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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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람들이 부러운 건,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서 거의 대부분 접한 거지만, 유럽에 있는 다른 나라로 여행이 쉽고, 웬만하면 외국어도 두세 개쯤 너끈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륙으로의 진입이 꽉 막힌 우리와 달리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깊고 폭 넓은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고로 이어지고 문학 작품에 온갖 에피소드로도 반영된다. 유럽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이유에 그들의 지리적 환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은 헝가리의 부더와 페스트, 이탈리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가 등장인물로 나오고 그들의 생활 방식도 우리와 많이 달랐다. 이 소설의 주제를 파악하기 전, 일단 등장인물의 삶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 평범하지 않고 독특했다.

 

작가의 경험이 많이 들어있는 이 소설에는 영적인 관점, 죽음,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묵직함이 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은 속물적 내용도 많아 완독하고 나서도 소설에 관한 확실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소설에 이질적인 것들이 많이 있어 배가 산으로 간 느낌도 들었다. 옮긴이 해설에 있는 용어인 에피스테메(어떤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심층적인 규칙의 체계)가 나에게는 상당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아주 어려운 소설이었다.

 

학창시절에 만난 친구와 그들과 함께 한 경험에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주인공 미하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인물이다. 미하이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에르지와 결혼한다.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로 가지만 그는 도중에 말도 없이 에르지를 떠나버린다. 청춘을 배신하지 못한 미하이는 15년이 지난 후, 결국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사람과 이탈리아에서 한 명씩 재회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앞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타고난 성향에다 인생의 중심이 되었던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미하이는 죽음을 선택하려 했지만 운명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한 아이의 대부가 됨으로서 어느 정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스스로가 아닌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미하이에겐 그 어려운 한 발이 새 인생의 첫 걸음이었다.

 

미하이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울피우시 터마시는 자살하고 그의 여동생 에버는 죽음의 조력자가 된다. 이 책에서 죽음은 아주 미학적으로 서술된다. 어머니의 부재와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울피우시 남매에게 죽음은 자연스러운 선택이고 귀결이었다. 죽음의 순간에 황홀경을 겪는다는 터마시의 말에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삶을 위해 죽음을 망각해야 하는 현실을 사는 평범한 내가 터마시의 죽음을 쉽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죽음은 언제나 내 옆에 꺼내 놓아야 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다른 친구인 에르빈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고 세페트네키 야노시는 사기꾼이 된다. 같은 시절을 거쳤고 모두 다 거기에 몰두했지만 그들의 삶의 방향은 다 달랐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세계 문학 시리즈 중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결정적 한순간이라는 테마로 간행된 이 소설에서 미하이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여행자가 된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새로운 사람들과 조우한다. 미하이에게 결정적 순간은 하나가 아닌 여러개가 될 것이다. 다만 그는 결정적 순간마다 우연을 믿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여행은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희망을 갖고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삶을 위한 준비였다. 앞으로 무수히 밀려 들 결정적 순간들마다 미하이는 도망가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책의 앞표지 뒷장에 있는 작가 소개에서 <세르브 언털>은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44년 헝가리 벌프의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고 1년 뒤인 1945년 그곳의 간수들에게 구타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있다. 1년 동안 수용소에서 겪었을 고통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끔찍한 이 말들이 생각나 내용에 잘 집중할 수 없었다. 현실에 비해 우리가 추구하는 허구는 얼마나 가당찮은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미하이는 우울해졌다. 머리에는 온갖 것이 떠올랐고, 일상적인 그 상황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영세식에 참석하자며, 그들은 유서를 작성하고 있는 미하이를 방해한다. 그는 갑자기 이렇게 사랑스럽고도 엉뚱한 일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끔찍하거나 숭고한 인생의 순간에 항상 사랑스럽고 엉뚱한 일들이 발생했으며, 사랑스럽고 엉뚱한 때에는 항상 끔찍하고 숭고한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생은 정해진 형식이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뭔가 매우 복합적인 장르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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