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희곡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은 내가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가는 이 희곡에 여러 가지 의미와 장치를 중첩시켜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를 힘들게 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모두 짧고 연속적이지 않아 대사의 숨은 의미를 해석해야했고, 변화하는 무대장치를 비롯한 행간의 의미까지 읽어야 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윌리엄 제임스와 헨리 제임스의 여동생인 ‘앨리스 제임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앨리스, 앨리스의 아빠와 오빠, 그녀의 상상속의 친구들이 여성의 삶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앨리스는 오빠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명민했지만, 19세에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영국으로 떠나 온 뒤로는 줄곧 침대를 떠나지 못하는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는 여자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발작은 마약과 진정제로 잠재운다. 44살에 죽은 후, 그녀가 쓴 일기가 출판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손택은 이 책이 여성의 이야기를 나타낸다고 했다. 이 희곡은 여성의 이야기가 주가 되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의 고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어날 수 있어요.”
“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의지의 문제라니까요.”
“게으름뱅이!”
“노력을 해 봐요.”
“사물을 다른 식으로 보려무나!”
“넌 인생에 기회를 주지 않고 있어”
침대에만 머물고 있는 앨리스에게 간호사와 그녀의 오빠가 하는 말이다. 간호사와 앨리스의 오빠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우울증을 겪고 있거나, 뭔가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다. 그들은 불행하다고 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한다. 자살하고 싶고, 괴로우니까 잠을 잔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쁘다고,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p.36)'고, 능력을 사용해 성취해 보라고 한다. 완벽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관계에서 두 대화는 평행선을 이룬다. 사람과의 관계는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더 절실하다.
‘앨리스 제임스’(1848~1892)의 전 생애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걸쳐져 있다. 명민하고 머리가 좋은 여성인 앨리스가 그들의 남자 형제와 같은 평등과 존중은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쉽게 규정지어지고, 대체적으로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한계 짓는 방식 때문이었다. 육체적으로 매력적이면서 아버지와 남자형제들, 남편에게 참을성 있고 나긋나긋하고 고분고분하며 예민하고 배려할 줄 아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이기심과 공격성, 자신에 대한 관심과 모순되는 것이므로 마찰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이기심과 공격성이야 말로 위대한 창조성이 피어날 수 있는 필연적인 조건인데 말이다.
-p.11~12, ‘작가의 말‘, 중에서]
그녀들의 공격성, 모순에 대한 마찰은 신경쇠약증으로 많이 나타났고,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에서 여성에 대한 단정적인 한계로 규정되어졌다.
[아빠도 오빠처럼 생각해? 이 끔찍한 병이 내게는 좋은 해결책이라고?
-p51]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의 5막에는 앨리스가 차 모임에서 다른 여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환상을 담고 있다.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평론가인 ‘마가렛 풀러’, 일생 동안 1775편의 시를 남긴 미국의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시팔’에 나오는 유일한 여성 인물인 ‘쿤드리’, 발레극 ‘지젤’에 나오는 환상적인 인물인 ‘미르타’가 앨리스의 차 모임에 초대를 받는다. 그들은 앨리스와 교감을 나누고자 찾아왔지만, 결국 그들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딱 그 정도로만 앨리스를 받아들인다.
앨리스는 침대 위에서만 생활하지만 자신의 ‘정신의 힘’을 믿는다. 머릿속과 마음으로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칩거 생활을 하며 글을 쓴 마르셀 프루스트에게도 이러한 것은 감지된다. ‘이른 아침,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려 커다란 창문 커튼 위로 새어 드는 아침 햇살이 어떤 미묘한 빛깔로 반짝이는지를 보기도 전에 이미 그날의 날씨를 알 수 있었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9권, p.13)'고 그는 단정적으로 표현한다. 칩거하는 자들은 보통의 사람보다 더 정교한 오감을 작동시킨다. 그들은 정신의 힘을 믿는다. 그렇지만 앨리스의 방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 앨리스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소리를 한다. 그런 그녀가 도둑에겐 한심하게 보일 뿐이다.
정신의 힘에 의한 상상력의 세계가 그들을 일으키고 나아가게 하지만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사람은 침대 위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남들처럼 살지 않더라도 나를 이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한 성장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성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편견과 억압은 그들을 숨게 만들며,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숨는 자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은 어렵게, 암시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연극은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연극이며, 결론적으로는 상상력에 대한 연극이다. 정신적 감옥의 현실, 상상력의 승리 말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p.17, '작가의 말‘ 중에서]

《앨리스, 깨어나지 않은 영혼》은 이번에 국립 극단에서 원작의 제목인 《앨리스 인 베드》로 무대에 올렸다. 원작이 워낙 어려운지라 연극 역시 어려웠다. 연극은 이 무대의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임을 많이 강조했고, 처음 앨리스의 대사 톤과 마지막 앨리스의 대사 톤을 다르게 해서, 앨리스가 스스로 깨어가는 과정을 표현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수전 손택의 ‘상상력의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는 말이 더 절실히 다가왔다.
연극티켓을 예매할 때 주의사항을 잘 읽지 않았던지라 내가 간 날의 회차가 ‘Barrier free' 공연임을 알지 못했다. 『베리어 프리』란 ’고령자나 장애인들도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네이버 지식백과)‘이다. 연극에서의 ’베리어 프리‘는 연극을 상연할 때 장애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이어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설명을 해주고,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자막이 제공되고, 배우들이 대사를 나눌 때 수화통역사들이 나와 대사를 같이 수화로 해주었다. 그리고 안내인들이 시각장애인들을 전철역에서 공연장으로 데려오고, 다시 전철역까지 데려다주는 편의도 제공되었다. 예매할 때 주의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특이한 경험을 했고, ’베리어 프리‘라는 말도 알게 되어 좋았다. 아마 이런 편의는 국립 극단이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새로운 경험으로 내 생각도 확장되었고, 특히 이 연극의 내용과 어느 정도 접목되어 더 유익했다.

연극구경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명동에 다녀왔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서인지 사람이 엄청 많았다, 외국인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예쁜 가을 하늘도 좋았다. 앎의 부족으로 수전 손택의 연극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앨리스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죽음보다는 ‘살아내라는’ 당부도....힘들겠지만 그래도...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상상’이라는 노래를 즐겨 듣는다.
앨리스에게도 우영우의 고래가 나타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