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8

“강간범을 거세시켜야 할까?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의회 토론에서 미셸 알리오마리 프랑스 내무장관이 한 말이다. 인권에 대한 이런 시대착오적인 관점(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다른 분야에도 확산되고 있다. 정신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개혁의 결과로 수십 년간 쌓아온 성과들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몰고 온 변화들은 정신질환자를 치료가 필요한 한 인간이 아닌,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고 있다.
 

2008년 12월 2일은 프랑스 정신의학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현직 프랑스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정신병원(파리 근교의 앙토니 병원)을 몸소 방문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그가 한 발언 때문이기도 하다. 역대 프랑스 국가 최고통치자들 중 이처럼 정신병에 낙인을 찍는 발언을 했던 예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단호하다. 그가 보기에 정신병 환자들은 위험한 존재다. 그런 생각은 그의 발언들 속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의 노력은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이 퇴원시킨 환자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에서부터 “정상인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때로는 실현 가능성이 적은 희망 때문에 (…)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까지. 그의 발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는 정신병 환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정신병 환자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버젓이 길을 활보하는 사람들 중에도 위험한 환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발언들을 더 잘 음미하고 싶다면, 전문가들의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노숙자들 중 30%가 정신이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자라는 말이다. 이들은 병원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차가운 길에서 죽어간다.

사르코지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교도소와 병원, 경찰 간 3자 공조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3자 간에 균형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좀더 분명해진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교도소 안도 위험하고 교도소 밖도 위험하다. 오늘날 정신병은 무엇보다 안전의 문제이다. 이제 정신병 환자들도 아동성범죄자와 테러리스트들에 이어 공포에 떠는 대중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의 범죄율보다 높지 않다.(1) 또한 정신질환자들이 작거나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중 상당수가 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정신병원에 필요한 건 안전요원이 아니라 충분한 수의 전문의다. 정신질환자들은 무관심과 따돌림, 폭력의 희생자로서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많으며 ‘정상인들’에 비해 기대수명도 짧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사르코지의 재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둔갑 

 그의 발언은 우연한 시점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르노블에서 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젊은 남자를 살해한 사건(2)이 있은 며칠 후에 그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 언론플레이에 능한 사르코지에게는 대중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좋은 기회였다. 그는 곧바로 ‘정신병원 보안강화 계획’이라는 정책을 세우고, 여기에 3천만 유로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신병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환자의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환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환자들에게 위치추적 장치를 부착해 탈출하면 경보장치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필요한 모든 병원’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폐쇄병동이 도입되고, 200여 개의 폐쇄병실이 마련될 것이다. 또한 기존 5개의 폐쇄병동에 4개의 중환자병동(UMD)을 추가하기 위해 4천만 유로가 투입될 예정이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코지는 강제 입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그는 잘못된 통계 수치를 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강제 입원이 전체 입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에 이른다. 환자 자신의 동의 없이 정신병동에 입원시키는 경우를 강제 입원이라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제3자, 주로 환자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2008년 4월 보건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환자의 행동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강제 입원을 시킨 경우는 전체 입원의 2%에 불과하다. 사르코지에게는 2%라는 수치가 인용하기에는 너무 적었을 것이다.

사르코지는 새 법안에 통원치료를 포함한 의무치료 조항이 명시돼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의무치료 조항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간호사들이 경찰과 함께 몰려와 반항하는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치료 행위는 기본적으로 환자들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과 의사 기 방이옹의 말처럼, 환자들은 “그를 둘러싼 사회가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3) 사르코지도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치료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의 동의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리가 돈 2급 시민들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으니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환자들의 퇴원과 관련한 규정도 강화될 것이다. 환자를 퇴원시키려면 담당 의사와 간호사, 외부 정신과 전문의 3명의 소견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소견을 밝히는 것에서 끝난다. 최종 결정은 행정 담당자가 내린다. 그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게 사르코지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에 앞서 안전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병원 밖에서는 행정자치단체장이, 병원 안에서는 병원장(경영자)이 ‘사장’처럼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경영자’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의 역할은 병원을 관리하고 병원 내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떻게든 예산을 절약할 방법을 궁리하고 불합리한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사르코지는 내무부 장관 시절에 이미 제안했던 계획을 다시 들고 나왔다.(4) 국가 차원에서 강제 입원 환자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자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의학계의 분노

사르코지의 발언에 정신병원 종사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중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안전의 밤’이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2월 7일, 파리 근교 몽트뢰유에서 열린 한 집회에는 2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가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앙토니 병원에서의 사르코지의 발언은 마른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다. 이미 25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돼온 프로세스가 갑자기 제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이 프로세스를 이해하려면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정신의학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2차 대전 중에 레지스탕스 운동 내부에서 정신병 환자 강제 수감- 때로는 평생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에 반대하는 ‘탈정신병운동’이 발전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광기의 인간성’(5)을 탐구한 프랑스 정신의학의 아버지 필리프 피넬이 있었다. 정신병 환자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람들에게는 ‘미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자 수용소의 벽을 허무는 것만으로 그런 생각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광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고 환자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될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공동체’ 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지역별·기관별 심리치료사들은 새로운 정신의학을 창조했다.(6) 정신과 의사들은 더 이상 ‘의료종사자’(7)가 아니라 환자가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전문 상담사’(8)들로 재정의된다. 이런 정신의학 혁명에 참여한 정신과 의사 뤼시앙 보나페는 “일반인도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우리는 그 잠재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누구든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정신병 환자들도 다른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병원이 가지는 중심적 역할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치료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시 말해 치료팀이 병원 안팎에서 환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생 동안 환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조직돼야 한다. 이 운동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장 에임은 “각 지역에 공립학교가 있듯이 지역별로 사회·의료팀을 두어야 한다”(10)고 주장한다.

환자를 인간 주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새로운 정신의학이 나날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끊임없이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 개선점을 찾아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현재 정신의학이 맞고 있는 ‘위기’는 이런 개념의 정신의학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개념의 정신의학을 추방하고 싶어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광기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여 통제·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것이 사르코지가 제안한 정책들이 뜻하는 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질환자들에게 투입되는 비용은 불필요한 인간들에게 투자되는 불필요한 비용이 된다. 온갖 평가(11)나 증명들을 요구하고 성과에 비례해 재정 지원을 하는 등의 정책을 강요하는 것에 의료종사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신병원 시스템이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 그것이다. 가령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주부나 자살 위험에 직면한 기업 간부들도 진료해야 한다. 그러러면 정신과 의사들은 광기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오늘날 광기는 부정된다. 이제 정신질환자는 평범한 신경증 환자들과 똑같이 취급된다.

돈으로만 환산되는 치료

우리는 지금 차가운 타산적 이성의 승리를 목도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성이 아니라 회계사들과 기술 관료들의 이성이다. 광인은 사회와 진정한 관계를 누릴 자격이 있는 특이한 주체가 아니라 뇌질환 환자로서 뇌를 ‘스캔’하고 유전적 형질을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문제 있는 행동을 일삼고 비정상적인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로서, 가능하면 빨리 정상인으로 되돌려져야 할 존재로 간주된다. 주류 ‘생체정신의학’의 이런 ‘과학적’ 시각은 정신질환자들의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 정신질환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순수한 의미의 손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젠가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때까지 약으로 광기를 억누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제약산업에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행동치료요법도 다시 인기를 끌게 될 것이다.

광기는 이제 이 세계 속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나 광기는 우리에게 삶이 숫자나 그래프로 요약될 수 없다는 것, 사람들 간의 관계가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광기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인간’이나 ‘시장형 인간’으로 정의되는 개인의 개념에 대항한다. 이 개념으로 정의된 인간은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할 줄 알며, 인간관계보다는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침투한 ‘거래’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프랑수아 토스켈은 말했다. “광기의 인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12)

글·파트리크 쿠프슈 Patrick Coupechoux
저서로 <광인들의 세계: 우리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들을 학대하는가>(2006), <피억압자의 우울증: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연구>(2009)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범죄학 교수 장루이 스농은 살인범의 2~5%, 성범죄자의 1~4%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정신질환자들이 크고 작은 범죄의 희생자가 될 확률은 일반인에 비해 17배나 높다(2008년 1월 16일, 안전구금에 관한 법률안 상원 공청회에서 한 발언).

(2) 2008년 11월 12일, 뤽 뫼니에(26·학생)가 이제르의 생테그레브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3) ‘안전의 밤’ 운동의 일환으로 보낸 공개 편지. www.collectifpsychiatrie.fr.

(4) ‘광기마저 순수성을 잃어버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7월호 참조.

(5) 피넬은 광인들이 부분적 이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성에 접근함으로써 치료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6) 레지스탕스 내부에서 ‘탈정신병운동’의 두 조류가 탄생했다. 프랑수아 토스켈로 대표되는 첫 번째 조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제도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조류를 대표하는 뤼시앙 보나페는 지역별·분야별로 정신과 치료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7)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Gallimard, Paris, 1976.

(8) 뤼시앙 보나페, <소외로부터의 해방: 광기와 사회>, Presses universitaires du Mirail, Toulouse, 1991 중, ‘정신과 의사의 역할’ 참조.

(9) <Recherches>, 17호, 1975.

(10) <Chronique de la psychiartrie publique>, Erès, Paris, 1995.

(11) “미소(항공기 승무원의 미소가 아니다)는 정신병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미소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쿠르슈베르니의 라보르드 클리닉의 창립자 장 우리가 한 말이다.

(12) <광기 속에서의 종말 체험>, éditions de l‘Arefppi, Toulouse, 19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34 

173년 전 토크빌의 ‘미국 예찬’을 어설프게 흉내내
예상보다 과격한 우파에 당황… 알맹이 없는 조언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공공의 적’을 자처하긴 하나, 매번 출간이 될 때마다 그의 책들이 프랑스 언론을 움직이는 건 사실이다. 공산주의, 유일신론, 실존주의, 이슬람 공격에 나섰던 레비가 이번에는 미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앞선 토크빌의 행보를 따른 것이었을까? 미국인의 반응으로 판단해보건대, 그의 책은 미국인들에게 가르침보다는 즐거움을 준 것 같다.

1831년 미국을 방문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스스로에게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부과했다. 민주적 평등이 자리잡은 미국에서 평등이 개인의 자유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곳에서보다 덜 끔찍했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어떻게 이런 결과에 이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로부터 173년이 흘러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토크빌의 뒤를 따라 미국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레비가 중대한 정치적 임무에 투신한 건 아니었다. 그는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의 취재 요청으로 그곳에 간 것이었다. 잡지사에서는 레비에게 차 한 대와 기사 한 명을 내주었고, 화제의 인물들과 4차원적 인물들 및 미국의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로 화려한 만남 일정을 만들어주었다. 책 속에서 레비는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내려간다. 하지만 예의 그 토크빌이 보여줬던 시상과 심리적 깊이, 사회적 농도는 결여돼 있다.(1)

저자가 여행을 한 2004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레비 역시 ‘반미주의’에 관심을 갖는다. 그해 반미주의는 미국에서든 해외에서든 특히 두드러진 감정이었다. 하긴 공화당원들은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판 여론은 무조건 반미로 몰아붙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오른팔 딕 체니 부통령의 위험한 영향을 받은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이 나라를 불필요한 전쟁으로 몰고 갔고, 전쟁 때문에 미국은 동맹국도 잃고 재정 출혈도 극심했다. 조지 부시와 그의 몰지각한 자문위원들이 했던 약속과는 달리, 이라크에서 미 점령군은 자유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얼마 전에는 대테러 전쟁이 상황 수습을 위해 고문, 불법 감시, 심지어 고문이 일상화된 제3국으로 전쟁 포로를 보내어 ‘하청’ 처리를 하는 ‘이상한 송환’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음이 알려졌다. 혐의자에 대한 이런 신병 인도 방식을 이용하면, 은밀한 뒤처리가 쉽게 이뤄질 수 있다. 같은 해 11월 부시 대통령에게서 헤어나려던 우리의 꿈은 거짓, 부패, 정보 조작이 극에 달한 선거운동 이후 산산조각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컨대 2004년은 미합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병적 사회현상까지 극찬

베르나르앙리 레비라는 방문객은 미국의 가장 충격적인 병적 측면을 과도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보여줬다. 미국 사회에서 민감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교도소를 둘러보되, 그는 우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작가 스스로 얼마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수감 인구 수치를 언급하는 친절함까지 베풀었다(그 후 이상하게도 2004년 226만7787명에 달했던 교도소 수감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기만 한다). 저자는 미국식 사형제도의 비참함을 애써 외면했다. 고맙게도 레비는 미국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비친 미국인은 개방적이고 호의적인 사람들이었으며, 프랑스인 혐오주의를 예상했으나 놀랍게도 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에 대해 레비가 묘사해놓은 내용은 감탄을 자아낼 만하다. 그 핵심을 살펴보면 여행 전문지에나 나올 듯한 글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가령 저자는 그랜드캐니언을 매우 좋게 봤다. 네바다의 어느 창가에서 그가 이끌어낸 와인 빛깔 벨벳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내부 장식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틀랜틱 먼슬리> 쪽은 그에게서 확실히 단순한 유람기와는 다른 걸 기대했다. 따라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들 다수와 만남을 주선해준다. 안타깝게도 이 만남들이 순조롭게 이뤄진 건 아니었다.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과의 저녁 만찬에서, 저자는 멕시코 이민 문제와 관련해 헌팅턴 교수가 표명한 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윌리엄 크리스톨과의 만남도 저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크리스톨과 다른 네오콘들에게서 레비는 일말의 고차원적 지성을 발견하고 싶어했으나, 부시 행정부의 충실한 아첨꾼인 크리스톨은 이라크전쟁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와 낙태 반대법 및 부시의 사회적 의제 구실을 수행하는 구시대적 규정들을 열렬히 옹호함으로써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에 분개한 레비는 크리스톨에게 레오 스트라우스, 한나 아렌트, 쥘리앵 방다의 책을 다시 읽으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대학교수들과 제법 유순한 양이 되지 못하는 네오콘들 외에도 또 다른 놀라운 사실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뚱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로스앤젤레스에서 240kg 가까이 나가는 여성을 만나기는 했으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렇다고 모든 게 예상을 빗나간 건 아니었다. 국민들 사이에 과체중이 널리 퍼져 있진 않았으나, 그는 경제적 비만, 공항의 비만, 교회의 비만, 주차장의 비만 등 다른 형태의 비대함에 주목한다. 저자가 ‘비만’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에서도 우리의 저자는 자신을 흥분시킨 현상에 대해 명확히 조명하지 못한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긴 하나 인구가 꽤 많다는 게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공항, 교회, 주차장에 대해서는 이 설명이 적용된다. 하지만 알다시피 상세한 설명은 <아메리칸 버티고>를 쓴 작가의 강점이 못 된다.

알맹이 없는 미국식 ‘모델’ 제시

이 책의 허접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건 책의 마지막 부분, 저자가 미국식 ‘모델’을 관통하는 몇 가지 결론을 써보려고 발악한 대목이었다. 토크빌이 미국을 이해하려 했던 건 유럽의 운명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조건에 달려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로 레비는 미국이 유일할 거라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런 예외성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이 성격은 분명 국가로서의 미국과 ‘공동체의 막대한 신성성’(이런 식의 표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사이의 해소되지 않은 갈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레비는 미국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소수의 횡포’로 인한 위기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들 질문과 관련해, 레비는 더 이상 오류 속에 파묻혀 있을 수 없게 됐다. 사실 미국은 새롭고 유일한 정치 형태를 구현한다기보다 (물론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고전적인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다. 토크빌이 미국을 여행할 당시, 미국은 근본적으로 분권화되고 지역적으로 통치되는 새로운 정치 형태로 나아가는 걸로 보였다. 토크빌은 자기 눈앞의 이 나라를 높이 평가했다. 엄청난 크기의 나라였어도 미국은 다른 수많은 유럽 국가들에 없던 무언가를 이미 가진 상태였다. 다른 나라의 문명과는 구별되면서도 내적으로 단일화한 공통 문명을 가졌던 것이다.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약 1600km가량 떨어진 메인주와 조지아주의 차이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의 차이가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분명 다양해 보이기는 하나, 오늘날의 미국은 이민자 집단 상당수를 동화시키고 있다. 정치적·도덕적 가치를 공유하는 독실한 영어권 미국인으로 이들 모두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수의 횡포’를 걱정해야 할 건 미국이 아닌 유럽이다. 유럽은 서로 다른 집단들을 하나의 단일화한 국가적 공동체로 묶어주지 못했다. 이 상대적 실패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과업도, 지식 과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확실히 레비의 책보다는 토크빌의 책에서 배울 점이 훨씬 더 많다.




<각주>
(1) 베르나르앙리 레비, <American Vertigo: Travels in Toqueville’s Footsteps>, 2006.(한국어 번역본 <아메리칸 버티고>, 김병욱 역, 2006.)

글린 모건 Glyn Morgan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번역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문화주의에 대해 불편한 어떤 부분을 갖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고, 내 불편한 한 부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90 

 관변 다문화주의 비판
‘포섭’-‘배제’의 모순 되풀이하는 국가동원체제
‘다문화’라는 이름뒤의 획일성·서열화 깨뜨려야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사회통제 시스템을 국가동원체제라고 부른다. 국가동원체제는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국가 독재를 정당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1970년대 국가동원체제의 핵심인 새마을운동과 200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달구는 다문화주의 열풍은 기이하게도 닮아 있다. 첫째,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진행된다. 둘째, 대상 대중의 역량 강화와 사회 통합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 의한 내적 분열과 사회적 배제다. 셋째, 당사자들의 주체적 자율성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조직은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이유로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수행된 모든 사업은 권위주의적이고 전시행정적’이었다. 그러나 명목적인 수준에서는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했기에 ‘대중동원적’ 성격을 띠었다. 다문화주의도 다를 바가 없다.

갑작스런 다문화주의 바람

한국은 반이민국가이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동질화의 압력이 강한 사회이며, ‘순혈’에 대한 강박을 바탕으로 전근대적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다. 게다가 다문화주의는 유럽과 미국에서 퇴조하고 있는 정치철학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대유행하고 있다. 불과 2~3년 사이에 놀라운 속도로 주류 담론이 되어버렸다. 바로 국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는 2006년 급작스럽게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 2006년 5월 개최된 ‘제1회 외국인정책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은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제시한다. 이후 각급 지자체를 포함하는 정부의 모든 부처는 ‘표류와 과잉’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련 제도와 시설의 선점 경쟁에 뛰어든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다문화주의는 허구적이며 모순된 효과 이상을 낳을 수 없다. 국가는 국가 통합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이질적인 소수자 집단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소수자들의 ‘포섭’과 ‘배제’라는 상반된 작업이 일관된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혈통 중심의 편협한 국민주권 개념을 고수하는 한국의 경우 이런 문제는 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발현된다. 한편에서는 다문화주의를 부르짖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했던 ‘다문화’ 활동가를 가차없이 쫓아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 다문화주의의 현실이다. 2009년 10월 23일 미누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이주민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서울 가이드라인’이 공표된 2008년 11월 12일, 마석가구공단에서는 법무부와 경찰 직원 280여 명이 투입된 ‘인간사냥’식 합동단속을 통해 13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붙잡혔다. 그 가운데 5명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의 위선적 양면성은 ‘다문화’라는 상징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문화’라는 상징이 대중의 내면에 친숙한 일상성으로 착근되는 과정은 ‘새마을정신’이 내면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새마을운동은 대중매체와 학교 교육 그리고 국가가 지정한 85개 사회교육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 역시 다를 바 없다. 1990년대 10년간 다문화와 관련한 기사 건수는 총 235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된 이듬해인 2007년 한 해에만 무려 2만7894건으로 급증했다. 2008년에는 3만6778건으로 더욱 늘어났다. 공익광고를 통해 다문화 사회는 ‘사랑하는 마음도 더 많아지는 사회’로 칭송된다. 다문화 시범학교들이 지정되고 다문화 교육센터, 다문화 복지센터,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 등 전국적으로 수백 곳의 ‘다문화’ 관련 기관들이 설립되어 운영된다. 법무부가 지정한 ‘ABT’(Active Brain Tower)라고 명명된 ‘다문화 사회통합 주요 거점 대학’만도 20여 곳에 이른다. 이 기관들을 중심으로 ‘다문화 전문가’, ‘다문화 복지사’, ‘다문화 멘토’, ‘다문화 전문 상담원’, ‘다문화 지도사’ 등으로 불리는 전문가 집단이 속성으로 양성되고, 수많은 의사(擬似) 자격증이 남발된다. 다문화를 주제로 하는 각종 행사와 강좌에는 자원봉사자와 수강생으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렵다.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명목적으로는 농민층의 자기 역량 강화와 사회통합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농민층에 대한 차별적 접근을 통해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은 영세 소농에게는 오히려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강제로 작용했다. 한 월간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1960년대 전반에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마을’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다.” 이 점에서 역시 다문화주의는 새마을운동을 꼭 닮아 있다. 영세 소농이 ‘새마을’에서 쫓겨났듯이, 이주민 역시 ‘다문화 마을’ 만들기라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개발 프로젝트에 의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다. ‘다문화 특구’로 지정된 안산시 원곡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인위적인 개발 프로젝트는 이주민의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제2, 제3의 ‘미누’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짐짓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분할통치 방식으로 이주민 공동체의 내적 분열과 인종적 서열화를 조장한다. 다문화주의에 의해 선진국 출신 이주자와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자, 비자 소지자와 만료자,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주자와 비국적 취득 이주자 사이의 경계와 위계는 더욱 엄격하고 뚜렷해진다. 이주민 공동체는 ‘선별적 포용’과 ‘폭력적 배제’의 대상으로 뚜렷하게 분리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민족’ 역시 1세계 거주 에스닉(ethnic) 코리안, 남한인, 3세계 거주 에스닉 코리안, 북한 이탈 주민 등의 순으로 ‘인종적으로 서열화’된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혹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이주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다. 2009년 1월 현재 한국에는 64만여 명의 이주노동자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약 27%에 해당하는 18만여 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들의 90%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근무한다. 내국인 노동자의 40~50%의 임금으로 하루 평균 11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한다. 2007년 이주노동자의 재해율은 1.01%로 한국 노동자 전체 재해율인 0.72%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은 ‘국내 노동시장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소중 제조업의 생존에 절대적 기여를 하는 한국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인권과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회용 노동자’와 ‘불법 인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을 뿐이다.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2007), ‘거주외국인지원조례’(2007), ‘다문화가족지원법’(2008) 등 2006년 이후 제정된 일련의 이주민 관련 법령으로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통해 미등록 체류자에 대한 단속 및 강제 퇴거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며 매년 말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미등록 체류자 합동단속을 통해 수많은 ‘미누’들이 강제 퇴거당한다. 2007년 한 해에만 2만2546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단속되었고 그중에 1만8462명이 강제 퇴거당했다. 대부분의 단속반원들은 사복 차림이다. 신분증을 제시하거나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79.5%가 수갑을 사용했으며, 4.5%는 경찰 장구를 사용했다. 전자충격기와 그물총을 사용하는 경우도 2.9%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2003년 이후에만 무려 100여 명의 이주민들이 사망했다.

‘국가 관료’가 주도하는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농민은 ‘실질적 주체’가 아니었다. 농민의 자조적 민주주의가 강조되었음에도 농민의 ‘자율성’은 보장되지 못했다. 한국 다문화주의의 가장 큰 특이성은 바로 이 점과 관련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에는 이주민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이주민 대중에게는 그 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이주민 인구의 증가였다. 1990년에 5만여 명이 채 되지 않던 외국인 인구의 규모는 2007년에는 10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체 인구의 2%를 웃도는 규모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이 전 사회적 의제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담론에서 이주민 자신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은 한국인들만이 결정한다. 그런 방식으로 획일적인 (곧 반다문화적인) 다문화의 규정, 자격, 기준, 매뉴얼이 작성된다. 이주민은 ‘온정과 연민’, ‘교육과 상담’의 대상일 뿐 결코 문화적 주체로 존중되지 않는다. 이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이 강요될 뿐이다.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외적인 강제가 되어버린 다문화주의는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다문화의 주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절박한 현실적인 욕구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왜곡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이주민 당사자들은 냉소적인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응한다.

성찰,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

국가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다문화 사회’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여러 가치와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다문화 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다.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인 셈이다. 이를테면 어떤 다수 집단(과 그들의 정체성 혹은 문화)도 ‘보편(표준)의 지위’ 혹은 ‘주류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심’과 ‘표준’, ‘주류’와 ‘다수’의 위상을 누렸던 기존의 인식틀과 제도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가 요구되는 탓이다. 그 핵심에는 민족국가를 재규정하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구성원에게는 인위적 동질성을 강요하고 소수자에게는 자의적 차별을 자행하는 ‘표준화된 권위’의 근간이자 거점이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민족국가를 재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문화 사회를 추구하는 철학이요, 정치 지향이요, 문제의식이자 전망으로서의 다문화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 실현을 위해 행정 및 관변 조직을 최대한 활용해 국민을 동원하고 참여시키는 정치’적 슬로건일 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위선과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한다. 대중에게 다문화는 친숙한 일상으로 내면화되지만, 정작 다문화 사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이주민 공동체는 내적으로 분열되고, 한민족의 인종적 서열화가 이루어지며, 이주민의 자기결정권과 삶의 주도권은 더욱 취약해진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1987년 이후 쇠퇴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가동원체제가 재가동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새마을운동이 그러했듯이 ‘정치·사회·경제적 위기를 관리하고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목적’임은 분명하다. 만약 다문화주의를 재가동되고 있는 국가동원체제로 이해한다면,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태도는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가 보여주는 위선과 모순의 분열증은 서구적 이론과 개념에 의존해서는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국가동원체제의 맥락에서라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통치술의 일환일 뿐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다문화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전 국가적이며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다문화’는 우리의 강령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결코 다문화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똑같아지고 있는 것이 싫을 뿐이다.

글·오경석
한양대학교 다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한울,2007)을 썼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12-18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푸코와 글뤽스만의 관계에 대한 아티클을 읽고서, 글뤽스만이 누군지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신문 2008년 5월 8일자 16면에 글뤽스만 부자가 대담을 나눈 게 있어 옮겨 놓는다.  

원본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508016001 

 

佛 저명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父子 인터뷰

[佛68혁명 40돌] (3) 현대적 의미를 논하다
 

파리 이종수특파원|68혁명 4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겁다. 최근 발간된 신간만 60여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부자(父子)가 대담 형식으로 정리한 ‘사르코지에게 설명한 68혁명’(드노엘 출간)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 좌파 지식인이었던 글뤽스만은 지난해 사르코지 여당 후보를 공개 지원해 논쟁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출간 직후인 지난달 초 파리 10구 포부르 푸아소니에르 62번지 글뤽스만의 자택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뷰는 1시간 30분여 진행됐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43년의 터울을 둔 부자는 68혁명을 놓고 생각이 겹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했다. 
 

“사르코지가 68혁명을 왜곡…”


 
 
 

출간 배경이 궁금했다. 말문을 연 것은 아들 라파엘. 그는 “우리 집은 68혁명 뒤 권위주의가 없어진 가정이니까 내가 먼저 말하겠다.(웃음)”고 했다. 
 

아들 (라파엘, 이하 아들) 지난해 여당 유세 현장에 참석했는데 사르코지 후보가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몹시 거북했다. 순간 68세대인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예상과 달리 웃고 있었다. 유세장을 나온 뒤 “왜 아까 웃고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사르코지 말은 당시 대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 뒤에도 질문이 이어져 아예 책으로 만들게 됐다. 
 

아버지(앙드레, 이하 아버지) 책 제목 그대로 사르코지에게 68혁명을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가 68혁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68혁명 이후 상대주의가 난무하고 도덕의식이 무너졌다는 그의 진단은 맞다. 하지만 핵심을 비켜갔다.68세대의 본질적 실수는 ‘교조주의적 마르크시즘’에 빠진 것이다. 사르코지 후보는 이를 알고도 정략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나중에 한 대담에서 본인도 ‘정략적 이용’이라고 시인했다.
‘정치적 책략’이었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물었다. 
 

아버지 당시 사르코지가 지지율이 높았다. 그래서 좌파는 물론 중도·극좌파 후보들이 ‘반(反) 사르코지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자 사르코지가 그들의 ‘정신적 공통분모’인 68혁명을 건드린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 후보가 처음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30분 뒤 사르코지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말려들었다. 처음처럼 대응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자 아들이 끼어 들며 반론을 제기했다. 
 

아들 전략적 연설이었다는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르코지의 도발은 좌·우파 양 진영에 남아 있는 보수주의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그는 ‘프랑스 병’의 핵심을 정체성 상실로 본 뒤 그런 혼돈의 책임을 묻기 위해 68혁명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이민자 출신에 이혼 경력이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8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68혁명을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인데 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프랑스 68혁명만이 공산주의 비판” 
 

고정된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탄력적 사유를 강조한 두 사람에게 68혁명의 본질은 어떻게 비칠까? 
 

아버지 두 가지 의미에서의 ‘단절’이다. 하나는 프랑스의 전통적 정서, 특히 농촌에 뿌리를 내렸던 평온함을 중시하는 전통과 단절한 게 68혁명이었다. 그래서 ‘68의 아이들’은 뿌리가 뽑히고, 불확실해하고 미래에 대해서 늘 걱정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200년 동안 이어온 노동자·공산주의 중심 사상과의 단절이다. 당시 좌파 가운데 최대 정당인 공산당은 노동자를 ‘대안 사회’ 혹은 혁명을 담보할 주역으로 껴안고 있었다. 소련을 추종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68세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아들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68혁명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점이 프랑스의 독창성이다.
아버지인 앙드레 글뤽스만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혁명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만의 경험이 담긴 ‘육성’을 들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 소르본 광장에 학생들이 운집, 연좌 시위를 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경찰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곳에 레지스탕스이자 공산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이 찾아 왔다. 그는 “나는 공산당과 노선을 달리한다. 여러분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콘-벤디트가 “당신이 왜 스탈린을 칭송했는지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 말에 동의하겠다.”고 말했다. 대답을 못하고 돌아가는 아라공을 향해 콘-벤디트가 “당신의 흰 머리 위에 피가 묻어 있다.”고 확성기로 말했다. 이 장면은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라파엘이 말한)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이나 일본의 68혁명과 가장 다른 프랑스만의 특징이었다. 
 

68혁명 이후 달라진 것들 
 

68혁명이 이후 프랑스에 가져온 구체적 변화와 그에 대한 해석에서 두 사람은 조금 입장이 달랐다. 특히 라파엘은 68세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들 68혁명은 ‘수직의 세계’를 수평으로 바꾸었다. 문화·관습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낙태도 허용됐고 여성이 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중·고교도 남녀 공학이 됐지. 
 

아들 그러나 프랑스 정치는 여전히 수직의 잔재가 남아 있다. 정치에서는 68혁명의 정신이 스며들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68세대를 비난한다. 프랑스는 여전히 중앙집권적이고 대통령에 집중돼 있다.. 이런 면에서 68세대라고 주장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 그래도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뒤 이민자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좌파를 등용한 것이 얼마나 열린 변화인가? 
 

아들 아직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국은 엘리트를 중시하는 전통적 의미의 정치집단과 사르코지가 갈등하는 형국이다.
이윽고 화제가 ‘68혁명의 현대적 의미’로 넘어 왔다. 아버지 앙드레 글뤽스만은 좌·우를 떠나서 인권과 자기 성찰, 유럽공동체 정신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튼실히 하면서 68혁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들은 ‘68혁명의 재해석’을 강조했다. 
 

아버지 68정신의 요체는 ‘감히 교수와 다르게 생각하기’다. 좌·우파를 아울러 한 진영에 종속되기보다는 항상 자신과 주위를 돌아 보면서 비판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가 58년 부다페스트 사태 때 소련을 비판했다가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한 것이나 70년대에 ‘배신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소련의 재야 인사들을 지지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아들 그러면 지금은 “우리는 티베트인”이라고 말해야겠다. 
 

아버지 그렇다. 중국이 강국이라고 눈치를 봐선 안 된다. 
 

아들 그런 의미에서 68혁명 지도자 가운데 한 명도 제도권 정치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이 없는 것도 흥미롭다. 다니엘이 속한 녹색당도 68년 이후에 생긴 당이어서 제도권 정당으로 보기 어렵고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무장관도 사회당원이었지만 당 내에서는 늘 변방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68정신은 늘 프랑스의 전통적 중심부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두 부자는 68혁명 리더들이 각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아들 그건 다행아닌가. 혁명의 리더들이 한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진영 구분짓기를 끝냈다는 의미다. 아버지 말대로 ‘스스로 운명 선택하기’를 실천했다는 거다. 꼭 좌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지워진 고정관념이다. 또 68세대가 깨고 싶었던 ‘벽’이 아닐까?
다시 물었다.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진 앙드레 글뤽스만이 지난해 사르코지를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냐고? 
 

아버지 그렇다. 대선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인권을 부활하겠다고 말한 이가 사르코지였다. 좌파의 비판이 예상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vielee@seoul.co.kr 

 --------------------------------------------------------------------------------- 

원문 : 한국일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017042 

佛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에 대하여 

 앙드레 글뤽스만은 1937년생이다. 그의 사상적 궤적은 좌우를 넘나들었지만, 그런 편력 속에서도 그가 일관되게 탐구한 것은 악의 다양한 형태들이었다.

글뤽스만은 그 악에 맞서는 행동적 지식인으로서 ‘소극적 윤리학’라고 부름직한 반유토피아주의에 안착했다.

글뤽스만의 첫번째 저작은 ‘전쟁론’(1967)이다. 전쟁이라는 주제는 현대의 철학자들이 좀처럼 다루지 않는 것이지만, 글뤽스만에게는 그것이 악의 문제를 탐구하는 출발점이었다.

그 세대의 많은 좌파 프랑스 지식인들처럼 그도 마오처퉁주의자로서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시작했고, 당대의 프랑스 지성계를 감염시킨 극좌적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러나 68년 5월 혁명 이후, 특히 솔제니친의 작품들이 프랑스에 알려진 70년대 이후, 그는 ‘신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반(反)마르크스주의를 이끌며 과격한 사상 전향을 했다.

글뤽스만이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사상의 거장들’(1977)에서 그는 마르크시즘만이 아니라 계몽주의와 거대 철학들의 해방적 전통을 단호히 비판함으로써 반(反)전체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런 해방적 전통은 관념론으로 추락하며 역사 속에서 최악의 정치적 기획을 도왔다는 것이 비판의 근거였다.

글뤽스만에 따르면 윤리는 선에 대한 욕망에서 나올 수 없고, 오직 악에대한 저항에서만 나올 수 있다.

‘사상의 거장들’은 그의 이런 이념적 선회를 선명히 보여주면서, 그를“마르크스는 죽었다”는 명제로 요약되는 신철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1978년 가을에 사르트르, 아롱과 함께 남베트남 출신의 보트피플을돕기 위한 ‘베트남에 배를’ 운동을 주도하면서 사르트르와 아롱 사이의화해를 주선했고, 그 뒤에도 보스니아 내전이나 에이즈 같은 현실적 문제에 개입하며 참여적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r 2009-12-17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좋은 기사 만났네요, 이것 말고 직전 포스트요.
사실 글뤽스만이라는 반동적인 사르코지 지지자는 알 필요도 없고,
오히려 신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비판적 시각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

- Jean-François Lyotard, Instructions païennes, Éditions Galilée, 1977.
- Gilles Deleuze, « Les « nouveaux philosophes » », supplément au n°24 du bimestriel Minuit, mai 1977 --> 텍스트 전문: http://1libertaire.free.fr/Deleuze03.html
- Pierre Bourdieu, « Le hit-parade des intellectuels français, ou Qui sera juge de la légitimité des juges ? », Homo academicus, Minuit, 1984, annexe 3.
- Daniel Bensaïd, Un nouveau théologien : Bernard-Henri Lévy, Lignes, 2008.

얼그레이효과 2009-12-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료타르와 부르디외의 텍스트 외엔 아직 접하지 못한 것들이네요. 좋은 링크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와 실천 이성, 파스칼적 명상같은 책을 쓰고 싶은 머나먼 꿈이 있습니다.
 



 

원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88 

 

신철학자들 좌파 비판, 미디어 만나 시대 풍미
푸코, 무늬만 비슷해도 극찬…들뢰즈와는 결별 

 프랑스에서 반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1973~81)를 주창한 신철학은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신사조임이 분명하다. 과연 신철학은 상반된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 사이에 어떤 가교 역할을 했고, 특히 스탈린의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증오심을 가진 좌파 지식인들과 어떤 정신적 유대관계를 가졌는가?

프랑스 미디어 지식인의 역사에서 1977년은 분명 ‘신철학자들’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특히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앙드레 글뤽스만이 철학계의 혜성으로 떠오른 해다. 좌파 이념을 공격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이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앙리 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La Barbarie à visage humain)이 발간 2주 만에 3만7천 부가 팔린 데 이어,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Les Maîtres penseurs)도 출간 한 달도 채 안 돼 3만 부가 팔렸다. 이 책들은 1년 사이 각각 8만 부가 나갔다. 이 책들의 성공은 프랑스 반전체주의 시대 도래의 신호탄이었다.

신철학자들이 좌파 정책과 좌파 이데올로기를 겨냥한 비판은 과장되긴 했어도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신철학’은 좌파연합 내부에 최대 위기가 닥치기 시작한, 정확히 1977년 5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1977년 3월 12일과 20일에 치른 시의원 선거에서 프랑스사회당(PS)과 프랑스공산당(PCF)이 압승하고, 모든 이들이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의 승리를 점치던 가운데, 선거의 승리는 오히려 좌파 진영에 경쟁과 분쟁을 심화시키고 내홍을 겪게 했다. 이에 PCF가 서둘러 양당 공동 프로그램을 운영하자고 요구해 5월부터 양당 대표의 협상이 시작됐지만, 협상은 그해 11월 23일 결렬됐다.

언론들의 뜨거운 관심

1977년 봄과 여름, 신철학자들은 좌파의 이런 위기를 상기시키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토론 방식을 제안하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도처에서 열린 신철학 관련 토론이 정치적인 핵심 이슈가 됐다.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아포스트로프>는 ‘신철학자들은 우파인가 아니면 좌파인가?’란 제목으로 신철학자들을 조명했다. 시사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는 1978년 대선을 예측하기 위해 잡지에 ‘목표 78’이란 토론의 장을 신설했고, 신철학자들은 이 지면을 통해 의견을 개진했다.

또 일간 <르몽드>도 이들의 정치적 태도를 다뤘다.(1) 최고 지식인들로 손꼽히는 저명인사들은 신철학을 용인하며,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이들 또한 신철학이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혁명적인 담론이나 계획에선 전체주의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다. 1977년 프랑스의 좌파 연합 당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 강조되면서 이같은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신철학의 성공 요인을 단순히 지식인들의 삶 속에서 커지고 있는 미디어의 역할로 한정할 수만은 없다. 비록 도서출판 그라세(Grasset)의 발행인과 이 출판사의 시리즈물 책임자인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그라세 소속 저자들을 홍보하기 위해 신철학을 창안해냈지만, 신철학이 지적 영역 자체를 상대로 외적인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념의 삶의 터전(지식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철학이 인정받게 된 것은 정치 및 문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유명 지식인들에 의해 홍보되고 토론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미치는 정치적 파장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롤랑 바르트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옹호하기 위해, 또 장프랑수아 르벨이 신철학을 전반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개입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트는 레비가 내린 <역사적 초월의 위기>라는 진단에 동조하며, 레비의 글쓰는 방식(2)에 “반했다”고 토로했다. 르벨은 좌파연합 반대 투쟁을 벌이는 신철학자들을 지지하며, 신철학자들이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담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유혹>에 공감한다고 여겼다.

유명 지식인들, 신철학 옹호

그러나 이들보다는 또 다른 두 유명 인사의 역할이 신철학을 인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을 찬양한 미셸 푸코의 역할뿐 아니라, 자신의 문학잡지 <텔켈>을 통해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신철학이 주도하는 투쟁에 동조한 필리프 솔러스의 역할이 그것이다.

푸코는 <누벨옵세르바퇴르>를 통해 <대사상가들>을 극찬했다. 한발 더 나아가 1977년, 푸코는 글뤽스만이 <요리사와 식인종>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저서 <광기와 비이성>을 활용해 ‘굴락’(Goulag·극동 러시아의 수용소 군도)과 지난 고전시대에 자행된 ‘대대적인 감금’을 비교한 것을 용납했다. 하지만 푸코의 글뤽스만 지지는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푸코는 클로드 모리아크와 질 들뢰즈가 자신을 비판하자, 자신의 견해(3)를 재고하기보다는 이들과 친교를 단절해버렸다.

글뤽스만의 견해, 특히 권력과 이성에 대한 그의 개념은 푸코 자신이 더욱 엄격한 분석을 통해 정의한 개념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푸코의 그런 태도는 한층 수수께끼 같다. 글뤽스만은 권력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권력과 국가, 두 기관으로부터 소외된 대부분의 평민을 지지한 반면, 푸코는 혁신적인 자신의 가설을 통해 권력이 분산돼 있다고 봤다. 푸코의 미시구조(micro-structures)적인 접근 방식은 통치자들에게 집중된 통치권 개념에 명백히 반대 태도를 취하고 있다. 더욱이 글뤽스만은 (철학 및 헤겔적인) 이성과 학문을 통치와 완전히 동일시하며, 푸코의 계보학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왜 푸코가 글뤽스만을 지지했는지 설명하고 싶다면, 푸코의 미디어 활용, 즉 그가 자신을 신성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1960년대, 교수로서 명성을 얻은 푸코는 지식 잡지와 문화 매체를 통해 자신의 명성을 문화계로 더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의 출간과 함께 순식간에 슈퍼스타 지식인 반열에 올랐다. 언론이 이 책을 놓고 장기간 토론을 벌이며, 이 책은 1966년 여름 베스트셀러가 됐다. 문화계에서 얻은 이 명성이 중요한 계기가 돼, 푸코는 1970년 프랑스 국립고등교육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골수 반공주의자 푸코

1970년대, 푸코는 여전히 지식인 사회에 명성을 알리는 데 목말라했다. 그는 급기야 동시대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저서를 집필했다. 비록 글뤽스만이 푸코의 이념을 왜곡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명성을 좇는 푸코에겐 좋은 동반자였다. 특히 이들의 동반자 관계는 1976년 출간된 <성의 역사>의 제1권 <앎의 의지>에 대해 언론이 푸코의 기대와는 달리 시원찮은 반응이 보였을 때 두드러졌다. 글뤽스만은 서평 기고문을 통해 푸코의 저서를 극찬했다. 그는 푸코가 마르크스 이후 처음으로 <현대 세계의 가장 직접적인 본질>(4)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푸코가 글뤽스만을 지지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골수 반공산주의자인 푸코는 좌파가 68혁명에서 우연찮게 승리를 쟁취하자 걱정이 된 듯, “공포를 주지 않는 권력 행사를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1978년 국회의원 선거 전날 좌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좌파에 합류할 것이 아니라 지난 15년 동안 자신과 여타 사람들이 재설정해놓은 정치적 정의(定義)에 좌파가 적응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는 반공세력을 옹호하는 집회에 낀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푸코는 권력을 20세기의 본질적인 문제로 파악했다. 그는 권력 문제가 과거에 잘못 이해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현대적인 권력의 양식을 이해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권력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감시와 처벌, 그리고 ‘굴락’

푸코는 아마도 글뤽스만처럼, 통치권력을 등한시할 정도로 규율권력의 중요성에 심취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자행된 권력 행사의 가장 끔찍한 순간들이 서구에서 자행된 권력 행사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을 것이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감시와 처벌>에서 ‘굴락’과 서구의 형무소를 ‘수용소 군도’처럼 묘사하며 서로 견주었다. 또 소비에트연합에서 활용된 억압적인 정신의학이 “정신의학의 활용을 왜곡”한 것이 아닌, 그게 정신의학의 “근본적인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5)

그가 러시아의 굴락과 서양의 <대대적인 감금> 사이를 견주며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런 비교가 모든 박해의 이미지를 혼탁하게 하는 데 쓰이지나 않을까, 또 이를 구실로 PCF가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좌파는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기존 담론을 수정하지 않고 고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푸코는 재출간된 <감시와 처벌>에서 ‘수용소 군도’란 용어를 삭제했다. 푸코는 <요리사와 식인종>은 이런 정치적 덫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자신과 굴락 그리고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분석 작업을 해본적이 없던 푸코는, 글뤽스만의 저서 <대사상가들> 속에서 그 자신이 주도적으로 비판했던 적들(공산주의자,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및 국가)에 대한 규탄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분명 이 책을 극찬했던 것이다.(6)

글·마이클 크리스토퍼슨 Michael Christofferson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 곧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될 <좌파에 맞선 지식인들, 프랑스의 반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Les Intellecuels contre la gauche. L‘idéologie antitotalitaire en France, 2009)의 저자. 이 글은 그의 저서를 간추려 발췌한 것이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르몽드>, 1977년 5월 27일.

(2) 롤랑 바르트, <베르나르앙리 레비에게 보내는 편지>.

(3) 미셸 푸코, <말과 글 1976~1979>, 갈리마르, 파리, 1994, p277~281, 418~428. 클로드 모리아크, ‘희망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 <르몽드> 1977년 7월 7일. 질 들뢰즈, ‘신철학자들’, <르몽드> 1977년 6월 19~20일.

(4) Niilo Kauppi, <French Intellectual Nobility: Institutional and Symbolic Transformations in the Post-Sartrian Era>, 뉴욕주립대 출판부, Albany, 1996, p.134~136. David Macey, <The Lives of Michel Foucault: A Biography>, Pantheon, 뉴욕, 1993 p.189 sq. 미디어에서 성공을 거둔 <말과 사물>, 앙드레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 그라세, 파리, 1977, p.237.

(5) 미셸 푸코, <섹스 킹에게 ‘NO’를 외쳐라> <1976년 1월 1일 강의> <말과 글 1976∼1979>, op. cit.,p266~267, 189 및 335, <감시와 처벌>, 갈리마르, 파리, 1975, p.305.

(6) 미셸 푸코, <1976년 1월 7일 강의> <소련을 비롯한 여타 국가에서의 범죄 및 징벌> <권력 및 전략> <말과 글 1976∼1979>, op. cit., p.166~167, 69, 418~421, 43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9-12-1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와 신철학과의 관계가 이런 게 있었군요.좋은 정보네요.아직도 앙리 레비는 활동하는 데 비해 글뤽스만은 요즘 좀 잠잠하죠?

얼그레이효과 2009-12-1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사실 레비는 아는데, 이번 기사보고 글뤽스만이란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신문에 글뤽스만 부자가 대담을 나눈 것이 있어 포스트에 링크를 걸어놓으려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2-1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보던 77년~78년 시사잡지를 보면 앙리 레비와 글뤽스만을 동시에 소개하더라구요.둘이 신철학파의 총아였지요.요즘은 앙리 레비만 알려진 듯 해요.

얼그레이효과 2009-12-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랬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