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신년계획으로 꼭 헬스장에 등록한다고 결심했지만, 당연히 아직이다. 그 대신 많이 걷고, 산책길 여러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 공원 기구 운동도 한 번씩 한다. 어차피 헬스장에 가도 이용하는 기구가 한정되어 있다. PT를 받지 않는 한, 헬스 중독자인 근육맨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에 선뜻 끼어들 수가 없다. 깨작깨작 기구 몇 개 들어 올리고, 러닝 머신이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면서 미리 지불한 1년 치 돈이 빠져나가는 안타까움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정신적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요즘은 집 근처 새로 조성되고 있는 호수 공원에 설치된 중량을 조절할 수 있는 운동 기구를 이용한다. 무게를 높일 수 있어 훨씬 운동하는 맛이 난다.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공원 기구 운동은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데, 저녁 늦게 가면 학원 수업이 끝난 학생들도 많이 와서 운동을 한다. 저번에는 어떤 학생들이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이 놓고 운동을 하길래 소리를 좀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전에는 태권도 도복을 입은 3명의 남학생과 1명의 여학생이 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쯤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10시쯤 태권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들린 듯 했다. 그들은 운동은 하지 않고 기구 옆의 벤치에 앉아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거의 3명의 남학생이 1명의 여학생을 놀리는 것이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그 여학생을 놀렸는데, 여학생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여학생이 고통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재미있게 친구들과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20분 정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가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왔지만 계속 그 광경이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여학생이 약간의 장애를 가진 친구는 아닐까? 아님 요즘 청소년의 행태나 우정을 내가 몰라서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학생 3명과 여학생 1명의 조합은 어딘지 조금 공평하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설사 그들이 친한 친구라 해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놀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지금은 괜찮아도 그것이 쌓이면 나중에 그 여학생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다음날까지 고민하다가 학생들이 입은 도복에 인쇄된 상호의 태권도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듣고 본 것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관장님이 전화를 받아 어제의 일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내가 오해를 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아이들을 혼내라고 전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도가 조금 심한 것 같았으니 정확한 상황은 알아보시라고 했다. 관장님은 잘 알겠다고 하며 아이들과 얘기 나눠보겠다고 했다.

 

태권도 관장님은 그 다음날 나에게 전화를 해주셨다. 아이들과 얘기를 해보았지만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고, 서로 장난친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로 여학생에게 남학생들이 한 행동에 대해 어떤 기분이 들었냐고 물어봤지만, 아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고 했다. 관장님은 계속 아이들을 지켜볼 것이고,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도록 지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라며,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우정을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의 호기심으로,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심심해서 부당한 것을 참거나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 금세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가족소설이면서 성장소설이다. 지우, 소리, 채운은 각자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고민이라는 표현은 가볍고 사실 불행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가족의 죽음과 폭력으로 야기된 것들로 인해 현재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는, 불행에 빠진 세 청소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불행은 뭔가 거창한 것을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큰 사건 없이, 존재해야 할 누군가와 살 수 있다는 바람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불행인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병이 찾아오고, 재수 없는 사고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하나라도 찾아오면 그냥 힘들어지는 것이다. 힘들기 시작하면 지우의 엄마인 지연처럼 피로와 허무에 젖어 살게된다. 그냥저냥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바라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지우, 소리, 채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그 연결을 거부하지 않는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안주하거나 그것으로 타인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지금 아이들이 의지할 엄마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어른이 그들을 보호해주려고 노력한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글로리악연은 청소년 시기를 정말 나쁘게 보낸 어른들의 이야기다. 김애란 작가의 착한 이 소설과는 정반대다. 전자에 비해 이 소설이 말하는 것이 너무 따뜻해 식상하고 재미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김애란의 소설에는 진심이 있다. 가족이 아니어도 마음 놓고 안길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아이들은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다. 그냥 이것이 진리다.


이 소설속 아이들과 산책길에서 만난 태권 소년 소녀가 무탈하게 어른으로 잘 성장했으면 좋겠다. 

바라는 건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집에서 한 과제라 채운은 '미끄럼틀'이나 '추락' 같은 단어를 미리 찾아볼 수 있었다. 채운은 저 때가 자기 삶에서 최고의 날까지는 아니어도 꽤 좋은 날이었음을 인정했다. 작은 몸에서 기쁨과 신뢰가 분수처럼 터져나오던 때, 저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마음놓고 내려와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어 그 사람에게 정말 마음껏 안겼던 그날이

그런데 어쩌다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데 와 있을까?’ 

채운은 접속사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여러 선택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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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5-05-24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리 지불한 1년 치 돈이 빠져나가는 안타까움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정신적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 ㄷㄷㄷ 아 바로 제가 작년에 겪은 일입니다! 몇 번 나가지도 않고 만료되었어요 막판에는 어서 빨리 끝나버려라 라는 자포자기적 심정이었지요 에휴 태권도장에 연락해보신 일은 정말 잘 하신 것 같아요 그냥 넘기고 묻어 버렸다면 엄청 찜찜하셨을 거에요

페넬로페 2025-05-24 19:55   좋아요 1 | URL
네, 등록해 놓고 안 가는 날이 많고 어느 순간 거의 가지 않는거죠 ㅎㅎ
이런 경우가 많아 운동을 많이 쉬었는데 할인 이벤트 전단지가 와서 고민중입니다 ㅋㅋ

태권 도장에 전화할지 고민이었는데 잘 한 것 같아요.
관장님이 성의 있게 경청해 주셨어요. 그 친구들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고요.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들도 조금 조심하지 않을까 합니다.

5월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래요^^

책읽는나무 2025-05-24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장님 조금 당황하셨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고 또 페넬로페 님께 경과를 보고하려고 따로 전화를 주신 것을 봐선 좋은 어른이신 것 같아요.
정말 김애란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 중 한 분 같단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도 소설 속 아이들과 겹쳐보이기도 하구요.
요즘 김애란 작가의 예전 소설을 펼쳐 들고 다시 읽어보고 있어요.
<이중 하나는 거짓말> 소설이 나쁘진 않았는데 예전 소설과 결이 비슷한 듯 다른 듯한 이 분위기가 왜 바뀐 것일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페넬로페 님의 글을 읽으면서 김애란 작가님이 의도한 게 진심 이것!!! 오호!! 맞아, 이것일 수도 있겠구나!
해답을 찾은 느낌입니다.
역시 페넬로페 님^^

페넬로페 2025-05-25 00:05   좋아요 1 | URL
성장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거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나쁜 길로 가지 않고 보통 어른으로 무탈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요. 청소년 시기에는 아차하는 순간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럴 때 좋은 어른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아이를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최근에 뒤늦게 정주행한 드라마 ‘조립식 가족‘의 내용이 그렇더라고요.꼭 엄마나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잘 먹이고, 잘 케어만 해준다면 각자, 나름 잘 성장할 수 있는 걸 보여줘서 너무 감동깊게 봤어요^^
요즘은 작가들이 힘들듯요. 매운 맛이 아니면 사람들이 잘 안 보고, 잘 안 읽으니
ㅠㅠ

책읽는나무 2025-05-25 00:28   좋아요 1 | URL
조립식 가족.
저도 재미나게 봤습니다.
팟캐스트 듣고 있는데 김혜리 기자님이 재미나게 봤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한 번 봤다가 재밌어서 정주행 했었어요. 이런 드라마가 좀 더 많았음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우리들의 블루스>편에서도 학생 커플 이야기도 인상 깊었는데 줄곧 떠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몇 달 전부터 넷플릭스를 잠깐 끊었어요. 드라마나 영화 들여다 본다고 헤어나오질 못하여 이용료가 오른 이후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었는데 그 폭싹 속았쑤다를 보고 싶어서 다시 넷플 결제를 할까 말까 엄청 망설이고 있네요. 다시 접속한다면 또 폐인이 될 것 같아ㅋㅋ 근데 넷플 안 보는 대신 요즘 유튜브 세계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어 큰일입니다.ㅜ.ㅜ
이러나 저러나 폐인 안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그중 가장 좋은 폐인은 책덕후 폐인인 듯 합니다만.^^
한국 소설 작가들 특히 여성작가들 책을 두루 읽어볼 계획을 세웠거든요. 확실히 젊은 작가일 수록 좀 자극적인 듯도 하구요. 특히나 안 읽던 호러쪽을 읽으면서 헐…이러면서도 차츰 중독되어 읽곤 있어요.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치부해야 할지 알 순 없지만 일단 읽어보자! 이러면서 읽습니다.
그래도 역시 저는 어둡지만 착한? 소설이 좋은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5-05-25 09:32   좋아요 1 | URL
조립식 가족 너무 좋죠?
이 드라마보고 황인엽 배우 팬도 됐고, 지인들에게도 좋은 내용이라고 소개했어요.
저는 요즘 넷플릭스 많이 보고 있어요 ㅠㅠ

책나무님, 한국 여성 작가 소설 읽으시고 리뷰 많이 부탁드려요.

잉크냄새 2025-05-25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학생들과 대화해보고 그 결과를 전화로 피드백해주는 걸 보니 해당 도장은 그래도 믿음이 가네요.

페넬로페 2025-05-25 10:47   좋아요 0 | URL
네, 전화상이지만 제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 주셨고, 피드백까지 해주셔서 감사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