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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평점 :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나를 형성하고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무수히 많다. 부질없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육체, 우주, 철학, 도덕, 세계, 자본주의, 사람…아무리 생각해도 내 결론은 언어이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그것으로 나를 표현한다. 언어의 기본인 ‘단어’가 나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출발인 것이다.
강원도 정선으로 방언 답사를 갔을 때, 어떤 어르신이 상추를 부루라고 하는 것을 듣고 시작된 황선엽 저자의 ‘단어 탐구’는 지평선이 보이지 않아 넘실대는 바다처럼 보이는 거대한 땅덩이 같다. 인간에 의해 시작된 단어가 땅에 뿌리를 내려 과거와 지금, 시작과 변천, 어원과 옛 문헌을 넘나들며 자라나고 때론 꺾이며, 열매를 맺는 과정을 저자는 생생하게 서술한다.
23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 장마다 다른 주제로 단어의 세계를 소개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거의 내가 모르는 것들이기에 재미있었다. 강의식으로 서술한 저자의 친절함으로 매 챕터가 끝날 때마다 좋은 강의를 듣고 흡족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말대로 단어의 변화를 들여다보며 ‘인류의 변화상, 민족의 역사, 세태의 변천(p4)’을 엿볼 수 있었다. 외국어 문법은 열심히 공부하지만 우리말 문법은 당연하게 넘어가는 것(p8)에 대한 반성도 했다.
일생동안 한국어를 사용해왔고 나름 책도 열심히 읽는다고 자부하지만, 항상 단어의 부족을 느낀다. 글을 쓸 때도 매번 사용하는 단어가 비슷하다. 그렇다고 작가들의 사전에나 나올법한 단어의 남용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전하고자 하는 언어를 평범하면서도 신박하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신조어가 사용되기에 그것을 따라가기도 바쁘다. 사실 내가 탐구하고 공부해야 할 것은 단어나 국어인데, 신조어의 뜻을 몰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싫어 오히려 그것에 대한 검색을 더 열심히 한다.
『단어가 품은 세계』는 정지용의 시 <향수>로 시작된다. 시보다는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의 노래로 먼저 알게 된 이 시(노래)가 너무 좋아 자주 듣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얼룩백이 황소’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얼룩백이는 몸에 호랑이처럼 줄무늬를 가진 ‘칡소’를 가리킨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누런 소를 한우로 규정하면서 예전에 볼 수 있었던 칡소가 사라졌다. 또한 황소는 누런 소가 아니라 ‘다 성장한 수소’를 뜻한다. 그러므로 얼룩백이 황소는 ‘수소 칡소’를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많은 것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조금만 의문을 품고 생각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칡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시 <향수> 속 ‘얼룩백이 황소’는 바로 칡소다. 지금은 누런 소만 쉽게 볼 수 있으나, 원래 우리나라에는 흰 소, 검은 소, 칡소 등 다양한 색의 소가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학교에 다닐 땐 선생님들이 왜 그리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켰는지 잘 모르겠다. 음치과에 속하는 나는 그것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어른이 하라고 하니 안 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매번 불렀던 노래가 ‘바닷가에서’라는 동요였다.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
나 혼자 걷노라면 수평선 멀리
갈매기 한두 쌍이 가물거리네
물결마저 잔잔한 바닷가에서]
챕터 11, ‘단어를 아는 과정은 삶을 아는 과정이다’에서 저자는 해당화에 대해 언급하며 나의 추억을 소급해준다. 해당화는 ‘장미과에 속하는 것으로 작은 나무에 향이 진한 꽃이 피고 주로 바닷가에서 찾아볼 수(p.141)’ 있다.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 가사에도 들어 있어 해당화는 한국의 ‘토종 장미’라고 불린다. 똑같은 한자를 사용하지만 중국에서는 해당화를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당화’를 뜻한다. 외국에서 온 꽃사과나무가 산사나무와 비슷해 해당화라고 불렀다.

-산사나무 열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산사나무를 인용한 아름다운 문장이 많다. 민음사 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6권의 책표지를 산사나무 잎을 모티프로 디자인 할 정도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을 때 나에게 ‘산사나무’는 프랑스와 프루스트 적 느낌이 강한 것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듯한 이국적인 이미지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산사나무 열매는 이미 우리나라의 술 ‘산사춘’의 원료이고 탕후루의 원조도 산사나무 열매이다. 산사나무 열매는 신맛이 강해 달게 먹기 위해 탕후루로 만든 것이라는 저자의 설명으로 이 나무가 전과 다르게 엄청 토속적으로 다가온다. 똑같은 사물과 단어라도 언제, 어디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이렇게나 그 의미나 느낌이 달라진다.
엄마는 당신이 나물 요리를 좋아해 반찬으로 많이 만드셨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싫어한 것이 가죽 나물이었다. 가죽나무는 참죽나무와 비교되는데, 참죽나무에 비해 쓸모없는 부분이 많아 가짜라는 의미의 ‘가(假)’가 붙는다. 참죽나무의 ‘참’과 대비된다. 저자는 《장자》의 <소요유>를 인용하며 가죽나무같이 쓸모없는 것에 대한 미학을 말한다.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엄마가 요리해주었던 가죽 나물은 사실 참죽나무 순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경상도에서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로 부르고 진짜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라고 한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알았을 때, 요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대~~~박~~~”
지인의 결혼식으로 강남에 있는 ‘더채플앳청담’ 예식장에 두 번이나 다녀온 적이 있다. 저자는 '더채플앳논현' 결혼식장에 다녀온 적이 있나보다. 저자는 이 결혼식장이 상호를 정한 바탕에는 외래어에 대한 선호와 선망이 들어있다고 했다. 이러한 예가 단지 이것 하나뿐이겠는가? 시어머니가 쉽게 찾아오지 말도록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지어 놓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시댁식구들과 자주 가는 고기집 ‘버드나무식당’에서 즐겨 먹는 갈매기살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다. 갈매기살은 갈비와 삼겹살 사이의 부위인데 식감이 소고기와 비슷하다. 갈매기살이라는 단어는 갈매기와 전혀 상관없다. 갈매기살의 갈매기는 ‘가로막’이라는 말이 변한 형태이다. 이 부위가 돼지의 갈비와 삼겹살 사이에 있는 것이니 가로막의 의미를 사용해 갈매기살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평소에 왜 갈매기살인지 궁금했지만 한 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요즘 어디를 가도 완전 기본이 된 기계 장치가 ‘키오스크’다. 주로 식당이나 카페, 햄버거 가계에 키오스크라고 불리는 무인단말기가 설치되어 있다. 본래 키오스크는 정자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데 유럽에 들어오면서 터키풍의 정자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이 가판대란 의미로 바뀌고 현대에는 주문을 위한 무인단말기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키오스크는 원래 정원 등에 지은 개방형 작은 건물을 뜻했다. 이 말은 궁궐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

-키오스크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전면이 개방된 간이 판매대와 소형 매점을 일컬었다.
이 책의 내용은 다양하고 범위가 넓다. 고추, 산초, 상추, 강아지풀과 성경의 가라지, 명아주, 김치에 대한 단어의 어원과 유래…‘열일하다’, 구독, 양치질, 낱말 앞에 ‘양’이 붙는 단어들의 공통점, 순우리말, 지명에 대한 구체적이고 성실한 설명이 있다. 언어에 대한 정책들, 시대의 인권감수성의 반영, 민간어원 등 언어가 가지는 특수성과 문제점에 대한 고찰도 있다. 각 챕터마다 참고할 수 있는 이미지도 풍성하다. 한 책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있어 옆에 두고 여러 번,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이다.
‘훈몽자회’로 시작해 ‘고려가요’가 나오는 순간 국어는 어려워진다. ‘그려긔, 그려가’는 ‘그려기’에 관형격조사나 호격조사가 결합할 때 마지막에 있는ㅣ가 탈락한다고 하겠지요. 그러다 관형격조사에서도 ‘그려기’의 형태가 쓰여 ‘그려기의’가 되고 현대국어에서는 호격에서만 이러한 현상이 남게 된 것입니다.‘라는 문장도 뒷목을 잡게 한다.
『단어가 품은 세계』의 부제목은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이다. 이 책을 읽고 당연히 아는 것이 많아져 삶의 품격이 올라가고 단어의 사용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국어 수업이라는 말에서 이 책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책의 내용에 전문성이 많아 살짝 어려워진다. 어려워진다는 것은 재미없어진다는 말과 연결된다. 국어학자의 성실과 의무라고 여겨지지만 일반인 독자에게는 갑자기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저자 역시 딱딱한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그것이 우려된다.
저자의 강의를 직접 듣는 듯한 이 책은 단어로 시작하지만, 단어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니다. 단어로 시작해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하고, 궁극적으로 삶의 자세와 철학을 배우는 중요한 기회를 준다. 봄빛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활기차게 보이는 요즘의 세상을 본다. 천지가 단어 투성이다. 그것에서 말이 이어지고 나의 우주가 열린다.
**이 글에서 인용한 이미지와 그에 대한 설명은 책에 수록되어 있고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