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리커버, 영화표지)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누가 사 놓은 건지 모르지만 옛 친정집 책장에는 김성종의 추리소설 5이 꽂혀있었다. 제목의 의미도 모르면서 무심코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너무 재미있어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나이가 몇 살쯤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간간이 나오는 야한 장면을 읽기에는 조금 어렸었던 것 같다.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읽은 건 그 소설이 처음이었는데,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냉혹한 킬러 B에게 그만 홀딱 빠져버렸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B는 언제나 제거해야 할 대상보다 한 발 앞섰고, 항상 주어진 임무를 성공시키는 킬러였다.

 

16세에 일을 시작해 지금 64세가 된 조각은 킬러 B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고 조금만 무리하면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물리적 노화가 시작된, ‘신체적 노화가 노력을 추월할 속도가 된 노인의 신세가 된 것이다. 상품화 되지 못해 버려지는 과일인 파과에 더 달고 깊은 맛이 있듯, 이 업계에서 레전드가 된 조각도 그동안 쌓아 온 숙달된 경험으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해충대신 쥐와 벌레 같은 인간 방역을 목표로 하는 에이전시 신성방역의 세계는 보통 사람이면 잘 모르고, 별 관심도 갖지 않은 곳이다. 소설 파과는 여기에 소재를 두어 일단 독자의 관심을 끈다. 거기다 다 늙은 여자 킬러가 주인공이라면 더 흥미롭다. 소설 여러 장면에서 조각의 생각으로 서술되는 노화의 단상이 사실적이라 공감이 간다. ‘조각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거기에 조각의 욕망과 허무가 들어있다. 소설적 서사로서는 썩 괜찮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소설의 진행도 좋다. 다만 소설적 맥락에서 식상했고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살인청부업자는 선과 악, 둘 중 하나의 편에 서서 임무를 완수해야한다. 설사 세상의 정의를 위해 악을 제거한다 해도, 그것은 선의가 될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살인이라는 도구는 그 어떤 이유라도 정당하지 않다. 한 번의 살인으로 깨끗이 정리되는 것은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다. 살인은 살인을, 죽음은 죽음을,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벌레 같은 인간들이지만, 그들은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의 출발은 불행을 기반으로 한다. 태생적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원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열다섯에 식모살이를 시작해 스승 류의 필요에 의해 희생자로 선택되고, 뜻밖의 소질 있음으로 살아남은 조각이 갈 수 있는 길은 방역업 외에는 없었다. 그런 조각의 출발은 동정을 얻을 수 있지만 살인병기로 길러진 조각의 그 이후의 삶은 그녀의 선택일 뿐이다.

 

조각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청부업자가 된 투우는 조각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조각이 노련미에서는 앞서지만 투우의 실력으로 봐서 조각은 그에게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투우는 어릴 때 잠시 동안 조각과의 인연으로 사람의 따스함을 느껴버렸다. 역시 출발이 불행했던 투우는 조각과는 다르게 이 연을 끊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조각보다 투우가 훨씬 더 인간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역시나 조각과 투우에게 중간은 위험했고 그들은 그것이 없는 삶을 선택한다.

 

소설 파과의 존재는 알았지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민규동 감독의 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이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볼까, 소설만 읽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영화를 먼저 볼까, 아니면 소설을 먼저 읽을까도 고민이 되었다. 일단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러 갔다. 소설은 끝까지 쉬지 않고 읽힐 정도로 재미있었다. 강 선생의 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의뢰, 강 선생의 딸인 해니를 투우가 납치하는 설정, 마지막 투우와의 결전에서 총으로 다섯 명을 조각이 제거하는 것은 조금 식상했다.

 

민규동 감독은 영화의 영어 제목을 ‘The old woman with the Knife’라고 정했다. ‘칼을 든 노파라는 말이 조각의 정체성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영화 파과의 여러 포스터 중 조각의 뒷모습만 보인 이 포스터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시작과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그저 조각이 끝까지 걸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죽을 수도 있고,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조각도 알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소설을 읽고 나서 본 영화는 이해가 잘 되어 좋았다. 소설과 영화가 서로 방해가 되지 않고 조화가 잘 되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대화나 행간을 민규동 감독이 잘 살린 것 같았다. 지루하지 않게 박진감도 있었다.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본 사람은 나보다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커피를 들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내 옆에 모녀가 앉아 있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끝까지 내 옆의 엄마는(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시종일관 사람 죽이는 잔인한 장면에서 놀라서 탄식하고 얼굴을 가리면서 안타까워하며 영화 보기를 힘들어 하였다. 계속 악, ! 하며 소리를 내었다. 반면 나는 커피를 마시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봤다.

 

분명 나도 전에는 잔인하고 무서운 영화를 못 보던 사람이었다. 영화 아저씨추격자를 보면서 거의 반을 눈 감고 있었다. 그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사람 때리고 죽이는 영상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게 되었다니. 결국 나에게도 중간이 없어지는 것인가?

 

조각 역을 맡은 이혜영배우가 멋졌다. 연극에 출연하신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완전 매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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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25-05-20 1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일로 영화를 아직 못봤네요. 소설과 영화가 서로 조화가 된다니 꼭 봐야겠어요^^

페넬로페 2025-05-20 14:10   좋아요 1 | URL
저는 괜찮더라고요.
생각보다 관객수가 적어 영화 볼까 말까 망설였는데, 지루하지 않게 봤어요. 조각과 투우의 감정신도 잘 살린 것 같더라고요^^

레삭매냐 2025-05-20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무척 재밌게 봐서 영화도
승승장구할 줄 알았는데...

요즘 영화시장이 워낙 다운이라
그런진 몰라도 영화 성적은 아
쉬워 보이네요.

페넬로페 2025-05-20 14:36   좋아요 1 | URL
소설과 영화에서 약간 식상한 전개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관객들은 더 재미있고 강렬한 것을 원하는 것 같아요. 저는 투우와 조각의 인간적인 면이 좋았어요.
그만하면 액션신도 괜찮았고요^^

새파랑 2025-05-20 14: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쟁이 페넬로페님은 영화보다는 책 먼저군요~!! 책도 좋고 영화도 좋군요 주말에 영화를 한번 봐야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05-20 14:47   좋아요 2 | URL
보통 서로 방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좋았습니다.
조각역의 이혜영 배우도 너무 잘 어울렸어요.
새파랑님께도 즐거운 영화관람 되시길요.

책읽는나무 2025-05-20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셨군요?^^
소설 읽은 직후엔 영화 넘나 보고 싶었는데 며칠 지나니 흥이 가라앉았고 영화 보면서 대부분 소설을 못따라가 실망한 적 많아서 영화관 가길 포기했었어요.
근데 소설만큼 영화도 괜찮다고 하시니 또 슬며시 땡기네요.^^
전 전공의 드라마를 보면서 신시아 배우를 처음 보았는데요. 조각 어린 시절의 배역은 신시아 배우가 맡았다고 하던데 러블리한 신시아 배우가 어떻게 연기했을지 좀 궁금하네요. 특히 <파쇄>소설은 신시아 배우 생각하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이혜영 배우님은 안봐도 연기가 멋졌을 것 같아요.
투우도 참 안됐단 생각이 들던데 결투씬을 어찌 찍었을지… 궁금해 하다가 페넬로페 님 말씀처럼 궁금했던 장면이 나오면 사람 죽이는 장면에선 그냥 눈 부릅뜨고 스크린 볼 것 같아요.ㅋㅋㅋ…소설을 읽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싶습니다. <추격자>는 와…완전 충격적인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어요.ㅋㅋ

페넬로페 2025-05-20 22:43   좋아요 2 | URL
이혜영배우가 신동엽의 짠한형에 나와서 ˝영화 보고 싶다고 하면서 막상 영화관에 안 보러 올거죠˝하면서 팩트를 날리더라고요. 그래서 양심상 보러 갔어요. 방구석 1열에서 민규동 감독도 많이 만나 반가웠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신시아 배우가 전공의 보다는 파과에 더 어울리더라고요.
파쇄 읽으면 마음 아플 것 같아요.
김성철 배우도 워낙 연기 잘하잖아요.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노화 현상이 어찌 그리 공감되는지요 ㅋㅋ

서니데이 2025-05-20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파과>영화 보셨군요. 저는 원작 소설은 아마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출간 초기에 앞 부분 읽고는 어딘가 두었던 것 같아요. 얼마전 영화 소개를 보니까 조각 이미지가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영화 재미있으면 저도 보러 가고 싶네요.
페넬로페님, 편안한 하루 되세요.^^

페넬로페 2025-05-20 22:45   좋아요 2 | URL
원작을 재미있게 읽어 영화 보러 갔어요. 원작보다는 조각 이미지가 좀 더 절제된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는데 영화가 글보다는 압축적이라 그런 것 같았어요.
서니데이님도 굿밤 되세요^^

자목련 2025-05-21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지만 내용이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아요. ㅎ
영화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저는 OTT에 올라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신시아 배우는 <마녀2>에서 보았는데 저도 슬기로운 보다는 <마녀2>나, <파과>에서의 역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5-05-21 14:48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재미있게 주욱 읽게 되는 책은 금방 잊히더라고요
ㅎㅎ
아마 곧 영화가 ott에 올라올 것 같아요. 마녀 내용을 잘 모르는데, 한 번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