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에서 4권은 우리와는 많이 달랐던 19세기 말의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담고 있다. 5권 역시 폐쇄적이고 가식적인 살롱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전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게르망트 쪽 1’에는 그 당시 프랑스 사회(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드레퓌스 사건과 반유대주의가 전반적으로 나타나 있다.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으로 입지가 흔들린 귀족계급은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군국주의자와 반드레퓌스파가 되어 있었다. 5권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생각도 이와 같아 유대인인 스완이 위험해 보인다.
[또 우리 가문에는 유대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도 훌륭하게 증명해 보일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드레퓌스가 결백하다 해도,” 하고 공작 부인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거의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잖아요. 섬에서 보내온 편지를 보세요. 얼마나 어리석고 과장됐는지! 에스테라지 씨가 드레퓌스보다는 훨씬 나아요.....”
-p394~395]
화자는 어린 시절 콩브레의 성당에서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잠깐 만나고 강력한 인상을 받는다. 파리에서 화자의 가족은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빌파르지 부인 댁 가까이, 게르망트 공작 저택과 이웃하는 별채로 이사를 온다. 그동안 이미지로 저장된 게르망트 부인은 실제의 모습으로 화자에게 다가온다. 화자는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연모하게 되었고, 그녀의 살롱에 입성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그는 정녕 금사빠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게르망트 쪽》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병약하고 신경증이 있는 화자에게 하녀인 프랑수아즈는 ‘진실 폭로에는 말이 필요치 않으며, 말에 기대지 않고, 더 나아가 말을 참조하지 않고도 수많은 외부 기호들에서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는(p106)' 것을 가르쳐준다. 그녀를 통해 화자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와 우리에게 작용하는 관념의 세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의 관계조차도 그것은 부동의 존재가 아니라 불충분하고 모순적이라는 것을 프랑수아즈를 통해 배운다. 그녀는 화자에게 충직한 하녀이면서도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도 보여 준다.
게르망트가의 사람이고 군인이지만 드레퓌스 지지파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인 생루는 화자에게 자신의 연인인 라셸을 소개한다. 라셸은 유대인 여배우로 정신적, 예술적으로 생루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귀족 계급인 생루의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화자는 라셸을 본 순간, 그녀가 예전에 사창가에서 만난 ‘라셸, 주님께서’로 불리던 창녀임을 알아본다. 생루에게 지적인 영감을 주고, 그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이 여자가 화자에게는 20프랑의 가치밖에 없는 거리의 여자에 불과했다.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할 때 가졌던 상상과 의심, 기대가 그대로 생루에게도 나타난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여인을 처음 알게 되는 경우, 나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 여인과 같은 작은 얼굴 조각 뒤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또 반대로 수많은 몽상의 대상이던 사람도 그 몽상과 상반된 방식으로 가장 하찮은 사실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에는 얼마나 초라하고 온갖 가치가 제거된 물질적 요소로 분해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렇듯 사랑과, 사랑과 하나를 이루는 고뇌에는 취기처럼 우리에게 사물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p256, 262]
우리는 똑같은 사람을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이미지와 그 가치의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연속적 관계의 집합체는 결국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된다. 작가 프루스트가 꾸준히 말하고 있는 이름과 관념 역시 관점의 연장선에 있다. ‘축소되었던 이름이, 인간적인 의미로 적셔지고 내 기억 속 작은 자리를 차지할 만큼 충분히 커지면서(p427)' 관점은 여유로워지고 ’내 안에서 지속되는 이름이 연이어 일고여덟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을 띠는 것을(p21)‘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관점에 세뇌당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지키려 한다.
작가 프루스트는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에 발표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의 지지자로서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을 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을 때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 역시 100년 전의 시대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느 시대나 극심하게 대립되는 두 개의 진영이 있고, 그것은 진실을 왜곡시킨다. 사건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양 극단끼리의 지치지 않는 싸움만이 진행된다.
[사람들은 흔히 개인의 죄는 용서하지만 집단적 범죄에 가담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사즈라 부인은 아버지가 드레퓌스 반대파인 것을 알자 곧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여러 대륙과 여러 세기를 두었다. 시간과 공간에서의 이런 거리감이 왜 그녀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으며 악수와 인사말은 생각조차 못했는지, 또 그 악수와 인사말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세계를 왜 극복하지 못하게 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p245]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하고 알자스/로렌지방을 빼앗긴다. 그 후 프랑스에는 독일에 대한 적대감에 의한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라는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여섯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드레퓌스 재판과 유죄 판결→피카르의 문제 제기→에스테라지 재판과 무죄 석방→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사면→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완전한 복권
-‘나는 고발한다-해제’, p238~239]
작가 에밀 졸라는 1897년 12월부터 1900년 12월까지 3년 동안,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르 피가로’, 팸플릿, ‘로로르’를 통해 13편의 글을 발표한다. 1901년 그것은 ‘멈추지 않는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출간된다. 그 중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보낸 <나는 고발한다〉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이 한 편의 글이 드레퓌스의 재심 운동의 계기가 되고 졸라는 고소되어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받는다. 그는 런던으로 망명한다.
에밀 졸라는 13편의 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고, 여론을 악화시키는 비열한 언론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언론이 유포하는 거짓 정보로, 군대를 모욕했다는 억지로, 국가 안보의 위협으로 국민의 눈을 멀게 하는 성직자, 정치인, 군부, 정당, 사법부를 비판한다. 또한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100년 전에 발표된 졸라의 이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진 작금의 대한민국에 진심으로 호소하는 글이다. 졸라가 비판한 많은 것들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우려의 대상이 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여론과 정치인의 선동에 아무 생각 없이 동조하는 대중들이다.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우리의 과업이 완성될 수 있다. 우리가 거두고자 하는 수확은 결코 증오의 열매가 아니다. 우리가 그 씨를 뿌렸던 선함과 공정성 그리고 무한한 희망의 결실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야만 한다. 아직은 얼마나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정당들은 침몰했고, 정국은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이상에 매달리는 반동 세력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비판과 진실 그리고 공정성을 추구하는 정신들이 있다. 오직 이 정신들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이며, 내일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전진하는 진실-정의’, p282]
졸라는 이 기고문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동안 쌓아올린 작가로서의 위상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심지어 아버지가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마저 의심받는다. 하지만 그의 용기로 수많은 사람을 결집시켰고,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지식인’은 ‘지적 활동과 사회 참여를 결합시키는 사람이라는 뜻(p254-’나는 고발한다-해제)‘ 으로 새롭게 정의되는데, 에밀 졸라는 지식인의 선봉장에 선 사람이었다. 그는 드레퓌스의 복권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내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건 1988년에 출간된 유시민 선생의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서였다. 그 뒤 수없이 만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 선생의 책에서 읽은 대로만 생각하고 지나쳤다. 프루스트의 책을 읽으며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만나고, 이제야 그의 기고문을 읽게 되었다. 졸라의 그 유명한 격문은 지금 읽어도 신선하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한 지금에도 뼈아프게 우리를 각성시켜준다.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매한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빼어난 글과 용감한 행동으로 ‘인류의 양심’이라는 찬사를 받던 졸라는 완전한 결말을 보지 못한 채 1902년 9월 29일 밤 숨을 거뒀다. 경찰은 침실 벽난로의 환기구가 막혀 일어난 질식 사고로 판단했지만 시중에는 암살설이 파다했다....
법원은 1906년 7월 12일 렌 군사재판의 선고를 무효화하고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참모본부가 공개할 경우 독일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밀문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을 감추려고 날조한 가짜 증거들만 역사의 뒤안길에 쓰레기로 남았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