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퍼시벌 에버렛 작가의 소설 『제임스』를 읽기 위해 먼저 이 두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 동화로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은 너무 재미있어 계속 반복해서 읽은 기억이 있다. TV에서 방영된 만화도 여러 번 봤다. 특히 톰 소여가 폴리 이모의 명령으로 높이가 3미터나 되는 30m 판자 담장을 회반죽으로 칠해야 할 때, 그의 기지로 다른 친구들이 신나게 담장을 칠하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읽은 ‘톰 소여의 모험’에서 이 부분은 책의 처음에 속하는데 그동안 내 기억은 딱 여기에서 멈추었던 것 같다.
그 뒤의 내용은 이제껏 한 번도 읽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웠다. 개구쟁이 톰,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년은 황당하고도 게걸스럽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머리 회전이 빠르고(조금 나쁜 쪽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먼저 깨우친 톰은 꼬마 갱단의 리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꾀바르고 능청스럽기도 한, 밥 먹듯이 하는 속임수나 거짓이 장난이나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톰은 소년이었고 성장하고 있었다. 마음에 사랑이 피어나고, 가족을 생각하며, 결정적일 때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낼 줄 알았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허클베리 핀은 ‘동네에서 이름난 주정뱅이의 아들이자 부랑 소년’으로 서술된다.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제멋대로인 데다 상스럽고 질이 좋지 않은 아이로 소개된다. 심지어 담배도 피운다. 만약 이번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헉을 그렇게만 생각했을 거고 영원히 톰에 붙은 곁가지라고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으면 톰의 모험은 딱히 별 거 아닌 게 된다. 톰은 그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헉은 여러 지역을 오가며 모험을 벌인다. 거기엔 흑인 노예 짐이 함께 있다. 헉은 아버지의 폭력과 더글라스 부인과 왓츤 부인의 양육, 학교, 사회의 구속과 도덕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 짐은 주인인 왓츤 부인이 그를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는 말을 듣고 도망친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같다. 둘 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다.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의 여정은 험난하다. 백인이지만 어리다는 것과 도망자의 신분인 흑인 노예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의심과 탐욕의 대상이 된다. 특히 흑인 노예에 대한 그 당시의 가혹한 폭력은 지금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다. 소설 전반에 있는 거짓과 속임은 헉과 짐이 자신들 앞에 놓인 힘들고 어려운 길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 역시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부분이 힘들고 지루했다. 하지만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마지막에 황당하지만 톰이 등장했던 것도 그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그 당시 사회의 폭력과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악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선한 방법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인인 헉은 짐이 도망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해주고 도와준다. 백인은 누군가 다른 백인이 도망자인 흑인 노예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깔봐도 되는 시절이었다. 헉은 평등주의자도 아니고 거창한 인류애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헉은 짐을 고발하지 않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거두고 교육시켜준 왓츤 아줌마에게 지독한 짓을 한다고도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이 비열하고 비참해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마저 든다. 그럼에도 헉은 자유를 갈망하는 짐을, 자신을 도와줘 고맙다고 말하는 짐을 고발하지 못한다. 자신을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자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짐을 도와주고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요즘 아이들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잘 모른다. ‘흔한 남매’에 열광하는 아이들은 톰과 헉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미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로 그 시대를 살렸다. 여기에 자신의 경험과 여러 실제 인물이 녹아 있어 우리가 그 시대로 들어가 이 글을 읽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이 두개의 소설 내용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과연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울림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헉은 짐이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살다 살다 이런 검둥이는 난생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헉과 짐이 솔로몬 왕의 재판에 대해 얘기할 때, 짐은 솔로몬이 아이를 반쪽으로 나눠 두 여자에게 준다는 판결에 분노한다. 그것은 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반쪽짜리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재판은 반쪽이 아닌 완전한 애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짐은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웃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이의 진짜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한다. 헉이 짐에게 요점을 놓치고 있다고 말하자 짐은 ‘요점 같은 소리 하지 말랑게 그러네! 내사 알고 있는 건 알고 있다고 생각헝게. 정말이지, 요점이라는 건 좀 더 멀리, 좀 더 깊은 데 있는 거제. 그건 솔로몬이 자라난 방식과 관련이 있당께. 솔로몬에게는 애새끼 하나둘쯤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랑께’라고 말한다.
솔로몬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할 수 있다. 요점은 좀 더 깊이 있는 것이고 사람은 자라난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결국 헉과 짐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게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운명을 거부하고 모험을 시작하지만 그 둘의 끝은 다르다. 짐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의 소유주인 왓츤 부인의 유언으로 자유를 찾는다. 반면 헉은 교양 있는 세계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인디언이 사는 지역으로 떠난다. 장난꾸러기 톰이 신사의 세계를 선택했다면 헉은 톰과는 정반대의 길로 간다. 문명과 속박에 얽매이지 않은, 야생에서 영원한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결국 자유를 찾은 헉과 짐의 여정은 헛되지 않았지만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엄청나다. 짐의 자유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자유는 불안하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수록된 삽화,
전자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다운로드 함
2024 전미도서상ㆍ커커스 프라이즈, 2025년 퓰리처상ㆍ브리티시북어워드를 수상한 『제임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소설이다. ’허클베리 핀‘이 백인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면 ’제임스‘는 철저히 흑인 노예 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제임스는 짐의 완전한 이름이다. 짐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이름이 불린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는 마크 트웨인의 글보다 훨씬 더 많은 흑인 노예의 비참한 삶이 들어있다. 그들을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대하는데 거침없는 백인들의 생각과 행동도 그대로 전달된다.
소설 ’제임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과정이 거의 그대로 진행된다. 이 두 소설이 헷갈릴 정도다. 그러나 그 두 소설에 등장하는 똑같은 사람인 흑인 노예 제임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제임스는 헉보다 훨씬 더 아는 것이 많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구속하는 잘못된 법과 볼테르, 루소, 로크의 자유론과 관용론을 비교할 수도 있다.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제임스에게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계급 사회의 모순을 조목조목 따질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합리적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숨기고 흑인의 말을 사용해야 하며, 무조건 백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영화 ’노예 12년‘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악랄한 백인 주인이 일요일에 목사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흑인 노예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진행하며 천국에 대해 설교한다. 참고 견디면 끝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노예들에게 심어준다. 제임스는 그런 종교를 비판한다. 백인 주인은 언젠가 하느님이 줄 보상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이 받을 처벌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그저 그들이 편리할 때만 신봉하며 사용하는 통제 수단‘일 뿐이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헉과 제임스는 같이 자유를 찾아 떠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제임스가 헉을 떠나지 않는다. 오로지 절체절명의 생존 자체가 목표인 제임스를 위해 헉은 여기서도 계속 거짓과 속임수를 사용한다. 가장 좋은 친구 사이인 그들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다. 백인과 유색 인종의 경계적 인물인 헉은 보다 더 성숙한 노예해방론자가 되어 있다.
이 책은 가독성이 좋다. 원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재해석도 성공적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약간의 억지스러움과 황당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퍼시벌 에버렛 작가는 그런 모험적인 시도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에게 분명히 전달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평등은 잘못된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 사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엔 수만 가지의 법과 철학, 사상이 동원되어야 한다. 다만 떠나고 투쟁하며 쟁취하기 위한 기본이 읽고 쓰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한 노예의 죽음으로 얻은 몽당연필과 훔친 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중인물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은 다름 아닌 미국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이상이다(p.650, 작품 해설 중에서)‘ 이러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미국 정신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여전히 유효한가?
[믿음은 진실과 아무 관련도 없어. 좋을 대로 믿으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 백인 소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어도, 어쨌든 백인 소년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 어느 쪽이든 달라지는 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