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 중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것이 있다. 재미있어서 내가 자주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2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그들 집의 냉장고 속 재료를 스튜디오에 그대로 가져와 그들이 원하는 요리를 15분 만에 셰프 들이 뚝딱 만들어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 내용이다. 그 중 중식요리를 전공한 셰프 들이 중국 요리를 만드는 방식에는 항상 비슷한 법칙이 있다. 일단 재료 손질을 먼저, 완벽히 하고 나서 나중에 불 쇼를 하며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벽돌책으로 분류되는 고전 읽기도 중국 요리를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보통 고전이라 알려진 작품을 읽을 땐 처음 50페이지나 100페이지 정도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본격적으로 중요한 사건(요리)이 나오기 전 작가들은 지루하고도 끈질기게 독자들에게 재료 준비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러다 불 쇼가 진행되면 그제서야 독자들은 기다려온 보람을 느낀다. 고전이란 언제나 읽다 지칠만할 때가 되어서야 진가가 발휘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도 당연히 그런 고전의 법칙이 적용된다. 한 명씩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1권이 끝나도록 그럴듯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계속 뭔가를 추측하게만 한다. 내가 뭔가 잘못 읽었거나 번역의 문제인가 싶어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다시 읽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민음사판 1권과 열린책들판 상은 주요 인물인 니콜라이와 표트르의 동시 등장으로 그냥 끝나버린다. 아마 2,3권에 중요한 사건이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대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초반 부분에 엄청 공을 들여 차례로 나오는 등장인물에 따라 문체와 어투를 달리한다. 스테판과 바르바라의 에피소드에서는 이제껏 읽은 도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엄청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꽉 차 있으므로 작품의 내용에 대해 얘기하기가 너무 어렵다. 뭔가 짧게 요약하기가 힘들다. 도작가의 작품은 그저 묵묵히, 반복해서 읽어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1800년대 중반 러시아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사상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왕위를 물러 받은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 여러 파벌의 혁명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2월에 반란이 일어났기에 이 사건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명명되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모든 것이 뒤처진 상태였는데 당시 젊은 지식인이나 장교들은 강력한 개혁과 자유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을 진압하고, 이 사건에 놀라 극도의 보수주의자가 되어 자유사상을 탄압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부터 참가한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의 페트라쎕스키 모임에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시기도 니콜라이 1세 때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악령』을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세르게이 네차예프(1847~1882) 사건>이었다. 여러 급진 사상을 접한 니힐리스트 네차예프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제네바로 가 바쿠닌을 만난다. 그의 영향을 받은 네차예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 조직을 결성한다. 급진주의자인 네차예프는 폭력 적이었고 살인마저 저질러 체포되고, 이 일은 러시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악령은 이 사건을 토대로 여진 작품이다. 악령에서의 혁명가들은 모두 니힐리스트였고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그들을 비판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 그러므로 악령은 작가의 정치소설이다.
[본래 니힐리즘은 19세기 러시아의 극도로 반동적이고 압제적인 현실에서 파생되었던 일종의 ‘자유사상’이었다. 이 자유사상, 즉 니힐리즘은 유물론과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사상에 기반했고 그것을 극한으로 추구했다. 니힐리스트들은 유물론자로서 모든 종교, 미신, 형이상학 등 물질적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무언가, 과학으로 분석되지 않은 것, 실질적인 유용성을 가지지 않은 것을 부정했다. 한편으로 개인주의자로서 그들은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개인에게 부과된 전통을 부정했다....이 니힐리즘이 오늘날 떠올리는 음울한 극단적 혁명이론으로 각인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네차예프라는 인물의 역할이다. 제정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조차 네차예프를 상종 못할 인간으로 간주했다.
-네이버 ‘나무위키’에서 발췌]
『악령』은 안톤 라브렌티예비치라는 화자의 연대기적 기술로 진행된다.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스테판과 바르바라, 아들 세대를 대표하는 니콜라이와 표트르의 대립적 구조로 여러 사건이 얽힌다. 인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등장하며 각자가 가진 캐릭터가 독자를 긴장시키고 나중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 추측하게 한다. ‘어떤 도시에서 최근에 일어난 그토록 이상한 사건을 기술(p.13)' 하기 위해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세히 설명한다. 연대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은 20년 동안 계속된 스테판 베르호벤스키와 바르바라 스타브로기나 사이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친구이자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친구이지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평생 그렇게 살면서도 헤어질 수는 없는(p.24)’ 사이로 뒤엉켜 지금은 영지를 소유한 돈 많은 바르바라가 스테판을 지켜주고 유모처럼 보살피고 있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바르바라의 외아들이다. 스테판 트로피모보치는 니콜라이의 교육자로 처음 이곳에 왔다. 바르바라는 스테판에게 니콜라이의 교육을 위임했지만 아들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였고 그것을 니콜라이는 병적일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병약하고 조용하고 생각에 골몰하는’ 열 여섯이 되었을 때 다른 도시로 공부하러 간다. 그 뒤 군대에 들어가지만 그때부터 니콜라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해리 왕자와 비슷한 행동을 해 그 이름이 별명이 되었다. 니콜라이는 방탕해지고 괜한 시비를 일삼고, 여러 번의 결투로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어 재판까지 회부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사회의 인간쓰레기들과 살고 뒷골목을 전전한다. 소문과는 다르게 교양있고 지식을 갖춘, 잘 생기고 우아하며 단정한 신사로 고향에 돌아 온 니콜라이는 야수처럼 이상한 행동을 한다.
[우리의 왕자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여러 인물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두세 가지 뻔뻔스러운 짓을 저질렀는데, 중요한 것은 그 뻔뻔스러운 짓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것, 흔히 통용되는 것이 전혀 아닌, 완전히 걸레짝 같고 어린애 같은 짓, 도무지 목적도, 동기도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그래도 나중에는 그가 이런 행동을 하던 그 순간에 ‘꼭 미친 것처럼’ 거의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그가 이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잘 이해했으되 당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일말의 후회도 없이’ 악의에 찬 즐거운 미소를 짓던 두 번째 순간만을 열렬히 기억할 뿐이었다. -p.77~78]
사람들은 니콜라이를 증오하고 미워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바르바라는 이러한 일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시작됐구나‘라고 생각한다. 간교하고 냉소적인, 때론 섬망 상태의 니콜라는 병원에 입원하고 회복 후에 삼 년 정도 여행을 다녀 점점 잊힌 존재가 된다.
스테판은 아들 표트르를 그동안 두 번 보았는데 한 번은 태어났을 때고 두 번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에 입학하려고 준비할 때였다. 표트르는 바르바라가 대 주는 생활비로 이모들 손에서 자랐다. 금발에 괴짜 같기도 하지만 예의범절이 훌륭하고 자기 확신에 찬 사람으로 스테판에게 돌아온 표트르는 아직은 신비로운 사람이다. 그에 대한 설명에 ‘어쩐지’라는 말이 계속 따라 붙는다.
[그는 다급히, 성급히 말하지만 동시에 자기 확신에 차 있고 말이 막히는 일도 없다. 그의 생각은 성급한 듯 보여도 실은 침착하고 분명하며 단정적인데 특히 이 점이 두드러진다. 그의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다. 그의 단어는 언제나 당신의 비위에 맞게 선별되고 준비된 것으로 고르고 굵은 밀알처럼 흩뿌려진다. 처음에는 이것이 마음에 들겠지만 나중에는 바로 이 너무 또렷한 발음 때문에, 또 영원토록 준비된 구슬 같은 말 때문에 오히려 혐오스러워진다. 어쩐지 입속에 든 그의 혀가 어쩐지 특별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어쩐지 이례적으로 길고 가늘며 끔찍이도 붉고 혀끝이 굉장히 뾰족하며 저도 모르게 끊임없이 날름거린다는 생각이 어쩐지 들게 한다. -p.305]
니콜라이와 표트르, 바르바라의 친구인 프라스코비야 부인과 그녀의 딸 리자베타, 새 도지사인 렘브케와 그의 아내 율리아가 이 도시로 들어오고, 퇴역 대위이자 주정뱅이인 레뱌드킨의 동생 마리야와 니콜라이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 이 연대기의 진짜 시작이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책의 제사로 4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마귀에 대한 것을 인용한다. 사람 속에 들어있던 마귀는 예수에게 자기들을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가 허락하자 마귀 떼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 모두 호수로 가서 빠져죽는다. 이렇게 예수는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했다. 악령은 이 구절의 마귀와 뜻이 같다. 악령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다 마귀가 들어있는 듯하다. 예수같이 이들을 구해줄 것은 무엇이며, 그들 속에 있던 악령은 어디로 갈 것인지 다음 내용이 기대된다.
『매핑 도스토옙스키』는 제목 그대로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따라 그가 살았던 곳과 거기서 집필된 작품을 따라가는 연대기적 매핑(mapping)이다. 오랫동안 러시아 문학, 특히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한 석영중 교수가 직접 그의 길을 따라 가며 서술한 책이라 더 깊이있고 볼거리가 많다. 신문에 연재되어서인지 글이 쉬워 읽기에 좋다.
1867년 재혼한 도스토옙스키는 부인 안나와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주변의 버거운 사람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4년 3개월 동안 여러 도시를 떠돌며 산 작가는 타국에서 ‘백치’와 ‘악령’을 완성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드레스덴에서 자신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을 집필했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란 모든 사상, 모든 의미, 모든 권위, 모든 도덕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를 지칭한다(p.335).' 외국에 있으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던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계기로 정치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악령의 표트르는 네차예프가 모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악령에서 니힐리스트의 폭력을 고발하면서도 더 나아가 인간 본성과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 세대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을 한다.
[그가 네차예프 사건에서 파헤친 것은 특정 사상의 문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인간 본성의 문제였다. 그는 인간 본성의 심연에 뿌리 내린 권력 의지를 끄집어내서 하나의 인간 유형을 창조했다. 그는 네차예프를 광신자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멍청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표트르로 <재탄생한> 네차예프는 인간의 권력 의지를 증폭시켜 보여 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정치 소설로 기획된 작품은 결국 철학 소설로 굳어졌다. -p.339
카뮈는 악령이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가장 예언적인 작품이라 상찬했다....악령은 분명 테러리즘을 예고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에서 당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p.342]

-p.336, 세르게이 네차예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