 이 자본주의 녀석의 얼굴을 꽁꽁 싸매어, 자본주의 자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섣부르고 뜬금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보다 인류학적인 태도. 손과 발에 달린 눈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매만지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믿는 쪽이다. 그들이 확실한 대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이 조각들이 모였을 때, 우연의 힘은 냉소로 시작했던 의도를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차분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 하지만. 이런 내 소심한 결론 뒤에 숨은 하나의 확신. 자본주의가 착해서 그렇다, 나빠서 그렇다에서 우리가 시원한 아이스크림같은 대답을 먹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가장 맛있는 부위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음을 알고 후회한다는 것이리라.  

다만, 앞에서 인용했던 성경 구절이 좌파에겐 상당히 신랄한 꾸짖음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자 한다. 여기엔 물론 나만의 비유와 비약이 들어간다. 양해를. 이 시대의 좌파(왼손)들은 정말 우파(오른손) 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른다기 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인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잘 안다는' 문제는 사회를 바라보는 감정과 시선의 차원, 앎의 누적에서 오는 교만함과 그 교만함을 어리광부리는 태도로 바꾼 냉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을 때, "오른손이 왼손이 보도록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라는 차원의 문제, 그래서 오른손은 결국 속물이었어라고 못박아 버리게 만드는 유혹. 이때 좌파들이 왼손과 오른손의 일 모두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신'의 경지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은 아닌가,하고 우려를 표하게 된다. 정작, 자신은 사람으로서 왼손과 오른손의 일로 분열하고 있는데, 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려는 사람들. 그 전지전능함의 최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착한 거북이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의 겸양된 시안으로 지면들, 페이지들, 쪽들을 채울 때. 나는 그들이 "사실은 나 저기 가 있는 토끼인데.."라고 위안을 삼은 채 거북이 행세를 하는 것 같아 두렵다.  토끼가 거북이와 개미의 기믹까지 다 먹어버린 시대로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 지극히 '문제적'이다. 

A를 신으로 생각하려는 어린 사환에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정작 들려주려고 하는 나는, 이미 이런 이야기 다 끝난 것 아니요,라는 오판으로 "사실은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해석을 할 줄 아는) 내가 신이야"라고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이, 인간은 운다.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고, 왼손으로는 자위를 하는 게 이제 이 삶의 낙인가,라는 찬 바람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그리고 이 사회가) 확성기를 대고 설파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삶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냉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복잡한 문제에서 오는 쾌락을 맛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요즘 그래서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첫 걸음을 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치유는, 냉소라는 지옥에서 탈출하기다.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때마침 필요했던, 그 심심함을 달래줄 고마운 적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정말 우리에게 닥칠 불안한 미래인 것일까?  우리는 이 논의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랑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사랑해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것을 택하겠다고. 다시,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다. 굿바이! 미스터 냉소주의.  

먼 길을 돌아간 이야기, 결국 나에게로 돌아갔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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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9-0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소하니까 지젝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자선이나 기부, 착한 자본주의 관련해서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재밌는 글이 떠오릅니다. 이미 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http://socialandmaterial.net/?p=104

얼그레이효과 2010-09-01 03:28   좋아요 0 | URL
바라님 늦은 밤 반갑습니다.^^ 논문이 잘 정리가 안 되서, 헛글을 써 봤습니다. 크. 링크 고맙습니다. 읽어보고 고민해보도록 하지요.

2010-09-02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음. 원래 공부를 '독고다이'로 해온 편인데, 이번 학기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또 공부의 열의가 있는 사람들끼리 '감정사회학'이라는 테마로 모임을 가져볼까 생각 중이다. 사실 김홍중 선생의 책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마음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이론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나는 이것이 매체 연구에서의 어떤 전환을 야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내 소견이다)  

가령, 미디어 연구에서는 (아직까지도!) 어떤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그 매체를 활용한 사람들이 이런 효과를 얻었다더라,수준에 머무르거나(대표적으로 이런 방법론을 이용과 충족 연구라고 한다.국내에서는 1980년대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언론학 하시는 분들은 이 방법 좋아라한다) 문화연구의 시선 처리를 배운 게 그나마 수용자의 능동적 해독방식 정도이다( 1990년대부터 미디어 연구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의 절충안으로서, 그나마 더 나아간 것 같지만, 사실 포장만 번지르르할 뿐.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  

난 차라리 일정한 매체의 수용 과정에서 나오는 사랑, 기쁨, 미움, 속물, 진정성 등등 그런 다양한 감정들 하나, 하나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가령 내 졸업논문 내용 중에 들어가 있는 비디오 시대의 영화광들을 둘러싼 담론에는 속물과 진정성의 대립이 포진되어 있다. (그랬을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과연 영화를 속물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 이 과정은 내 만두 속에) 

 

 

 

 

  

 

 

 

 

감정의 상품화라는 테마 또한 염두에 두고 있다(이 테마에 대해 벌써 식상해져가는 이 학문 소비자들이 두렵다!) 나는 통치성론과 좀 다른 맥락에서 크리스토퍼 래쉬가 '치료국가'라고 불렀던 개념을 더 깊게 팔 생각이다 (졸업 논문을 쓰는 과정에, 나는 래쉬의 치료국가론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의 '문화'와 도덕주의 그리고 정신의 관계가 어떻게 가정에 개입하였는가,의 문제. 특히 문화 소비와 관련하여, 국가와 여성의 도덕주의적 접점이 만들어지는 데  개입한, 지식을 활용하는 연구소들의 담론, 그 문제점을 짚는 작업을 했다)

 

 

 

 

 

 

 

 

 

 

  

 

 

  크리스토퍼 래쉬를 공부하다 보면, 필립 리예프를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다시 앤서니 기든스와 지그문트 바우만으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시선에서 문화를 진공상태로 만들지 않기다. 에바 일루즈가 말한 것 처럼, 문화 내부의 논리를 어떻게 복합적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차원. 그 차원에서 보다 우리를 복잡미묘하게 만드는 감정과 지식, 감정과 경제, 감정과 문화. 이것을 보다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눈을 길러보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진흙탕 속에 빠져있는 미디어/문화연구의 획기적인 기획을 꿈꾸면서, 내 무기를 단련시켜보고자 한다. 이게 내 이번 학기 목표가 아닐까 한다(졸업을 앞두고 이 무슨 짓인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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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