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다시피, 사회학에서 구조/행위라는 개념 아래 진행되어온 수많은 논의는 자칫 진부할 것 같다는 편견을 깨고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해왔다. 행위자는 구조에 종속되는가, 행위자는 구조로부터 자유로운가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구조/행위 간의 관련성을 탐색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의 진리이자 골동품이 되었다. 모셔놓고자 하는 지식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활용하고 창안할 수 있는 지식의 소생술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몇 줄로 요약된 정의로 여기는 개념들이 이론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는 것,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다른 말 가운데 공모자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의 논지를 비교해보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빙 고프만과 피에르 부르디외는 공공연히 비교되어왔고, 이들의 논의에서 빚어진 유사성과 차이점은 '행동의 이론'이라는 영역 안에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윤택하게 만드는 학술적 언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빙 고프만에게 행동이란 운명적 순간을 감지한 개인이 불확실한 결과와 실용적 이득이 없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사회에서 얻고자 하는 '성격적 특성'을 얻는다는 차원으로 정리된다. 그는 카지노 세계의 민족지적 연구를 바탕으로  운-사후 영향-운명성-실용적 도박-적응이란 단계로 개인의 행동 단계를 설명한다. 사회심리학적 속성이 강했던 어빙 고프만의 사회학적 논의에서는 개인의 성격으로 인해 나타나는 장면들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는 '성격 게임'이란 용어를 즐겨 썼고, 사회 속 개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A란 사람이 B란 사람으로부터 '강한 성격'을 소유한다고 인정받을 때, 여기서 강한 성격이란 자신이 참여한 상황을 깨지 않기 위해 보이는 자제력, 냉정함, 차분함 등을 지칭한다. 그는 개인과 개인이 참여해 만들어가는 이러한 상황을 깨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인간의 속성이라 보았으며, 그 노력을 고프만은 '품행'이란 관점에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적응해가며 나름의 '품행기준'을 규범화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영향을 감안하고 예측해 실행에 옮긴다. 


그의 글에서도 느껴지지만, '편집증적' 분위기까지 느끼게 하는 어빙 고프만 특유의 예민한 관찰력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따른 손실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쉽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지를 조망했다. 그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말 자체가 사회학적 풍경이 될 수 있다고 본 사람이었고,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서 행동의 이론을 만들어나갔다. 어빙 고프만의 이러한 행동 이론과 피에르 부르디외가 만나는 지점은 '환상'이다.


어빙 고프만은 '자기 결단력이라는 환상'에 주목했다. 개인이 왜 안정된 영역을 박차고 나와 모험을 무릅쓰며 위험을 감수하려 하는지에 대해 고프만은 개인이 얻고자 하는 목표의식이란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러한 목표의식을 위해 하는 행동이 곧 자신의 온전한 결정에서 나온다는 말은 개인이 뛰어들었을 때의 손실을 막는 방어 기제일 뿐이라 여겼다. 반면 피에르 부르디외는 어빙 고프만에 비해 보다 '폭로의 스타일'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네가 사심 없이 행동하는 그 모든 흔적이 네가 속한 집단의 속성과 무단하다고 생각해?라는 식의 폭로를 통해, 부르디외는 그 유명한 일루지오와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행동의 이론을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행동 이론에서 환상이란 개인과 그 개인들이 속한 장의 관계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부르디외는 사심 없음 자체가 장의 목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그 입장이 순진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사심 없음 자체가 바로 장의 속성이라 주장하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장 자체는 장에 속한 개인의 특성을 제한하는 규범도 부과하지만, 그 규범을 넓혀나가는 개인의 의지를 통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부르디외는 즉, 왜 우리가 일상에서 이런 일로 경쟁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희열과 좌절을 혹은 순응과 저항을 의식하는지 등을 통해 개인이 참여하는 행동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게끔 하는 정신의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 정신의 경제에서 개인이 '사회적 개인'이 되어가는 것은 자신이 속한 장의 속성을 체화하며 그 경향을 숙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향을 변화시켜나가는 '아비투스'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어빙 고프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일면 타당하다고 보는 게 그가 고민했던 내기, 투자, 삶의 숙명과 돌파라는 용어와 관점은 분명 고프만이 이야기하려는 운명적 순간과 실용적 도박이라는 행동 단계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부르디외가 상징 자본이라고 불렀던 지점에서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궁정사회'를 사례로 꺼낸 귀족들의 감정 양태는 고프만이 강한 성격이라고 정의했던 것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허나, 고프만의 행동 이론이 개인과 개인의 대면에서 오는 '존대와 처신'의 입장으로 '성격 문화'에 치중한 사회를 그려나갔다면, 부르디외가 파고든 지점은 달랐다.  부르디외는 성격을 넘어 개인의 '성향'에 집중했으며, 이러한 성향 자체가 갖는 독립적인 부분에서 규칙성을, 질서정연한 부분에서 자율성을 포착해 계속해서 개인이 자신의 장을 향해 '의미의 투신'을 하게 만드는 구조적 속성에 주안점을 두었다(부르디외는 ACTION보단 PRACTICE란 표현을 즐겨 썼다. 즉 인간이 실행을 하는 데 있어 참고하게 되는 역사적인 궤적, 누적되어온 관습을 의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 관습은 사회 속 개개의 장마다 고유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부르디외는 인간을 지정된 목표를 놓고 그 목표라는 지향점 아래 실행해나가는 주체란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고로 사회학자로서 '전략'이란 용어 자체에 의구심을 품은 한 사람이기도 했다. 


고프만과 부르디외 둘 다 사회학이 좀처럼 건드리지 못했던 마음의 영역, 비가시적인 것이 사회학적 테마로 규명될 수 있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사람임은 분명하다. 다만 고프만은 자신이 관찰했던 사람들의 속성을 묘사하고 조망하는 과정에서 '관찰' 자체에서 오는 확증을 너무나 믿었다. 그 확증으로 인해 고프만이 설정한 개인과 개인 간의 '게임' 구도는 고프만의 눈에 보이는 언어와 실행 자체에 지나친 신뢰가 묻어나 있다. 이러한 신뢰는 곧 고프만 특유의 예리함에서 나온 개인의 행동에 묻어난 의중 파악까지 포함해서 나온 오류 가능성의 형태일 수 있다. 


반면 '폭로의 스타일'(부르디외 본인은 이러한 폭로자의 속성 또한 학문적 주제로 삼을 정도로 언급했지만)을 고수했던 부르디외는 하비투스를 통해 보다 인간의 행동 이론을 보다 유연하게 만든 것 같지만, 그의 사유엔 인간은 인간 자신이 하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모르나이다 식의 관점이 어느 정도 있음을 비껴갈 순 없었다. 부르디외를 공부하면 늘 따라다니는 의문이지만, 결국 그 또한 장에 속한 개인이 자신의 내기물을 걸고 이 놀이에 빠지고, 이 놀이에 사로잡히고 이 놀이가 해볼 가치가 있으며 놀아볼만하다는 일루지오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던 것이다. 학자로서 늘 부딪히는 측면이지만 그가 설명하려는 역동적인 사회상을 위해선 그 역동성 또한 조종될 수밖에 없었다. 


행동 이론이란 영역 안에서 고프만은 자신의 섬세한 눈 뜸을 너무 믿었고, 부르디외는 자신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 멂을 너무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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